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른입니까 28] 학교읽기
― 가르치고 배우는 뜻

 


  학교에서는 무언가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무언가 꾸준히 배웁니다. 이리하여 아이들 어버이는 아이들을 학교에 넣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날마다 이런 이야기 저런 말을 듣습니다.


  슬기로운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더라도 슬기롭고, 슬기롭지 못한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더라도 슬기롭겠지요. 슬기로운 아이들은 학교를 안 다니더라도 슬기롭고, 슬기롭지 못한 아이들은 학교를 안 다니더라도 슬기롭지 못할 테고요.


  다시 말하자면, 학교는 아이들이 더 슬기롭도록 이끌지 못하고, 학교는 슬기롭지 못한 아이들을 일깨우지 못합니다. 학교는 무언가 가르치면서 모든 아이들을 똑같은 지식이 되도록 줄을 세웁니다.


  슬기로운 아이가 되건 슬기롭지 못한 아이가 되건, 이 아이들은 학교를 안 다닐 적에는 ‘저마다 다른 빛’입니다. 그런데, 학교를 다니고 보면 ‘서로 비슷하게 닮은 모습’으로 바뀝니다. 학교에서는 ‘바른 생활 규범’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모범생 규율’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머리카락과 옷차림과 말매무새 모두 똑같이 맞추도록 하는 틀이 있습니다.


  더구나, 이 나라 학교에서는 오랫동안 아이들을 때리고 거친 말을 퍼부었으며 돈을 걷었어요. 이 나라 학교에서는 아직도 아이들한테 주먹다짐을 하거나 모진 말을 들이붓는 어른이 있어요. 이름은 학교이지만 마치 군대처럼 아이들을 들볶아요. 이 나라 군대에서는 일제강점기 군국주의 군대처럼 주먹다짐과 얼차려와 막말이 아직도 떠도는데, 이 버릇이 학교로 고스란히 스며들어요. 학교를 다닌 나이에 따라 사람 사이에 금을 긋는데다가, 어느 학교를 다녔느냐를 놓고 사람 사이에 값을 매기기까지 해요.


  다 다른 고장에서 태어나고 다 다른 마을에서 살아가던 아이들이지만, 학교를 다닐 적부터 ‘서울 표준말’로 말씨를 바꾸어야 합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거나 바닷물 만지는 어버이한테서 태어난 아이도,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일하는 어버이한테서 태어난 아이도, 서로 똑같은 교과서를 들여다보고 똑같은 시험문제를 풀며 똑같은 웃학교로 나아가는 교육을 받도록 하는 학교입니다.


  얼핏 보면 ‘평등’이라 할 터이나, 곰곰이 살피면 아이마다 다르게 서린 빛을 누르거나 없애는 일입니다. 왜 아이들은 웃학교에 가야 할까요? 왜 아이들은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어야 할까요? 왜 아이들은 고향 말씨를 잃어야 할까요?


  학문을 해야 하는 뜻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초등학교는 왜 있는지 궁금합니다. 고등학교는 아이들한테 어떤 빛이 되고 어떤 꿈이 되며 어떤 사랑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은 사회에서 어떻게 지내야 하기에 학교를 다녀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특권을 누리도록 한다면 교육이 아닐 테지요. 그런데, 모든 아이들 다 다른 빛을 똑같이 틀에 박히게 내몬다면, 이 또한 교육이 아닐 테지요. ‘나다움’을 가르칠 수 있을 때에 교육이라고 느낍니다. 아이들 스스로 ‘나다움’을 깨닫도록 이끌 적에 비로소 교육이라고 느낍니다.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다른 마을에서 다 다른 보금자리를 일구면서 다 다른 삶을 즐겁게 누리도록 북돋울 수 있어야 바야흐로 ‘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하다고 느낍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얼거리가 아름다울 때에 교육이에요. 가르치고 배우는 삶이 아름다워야 교육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모습과 빛과 결이 아름다운 흐림일 때에 교육이지요.


  함께 나눌 뜻으로 법도 의학도 철학도 문학도 예술도 가르치면서 배우리라 느껴요. 서로 어깨동무하려는 꿈으로 밑지식을 가르칠 초등학교요 고등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느껴요.


