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빛 2021.11.15.

헌책집 언저리 : 큰나무 사이로



  집만 덩그러니 세운 곳은 아직 ‘마을’이란 이름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랜 우리말에 ‘숲정이’가 있습니다. 마을을 포근히 두른 숲을 ‘숲정이’라 합니다. 큰나무가 우거지며 집집을 푸르게 덮을 적에 비로소 ‘마을’입니다. 아직 나무가 집집을 덮지 않으면 ‘벌판’입니다. 서울이든 큰고장이든 들숲을 밀어내어 집만 잔뜩 올리고 길만 크게 닦기 일쑤였어요. 열 해 남짓은 벌판이라 할 만할 텐데, 열다섯 해를 지나고 스무 해를 지나며, 서른이며 마흔이란 나날을 살아낼 뿐 아니라, 쉰이며 예순을 가로지르는 사이에 비로소 ‘마을’이 됩니다. 곰곰이 보자면, 한자말로 가리키는 ‘고향’이라는 내음이 퍼지기에 ‘마을’이라 할 만해요. 아직 벌판일 적에는 아이어른 모두 고단하거나 심심합니다. 나무가 우거지고 곳곳에 들꽃이 피면서 새가 찾아들어 지저귀고 풀벌레가 깃들어 울 적에 어느덧 ‘마을스럽네’ 싶어요. 오랜마을에 오랜책집이 있고, 이 책집 앞을 마을아이가 달려서 지나갑니다. 달려서 지나가던 아이가 문득 멈춰서 묻습니다. “아저씨, 여기서 뭐 해요?” “응? 이 책집을 찰칵 하고 그림으로 담아.” “책집? 아, 여기! 난 오늘 심부름 가는 길이라, 이다음에 들러 봐야겠다. 아저씨, 잘 찍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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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연남서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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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2021.11.15.

헌책집 언저리 : 배드민턴



  마을헌책집 곁에 마을글붓집(동네문방구)이 있고, 잇달아 마을가게가 줄줄이 있습니다. 마을가게에서 일하는, 또는 이 마을가게가 깃든 모둠집(연립주택)에서 살아가는 아주머니들은 곧잘 거님길이자 빈터에서 배드민턴을 합니다. 자전거도 수레도 지나가기 어려운 좁다란 거님길이어도 아이들은 부릉이(자동차) 걱정이 없이 걷습니다. 가볍게 깃공(셔틀콕)을 날릴 틈은 있고, 자리를 깔고 앉아서 수다를 떨거나 바람을 쐬거나 가을볕을 누릴 만합니다. 마을책집이란 바로 이 틈새가 있는 쉼터라고 느낍니다. 마을가게란 언제나 이 틈새를 누리는 즐거운 마당이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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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삼선서림.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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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2021.11.12.

헌책집 언저리 : 곁에 있습니다



  책집은 북적길에 있어야 할까요? 책집은 커야 할까요? 책집은 굳이 북적거리는 길목에 있지 않아도 좋고, 엄청나게 커다랗지 않아도 됩니다. 책집은 책을 돌보는 손빛을 나누는 쉼터이면 넉넉합니다. 책집은 저잣거리 한켠에 있을 만합니다. 책집은 호젓한 마을 어귀에 있을 만합니다. 책집은 시골 기스락에 있을 만합니다. 책집은 어린배움터 둘레에 있을 만합니다. 1만이나 10만이나 100만에 이르는 책을 잔뜩 놓기에 눈부시거나 훌륭한 책집이지 않습니다. 1000은커녕 100자락 책을 곱다시 모실 줄 아는 손빛을 밝혀도 아름답거나 즐거운 책집입니다. 책집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서둘러 걸어가면 책집을 못 봅니다. 빠르게 부릉부릉 지나치면 책집을 안 봅니다. 스스로 삶이 고단하다고 여기면 책집을 눈여겨볼 틈이 없고, 남이 시키는 대로 휩쓸리는 나날이라면 책집하고 이웃이 되기 어렵습니다. 책 한 자락을 장만할 적에 돈이 엄청나게 들지 않습니다. 책을 많이 사서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애써 장만한 책을 두고두고 되읽으면서 마음을 다스리면 됩니다. 새책이 버겁다면 헌책으로 장만해도 흐뭇합니다. 반들거리는 겉모습인 책이 반짝거리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낡거나 닳은 책이기에 케케묵거나 해묵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아요. 숲에서 자라던 아름나무한테서 얻은 종이로 묶은 책입니다. 모든 책에는 숲빛이 흐릅니다. 숲에서 크던 아름나무한테서 얻은 연필로 쓴 책입니다. 모든 책에는 숲내음이 서립니다. 책집은 늘 곁에 있습니다. 우리가 여태 너무 바빠서 알아보지 않았을 뿐입니다. 마을책집에 마을 이야기가 있고, 마을책집에 마을 숨결이 있어요. 곁에 있는 마을책집에 사뿐히 발을 들여놓아 봐요. 먼먼 곳에서 얻는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짓는 삶자락에서 가만히 피어나는 이야기를 느껴 봐요.


ㅅㄴㄹ


* 사진 : 대전 중앙로.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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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2021.11.12.

