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른입니까 27] 정치읽기
― 개혁이나 혁명을 어떻게 이루는가

 


  프랑스혁명을 다룬 책을 읽다가 자꾸 책을 덮습니다. 속이 메스껍기 때문입니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같이 ‘임금이 누군가를 죽이는’ 이야기라든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서 ‘백성을 괴롭히던 사람을 붙잡아 죽이는’ 이야기로구나 싶습니다. 아주 쉽게 대단히 자주 ‘사람 머리를 칼로 잘라 창에 꽂고 흔들며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런 죽음수렁이 혁명일까요. 누가 누구를 죽여야 혁명이 이루어지나요. 이런저런 사람은 밥을 먹을 값어치 없으니 목아지를 뎅겅 잘라 죽이면서 손뼉치고 낄낄거리며 잔치를 벌여야 혁명인가요.


  평화나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은 몇몇 사람이 밥을 혼자 차지한 채 꽁꽁 숨기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전두환·노태우 추징금’을 못 걷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지요. 이 나라 여느 사람들이 카드빚 10만 원만 밀려도 신용불량자가 되고, 100만 원이 없어 압류를 쉽게 받기도 하는데, 돈 한 푼 없다고 하는 옛 대통령은 거들먹거리면서 잘 살아가요. 이들은 아무 거리낌이 없어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정치라 하는 얼거리가 있으니 바보스러운 일이 벌어집니다. 임금도 대통령도 굳이 있어야 할 까닭 없어요. 대표나 우두머리가 꼭 있어야 할 까닭 없어요. 평화와 평등을 바라는 사회에 어떻게 대표나 우두머리가 있겠어요. 모든 사람이 저마다 대표이면서 우두머리예요.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저마다 딱 하나뿐인 목숨이면서, 저마다 아주 밝게 빛나는 숨결이에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뜻있고 값있는 빛인 터라, 누구나 대표이면서 우두머리입니다.


  잘 생각해 보셔요. 임금이나 대통령은 일을 하지 않아요. 일을 하는 척하지만, 정작 아무 일을 하지 않아요. 장관이나 벼슬아치도 일을 하지 않아요. 모두 일을 하는 척할 뿐입니다. 관리나 공무원 모두 일을 하지 않아요. 다들 일을 하는 척일 뿐이에요.


  일이란 무엇일까요? 돈을 버는 직업이 일인가요? 아닙니다. 밥과 옷과 집을 빚을 때에 비로소 일입니다. 돈을 벌어 밥과 옷과 집을 장만한다고 하지만, 돈이란 밥도 옷도 집도 아니에요. 돈은 돈일 뿐입니다.


  궁월이나 청와대나 국회의사당 짓느라 억수로 큰 돈이나 품이나 겨를을 들일 까닭이 없습니다. 임금은 임금 스스로 논밭을 일구어 이녁 밥을 얻어야 합니다. 대통령은 대통령 스스로 실을 잣고 베틀을 밟고 바느질을 해서 옷을 얻어야 합니다.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세무사도 모두 스스로 땅을 일구고 실을 훑으며 나무를 만져야 합니다.


  정치가 무엇인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정치란, 일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일을 하는 사람들을 억누리는 권력기구입니다.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짓지 않는 사람들이 정치를 한들, 사회나 나라를 올바로 세울 수 없습니다. 정치꾼은 밥을 어떻게 먹나요? 남이 해 주는 밥을 먹나요? 그러면, 정치꾼 몫만큼 누가 더 일을 해야 하지요? 정치꾼이 입는 옷은? 국회의원 같은 이들이 타는 자가용은 누가 일해서 굴리도록 하지요?


  세금을 어디에 쓰는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세금 가운데 아주 큰 몫은 군대를 거느리는 데에 쓰는데, 군대 거느리는 자리보다 ‘정치꾼과 공무원 품삯’ 치르는 데에 세금을 더 크게 씁니다. 다시 말하자면, 대통령이나 정치꾼이나 공무원을 모시려고 세금을 걷는 꼴입니다. 이들 품삯으로 세금이 어마어마하게 나가지요. 이들이 직업을 얻어 아침저녁으로 다니는 공공기관 건물을 짓느라 세금을 어마어마하게 쓰지요. 이들이 공공기관 건물에서 서류를 쓰고 컴퓨터를 만지며 낮에도 전기불 켜고 에어컨과 난방기 돌리느라 세금을 엄청나게 씁니다.


