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쿠와 류시화와 번역



  나는 ‘하이쿠’라는 일본 시를 아마 1998년에 처음 읽었지 싶다. 하이쿠라는 낱말도, 또 이러한 일본문학이 한국말로 나온 책도, 그무렵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때에 일본 하이쿠라는 문학을 ‘스스로 일본말을 공부하면’서 읽어 보는데, 참으로 놀랍고 재미나면서 쉬운 문학이로구나 하고 느꼈다. 일본 ‘하이쿠’는 누구나 쓰면서 누구나 읽되, 아무나 못 쓰고 아무나 못 읽는 문학이다. 그러니 얼마나 재미있는가. 누구나 쓰면서 누구나 읽는다. 그러나, 아무나 못 쓰고 아무나 못 읽는다.


  일본만화 《알바 고양이 유끼뽕》을 아는 분이 있는가 모르겠는데, 이 만화가 일본에서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 편마다 ‘하이쿠로 쓴 감상평’을 받아서 이 가운데 명작을 싣곤 했는데, 창작도 번역도 엄청나게 훌륭하다. 고양이와 얽힌 하이쿠를 이렇게 재미나면서 쉽고 아름답게 쓰다니, 하고 놀란 일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류시화 님은 2003년에 김영사라는 출판사에서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책을 한국말로 옮겼다. 이 책이 처음 나올 때부터 판이 끊길 적까지, 이 책 ‘지은이’로는 오직 ‘류시화’ 이름만 나온다. 적어도 이 책에 글을 넣게 된 북아메리카 원주민 이름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북아메리카 원주민 사진을 찍은 미국사람 이름까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책에는 맨 끄트머리에 아주 깨알, 아니 코딱지만 하게 작은 글씨로 ‘사진 찍은 사람’ 이름이 나오지만, 이녁 저작권을 밝히지도 않고, 저작권료도 지불하지 않는다. 아주 마땅한 노릇일는지 모르나, ‘사진가 이름’은 서지사항에서 아예 빠진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책에 실린 사진을 찍은 사람은 ‘에드워드 커티스’ 님이고, 이분 사진을 담은 사진책은 2011년에 비로소 한국에서 처음 번역된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이라는 이름을 달고 눈빛 출판사에서 펴낸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지만, 김영사에서 나온 책이나 눈빛에서 나온 책은 해상도가 아주 떨어진다. 원본을 받아서 책을 냈는지 어떠했는지 알 길이 없는데, 김영사 판은 류시화 님이 손수 ‘모았다’고 하는 책에서 스캔을 했을 테니 해상도가 떨어지고, 눈빛 판은 인쇄 질이 떨어져서 해상도가 엉망이다. 두 가지 책 모두 실망스러워서 나는 일본 판과 미국 판을 따로 해외배송으로 장만했다. 아니, 두 가지 책을 만나기 앞서 외국에서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책을 장만해서 건사했다. 제대로 된 사진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영사에서 나온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책에서는, ‘사진 저작권’이 류시화 님한테 있다고 한다. 김영사 편집부로 두 차례 확인전화를 걸었는데, 그곳 편집장이 나한테 이렇게 ‘확답’을 해 주었다.


  번역이란 무엇일지 잘 모르겠다. 외국책을 한국에서 펴낼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외국문학을 읽을 적에 꼭 외국말로 읽어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한국말로 읽을 수 있다면 더없이 고마운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산문이 아닌 시를 번역한다고 하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산문이든 시이든 저마다 ‘글쓴이 가락’이 있는데, 이를 어기고 번역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바꾼 가락으로 풀어놓으면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일본문학 하이쿠는 ‘일본말과 한자’를 안다고 다 헤아릴 만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하이쿠는 그야말로 쉽게 쓰는 문학이니까, 일본말과 한자를 어느 만큼 헤아린다면, 누구라도 읽을 수 있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쉬우면서 어려운 문학이 하이쿠이니까, 일본말과 한자를 안대서 하이쿠를 누구나 번역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형 하이쿠’를 ‘정형 번역’으로 하지 않으면 무엇이 번역일까?


