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른입니까 8] 씨앗읽기
― 씨앗회사와 정치권력 꿍꿍이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으며 생각합니다. 칼을 쥐어 감자나 양파나 무나 푸성귀를 써는 내 마음속에 흐리거나 어두운 빛이 흐르면, 내 손으로 짓는 먹을거리 또한 흐리거나 어두운 기운이 서리는구나 싶습니다. 즐겁게 노래하면서 밥을 짓고 밥상을 차리면, 아무리 아이들이 개구지게 뛰놀며 밥알이나 국을 흘리더라도 따스하며 밝은 기운이 서리는구나 싶어요.


  빨래를 할 적에도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좋은 마음이 되어 복복 비비고 헹구어야 옷가지마다 따스하며 밝은 기운이 서려요. 아이들을 씻길 적에도 내 마음이 환하고 기뻐야, 아이들 몸을 정갈히 씻길 수 있어요.


  마음이 어두움으로 꽉 찼을 적에는, 아무리 허울좋은 예쁜 말을 내놓으려 하더라도, 어두움이 잔뜩 낀 슬프거나 새된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마음이 밝게 빛날 적에는, 언제 어느 자리에 있더라도 고운 노랫소리가 솔솔 흘러나옵니다.


  씨앗 한 알 손에 쥐어 논과 밭에 심는 사람들 마음은 어떠할까 헤아려 봅니다. 흙을 밟으며 흙을 만지는 마음이 어둡다면, 씨앗에도 어두운 기운이 서리면서 흙에까지 어두운 기운이 퍼질 테지요. 밝은 마음으로 흙을 밟고서 밝은 생각 길어올려 흙을 만지면, 씨앗뿐 아니라 흙에까지 밝은 기운이 이어질 테고요.


  사람들 누구나 먹는 밥은 쌀로 짓습니다. 쌀은 나락 껍질을 벗겨 얻습니다. 나락 껍질을 살짝 벗기면 누런쌀이요, 나락 껍질을 많이 벗겨 알맹이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하면 흰쌀입니다. 나락 껍질, 그러니까 겨를 살짝 벗긴 누런쌀에는 씨눈이 남고, 겨를 벗길 뿐 아니라 하얀 알맹이만 남기려 하면 씨눈이 잘립니다.


  나락이란 무엇인가 하면 바로 볍씨입니다. ‘씨가 되는 벼’, 곧 ‘이듬해에 벼를 새로 얻을 씨앗’입니다. 감자알도 이듬해에 심어 새로 거두려 하면 ‘씨감자’를 갈무리합니다. 씨알이 있어야 다시 흙을 일구면서 우리 먹을거리를 얻습니다. 보리도 밀도 수수도 서숙도 모두 ‘먹을 알곡’에서 ‘씨앗으로 삼을 알곡’을 따로 갈무리합니다.


  밥을 먹는다 할 때에는 씨앗을 먹는다는 뜻입니다. 곡식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씨앗을 먹습니다. 풀이 맺는 씨앗, 이른바 곡식은 풀한테 열매입니다. 능금이나 배나 살구처럼 알이 커다랗지 않으나, 풀열매는 곡식이면서 씨앗입니다.


  먼먼 옛날부터 풀열매요 곡식인 씨앗은 ‘거두고 심고 거두고 심고’를 되풀이합니다. 거둔 씨앗을 갈무리하고 다시 심어 먹을거리를 얻으며, 새로 심을 씨앗을 둡니다. 백 해 오백 해 천 해 오천 해 만 해를 잇는 씨앗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오늘 먹는 씨앗은, 천 해 앞서 살아가던 옛사람이 거두고 심던 씨앗입니다. 천 해 앞서 살아가던 옛사람이 거두고 심던 씨앗이란, 만 해 앞서 살아가던 옛사람이 거두고 심던 씨앗이에요.


  사람을 낳는 씨앗은 사람 몸에 깃듭니다. 곡식을 낳는 씨앗은 곡식 몸, 곧 줄기와 뿌리와 잎과 꽃에 깃듭니다. 곡식 유전자를 건드려 돈을 벌려고 하는 회사는, 곡식을 이듬해에 심으면 새로 돋지 않도록 가로막습니다. 사람들이 씨앗을 건사해서 심다가는 씨앗회사가 돈을 못 벌 테니까요. 자꾸자꾸 새로 사다 심도록 길들입니다. 처음에는 씨앗값을 눅게 파는 듯하지만, 곰곰이 따지면, 여태까지 어느 흙일꾼도 씨앗값을 돈으로 치른 적 없어요. 씨앗은 돈으로 사고팔 수 없거든요. 씨앗이란 밥이면서 목숨이기에, 스스로 제 땅을 일구어 제 삶을 일구는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심고 거두며 밥을 먹었지, 돈으로 씨앗(곡식)을 내다 팔아 밥을 먹지 않았어요.


  도시가 커지고 시골을 잡아먹으면서, 흙일꾼더러 씨앗(곡식)을 도시로 내다 팔도록 부추깁니다. 흙일꾼 살림집에는 전기나 수도물이 없어도 되었으나, 흙일꾼이 전기와 수도물을 쓰도록 길들입니다. 흙일꾼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도록 하면서, 땅을 팔고 씨앗(곡식)을 팔도록 내몹니다. 흙일꾼 집 아이들을 도시로 보내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도록 가르치자니, 흙일꾼은 자꾸자꾸 땅을 팔고 씨앗(곡식)을 팔아야 합니다. 스스로 지어서 먹던 씨앗은 조금 못생기거나 볼품이 없더라도, 집집마다 가장 맛나고 아름다웠지만, 내다 팔아야 하는 씨앗은 굵직하고 예뻐야 합니다.


