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츰 쌓이는 책



  책방마다 책이 쌓인다. 미처 팔리지 못한 책이 쌓이고, 아직 새로운 책손을 만나지 못한 책이 쌓인다. 누군가한테는 보물이라 할 만한 책이지만, 다른 누군가한테는 눈길조차 가지 않는 책이다. 그러나 이 모든 책은 우리가 만든다. 읽힐 만한 값이 있다고 여겨 책 한 권을 빚고,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에 책 한 권을 엮는다.


  나무가 우거진 숲을 보면 발 디딜 틈이 없이 빽빽하게 우거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제법 빽빽하게 나무가 자라는 듯싶지만, 쉰 해 백 해 오백 해가 흐르면서 조용히 쓰러져서 흙으로 돌아가는 나무가 많다. 숲에는 오랫동안 이곳을 지키면서 푸른 숨결을 나누어 줄 나무가 남는다. 책방에 쌓이는 책 가운데에도 조용히 이곳에서 사라지면서 새로운 종이로 되살아날 책이 있을 테고, 이 모습 그대로 새로운 책손을 만나서 두고두고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책이 있을 테지. 4348.1.1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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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홀릭 2015-01-13 08:02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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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쌓여서 어느새 처치곤란
책 모으는 취미는 없는데

숲노래 2015-01-13 09:50   좋아요 0 | URL
그럴 때는 가까운 이웃이나 동무한테 선물하시거나,
가까운 헌책방에 즐겁게 내놓으시면 되지요~ ^^

리더홀릭 2015-01-13 09:54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전 동네 도서관에 기증 ^^
불행히도 책 갖겠다는 사람이 주변에 없어서

숲노래 2015-01-13 10:4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 도서관에서 부디 책을 잘 건사해야 할 텐데요.
한국에서는 대출실적이 없으면 도서관에서도 책을 버리니까요 ㅠ.ㅜ

낭만인생 2015-01-13 10:18   좋아요 0 | URL
책이 그냥 좋습니다. 짐이 되긴 하지만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리더홀릭 2015-01-13 10:31   좋아요 0 | URL
최상의 생각 ^^

숲노래 2015-01-13 10:43   좋아요 0 | URL
언제나 즐겁게 책을 잘 돌보면서 아껴 주셔요.
책도 낭만인생 님을 좋아하겠지요~
 

광주 대인시장과 작은 헌책방



  사람들은 밥을 먹으려고 저잣거리에 갑니다. 시골에서는 손수 일구는 논밭에서 밥을 얻지만, 도시에서는 저잣거리에 가서 먹을거리를 장만해야 집에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습니다. 저잣거리는 어느 동네이든 무척 오래되기 마련이요, 수많은 사람이 얼크러져서 온갖 이야기가 쏟아집니다.


  사람들은 마음을 가꾸려고 책방에 갑니다. 씨앗을 심거나 풀을 뜯거나 나무를 돌볼 적에도 마음을 가꾸지만, 도시에서는 씨앗을 심거나 풀을 뜯거나 나무를 돌볼 만한 너른 땅뙈기를 마련하기 어렵습니다. 몸뚱이 하나 느긋하게 누일 방 한 칸을 마련하는 데에도 모두 고단하거나 힘든 만큼, 따로 책을 쓰고 엮고 펴서 ‘마음을 가꾸는 이야기’를 빚습니다. 이러한 책 한 권을 만나면서 마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으려 합니다.


  광주에 대인시장이 있고, 대인시장 옆에 작은 헌책방이 있습니다. 배가 고픈 이들은 저잣거리를 찾아 먹을거리를 장만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고픈 이들은 헌책방을 찾아갈까요. 아니면 알라딘 중고샵을 찾아갈까요, 아니면 큼지막한 새책방을 찾아갈까요, 아니면 인터넷을 켜서 집으로 책이 날아오도록 시킬까요, 아니면 도서관에 마실을 갈까요.


  새로 나오는 책은 새책방에 있습니다. 나온 지 제법 된 책은 도서관에 있을 법하지만, 도서관에서는 사람들이 덜 빌리거나 안 빌리거나 맞춤법이 지난 책은 내다 버립니다. 사람들이 많이 안 찾더라도 아름다운 책은 헌책방에 있고, 맞춤법이 지났어도 사랑스러운 책은 헌책방에 있습니다. 작은 헌책방은 작은 책벗이 작은 손길로 아끼거나 사랑하거나 보듬고 싶은 책을 조용히 건사합니다.


