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른입니까 16] 마음읽기
― 스스로 사랑하려는 마음일 때에 사랑

 


  글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그냥 나오는 글이란 없이, 모두 이녁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쓰는 글은 내 마음이고, 내 이웃이 쓴 글은 내 이웃 마음입니다.


  내 마음과 이웃 마음은 다릅니다. 내 삶과 이웃 삶이 다르니까요. 내 목소리와 이웃 목소리는 다릅니다. 내 생각과 이웃 생각이 다르니까요.


  글을 읽을 때에 ‘줄거리’를 읽으려고 하면 마음을 못 읽습니다. 누가 쓴 글이든 마음을 쓰기에, 마음을 읽으려 하지 않고서는 서로 말다툼으로 번지기 쉽습니다.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삶에 따라 다 다른 목소리로 쓰는 글이기에, ‘내 삶과 내 생각과 내 목소리’에 맞추어 다른 사람 글을 읽으면 엉뚱하게 풀어내고 맙니다. 글 아닌 말에서도 이와 같아요.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읽어야지요.


  누군가는 말투가 좀 거칠 수 있어요. 누군가는 말끝마다 욕지꺼리가 섞일 수 있어요. 누군가는 말투가 나긋나긋하겠지요. 누군가는 말끝마다 상냥한 기운 감돌겠지요.


  말투가 거칠면, 이녁 마음도 거칠까요. 말끝마다 욕지꺼리 섞으면 이녁 말은 들을 값어치조차 없을까요. 문학을 떠올려요. 문학에 나오는 말을 떠올려요. 문학에 나오는 줄거리를 떠올려요. 문학을 읽는 우리들은 ‘줄거리’를 읽으려는 뜻이 아니에요. 문학을 읽는 까닭은 마음을 읽고 싶기 때문이에요.


  어떤 사람은 글을 읽든 책을 읽든 문학을 읽든 ‘줄거리’만 좇을 수 있어요. 누구한테나 자유이니, 줄거리가 좋으면 줄거리로 갈 뿐이에요. 다만, 줄거리를 붙잡을 때에는 마음을 잡지 못해요. 줄거리에 얽매이면 마음읽기하고 멀어져요.


  글 한 줄에서 마음을 읽는다 할 때에는, 글을 쓴 이녁 마음이 어떠한가를 살펴, 서로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뜻이에요. 살을 섞거나 쓰다듬어야 사랑이 아니라, 마음을 읽고 나누려 할 때에 사랑이에요. 살을 섞는 일은 살섞기예요. 살을 쓰다듬는 일은 쓰다듬기예요. 마음을 읽을 때에는 마음읽기이고, ‘마음’이란 바로 삶을 사랑하는 바탕이니, 저절로 사랑읽기로 흘러요.


  마음을 따사롭게 추스르는 사람은 삶을 따사롭게 추스릅니다. 마음을 너그럽게 북돋우는 사람은 삶을 너그럽게 북돋우지요.


  우리 어른들은 마음을 슬기롭게 읽으며 삶을 슬기롭게 지을 수 있기를 빌어요. 우리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한테 슬기로운 삶·넋·사랑을 찬찬히 물려줄 수 있기를 빌어요. 스스로 사랑하려는 마음일 때에 사랑이에요. 땅에서 솟아나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사랑은 없어요. 스스로 일구는 사랑이고, 스스로 짓는 사랑이에요. 마음을 읽으면서 사랑을 나누고, 마음을 헤아리면서 사랑을 빛내요. 4346.5.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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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19] 시멘트읽기
― 숲과 논밭과 찻길과 도시

 


  시골자락 논두렁이 아주 빠르게 사라집니다. 경운기와 오토바이 다니기 좋도록, 또 들풀 자라지 못하도록, 논두렁을 시멘트로 덮습니다. 시골자락 논도랑이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큰물 질 적에 물골에 빗물 잘 빠지도록 한다면서, 흙도랑을 시멘트도랑으로 바꿉니다.