  흙일꾼은 나날이 비료와 농약을 써야 합니다. 비료와 농약 없이 흙을 일구던 사람들이지만, 흙일꾼 집 아이들이 학교에 가야 하니, 풀을 뽑거나 거름을 만들 일손이 모자랍니다. 시골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시골을 떠나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공장)노동자가 되고 보니, 이제 시골에는 늙은이만 남느라 비료와 농약 없이는 ‘씨앗(곡식) 내다 팔 길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시골 흙일꾼이 비료와 농약에 길들면서 ‘스스로 씨앗을 건사해 새로 심던 삶’이 무너집니다. 씨앗회사에서 씨앗을 돈 주고 삽니다. 더 굵고 더 예뻐 보이는 열매가 나는 씨앗을 사다 씁니다. 이제 ‘씨앗과 밥이 되는 목숨(씨앗)’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내다 팔기 좋아 보이는 열매’만 바라봅니다.


  시나브로 씨앗회사가 씨앗을 홀로 차지하면서 흙을 망가뜨립니다. 흙이 망가지니 비료를 더 써야 하고, 일손이 모자라니 농약을 더 써야 합니다. 흙은 자꾸자꾸 더 망가지고, 비료와 농약 장사는 더 불티나게 되면서, 씨앗회사는 조금씩 씨앗값을 올리며 떼돈을 법니다. 이동안, 시골 떠나 도시에서 새 보금자리를 튼 아이들이 다시 시골로 돌아오는 일이 없습니다. 도시로 간 시골 아이들이 늙은 어버이 일손을 거들러 시골로 찾아오는 일조차 없습니다.


  처음에는 씨앗 한 알이지만, 바야흐로 흙과 시골과 숲과 사람 모두 뒤흔들며 무너뜨리는 사회·정치·경제·교육 얼거리요, 씨앗회사입니다.


  사회는 돈만 바라보도록 내몹니다. 정치는 시골을 살피지 않습니다. 경제는 무역과 투자와 수출을 외칩니다. 교육은 ‘씨앗 심는 아이’로 이끌지 않습니다. 씨앗회사는 돈을 벌어들여 기쁘고, 정치권력은 값싼 일꾼(회사원과 공장노동자)을 시골에서 끌여들여 도시를 이루고 세금을 더 거두어들이니 기쁩니다. 사회나 정치나 경제나 교육을 받친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톱니바퀴나 쳇바퀴 구실을 합니다. 연봉이 제법 높다거나 연금과 노후를 지켜 준다는 공공기관이라는 이름은 허울입니다. 시골 떠난 아이들이 도시에서 돈을 버는 동안, 시골마을 늙은 어버이는 허리가 휠 뿐더러, 시골마을 흙과 숲은 모두 망가질 뿐 아니라, 시골이나 도시에서 ‘밥(씨앗)을 먹는 사람’들은 ‘아름답지도 좋지도 맛나지도 않은’ 유전자 건드린 곡식을 먹어야 합니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나 닭고기는 ‘유전자 건드린 곡식’으로 만든 사료를 먹으며 화학약품으로 만든 항생제를 먹은 돼지와 소와 닭을 잡아서 공장에서 만듭니다. 풀을 먹든 고기를 먹든, 도시와 시골에서는 몸을 망가뜨리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먹을거리로 넘칩니다.


  씨앗 한 알이 우주입니다. 씨앗 한 알이 우주인 줄 깨달은 슬기로운 사람은 숲에 깃들며 손으로 흙을 일굽니다. 씨앗 한 알이 우주인 줄 알아챈 장사꾼은, 씨앗 유전자를 건드려 돈과 권력을 거머쥐며 사람들을 바보로 길들이려고 합니다. 정치권력은 도시사람들이 ‘씨앗 한 알이 우주’인 줄 깨닫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학교에서는 씨앗하고 동떨어진 교과서만 가르칩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는 영어에 온마음 바치도록 등을 밉니다. 중·고등학교 푸름이한테는 대학바라기만 하도록 짓누르고, 대학교에 들어간 뒤에는 일자리 찾는 데에 마음 사로잡히도록 울타리를 쌓습니다. 시골사람은 시골사람대로 흙을 잊고 씨앗을 잃습니다. 도시사람은 도시사람대로 삶을 잊고 사랑을 잃습니다. 4346.1.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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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7] 아이읽기
― 아이와 할 수 있는 숱한 일놀이

 


  아이들은 즐겁게 웃으며 놉니다. 뛰놀다 넘어진대서 아이들이 우는 일은 없습니다. 아프다고 울지는 않거든요. 넘어진 아이를 바라보며 근심과 걱정에 휩싸인 어른들이 ‘어머나!’라든지 ‘어떡해!’ 하며 낯빛이 달라지니까, ‘아하, 울어야 하는구나!’ 하고 느끼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아이가 넘어지거나 말거나, 피가 나거나 말거나,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면서 “그래, 넘어졌네. 괜찮아. 무릎한테 괜찮다고 말하렴.” 하고 이야기하면 아이는 안 웁니다. “아프겠네. 아프겠구나. 그래, 아픈 데는 곧 나아. 자, 손가락아 얼른 나으렴.” 이렇게 말하면 아이도 따라서 말하면서 어느새 손가락 아픈 줄 잊습니다. 그러고는 아픈 손가락이 어느새 나아요.


