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른입니까 10] 글읽기
― 신문에 ‘사건·사고’ 이야기가 없어야지요

 


  어느 신문이든 펼치면 맨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사고’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정치판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경제판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 노동판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사고’, 사회 언저리에서 불거지는 ‘사건·사고’ 이야기로 가득해요. 여기에 방송 연예인들 ‘사건·사고’가 한몫 단단히 거듭니다.


  어른들 보는 신문이든 아이들 보는 신문이든 서로 매한가지입니다. 도시에서 나오는 신문이든 시골에서 나오는 신문이든 모두 엇비슷해요. 이 나라에서 나오는 신문이란 죄다 ‘사건·사고’만 다루는구나 싶습니다.


  기자들은 ‘사건·사고’를 캐는 사람을 가리키기만 할까 궁금하지만, 오늘날 이 나라에서 기자로 일하는 분들은 ‘사건·사고’ 다루는 울타리를 스스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신문을 읽거나 방송을 켜거나 인터넷을 여는 여느 사람들 또한 ‘사건·사고’ 이야기에 눈길을 보내고 생각을 기울입니다.


  날마다 온갖 ‘사건·사고’ 이야기가 넘실거립니다. 사람들은 속닥속닥 ‘사건·사고’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자꾸 잊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는 차츰 잊습니다. 서로 ‘꿈꾸는’ 이야기는 그예 잊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을 가까이하는 동안 사람들 마음속에는 ‘사건·사고’ 생각이 꾸준히 스며듭니다. 생각밭에도 마음밭에도, 또 지식밭에도 온통 ‘사건·사고’ 이야기를 심습니다. 이리하여, 오늘날 여느 사람들은, 도시에서 지내든 시골에서 지내든 ‘풀·숲·나무’ 이야기를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옆에 ‘풀·숲·나무’가 있어도 못 느끼기 일쑤요, 코앞에서 ‘풀·숲·나무’를 마주하더라도 어떤 내음이요 어떤 빛깔이며 어떤 무늬인가를 알아채지 못해요.


  바람이 불어도 바람내음을 못 맡는 도시사람입니다. 햇살이 드리워도 햇살내음을 안 맡는 시골사람입니다. 들새가 노래해도 자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에 파묻혀 도시사람은 들새와 벗하지 못합니다. 멧새가 지저귀어도 경운기와 갖가지 기계를 다루느라 시골사람은 멧새와 동무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싶은가에 따라서, 나한테 찾아드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스스로 ‘사건·사고’ 이야기에 젖어들면, 언제나 ‘사건·사고’ 이야기가 나한테 찾아듭니다. 스스로 ‘풀·숲·나무’를 떠올리면 언제나 ‘풀·숲·나무’ 이야기가 나한테 다가와요.


  내 삶에 맞추어 내 생각이 자랍니다. 내 생각에 따라 내 말이 자랍니다. 곧, 내가 쓰는 글이든 이웃이 쓰는 글이든, 저마다 생각을 담는 글이요, 생각이란 삶을 담기 마련이니, ‘삶을 담는 글’입니다. ‘사건·사고’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사건·사고’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을 부릅니다. ‘풀·숲·나무’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풀·숲·나무’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을 부를 테지요.


  온누리를 따뜻하게 어루만지면서 평화와 평등과 민주와 통일이 드리우기를 바란다면, 바로 나부터 내 마음자리에 평화와 평등과 민주와 통일이 싹틀 수 있도록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내 마음자리에 ‘사건·사고’ 이야기가 아닌 ‘풀·숲·나무’ 이야기가 감돌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꿈을 생각하고 사랑을 생각하며 믿음을 생각할 노릇이에요. 꿈을 빚는 이야기를 스스로 쓰고, 사랑을 빚는 이야기를 스스로 읽으며, 믿음을 빚는 이야기를 다 함께 나눌 노릇이지요.


  ‘사건·사고’ 이야기를 자꾸 꺼낼수록, 사람들은 ‘논쟁·투쟁’에 휘둘립니다. ‘풀·숲·나무’ 이야기를 천천히 주고받으면, 사람들은 아름다움과 빛줄기와 따사로움에 시나브로 젖어듭니다.