  고샅이라 할 시골길은 어느새 거의 다 시멘트길로 바뀌었습니다. 도시 골목길도 흙길은 한 군데도 안 남았다 할 만하며, 아스팔트를 깔거나 시멘트를 깝니다. 자동차를 대기 좋도록, 또 자동차가 다니기 좋도록, 도시는 어디에나 아스팔트하고 시멘트로 바닥을 마감합니다.


  시골에서도 논이나 밭으로 경운기나 트랙터 드나들기 좋도록 시멘트길 따로 한 군데쯤 마련합니다. 멧자락에 올라 시골마을 멀리 내다보면, 논밭 한쪽에 하얗게 시멘트길 난 모습 볼 수 있습니다. 머잖아 이 나라 시골마을 어디에나 논두렁까지 하얗게 덮이리라 느낍니다.


  아무래도 자동차는 흙길을 다니기 나쁘지요. 아무래도 짐차이든 경운기이든 흙길에서는 바퀴 빠질 수 있지요.


  그런데, 시멘트바닥에는 아무 씨앗을 못 심어요. 시멘트바닥에서는 나무도 풀도 돋지 못해요. 사람이 살아갈 집에서도 방바닥을 시멘트로 하면 숨이 막히지요. 방바닥과 벽을 흙으로 하는 까닭이 있어요. 먼 옛날부터 사람들 살림집 바닥이나 벽이 모두 흙인 까닭이 있어요. 서양 문명이 퍼지기 앞서까지 지구별 모든 겨레는 흙바닥에서 잠을 잤어요. 서양사람조차 흙바닥에서 잠을 잤지요. 다만, 서양사람은 흙바닥에 나무로 짠 침대를 놓고 잠을 잤습니다. 서양에서 도시라는 데가 생기고 돌과 시멘트로 지은 층집 생기면서 비로소 ‘시멘트집’이 지구별 곳곳에 퍼졌어요.


  풀이 돋는 흙바닥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에요. 풀과 나무를 보듬는 흙으로 집을 지어 흙내음 마시고 흙숨 먹으며 살아온 사람들이에요. 흙을 치우고 시멘트로 높다라니 층집 지으니, 어른이든 아이이든 숨이 막히고 코가 막힐밖에 없어요. 숨과 코가 막히다 보니, 마음까지 막히고 생각마저 막혀요.


  사람도 짐승도 흙에 기대어 살아가고, 흙바닥에 누워 자요. 흙을 싫어하거나 흙을 아끼지 않거나 흙을 멀리하거나 흙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따스한 마음결을 잃어요. 동네나 마을이 살기 좋다면, 동네사람이나 마을사람이 흙을 아낀다는 뜻이에요. 도시에서는 조그맣게 텃밭을 일구거나 꽃밭을 가꾸는 동네일 때에 포근한 숨결 감돌아요. 시골에서는 논밭이 제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풀약과 비료와 항생제로 돈농사 짓는다면 너그러운 숨결 감돌지 못해요.


  큰비 몰아치면 아스팔트 찻길도 무너지고 시멘트바닥도 갈라져요. 큰비 몰아치면 때때로 멧자락 무너지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숲을 망가뜨리지 않았으면 멧자락 무너질 일 없어요. 사람들이 찻길을 낸다며 멧자락 한쪽을 깎거나 밀었기 때문에 큰비 때문에 멧자락 무너져요. 찻길 없고 숲나무 함부로 베지 않은 멧자락은 큰비에 아랑곳하지 않아요.


  나무가 있고 풀이 있어, 멧자락은 비가 오거나 말거나 늘 괜찮아요. 나무가 있고 풀이 있는 멧자락은 보송보송하지요. 손가락으로 땅바닥 누르면 손가락 쏘옥 들어갈 만큼 보드랍지요. 그런데 이 보드라운 숲흙은 큰비에든 작은비에든 튼튼하고 씩씩합니다. 풀뿌리와 나무뿌리가 흙을 지키니까요. 풀과 나무가 흙을 살리니까요. 흙은 풀과 나무를 북돋우고, 풀과 나무는 흙을 지켜요.