  어떤 정부기관이건 따로 있을 일이 없습니다. 어떤 공공기관이건 따로 세울 일이 없습니다. 어디에서나 조그맣게 마을이 이루어지면 됩니다. 마을마다 숲을 이루고 냇물이 흐르며 나무가 자라면 됩니다. 마을마다 오순도순 어울려 잔치를 벌이고 품앗이를 하면 됩니다.


  청와대 헐고 숲을 이루어야지요. 세무소와 법원 허물어 밭을 이루어야지요. 경복궁도 광화문도 굳이 문화재로 삼지 않아도 돼요. 들이 되고 냇물이 흐르도록 하면 돼요.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니 나라살림이 버겁습니다. 흙을 만지지 않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으니 이 나라가 어지럽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시골에서 흙을 만져 풀과 열매와 곡식 돌보는 사람이 없다면, 정치이고 사회이고 문화이고 경제이고 과학이고 몽땅 무너집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들이 있기에 정치를 하느니 사회를 지키느니 문화를 닦느니 경제를 세우느니 과학을 밝히느니 교육을 하느니 하고 말합니다.


  가만히 헤아려 봐요. 스스로 흙을 만지며 조그맣게 이루는 마을살이가 바로 정치요 사회이며 문화이고 과학이면서 교육입니다. 메주를 띄우고 간장과 된장을 담그던 삶이 과학이자 문화이며 교육입니다. 논일 밭일 숲일 모두 교육이고 정치이며 사회입니다. 품앗이와 두레와 잔치가 바로 정치이자 문화이고 교육입니다.


  뜻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대서 개혁이나 혁명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총칼을 들고 뒤집어엎어야 혁명이나 개혁이 되지 않아요. 서로서로 흙을 만질 때에 개혁도 되고 혁명도 되어요. 다 함께 스스로 가장 아름다운 보금자리 일구면서 숲을 누릴 적에 평화와 평등 이루어져요. 4346.7.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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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26] 놀이터읽기
― 아이하고 놀고 싶다면

 


  아이하고 놀고 싶다면 놀면 됩니다. 아이 얼굴을 쳐다보고, 아이 손을 잡으며, 아이랑 나란히 뒹굴면 됩니다.


  놀이공원에 가는 일이 놀이가 아닙니다. 놀이공원에 간다면 ‘놀이기구 타러 나들이’를 가는 셈이지, 놀이가 아닙니다. 바깥밥을 먹으러 나간다든지, 놀이터에 간대서 놀이가 아니에요. 함께 놀아야 놀이입니다.


  내가 1975년에 태어나 자란 인천에도 놀이터가 있었습니다. 그무렵 인천에 있던 놀이터는 제법 컸습니다. 아이들이 많으니 놀이터도 클밖에 없을는지 모르지만, 예전과 요즈음은 놀이터를 마련하는 어른들 생각이 사뭇 다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전에는 이런저런 놀이기구가 많이 없더라도 좋아요. 널따란 모래밭이나 흙땅이기만 하면 놀이터입니다. 시멘트땅이나 아스팔트땅 아닌 데라면 놀이터예요.


  아이들은 시멘트땅이나 아스팔트땅조차 바닥에 분필이나 돌로 금을 그으며 온갖 놀이 즐기기도 하지만, 참으로 빛나는 아이들 놀이는 바로 모래밭이나 흙땅이나 숲이나 들이나 냇가에서 이루어집니다.


  놀이기구 아닌 흙을 만지고 나무와 나뭇가지를 만지며, 풀잎과 꽃잎을 만지면서 아이들이 놉니다. 놀이기구라 한다면, 철봉에 매달리고 그네를 밟으며 미끄럼틀과 구름사다리를 원숭이처럼 척척 붙어서 옮겨다니면서 놉니다.