  신문에 ‘사건·사고’ 이야기만 가득하다면 신문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방송에 ‘사건·사고’ 이야기만 수두룩하다면 텔레비전을 꺼야 합니다. 인터넷에 ‘사건·사고’ 이야기로 빼곡하다면 인터넷 창을 닫아야지요. 겨울숲을 바라보아요. 겨울들을 거닐어요. 겨울바다를 마주해요. 너른 하늘 파랗게 눈부신 숨결을 마셔요. 봄을 기다리는 새싹이 얼어붙은 땅에서 힘껏 솟아나려고 하는 모습을 지켜봐요. 한겨울에 먹이를 찾는 들새와 멧새들 날갯짓을 물끄러미 바라보아요. 마음속에서 사랑이 자라고 꿈이 피어나며 믿음이 솟아나도록, 생각씨앗 한 알을 슬기롭게 다스려요. 내 작은 힘을 모으고 네 작은 힘을 갈무리해서, ‘참신문’을 엮을 수 있기를 빌어요. ‘사건·사고’ 이야기로 넘치는 ‘거짓글’은 이제 그만 쓰고 그만 읽어요. 서로 아름답게 어깨동무하면서 착하게 살림하는 ‘참글’을 쓰고 즐겁게 읽어요.


  글쓰기는 삶쓰기예요. 글읽기는 삶읽기예요. 내가 쓰는 내 삶이 ‘사건·사고’뿐이라면 너무 메말라 답답하지 않겠어요? 내가 쓰는 내 삶이 ‘풀·숲·나무’라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푸르고 싱그러우며 어여쁘겠지요? 서로 사랑할 삶을 읽고, 함께 사랑할 삶을 쓸 때에, 비로소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4346.1.1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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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9] 동무읽기
― 내 동무는 누구인가

 


  새해(2013년)를 맞이해 여섯 살 세 살 되는 우리 집 두 아이는 어린이집에 안 갑니다. 한 해 더 지나 큰아이가 일곱 살 되면, 아마 ‘취학통보서’가 우리 집에 날아올 텐데, 우리 집에서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마음이 없습니다. 학교는 아이들 모두 대학바라기로 이끌 뿐 아니라, 모두 시골 떠나 도시에서 살도록 길들이기만 합니다. 시골에서 아름다운 숲 누리면서 예쁘게 살아가고 싶어 시골에 보금자리를 튼 만큼, 어여쁜 시골살이 즐거이 누리도록 이끄는 배움터가 아니라 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어디로도 보내고 싶지 않아요.


  둘레 어른들은 우리 아이를 만날 때 자꾸 “시골에 또래 동무가 없어서 어쩌니?” 하고 말합니다. 나이가 엇비슷한 또래가 없고, 시골 아이는 죄 도시로 떠났으니 동무가 없다는 뜻일 텐데, 또래가 없거나 동무가 없대서 그리 걱정스럽지 않아요. 왜냐하면,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가서 또래를 만나거나 사귄다고 해서 아이들이 한결 즐거이 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아이 또래를 헤아려 보면 슬픕니다. 우리 아이 또래인 다른 집 아이들은 으레 아주 어릴 때부터 영어노래를 배우고 영어만화를 봅니다. 어린이집부터 온통 비디오와 만화영화에 길들고, 따로 무슨무슨 학습이라면서 머리에 지식조각을 집어넣어야 해요. 집집마다 거의 다 있다는 자가용을 아주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탑니다. 두 다리로 개구지게 뛰노는 또래 아이들을 찾아보기 몹시 힘듭니다. 두 다리로 풀숲을 헤치고 들판을 누비거나 바다를 가르는 또래 아이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마을이나 집이나 학교 둘레에 ‘풀숲 헤치’고 ‘들판 누비’며 ‘바다 가르’는 또래가 있다면, 곧장 이 아이한테 찾아가 서로 동무로 삼자고 할 생각입니다. 이 같은 또래가 아니라면, ㅃㄹㄹ이니 ㅌㅇ이니 하는 ‘텔레비전 캐릭터’에 마음을 빼앗긴 채, 흙이나 모래를 마음대로 주무르지 못하는 또래라 한다면, 이 아이들이 우리 집 아이들하고 나이가 엇비슷하대서 서로 어울리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도, 아이들끼리 두면, 집안 아닌 마당이나 바깥에서 아이들끼리 두면, 아이들은 어느새 ‘텔레비전 캐릭터’나 ‘영어노래’ 따위는 잊습니다. 온몸 굴리고 뜀박질하는 놀이에 흠뻑 젖어듭니다.


  아이들은 뛰놀 마당과 숲과 들과 바다와 멧골이 있어야 해요. 아이들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나 놀이공원이나 보육시설이 있어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마음이 맞는 벗을 찾아야 할 뿐이에요. 아이들은 또래를 만나지 않아도 돼요. 또래가 꼭 동무가 되지 않아요. 동무란, 서로 마음이 맞는 아름다운 사이로 지내는 이웃입니다. 동무란, 나와 네가 마음을 활짝 열며 아름다이 사랑을 일구는 삶지기입니다.