  시멘트바닥과 아스팔트길은 무엇을 지킬까요. 그래요, 시멘트바닥과 아스팔트길은 자동차를 지키지요. 아파트를 지키고 높다란 건물 지키지요. 시멘트는 도시를 지켜 물질문명 사회 세워요. 아스팔트는 도시를 북돋아 물질문명 사회 키워요. 도시에서 자동차 없는 나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으리라 느껴요. 시골에서도 자동차 없이 농사를 짓거나 살림을 꾸릴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오늘날 거의 사라졌다고 느껴요. 흙이 없으면 밥도 물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지만, 흙을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나머지 학교 운동장에서조차 흙을 몰아내요. 도시는 공원에서도 흙을 밟지 못해요. 도시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이 흙을 만지며 놀 수조차 없어요. 도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가운데에는 흙 한 줌 없는 시설 제법 많아요.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자동차 다니는 찻길에서는 아무런 잔치도 놀이도 얘기마당도 어울림판도 이루어지지 못해요. 자동차가 다니지 못해야, 자동차가 서지 않아야, 자동차가 모두 사라지고 없어야, 비로소 동네사람이든 마을사람이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잔치마당 펼쳐요. 서울 광화문을 생각하면 쉬 알 수 있을까요. 자동차를 몰아낸 광화문 너른터 되기에 비로소 그곳에서 무언가 잔치라든지 행사를 꾀하지요. 자동차 싱싱 달리면 사람들은 아무것 못할 뿐 아니라, 뿔뿔이 찢어지거나 흩어져요. ‘재래시장’이라고 하는 오래된 저잣거리에 왜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따스한 기운 감도는가를 떠올려요. 오래된 저잣거리에는 자동차 드나들지 못해요. 오직 사람들이 두 다리로 걸어서 오갈 뿐이에요.


  자동차 대는 자리가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백화점이나 커다란 할인매장을 떠올려요. 이런 데에서 따스한 기운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백화점 일꾼조차 힘겹거나 고단한 일에 지쳐요. 곧, 자동차 있는 곳에는 민주주의 없어요. 자동차 있는 곳에는 평화 없어요. 자동차 달리는 찻길에서는 평등도 복지도 통일도 자유도 권리도 꿈도 사랑도 믿음도 배움도 없어요. 자동차 달리는 찻길에는 오직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와 매판권력과 노예교육만 있어요.


  숲은 시멘트로 안 덮어도 빗물에 쓸리지 않아요. 또 숲은 빗물에 조금씩 쓸려 냇물이나 바닷물로 흘러들어도 돼요. 풀과 나무가 가을 지나 겨울 되고 다시 봄이 되는 동안 새 흙 태어나도록 가랑잎 떨구고 풀잎 지거든요. 잘 생각해 보셔요. 백두산이든 지리산이든 한라산이든 높이가 낮아지지 않아요. 비를 그렇게 맞으며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 해를 살았어도 멧자락은 높이가 낮아지지 않아요. 흙이기 때문이고, 흙땅에 풀과 나무가 살아가기 때문이에요.


