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른입니까 31] 어버이읽기
― 물려받은 사랑과 삶과 넋 물려주기

 


  엊저녁 아이들이 남긴 밥을 새벽에 먹습니다. 이 찬밥을 치워야 아침에 새밥 짓습니다. 아이들 밥그릇에 남은 밥을 치워야, 아이들 밥그릇을 정갈하게 씻고 헹구어 다시 밥상에 올립니다.


  아이들은 놀이꾼입니다. 잠자리에서도 놀고, 마실을 가는 군내버스에서도 놀며, 머리를 감거나 몸을 씻을 적에도 놉니다. 아이들은 놀이지기입니다. 밥을 먹다가도 놀며, 놀다가도 새롭게 놀 뿐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 안겨 새로운 놀이를 찾아냅니다.


  어버이란 아이들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버이란 아이를 낳거나 돌보면서 사랑을 물려주는 사람입니다. 어버이란 어버이 되기 앞서까지 아이로 지내면서 다른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은 사람입니다. 곧, 어버이라는 자리에 서면, 이제껏 받은 사랑을 새로운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여태 누린 즐거운 삶을 아이한테 새로우면서 즐겁게 물려줄 적에 어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많대서 어버이가 아닙니다. 아이를 낳았기에 어버이가 아닙니다. 그동안 아름답게 받은 사랑을 하나하나 깨닫고, 이렇게 깨달은 사랑을 아이들한테 차근차근 따사롭고 넉넉하게 돌려주거나 나눌 수 있을 때에 어버이입니다. 그동안 즐겁게 누린 삶을 찬찬히 헤아리면서, 이렇게 헤아린 삶을 아이들이 씩씩하고 튼튼하게 가꾸도록 이끌 수 있을 때에 어버이입니다.


  새벽에 엊저녁 아이들 밥을 마저 먹어서 치웁니다. 아이들 밥그릇에 물을 받습니다. 아침에 밥을 끓이면서 설거지를 해야지요. 아이들 오줌그릇을 비우러 마당으로 내려서며 밤하늘 별을 올려다봅니다. 아직 새벽이 이르고, 곧 섣달이며 그믐달에 가까우니, 까만 하늘에 초롱초롱 빛나는 별이 새하얗습니다. 아이들 마음이란, 이 별빛처럼 초롱초롱 빛나겠지요. 어버이라는 사람은 아이들 마음이 언제나 초롱초롱 빛나면서 환하게 따숩도록 북돋우는 길을 걷는다 하겠지요.


  날마다 아이들 옷을 갈아입히고, 몸을 씻기며 손발을 살핍니다. 날마다 아이들과 살을 비비고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아이들이 보고 듣고 배울 것을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맞아들이고 받아들일 삶을 돌아봅니다. 아이들이 먹을 밥이란 어른이 함께 먹을 밥입니다. 아이들이 입을 옷이란 어른이 함께 입을 옷입니다. 아이들이 살아갈 집이란 어른이 함께 살아갈 집입니다. 아이들이 자랄 마을이란 어른이 함께 자라며 어깨동무할 마을입니다.


  아이한테만 주지 않습니다. 아이한테 주기 앞서 어버이가 먼저 살피고 누리며 생각합니다. 아무 책이나 아이한테 건네지 않습니다. 아이한테 건네기 앞서 어버이가 먼저 살피고 읽으며 생각합니다. 어버이부터 스스로 즐겁게 읽으며 누린 책일 때에 아이한테 건넬 수 있습니다. 어버이부터 스스로 마음이 북받치거나 즐겁구나 하고 느낀 책일 때에 아이를 무릎에 앉혀 읽어 줄 수 있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몫은 어머니 혼자 맡지 않습니다. 아이는 어머니 혼자 못 낳습니다. 아이는 아버지 혼자 낳을 수도 없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둘이 있어 아이를 낳듯, 어머니와 아버지 둘이 아이들한테 사랑을 고이 물려줄 때에 비로소 어버이 몫을 맡는다 말합니다.