  가방을 메고 작은 헌책방으로 갑니다. 찬바람에 얼어붙는 손을 살살 비벼 녹이면서 책을 살핍니다. 즐겁게 고른 책은 값을 치른 뒤 가방에 넣습니다. 묵직한 가방을 기쁘게 멥니다. 언손을 웃옷 주머니에 넣고 녹이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4348.1.1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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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남은 자국



  책에 글 몇 줄 끄적이면, 이 자국은 책과 함께 고이 흐른다. 책을 장만한 뒤 도장을 찍으면, 이 자국은 책과 나란히 오래도록 흐른다. 책에 자국을 남긴 사람은 서른 해나 쉰 해쯤 뒤에는 이 땅에 없을 수 있다. 책에 도장을 찍은 도서관이나 학교나 시설은 마흔 해나 예순 해 뒤에는 이 땅에 없을 수 있다.


  책에 자국을 남긴 사람은 사라져도, 이이가 낳은 아이가 책을 물려받을 수 있다. 책에 도장을 찍은 곳이 없어져도, 다른 곳이 튼튼하게 서서 오래된 책을 이어받을 수 있다. 그리고, 오래된 책도 오래된 사람과 집처럼 조용히 스러지면서 자취를 감출 수 있을 테지.


  새로 책 한 권을 장만하면서 맨 처음으로 연필 자국이나 도장 자국을 남긴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이 책에서 길어올리면서 이녁 삶을 가꾸었을까. 스무 해나 마흔 해나 예순 해쯤 흘러 헌책방에서 묵은 책 하나 손에 쥐는 사람은 이때부터 어떤 이야기를 이 책에서 새롭게 느끼면서 이녁 삶을 가꿀까.


  내가 손에 쥐는 책에는 내 손자국과 연필자국이 남는다. 내가 마음을 기울이고 생각을 움직인 자국이 책마다 고스란히 남는다. 헌책이라 한다면, 자국이 있는 책이라고 할까. 앞사람 자국을 더듬으면서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자국을 남기는 일이 책읽기라고 할까. 왜냐하면, 아무리 ‘빳빳한 새책’을 장만해서 맨 처음으로 읽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책은 ‘글쓴이가 먼저 자국을 남긴 이야기’이다. ‘깨끗한 헌책’이란 껍데기만 멀쩡한 책을 가리킨다. 우리가 읽는 책은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일 테니, 앞서 이 길을 걸어간 사람이 남긴 자국을 헤아리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 새로운 자국을 보태거나 연다. 4347.12.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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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과 ‘헐다’



  헌책방이라는 곳에서는 헌책을 다룬다. 헌책이란 ‘헌(헐다) + 책’으로 엮은 낱말이다. 그러니, 헌책을 헤아릴 적에는 ‘헐다’라는 낱말이 어떤 뜻인지 살펴야 한다. 한국말사전을 살펴본다.



 헌책 : 이미 사용한 책

 헐다(헌)

 1. 몸에 부스럼이나 상처 따위가 나서 짓무르다

  - 피곤하면 입 안이 금방 헌다

 2. 물건이 오래되거나 많이 써서 낡아지다

  - 그 천막은 너무 헐어서 쓸 수가 없다



  한국말사전에서는 ‘헌책’을 “예전에 일찌감치 쓴 책”으로 풀이한다. 이 뜻풀이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올바르다고까지 하기는 어렵다. ‘헌책’이란 무엇인가를 살핀다면 제대로 풀이하지 못했기에 올바르지 못하다. 다만, 예전에 일찌감치 썼다는 대목을 건드렸으니 틀린 말풀이는 아니다.


  그런데, ‘헐다’라는 낱말을 살피면 “오래되거나 많이 써서 낡아지다”로 풀이한다. 다시 ‘낡다’라는 낱말을 살펴야 할 텐데, ‘낡다’는 “(1) 물건 따위가 오래되어 헐고 너절하다 (2) 생각이나 제도, 문물 따위가 시대에 뒤떨어져 새롭지 못하다”를 뜻한다고 한다. ‘낡다 (1)’에 ‘헐다’라는 낱말이 다시 들어가지만 ‘너절하다’라는 낱말이 새로 있다. ‘너절하다’를 다시 살피면, “(1) 허름하고 지저분하다 (2) 하찮고 시시하다”를 뜻한다고 한다.