  시골이 시골답게 빛나는 길을 헤아려요. 도시가 도시답게 즐거운 길을 살펴요. 독재정권 새마을운동이 저지른 ‘슬레트 지붕’이 나쁜 줄 이제서야 깨닫고는, 요즈음 들어 나라에서 큰돈 들여 시골마을 슬레트집을 하나씩 허물어요. 그러나, 슬레트 지붕 쓰레기를 어떻게 하려는지 딱히 대책이나 정책은 없어요. 그저 허물어 어느 쓰레기매립지에 파묻을 뿐이에요. 핵발전소 핵쓰레기만 걱정할 일 아니에요. 온 나라 뒤덮은 시멘트바닥과 아스팔트길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상수도 공사이니 무슨 공사이니 하면서 아스팔트길이나 시멘트바닥 자주 뜯지요? 그러면, 이렇게 뜯은 아스팔트쓰레기와 시멘트쓰레기는 어떻게 하나요? 어마어마한 시멘트쓰레기 어찌해야 할까요. 아파트 재개발 할 때마다 쏟아질 시멘트쓰레기는 또 어떡해야 할까요. 흙집은 허물어도 흙으로 돌아가고, 다시 흙집 지으면 되지만, 도시를 이루는 엄청난 시멘트집에서 나올 시멘트쓰레기 앞으로 어디에 어떻게 버리려나요. 제발, 도시 시멘트쓰레기 시골에 몰래 갖다 버리지 마셔요. 부디, 시골 흙땅에 함부로 시멘트 덮지 마셔요. 4346.5.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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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17] 나무읽기
― 마을 이루는 바탕이란

 


  도시에서 나고 자라면서 늘 한 가지 아쉽다고 여겼습니다. 내 어버이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될 무렵 여러모로 돈을 그러모아 아파트를 마련해서 ‘우리 집’이라고 삼으셨지만, 나는 이 아파트가 참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왜 아파트가 ‘우리 집’이어야 할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 집’이라 한다면, 마당이 있고 꽃밭이 있으며 나무 자랄 흙땅 있어야 한다고 여겼어요. 누가 가르치거나 알려주지 않았지만, ‘우리 집’이라 하면 우리 식구 사랑하면서 아낄 나무와 풀과 꽃이 자랄 흙땅 있어야 비로소 ‘우리 집’이 된다고 느꼈어요.


  국민학교 다니며 동무네 집 놀러갈 적에 언제나 새삼스레 깨달았어요. 아파트 사는 동무네 놀러갈 적에는 따로 느끼지 못했지만, 아파트 아닌 단독주택이라 하는 여느 골목집에서 살아가는 동무네 놀러가고 보면, 아무리 손바닥만큼 작은 마당이라 하더라도, 이 집에서 살아가는 동무는 ‘내 나무’가 있어요.


  그래, 내 나무 한 그루 있구나, 참 좋네, 하고 생각하며 으레 나무줄기 쓰다듬고 우듬지 올려다보곤 했어요. 작은 골목집 작은 골목나무 한 그루인데, 이 나무 한 그루 있기에 이 조그마한 살림집이 환하게 빛나면서 푸르게 따스하구나 하고 느껴요.


  도시 떠나 옆지기랑 아이들하고 살아갈 새 터 헤아리면서 나는 다른 무엇보다 ‘나무 심어 돌보기’를 생각했어요. 세 식구 깃든 충청북도 멧골집에서는 살구나무 두 그루 심어 앞으로 이 살구나무 무럭무럭 자라 우리 집이 ‘살구나무 집’ 되기를 꿈꾸었어요. 네 식구 되고 나서 전라남도 고흥 시골마을로 옮겨 지내는 오늘날은 우리 집 둘레에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대추나무, 이렇게 세 가지를 두 그루씩 심으며 꿈을 꿉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 스무 살 즈음 될 무렵에는 제법 우람하게 자랄 이 나무들을 바탕으로 우리 조그마한 이 집이 ‘나무 집’ 될 수 있기를 꿈꿉니다. 해마다 이 나무 저 나무 몇 그루씩 심어 온갖 나무 골고루 어여쁘게 어우러지는 ‘집숲’ 되기를 꿈꿉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마을이라 한다면, 사람들 모여서 살아가기에 마을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집집마다 ‘집나무’를 심어서 돌보고, 마을 테두리에서는 마을사람 모두 보듬을 만한 넓은 멧자락과 숲이 있고 냇물이 흐르며 들판 있을 때에 비로소 마을이라 일컬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도시이든 시골이든 모두 똑같아요. 멧자락도 숲도 냇물도 들판도 없이, 시멘트 층집, 그러니까 아파트만 우줄우줄 때려박는 곳을 ‘마을’이나 ‘동네’나 ‘고을’이라고는 가리킬 수 없다고 생각해요. 수천 수만 사람 바글바글거리도록 때려짓는 아파트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지 못하도록 가두는 감옥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게다가, 이런 시멘트감옥 같은 데를 몇 억 원이니 하는 비싼값에 사고팔도록 하니, 더더욱 사람들을 바보로 짓누르는 셈 아닌가 하고 느껴요.


