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285) 고요의


 고요의 바다 → 고요 바다 / 고요한 바다

 고요의 집 → 고요한 집

 고요의 밤 → 고요한 밤

 고요의 순간 → 고요한 때


  한국말 ‘조용하다’는 ‘조용’만 따로 쓰는 일이 없지만, ‘고요하다’는 ‘고요’만 따로 쓰는 일이 꽤 있습니다. 다만, ‘고요’를 외따로 이름씨처럼 쓴다고 하더라도 ‘고요 + 의’처럼 쓸 수 있습니다. 그림씨인 ‘고요하다’는 “고요한 무엇” 꼴로 써야 올바르지, “고요의 무엇”처럼 쓰는 일은 모두 잘못입니다. 문학을 하는 이들이 글멋을 부린다면서 ‘-의’를 붙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4348.10.19.달.ㅅㄴㄹ



착륙 지점은 고요의 바다 한가운데다

→ 내릴 곳은 고요 바다 한가운데다

→ 내릴 곳은 고요한 바다 한가운데다

《사토 사토루/햇살과나무꾼 옮김-비밀의 달팽이 호》(크레용하우스,2000) 80쪽


모든 악몽 위에 세워진 / 고요의 땅

→ 모든 악몽에 세워진 / 고요한 땅

→ 모든 악몽에 세워진 / 고요 누리

《안희연-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2015) 14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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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338) 서로의


 서로의 행복을 빌다 → 서로 행복을 빌다 / 서로 잘되기를 빌다

 서로의 마음을 알다 → 서로 마음을 알다

 서로의 길을 가다 → 서로 길을 가다 → 서로 제 길을 가다

 서로의 사진을 찍어 주며 놀다 → 서로 사진을 찍어 주며 놀다

 서로의 성장을 돕는 이야기 → 서로 성장하도록 돕는 이야기

 아직 서로의 존재를 모른다 → 아직 서로 모른다


  한국말 ‘서로’에 ‘-의’를 붙여서 쓰는 사람이 차츰 늘어납니다. ‘서로’는 이 말투 그대로 쓰면 될 뿐인데 그야말로 군더더기를 붙이는 셈입니다. ‘서로’만 쓰면 되기도 하고, 때때로 ‘서로서로’처럼 쓰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로·서로서로’를 굳이 안 쓰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서로의 마음을 알다”는 “서로 마음을 알다”로 손보면 되는데, “마음을 알다”로만 손볼 수 있고 “둘은 마음을 알다”나 “둘은 서로 마음을 알다”처럼 손볼 수 있어요. “서로의 사진을 찍어 주며 놀다”도 “서로 사진을 찍어 주며 놀다”로 손보면 되고, “둘은 사진을 찍어 주며 놀다”나 “둘은 서로 사진을 찍어 주며 놀다”로 손볼 수 있습니다. 4348.10.13.불.ㅅㄴㄹ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서로 손을 꼭 붙잡고

→ 서로서로 손을 꼭 붙잡고

→ 손을 꼭 붙잡고

 《신지식-내 친구들 이야기》(성바오로출판사,1987) 37쪽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 서로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베른트 M. 베이어/유혜자 옮김-숲이 어디로 갔지?》(두레아이들,2002) 11쪽


서로의 집에 방문하기도

 서로 집에 찾아가기도

 서로 찾아가기도

《마이클 예이츠/추선영 옮김-싸구려 모텔에서 미국을 만나다》(이후,2008) 62쪽


서로의 껍질을 부비며 논다

→ 서로 껍질을 부비며 논다

→ 서로서로 껍질을 부비며 논다

《정영-화류》(문학과지성사,2014) 80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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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373) -의 : 두 아이의 엄마


나는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것이다

→ 나는 이제 두 아이 엄마가 되었다

→ 나는 이제 두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가 되었다

《김선영-가족의 시골》(마루비,2015) 151쪽


  “된 것이다”는 “되었다”로 손봅니다. 아이를 낳거나 돌보는 어머니라면 언제나 “아이 어머니”입니다. 아이를 보살피는 아버지라면 언제나 “아이 아버지”입니다. “아이 할머니”요 “아이 고모”입니다.


그 나무의 무성한 나뭇잎이 창문을 시커멓게 뒤덮어

→ 그 나무는 우거진 잎으로 창문을 시커멓게 뒤덮어

→ 그 나무는 잎으로 우거졌는데 창문을 시커멓게 뒤덮어

→ 그 우거진 나뭇잎으로 창문을 시커멓게 뒤덮어

《필리파 피어스/햇살과나무꾼 옮김-외딴 집 외딴 다락방에서》(논장,2005) 14쪽


  ‘무성(茂盛)한’은 ‘우거진’으로 손질합니다. 그런데, 이 보기글을 보면 “그 나무의 나뭇잎”처럼 나와요. 여러모로 어설픕니다. “그 우거진 나뭇잎으로”처럼 적든지 “그 나무는 우거진 잎으로”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이건 제우스 님의 명령이에요

→ 이건 제우스 님 명령이에요

→ 이건 제우스 님이 명령했어요

→ 이건 제우스 님이 시켰어요

→ 이건 제우스 님이 한 말이에요

《제럴드 맥더멋/노계순 옮김-석류 세 알의 비밀》(현북스,2012) 25쪽


  “제우스 님의 명령(命令)이에요”에서는 ‘-의’만 덜어도 됩니다. 한국 말투는 이렇게 ‘-의’만 덜어도 됩니다. 말꼴을 손질해서 “제우스 님이 명령했어요”로 적을 수 있고, 한자말 ‘명령’을 풀어내어 “제우스 님이 시켰어요”로 적어도 됩니다.