  나이가 같대서 동무가 되지 않아요. 어른끼리도 그렇거든요. 어른끼리도 나이가 같아야 동무가 되지는 않아요. 마음이 맞아야 동무입니다. 마음이 사랑스럽고, 마음이 믿음직하며, 마음이 넉넉할 때에 비로소 동무예요. 4346.1.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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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8] 씨앗읽기
― 씨앗회사와 정치권력 꿍꿍이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으며 생각합니다. 칼을 쥐어 감자나 양파나 무나 푸성귀를 써는 내 마음속에 흐리거나 어두운 빛이 흐르면, 내 손으로 짓는 먹을거리 또한 흐리거나 어두운 기운이 서리는구나 싶습니다. 즐겁게 노래하면서 밥을 짓고 밥상을 차리면, 아무리 아이들이 개구지게 뛰놀며 밥알이나 국을 흘리더라도 따스하며 밝은 기운이 서리는구나 싶어요.


  빨래를 할 적에도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좋은 마음이 되어 복복 비비고 헹구어야 옷가지마다 따스하며 밝은 기운이 서려요. 아이들을 씻길 적에도 내 마음이 환하고 기뻐야, 아이들 몸을 정갈히 씻길 수 있어요.


  마음이 어두움으로 꽉 찼을 적에는, 아무리 허울좋은 예쁜 말을 내놓으려 하더라도, 어두움이 잔뜩 낀 슬프거나 새된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마음이 밝게 빛날 적에는, 언제 어느 자리에 있더라도 고운 노랫소리가 솔솔 흘러나옵니다.


  씨앗 한 알 손에 쥐어 논과 밭에 심는 사람들 마음은 어떠할까 헤아려 봅니다. 흙을 밟으며 흙을 만지는 마음이 어둡다면, 씨앗에도 어두운 기운이 서리면서 흙에까지 어두운 기운이 퍼질 테지요. 밝은 마음으로 흙을 밟고서 밝은 생각 길어올려 흙을 만지면, 씨앗뿐 아니라 흙에까지 밝은 기운이 이어질 테고요.


  사람들 누구나 먹는 밥은 쌀로 짓습니다. 쌀은 나락 껍질을 벗겨 얻습니다. 나락 껍질을 살짝 벗기면 누런쌀이요, 나락 껍질을 많이 벗겨 알맹이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하면 흰쌀입니다. 나락 껍질, 그러니까 겨를 살짝 벗긴 누런쌀에는 씨눈이 남고, 겨를 벗길 뿐 아니라 하얀 알맹이만 남기려 하면 씨눈이 잘립니다.


  나락이란 무엇인가 하면 바로 볍씨입니다. ‘씨가 되는 벼’, 곧 ‘이듬해에 벼를 새로 얻을 씨앗’입니다. 감자알도 이듬해에 심어 새로 거두려 하면 ‘씨감자’를 갈무리합니다. 씨알이 있어야 다시 흙을 일구면서 우리 먹을거리를 얻습니다. 보리도 밀도 수수도 서숙도 모두 ‘먹을 알곡’에서 ‘씨앗으로 삼을 알곡’을 따로 갈무리합니다.


  밥을 먹는다 할 때에는 씨앗을 먹는다는 뜻입니다. 곡식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씨앗을 먹습니다. 풀이 맺는 씨앗, 이른바 곡식은 풀한테 열매입니다. 능금이나 배나 살구처럼 알이 커다랗지 않으나, 풀열매는 곡식이면서 씨앗입니다.


  먼먼 옛날부터 풀열매요 곡식인 씨앗은 ‘거두고 심고 거두고 심고’를 되풀이합니다. 거둔 씨앗을 갈무리하고 다시 심어 먹을거리를 얻으며, 새로 심을 씨앗을 둡니다. 백 해 오백 해 천 해 오천 해 만 해를 잇는 씨앗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오늘 먹는 씨앗은, 천 해 앞서 살아가던 옛사람이 거두고 심던 씨앗입니다. 천 해 앞서 살아가던 옛사람이 거두고 심던 씨앗이란, 만 해 앞서 살아가던 옛사람이 거두고 심던 씨앗이에요.


  사람을 낳는 씨앗은 사람 몸에 깃듭니다. 곡식을 낳는 씨앗은 곡식 몸, 곧 줄기와 뿌리와 잎과 꽃에 깃듭니다. 곡식 유전자를 건드려 돈을 벌려고 하는 회사는, 곡식을 이듬해에 심으면 새로 돋지 않도록 가로막습니다. 사람들이 씨앗을 건사해서 심다가는 씨앗회사가 돈을 못 벌 테니까요. 자꾸자꾸 새로 사다 심도록 길들입니다. 처음에는 씨앗값을 눅게 파는 듯하지만, 곰곰이 따지면, 여태까지 어느 흙일꾼도 씨앗값을 돈으로 치른 적 없어요. 씨앗은 돈으로 사고팔 수 없거든요. 씨앗이란 밥이면서 목숨이기에, 스스로 제 땅을 일구어 제 삶을 일구는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심고 거두며 밥을 먹었지, 돈으로 씨앗(곡식)을 내다 팔아 밥을 먹지 않았어요.