  교과서를 가르칠 학교가 아닙니다. 아이들 스스로 ‘어떻게 살아야 즐거운가’ 하는 대목을 깨닫도록 가르칠 학교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옷과 밥과 집을 일구도록 도울 학교입니다. 도시에서는 도시 나름대로 삶길을 보여줄 학교요, 시골에서는 시골 나름대로 삶빛을 일깨울 학교입니다. 다 다른 아이들한테 다 다른 꿈과 사랑이 얼마나 즐겁고 아름다운가 하고 이야기하는 배움마당이자 어울림마당이 학교예요. 놀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놀며, 어깨동무하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이야기하는, 삶이 흐드러지는 꽃이 되는 터가 학교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뜻은 하나입니다. 즐겁게 살아가는 길을 느끼도록 하고 싶기에 가르치고 배웁니다. 사랑하며 살아가는 길을 누리도록 하고 싶기에 가르치고 배웁니다. 꿈꾸며 살아가는 빛을 환히 밝히고 싶기에 가르치고 배웁니다. 4346.10.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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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기사에 붙은 '전국 온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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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30] 날씨읽기
― 한국은 왜 아열대 날씨가 되는가

 


  한국에서 한여름에 40도를 넘어서는 데가 나타납니다. 한국이 온대 날씨 아닌 아열대 날씨로 바뀐다는 이야기는 퍽 예전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전부터 이런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사람들 살림살이는 달라지거나 제자리를 찾으려 하지 않았어요. 온대 아닌 아열대가 된다 하더라도 자동차는 늘어나기만 합니다. 고속도로와 고속국도는 끝없이 자꾸 닦습니다. 늘어나는 자동차는 배기가스를 더 많이 내뿜습니다. 고속도로와 고속국도는 시골마을 들과 숲과 멧골을 깎아서 닦습니다. 요즈음 고속도로와 고속국도는 아예 1자로 펴는 길인 터라, 높은 멧자락과 멧자락 사이에 까마득하게 다리를 놓고 굴을 파요. 요즈음 고속도로 한 곳은 지난날 고속도로 열 곳이 들과 숲과 멧골을 파헤치거나 무너뜨리는 크기와 엇비슷하달 만큼 끔찍한 막삽질입니다.


  들과 숲과 멧골이 무너지면, 사람들이 마실 숨이 나빠집니다. 푸른 숨결이 차츰 사라지지요. 자동차는 자꾸 늘고, 공장 또한 자꾸 늡니다. 아파트도 자꾸 늘며, 관광단지와 쇼핑센터와 백화점과 대형할인매장 또한 자꾸 늘어나요. 전기를 많이 쓰는 시설은 끊임없이 아주 빠르게 늘어납니다. 이에 발맞추어 발전소도 한꺼번에 엄청나게 새로 짓습니다. 발전소는 ‘도시 중심지’에서 가까우면 위험·위해시설이 된다 하기에 시골에다 짓고, 우람한 송전탑을 길게 이어 도시로 전기를 보냅니다.


  한국이 온대 날씨에서 아열대 날씨로 바뀌는 까닭을 모를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시골을 파먹으면서 도시가 커지고, 자동차 엄청나게 늘어나며, 전기 먹는 시설을 비롯해 아파트와 공장과 발전소를 어마어마하게 늘리니, 이렇게 달라지거나 뒤틀리는 삶터에 맞추어 날씨 또한 달라지거나 뒤틀립니다.


  날씨가 심술을 부리지 않습니다. 날씨는 사람들 삶을 고스란히 따릅니다. 부채 하나로 여름을 나던 지난날 사람들은 온대 날씨를 누렸어요. 아무리 한여름 뙤약볕이라 하더라도 시원스레 바람이 불었고, 나무그늘에서 땀을 식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한여름뿐 아니라 첫봄과 늦봄에도 시원스러운 바람을 쐬기 어려워요. 자동차 배기가스와 공장 매연이 스모그를 이루어 도시를 섬처럼 가둡니다. 스모그 무더기에 장마전선이 깃들면 빠져나오지 못하며 비를 왕창 퍼붓습니다. 옛날처럼 장마전선이 남녘과 북녘을 천천히 오르내리면서 골고루 비를 뿌리지 않아요. 막삽질로 들과 숲과 멧골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서울·경기·강원에 비를 퍼붓고 또 퍼붓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런 날씨를 어느 만큼 살필까요. 이런 날씨를 얼마나 헤아릴까요. 이런 날씨를 어떻게 느낄까요.