우리가 불려온 걸 보면 타살의 의혹이 있는 건가요?

→ 우리가 불려왔으니 타살한 의혹이 있는가요?

→ 우리가 불려왔으니 누군가 죽인 자취가 있는가요?

《모리모토 코즈에코/이지혜 옮김-개코형사 ONE코 11》(대원씨아이,2015) 15쪽


  “불려온 걸 보면”은 “불려왔으니”로 손보고, “있는 건가요”는 “있는가요”로 손봅니다. “타살(他殺)의 의혹(疑惑)”은 “타살한 의혹”으로 손질할 수 있고, “누군가 죽인 자취”로 손질할 수 있습니다. 4348.10.13.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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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1710) 조석


 조석으로 문안을 드린다 →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여쭌다

 조석을 가리지 않고 → 아침저녁을 가리지 않고

 조석 두 끼 먹기도 힘들다 → 아침저녁 두 끼 먹기도 힘들다

 조석을 짓다 → 아침저녁을 짓다


  한자말 ‘조석(朝夕)’은 “1. 아침과 저녁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썩 가까운 앞날 3. = 조석반”, 이렇게 세 가지로 쓴다고 합니다. ‘조석반(朝夕飯)’은 “1. 아침밥과 저녁밥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날마다 같은 때에 밥을 먹는 일”을 뜻한다고 해요. 그런데 ‘조석’이나 ‘조석반’은 한국말이 아닙니다. 한자말이지요. 한국말은 ‘아침저녁’입니다. 다시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아침저녁’을 “1. 조석 2. 조석반”처럼 풀이합니다.


  한국말사전은 한국말을 풀이하지 않고 한자말만 풀이하는 꼴입니다. ‘아침저녁’이라는 한국말에 말풀이를 달고, 한자말 ‘조석·조석반’은 ‘아침저녁’이라는 한국말하고 쓰임새가 같다고 적어야 올바릅니다.


  한국말사전에는 “국가 흥망이 조석에 달린 이때”나 “6백여 인의 생명이 조석에 있는 것을 보고도” 같은 보기글을 싣습니다. 이런 글월은 “나라가 사느냐 죽느냐 코앞에 달린 이때”나 “나라가 기우느냐 사느냐 발등에 떨어진 이때”, “6백여 사람 목숨이 눈앞에 있는 모습을 보고도”나 “육백 사람 남짓이 코앞에서 사느냐 죽느냐를 보고도”로 손볼 만합니다. 4348.10.12.달.ㅅㄴㄹ



조석으로 나를 불러다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나를 불러다 세우고

《한용운-한용운 수상집》(신구문화사,1975) 135쪽


서울에 살면서 조석으로 한강을 건너다니다 보니

→ 서울에 설면서 아침저녁으로 한강을 건너다니다 보니

《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창비,2015) 16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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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1758) 대안적


 대안적 시각 → 다른 눈길 / 새로운 눈길

 대안적 삶 → 다른 삶 / 새로운 삶

 대안적 유아교육 → 다른 유아교육 / 새 육아교육

 대안적 공동체 → 다른 공동체 / 새로운 두레


  ‘대안적’은 한국말사전에 없습니다. 한국말사전에는 ‘대안(代案)’만 싣고, 이 한자말은 “어떤 안(案)을 대신하는 안”을 뜻합니다. ‘대신(代身)하다’는 “어떤 대상의 자리나 구실을 바꾸어서 새로 맡다”를 뜻해요. 그러니, ‘대안’이란 “새로 맡는 안”을 가리키는 셈입니다. “대안을 내놓다”는 “다른 생각을 내놓다”나 “새로운 생각을 내놓다”로 손볼 만하고, “대안을 제시하다”는 “다른 생각을 내놓다”나 “새로운 생각을 내놓다”로 손볼 만합니다. “현실적인 대안을 찾다”는 “현실에 맞는 다른 길을 찾다”나 “현실에 맞춰 새로운 길을 찾다”로 손볼 만하지요.


  요즈음은 “대안 교육”이나 “대안적 교육”을 흔히 이야기합니다. 교육을 놓고 ‘대안·대안적’을 따진다면 “새로운 교육”이나 “틀에 박히지 않는 교육”이나 “다른 교육”이나 “다른 삶을 나누는 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다. 4348.10.12.달.ㅅㄴㄹ



대안학교는 말 그대로 ‘대안적인’ 교육을 실천하는 배움터

→ 대안학교는 말 그대로 ‘대안’ 교육을 펼치는 배움터

→ 대안학교는 말 그대로 ‘대안’ 교육을 나누는 배움터

→ 대안학교는 말 그대로 ‘다른’ 교육을 하는 배움터

→ 대안학교는 말 그대로 ‘새로운’ 길을 가르치고 배우는 터

《윤성근-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매진,2009) 78쪽


삶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기술을 익혀야 대안적인 생각도 떠올릴 수 있다는

→ 살아가는 기본 기술을 익혀야 다른 생각도 떠올릴 수 있다는

→ 삶을 짓는 바탕이 될 솜씨를 익혀야 새로운 생각도 떠올릴 수 있다는

→ 살림을 짓는 밑솜씨를 익혀야 새 생각도 떠올릴 수 있다는

《김선영-가족의 시골》(마루비,2015) 147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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