  도시가 커지고 시골을 잡아먹으면서, 흙일꾼더러 씨앗(곡식)을 도시로 내다 팔도록 부추깁니다. 흙일꾼 살림집에는 전기나 수도물이 없어도 되었으나, 흙일꾼이 전기와 수도물을 쓰도록 길들입니다. 흙일꾼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도록 하면서, 땅을 팔고 씨앗(곡식)을 팔도록 내몹니다. 흙일꾼 집 아이들을 도시로 보내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도록 가르치자니, 흙일꾼은 자꾸자꾸 땅을 팔고 씨앗(곡식)을 팔아야 합니다. 스스로 지어서 먹던 씨앗은 조금 못생기거나 볼품이 없더라도, 집집마다 가장 맛나고 아름다웠지만, 내다 팔아야 하는 씨앗은 굵직하고 예뻐야 합니다.


  흙일꾼은 나날이 비료와 농약을 써야 합니다. 비료와 농약 없이 흙을 일구던 사람들이지만, 흙일꾼 집 아이들이 학교에 가야 하니, 풀을 뽑거나 거름을 만들 일손이 모자랍니다. 시골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시골을 떠나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공장)노동자가 되고 보니, 이제 시골에는 늙은이만 남느라 비료와 농약 없이는 ‘씨앗(곡식) 내다 팔 길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시골 흙일꾼이 비료와 농약에 길들면서 ‘스스로 씨앗을 건사해 새로 심던 삶’이 무너집니다. 씨앗회사에서 씨앗을 돈 주고 삽니다. 더 굵고 더 예뻐 보이는 열매가 나는 씨앗을 사다 씁니다. 이제 ‘씨앗과 밥이 되는 목숨(씨앗)’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내다 팔기 좋아 보이는 열매’만 바라봅니다.


  시나브로 씨앗회사가 씨앗을 홀로 차지하면서 흙을 망가뜨립니다. 흙이 망가지니 비료를 더 써야 하고, 일손이 모자라니 농약을 더 써야 합니다. 흙은 자꾸자꾸 더 망가지고, 비료와 농약 장사는 더 불티나게 되면서, 씨앗회사는 조금씩 씨앗값을 올리며 떼돈을 법니다. 이동안, 시골 떠나 도시에서 새 보금자리를 튼 아이들이 다시 시골로 돌아오는 일이 없습니다. 도시로 간 시골 아이들이 늙은 어버이 일손을 거들러 시골로 찾아오는 일조차 없습니다.


  처음에는 씨앗 한 알이지만, 바야흐로 흙과 시골과 숲과 사람 모두 뒤흔들며 무너뜨리는 사회·정치·경제·교육 얼거리요, 씨앗회사입니다.


  사회는 돈만 바라보도록 내몹니다. 정치는 시골을 살피지 않습니다. 경제는 무역과 투자와 수출을 외칩니다. 교육은 ‘씨앗 심는 아이’로 이끌지 않습니다. 씨앗회사는 돈을 벌어들여 기쁘고, 정치권력은 값싼 일꾼(회사원과 공장노동자)을 시골에서 끌여들여 도시를 이루고 세금을 더 거두어들이니 기쁩니다. 사회나 정치나 경제나 교육을 받친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톱니바퀴나 쳇바퀴 구실을 합니다. 연봉이 제법 높다거나 연금과 노후를 지켜 준다는 공공기관이라는 이름은 허울입니다. 시골 떠난 아이들이 도시에서 돈을 버는 동안, 시골마을 늙은 어버이는 허리가 휠 뿐더러, 시골마을 흙과 숲은 모두 망가질 뿐 아니라, 시골이나 도시에서 ‘밥(씨앗)을 먹는 사람’들은 ‘아름답지도 좋지도 맛나지도 않은’ 유전자 건드린 곡식을 먹어야 합니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나 닭고기는 ‘유전자 건드린 곡식’으로 만든 사료를 먹으며 화학약품으로 만든 항생제를 먹은 돼지와 소와 닭을 잡아서 공장에서 만듭니다. 풀을 먹든 고기를 먹든, 도시와 시골에서는 몸을 망가뜨리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먹을거리로 넘칩니다.


