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 비는 진주에서



  삼천포로 가자면, 먼저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와서 순천 가는 시외버스를 탄다. 진주에서 삼천포 가는 시외버스를 탄다. 길그림으로는 고흥하고 삼천포는 가까운데 시외버스로는 꽤 멀어, 서울 갈 때보다 훨씬 멀다.

  순천서 진주 가는 버스에 맞추려고 일찍 나섰더니 진주서 두 시간이 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남강 옆 헌책방 동훈서점에 걸어가기로 한다. 진주시외버스역에서 꼭 십 분 길이다. 한 시간 남짓 책을 살피고 오만 원어치 책을 장만하다. 가방이 아주 묵직하다.

  아이들하고 왔다면 오늘 이 책방에서 어떤 책을 골랐을까? 그림책 두 권에다가 묵은 번역 동화책 열두 권도 골랐다. 아이들한테 읽힐 외국동화는 아무래도 묵은 번역이 부드러우면서 살갑다. 이제 슬슬 다시 시외버스에 올라야지. 4348.8.28.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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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이에 계산기



  이제 거의 모든 새책방은 책을 바코드로 찍어서 컴퓨터로 책값을 셈한다. 지난날에는 책방마다 주판을 튕겼으며, 주판에 이어 계산기가 나왔다. 지난날에는 주판을 튕길 줄 몰랐으면 값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계산기가 나온 뒤로 주판은 차츰 자리를 잃었는데, 손전화 기계가 나오고 셈틀이 나오면서 계산기도 차츰 자리를 잃는다. 그러면, 앞으로 손전화 기계나 셈틀보다 한 걸음 나아간 새 기계가 나오면 손전화 기계와 셈틀도 설 자리를 잃을까?


  헌책방 책시렁 한쪽에 곱게 놓인 계산기를 바라본다. 책과 함께 책방을 지키는 계산기에 묻은 손때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4348.6.14.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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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나무판



  책꽂이를 짤 적에 반드시 뒤쪽에 얇은 나무판을 댄다. 얇은 나무판을 대지 않으면 책꽂이가 되지 않는다. 뒤쪽에 두꺼운 나무판을 댈 수 있으나, 책꽂이를 짜면서 뒤쪽에 두꺼운 나무판을 대는 사람은 없다. 두꺼운 나무판을 대면 책꽂이가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책꽂이 뒤쪽에 나무판을 안 대면 어떻게 될까. 얇은 나무판이라지만, 이 나무판을 뒤쪽에 안 되면, 아무리 두꺼운 나무로 단단히 틀을 짰어도, 이리저리 흔들리거나 뒤틀린다. 얇은 나무판을 대고 작고 가는 못을 박더라도, 이 얇은 나무판이 있기에 책꽂이는 안 흔들리고 안 뒤틀린다. 언제까지나 튼튼하게 서서 책을 지켜 준다.


  책을 이루는 종이는 얇다. 겉종이는 두툼하고, 속종이는 얇다. 얇게 빚은 종이에 온갖 이야기를 얹는다. 나무를 베어 얇게 보들거리는 종이를 빚은 뒤, 언제까지나 고이 흐르는 이야기를 얹는다. 책을 읽는다고 하면, 얇은 속종이를 읽는다. 얇은 속종이에 얹은 이야기를 읽는다.


  책을 이루는 종이는 얇지만, 이 얇은 종이에 얹힌 이야기는 깊다. 이야기가 있기에 책이고, 이야기를 얹어서 나누기에 책이다.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책을 물려주고, 이야기를 펼치기에 책을 쓴다. 얇은 나무판처럼, 얇은 종이처럼, 얇고 가냘프면서 하얀 마음이 있는 사람이다. 얇은 종이에 까만 글씨를 새겨서 이야기를 짓듯이, 얇고 가냘프면서 하얀 마음에 까만 씨앗을 하나둘 심어서 아름다운 생각을 짓는다. 4348.5.5.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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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시렁과 신문종이



  헌책방지기는 으레 신문종이를 모은다. 신문종이를 버리는 헌책방지기는 없다. 신문종이는 그대로 두어 묵히기만 해도 먼 뒷날 재미난 읽을거리가 되기 일쑤이기도 하지만, 바로 오늘 이곳에서는 책을 묶거나 꾸릴 적에 ‘책이 안 다치도록 감싸는’ 보드라운 종이가 되기도 한다.


  신문종이는 매우 얇다. 그런데 이 얇은 종이를 한 겹 댈 적과 한 댈 적은 사뭇 다르다. 얇은 신문종이를 대기에 책이 덜 다치거나 안 다친다. 책시렁에는 얇은 신문종이를 한 겹 깔면서 좀이 안 슬거나 벌레가 안 꼬인다. 책도 먼지를 덜 탄다.


  책시렁 바닥에 놓여 열 해나 스무 해쯤 ‘바닥종이’ 구실을 한 신문종이는, 열 해나 스무 해쯤 뒤에는 재미나면서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드러난다. 마치 옷장 서랍 바닥에 깐 신문종이와 같다고 할까. 옷장 서랍 바닥에 깐 신문종이가 오래되면 그냥 버릴 수 있지만, 부들부들해진 신문종이를 햇볕에 곱게 말린 뒤 찬찬히 넘기면, 열 해나 스무 해, 때로는 서른 해나 마흔 해마저 묵은 옛이야기를 아스라이 떠올릴 수 있다. 4348.4.29.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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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이랑 책이랑



  책방이 있어 책이 있다. 책방이 없으면 책이 없다. 이제 인터넷이 크게 발돋움하니, 책방이 없어도 책이 있을 수 있다. 책방은 없어도 인터넷을 켜면 책을 장만할 수 있다. 이러한 얼거리라면, 앞으로 ‘책’이 없이 글씨와 디지털파일만 있어도 ‘읽을거리’는 얼마든지 있으리라 느낀다. 종이신문은 벌써 ‘인터넷에서 읽는 글’로 빠르게 넘어간다.


  그런데 종이책은 종이신문과 달리 ‘인터넷에서 읽는 글’로 쉬 넘어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책’은 한 번 슥 스치고 훑는 읽을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 세 번 되읽는 생각이자 이야기를 담는 책이고, 두고두고 갈무리하면서 마음에 되새기는 숨결인 책이기 때문이지 싶다.


  책방이 있어 책이 있다. 책방을 가꾸는 손길이 있어서 책을 짓는 손길이 있다. 책을 짓고 책방을 가꾸는 손길이 있으니, 책을 읽는 손길하고 책방마실을 하는 발길이 함께 있다. 4348.4.21.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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