  넘어지거나 자빠지더라도 머리가 안 깨질 흙이나 모래로 이루어진 터가 놀이터입니다. 생각해 보셔요. 풀밭과 숲에서 아이들이 넘어진들 머리가 깨질 일 없습니다. 냇가에서라면 돌에 머리를 박을는지 모르는데, 잘 살피면 아이들은 냇가에서 외려 잘 안 넘어집니다. 냇가에서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지가 젖겠지요.


  손과 발이 흙과 모래와 풀을 느끼면서 아이들이 자랍니다. 손과 발로 나무를 타고 그네 줄을 붙잡으며 아이들이 큽니다.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마시면서 아이들이 자랍니다. 저희끼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사이 아이들이 큽니다.


  놀이터쯤 되려면, 아이들이 서너 시간 쉬지 않고 놀 만한 데여야 놀이터입니다. 너덧 시간 대여섯 시간,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잊고, 배고픔마저 잊으면서 폭 빠져들 만한 데일 때에 놀이터입니다.


  그럴듯한 놀이기구 덩그러니 놓는대서 놀이터가 되지 않아요. 이런 데는 ‘놀이기구터’예요. ‘놀이터’라 말할 수 없어요. 놀이기구 잔뜩 놓은 놀이기구터에서 아이들이 놀지 못합니다. 궁금하다면 놀이터와 놀이기구터에 아이들을 풀어놓아 보셔요.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부를 때’까지 하염없이 새 놀이를 빚으면서 놉니다. 아이들은 놀이기구터에서 몇 분쯤 이것저것 만지고 타고 하다가 이내 따분해 합니다.


  놀이기구터에는 새로움이 없습니다. 놀이기구터에는 아이들 스스로 생각날개 펼치도록 이끌 새로움이 없습니다. 어른들이 꽉 짜 놓은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놀이기구터에서 아이들이 할 놀이란 없습니다. 무엇을 새로 빚을 수 있나요. 아이들이 놀이기구터에서 무엇을 새로 빛낼 만한가요.


  들판에 나뭇가지 굴러다녀도 이 나뭇가지를 놀잇감 삼아 수많은 놀이를 새롭게 빚는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놀이기구터에는 나뭇가지 없어요. 돌멩이도 없어요. 시늉으로만 바닥에 깐 모래밭에 아무나 아무렇게나 들락거리면, 이런 모래밭에서 아이들이 모래놀이 할 수 없어요. 게다가 놀이기구터 바닥을 모래조차 아닌 인공소재로 깔면, 이런 데에서 아이들이 맡거나 느낄 냄새는 화학약품이 되고 맙니다.


  어른들 스스로 즐겁게 놀며 어울리는 삶이라 한다면, 아이들 놀이터를 엉터리로 만들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어른들 스스로 즐겁게 놀 줄 모르고, 즐겁게 놀지 않는 탓에, 아이들 놀이터를 바보스레 만드는구나 싶어요.


  아이하고 놀고 싶다면 아이하고 신나게 뛰놀아요. 아이들하고 놀이기구터에 엉금엉금 찾아가지 말고, 놀이기구터에 갔더라도 아이들 스스로 놀이기구를 만지도록 하셔요. 이건 어떻게 타고 저건 어떻게 타라고 하나하나 말하지 마셔요. 아이들 스스로 느끼고 생각해서 타도록 하셔요. 그나마 놀이기구터에서조차 아이들 스스로 생각을 짓도록 이끌지 못하면,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야 하나요. 놀이터는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을 빛내어 놀이를 찾아내어 개구지게 몸을 놀리면서 무럭무럭 자라도록 이끄는 배움터요 삶터이자 만남터예요. 이 놀이터에 어른들 섣불리 끼어들지 말 노릇이에요. 아이와 똑같이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고 할 마음이 아니라면, 놀이터에 어른들 함부로 발을 들이지 마셔요.


  걸리적거린답니다. 다른 아이들 노는데, 어른들이 당신 아이 손을 붙잡고 그네를 태우느니 미끄럼틀을 태우느니 하면, 참 걸리적거린답니다. 아이들과 ‘놀아’야지, ‘주말에 놀아 준다’는 생각으로 놀이기구터에 찾아가지 마셔요. 아이들도 재미없어요. 어른인 당신도 재미없지요? ‘아이들과 놀아 주려’고 하니 얼마나 따분하겠어요?