  한국말사전 뜻풀이를 헤아린다면, ‘헐다’는 “오래되거나 많이 써서 지저분하거나 하찮거나 시시하거나 새롭지 않다”를 가리킨다고 할 만하다. 한국말사전 뜻풀이대로만 헤아리면 ‘헌책’은 “지저분하거나 하찮거나 시시하거나 새롭지 않은 책”이 되고 만다. 비록 한국말사전에서 ‘헌책’을 따로 올림말로 삼아 “이미 사용한 책(예전에 일찌감치 쓴 책)”으로 풀이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말풀이는 옳을까? 옳지 않다. 한국말사전에서 ‘헐다’를 제대로 풀이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헐다’라는 낱말을 “지저분하거나 하찮거나 시시하거나 새롭지 않은” 뜻이나 느낌으로만 받아들이고 만다.


  그런데, 정작 헌책이란 어떤 책인가. 새책방에서 다루는 책을 누군가 장만하면, 이 책은 이때부터 ‘새책’이 아닌 ‘헌책’이다. 누군가 한 번 손을 대면, 다시 말하자면 사람 손을 한 번 타면 ‘헌책’이다. 옷집에서 다루는 옷도 누군가 한 번 손을 대어 입으면 ‘헌옷’이다. ‘헌책’이나 ‘헌옷’은 달리 ‘헌-’을 붙이지 않는다.



 중고(中古)

 1. 이미 사용하였거나 오래됨

 2. = 중고품

 3. 그리 오래지 아니한 옛날

 중고품(中古品) : 좀 오래되거나 낡은 물건



  헌책방지기 가운데 ‘헌책방’이라는 이름을 썩 못마땅해 하거나 달가이 여기지 않는 분이 있다. 이분들은 ‘중고서적’이라는 이름을 쓰시곤 한다. 헌책방을 ‘헌책방 문화’나 ‘책 문화’처럼 바라보거나 이야기하지 않던 지난날에는 더더욱 ‘헌책방’이라는 이름을 안 쓰려 했고, 거의 모두 ‘중고서적’이라는 이름을 쓰려 했다.


  헌책방지기라고 해서 책을 안 읽거나 사전을 안 뒤지지 않는다. 헌책방 일을 하면서 으레 한국말사전을 뒤적였을 텐데, 말풀이를 보고 얼마나 골이 나거나 마음이 다쳤을까. 한국말 ‘헌책·헌책방’을 버리고 굳이 ‘중고도서·중고서적’ 따위 한자말을 쓰려고 한 뜻을 알 만하다. 한국말사전에서는 한자말 ‘중고(中古)’를 “이미 사용하였거나 오래됨”으로만 풀이한다. ‘중고품’은 “좀 오래되거나 낡은 물건”으로 풀이하니, 여기에는 ‘낡은’이라는 말이 깃들지만, ‘-거나’로 잇는다. ‘중고도서’라 하면 “한 번 쓴 책”이나 “좀 오래된 책”을 가리키는 셈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한국말을 다루는 학자뿐 아니라, 책을 다루는 학자까지도, ‘헐다(헌)’와 ‘헌책’ 말풀이를 올바르게 다루거나 바로잡으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깝다고 할 텐데, 한국말 학자와 책을 다루는 학자는 ‘새책’이라는 낱말조차 한국말사전에 안 싣는다. ‘헌책’은 올림말이지만 ‘새책’은 올림말이 아닌 모양새는 참 얄궂지 않은가? 말이 될까? 그런데, ‘새집’은 한 낱말로 한국말사전에 나오는데, ‘헌집’은 따로 올림말이 아니다. 아이들이 두꺼비집 노래를 부를 적에 “헌 집 줄게 새집 다오”처럼 띄어쓰기를 해야 한다는 소리이다. 책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새 책방에 있는 새 책을 장만해서 즐겁게 읽은 뒤에, 헌책방에 팔아서 새로운 헌책을 한 권 장만했어요.”처럼 띄어쓰기를 해야 하는 셈이다.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고, 책을 제대로 모르는 어떤 사람은 ‘헌 책방’처럼 띄어쓰기를 잘못 하기도 하는데, ‘헌 책방’처럼 띄어서 쓰면 “책방이 헌 곳”이라는 소리가 되고 만다. 헌책방은 헌책을 다루는 곳이지 “책방이 지저분하거나 하찮거나 시시하다”고 할 수 없다. ‘헌 책방’처럼 띄어서 쓰는 사람은 아주 크나크게 잘못하는 셈이다. 그래서 ‘헐다(헌)’라는 낱말을 내 나름대로 새롭게 풀이를 해 본다. 앞으로 여러 한국말사전이 이렇게 바로잡으면서 고쳐야 한다고 본다.