  너무 쉽게 ‘지구온난화’를 들먹이지는 않나요? ‘내가 도시 물질문명 누리는 탓’은 하지 않으면서 ‘인류가 모두 환경문제에 눈길을 안 두기 때문’이라고 둘러대지는 않나요? 자가용을 몰고, 에어컨을 돌리며, 온갖 공산품을 끝없이 사다가 쓰고 쓰레기로 버리는 나날을 되풀이하면서, 날씨가 왜 뒤틀리거나 흔들리는지, 밑뿌리를 캘 생각은 없지 않나요?


  ‘스스로 삶을 바꾸지 않는 사람 하나’가 모여 열이 되고 백이 되며,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이 됩니다. 그나마 한국 날씨가 온대에서 열대로 안 가고 아열대로 가는 까닭은, 이럭저럭 도시에서 ‘스스로 삶을 바꾸려고 애쓰는 사람 하나’ 있고, 이런 사람이 열 백 천쯤 있기 때문입니다. 자가용을 안 모는 사람이 아주 드물지만 어김없이 있고, 에어컨을 안 쓰는 사람이 매우 드물지만 꼭 있으며, 공산품을 함부로 안 쓰는 한편 쓰레기를 거의 안 내놓는 예쁜 삶 일구는 사람이 참 드물지만 사랑스레 있습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에는, 지구별 모든 목숨이 날씨를 읽었습니다. 2010년대 오늘날에는, 지구별 모든 목숨 가운데 사람만 날씨를 못 읽습니다. 옛날에는 개미도 나비도 벌도 제비도 사람도 날씨를 읽고 느끼며 알았어요. 오늘날에는 개미나 나비나 벌이나 제비는 날씨를 읽고 느끼며 알지만, 사람만큼은 날씨를 안 읽고 안 느끼며 안 알려 해요.


  날씨방송을 본대서 날씨를 알 수 없어요. 하늘을 보아야지요. 바람을 마셔야지요. 흙을 만지고, 풀과 나무를 어루만지며, 해와 달과 별을 두루 살필 때에 비로소 날씨를 알아요. 하늘과 바람과 흙과 해를 돌아보지 않으면 날씨를 느낄 수 없어요. 4346.8.1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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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25] 자전거읽기
― 자전거와 살아가는 즐거움이란

 


  나는 자전거를 타면서 대단히 많은 모습을 봅니다. 내 둘레 사람들은 나더러 자동차를 몰면 훨씬 멀리 더 빠르게 달릴 뿐 아니라, 책방마실을 하고 나서 짐칸에 책 거뜬히 싣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자전거를 달리며 마주하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모습이랑, 두 다리로 거닐며 누리는 아주아주 많은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우면서 반갑고 남다르구나 싶어서 자동차를 아예 생각하지 않습니다.


  몸이 많이 힘들면 택시를 불러서 탑니다. 택시는 참 너그럽지요. 부르면 달려오고, 가고 싶다는 데에 태워 주거든요. 택시삯이 비싸다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자동차 장만해서 보험삯 내고 기름값 치르며 굴리는 값을 생각하면 택시삯은 매우 싸요. 그러면 자전거는? 자전거는 아예 아무런 돈이 안 든다 할 만하지요.