  돈만 버는 사람이라면 돈쟁이가 될 뿐이에요. 밥만 지어 챙긴다면 밥순이가 될 뿐입니다. 집살림 꾸리려 돈은 돈대로 벌더라도, 아이들과 누리는 삶을 생각하면서, 내가 이제까지 우리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사랑을 떠올리고, 아이한테 새롭게 사랑 한 타래 더 얹은 꿈을 물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받아먹으며 자라는 아이입니다. 교육을 받거나 훈련을 받는 아이가 아닙니다. 꿈을 받아먹으며 크는 아이입니다. 한글과 영어와 한자를 일찌감치 떼어야 하는 아이가 아닙니다. 삶을 깨달아 아름답게 가꿀 아이입니다. 대학생이 되거나 회사원이 되어야 할 아이가 아닙니다.


  아이를 아름답게 돌보고 싶다면, 어버이는 어버이 삶부터 아름답게 돌보면 됩니다. 아이를 사랑스레 보살피고 싶으면, 어버이는 어버이 삶부터 사랑스레 보살피면 됩니다. 아이한테 베풀거나 나누고 싶은 무언가 있다면, 바로 어버이 스스로 이러한 무언가를 즐겁게 누리면서 시나브로 아이한테 물려주면 돼요. 어버이 마음이 아이 마음 되어요. 아이 마음은 다시 어버이 마음이 됩니다. 어버이와 아이는 마음과 마음으로 사귀면서 활짝 웃는 한솥밥지기입니다. 4346.11.3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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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18] 전기읽기
― 아파트와 청와대 옆에 발전소를

 


  전기란, 도시사람 도시살이를 지키도록 하는 물질문명 밑바탕입니다. 도시에 몰려들어 살아가는 사람이 워낙 많기에, 이 도시를 지키도록 하려면 전기를 어마어마하게 써야 합니다. 아파트와 건물에서 전기를 쓰고, 지하철에서 전기를 쓰며, 지하상가에서 전기를 씁니다. 그리고, 도시사람 쓰는 물건을 공장에서 척척 찍어낼 뿐 아니라, 도시 물질문명 지키도록 물건을 이웃나라와 사고팔려면 또 전기를 끝없이 만들어서 써야 합니다.


  도시가 서기 때문에 커다란 발전소를 지어야 합니다. 도시를 자꾸 늘리려 하기 때문에 커다란 발전소는 자꾸 늘어야 합니다. 아파트를 더 세우고 고속도로를 더 닦으며 공장을 더 돌려야 하니까 발전소를 끝없이 늘려야 합니다.


  발전소는 도시 언저리에 안 짓습니다. 발전소 매연과 공해와 전자파가 워낙 사람한테 안 좋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애써 도시로 끌어모았는데, ‘도시 주거 환경’이 나쁘다면 사람들이 떼로 일어나서 손가락질을 할 테지요. 그러니까,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달래거나 다독일 뜻으로 도시에 발전소를 안 지어요. 도시에 있던 공장도 도시 바깥으로 내보내며, 도시사람이 버리는 쓰레기를 치울 곳이랑 도시사람 쓰는 석유를 다루는 공장도 몽땅 도시하고는 아주 먼 시골에 짓습니다.


  도시사람이건 시골사람이건 밥을 먹습니다. 밥은 시골에서 얻습니다. 쌀과 다른 곡식을 중국이나 베트남이나 미국에서 사다 먹는다 하더라도, 그 나라 시골이 있어야 흙을 일구어 쌀과 여러 곡식을 얻어요. 시골이 없다면 능금도 복숭아도 배도 포도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도시를 키우려고 시골을 죽입니다. 도시를 살린다며 시골을 망가뜨리거나 더럽힙니다. 도시 물질문명을 지킨다면서 도시에 발전소를 안 짓고 도시에 있던 공장을 시골로 보내는 일이란, 도시사람 스스로 나쁜 밥이랑 농약·비료·항생제·화학첨가물 그득한 가공식품만 먹겠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도시사람 쓸 전기를 시골에 발전소 지어서 얻으면 얻을수록, 시골에 우람한 송전탑 서면 설수록, 시골을 망가뜨리는 꼴이 되고, 시골 숲과 들과 보금자리를 어지럽히는 짓이 되어, 시골과 함께 도시가 흔들리거나 무너질밖에 없습니다.