  나무 한 그루 심을 마당 한 뼘 누리지 못하는데 집값이 몇 억이라니요. 들나물 한 포기 뜯어서 먹을 기쁨 즐기지 못하는데 집값이 몇 억이라니요. 봄꽃 여름꽃 가을꽃 겨울꽃 철따라 다 다른 빛깔 맞이하지 못하는데 집값이 몇 억이라니요.


  나무가 자라 집을 지어요. 나무가 자라 바람내음 싱그러워요. 나무가 자라 새가 찾아들고 어여쁜 벌레가 깃들어요. 나무가 자라 열매를 베풀고 꽃을 나누어 줘요. 나무가 자라 그늘이 드리우고 햇살조각 눈부셔요. 나무가 자라 흙이 살아나고, 나무가 자라 아이들이 방긋방긋 웃으며 튼튼하게 함께 자라요.


  우리 집 나무를 떠올리다가 문득 하나 생각합니다. 역사를 밝히는 분들은 한겨레 발자취를 으레 단군 때부터 짚어 반 만 해를 말하는데요, 반 만 해 앞서 이 나라 삶터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사천오백 해 앞서는, 오천 해 앞서는, 오천오백 해 앞서는, 또 육천 해나 칠천 해 앞서는, 구천 해나 일만 해 앞서는, 이 나라 삶터에 어떤 이야기와 숨결과 빛줄기 있었을까요. 단군이라는 님이 있기 앞서, 이 나라 시골마을 사람들은 어떤 삶 누렸을까요. 팔천 해 앞서 이 땅에서 살던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어떤 집을 지으며 어떤 옷을 나누며 살았을까요.


  씨족 우두머리나 제사 지내는 우두머리 아닌 사람들은 삶에서 무엇을 바라보거나 돌보면서 하루를 누렸을까요. 전쟁무기 없던 지난날 사람들은 서로 어떤 하루 맞이하면서 어떤 삶 지었을까요. 갖은 문명과 문화를 누린다는 오늘날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하루 맞아들이며 어떤 삶 짓는가요. 공무원이나 회사원으로서 다달이 어느 만큼 돈을 벌기는 하되, 정작 스스로 하루하루 새 삶을 짓는 길하고는 그만 동떨어지지 않나요. 어른인 한 사람으로서 누리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아이들이 누리도록 하는 삶은 얼마나 빛나는가요. 4346.4.2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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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13] 바람읽기
― 어떤 보금자리, 어떤 배움자리, 어떤 꿈자리

 


  바람맛을 느낍니다. 이웃집 할매가 쓰레기를 태울 적에는 쓰레기내음 실린 바람맛을 느낍니다. 봄꽃이 피어나는 따사로운 봄철에는 봄꽃가루 살포시 내려앉은 봄꽃바람맛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바람내음을 맡습니다. 이웃집 할배가 논이랑 밭에 농약을 뿌릴 적에는 우리 집 마당에까지 농약내음이 바람 따라 흘러듭니다. 가을열매 무르익는 가을철에는 열매와 곡식이 익으며 나누어 주는 고운 내음을 바람결 사이사이 누립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봄에 어떤 바람을 마실까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여름에 어떤 바람을 마실까요. 도시에서 살거나 도시로 마실을 가면, 가을에 어떤 바람을 맛볼까요. 시골에서 지내거나 시골로 나들이를 가면, 겨울에 어떤 바람을 맛보려나요.