  나는 세발도 네발도 아닌 두발로 달리는 자전거를 처음 몰던 느낌을 오늘까지도 또렷하게 아로새깁니다. 꽤 어린 나이였을 텐데, 작은 바퀴 둘을 떼고 두발로 자전거를 달리며 얼마나 들뜨고 설레며 기뻤는지 몰라요. 다만, 들뜸과 설렘과 기쁨만 생각하다가 그만 고꾸라져서 팔뚝이 아주 크게 까지고 찢어졌어요. 이마에서 피도 흘렀어요. 그런데, 이렇게 까지고 찢어졌어도, 두발자전거로 달리는 들뜸과 설렘과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그 뒤로는 두발자전거로만 달렸어요. 어머니가 말리셨지만 이듬날에도 또 두발자전거로 달렸고, 또 크게 고꾸라져서 다친 데가 더 찢어지고 피는 훨씬 많이 흘렀어요.


  오늘 나는 두 아이와 살아갑니다. 작은아이는 수레에 태우고 큰아이는 샛자전거에 태워, 앞에서 샛자전거와 수레를 끌고 두 아이를 태우며 달리는 자전거 발판을 밟자면 힘이 무척 많이 듭니다. 자전거 무게도 퍽 무겁고, 언덕길 오르자면 온몸에서 땀이 옴팡지게 쏟으면서 이마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서 길바닥을 적셔요. 그렇지만, 이런 자전거를 거의 날마다 탑니다.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을 거의 날마다 누려요.


  자전거로 면소재지나 읍내 언저리를 달리고 보면, 시골길에서는 온갖 죽음을 마주합니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곧 알아채요. 길바닥에는 자동차에 치여 죽은 멧짐승과 뱀과 개구리와 나비와 잠자리와 사마귀와 메뚜기와 달팽이와 개미뿐 아니라, 너구리도 오소리도 삵도 제비도 비둘기도 박새도 소쩍새도 있어요. 다람쥐도 고라니도 자동차에 치여 죽습니다. 이 모든 슬픔을 자전거를 몰며 더 끔찍하게 느껴요. 아마, 자동차 모는 분들은 모를 텐데, 자전거로 달리거나 두 다리로 거닐다 보면, 길바닥에 자동차에 치여서 죽어 날개가 바람 따라 팔랑거리는 나비 주검 되게 많아요. 자동차에 밟힌 개구리와 개미는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샛자전거에 앉은 큰아이는 아버지를 보며 “아버지, 저기 밟지 말아요!” 하고 먼저 알아채서 외치기도 하지요.


  자동차를 장만하면서 자전거를 함께 장만하는 어른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자동차를 장만할 적에 이것저것 옵션 한두 가지쯤 줄여 백만 원쯤으로 자전거 한 대 함께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어른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생각을 기울여 보면, 자동차 몰면서 한 달 기름값 십만 원쯤 아끼면 한 해에 백이십만 원을 모아 ‘좋은 자전거’ 한 대 장만할 수 있어요. 한 달 기름값 오만 원쯤 아끼면 한 해에 육십만 원을 모아 ‘썩 나은 자전거’ 한 대 장만할 수 있어요. 그래도, 이렇게나마 마음을 쏟는 어른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어요.


  어떻게 살아갈 때에 아름다울까요? 이 길은 어떻게 달릴 때에 즐거울까요?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달리면 가장 빨리 갈 수 있나요? 이곳에서 저곳으로 매우 빠르게 달릴 수 있으면 무엇이 좋을까요?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자전거로 삶을 노래하는 이웃을 만나고 싶습니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자전거로 기쁘게 나들이 누리는 아이들을 마주하고 싶습니다. 4346.7.2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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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13-12-14 16:46   좋아요 0 | URL
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평소에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당신은 어른입니까 27] 정치읽기
― 개혁이나 혁명을 어떻게 이루는가

 


  프랑스혁명을 다룬 책을 읽다가 자꾸 책을 덮습니다. 속이 메스껍기 때문입니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같이 ‘임금이 누군가를 죽이는’ 이야기라든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서 ‘백성을 괴롭히던 사람을 붙잡아 죽이는’ 이야기로구나 싶습니다. 아주 쉽게 대단히 자주 ‘사람 머리를 칼로 잘라 창에 꽂고 흔들며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런 죽음수렁이 혁명일까요. 누가 누구를 죽여야 혁명이 이루어지나요. 이런저런 사람은 밥을 먹을 값어치 없으니 목아지를 뎅겅 잘라 죽이면서 손뼉치고 낄낄거리며 잔치를 벌여야 혁명인가요.