  날마다 하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집일을 하고 글쓰기를 하느라 자칫 잊거나 힘들다며 ‘아이랑 글씨 쓰기’하고 ‘아이랑 그림 그리기’를 넘어가곤 합니다. ‘아이랑 숲마실 하기’도 곧잘 넘어가곤 합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저희끼리 놀이를 생각해 내고, 저희 나름대로 다투거나 사이좋게 얼크러지면서 놀이를 즐깁니다. 하루 내내 아이들을 바라보고, 아이들을 보살피며, 아이들과 부대낍니다. 아이랑 함께 글씨를 써 보거나 그림을 그려 보면, 이 아이가 날마다 새로운 손길과 눈썰미로 새 모습을 빚는구나 하고 느낄 만합니다. 아마, 학교 교사라면 ‘여러 아이들 날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낄 테지요. 이 보람이 있기에 고된 공무원 노릇을 견딜 만한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퍼뜩 생각합니다. 교사가 학교에서 느끼는 보람이란, 따지고 보면 모든 어버이가 여느 보금자리에서 늘 누려야 하던 모습 아닌가 하고.


  오늘날 거의 모든 어버이는 아이들을 보육원이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넣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아이들을 보육원이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넣을 때에 여러모로 도움돈을 줍니다. 2012년 12월에 새 대통령 뽑히고 2013년이 되면 서울을 비롯한 크고작은 도시마다 ‘어린이 보육시설’이 부쩍 늘어나리라 봅니다. 맞벌이 집안을 헤아리는 보육시설이 늘고, ‘전일제’로 아이를 맡는다는 곳도 늘어난다고 해요. 이른바 ‘보건 복지’와 ‘교육 문화’라는 이름으로 ‘어린이 보육시설’이 늘어나는데요, 나는 이 대목이 여러모로 못마땅합니다. 제대로 된 보건 복지요 교육 문화라 한다면, 어버이들이 ‘돈을 벌러 회사에 나가거나 가게를 지키는 품’을 줄이도록 해 주어야 옳기 때문입니다. 맞벌이 집안이라 아이들을 ‘전일제’로 늦게까지 보육 시설에 두는 일이 즐거울까요. 아이를 둔 어버이라면 회사에서 ‘일을 더 적게 해도 되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올바르지 않을까요. 보육 시설을 늘려야 할 노릇이 아니라, ‘회사 정규직을 더 늘려’서, ‘아이 둔 어버이가 다른 일꾼보다 조금 더 일을 마친 다음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이렇게 해서 ‘아이 어버이가 적게 맡은 일 몫’만큼 다른 사람이 ‘일을 나누어 하도록’ 할 때에 일자리가 저절로 느는 한편, 굳이 어떤 돈을 더 들여 시설을 만들지 않아도 한결 적은 돈과 품으로 ‘복지’와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회사나 가게에서 일을 조금 더 적게 할 수 있는 어버이는, 더 일찍 집으로 돌아와서 아이들하고 어울릴 수 있어요.


  아이를 돌보거나 가르치는 몫은 바로 어버이가 맡아야 올바릅니다. 어버이가 회사일이나 가게일로 바쁘다고 하니까, 중앙정부나 지자체에서 보육 시설을 마련하기는 합니다만, 교사에 앞서 어버이예요. 어버이는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돌보는 몫에다가, 아이를 가르치고 사랑하고 아끼고 북돋우는 몫을 맡습니다. 왜냐하면, 어버이잖아요. 이리하여, 교사란 지식과 정보를 아이 나이(발달 높낮이)에 맞추어 가르치는 일꾼이 아닙니다. 교사란, 아이와 함께 살아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어른이자, 아이 삶을 곁에서 지키고 보살피는 어버이입니다. 어른이면서 어버이 구실을 할 교사이지, 지식과 정보를 건네는 일꾼 구실을 할 교사는 아니에요. 지식과 정보를 건네는 노릇은 ‘책’으로 넉넉해요. 그러나, 책이라 하더라도 지식과 정보를 쌓으려고 읽힐 때에는 빛이 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살찌우고 생각을 이끄는 구실을 할 때에 책은 책답게 빛이 나요.


  아이들은 날마다 자랍니다. 어른 또한 날마다 자랍니다.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씩씩하게 자랍니다. 어른도 몸과 마음이 씩씩하게 자랍니다.


  나는 첫째 아이를 2008년 8월 16일에 낳은 뒤, 하루 서너 시간 느긋하게 잠든 적이 없습니다. 첫째 아이가 세 살이 될 무렵까지 밤마다 한두 시간에 한 차례씩 깨어 기저귀를 갈고 밤오줌 누이는 한편, 칭얼대는 아이 다독이며 지냈어요. 첫째 아이가 세 살을 지나 네 살이 될 무렵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제 좀 밤잠을 자 볼까 싶던 삶’이 더 짧아졌어요. 두 아이를 나란히 보듬어야 하니까요. 아이가 하나일 적에는 아이가 낮에 곯아떨어질 때에 곁에 나란히 누워 숨을 돌릴 만했지만, 아이가 둘이다 보니, 두 아이가 나란히 곯아떨어져 낮잠 자는 일은 거의 없어요. 하나가 잘 놀다 곯아떨어진다 해도, 다른 아이는 기운차게 놀아요. 다른 아이가 졸린 낌새 가득해서 살살 달래며 재우면, 그동안 자던 아이가 깨어나 기운차게 뛰놀려고 해요.


