숲노래 살림말


하루 한끼도 안먹기 : “하루 한끼도 안먹기”를 한다. 지난 열한 달, 330일에 걸쳐서 돌아보니 이백쉰 날을 “하루 한끼도 안 먹기”로, 여든 날을 “하루 한끼 먹기”로 해왔는데, 어느 모로 보면 ‘좀 많이’ 먹은 셈이다. 열흘에 한 끼를 먹어도 배가 부를 뿐 아니라, 그냥 안 먹어도 늘 배가 부르니까. 둘레에서는 으레 걱정을 내뿜는다. 걱정이란 옷을 나한테 입히려 하지만, 언제나 그 걱정은 그들이 스스로 입는 옷이다. “어떻게 안 먹어요?” 하고 묻는데, 이렇게 물을 까닭조차 없다. 그분들 스스로 해보면 스스로 안다. 그분들 스스로 두려움하고 걱정으로 온몸을 친친 감아 놓고서 스스로 하나도 안 해보니 스스로 아무것도 모를 수밖에 없다. 아주 쉬운 보기를 든다면, 숲에 누가 물을 주지 않지만, 말라서 죽는 풀이나 나무란 없다. 풀하고 나무는 뿌리로 ‘밥(양분)’을 빨아들인다고들 말하던데, 그러면 또 생각해 보자. ‘뿌리로 어떻게’ 기운을 끌어올리는가? 사람은 어떻게 하면 된다는 뜻일까? 내 대꾸는 늘 하나일 뿐. “굳이 왜 먹어요?(어떻게 덩어리를 입에 넣어야 안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고요히 생각하고, 고요히 몸으로 하고, 고요히 다시 생각으로 옮기면 된다. 하나를 보태자면, 다른 사람들 걱정이나 눈치를 터럭만큼도 안 받아들이면 된다. 우리는 스스로 가려고 하는 길을 바라보면서 온숨결을 이 길에 내려놓으면 된다. 스스로 심는 씨앗을 스스로 거둔다. 스스로 ‘못하는걸!’이란 씨앗을 심으니 스스로 ‘못하네!’란 열매를 거둔다. 스스로 ‘하면서 즐겨야지!’란 씨앗을 심으니 스스로 ‘하면서 즐겁네!’란 열매를 거둔다. 책을 숱하게 읽어도 ‘실천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이 많다. 보라, 다 알지 않는가? 글쓰기 강의를 숱하게 들어도 글을 못 쓰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글쓰기를 다룬 책을 읽어도 글을 안 쓰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거의 모든 글쓰기 강의나 책은 부질없다. 그런 강의나 책으로 겉옷을 둘둘 싸맨들 글쓰기가 태어나지 않는다. 스스로 심을 씨앗이 없이 강의나 책만 판다면, 하루에 열끼를 먹어도 배가 고프기 마련이다. 스스로 심을 씨앗이 있기에 “하루 한끼도 안먹기”를 즐겁게 하면서 “가끔 이웃님하고 둘러앉아서 아무렇지 않게 먹어도 속이 부대끼지 않”을 수 있다. 2019.9.29.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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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또는 실천적 지식인 : 한자말 ‘실천’은 한국말로 하자면 ‘하다’이다. 그냥 ‘하다’를 ‘실천’이란 한자말 껍데기에 담으니 사람들이 ‘실천’이 어렵다고 여기고 만다. 그러나 한국사람이라면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면 된다. 굳이 영어나 일본말이나 한자말이나 중국말이나 티벳말이나 인도말을 안 해도 된다. 다시 말하자면 ‘하다’만 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다 된다. 스스로 생각하면 된다.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할 적에 몇 가지 말씨가 없으면 한 마디도 못한다. 이 가운데 하나는 ‘하다’요, 둘은 ‘있다’이다. 곰곰이 보면 ‘하다·있다’는 같은말이면서 꼴만 다르다. 스스로 이 얼거리를 생각하면서(생각이 있도록), “배운 살림”을 “익힌 삶”으로 피어나는 길을 가면 된다. 