  보금자리는 배움자리입니다. 배움자리는 삶자리입니다. 삶자리는 꿈자리입니다. 꿈자리는 사랑자리입니다. 스스로 살아가려는 곳, 그러니까 보금자리에서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배웁니다. 식구들과 나누는 이야기도 배움이요, 이웃과 나누는 이야기 또한 배움이에요. 즐겁게 배울 수 있기에 보금자리를 틀며 살지요. 보금자리를 틀며 살아가는 곳에서 앞으로 하루하루 누릴 꿈을 키우고, 꿈을 키우노라면, 이 꿈을 이루는 동안 나눌 사랑을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낳기 앞서 어른인 나는 어디에 집을 마련해서 살아갈 때에 즐거울까요. 아이들을 낳고 나서 어른인 나는 어떤 집을 어떤 곳에 두고는 고향마을로 삼을 때에 기쁠까요.


  사람은 누구나 바람을 마시면서 숨결을 잇습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숨결을 잇지만, 밥에 앞서 물을 마시고, 물에 앞서 바람을 마셔요. 곡식을 끊으며 백 날 넘게 숨결 건사할 수 있고, 물을 끊어도 퍽 여러 날 숨결 건사하지만, 바람을 끊으면 1분조차 건사하지 못해요. 사람들 몸은, 또 벌레와 짐승과 풀과 나무 모두 바람이 없으면 1분조차 살아남지 못합니다.


  바람을 더럽히는 짓이란 스스로 죽으려는 짓이며, 이웃과 동무 모두 죽이려는 짓입니다. 바람을 보살피는 손길이란 스스로 살아가려는 몸짓이면서, 이웃과 동무 모두 살리려는 사랑입니다.


  논이나 밭에 농약을 치는 일은, 그저 돈을 버는 농사짓기조차 아니에요. 농약 때문에 풀과 흙도 망가지지만, 무엇보다 바람이 망가져요. 농약내음 잔뜩 밴 바람을 마신 사람은 몸이 아프고, 죽을 수 있어요. 자동차를 달리면 더 빨리 간다지요. 그런데 자동차 달릴 적마다 배기가스 잔뜩 뿜어요. 배기가스를 마셔 보셔요. 숨이 막히고 갑갑해요. 자동차 물결치는 커다란 도시는 사람들 스스로 죽으려는 꼴이면서, 이웃과 동무를 조금도 안 살피는 모양새예요. 자동차를 타야 할 때에는 탈밖에 없지만, 자동차를 줄일 수 있어야 하고, 마지막에는 자동차하고 헤어질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숨을 쉬거든요. 그래야, 숨결을 살리거든요. 그래야, 삶을 사랑하거든요.


  바람을 읽어요. 맑은 바람을 읽어요. 맑게 함께 나눌 바람을 읽어요. 바람을 지키고, 바람을 아끼며, 바람을 돌보는 길을 읽어요. 서로서로 즐겁게 바람을 마셔요. 꽃바람을 마시고, 나무바람을 마셔요. 민들레꽃바람을 마시고, 팽나무바람을 마셔요. 도시에서 살건 시골에서 살건, 어디에서나 고운 바람 불 수 있는 터전으로 일구어요. 이런 일을 하건 저런 놀이를 하건, 나와 네가 함께 마시는 바람을 돌아보면서, 바람맛과 바람내음 살찌우는 길을 걸어요. 4346.3.2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당신은 어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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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15] 숲읽기
― 밥과 옷과 집

 


  고등학교를 마치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며 이 대목을 배운 적 없습니다. 고등학교에서는 ‘고등학교 교육 얼거리’에 맞추어 교과서 지식을 집어넣으려 했을 뿐, 내 삶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교과서 지식을 집어넣으면서 시험을 치르는데, 시험점수가 어떠한가에 따라 몽둥이찜질과 줄세우기를 함부로 했습니다(1991∼1993년).


  중학교를 마치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나는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이 대목을 배운 적 없습니다. 중학교에서는 고등학교에서처럼 ‘중학교 교육 얼거리’에 맞추어 교과서 지식을 집어넣기만 했습니다. 중학교에서 우리한테 할 수 있던 일이라면 ‘고등학교에 보내기’였어요.