  하이쿠는 그냥 하이쿠만 있지 않다. ‘정형 하이쿠’가 있고 ‘자유 하이쿠’가 있다. 정형 하이쿠를 ‘자유로운 번역’으로 옮기면, 자유 하이쿠는 어떻게 옮겨야 할까? 일본사람이 그네들 스스로 ‘정형 하이쿠’를 정형 하이쿠대로 글잣수를 맞춰서 쓰는 까닭이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한국에서는 정형 하이쿠를 그야말로 ‘정형 한국말 글잣수와 틀’까지 헤아려서 땀흘려 번역했다.


  류시화 님이 이녁 나름대로 일본문학 하이쿠를 번역했다고 하지만, ‘정형 하이쿠’를 정형 얼거리대로 번역하지 않으면서 자꾸 ‘자유’로운 번역을 말한다면, ‘자유 하이쿠’를 어떻게 읽고 느껴야 할는지 알쏭달쏭하다. 일본문학은 류시화 님도 아시리라 생각하는데, 그렇게 ‘우리(한국) 마음대로 바꾸어서 번역해도 되’지 않는다. 거꾸로 생각해 보라. 한국문학을 저들(일본이든 어디이든) 마음대로 번역해도 될까?


  한국말에서 도드라지는 토씨를 외국사람이 아무렇게나 바꾸어서 번역해도 될까? 류시화 님이 열 몇 해만에 드디어 ‘정형 하이쿠’를 ‘정형 하이쿠’대로 번역했다면, 나는 하이쿠라는 일본문학을 좋아하니까 그 책을 사서 읽고 싶다. 그러나, ‘알라딘서재에서 나귀님한테 댓글을 남기는 류시화 님 모습’을 볼 적에는 그리 미덥지 못하다. 그뿐이다. 4347.7.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과 책읽기)

+


'에드워드 커티스' 사진 해상도를 놓고는

http://blog.aladin.co.kr/hbooks/5071237

이 글에서

일본책과 미국책과 한국책을 나란히 놓고

'사진을 찍어서 올린' 적이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살펴보시기를 바란다.




예전 느낌글에도 적고 올렸는데,

세 나라 책을 살피면,

일본이 사진을 가장 잘 매만졌고

미국이 볼 만하도록 사진을 매만졌으며

한국은 사진을 먹으로 발라 버리고 말았다.



일본에서는 어떻게 저만 한 사진을 얻었을까?

한국에서는 왜 왼쪽과 같은 사진이 나올까?





오른쪽 사진처럼

주름살과 옷감 결을 살리지 못하면

이 사진은 '빛이 사라진'다.


커티스 유족과 제대로 만나서 

제대로 값을 치러서

사진을 받아

책을 펴낸다면,

왼쪽 모습과 같은 사진은 나오지 않을 텐데,

제대로 만나서 사진을 받더라도

사진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똑같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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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국어사전 (아이들한테 줄 책이란)



  동화를 쓰는 채인선 님이 2008년에 《나의 첫 국어사전》이라는 책을 선보였다. 참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했으나, 책이름이 몹시 걸렸다. 왜 ‘나의’라는 말을 쓰는가? 아이들이 처음 볼 국어사전인데 왜 ‘나의’인가? 한국말은 ‘내’이다. 일본사람이 일본말로 ‘私の’라 쓰는 말투를 엉성하게 한국말로 옮긴 ‘나의’를 쓸 일이 아니다. 어른이 읽을 보면, 이를테면 유홍준 님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고 이름을 붙인다. 이 책이 얼마나 많이 팔리고 읽혔는가. 이렇게 엉터리로 붙인 ‘나의’는 이 나라 말글을 얼마나 망가뜨리는가. 유홍준 님 책에서는 ‘나의’를 빼면 한결 낫다. 또는 ‘우리’를 넣든지.


  채인선 님이 내놓은 책도 “첫 국어사전”이라 하든지 “내 첫 국어사전”이라 해야 올바르다. 그렇지만, 2009년부터 2014년까지 글쓴이나 엮은이 모두 이러한 대목을 살피지 않거나 못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렇게 책이름을 옳게 바라보지 못하는 눈썰미는, 책에 깃든 이야기로도 똑같이 이어진다. 따로 긴 느낌글을 쓰려 하는데, 한 가지 보기만 든다면, 《나의 첫 국어사전》은 ‘더럽다’를 풀이하면서 “때가 묻었거나 지저분한 거예요.”라 적는다.