  씨앗 한 알이 우주입니다. 씨앗 한 알이 우주인 줄 깨달은 슬기로운 사람은 숲에 깃들며 손으로 흙을 일굽니다. 씨앗 한 알이 우주인 줄 알아챈 장사꾼은, 씨앗 유전자를 건드려 돈과 권력을 거머쥐며 사람들을 바보로 길들이려고 합니다. 정치권력은 도시사람들이 ‘씨앗 한 알이 우주’인 줄 깨닫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학교에서는 씨앗하고 동떨어진 교과서만 가르칩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는 영어에 온마음 바치도록 등을 밉니다. 중·고등학교 푸름이한테는 대학바라기만 하도록 짓누르고, 대학교에 들어간 뒤에는 일자리 찾는 데에 마음 사로잡히도록 울타리를 쌓습니다. 시골사람은 시골사람대로 흙을 잊고 씨앗을 잃습니다. 도시사람은 도시사람대로 삶을 잊고 사랑을 잃습니다. 4346.1.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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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7] 아이읽기
― 아이와 할 수 있는 숱한 일놀이

 


  아이들은 즐겁게 웃으며 놉니다. 뛰놀다 넘어진대서 아이들이 우는 일은 없습니다. 아프다고 울지는 않거든요. 넘어진 아이를 바라보며 근심과 걱정에 휩싸인 어른들이 ‘어머나!’라든지 ‘어떡해!’ 하며 낯빛이 달라지니까, ‘아하, 울어야 하는구나!’ 하고 느끼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아이가 넘어지거나 말거나, 피가 나거나 말거나,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면서 “그래, 넘어졌네. 괜찮아. 무릎한테 괜찮다고 말하렴.” 하고 이야기하면 아이는 안 웁니다. “아프겠네. 아프겠구나. 그래, 아픈 데는 곧 나아. 자, 손가락아 얼른 나으렴.” 이렇게 말하면 아이도 따라서 말하면서 어느새 손가락 아픈 줄 잊습니다. 그러고는 아픈 손가락이 어느새 나아요.


  날마다 하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집일을 하고 글쓰기를 하느라 자칫 잊거나 힘들다며 ‘아이랑 글씨 쓰기’하고 ‘아이랑 그림 그리기’를 넘어가곤 합니다. ‘아이랑 숲마실 하기’도 곧잘 넘어가곤 합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저희끼리 놀이를 생각해 내고, 저희 나름대로 다투거나 사이좋게 얼크러지면서 놀이를 즐깁니다. 하루 내내 아이들을 바라보고, 아이들을 보살피며, 아이들과 부대낍니다. 아이랑 함께 글씨를 써 보거나 그림을 그려 보면, 이 아이가 날마다 새로운 손길과 눈썰미로 새 모습을 빚는구나 하고 느낄 만합니다. 아마, 학교 교사라면 ‘여러 아이들 날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낄 테지요. 이 보람이 있기에 고된 공무원 노릇을 견딜 만한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퍼뜩 생각합니다. 교사가 학교에서 느끼는 보람이란, 따지고 보면 모든 어버이가 여느 보금자리에서 늘 누려야 하던 모습 아닌가 하고.


  오늘날 거의 모든 어버이는 아이들을 보육원이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넣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아이들을 보육원이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넣을 때에 여러모로 도움돈을 줍니다. 2012년 12월에 새 대통령 뽑히고 2013년이 되면 서울을 비롯한 크고작은 도시마다 ‘어린이 보육시설’이 부쩍 늘어나리라 봅니다. 맞벌이 집안을 헤아리는 보육시설이 늘고, ‘전일제’로 아이를 맡는다는 곳도 늘어난다고 해요. 이른바 ‘보건 복지’와 ‘교육 문화’라는 이름으로 ‘어린이 보육시설’이 늘어나는데요, 나는 이 대목이 여러모로 못마땅합니다. 제대로 된 보건 복지요 교육 문화라 한다면, 어버이들이 ‘돈을 벌러 회사에 나가거나 가게를 지키는 품’을 줄이도록 해 주어야 옳기 때문입니다. 맞벌이 집안이라 아이들을 ‘전일제’로 늦게까지 보육 시설에 두는 일이 즐거울까요. 아이를 둔 어버이라면 회사에서 ‘일을 더 적게 해도 되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올바르지 않을까요. 보육 시설을 늘려야 할 노릇이 아니라, ‘회사 정규직을 더 늘려’서, ‘아이 둔 어버이가 다른 일꾼보다 조금 더 일을 마친 다음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이렇게 해서 ‘아이 어버이가 적게 맡은 일 몫’만큼 다른 사람이 ‘일을 나누어 하도록’ 할 때에 일자리가 저절로 느는 한편, 굳이 어떤 돈을 더 들여 시설을 만들지 않아도 한결 적은 돈과 품으로 ‘복지’와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회사나 가게에서 일을 조금 더 적게 할 수 있는 어버이는, 더 일찍 집으로 돌아와서 아이들하고 어울릴 수 있어요.


