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책



  ‘새책’하고는 다른 책이라면 ‘헌책’이다. 왜냐하면 ‘새’ 것하고 맞서는 것은 ‘헌’ 것이니까. 이리하여 책방에는 새책방하고 헌책방이 있다. 새로 나온 책이기에 새책이고, 새책방은 새책을 다룬다. 한 번 값을 치러서 사고판 책은 ‘사람 손길’을 타면서 헌책이 된다. 그러니까 ‘헌책’이란 “한 번 읽힌 책”인 셈이다.


 새책 → 헌책 = 읽힌 책


  이다음을 헤아려 본다. “읽힌 책”이란 무엇인가? 바로 “사람 손길을 탄 책”이다. 사람 손길을 탄 책이란 “사랑을 받은 책”이다. 고운 사랑이든 미운 사랑이든, 누군가 어느 책 하나를 사랑하면서 어루만졌기에 ‘헌책’이 된다.


 헌책 = 읽힌 책 = 손길 받은 책 = 사랑받은 책


  여기에서 헌책방이라는 책터를 새삼스레 돌아본다. 헌책방에 깃든 헌책이란 바로 “한 번 읽힌 책”일 텐데, 때로는 “두 번 읽힌 책”도 있고 “열 번 읽힌 책”이라든지 “서른 번 읽힌 책”도 있으리라. 어느 책은 여러 도서관이나 개인을 거쳐서 헌책방에 들어오고, 어느 책은 한 사람 손길만 탄 뒤에 헌책방에 들어온다.


  누군가는 어느 책을 다 읽은 뒤에 곧장 내놓기에 “갓 나온 지 이레 만에 헌책방에 들어올” 수 있다. 책 한 권에 사랑스러운 손길을 내민 사람은 저마다 다 다른 빠르기로 책을 읽으니까, 즐겁게 읽고서 즐겁게 내놓을 수 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를 더 살펴본다면, 모든 새책은 헌책이 된다. 모든 책은 “헌책이 되면”서 비로소 “읽히는 책”이 되고 “사랑받는 책”으로 거듭나는 셈이다. 읽혀서 사랑받는 책이 되기에 비로소 ‘헌책’이니까, 헌책 한 권에 얼마나 아름다운 숨결이 깃들었는가 하고 새롭게 생각할 수 있다. 헌책방 나들이를 즐기는 이들은 바로 이 숨결을 누리려고 굳이 ‘헌책’을 만지면서 새롭게 읽으려 하지 싶다. 게다가 ‘새책’을 손에 쥐어 읽은 사람은 이 ‘헌책’을 헌책방에 내놓을 적에 무척 눅은 값으로 팔거나 그냥 맡기기 때문에, 헌책방에서 파는 책은 ‘새책 값하고 대면 싸다’고 할 수 있다.


  사랑스러운 손길을 탄 아름다운 책이 값까지 싸니까 헌책방이라는 책터는 대단히 재미나면서 놀라운 곳이 되기도 한다. 사랑이 흐르고 아름다움이 감돌며 기쁨이 어리는 책터를 가리켜 헌책방이라고 할 만하지 싶다.


 읽히고 + 손길 받고 + 사랑받고 + 아름답고 + 기쁜 → 책


  모든 책은 처음부터 ‘책’이지 않다. 모든 책은 처음에는 ‘새책’이다. 새책으로 새책방에 놓이고 나서 누군가 처음으로 눈길을 보내고 손길을 뻗기에 ‘헌책’으로 바뀐다. 헌책으로서 찬찬히 읽히는 동안 어느새 이 책은 ‘책다운 책’으로, 그러니까 오롯이 ‘책’이라는 이름으로 제구실을 한다.