  그런데, 이렇게 두 아이하고 복닥이는 하루를 보내고 보면, 나로서는 여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생각하지 못한 대목을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두 아이와 지내며 아이 어르거나 달래거나 보듬는 마음길과 손길을 새롭게 다스립니다. 어린이노래를 새삼스레 다시 부르고, 어린이책을 새삼스레 다시 읽습니다. 어린이 눈길이 무엇인가 하고 곰곰이 되짚습니다. 내 옷가지와 옆지기 옷가지 손빨래에다가 두 아이 옷가지 손빨래를 하며 내 손가락이랑 손바닥이랑 손목이랑 팔뚝이랑 등허리 모두 한결 튼튼하게 거듭납니다.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마실을 다니니 내 허벅지와 어깨는 더 튼튼하게 거듭납니다. 두 아이 먹을 밥을 날마다 새롭게 차리자니, 내 밥솜씨는 부쩍 늘어납니다. 두 아이가 졸리면 안고 업고 보듬고 해야 하니, 내 팔힘이나 어깨힘도 남달리 씩씩해지곤 합니다. 어른은 어른 나름대로 자라요. 어른은 어른 깜냥껏 새로 태어나요.


  아이와 함께 해바라기나 별바라기나 꽃바라기를 합니다. 아이와 함께 숲길을 거닙니다. 아이와 함께 바다를 바라보고 들길을 걷습니다. 아이 눈길을 생각합니다. 내 눈길은 무엇인가 하고 돌아봅니다.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숱한 일놀이를 느낍니다. 아이와 함께 다닐 만하지 않은 데라면, 어른인 나부터 다닐 만하지 않다고 깨닫습니다. 아이한테 보여줄 만하지 않은 만화나 영화라 할 때에도, 어른인 내가 얼마나 볼 만한 만화나 영화인가 하고 깨우칩니다.


  오늘날 이 나라 수많은 어버이들은 아이하고 더 오래 지내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이하고 즐거이 더 오래 지내지 못하니까, 정작 ‘당신 아이’가 얼마나 넓고 깊으며 따사로운가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아이를 일찍부터 보육 시설에 집어넣기 때문에, 아이와 당신이 누릴 아름다운 삶을 잃거나 빼앗깁니다. 참다운 복지일 때에는 ‘어버이가 회사나 가게에 덜 얽매이고 돈벌이에 덜 붙들리도록’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다운 교육일 때에는 ‘어버이가 아이와 서로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즐거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육 시설은 없어도 돼요. 보육 시설은 아예 없어도 돼요. 중앙정부나 지자체에서는 아이 낳은 집안마다 ‘아이 살림돈’을 맞돈으로 도와주면 돼요. 보육 시설 없으면 걱정된다고요? 하나도 걱정스럽지 않아요. ‘아이 품앗이’를 짜면 되거든요. 이웃 여러 집하고 품앗이를 짜서, 아이를 따로 맡겨야 할 때에는 아이들끼리 ‘어느 이웃 한 집’에 모여 즐거이 뛰놀도록 하면 돼요. ‘공동육아’라고도 할 텐데, 시설이 아닌 보금자리(살림집)를 누려야 할 아이요 어른이에요. 시설에서 영어를 가르치거나 한글을 더 일찍 가르치지 않아도 돼요. 아이는 마음껏 놀아야 아이예요. 아이와 살아가는 어버이는 아이하고 신나게 놀면서 스스로 몸을 쉬고 마음을 다스릴 때에 삶을 넉넉히 일굴 수 있어요.


  아이 눈빛을 맑게 읽어요. 아이 마음을 슬기롭게 읽어요. 아이 사랑을 따숩게 읽어요. 아이 꿈과 이야기를 기쁘게 읽어요. 4345.12.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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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6] 사회읽기
― 남북녘 ‘미사일’ 또는 ‘로켓’ 또는 ‘우주선’

 


  나는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나는 방송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 시골마을에는 신문이 안 들어오고, 우리 시골집에는 텔레비전을 안 놓습니다. 무언가 읽어야겠으면 내 마음 따사로이 이끄는 책을 찾아서 읽습니다. 무언가 보아야겠다면 아이들과 함께 들길마실이나 멧골마실이나 바다마실을 합니다. 시골마을 벗어나 이웃마을, 이를테면 서울이나 부산이나 인천 같은 도시로 마실을 한다든지, 시골집을 떠나 아이들 할머니 할아버지 뵈러 음성이나 일산으로 마실을 할 적에 비로소 신문이든 방송이든 마주합니다.


  사람들은 으레 묻습니다. 신문 안 읽고 방송 안 보면 사회 굴러가는 흐름을 어찌 아느냐고. 오늘날 같은 사회에서 신문이랑 방송 없이 지내면 바보가 되지 않느냐고.