  아이를 돌보거나 가르치는 몫은 바로 어버이가 맡아야 올바릅니다. 어버이가 회사일이나 가게일로 바쁘다고 하니까, 중앙정부나 지자체에서 보육 시설을 마련하기는 합니다만, 교사에 앞서 어버이예요. 어버이는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돌보는 몫에다가, 아이를 가르치고 사랑하고 아끼고 북돋우는 몫을 맡습니다. 왜냐하면, 어버이잖아요. 이리하여, 교사란 지식과 정보를 아이 나이(발달 높낮이)에 맞추어 가르치는 일꾼이 아닙니다. 교사란, 아이와 함께 살아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어른이자, 아이 삶을 곁에서 지키고 보살피는 어버이입니다. 어른이면서 어버이 구실을 할 교사이지, 지식과 정보를 건네는 일꾼 구실을 할 교사는 아니에요. 지식과 정보를 건네는 노릇은 ‘책’으로 넉넉해요. 그러나, 책이라 하더라도 지식과 정보를 쌓으려고 읽힐 때에는 빛이 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살찌우고 생각을 이끄는 구실을 할 때에 책은 책답게 빛이 나요.


  아이들은 날마다 자랍니다. 어른 또한 날마다 자랍니다.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씩씩하게 자랍니다. 어른도 몸과 마음이 씩씩하게 자랍니다.


  나는 첫째 아이를 2008년 8월 16일에 낳은 뒤, 하루 서너 시간 느긋하게 잠든 적이 없습니다. 첫째 아이가 세 살이 될 무렵까지 밤마다 한두 시간에 한 차례씩 깨어 기저귀를 갈고 밤오줌 누이는 한편, 칭얼대는 아이 다독이며 지냈어요. 첫째 아이가 세 살을 지나 네 살이 될 무렵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제 좀 밤잠을 자 볼까 싶던 삶’이 더 짧아졌어요. 두 아이를 나란히 보듬어야 하니까요. 아이가 하나일 적에는 아이가 낮에 곯아떨어질 때에 곁에 나란히 누워 숨을 돌릴 만했지만, 아이가 둘이다 보니, 두 아이가 나란히 곯아떨어져 낮잠 자는 일은 거의 없어요. 하나가 잘 놀다 곯아떨어진다 해도, 다른 아이는 기운차게 놀아요. 다른 아이가 졸린 낌새 가득해서 살살 달래며 재우면, 그동안 자던 아이가 깨어나 기운차게 뛰놀려고 해요.


  그런데, 이렇게 두 아이하고 복닥이는 하루를 보내고 보면, 나로서는 여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생각하지 못한 대목을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두 아이와 지내며 아이 어르거나 달래거나 보듬는 마음길과 손길을 새롭게 다스립니다. 어린이노래를 새삼스레 다시 부르고, 어린이책을 새삼스레 다시 읽습니다. 어린이 눈길이 무엇인가 하고 곰곰이 되짚습니다. 내 옷가지와 옆지기 옷가지 손빨래에다가 두 아이 옷가지 손빨래를 하며 내 손가락이랑 손바닥이랑 손목이랑 팔뚝이랑 등허리 모두 한결 튼튼하게 거듭납니다.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마실을 다니니 내 허벅지와 어깨는 더 튼튼하게 거듭납니다. 두 아이 먹을 밥을 날마다 새롭게 차리자니, 내 밥솜씨는 부쩍 늘어납니다. 두 아이가 졸리면 안고 업고 보듬고 해야 하니, 내 팔힘이나 어깨힘도 남달리 씩씩해지곤 합니다. 어른은 어른 나름대로 자라요. 어른은 어른 깜냥껏 새로 태어나요.


  아이와 함께 해바라기나 별바라기나 꽃바라기를 합니다. 아이와 함께 숲길을 거닙니다. 아이와 함께 바다를 바라보고 들길을 걷습니다. 아이 눈길을 생각합니다. 내 눈길은 무엇인가 하고 돌아봅니다.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숱한 일놀이를 느낍니다. 아이와 함께 다닐 만하지 않은 데라면, 어른인 나부터 다닐 만하지 않다고 깨닫습니다. 아이한테 보여줄 만하지 않은 만화나 영화라 할 때에도, 어른인 내가 얼마나 볼 만한 만화나 영화인가 하고 깨우칩니다.