  이제 이 이야기를 간추리자면, “모든 읽힌 책은 아름다운 헌책이요 사랑받으며 새롭게 태어나는 숨결이다” 하고 말할 만하지 싶다. ‘물건’으로서 새책이었다가 ‘사랑받아 읽혀서 아름다운 숨결로 거듭난 기쁨’으로 거듭난 헌책한테 이름을 새롭게 붙이면 어떠할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이를테면 ‘오랜책’이라는 이름? 오랜 나날 사랑을 받을 만한 책이라는 뜻이고, 오랜 나날 이야기꽃을 피울 만한 책이라는 뜻이며, 오랜 나날 사람들한테 슬기로운 꿈을 북돋울 만한 책이라는 뜻이다. 2016.3.1.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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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손길 저 손길



  이 손길이 닿아 이 책 한 권이 새롭게 빛난다. 저 손길이 닿아 이 책이 새삼스레 빛난다. 한 사람 손길이 닿으면서 비로소 곱게 피어난다. 두 사람 손길이랑 세 사람 손길이 어우러지면서 바야흐로 무럭무럭 자라는 나무처럼 뿌리를 내린다.


  책 한 권은 꼭 한 사람한테 읽히려고 태어날 수 있다. 그리고 꼭 한 사람은 오래도록 책 한 권을 건사한 뒤 새로운 한 사람한테 물려줄 수 있고, 새로운 한 사람도 오래도록 책 한 권을 건사한 뒤 다시 새로운 한 사람한테 물려줄 수 있다.


  책이란, 참으로 책이란, 한 번 읽히고 사라져도 되기에 나오지는 않는다고 느낀다. 책이란, 그러니까 책이란, 한 번 읽히고 두 번 세 번 거듭 읽히면서 두고두고 아름다운 삶을 노래하려는 숨결로 태어난다고 느낀다.


  새책방에서 한 번 팔리고 끝이 날 책이 아니라, 여러 사람 손길을 차근차근 걸치면서 여러 사람한테 기쁜 숨결을 나누어 주려고 태어나는 책이라고 본다. 내 손에서 네 손으로 가고, 네 손에서 내 손으로 온다. 우리는 서로서로 책을 돌려서 읽고 돌보고 건사하고 어루만지면서 마음밭을 가꾼다. 4348.11.9.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헌책방 언저리/책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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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구리왕짜 2015-11-09 18:53   좋아요 0 | URL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책이죠?
책도 기뻐할 것 같아요^^

숲노래 2015-11-09 21:0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말씀처럼
온누리에 하나만 있는 책이겠군요!
 

책과 걸상



  책 한 권을 손에 쥐어 한 쪽 두 쪽 천천히 읽다가 어느새 이야기에 사로잡히면 오직 이야기만 바라본다. 두툼하다 싶은 책을 들고 책을 읽더라도 팔이 아프다거나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을 잊는다. 이야기에 사로잡히지 못할 적에는 팔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기 마련이다.


  마음을 사로잡는 책은 아무리 무게가 나가더라도 이 책 때문에 무겁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책이 안 다치도록 잘 건사하자는 생각을 한다. 마음을 사로잡는 책은 아무리 값이 나가더라도 이 책 때문에 주머니가 홀쭉해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책을 기쁘게 장만하자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어떤 장난감이든 ‘장난감에 붙은 값’ 때문에 더 아끼거나 덜 아끼지 않는다. 스스로 마음에 드는 장난감일 때에 그야말로 아끼고 보듬고 사랑하고 고이 품으면서 신나게 논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장난감으로 신나게 노는 아이란 없다. 그러니, 책을 읽는 어른이 바라볼 곳은 ‘내 앞에 있는 책에 내 마음이 살며시 날아가듯이 닿는가’이다.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고, 걸상이 있다면 발걸음 소리를 죽이면서 조용히 앉는다. 마음에 드는 책을 읽을 적에는 종잇장 넘기는 소리조차 없다.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더위나 추위도 느끼지 않는다.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온마음을 넉넉히 울리는 아름다운 노래로 흐른다. 4348.11.8.ㅎ.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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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구리왕짜 2015-11-09 18:5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소리조차 묻히죠...
 