  나는 빙긋빙긋 웃으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신문에 어떤 기사가 실리나요? 방송에 어떤 사람들이 나오나요? 신문에 실린 기사 가운데 하루 지난 뒤에도 떠오르는 기사가 있나요? 방송에 나온 연속극이나 새소식이나 연예인 수다 가운데 며칠 지나서 또렷이 되새기는 모습이 있나요? 아니, 아침에 읽은 신문글이 저녁이 되면 덧없는 지식조각이 되지 않나요? 아니, 저녁에 본 방송은 이듬날 되면 고스란히 옛 것이 되거나 낡은 것 되어 새로운 방송이 자꾸자꾸 더 낯간지럽게 흐르지 않나요?


  신문을 펴면 첫 쪽부터 언제나 정치꾼 얼굴이 큼지막하게 나옵니다. 그런 다음 미국 이야기가 몇 가지 나오고, 주식시세표가 나오며, 운동경기 이야기가 나오다가는 연예인 이야기 얼마쯤 나온 뒤, 누가 죽고 다쳤다느니, 누가 돈을 떼어먹었거나 누군가를 괴롭힌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문은 이와 같습니다. 신문은 우리 삶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방송도 엇비슷해요. 방송은 여기에 몇 가지 곁들이는데, 이른바 대중노래라든지 연속극이라든지 때때로 영화라든지 다큐멘타리라든지 나오기도 하지만, 한결같이 시청율 노리는 낯뜨거운 이야기가 그득그득합니다.


  신문을 읽는 사람이 외레 사회를 모르는 채 바보가 되지 않나요? 방송을 보는 사람이 오히려 사회와 멀어진 채 멍청이가 되지 않나요? 신문에는 ‘노동자가 왜 파업까지 하게 되는가’ 하는 대목을 밑뿌리 낱낱이 캐며 밝히지 않아요. 택시회사 일꾼이 사납금 때문에 얼마나 애먹는지, 택시회사는 사납금 제도로 돈을 얼마나 벌어들이는지, 이런저런 속깊은 이야기가 드러나지 않아요. 방송 새소식에서도 이와 같아요. 정치꾼 이야기를 할 적에도, 두 군데 커다란 정당 사람들 목소리만 담지, 정치를 아름다이 일구려 힘쓰는 사람들 이야기에는 귀퉁이 한쪽 자리조차 안 주기 일쑤예요.


  무엇보다, 신문이랑 방송은 온통 서울 이야기입니다. 부산이나 대구나 광주나 인천 이야기조차 ‘지방 소식’으로 다룰 뿐이에요. 작은도시 이야기는 끼어들 자리마저 없고, 시골 이야기는 아예 나오지 않아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신문이나 방송을 들출 일이 없어요.


  사회를 읽고 싶으면 사회를 읽으면 됩니다. 나 스스로 사회와 부대끼면서 내 눈썰미와 마음그릇으로 사회를 돌아보면 됩니다. 사회읽기란 나와 이웃이 지내는 마을이 어떻게 흐르는가를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바라보는 일이에요.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이나 논문이나 잡지로는 사회읽기에 한 가지 도움조차 주지 못해요. 내가 사회에 있을 때에 사회를 읽고, 내가 사회를 생각할 때에 사회를 읽어요.


  고흥 시골집을 떠나 인천으로 이틀 마실을 다녀오는 길에, 순천 기차역에 내려 김밥 두 줄을 사는데, 분식집 텔레비전에서 ‘북녘에서 로켓을 쏘았다. 북녘 가난한 주민 삶은 걱정하지 않는다. 로켓 개발비로 쓸 돈을 민생 살리는 데에 써라. 남녘 안보를 어지럽히는 나쁜 짓이다.’와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김밥 두 줄 받고 5500원을 치릅니다. 가방에 김밥통을 담습니다. 순천 버스역까지 천천히 걸어갑니다. 고흥으로 들어가는 시외버스를 탑니다. 시외버스는 국도를 달려 고흥으로 접어들고, 고흥 읍내에서 내리니 아주 한갓집니다. 짐이 많아 군내버스 말고 택시를 탑니다. 억새풀 흐드러지고 갈대밭 어여쁜 시골길 지나 우리 마을 어귀에 닿습니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지개를 켭니다. 아이들 모두 잠든 깊은 밤에는 홀로 마당으로 내려와 까만 하늘을 새삼스레 올려다봅니다. 쏟아지는 별을 가득 안습니다.


  남녘 대통령과 정치꾼과 기자와 지식인이 ‘걱정해 주는 북녘 민생’이란 무엇일까요. 남녘 대통령과 정치꾼과 기자와 지식인은 ‘남녘 민생 걱정’을 얼마나 하며 살까요. 남녘땅 고흥 나로섬에 지은 우주기지에서 ‘우주선에 붙일 로켓 추진장치’를 쏘려고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돈을 쏟아부었지만, 끝내 로켓 추진장치를 못 쏘고 끝났어요. 몇 조인지 몇 십 조인지 알 수 없는 돈을 우주개발 하겠다면서 쓴 남녘이에요.


  얼추 10조라고 쳐 보아요. 10조 원이라는 돈을 남녘 ‘민생’을 살펴 보듬는 데에 썼다고 하면, 우리들 남녘살이는 어떠한 모습으로 거듭날까요. 이른바 ‘4대강 살리기’를 ‘남녘사람 삶 살리기’를 하는 쪽으로 가닥잡았다면 우리들 남녘살이는 어떠한 빛깔로 환하게 빛날까요.