  곰곰이 돌아보면, 고등학교가 하는 일도 ‘대학교 보내기’에 머무는구나 싶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가 아니라면 ‘공장 보내기’나 ‘회사 보내기’가 될 테지요. 그러면, 인문계 고등학교는 왜 대학교에 보내려 하는가요. 대학교에 보내면 아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또, 대학교를 여러 해 다녀서 마치는 아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도시에서 태어나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무엇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대목에서 갈팡질팡했습니다. 오직 입시시험만 가르치는 고등학교를 마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하나도 몰랐습니다. 다른 대목보다 ‘먹고 입고 자는’ 대목을 생각했습니다. 이른새벽부터 늦은밤까지 학교에 붙들린 채 입시교육만 받는데, 밥하기와 바느질부터 빨래나 집일 어느 하나 익히거나 배울 틈이 없습니다. 집에서 어머니가 혼자 김치를 담그셔도 도우러 갈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문제집 한 번 더 들추어야 한다고 말할 뿐, 김치가 어쩌고 자시고 아랑곳하지 않아요. 설이나 한가위를 앞둔대서 수험생이 집일을 거들 틈이 없습니다. 명절 코앞까지 밤늦도록 입시교육을 시키니까요.


  그러니까, 고등학생이 대입시험을 치러 붙지 않으면, 그야말로 할 줄 아는 일이 없습니다. 책상맡에서 문제집 들여다보기 빼놓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짐을 나를 줄 아나, 연장을 고칠 줄 아나, 삽질을 할 줄 아나, 망치질을 할 줄 아나, 도무지 어느 하나 스스로 하도록 가르치거나 이끌지 않는 학교입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이 고추포기를 고추나무로 잘못 알고, 벼 또한 벼나무라도 되는 줄 잘못 안다고 나무라는데, 도시 아이들은 곁을 둘러볼 겨를이 없습니다. 도시 아이들한테 둘레를 살펴볼 틈을 안 줍니다. 도시에는 논도 밭도 없어요. 고추이든 벼이든 구경할 수 없어요. 사내도 가시내도 스스로 밥상 차릴 일이 없습니다. 사내도 가시내도 제 옷을 스스로 빨아서 입을 일이 없습니다. 사내도 가시내도 제 방을 스스로 쓸고 닦을 일이 없습니다. 이 얼거리는 대학생이 되어 여러 해 지난 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된 다음에도 늘 매한가지입니다. 대학생이 된대서 집일을 배우거나 집살림을 배우는 아이는 없어요. 대학교를 마치고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니까 집일하고 집살림을 익히려는 젊은이는 없어요. 한 마디로 간추리면, 오늘날 아이들은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어린이집에 한 번 들어가고 나면, 그 뒤로 집일하고 집살림하고는 아예 등을 지고 맙니다.


  과학 수업에서 별이름을 배웁니다. 원소가 어떠하고 화학조합물이 어떠하고 배웁니다. 옛 임금들 이름과 이런저런 옛 제도와 정책 줄거리를 외웁니다. 때때로 나무이름도 외우지요. 그러나, 학교 언저리에 심은 나무가 소나무인지 향나무인지 알 턱이 없습니다. 알려주는 교사가 없고, 푯말이 붙지도 않습니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어떻게 다른지 배울 길 없고, 가르치는 교사가 없습니다. 참나무는 왜 참나무이고, 참나무 열매가 왜 도토리이며, 도토리를 열매로 맺는 참나무 갈래는 어떻게 되는가를 배울 수 없고, 알려줄 만한 교사가 없어요. 대나무조차 못 알아보는 동무가 있습니다. 감이 열린 감나무를 바라보면서 저 불그스름한 알이 무언지 모르는 동무가 있습니다. 포도가 나무에 열리는지, 능금꽃이나 배꽃이 어떠한지 생각하거나 헤아리거나 아는 동무가 거의 없습니다.