연필 한 자루



  나는 연필 한 자루로 글을 쓴다. 아이들은 연필 한 자루로 그림을 그린다. 헌책방지기는 연필 한 자루로 책마다 책값을 매기고, 장부에 팔림새를 적는다. 연필도 숲에서 왔고, 종이도 숲에서 왔으며, 책도 숲에서 왔다. 숲에서 자란 나무를 사람이 사랑하고, 사람이 가꾸며, 사람이 베고, 사람이 다루어, 사람이 연필이며 종이에다가 책을 짓는다.


  연필 한 자루를 손에 쥐면 문득 숲바람이 살풋 분다. 어디에서 비롯한 숲바람일까? 내가 쥔 연필 한 자루는 어느 두멧자락 숲에서 살던 나무가 새롭게 태어난 숨결일까? 내가 연필로 글을 쓰는 종이는 어느 시골자락 숲에서 자라던 나무가 새롭게 거듭난 숨결일까? 헌책방지기가 건사해서 책꽂이에 곱게 둔 책 한 권은 어느 나라 어느 마을 깊은 숲에서 깃들던 나무로 새롭게 이룬 이야기일까?


  연필 한 자루를 마주하면서 늘 숲을 그린다. 연필 한 자루를 손에 쥐어 칼로 석석 깎으면서 늘 숲을 헤아린다. 연필 한 자루를 아이한테 건네면서 늘 숲을 떠올린다. 연필 한 자루를 주머니에 넣고 나들이를 다니면서 늘 숲을 가슴에 품는다. 연필 한 자루가 있는 헌책방에서 책시렁을 살피면서 늘 숲을 만난다. 4348.10.26.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헌책방 언저리/책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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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앞



  어릴 적부터 누군가를 만날 적에 으레 “책방 앞”에서 보자고 했다. 참말 “책방 앞”에서만 기다리기도 하지만, “책방 안”으로 들어가서 책을 보며 기다리기도 했고, 책방에서 책을 장만하기도 했다. 시계조차 없이 돌아다니면서 동무를 만나던 때에는 책방 시계를 보기도 했지만, 굳이 시간을 따지지 않았다. 늦든 이르든 대수로울 일이 없고, ‘동무하고 함께 있는 겨를’이 즐거울 뿐이었다. 늦게 오더라도 서로 마음으로 함께 있으니 걱정할 일이 없기도 하고, “책방 앞”에서 그달에 새로 나온 잡지 겉모습을 구경한다든지, “책방 안”으로 들어가서 ‘가벼운 주머니로 장만하지 못하는’ 책을 몇 쪽씩 읽는다든지 하면서 재미있었다.


  언제 어디에서든 “책방 앞”에 서면, 또 “책방 앞”을 보면, 어린 마음으로 돌아간다. 앞으로 내 나이가 몇 살이 되든 “책방 앞”에 서거나 “책방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면, 나는 늘 풋풋한 마음이 되어 삶을 노래할 만하리라 느낀다. 4348.9.15.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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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5-09-15 09:09   좋아요 0 | URL
책방 앞이라고 하시니 문득 저도 항상 친구들과 약속했던 서점이름이 떠오르네요!
부산의 서면쪽 영광도서 앞,(동보서적?도 있었던 것도 같고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그리고 남포동의 남포문고 앞!!(대형 남포문고 옆에 오래된 다른 서점이 있었는데 바로 앞이 버스정류장이라 친구들,지금의 신랑과 늘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가 그서점이었는데 오래되어 이름이 생각나질 않네요ㅜ 그서점은 없어진지가 십여 년이 넘어 제일 아쉬운 서점이에요)
그시절엔 그곳들이 명소였었는데~~옛추억들이 새삼 떠오르네요^^

숲노래 2015-09-15 10:28   좋아요 0 | URL
사람들마다
책방 앞하고 얽힌
멋지면서 애틋한 옛이야기가 있을 테지요?

그 이야기가 옛이야기만이 아니라
오늘도 새롭게 누리는 이야기가 되어서
작은 마을에서도
언제나 고운 노래가 흐를 수 있기를 빌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