  놀이는 놀이터나 놀이기구터에 가야 할 수 있지 않아요. 놀이는 언제 어디에서나 할 수 있어요. 집에서도 방에서도 이부자리에서도 하지요. 방바닥에서도 마룻바닥에서도 얼마든지 하는 놀이예요. 아이들과 즐길 놀이를 어른들도 생각해야지요. 아이들이 까르르 웃고 떠들며 노래하도록 북돋우는 놀이를 어른들도 생각을 빛내어 하나하나 새롭게 일구어야지요. 4346.7.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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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24] 풀읽기
― 군대 사계청소(시계청소)가 저지른 짓

 


  네 식구 함께 시골집 떠나 도시로 마실을 오면서 새삼스레 느낍니다. 내가 군대에 있을 적에 중대장·대대장·연대장·사단장·군단장 같은 분들께서 우리한테 시킨 짓 ‘사계청소’가 우리를 어떻게 길들이거나 물들였는가를 새삼스레 느낍니다.


  비무장지대라고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완전무장지대’인 휴전선 철책 둘레에서 스물여섯 달을 보내며, 봄날 되고 여름날 맞이하면 날이면 날마다 해야 하는 숱한 ‘사역’ 가운데 하나는 ‘사계청소’였습니다. 한자말로 ‘사계청소’라 했는데, 이를 ‘시계청소’라고도 했습니다. ‘사계’라는 한자말 쓴 하사관, 이를테면 행정보급관은 ‘둘레에 있는 풀과 나무를 없애 멀리까지 잘 보이도록’ 하자는 뜻이요, ‘시계’라는 한자말 쓴 장교, 이를테면 중대장이나 대대장은 ‘보초를 서는 병사들 눈앞이 확 트여 저기 북녘 인민군 병사가 뭘 하는지 잘 보이도록’ 하자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낫, 정글칼, 톱 들을 하나씩 들고 철책 둘레에 섭니다. 백육십 졸개(땅개, 육군 사병)는 한 줄로 서서 풀을 베고 나무를 자릅니다. 눈앞에 보이는 ‘푸른 빛깔’은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그야말로 작은 들풀 하나조차 남기지 않고 뽑고 베고 죽이고 짓밟습니다. 이렇게 한 다음 무엇을 하느냐 하면 고엽제를 뿌립니다. 고엽제를 뿌려서 풀이 돋지 못하도록 해요. 고엽제는 맨손으로도 뿌리고, 바가지로도 퍼서 뿌리며, 하이바로도 담아 뿌려요. 철책 둘레에서 풀을 베고 죽이고 없애는 동안, 또 전역을 할 때까지 어느 누구도 그 가룻덩어리가 고엽제였다고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사계청소이든 시계청소이든 막일을 해야 하던 졸개(땅개, 육군 사병)들마다 팔과 다리와 몸에 두드러기가 생기고 피부병 걸린 까닭을 어느 누구도 제대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 해 동안 뒤탈을 앓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마취제 없이 칼로 생채기를 도려내기도 해야 했습니다.


  예전에는, 그러니까 전역을 하고 열 몇 해 동안은, 군대에서 사계청소나 시계청소를 하며 고엽제를 쓴 대목이 엿같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즈음, 시골에서 아이들과 살아가며 문득 지난날이 떠오르거나 어쩌다가 군대 적 일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 있으면, 풀을 미워하고 나무를 몽땅 죽이도록 하는 군대 몸짓이란, 사람들(젊은 사내) 마음속에 아름다운 사랑이나 맑은 꿈이 깃들지 못하도록 하려던 꿍꿍이였구나 싶어요. 군인이란 살인기계이니까, 군인이란 ‘내 이웃이나 동무라 할지라도 적군이라는 자리에 있으면 거침없이 죽이도록 명령을 따라야 하는 졸개’이니까, 군인들 마음속에 푸른 빛깔과 씨앗과 생각이 깃들면 안 된다고 여겼구나 싶어요.