우리가 배우는 까닭은 이쪽 귀에서 저쪽 귀로 흘려나가도록 할 뜻이 아니요, 수업료를 치르려는 뜻이 아니요, 어떤 책을 읽었다고 자랑하려는 뜻이 아니요, 무슨 강의를 들었다고 알리려는 뜻이 아니요, 배운 티를 내려는 뜻이 아니요, 오로지 그처럼 배운 빛을 저마다 다른 삶이라는 열매로 맺도록 마음에 씨앗을 심으려는 뜻일 뿐이다. 그러니 “배운 것을 우리 나름대로 삭여서 ‘하면’ 된다”고 하겠다. 다만, “하면 된다”는 아니다. 한국 곳곳에 전두환이나 박정희가 때려박은 돌에 적힌 “하면 된다”는 거짓이다. 참은, “꿈을 생각하면 된다”이거나, “꿈을 사랑하면 된다”이고, “배운 길을 생각하면 된다”요, “익힌 삶을 사랑하면 된다”이다. 사회의식이나 정부기관은 우리한테 마치 “좋은 말”을 들려주는 척하지만, 그저 좋은 척‘하는’ 말일 뿐이다. ‘실천’ 같은 한자말을 지식인이 왜 끌어들여서 퍼뜨릴까? 생각해야 한다. 왜 사회에서는 ‘실천적 지식인’이란 뜬금없는(엉뚱한) 말을 자꾸 쓸까? “배운 사람(지식인)”이라면 마땅히 배운 그 길을 몸으로 삭여서 하면 될 뿐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지식인은 허깨비란 뜻이다. 허깨비가 ‘실천적’이란 탈을 쓴들 그이가 실천적일 수 있을까? 일본 말씨 ‘-적’은 ‘하는’을 가리키는 자리에 안 쓴다. 이 일본 말씨 ‘-적’은 ‘하는 척’이나 ‘하는 듯한’을 가리키는 자리에 쓴다. 곧 “실천적 지식인 = 안 하지만, 마치 하는 척하면서 사람들을 지식으로 속여서 장사를 하는 권력자 허수아비”란 뜻이다. 이 속내까지 읽으면 “실천적 지식인”이 읊는 말(강의)이 왜 덧없는지, 또 “실천적 지식인”이 쓴 책(글)이 얼마나 우리를 홀리거나 거짓으로 이끄는가를 알 수 있다. 생각해야 한다. “실천적 지식인”이 쓴 모든 인문책은 열 살 어린이가 못 읽는다. 열 살 어린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헤아려서 글을 쓰지도 못하는 이들이 어떻게 “실천하는 아름님” 구실을 하겠는가. 우리가 배우는 뜻은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저마다 다 다른 눈높이로 저마다 다 다른 즐거움을 빛내면서 웃고 노래하려고 ‘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즐겁게 배우니 즐겁게 한다. 배울 적에 즐거운 마음이 없으니 안 하고 또 지나간다. 즐겁게 배우지 않는 사람은 늘 수업료만 치른다. 2019.9.29.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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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노동 무임금 : 참 오랫동안 집안일(가사노동)을 품삯 없이 시킨 온누리이지 싶다. 그런데 가만 보면 가시내(여성)가 뛰어난 솜씨요 사랑이기에 집안일을 그렇게 도맡아서 해올 만하지 않았을까? 집안일을 가만 보면 칼잡이(부엌일)에 바늘잡이(옷짓기)에 틀잡이(물레질·베틀질) 노릇을 해야 하고, 엄청난 힘으로 주먹잡이(절구질·다듬이질·바심질)를 할 뿐 아니라, 아기를 낳아 포근한 숨결로 돌보고, 더군다나 아이한테 말을 가르치고 노래를 불러 주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뭇사내는 이 여러 일을 너무 못하는 몸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가시내는 기꺼이 낮은자리에 서서 조용히 모든 일을 사랑으로 펼쳤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 사내가 기꺼이 낮은자리에 서는 마음이 될까? 사내는 기꺼이 낮은자리에 서면서 언제나 사랑으로 집안일을 하거나 아이를 돌볼 수 있을까? 