  이렇게 하니 잘못이고 저렇게 하니 글러먹는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회를 어떻게 읽겠느냐는 소리입니다. 남녘 과학자와 공무원이 ‘러시아 기술자’ 아닌 ‘북녘 기술자’를 받아들였으면, 한결 적은 돈을 들여 더 빨리 ‘로켓 추진 장치 쏘는 일’도 ‘뜻을 이루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는 동안 남북교류라든지 남북협력이라든지 남북통일이라든지, 더 따사롭고 슬기로우며 즐겁게 이루는 길을 걸었겠지요. 남녘과 북녘이 따사로이 손을 잡으면 국방비에 터무니없는 돈을 들일 까닭이 없고, 이 국방비는 ‘대학 무상교육’이라든지 ‘병원 무상시설’이라든지 ‘출판 무상지원’처럼, 교육과 복지와 문화를 북돋우는 아름다운 꿈을 이루는 멋스러운 길이 되리라 느껴요. 사회를 읽으려면, 신문이나 방송이라 하는 ‘안경’을 벗고, ‘내 눈’으로 내 삶을 사랑하면서 눈빛을 맑게 트면 돼요. 4345.12.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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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5] 나이읽기
― 사람을 보는 눈길, 허울을 보는 눈매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를 다니면 둘레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며 귀엽다고 말하다가도 으레 나이를 묻습니다. “너 몇 살이니?” 아이 앞에서 적어도 ‘-요’나마 붙여 “몇 살이에요?” 하고 묻는 어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른들 스스로 당신이 아이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처음부터 말을 놓고 들어옵니다.


  아이와 함께 다니는 다른 어른도, 아이 없이 혼자 다니는 다른 어른도, 으레 우리 아이더러 “몇 살”인가를 물을 뿐, 정작 이름을 묻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어느 모임자리에서 조금 오래 얼굴을 마주할 때에는 이름을 묻기는 하되, 나이부터 먼저 묻고 나서 이름을 묻습니다.


  아이들 나이 알아맞히는 놀이를 하는 어른일까요. 나이를 알아서 무엇을 할는지 알 길이 없지만, 아이들 나이 하나만 궁금하게 여깁니다. 그렇다고 아이들 나이를 묻고 나서 잘 되새기지 않아요. 쉽게 묻고 쉽게 잊어요. 다시 쉽게 묻고 또 쉽게 잊어요.

  알고 싶어서 묻지는 않겠지요. 잘 되새기려고 묻지는 않겠지요. 버릇처럼 묻습니다. 서로 ‘높고 낮음(위계)’을 나누려고 묻습니다. 게다가, 아이와 함께 다니는 어른들은 나이를 묻고 나서 저희 아이랑 ‘숫자 대기’를 합니다. 한쪽이 나이가 더 많으면 누나이니 오빠이니 형이니 동생이니 언니이니 하고 부름말을 틀짓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군대나 회사나 공공기관을 들여다보면, 이들 조직은 밥그릇이라 하는 나이를 따집니다. 이른바 ‘호봉’이라고 해서, 얼마나 오래 조직에 몸을 담갔느냐를 놓고 ‘나이 매기기’를 합니다. 먼저 들어와서 조금 더 조직살이를 했으면 ‘어른(또는 선배) 노릇’을 하려고 듭니다.


  학교에서는 ‘학년’이라 하는 나이를 따집니다. 초등학교 몇 학년, 중학교 몇 학년, 고등학교 몇 학년, 이렇게 학년 나이에 따라 줄을 세웁니다. 다 다른 아이들이지만 다 같은 나이에 맞추어 똑같은 틀에 가두고는 줄을 세웁니다. 예전에는 일고여덟 살쯤 될 무렵에야 비로소 ‘같은 나이 줄세우기’를 했으나, 요즈음에는 갓난쟁이마저 보육원에 집어넣는 흐름이기에, 이 나라 아이들은 한두 살일 적부터 ‘같은 나이 줄세우기’에 들볶입니다. 키도 마음도 생각도 앎도 다른 아이들이요, 몸도 팔다리도 눈썰미도 다 다른 아이들이지만, 같은 나이에 맞추어 똑같이 생긴 교실에 들어가서 줄을 맞추어 앉아야 할 적에는 ‘번호로 부르는 숫자’를 받고는 똑같은 틀로 다스려집니다. 아이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관리 대상’이 돼요.