헐다(헌)

1. 많이 썼기에 앞으로 오래 쓸 만하지 않다

 - 너무 헌 것이라 다른 사람한테 그냥 주지도 못하겠어

2. 살갗이 다치거나 덧나서 진물이나 부스럼이 나다

 - 다친 자리를 자꾸 건드리니까 아물지 않고 허는 듯해

3. 한 번 쓰거나 다른 사람 손을 거치다

 - 헌책방에는 오래된 헌책도 있고 얼마 안 된 헌책도 있다

4. 오랫동안 쓰거나 오랜 나날이 흐르다 (처음으로 만든 지 오래되다)

 - 우리 집에 헌 재봉틀이 한 대 있어



  한국말사전은 ‘헐다(헌)’라는 낱말을 제대로 풀이해야 한다. 오늘날 여러 한국말사전은 ‘헐다’를 두 가지로만 풀이하지만, 뜻과 쓰임새와 느낌에 따라 네 가지로 나누어야 옳다고 느낀다. 첫째, “많이 써서 오래 쓸 만하지 않다”로 또렷하게 한 가지 쓰임새가 있다. 그리고, “한 번 쓰거나 다른 사람 손을 거치다”로도 널리 쓰는 대목을 헤아려서 담아야 한다. 여기에, “오랫동안 쓰거나 오랜 나날이 흐르다”나 “처음으로 만든 지 오래되다”와 같은 뜻을 따로 갈라야 한다.


  헌 재봉틀은 어떤 물건일까. 헌 책상이나 헌 자전거는 어떤 물건일까. 많이 써서 앞으로 쓸 만하지 않을 수 있으나, 그저 오래된 것일 수 있으며, 한 번 쓰고 묵힌 것일 수 있다. 한 번 손을 탔기에 새것으로 팔 수 없을 수 있다. ‘헌-(헐다)’이라는 낱말이 이런 여러 가지 뜻으로 쓰는 줄 제대로 담도록 말풀이를 바로잡으면서 고쳐야 한다고 느낀다. “오래된 헌책”과 “얼마 안 된 헌책”이 헌책방에 나란히 있는 줄 알고 느끼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4347.12.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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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보이는 책



  책방마실을 하면서 책탑이나 책꽂이를 사진으로 찍는다. 사진을 찍기 앞서나 사진을 찍을 적에 책탑과 책꽂이를 찬찬히 살펴서 ‘내 마음에 드는 책’을 다 골랐으리라 여기지만, 막상 ‘책방마실을 하며 찍은 사진’을 집으로 돌아와서 큼지막하게 키워서 들여다보면, ‘어라, 내가 왜 이 책을 코앞에 두고도 안 골랐을까?’ 하면서 쓸쓸하기 일쑤이다. 참말 이 책들을 코앞에서 사진기를 디밀면서 바라보았는데, 왜 사진기 눈으로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사진기에 앞서 두 눈으로 쳐다볼 적에도 왜 깨닫지 못했을까.


  나중에 보이는 책 가운데 나중에 다시 책방마실을 할 적에 고맙게 만나는 책이 더러 있다. 그러나, 나중에 보이는 책은 나중에 다시 책방마실을 하더라도 으레 다시 못 만나기 일쑤이다.


  앞으로 다른 책방을 나들이하면 만날 테지. 몇 달이나 몇 해쯤 지나야 만날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앞으로 다른 책방에서 틀림없이 만날 테지. 믿고 믿는다. 기다리고 기다린다. 4347.1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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