  핵발전소뿐 아니라 화력발전소 모두 도시 한복판에 서야 옳습니다. 공장과 쓰레기매립지나 하수처리장 모두 도시 한복판에 놓아야 옳습니다. 식품공장과 맥주공장과 자동차공장과 석유화학공장과 유리공장과 제지공장과 반도체공장 모두 도시 한복판에 올려야 옳습니다. 도시사람은 공장에서 나오는 매연과 폐수와 방사능과 전자파가 어떠한가를 제대로 모릅니다. 제대로 모르니, 스스로 삶으로 안 겪으니, 하나도 깨닫지 못합니다. 물꼭지 틀면 물 콸콸 쓸 수 있는데, 수도물 이으려고 시골 여러 마을 물에 잠기도록 하고 너른 숲 망가뜨리는 짓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수도물이란 문명이 아니라 ‘문명 파괴’요 ‘환경 재난’입니다. 전기란 문화가 아니라 ‘문명 몰살’이자 ‘환경 재앙’입니다.


  전기를 쓴다 하더라도, 왜 집집마다 집열판 두어 매연도 공해도 없이 전기를 스스로 만들어 쓰도록 하지 않을까요? 전기를 쓰려면 가장 깨끗하고 가장 올바르며 가장 아름다운 전기를 저마다 스스로 만들어서 써야 하지 않나요?


  발전소 짓는 돈, 한국전력이라는 커다란 회사를 꾸리는 돈, 전봇대와 송전탑 세우는 돈, 전깃줄 끝없이 잇는 돈, 이런 돈 저런 돈 모두 따져 보셔요. 도시사람이 ‘발전소를 도시와 멀리 떨어진 시골에 짓느라 들이는 돈’을 헤아려 보셔요. 커다란 발전소를 지어 전기를 뽑은 뒤에 우람한 송전탑과 전깃줄을 잇고 잇느라 드는 돈을 가누어 보셔요.


  온 나라 모든 살림집에 집열판 붙여서 전기 스스로 빚어서 쓰도록 하는 데에 드는 돈이 오히려 아주 적게 듭니다. 값조차 쌉니다. 게다가 공해도 매연도 없습니다. 전깃줄이나 전봇대 어지러이 서지 않을 뿐 아니라, 송전탑 걱정조차 없습니다. 발전소를 돌린다며 우라늄을 만지거나 석유나 석탄을 땔 걱정마저 없습니다. 발전소 폐기물조차 하나 없지요. 그러나, 공공기관이라 일컫는 정부 조직이나 재벌회사는 돈벌이(세금)를 하고자, 사람들 여느 살림집에 집열판 붙이는 길을 걷지 않습니다. 사람들 또한 전기를 어떻게 써야 즐겁고 아름다우며 올바를까 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발전소를 지어야 한다면 아파트 옆에 지어야 합니다. 청와대 옆에도 발전소를 지어야 합니다. 안전과 환경에 걱정이 없다면 마땅히 아파트와 청와대 옆에 핵발전소와 화력발전소를 나란히 지을 노릇입니다. 핵폐기물처리장은 미대사관 옆에 지으면 됩니다. 안전하고 환경을 더럽히지 않는다 하니까요.


  더 곰곰이 살피면, 사람들 스스로 흙을 잊기에 전기를 아무렇게나 씁니다. 스스로 흙하고 동떨어진 채 살면서, 밥과 옷과 집이 모두 흙에서 비롯하는 줄 잊었으니, 자꾸 쓰레기를 낳는 물질문명에 기댑니다. 물질문명을 누릴 적에도 아름답게 즐기며 깨끗하게 돌보는 길하고는 멀어집니다. 흙에서 나온 것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석유와 석탄도 흙에서 나온 그대로 온갖 공해와 매연을 이 땅에 드리웁니다. 흙에서 얻은 쌀과 곡식과 열매는 사람들 몸을 거쳐 똥오줌 되어 다시 흙을 살리는 거름 구실 하지만, 도시에서는 이를 몽땅 생활쓰레기로 다룹니다.