  오늘날 이 나라 수많은 어버이들은 아이하고 더 오래 지내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이하고 즐거이 더 오래 지내지 못하니까, 정작 ‘당신 아이’가 얼마나 넓고 깊으며 따사로운가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아이를 일찍부터 보육 시설에 집어넣기 때문에, 아이와 당신이 누릴 아름다운 삶을 잃거나 빼앗깁니다. 참다운 복지일 때에는 ‘어버이가 회사나 가게에 덜 얽매이고 돈벌이에 덜 붙들리도록’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다운 교육일 때에는 ‘어버이가 아이와 서로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즐거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육 시설은 없어도 돼요. 보육 시설은 아예 없어도 돼요. 중앙정부나 지자체에서는 아이 낳은 집안마다 ‘아이 살림돈’을 맞돈으로 도와주면 돼요. 보육 시설 없으면 걱정된다고요? 하나도 걱정스럽지 않아요. ‘아이 품앗이’를 짜면 되거든요. 이웃 여러 집하고 품앗이를 짜서, 아이를 따로 맡겨야 할 때에는 아이들끼리 ‘어느 이웃 한 집’에 모여 즐거이 뛰놀도록 하면 돼요. ‘공동육아’라고도 할 텐데, 시설이 아닌 보금자리(살림집)를 누려야 할 아이요 어른이에요. 시설에서 영어를 가르치거나 한글을 더 일찍 가르치지 않아도 돼요. 아이는 마음껏 놀아야 아이예요. 아이와 살아가는 어버이는 아이하고 신나게 놀면서 스스로 몸을 쉬고 마음을 다스릴 때에 삶을 넉넉히 일굴 수 있어요.


  아이 눈빛을 맑게 읽어요. 아이 마음을 슬기롭게 읽어요. 아이 사랑을 따숩게 읽어요. 아이 꿈과 이야기를 기쁘게 읽어요. 4345.12.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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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6] 사회읽기
― 남북녘 ‘미사일’ 또는 ‘로켓’ 또는 ‘우주선’

 


  나는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나는 방송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 시골마을에는 신문이 안 들어오고, 우리 시골집에는 텔레비전을 안 놓습니다. 무언가 읽어야겠으면 내 마음 따사로이 이끄는 책을 찾아서 읽습니다. 무언가 보아야겠다면 아이들과 함께 들길마실이나 멧골마실이나 바다마실을 합니다. 시골마을 벗어나 이웃마을, 이를테면 서울이나 부산이나 인천 같은 도시로 마실을 한다든지, 시골집을 떠나 아이들 할머니 할아버지 뵈러 음성이나 일산으로 마실을 할 적에 비로소 신문이든 방송이든 마주합니다.


  사람들은 으레 묻습니다. 신문 안 읽고 방송 안 보면 사회 굴러가는 흐름을 어찌 아느냐고. 오늘날 같은 사회에서 신문이랑 방송 없이 지내면 바보가 되지 않느냐고.


  나는 빙긋빙긋 웃으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신문에 어떤 기사가 실리나요? 방송에 어떤 사람들이 나오나요? 신문에 실린 기사 가운데 하루 지난 뒤에도 떠오르는 기사가 있나요? 방송에 나온 연속극이나 새소식이나 연예인 수다 가운데 며칠 지나서 또렷이 되새기는 모습이 있나요? 아니, 아침에 읽은 신문글이 저녁이 되면 덧없는 지식조각이 되지 않나요? 아니, 저녁에 본 방송은 이듬날 되면 고스란히 옛 것이 되거나 낡은 것 되어 새로운 방송이 자꾸자꾸 더 낯간지럽게 흐르지 않나요?


  신문을 펴면 첫 쪽부터 언제나 정치꾼 얼굴이 큼지막하게 나옵니다. 그런 다음 미국 이야기가 몇 가지 나오고, 주식시세표가 나오며, 운동경기 이야기가 나오다가는 연예인 이야기 얼마쯤 나온 뒤, 누가 죽고 다쳤다느니, 누가 돈을 떼어먹었거나 누군가를 괴롭힌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문은 이와 같습니다. 신문은 우리 삶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방송도 엇비슷해요. 방송은 여기에 몇 가지 곁들이는데, 이른바 대중노래라든지 연속극이라든지 때때로 영화라든지 다큐멘타리라든지 나오기도 하지만, 한결같이 시청율 노리는 낯뜨거운 이야기가 그득그득합니다.


  신문을 읽는 사람이 외레 사회를 모르는 채 바보가 되지 않나요? 방송을 보는 사람이 오히려 사회와 멀어진 채 멍청이가 되지 않나요? 신문에는 ‘노동자가 왜 파업까지 하게 되는가’ 하는 대목을 밑뿌리 낱낱이 캐며 밝히지 않아요. 택시회사 일꾼이 사납금 때문에 얼마나 애먹는지, 택시회사는 사납금 제도로 돈을 얼마나 벌어들이는지, 이런저런 속깊은 이야기가 드러나지 않아요. 방송 새소식에서도 이와 같아요. 정치꾼 이야기를 할 적에도, 두 군데 커다란 정당 사람들 목소리만 담지, 정치를 아름다이 일구려 힘쓰는 사람들 이야기에는 귀퉁이 한쪽 자리조차 안 주기 일쑤예요.