아아아, 이렇게 거꾸로 생각해 보니, 사내라는 몸을 입은 내가 참으로 부끄럽다. 아무래도 사내라고 하는 몸은 가시내한테서 엄청난 사랑을 배우라고 하는 삶이지 싶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할 줄 아는 가시내 곁에서 꼬박꼬박 배워서 새롭게 집안일이며 집밖일을 지피라는 슬기를 가꿀 뜻으로 사내라는 몸을 입은 셈 아닌가 싶다. 이리하여 이제는 ‘막노동 무임금’이란 틀을 사내가 앞장서서 깨 주어야지 싶다. ‘사랑일 사랑삯’이 되도록, 그러니까 집에서 일하고 살림하는 이들이 ‘사랑일을 하는 만큼 사랑삯을 누리’는 길을 열어야지 싶다. 아마 이 ‘사랑일 사랑삯’은 ‘기본소득’이란 이름으로 펼 만하리라. 아무한테나 주는 기본소득이 아니라 ‘여태 사랑으로 살림을 꾸리고 아이를 돌본 가정주부’란 이름인 할머니 어머니 아주머니, 여느 곁님이 누리도록 할 노릇이지 싶다. 그리고 가시내한테서 집안일하고 집살림을 배우며 조용히 보금자리를 가꾸는 착한 사내도 기본소득을 누리면 좋겠지. 다시 말하지만 ‘사랑일 사랑삯 = 기본소득’이 되는 길을 닦아야지 싶다. 온누리에 아름다운 빛이 흐르도록 확 뒤집어엎어야지 싶다. 2019.9.28.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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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 : 살다 보면 날벼락이 오기도 하고, 불벼락을 맞기도 한다. 돈벼락이 쏟아지더니 가난벼락이 찾아들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생각이 벼락처럼 떠오르기도 한다. 사진을 하는 이들은 일본 말씨를 그대로 따서 “결정적 순간”이라 하고, 불교를 믿는 이들은 “찰나·찰나적”이란 한자말에 얽매이는데, 이 모든 때란 ‘벼락’이다. 벼락이 친다. 머리에 번쩍 벼락이 스친다. 벼락이 내리친다. 온마음에 불덩이처럼 후끈후끈한 기운이 들이친다. 이제 깨어나라고, 이제부터 보라고, 바야흐로 알아차리라고, 즐겁게 몰아치는 회오리바람처럼 춤을 추라고 벼락이 반짝반짝 친다. 2019.9.28.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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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씬욱씬 : 다치거나 힘들어서 욱씬거릴 적이 있다. 이때에 이 다치거나 힘든 곳, 이른바 욱씬거리는 곳이 어떻게 낫는가? 스스로 그 욱씬거리는 곳을 끝없이 생각하면서 ‘기운’을 보내기에 낫는다. 걸어다니면서도 욱씬거리는 곳을 생각하고, 자리에 드러누우면서도 욱씬거리는 곳을 생각하니 이곳에 온갖 기운이 모여들어 따뜻하게 감싸면서 낫도록 북돋운다. 약을 먹기에 낫지 않는다. 욱씬거리는 곳을 하나하나 스스로 생각하면서 차분히 몸을 펴기에 차근차근 낫는다. 서두르지 말고 고요히 그리자. 욱씬거리는 곳을 낱낱이 마음에 그리자. 모든 사람한테는 스스로 낫도록 하는 힘(자가치유력)이 있다. 보라, 바닷게가 병원에 가는가? 고라니가 약을 먹는가? 꿩은 병원을 드나들지 않는다. 풀은 줄기가 잘리고 나무는 가지가 치여도 스스로 새 줄기이며 가지를 내놓는다. 다치거나 힘든 곳을 고요히 바라보노라면 누구나 스스로 낫기 마련이지만, 다치거나 힘든 욱씬거리는 곳을 고요히 바라보려 하지 않고서 짜증을 내거나 성을 내거나 골을 내면, 아주 더디게 나을 뿐 아니라, 욱씬욱씬하는 기운을 질질 끌고 만다. 2019.9.28.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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