  평화나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은 몇몇 사람이 밥을 혼자 차지한 채 꽁꽁 숨기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전두환·노태우 추징금’을 못 걷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지요. 이 나라 여느 사람들이 카드빚 10만 원만 밀려도 신용불량자가 되고, 100만 원이 없어 압류를 쉽게 받기도 하는데, 돈 한 푼 없다고 하는 옛 대통령은 거들먹거리면서 잘 살아가요. 이들은 아무 거리낌이 없어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정치라 하는 얼거리가 있으니 바보스러운 일이 벌어집니다. 임금도 대통령도 굳이 있어야 할 까닭 없어요. 대표나 우두머리가 꼭 있어야 할 까닭 없어요. 평화와 평등을 바라는 사회에 어떻게 대표나 우두머리가 있겠어요. 모든 사람이 저마다 대표이면서 우두머리예요.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저마다 딱 하나뿐인 목숨이면서, 저마다 아주 밝게 빛나는 숨결이에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뜻있고 값있는 빛인 터라, 누구나 대표이면서 우두머리입니다.


  잘 생각해 보셔요. 임금이나 대통령은 일을 하지 않아요. 일을 하는 척하지만, 정작 아무 일을 하지 않아요. 장관이나 벼슬아치도 일을 하지 않아요. 모두 일을 하는 척할 뿐입니다. 관리나 공무원 모두 일을 하지 않아요. 다들 일을 하는 척일 뿐이에요.


  일이란 무엇일까요? 돈을 버는 직업이 일인가요? 아닙니다. 밥과 옷과 집을 빚을 때에 비로소 일입니다. 돈을 벌어 밥과 옷과 집을 장만한다고 하지만, 돈이란 밥도 옷도 집도 아니에요. 돈은 돈일 뿐입니다.


  궁월이나 청와대나 국회의사당 짓느라 억수로 큰 돈이나 품이나 겨를을 들일 까닭이 없습니다. 임금은 임금 스스로 논밭을 일구어 이녁 밥을 얻어야 합니다. 대통령은 대통령 스스로 실을 잣고 베틀을 밟고 바느질을 해서 옷을 얻어야 합니다.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세무사도 모두 스스로 땅을 일구고 실을 훑으며 나무를 만져야 합니다.


  정치가 무엇인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정치란, 일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일을 하는 사람들을 억누리는 권력기구입니다.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짓지 않는 사람들이 정치를 한들, 사회나 나라를 올바로 세울 수 없습니다. 정치꾼은 밥을 어떻게 먹나요? 남이 해 주는 밥을 먹나요? 그러면, 정치꾼 몫만큼 누가 더 일을 해야 하지요? 정치꾼이 입는 옷은? 국회의원 같은 이들이 타는 자가용은 누가 일해서 굴리도록 하지요?


  세금을 어디에 쓰는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세금 가운데 아주 큰 몫은 군대를 거느리는 데에 쓰는데, 군대 거느리는 자리보다 ‘정치꾼과 공무원 품삯’ 치르는 데에 세금을 더 크게 씁니다. 다시 말하자면, 대통령이나 정치꾼이나 공무원을 모시려고 세금을 걷는 꼴입니다. 이들 품삯으로 세금이 어마어마하게 나가지요. 이들이 직업을 얻어 아침저녁으로 다니는 공공기관 건물을 짓느라 세금을 어마어마하게 쓰지요. 이들이 공공기관 건물에서 서류를 쓰고 컴퓨터를 만지며 낮에도 전기불 켜고 에어컨과 난방기 돌리느라 세금을 엄청나게 씁니다.


  어떤 정부기관이건 따로 있을 일이 없습니다. 어떤 공공기관이건 따로 세울 일이 없습니다. 어디에서나 조그맣게 마을이 이루어지면 됩니다. 마을마다 숲을 이루고 냇물이 흐르며 나무가 자라면 됩니다. 마을마다 오순도순 어울려 잔치를 벌이고 품앗이를 하면 됩니다.