헌책집 언저리 : 책수레



  가게를 얻거나 내면서 책집을 꾸리는 분이 있고, 가게를 얻지 못하고 손수레를 끌면서 천천히 이곳저곳 옮기는 분이 있습니다. 손수레를 끌며 헌책집에 책을 내주는 샛장수 일을 하다가 책집을 차리는 분도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까지 책수레장수로 살림길을 잇는 분이 있습니다. 모든 책집은 처음에는 길바닥에 자리나 보자기를 깔고서 책 몇 자락 얹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다음에 책수레가 태어나고, 이다음이 비로소 책집입니다. 등짐이나 지게로 책을 나르며 저잣거리를 돌던 책장수가 있어요. 책수레를 끌면서 여러 마을을 이은 책장수가 있고요. 서울 서대문·광화문·종로·동대문·청계천을 죽 책수레를 끌던 할아버지를 여러 해 만났습니다. 젊은이보다는 할배 눈길을 끌 만한 책을 싣고 다니셨습니다. 어느 자리에 머물면서 책손을 기다릴라치면 어느새 경찰이 다가와서 “할아버지, 여기서는 노점 금지입니다. 다른 데로 가셔요.” 하고 큰소리를 냅니다. 책수레 할아버지는 다리를 얼마 쉬지 못하고 수레를 끕니다. 거님길로는 갈 수 없어 찻길로 들어서면 시내버스가 빵빵거립니다. 때로는 창문을 열고 “할아버지! 버스전용차선으로 다니면 위험해요! 인도로 올라가셔요!” 하고 소리치기도 합니다. 책수레 할아버지는 걷고 또 걷고 다시 걷습니다. 책수레 할아버지는 날마다 경찰한테서 버스일꾼한테서 또 숱한 사람들한테서 숱한 잔소리를 듣습니다. 책수레 할아버지 곁에 다가가서 “이 책 살게요. 고맙습니다.” 하는 목소리를 들려주는 책손이 있을까 싶어 몇 시간쯤 책수레 할아버지 뒤를 천천히 따라서 걷다가, 오르막에서는 수레를 천천히 민 적이 있습니다.


* 사진 : 서울 종로에서, 책수레. 2003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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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2021.11.12.

헌책집 언저리 :‘책’이라는 글씨



  두 다리로 의젓하게 ‘책’이라는 글씨를 찾아나서며 살았습니다. 어느 마을 어느 골목쯤에 책집이 있나 그리면서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었습니다. “못 보고 지나쳤는지 몰라” 하고 생각하면서 모든 골목을 다 걸으려 했습니다. “어떻게 골목을 그리 환히 꿰슈? 젊은 양반이 택시기사보다 길을 더 잘 아네? 택시기사를 해도 되겠구만.” 하는 말을 들을 적에는 “저는 운전면허를 안 땄어요. 걸어다니려고요. 책을 읽으려면 손잡이를 쥘 수 없고, 또 그때그때 떠오르는 글을 쓰려면 더더구나 손잡이를 못 잡아요.” 하고 대꾸했습니다. 눈을 밝혀 ‘책’이라는 글씨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알림판을 내걸지 않은 헌책집도 많기에, 더욱 눈을 밝혀 ‘책’이라는 글씨를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먼먼 곳에서 “어! 저기에 ‘책’이라는 글씨가 있구나!” 하고 찾아내면 몇 시간째 걷느라 퉁퉁 부은 다리에 새힘이 솟습니다. 마을에 깃든 헌책집은 하나같이 작았습니다. “이 작은 헌책집을 찾으려고 몇 시간을 이 골목 저 골목 헤맨 사람은 처음 봤네?” 하고 너털웃음을 짓는 헌책집지기님한테 “이곳을 오늘까지 지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여쭈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두어 시간은 가볍게 책을 읽고, 서너 시간은 우습게 책을 살피니, “여보게, 배고프지도 않은가? 하긴, 책 좋아하는 분들은 책만 보면 배가 부르다고 하더니, 딱 자네하고 어울리는 말이네. 그래도 나 혼자는 심심하니 다음에 또 와서 더 보시고, 오늘은 그만 내 옆에 앉아서 이바구 좀 들으시면 어떤가?” 하고 옷소매를 붙잡는 분이 제법 계셨습니다. 해가 기울며 가게를 닫을 즈음엔 혼자서 술 한 모금 홀짝인다는 늙수그레한 헌책집지기 아재나 할배한테서 곧잘 옛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옛날엔 좋았지. 옛날엔 책만 들여놓으면 다 팔렸는데, 요새는 들여놓는 책보다 버려야 하는 책이 더 많아. 그나저나 젊은 양반은 이런 고리타분한 책이 뭐가 좋다고 읽는가?” “사장님도 아시겠지만, 겉으로는 허름하고 고리타분해 보여도, 막상 펼쳐서 읽으면 새길을 일깨우는 오랜 슬기를 이 헌책에서 찾아낼 수 있잖아요. 그래서 사장님도 이 일을 놓지 못하고 고이 이으시지 않나요?” 나무가 오랠수록 마을이 깊으면서 아늑합니다. 마을책집이 오랠수록 마을빛이 환하면서 포근합니다.


ㅅㄴㄹ


* 사진 : 서울 대방헌책방. 2003


이제는 책집이 깃든 오랜집도

이 마을도, 큰나무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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