  이렇게 풀이하면 아이나 어른이 얼마나 알아들을 만할까. “더럽다 = 지저분하다”라고 낱말풀이를 적어도 되는가? 두 낱말은 똑같은가? 아이가 읽도록 어른이 만든 선물이라는 “첫 국어사전”에서 이런 말풀이가 곳곳에 자주 나온다.


  ‘생명·안경·안전·예술·앵무새·아이스크림’ 같은 낱말을 굳이 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더럽다’와 ‘지저분하다’를 옳게 살피고 바르게 쓰도록 이끌 수 있게끔 마음을 기울여야 하지 않나 궁금하다. 아이들이 뻔히 알 만한 낱말은 굳이 “첫 국어사전”에 싣지 않아도 된다.


  문학을 하거나 사전을 엮는 이들이 한국말을 올바르게 쓰지 못할 뿐 아니라 올바르게 들려주지 못하면, 이 나라 아이들 앞날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4347.5.2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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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름을 바꾸는 바보짓 (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



  2013년에 시공아트라는 출판사에서 한국말로 옮긴 《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이라는 책이 있다. 나는 한국말로 붙은 책이름이 처음부터 못마땅했다. 우리 삶은 언제나 춤인데 왜 ‘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이라고 할까? 한국말로 나온 책을 달포쯤 앞서 장만한다. 책이름이 마뜩하지 않아 한 해 즈음 안 쳐다보다가 비로소 들여다본다. 책을 거의 다 읽을 무렵 문득 궁금해서 살펴보니, 미국에서 2012년에 처음 나올 적에 붙은 이름은 《Dancers Among Us: A Celebration of Joy in the Everyday》이다.


  이 사진책을 선보인 미국사람은 요즈음도 사진을 꾸준히 찍는다고 한다. 그러면, 미국 사진가는 어떤 넋으로 사진을 찍을까? 바로 ‘Dancers Among Us’라는 넋으로 사진을 찍는다. ‘Dancers’는 “춤꾼들” 또는 “춤을 추는 사람들”이다. “Among Us”는 “우리 사이에서”나 “우리 곁에서”나 “우리와 함께”나 “우리한테 둘러싸여서”라고 할 만하다. 그러니까, “우리 곁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이나 “우리와 함께 춤추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큰이름 옆에 붙인 작은이름을 본다. ‘A Celebration of Joy in the Everyday’는 무엇을 뜻할까. “날마다 즐거운 잔치”이다.


  사진을 찍은 미국사람은 “우리와 함께 춤을 : 날마다 즐거운 잔치” 또는 “우리가 함께 춤을 : 언제나 즐거운 잔치”라고 노래한다. ‘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 하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 삶은 언제나 춤’이기에 ‘날마다 즐거운 잔치’라고 말한다.


  이름을 어떻게 붙이느냐는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 뜻을 제대로 밝히지 않고 붙여서 잘못 퍼뜨리는 이름은 속내와 속살을 엉뚱한 쪽으로 이끌 수 있다.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즐겁게 춤을’쯤으로 책이름을 붙일 만했고, 이렇게 붙이는 이름이 사진가 넋을 잘 헤아릴 뿐 아니라, 이 사진을 마음에 담아 날마다 새롭게 웃고 노래하며 춤출 수 있도록 이끄는 빛이 되리라 느낀다. 4347.5.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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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짚고 알려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이방인 번역)



  외국책이 한 가지 번역만 있으라는 법이 없다. 한국사람이 쓴 한국문학이라면 한 가지 책만 있을 테지만, 외국사람이 쓴 외국문학은 여러 가지 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모비딕》 번역이 한 권만 있을 수 있을까? 《앤》 번역이 한 가지만 있을 수 있을까? 《창가의 토토》 번역이 한 권만 있을 수 있을까? 어린이 그림책인 《생쥐와 고래》조차 ㄷ출판사 판과 ㅅ출판사 판 번역이 다르다. 러시아 옛이야기를 다룬 《장갑》이라는 그림책도 두 가지 번역책이 있다. 번역하는 사람 삶과 넋뿐 아니라, 번역하는 사람이 어린이를 마주하는 매무새에 따라 번역이 달라진다. 한 가지 번역만 있어야 한다면 《삼국지》나 《수호지》는 앞으로 아무도 번역해서는 안 된다. 한글 아닌 한문으로 글을 쓴 옛사람 책도 한 사람만 번역하고 더는 번역해서는 안 된다.