  무엇보다, 신문이랑 방송은 온통 서울 이야기입니다. 부산이나 대구나 광주나 인천 이야기조차 ‘지방 소식’으로 다룰 뿐이에요. 작은도시 이야기는 끼어들 자리마저 없고, 시골 이야기는 아예 나오지 않아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신문이나 방송을 들출 일이 없어요.


  사회를 읽고 싶으면 사회를 읽으면 됩니다. 나 스스로 사회와 부대끼면서 내 눈썰미와 마음그릇으로 사회를 돌아보면 됩니다. 사회읽기란 나와 이웃이 지내는 마을이 어떻게 흐르는가를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바라보는 일이에요.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이나 논문이나 잡지로는 사회읽기에 한 가지 도움조차 주지 못해요. 내가 사회에 있을 때에 사회를 읽고, 내가 사회를 생각할 때에 사회를 읽어요.


  고흥 시골집을 떠나 인천으로 이틀 마실을 다녀오는 길에, 순천 기차역에 내려 김밥 두 줄을 사는데, 분식집 텔레비전에서 ‘북녘에서 로켓을 쏘았다. 북녘 가난한 주민 삶은 걱정하지 않는다. 로켓 개발비로 쓸 돈을 민생 살리는 데에 써라. 남녘 안보를 어지럽히는 나쁜 짓이다.’와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김밥 두 줄 받고 5500원을 치릅니다. 가방에 김밥통을 담습니다. 순천 버스역까지 천천히 걸어갑니다. 고흥으로 들어가는 시외버스를 탑니다. 시외버스는 국도를 달려 고흥으로 접어들고, 고흥 읍내에서 내리니 아주 한갓집니다. 짐이 많아 군내버스 말고 택시를 탑니다. 억새풀 흐드러지고 갈대밭 어여쁜 시골길 지나 우리 마을 어귀에 닿습니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지개를 켭니다. 아이들 모두 잠든 깊은 밤에는 홀로 마당으로 내려와 까만 하늘을 새삼스레 올려다봅니다. 쏟아지는 별을 가득 안습니다.


  남녘 대통령과 정치꾼과 기자와 지식인이 ‘걱정해 주는 북녘 민생’이란 무엇일까요. 남녘 대통령과 정치꾼과 기자와 지식인은 ‘남녘 민생 걱정’을 얼마나 하며 살까요. 남녘땅 고흥 나로섬에 지은 우주기지에서 ‘우주선에 붙일 로켓 추진장치’를 쏘려고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돈을 쏟아부었지만, 끝내 로켓 추진장치를 못 쏘고 끝났어요. 몇 조인지 몇 십 조인지 알 수 없는 돈을 우주개발 하겠다면서 쓴 남녘이에요.


  얼추 10조라고 쳐 보아요. 10조 원이라는 돈을 남녘 ‘민생’을 살펴 보듬는 데에 썼다고 하면, 우리들 남녘살이는 어떠한 모습으로 거듭날까요. 이른바 ‘4대강 살리기’를 ‘남녘사람 삶 살리기’를 하는 쪽으로 가닥잡았다면 우리들 남녘살이는 어떠한 빛깔로 환하게 빛날까요.


  이렇게 하니 잘못이고 저렇게 하니 글러먹는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회를 어떻게 읽겠느냐는 소리입니다. 남녘 과학자와 공무원이 ‘러시아 기술자’ 아닌 ‘북녘 기술자’를 받아들였으면, 한결 적은 돈을 들여 더 빨리 ‘로켓 추진 장치 쏘는 일’도 ‘뜻을 이루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는 동안 남북교류라든지 남북협력이라든지 남북통일이라든지, 더 따사롭고 슬기로우며 즐겁게 이루는 길을 걸었겠지요. 남녘과 북녘이 따사로이 손을 잡으면 국방비에 터무니없는 돈을 들일 까닭이 없고, 이 국방비는 ‘대학 무상교육’이라든지 ‘병원 무상시설’이라든지 ‘출판 무상지원’처럼, 교육과 복지와 문화를 북돋우는 아름다운 꿈을 이루는 멋스러운 길이 되리라 느껴요. 사회를 읽으려면, 신문이나 방송이라 하는 ‘안경’을 벗고, ‘내 눈’으로 내 삶을 사랑하면서 눈빛을 맑게 트면 돼요. 4345.12.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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