  그런데, 시골집 떠나 인천으로 나들이를 오는 동안, 시외버스가 서울 버스역에 닿고, 서울에서 전철로 갈아타서 인천으로 오면서, 둘레에서 풀이나 나무를 거의 못 봅니다. 서울도 인천도 풀과 나무는 제자리를 못 찾습니다. 부산도 그렇고 대구도 그래요. 광주라고 다를 수 없고, 울산이라고 낫지 않아요. 마산 진해 창원을 마창진으로 엮어 엄청나게 큰 도시로 바꾸었다지만, 마창진이라는 데에 풀숲과 나무숲 얼마나 있는가요.


  풀이 마음껏 자라지 못하는 곳에 사랑이 자라지 못합니다. 나무가 흐드러지게 뿌리내리지 못하는 곳에 꿈이 흐드러지지 못합니다. 꽃이 곱다시 빛나지 못하는 곳에 생각이 곱다시 빛나지 못합니다.


  오늘날 이 나라 도시는 모두 군대와 같습니다. 회사도 공공기관도 일꾼(사람들)을 군인처럼 다뤄요. 회사원도 공무원도 마치 군인처럼 위계질서와 명령만 받아들여요. 게다가,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마치고 사회에서 일자리 얻으려는 푸름이와 젊은이도 군인과 똑같은 매무새나 넋이 되고 맙니다.


  군대를 가서 여러 해 지내는 일은 얼마나 나라사랑 될까요. 군대에서 이웃사랑 동무사랑 하나도 배우지 않으면서 사람 죽이는 솜씨를 배우는 한편, 풀과 나무와 꽃을 짓밟는 일을 끝없이 할 때에, 어떤 나라사랑 될까요. 풀사랑과 나무사랑과 꽃사랑을 하지 못한다면, 나라사랑이나 지구사랑 이룰 수 있을까요.


  가만히 눈을 감다가 눈을 다시 뜹니다. 서울 벗어난 전철이 인천으로 달리는 바깥을 바라보며 풀빛을 찾습니다. 전철역에는 풀포기 하나 없으나, 전철역과 전철역 사이에는 풀포기 제법 있습니다. 골목집 사이사이 우람한 나무 보입니다. 그렇지만, 아파트 높직한 데에는 아무런 풀포기도 나무도 안 보입니다. 전철은 동인천역에 닿고, 네 식구는 내립니다. 사람들은 쉽게 새치기를 하고, 표를 끊은 뒤 저마다 갈 곳을 찾아갑니다. 동인천역 뒤쪽은 너른터 만든다며 골목집 허물어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벽돌을 깔아 놓았습니다. 나무는 어디에서 자라야 하고 풀은 어디서 돋아야 할까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푸른 숨결 마셔야 목숨을 잇는데, 도시에 풀과 나무와 꽃이 제대로 자랄 수 없으면, 사람은 무엇을 마시면서 삶을 일구는지 모르겠습니다. 4346.6.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당신은 어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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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23] 고향읽기
― 살아가는 곳과 태어난 곳

 


  나는 ‘고향’이라는 낱말을 그닥 즐겨쓰지 않습니다. 나는 두 가지 말을 씁니다. 하나는 ‘태어난 곳’, 또 하나는 ‘살아가는 곳’, 이렇게 두 가지 말을 으레 씁니다.


  고향이라는 곳을 헤아려 보면, 고향이 이곳이라 하더라도 이곳에서 내처 살아가는 사람 매우 적은 오늘날입니다. 이곳이 고향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릴 적에 어버이와 함께 옮긴 뒤 내처 살아가는 사람 많고, 고등학교 마치고 스무 살부터 새롭게 살아가며 새로운 고향 되는 곳으로 여기는 사람 많습니다.


  어느 곳에서 태어났기에 굳이 어느 곳을 고향으로 삼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태어난 곳’과 ‘살아가는 곳’에 한 가지를 더해서, ‘사랑하는 곳’을 생각합니다. 아마, 누군가는 태어난 곳이 살아가는 곳이면서 사랑하는 곳일 수 있어요. 아마, 누군가는 태어난 곳도 사랑하는 곳도 아닌 데에서 살아갈 수 있어요. 아마, 누군가는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겠지요.