  지난날에 한글 아닌 한문으로 글을 쓴 그분들이 되살아나서 한문 아닌 한글로 글을 다시 쓰지 않는다면, 한국사람이 빚은 책과 문학조차 여러 가지 번역이 나올 수밖에 없다. 글쓴이 넋은 글쓴이가 오롯하게 알지, 다른 사람은 오롯이 알 수 없다. 번역하는 말씨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글맛이 아주 달라져, 린드그렌 님이 쓴 문학도 어떤 사람이 옮겼느냐에 따라 이야기마저 다르게 느끼곤 한다. 《사자왕 형제 모험》 같은 작품은 번역판이 너덧 가지 있고, 너덧 가지마다 글맛이 다르다. 그렇다고 어느 한 가지 책만 읽으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정서라는 분이 새로 옮긴 《이방인》을 놓고 참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게다가 이정서라는 분이 새로 옮긴 《이방인》에서 드러나는 잘잘못을 여러 사람이 찬찬히 짚어서 꼼꼼하게 알려준다. 그리고 이정서라는 분을 비롯해 《이방인》을 펴낸 출판사에서는 이 번역책에서 드러나는 잘잘못을 독자가 짚거나 알려주거나 밝혀도 그리 반기지 않을 뿐더러, 고맙게 여기지 않는다.


  독자는 어떤 사람일까. 출판사에서 책을 내면 독자는 고스란히 믿고 따르기만 할 사람인가? 번역자와 출판사 대표는 어떤 사람일까. 독자가 짚거나 알려주거나 밝히는 잘잘못을 모두 내팽개치면서 거친 말을 퍼붓는 사람인가?


  가만히 보면 처음부터 모든 이야기는 ‘끝’이 있다. 《이방인》이라는 책을 새로 번역한 새움출판사는 독자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말이라든지 “25년을 속아 온 번역의 비밀”이라는 광고 글월이 모든 것을 말한다. 번역자와 출판사 대표와 직원 모두, 독자는 ‘출판사가 내놓은 책을 받아먹기’만 해야 한다고 여길 뿐이다. 이정서와 새움출판사는 모두 ‘25년 동안 속으며 살아온 독자가 바보’라는 생각을 처음부터 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다른 번역자를 함부로 깎아내릴 뿐 아니라, 독자가 알려주는 잘잘못을 놓고 온갖 핑계와 막말을 일삼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정서와 새움출판사한테는 한 마디 말을 들려줄밖에 없다. 오직 한 마디뿐이다. “이 책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라 새움출판사의 이방인이다. 카뮈가 쓴 이방인이 아니라 새움출판사가 쓴 이방인이다.”


  이정서와 새움출판사가 독자 앞에서 제대로 뉘우치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앞으로 새움출판사가 하는 일과 이곳에서 펴내는 책을 하나도 믿을 수 없다. 독자는 바보가 아니니까. 독자는 책을 사랑하고 문학을 아끼는 사람이니까. 4347.5.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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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 2014-07-13 07:0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최종규님, 이정서입니다.
블로그에 올리신 글들을 보면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사시는분 같은데 왜 유독 <이방인>에만 이렇듯 섬뜩한 적의를 품는지 안타깝습니다. 초기에도 아마 제가 선입관을 갖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독자님들 같은 분들의 오해를 영원히 가지고 갈 수 없기에 제나름 최선을 다해볼 생각입니다. 오해를 풀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연재를 시작하며>



안녕하세요, ㅇㅇㅇ입니다.

어제 이십년이 넘도록 의문을 갖고 있었던 이방인을 오랫만에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프랑스언어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문학전공자가 아닌 까닭에 이방인의 소설적 가치를 미처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생각했었습니다.

세상을 바꿨다는 소설에 왜 나는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죄책감마저 생길 정도였어요. 번역본이라 이해가 잘 안 되는 걸까 생각하며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원서완독에 도전했습니다만, 그땐 어려서였는지 해석은 되지만 그렇다해도 뫼르소와 주변인물의 캐릭터를 완벽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번역서와 원서를 같이 두고 읽어보기도 했죠. 아무리 생각해도 의역이다 싶었지만, 번역도 일종의 문학장르니까 그럴수 있구나 했습니다. 이정서 선생님의 번역본을 읽으면서 깨달았어요. 그때 선생님처럼 분노했어야했다는 걸요...그가 맞겠지, 내가 몇년 공부했다고...라며 아 역시 난 문학체질은 아닌가봐 했던 게 후회됩니다. ^^



요점은, 이방인이 엄청난 재미를 주는 소설이자 진짜 세상을 바꾼 책이 맞다는 걸 2014년에라도 알려주셔서 감사하단 거예요.