  요즈음은 시골에서도 숲을 마주하거나 누리기 어렵습니다. 이제 한국에서 시골자락은 ‘고속도로와 고속철도가 지나가는 길목’이거나 ‘공장하고 골프장하고 발전소 짓는 터’이거나 ‘관광지’로 꾸미는 데가 됩니다. 도시에서는 아파트와 건물 늘리느라 바빠, 그나마 도시 바깥쪽에 있던 논밭이나 뒷동산조차 사라집니다.


  도시에서는 자가용 몰아 ‘수목원’이라 따로 이름을 붙이는 데로 찾아가야 나무내음 맡을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나비박물관 아니고서야 나비조차 볼 수 없습니다. 참새나 비둘기가 더러 도시에서도 살아간다지만, 멧새나 들새를 볼 수 없는 도시예요. 소쩍새나 참수리가 살 터가 없는 도시요, 들쥐나 멧쥐조차 살 터가 없는 도시예요.


  입시공부에 찌들리던 지난날, 나는 무엇보다 ‘숲을 모른다’는 대목이 부끄럽습니다. 매캐한 자동차 냄새는 그만 맡고 싶습니다. 갑갑하고 어두운 시멘트 교실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내가 태어나 자란 인천 어디에나 수두룩하게 많은 공장마다 내뿜는 매연덩어리에서 홀가분하고 싶습니다. 송전탑과 전봇대하고 헤어지고 싶습니다.


  바람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바람에 실리는 꽃내음과 풀내음을 맡고 싶어요. 바람결에 살랑이는 햇살을 쬐고 싶어요.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고 싶어요. 창밖을 바라보아도 잿빛투성이일 뿐이었지만, 창밖으로 숲이 있기를 빌었어요. 나무그늘에서 책을 펼치고, 풀밭에 앉아 도시락을 즐기며, 나무타기를 하며 쉬다가는, 싱그럽고 푸른 맛난 풀 뜯어먹고 싶었어요.


  밥과 옷과 집은 어디에서 얻을까요. 바로 숲에서 얻지요. 숲이 있어야 밥을 얻지요. 숲이 있어야 옷을 얻지요. 숲이 있어야 집을 얻지요. 공장에서 가공식품 찍어낸대서 배부르지 않아요. 공장에서 천을 짜고 옷을 짓는대서 예쁘지 않아요. 공장에서 시멘트와 플라스틱과 쇠붙이 얽어 높다란 아파트 짓는대서 반갑지 않아요. 숲에 푸른 숨결 가득한 나무가 있을 때에 먹을거리가 나와요. 숲에 푸른 숨소리 가득한 나무가 있어 비로소 입을거리를 빚어요. 숲에 푸른 숨빛 해맑은 나무가 있기에 튼튼히 기둥 세우고 서까래 얹으며 집을 지어요.


  학교는 모름지기 숲학교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어린이집도 유치원도 초등학교도 모두 숲배움터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숲배움터가 되면서, 아이들이 나이와 눈높이에 맞게 ‘밥·옷·집’ 스스로 건사하는 슬기와 넋을 익힐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인문계 고등학교이든 실업계 고등학교이든 예체능계 고등학교이든, 모두 너른 숲 한복판에 깃들어, 숲내음 맡고 숲살이 익히면서 차근차근 자랄 수 있어야 한다고 느껴요. 운전면허증은 아예 안 따거나 나중에 따도 돼요. 굳이 열아홉 살이나 스무 살에 대학생 되어야 하지 않아요. 대학생 애써 안 되어도 즐겁지요. 삶을 누릴 수 있을 때에 즐겁고, 삶을 사랑할 수 있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숲이 곧 살림터요 배움터일 수 있기를 꿈꿉니다. 나는 숲배움터를 조금도 누리지 못했지만, 우리 아이들은 숲배움터를 실컷 누릴 수 있기를 꿈꿉니다. 숲에 깃들 때에 시나브로 사람다움과 참다움과 나다움을 다스릴 수 있구나 싶어요. 4346.3.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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