  엊저녁, 어느 분이 저를 다른 어느 분한테 소개하면서 “이곳(전남 고흥) 분은 아니신데, 이곳으로 와서 살아가는 분이에요.” 하고 말합니다. 다른 어느 분은 “귀촌하신 분인가 보네.” 하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가만히 듣다가 생각합니다.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스무 살에 인천을 떠났다가 서른세 살에 인천으로 돌아갔고, 이제 인천을 다시 떠나 시골마을에서 살아갑니다. 인천으로 돌아가 살던 때 일을 곰곰이 떠올립니다.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열세 해 동안 인천을 떠나서 지냈어요. 이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인천 토박이네’ 하고 말하더군요. 나는 ‘글쎄요’ 하고 말했고, 다른 곳에서 태어나 살다가 인천으로 온 분이 있을 때에 나는 그저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면 인천사람이지요. 다른 말은 다 쓸데없어요.’ 하고 말했어요. 둘레 다른 분들이 인천 아닌 데에서 살다가 인천에 온 분을 보며 ‘당신은 아직 인천사람 아니에요.’ 하고 말하기에, 그런 말은 말이 안 된다고, 그러면 이분을 가리켜 ‘이농인’이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며 이곳을 좋아하면 ‘이곳 사람’일 뿐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나는 오늘 두 아이와 옆지기하고 전남 고흥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는 ‘전라도사람’이면서 ‘고흥사람’입니다. 나한테는 다른 이름을 붙일 만하지 않습니다. 나는 텃세를 부릴 까닭이 없습니다. 나는 손님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살아가는 사람은 그저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저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듯, 일하는 사람은 그저 일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하루 먼저 어느 회사에 들어갔대서 ‘고참’이나 ‘선배’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하루 먼저 태어났대서 ‘형’이나 ‘선배’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나이가 조금 더 많을 뿐입니다.


  돈이 조금 더 많대서 돈이 조금 더 적은 사람보다 웃사람 되지 않습니다. 이름값이 조금 높대서 이름값 없는 사람 앞에서 우쭐거릴 까닭 없습니다. 어느 마을 토박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서지 않습니다. 어느 마을에 새로 옮겨서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보다 낮은 자리에 서지 않습니다.


  모두 같은 사람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공장에서 일하는 ‘한국 노동자’이든,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한국으로 와서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이든, 모두 똑같은 노동자요, 똑같은 숨결이며, 똑같은 사랑입니다.


  이주 노동자, 이른바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인 노동자를 똑같이 아끼는 눈길로 바라볼 수 있자면, 토박이와 ‘외지인(손님)’ 나누기부터 없어져야 합니다. 나이에 따라 계급이나 신분을 쌓는 울타리를 없애야 합니다. 선배나 고참이라는 울타리를 허물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길을 걸어야지요. 서로 아끼는 삶을 가꾸어야지요.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꿈꾸는 마을 살찌워야지요. 4346.5.3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당신은 어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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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22] 방송읽기
― 무엇을 보고 들어야 즐거울까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갈 때에 곧잘 버스 일꾼이 라디오를 켭니다. 군내버스 20분을 조용히 시골길 누비며 다닐 때가 있지만, 시골길 누비면서도 라디오 소리에 두 귀가 멍멍할 때가 꽤 됩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고흥읍에서 순천을 오갈 적에는 거의 언제나 버스 일꾼이 라디오를 틉니다. 시외버스로 고흥과 순천을 오가는 한 시간 길에는 거의 언제나 두 귀 멍멍한 채 있어야 합니다.


  시외버스 일꾼은 시외버스에 어른이 타건 아이가 타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타건 푸름이가 타건 어르신이 타건 대수로이 살피지 않습니다. 그저 버스 일꾼 스스로 들으려 하는 라디오를 켭니다.


  가끔 도시로 가서 시내버스를 탈 적에는 좀 다르다고 느끼곤 합니다. 왜냐하면, 도시에서는 자동차 너무 많고, 사람들 지나치게 많아서, 도시 시내버스 일꾼으로서는 라디오라도 켜지 않으면 골이 아프겠구나 싶어요.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와 손전화 소리와 수다 떠는 소리에서 홀가분하면서 도시 시내버스를 몰자면, 라디오란 더할 나위 없는 길벗이 되리라 느껴요.