  아이들은 키가 자랍니다. 아이들은 몸집이 커집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 키와 몸무게와 가슴둘레와 이것저것 숫자로 꼬치꼬치 따지고 잽니다. 체력을 재고 시험을 치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기 무섭게 저희 이름을 잊고, ‘아이한테 주어진 번호에 따라 끝없이 따지고 재고 매기고 붙이는 숫자’에 따라 다스려집니다. 이를테면 몇 살에 몇 센티미터 몇 킬로그램, 몇 살에 달리기 몇 초 팔굽혀펴기 몇 차례, 몇 살에 산수 몇 점 국어 몇 점, 몇 살에 던지기 몇 미터 행동발달사항 몇 점, 몇 살에 봉사활동 몇 점 영어능력이나 한자능력 몇 급 …….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며 저희 이름을 잊고 숫자를 외웁니다. 저 먼 데 있는 푸른숲 잣나무에 앉은 꾀꼬리를 알아볼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지 않고 시력점수 2.0이라느니 1.0이라느니 0.1이라느니 또 얼마라느니 하는 숫자를 외웁니다. 책을 읽었으면 어떠한 책을 읽으며 가슴속에 어떤 꿈과 사랑이 샘솟는가 하는 대목을 이야기할 때에 아름답겠지만, 몇 권을 읽었는지를 따지고 주인공과 줄거리 외우기에만 휩쓸립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푸름이한테 “너 몇 학년이니?” 하고 묻기보다는 “너 몇 살이니?” 하고 물을 때에 한결 사람다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푸름이는 ‘중3’이나 ‘고2’가 아니라 ‘열여섯 살 푸름이’나 ‘열여덟 살 푸름이’라 할 때에 걸맞을 테니까요. 버스를 타거나 어느 시설을 쓸 적에 ‘학생 삯’ 아닌 ‘청소년 삯’을 따져야 알맞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대목도 차근차근 더 헤아린다면, ‘어린이 삯’과 ‘푸름이 삯’과 ‘어른 삯’과 ‘어르신 삯’ 이렇게 나눌 수 있겠지요. 다시금 더 헤아리면, 이런저런 나이나 모습으로 가르지 말고 누구나 똑같은 삯으로 나눈다든지 아예 삯을 없애면 훨씬 나아요.


  이제 대학생이 퍽 많이 늘어났기 때문인지, 어른들 사이에서는 “몇 학번이셔요?” 하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어 보려면 차라리 ‘나이’를 물을 노릇이건만, 나이 아닌 ‘학력 신분’을 물어요. 스스로 학력 신분을 누리는 계급이기에 이처럼 물을 텐데, 삶을 즐거이 누리지 못하는 모습은 더없이 슬프구나 싶어요.


  한겨레 옛말에 ‘개밥에 도토리’가 있고, ‘따돌리다’나 ‘돌림뱅이’가 있습니다. 우리 겨레도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들볶던 발자국이 있구나 싶은데, 양반과 양반 아닌 사람, 임금과 임금 아닌 사람, 권력자와 권력자 아닌 사람, 땅임자와 땅임자 아닌 사람, 이렇게 틀이 갈린 나머지 ‘개밥에 도토리’ 같은 말마디가 생겼구나 싶어요. 임금과 임금 아닌 사람이 갈리지 않고 서로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아끼거나 사랑했다면 ‘따돌리다’나 ‘괴롭히다’라는 낱말조차 안 태어났겠지요. 그러니까, 한겨레가 서로를 믿고 아끼는 삶을 누렸으면 ‘싸움’이나 ‘미움’ 같은 낱말은 안 태어나요. 자꾸자꾸 슬픈 수렁으로 빠지니까 ‘전쟁’이나 ‘(전쟁)무기’ 같은 한자말을 끌어들입니다.


  해마다 한 살 나이를 먹으며 철이 드는 일은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저마다 한 살 나이가 들며 생각을 깊이 다스리고 꿈을 넓게 펼치는 일은 아리땁다고 느낍니다. 나이란, 밥그릇 숫자에 따라 금을 죽 긋고는 높고낮은 지위나 신분이나 계급을 나누라는 데에 쓰라고 생기지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삶을 누리면서 사랑을 빛내는 한 살 두 살이 모여 ‘철’이 되고 ‘슬기’가 되기에, 먼먼 옛날부터 나이값을 말하면서 나잇살을 헤아렸으리라 느낍니다. 4345.1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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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4] 사람읽기
― 사람은 어디에서 살아가는가

 


  어릴 적부터 내 둘레 어른들은 으레 ‘사람은 어디에서도 살 수 있다. 남극에서도 북극에서도 사막에서도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땅속에서 햇볕을 안 쬐고도 살 수 있고, 사람은 물과 소금과 밥이 있으면 어디에서든 산다.’고 말했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이 말이 틀리지는 않구나 싶으면서도, 어딘가 영 내키지 않았어요. 어린 나는 이 말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딱히 어른들 말에 무어라 대꾸하지 못했어요.