책의 뒷장에 장승일 선생님께서 쓰신 글에 완전공감합니다.

이방인이 좀 더 일찍 제모습을 드러냈다면 전국 대학에서 불어불문학과가 덜 없어졌을 수도 있었을텐데, 아쉽습니다. ^^

이방인을 주변에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남편도 곧 읽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얼마 전 한 독자로부터 받은 메일입니다.

제가 포기하려할 때면 날아들었던 이런 격려글 들이 곧, ‘카뮈로부터 보내 온’ 편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믿음을 주신 분들을 위해서도 제가 무너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그래서 연재는 다시 시작되었고, 끝까지 가보려 합니다.

독자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정서
 

치비 마루코짱, 모모는 엉뚱해, 마루코는 아홉 살



  한국말로는 《모모는 엉뚱해》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일본 만화가 있다. 이 이름을 보고는 어떤 만화인지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 이름 《치비 마루코짱(ちびまる子ちゃん)》을 한국판에서 요모조모 바꾸어서 붙였더라. 책이름도, 주인공 이름도 왜 이렇게 바꾸어야 했을까. 한국 어린이한테 보여주는 만화영화로는 〈마루코는 아홉 살〉이라는 이름을 쓴다. 한국에서 나오는 만화책으로도 만화영화로도 ‘치비’라는 낱말을 살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만화를 그린 이 이름이 ‘사쿠라 모모코’이니, ‘모모코’에서 ‘모모’를 따서 한국판 만화책 이름으로 삼았다고도 여길 수 있다.


  그동안 일본 만화영화를 아이들과 더러 보곤 하다가 오늘 처음으로 ‘한국말로 흐르는 만화영화’를 찾아서 본다. 한국에서도 이럭저럭 이 만화영화를 옮겨서 보여주는구나 싶다. 그런데 퍽 오래된 일본 만화영화를 요즈음에도 그대로 보여주지 싶다. 이렇게 묵은 만화영화를 이렇게 보여주기도 하는구나 싶어 놀라는 한편, 한국에서는 이처럼 수수하며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얼마나 삭히거나 보여주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한국에는 《안녕 자두야》가 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안녕 자두야》는 만화책으로도 만화영화로도 많이 딸린다. 억지스레 웃기려는 대목이 많고, 거친 말투라든지 떼를 부리는 모습이 잦다고 느낀다. 식구들이 오순도순 지내는 사랑을 느끼기 어렵다고 해야 할까. 치고받거나 툭탁거리더라도 《아따 맘마》처럼 푸근한 맛이 없는 《안녕 자두야》라고 느낀다. 만화책을 몇 권 읽어 보아도 《안녕 자두야》에 나오는 말마디는 도무지 아이한테 보이거나 읽히기에 알맞지 않다. 참말 아이들이 이런 말투대로 동무를 사귀거나 놀아야 할까?


  《치비 마루코짱》에 나오는 마루코네 다른 동무 가운데 ‘사내’ 아이 말투는 한국 아이들 못지않게 거칠다. 그러나, 주인공인 마루코는 다르다. 주인공인 마루코는 곧잘 엉뚱하게 꿈에 젖곤 하지만, 수수하며 착하고 예쁘다. 공주님 같은 예쁨이 아니라 수수하게 맑은 마음결이 예쁘다. 그러고 보면 거칠게 노는 아이가 나오는 《하나다 소년사》조차 주인공 ‘사내’ 아이가 보여주는 마음씨나 몸가짐은 밑바탕이 착하고 맑다. 참 그렇다.


  나한테 아이가 없다면, 아이가 없이 그저 만화만 보았다면, 아이가 만화를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아 찬찬히 즐기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않았다면, 이런 만화이든 저런 만화이든 자잘한 말씨와 몸가짐과 움직임과 줄거리까지 두루 살피지는 못했으리라고 문득문득 깨닫는다. 4347.5.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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