  흙에서 나온 그대로 흙으로 갑니다. 흙에서 뽑아낸 쇠붙이로 전쟁무기 만들면, 이 땅에는 전쟁이 판칩니다. 흙에서 얻은 나무로 종이를 만들어 책을 엮으면, 이 책에는 나무내음이 감돌면서 사람들한테 아름다운 빛을 이야기 한 자락으로 들려줍니다. 흙에서 우라늄 캐내면 엄청난 방사능이 지구별 곳곳에 퍼지지요. 흙에서 다이아몬드를 캐내거나 금을 캐내니, 사람들 눈알이 빙빙 돌아 버렸습니다. 흙에서 무엇을 캐내렵니까. 흙에서 캐낸 것을 어떻게 쓰며 흙에 무엇을 돌려주렵니까. ‘밀양 송전탑’을 말하기 앞서 ‘우리 집 전기’부터 생각할 수 있어야, 무엇보다 ‘내 손으로 만질 흙’을 살필 수 있어야, 비로소 ‘어른’입니다. 4346.11.1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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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28] 학교읽기
― 가르치고 배우는 뜻

 


  학교에서는 무언가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무언가 꾸준히 배웁니다. 이리하여 아이들 어버이는 아이들을 학교에 넣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날마다 이런 이야기 저런 말을 듣습니다.


  슬기로운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더라도 슬기롭고, 슬기롭지 못한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더라도 슬기롭겠지요. 슬기로운 아이들은 학교를 안 다니더라도 슬기롭고, 슬기롭지 못한 아이들은 학교를 안 다니더라도 슬기롭지 못할 테고요.


  다시 말하자면, 학교는 아이들이 더 슬기롭도록 이끌지 못하고, 학교는 슬기롭지 못한 아이들을 일깨우지 못합니다. 학교는 무언가 가르치면서 모든 아이들을 똑같은 지식이 되도록 줄을 세웁니다.


  슬기로운 아이가 되건 슬기롭지 못한 아이가 되건, 이 아이들은 학교를 안 다닐 적에는 ‘저마다 다른 빛’입니다. 그런데, 학교를 다니고 보면 ‘서로 비슷하게 닮은 모습’으로 바뀝니다. 학교에서는 ‘바른 생활 규범’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모범생 규율’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머리카락과 옷차림과 말매무새 모두 똑같이 맞추도록 하는 틀이 있습니다.


  더구나, 이 나라 학교에서는 오랫동안 아이들을 때리고 거친 말을 퍼부었으며 돈을 걷었어요. 이 나라 학교에서는 아직도 아이들한테 주먹다짐을 하거나 모진 말을 들이붓는 어른이 있어요. 이름은 학교이지만 마치 군대처럼 아이들을 들볶아요. 이 나라 군대에서는 일제강점기 군국주의 군대처럼 주먹다짐과 얼차려와 막말이 아직도 떠도는데, 이 버릇이 학교로 고스란히 스며들어요. 학교를 다닌 나이에 따라 사람 사이에 금을 긋는데다가, 어느 학교를 다녔느냐를 놓고 사람 사이에 값을 매기기까지 해요.


  다 다른 고장에서 태어나고 다 다른 마을에서 살아가던 아이들이지만, 학교를 다닐 적부터 ‘서울 표준말’로 말씨를 바꾸어야 합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거나 바닷물 만지는 어버이한테서 태어난 아이도,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일하는 어버이한테서 태어난 아이도, 서로 똑같은 교과서를 들여다보고 똑같은 시험문제를 풀며 똑같은 웃학교로 나아가는 교육을 받도록 하는 학교입니다.


  얼핏 보면 ‘평등’이라 할 터이나, 곰곰이 살피면 아이마다 다르게 서린 빛을 누르거나 없애는 일입니다. 왜 아이들은 웃학교에 가야 할까요? 왜 아이들은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어야 할까요? 왜 아이들은 고향 말씨를 잃어야 할까요?