  이제 나는 어른이 되어 우리 집 아이를 돌보기도 하고, 이웃 아이들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때때로 어린이 앞이나 푸름이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는 나 스스로 어릴 적부터 궁금하게 여기며 스스로 길을 찾아나선 대목을 밝히곤 합니다. “사람은 어디에서라도 살 수 있다고들 말해요. 그런데 참말 사람은 어디에서라도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셔요. 맞는 말일까요. 돼지는 차가운 시멘트바닥 조그마한 우리에서도 ‘목숨을 이을’ 수 있어요. 그렇지요? 그런데, 커다랗게 불어난 몸을 옴쭉달싹 못하며 조그마한 우리에 시멘트 차가운 바닥인 햇볕도 안 드는 곳에서 지내야 하는 돼지한테 ‘삶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닭은 0.1평조차 안 되는 아주 좁은 데에 다닥다닥 붙은 채 밤에도 불빛을 받으며 잠을 못 자며 알을 낳아야 해요. 사료와 항생제를 먹으며 고작 한 달 만에 고기닭이 되기까지 해요. 이 닭한테도 ‘삶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목숨을 이으’니 ‘산다’고 말할 만할까요?” 어린이나 푸름이 앞에서 이렇게 물어 봅니다. 어린이나 푸름이 스스로 삶길을 스스로 찾거나 헤아리기를 바라며 물어 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이란 무엇이겠느냐고 저마다 슬기를 빛내어 깨닫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윽고 한 마디 붙입니다. “두 아이와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생각해 보니, 사람은 숲 아니고서는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다고 느껴요. 그래서 우리 식구는 처음에는 인천이라는 도시에서 지내다가, 충청북도 멧골로 옮겨서 살았고, 다시 한결 깊은 시골인 전라남도 고흥으로 옮겨서 살아요. 숲을 누리는 데에서 살아야 비로소 사람답게 살아간다고 느끼거든요. 곧, 사람이 사람답게 목숨을 잇도록 북돋우는 숨결은 숲에서 비로소 푸르고 싱그러이 빛나는구나 싶어요. 어린 여러분이 먹는 모든 것, 어린 여러분이 입는 모든 것, 어린 여러분이 잠을 자거나 쉬는 모든 것, 이 모두는 바로 숲에서 얻어요. 연필 한 자루, 책 한 권, 종이 한 장, 모두 숲에서 자라던 나무한테서 얻어요. 마시는 물은 공장에서 뽑지 않아요. 수도물이건 먹는샘물이건 모두 정갈한 숲이 있는 시골에서 얻어요. 숲이 푸르게 빛날 때에 어린 여러분이 서울에서 살더라도 목숨을 이어요. 숲이 푸르게 빛나지 않으면 어린 여러분이 서울이나 시골에서 살더라도 목숨을 아름다이 잇는다고 할 수 없어요. 시골마을은 언제나 정갈해야 하고, 숲은 늘 푸르게 빛나야 해요. 시골에는 어떠한 위험·위해시설을 지어서는 안 돼요. 그렇지요? 시골에 발전소나 공장이나 골프장이나 고속도로나 공항이나 송전탑이나, 이런저런 시설을 지으면, 시골마을과 시골숲 모두 더러워지고, 시골마을과 시골숲이 더러워지면, 바로 어린 여러분이 먹고 입고 마시고 누리는 모든 것이 더러워진다는 뜻이에요.”


  아이들한테 참거짓을 슬기롭게 밝히는 어른이 늘어나기를 빕니다. 아이들 앞에서 참거짓을 슬기롭게 밝히며 스스로 참답게 살아가는 어른이 늘어나기를 빕니다. 사람은 ‘서울에서도 목숨을 잇는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목숨을 잇는대서 ‘살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느껴요. 서울에서 일자리를 얻거나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닌대서 ‘살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스스로 참삶을 누리며 느껴야 하고, 스스로 거짓삶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며 바로세울 수 있어야 해요. 4345.11.2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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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demian 2012-11-26 19:05   좋아요 0 | URL
너무 댓글을 많이 다는 거 같습니다만..느낀 바가 있어서요..
삶을 누리는 게 아니면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와 닿습니다. 나는 그저 삶을 사는 게 아닌 '누리고' 있는가? '누리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숲 아니면 살아갈 수 없다..비록 몸으론 아직 체험해보진 못했지만..이성적으로는 알 수 있죠. 사람으로서 동물생명 자체가 나무-숲이 내뿜는 산소가 없었다면 생존하지 못했을거예요..숲에 들어가면 평안감..사람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듯 합니다.
도시적 삶에 대해서 완전히 회의적이신건가요? 저도 서울에 대해서..아파트에 대해서..마당도 없고 좁은 주택에 대해서..거리에 대해서 안좋게 생각하고 느낍니다만..좀 더 나은 도시 삶에 대해서는 구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도시의 공기가 주는 자유. 멜팅팟이 주는 관용과 다양함..의 긍정적인 이미지 때문에요.

숲노래 2012-11-26 20:04   좋아요 0 | URL
제 서재에서
[국어사전 뒤집기] 게시판이 있는데,
그곳에서 다음 글을 한번 읽어 보셔요.
http://blog.aladin.co.kr/hbooks/5945787
'서울(도시)'과 '시골'이라는 말밑을 풀이한 글이에요.

그리고 다음 글도 한번 읽어 보셔요.
http://blog.aladin.co.kr/hbooks/5785494
'숲'과 '자연'이라는 낱말을 다룬 글이에요.
'자연'이라는 한자말이 어떻게 생겨났고,
한국말로는 어떻게 나타내야 알맞는가를 따진 글이에요.

'숲'이란 바로 '자연'이에요.
그러니까, 고기를 먹든 풀을 먹든 물을 마시든,
모든 먹을거리는 다 자연(숲)에서 나왔어요.
자연 아닌 데에서 나온 것은 아무도 안 먹어요.
가공식품도 모두 자연에서 나온 것을 가공하거든요.

그런데 서울(도시)에서는 이러한 얼거리를
모두 무시하거나 등돌리기만 해요.
이렇게 되면, 서울(도시)에서 살더라도
'나다운 삶'을 못 찾고 말면서 쳇바퀴 톱니바퀴에 허덕이지요.

서울(도시)에서 살더라도, 즐거운 삶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하는데,
정작 서울(도시) 사는 사람 가운데 즐거운 보람을
누리거나 찾거나 나누는 이는 얼마나 될까 궁금해요.

여러 가지를 깊이 헤아릴 만큼 느긋하게 내 하루를 누리면
이 글에서 밝히려는 생각을 받아들이실 수 있으리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