  청와대 헐고 숲을 이루어야지요. 세무소와 법원 허물어 밭을 이루어야지요. 경복궁도 광화문도 굳이 문화재로 삼지 않아도 돼요. 들이 되고 냇물이 흐르도록 하면 돼요.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니 나라살림이 버겁습니다. 흙을 만지지 않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으니 이 나라가 어지럽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시골에서 흙을 만져 풀과 열매와 곡식 돌보는 사람이 없다면, 정치이고 사회이고 문화이고 경제이고 과학이고 몽땅 무너집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들이 있기에 정치를 하느니 사회를 지키느니 문화를 닦느니 경제를 세우느니 과학을 밝히느니 교육을 하느니 하고 말합니다.


  가만히 헤아려 봐요. 스스로 흙을 만지며 조그맣게 이루는 마을살이가 바로 정치요 사회이며 문화이고 과학이면서 교육입니다. 메주를 띄우고 간장과 된장을 담그던 삶이 과학이자 문화이며 교육입니다. 논일 밭일 숲일 모두 교육이고 정치이며 사회입니다. 품앗이와 두레와 잔치가 바로 정치이자 문화이고 교육입니다.


  뜻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대서 개혁이나 혁명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총칼을 들고 뒤집어엎어야 혁명이나 개혁이 되지 않아요. 서로서로 흙을 만질 때에 개혁도 되고 혁명도 되어요. 다 함께 스스로 가장 아름다운 보금자리 일구면서 숲을 누릴 적에 평화와 평등 이루어져요. 4346.7.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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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26] 놀이터읽기
― 아이하고 놀고 싶다면

 


  아이하고 놀고 싶다면 놀면 됩니다. 아이 얼굴을 쳐다보고, 아이 손을 잡으며, 아이랑 나란히 뒹굴면 됩니다.


  놀이공원에 가는 일이 놀이가 아닙니다. 놀이공원에 간다면 ‘놀이기구 타러 나들이’를 가는 셈이지, 놀이가 아닙니다. 바깥밥을 먹으러 나간다든지, 놀이터에 간대서 놀이가 아니에요. 함께 놀아야 놀이입니다.


  내가 1975년에 태어나 자란 인천에도 놀이터가 있었습니다. 그무렵 인천에 있던 놀이터는 제법 컸습니다. 아이들이 많으니 놀이터도 클밖에 없을는지 모르지만, 예전과 요즈음은 놀이터를 마련하는 어른들 생각이 사뭇 다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전에는 이런저런 놀이기구가 많이 없더라도 좋아요. 널따란 모래밭이나 흙땅이기만 하면 놀이터입니다. 시멘트땅이나 아스팔트땅 아닌 데라면 놀이터예요.


  아이들은 시멘트땅이나 아스팔트땅조차 바닥에 분필이나 돌로 금을 그으며 온갖 놀이 즐기기도 하지만, 참으로 빛나는 아이들 놀이는 바로 모래밭이나 흙땅이나 숲이나 들이나 냇가에서 이루어집니다.


  놀이기구 아닌 흙을 만지고 나무와 나뭇가지를 만지며, 풀잎과 꽃잎을 만지면서 아이들이 놉니다. 놀이기구라 한다면, 철봉에 매달리고 그네를 밟으며 미끄럼틀과 구름사다리를 원숭이처럼 척척 붙어서 옮겨다니면서 놉니다.


  넘어지거나 자빠지더라도 머리가 안 깨질 흙이나 모래로 이루어진 터가 놀이터입니다. 생각해 보셔요. 풀밭과 숲에서 아이들이 넘어진들 머리가 깨질 일 없습니다. 냇가에서라면 돌에 머리를 박을는지 모르는데, 잘 살피면 아이들은 냇가에서 외려 잘 안 넘어집니다. 냇가에서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지가 젖겠지요.


  손과 발이 흙과 모래와 풀을 느끼면서 아이들이 자랍니다. 손과 발로 나무를 타고 그네 줄을 붙잡으며 아이들이 큽니다.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마시면서 아이들이 자랍니다. 저희끼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사이 아이들이 큽니다.