  학문을 해야 하는 뜻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초등학교는 왜 있는지 궁금합니다. 고등학교는 아이들한테 어떤 빛이 되고 어떤 꿈이 되며 어떤 사랑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은 사회에서 어떻게 지내야 하기에 학교를 다녀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특권을 누리도록 한다면 교육이 아닐 테지요. 그런데, 모든 아이들 다 다른 빛을 똑같이 틀에 박히게 내몬다면, 이 또한 교육이 아닐 테지요. ‘나다움’을 가르칠 수 있을 때에 교육이라고 느낍니다. 아이들 스스로 ‘나다움’을 깨닫도록 이끌 적에 비로소 교육이라고 느낍니다.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다른 마을에서 다 다른 보금자리를 일구면서 다 다른 삶을 즐겁게 누리도록 북돋울 수 있어야 바야흐로 ‘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하다고 느낍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얼거리가 아름다울 때에 교육이에요. 가르치고 배우는 삶이 아름다워야 교육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모습과 빛과 결이 아름다운 흐림일 때에 교육이지요.


  함께 나눌 뜻으로 법도 의학도 철학도 문학도 예술도 가르치면서 배우리라 느껴요. 서로 어깨동무하려는 꿈으로 밑지식을 가르칠 초등학교요 고등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느껴요.


  교과서를 가르칠 학교가 아닙니다. 아이들 스스로 ‘어떻게 살아야 즐거운가’ 하는 대목을 깨닫도록 가르칠 학교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옷과 밥과 집을 일구도록 도울 학교입니다. 도시에서는 도시 나름대로 삶길을 보여줄 학교요, 시골에서는 시골 나름대로 삶빛을 일깨울 학교입니다. 다 다른 아이들한테 다 다른 꿈과 사랑이 얼마나 즐겁고 아름다운가 하고 이야기하는 배움마당이자 어울림마당이 학교예요. 놀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놀며, 어깨동무하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이야기하는, 삶이 흐드러지는 꽃이 되는 터가 학교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뜻은 하나입니다. 즐겁게 살아가는 길을 느끼도록 하고 싶기에 가르치고 배웁니다. 사랑하며 살아가는 길을 누리도록 하고 싶기에 가르치고 배웁니다. 꿈꾸며 살아가는 빛을 환히 밝히고 싶기에 가르치고 배웁니다. 4346.10.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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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기사에 붙은 '전국 온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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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30] 날씨읽기
― 한국은 왜 아열대 날씨가 되는가

 


  한국에서 한여름에 40도를 넘어서는 데가 나타납니다. 한국이 온대 날씨 아닌 아열대 날씨로 바뀐다는 이야기는 퍽 예전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전부터 이런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사람들 살림살이는 달라지거나 제자리를 찾으려 하지 않았어요. 온대 아닌 아열대가 된다 하더라도 자동차는 늘어나기만 합니다. 고속도로와 고속국도는 끝없이 자꾸 닦습니다. 늘어나는 자동차는 배기가스를 더 많이 내뿜습니다. 고속도로와 고속국도는 시골마을 들과 숲과 멧골을 깎아서 닦습니다. 요즈음 고속도로와 고속국도는 아예 1자로 펴는 길인 터라, 높은 멧자락과 멧자락 사이에 까마득하게 다리를 놓고 굴을 파요. 요즈음 고속도로 한 곳은 지난날 고속도로 열 곳이 들과 숲과 멧골을 파헤치거나 무너뜨리는 크기와 엇비슷하달 만큼 끔찍한 막삽질입니다.


  들과 숲과 멧골이 무너지면, 사람들이 마실 숨이 나빠집니다. 푸른 숨결이 차츰 사라지지요. 자동차는 자꾸 늘고, 공장 또한 자꾸 늡니다. 아파트도 자꾸 늘며, 관광단지와 쇼핑센터와 백화점과 대형할인매장 또한 자꾸 늘어나요. 전기를 많이 쓰는 시설은 끊임없이 아주 빠르게 늘어납니다. 이에 발맞추어 발전소도 한꺼번에 엄청나게 새로 짓습니다. 발전소는 ‘도시 중심지’에서 가까우면 위험·위해시설이 된다 하기에 시골에다 짓고, 우람한 송전탑을 길게 이어 도시로 전기를 보냅니다.