  시골 군내버스는 퍽 달라요. 호젓한 시골길을 달리는 군내버스는 앞에서나 옆에서나 뒤에서나 숲을 보고 들을 봅니다. 때로는 냇물을 보고 바닷물을 봅니다. 눈을 맑게 틔우고 생각을 환하게 여는 푸른 빛깔을 한 가득 바라보면서 버스를 몰 수 있어요. 그러니, 시골 군내버스 일꾼은 굳이 라디오를 안 켜도 됩니다. 게다가, 시골 할매나 할배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가 있고, 갓 태어난 아기들 무럭무럭 자라 어린이 되고 푸름이 되며 어른 되는 흐름을 죽 지켜보기도 하기에,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새록새록 누립니다. 따로 라디오를 헤아릴 틈이 없다 할 만해요.


  도시에서 택시를 모는 일꾼이 손님들 기다리면서 텔레비전을 볼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루 내내 찻길에서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에 시달리면서, 자동차 배기가스를 맡을 뿐 아니라, 열 몇 시간 좁은 자동차에 갇히다시피 들어앉아 일을 해야 하니, 택시 일꾼 또한 버스 일꾼처럼 라디오가 길벗이요 텔레비전이 삶벗 되리라 느껴요.


  그러면,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버스와 택시 일꾼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채우는 이야기는 어느 곳에서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이 빚을까요. 사람들 마음을 따사롭게 보듬는 이야기가 새벽부터 밤까지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흐르나요. 치거나 박거나 싸우거나 하는 이야기가 흐르는 방송은 아닌가요. 아름다운 사람들 아름다운 이야기는 뒤로 밀린 채, 갖가지 정치 다툼·경제 다툼·외교 다툼 따위만 다루다가는, 차별 문제·반민주 문제·막개발 문제조차 제대로 못 다루는 방송이지 않나요.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는 사람들 마음을 어떻게 건드리는지 궁금합니다.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영화나 연속극이나 운동경기나 새소식이나 정보나 토론이나 연설 들은 사람들 생각을 어떻게 움직이려는지 궁금합니다.

  고흥읍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이웃도시 순천으로 마실을 가서 한나절 지내고는 다시 고흥읍으로 와서 군내버스로 갈아타고는 시골마을 우리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합니다. 시외버스 타고 오가는 동안 내내 라디오 소리에 귀가 멍멍했고, 군내버스에 내리자마자 마을 어귀부터 훅 끼치는 고소하고 시원한 들바람에 개구리 노랫소리 가득 울려퍼집니다. 개구리 노랫소리 사이사이 아직 나즈막하다 싶은 풀벌레 노랫소리 섞입니다. 멧새 노랫소리는 개구리 노랫소리에 그예 파묻힙니다. 머잖아 이 밤에 개똥벌레 불꽃춤잔치 벌어지리라 생각합니다. 해마다 찾아오는 밤노래잔치 즐겁고, 해마다 다시 마주하는 개똥벌레 불꽃춤잔치 반갑습니다. 하늘 올려다보면 별이 쏟아지고, 멀리 내다보면 까만 밤하늘 가로지르는 멧자락 얼핏설핏 보입니다.


  라디오 방송 가운데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즈음 개구리 노랫소리나 제비 노랫소리 들려주는 적은 아직 없습니다. 텔레비전 방송 가운데 세 시간이나 네 시간 즈음 바람소리와 햇살내음이랑 풀노래랑 바다물결 골고루 보여주는 적은 아직 없습니다. 바람 따라 풀이 눕고 나뭇잎 살랑거리는 소리를 오래오래 들려주는 라디오 방송이 있을까요. 고래가 노니는 춤사위를 오래도록 보여주는 텔레비전 방송이 있을까요.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우리한테 어떤 이야기밭이 될까요.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지구별 사람들한테 어떤 사랑이나 꿈이 될 만할까요. 우리들은 꿈과 사랑을 헤아리면서 방송을 마주하는 삶인가요 아닌가요. 4346.5.2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당신은 어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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