  놀이터쯤 되려면, 아이들이 서너 시간 쉬지 않고 놀 만한 데여야 놀이터입니다. 너덧 시간 대여섯 시간,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잊고, 배고픔마저 잊으면서 폭 빠져들 만한 데일 때에 놀이터입니다.


  그럴듯한 놀이기구 덩그러니 놓는대서 놀이터가 되지 않아요. 이런 데는 ‘놀이기구터’예요. ‘놀이터’라 말할 수 없어요. 놀이기구 잔뜩 놓은 놀이기구터에서 아이들이 놀지 못합니다. 궁금하다면 놀이터와 놀이기구터에 아이들을 풀어놓아 보셔요.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부를 때’까지 하염없이 새 놀이를 빚으면서 놉니다. 아이들은 놀이기구터에서 몇 분쯤 이것저것 만지고 타고 하다가 이내 따분해 합니다.


  놀이기구터에는 새로움이 없습니다. 놀이기구터에는 아이들 스스로 생각날개 펼치도록 이끌 새로움이 없습니다. 어른들이 꽉 짜 놓은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놀이기구터에서 아이들이 할 놀이란 없습니다. 무엇을 새로 빚을 수 있나요. 아이들이 놀이기구터에서 무엇을 새로 빛낼 만한가요.


  들판에 나뭇가지 굴러다녀도 이 나뭇가지를 놀잇감 삼아 수많은 놀이를 새롭게 빚는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놀이기구터에는 나뭇가지 없어요. 돌멩이도 없어요. 시늉으로만 바닥에 깐 모래밭에 아무나 아무렇게나 들락거리면, 이런 모래밭에서 아이들이 모래놀이 할 수 없어요. 게다가 놀이기구터 바닥을 모래조차 아닌 인공소재로 깔면, 이런 데에서 아이들이 맡거나 느낄 냄새는 화학약품이 되고 맙니다.


  어른들 스스로 즐겁게 놀며 어울리는 삶이라 한다면, 아이들 놀이터를 엉터리로 만들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어른들 스스로 즐겁게 놀 줄 모르고, 즐겁게 놀지 않는 탓에, 아이들 놀이터를 바보스레 만드는구나 싶어요.


  아이하고 놀고 싶다면 아이하고 신나게 뛰놀아요. 아이들하고 놀이기구터에 엉금엉금 찾아가지 말고, 놀이기구터에 갔더라도 아이들 스스로 놀이기구를 만지도록 하셔요. 이건 어떻게 타고 저건 어떻게 타라고 하나하나 말하지 마셔요. 아이들 스스로 느끼고 생각해서 타도록 하셔요. 그나마 놀이기구터에서조차 아이들 스스로 생각을 짓도록 이끌지 못하면,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야 하나요. 놀이터는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을 빛내어 놀이를 찾아내어 개구지게 몸을 놀리면서 무럭무럭 자라도록 이끄는 배움터요 삶터이자 만남터예요. 이 놀이터에 어른들 섣불리 끼어들지 말 노릇이에요. 아이와 똑같이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고 할 마음이 아니라면, 놀이터에 어른들 함부로 발을 들이지 마셔요.


  걸리적거린답니다. 다른 아이들 노는데, 어른들이 당신 아이 손을 붙잡고 그네를 태우느니 미끄럼틀을 태우느니 하면, 참 걸리적거린답니다. 아이들과 ‘놀아’야지, ‘주말에 놀아 준다’는 생각으로 놀이기구터에 찾아가지 마셔요. 아이들도 재미없어요. 어른인 당신도 재미없지요? ‘아이들과 놀아 주려’고 하니 얼마나 따분하겠어요?


  놀이는 놀이터나 놀이기구터에 가야 할 수 있지 않아요. 놀이는 언제 어디에서나 할 수 있어요. 집에서도 방에서도 이부자리에서도 하지요. 방바닥에서도 마룻바닥에서도 얼마든지 하는 놀이예요. 아이들과 즐길 놀이를 어른들도 생각해야지요. 아이들이 까르르 웃고 떠들며 노래하도록 북돋우는 놀이를 어른들도 생각을 빛내어 하나하나 새롭게 일구어야지요. 4346.7.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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