  한국이 온대 날씨에서 아열대 날씨로 바뀌는 까닭을 모를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시골을 파먹으면서 도시가 커지고, 자동차 엄청나게 늘어나며, 전기 먹는 시설을 비롯해 아파트와 공장과 발전소를 어마어마하게 늘리니, 이렇게 달라지거나 뒤틀리는 삶터에 맞추어 날씨 또한 달라지거나 뒤틀립니다.


  날씨가 심술을 부리지 않습니다. 날씨는 사람들 삶을 고스란히 따릅니다. 부채 하나로 여름을 나던 지난날 사람들은 온대 날씨를 누렸어요. 아무리 한여름 뙤약볕이라 하더라도 시원스레 바람이 불었고, 나무그늘에서 땀을 식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한여름뿐 아니라 첫봄과 늦봄에도 시원스러운 바람을 쐬기 어려워요. 자동차 배기가스와 공장 매연이 스모그를 이루어 도시를 섬처럼 가둡니다. 스모그 무더기에 장마전선이 깃들면 빠져나오지 못하며 비를 왕창 퍼붓습니다. 옛날처럼 장마전선이 남녘과 북녘을 천천히 오르내리면서 골고루 비를 뿌리지 않아요. 막삽질로 들과 숲과 멧골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서울·경기·강원에 비를 퍼붓고 또 퍼붓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런 날씨를 어느 만큼 살필까요. 이런 날씨를 얼마나 헤아릴까요. 이런 날씨를 어떻게 느낄까요.


  너무 쉽게 ‘지구온난화’를 들먹이지는 않나요? ‘내가 도시 물질문명 누리는 탓’은 하지 않으면서 ‘인류가 모두 환경문제에 눈길을 안 두기 때문’이라고 둘러대지는 않나요? 자가용을 몰고, 에어컨을 돌리며, 온갖 공산품을 끝없이 사다가 쓰고 쓰레기로 버리는 나날을 되풀이하면서, 날씨가 왜 뒤틀리거나 흔들리는지, 밑뿌리를 캘 생각은 없지 않나요?


  ‘스스로 삶을 바꾸지 않는 사람 하나’가 모여 열이 되고 백이 되며,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이 됩니다. 그나마 한국 날씨가 온대에서 열대로 안 가고 아열대로 가는 까닭은, 이럭저럭 도시에서 ‘스스로 삶을 바꾸려고 애쓰는 사람 하나’ 있고, 이런 사람이 열 백 천쯤 있기 때문입니다. 자가용을 안 모는 사람이 아주 드물지만 어김없이 있고, 에어컨을 안 쓰는 사람이 매우 드물지만 꼭 있으며, 공산품을 함부로 안 쓰는 한편 쓰레기를 거의 안 내놓는 예쁜 삶 일구는 사람이 참 드물지만 사랑스레 있습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에는, 지구별 모든 목숨이 날씨를 읽었습니다. 2010년대 오늘날에는, 지구별 모든 목숨 가운데 사람만 날씨를 못 읽습니다. 옛날에는 개미도 나비도 벌도 제비도 사람도 날씨를 읽고 느끼며 알았어요. 오늘날에는 개미나 나비나 벌이나 제비는 날씨를 읽고 느끼며 알지만, 사람만큼은 날씨를 안 읽고 안 느끼며 안 알려 해요.


  날씨방송을 본대서 날씨를 알 수 없어요. 하늘을 보아야지요. 바람을 마셔야지요. 흙을 만지고, 풀과 나무를 어루만지며, 해와 달과 별을 두루 살필 때에 비로소 날씨를 알아요. 하늘과 바람과 흙과 해를 돌아보지 않으면 날씨를 느낄 수 없어요. 4346.8.1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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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25] 자전거읽기
― 자전거와 살아가는 즐거움이란

 


  나는 자전거를 타면서 대단히 많은 모습을 봅니다. 내 둘레 사람들은 나더러 자동차를 몰면 훨씬 멀리 더 빠르게 달릴 뿐 아니라, 책방마실을 하고 나서 짐칸에 책 거뜬히 싣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자전거를 달리며 마주하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모습이랑, 두 다리로 거닐며 누리는 아주아주 많은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우면서 반갑고 남다르구나 싶어서 자동차를 아예 생각하지 않습니다.


  몸이 많이 힘들면 택시를 불러서 탑니다. 택시는 참 너그럽지요. 부르면 달려오고, 가고 싶다는 데에 태워 주거든요. 택시삯이 비싸다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자동차 장만해서 보험삯 내고 기름값 치르며 굴리는 값을 생각하면 택시삯은 매우 싸요. 그러면 자전거는? 자전거는 아예 아무런 돈이 안 든다 할 만하지요.


  나는 세발도 네발도 아닌 두발로 달리는 자전거를 처음 몰던 느낌을 오늘까지도 또렷하게 아로새깁니다. 꽤 어린 나이였을 텐데, 작은 바퀴 둘을 떼고 두발로 자전거를 달리며 얼마나 들뜨고 설레며 기뻤는지 몰라요. 다만, 들뜸과 설렘과 기쁨만 생각하다가 그만 고꾸라져서 팔뚝이 아주 크게 까지고 찢어졌어요. 이마에서 피도 흘렀어요. 그런데, 이렇게 까지고 찢어졌어도, 두발자전거로 달리는 들뜸과 설렘과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그 뒤로는 두발자전거로만 달렸어요. 어머니가 말리셨지만 이듬날에도 또 두발자전거로 달렸고, 또 크게 고꾸라져서 다친 데가 더 찢어지고 피는 훨씬 많이 흘렀어요.


  오늘 나는 두 아이와 살아갑니다. 작은아이는 수레에 태우고 큰아이는 샛자전거에 태워, 앞에서 샛자전거와 수레를 끌고 두 아이를 태우며 달리는 자전거 발판을 밟자면 힘이 무척 많이 듭니다. 자전거 무게도 퍽 무겁고, 언덕길 오르자면 온몸에서 땀이 옴팡지게 쏟으면서 이마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서 길바닥을 적셔요. 그렇지만, 이런 자전거를 거의 날마다 탑니다.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을 거의 날마다 누려요.


  자전거로 면소재지나 읍내 언저리를 달리고 보면, 시골길에서는 온갖 죽음을 마주합니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곧 알아채요. 길바닥에는 자동차에 치여 죽은 멧짐승과 뱀과 개구리와 나비와 잠자리와 사마귀와 메뚜기와 달팽이와 개미뿐 아니라, 너구리도 오소리도 삵도 제비도 비둘기도 박새도 소쩍새도 있어요. 다람쥐도 고라니도 자동차에 치여 죽습니다. 이 모든 슬픔을 자전거를 몰며 더 끔찍하게 느껴요. 아마, 자동차 모는 분들은 모를 텐데, 자전거로 달리거나 두 다리로 거닐다 보면, 길바닥에 자동차에 치여서 죽어 날개가 바람 따라 팔랑거리는 나비 주검 되게 많아요. 자동차에 밟힌 개구리와 개미는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샛자전거에 앉은 큰아이는 아버지를 보며 “아버지, 저기 밟지 말아요!” 하고 먼저 알아채서 외치기도 하지요.


  자동차를 장만하면서 자전거를 함께 장만하는 어른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자동차를 장만할 적에 이것저것 옵션 한두 가지쯤 줄여 백만 원쯤으로 자전거 한 대 함께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어른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생각을 기울여 보면, 자동차 몰면서 한 달 기름값 십만 원쯤 아끼면 한 해에 백이십만 원을 모아 ‘좋은 자전거’ 한 대 장만할 수 있어요. 한 달 기름값 오만 원쯤 아끼면 한 해에 육십만 원을 모아 ‘썩 나은 자전거’ 한 대 장만할 수 있어요. 그래도, 이렇게나마 마음을 쏟는 어른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어요.


  어떻게 살아갈 때에 아름다울까요? 이 길은 어떻게 달릴 때에 즐거울까요?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달리면 가장 빨리 갈 수 있나요? 이곳에서 저곳으로 매우 빠르게 달릴 수 있으면 무엇이 좋을까요?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자전거로 삶을 노래하는 이웃을 만나고 싶습니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자전거로 기쁘게 나들이 누리는 아이들을 마주하고 싶습니다. 4346.7.2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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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13-12-14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평소에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