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신문>에 주마다 한 번씩 싣는 글. 어느덧 스물한 번째 글이 되었네.

그나저나, 글에서 이야기하는 <민족통일을 위하여>는 미처 겉그림을 긁어 놓지 못했다 ^^;;;








 책으로 보는 눈 21 : 어떤 책을 선물받고 싶나



 2001년 세상을 떠난 송건호 님이 1986년에 써낸 책 《민족통일을 위하여》(한길사)가 있습니다. 227쪽자리 조그마한 판으로, 이 나라 민족지성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현대 역사는 어떻게 연구해야 좋은가, 식민사관은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는가, 일본과 우리 나라는 어떻게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가, 오늘날(1980년대)을 살아가는 젊은이들한테 바라는 일, 통일 이야기로 무엇을 주고받으면 좋을까, 남북이 나뉘어 있는 이 땅에서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들을 차근차근 짚어 나갑니다.

 지난 2004년, 전교조 ㄷ지부를 찾아가서 학교 선생님들 앞에서 우리 말 이야기를 들려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 나이 또래 선생님도 계셨겠지만, 저보다 한참 나이든 선생님들이 많았습니다. 모두들 나어린 사람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습니다. 배워야 할 일이 있으면 자기보다 한참 젊거나 어린 사람들 말도 귀담아들어야 좋음을 살갗으로 느꼈습니다. 이날, ㄷ역에서 모임터까지 차로 실어다 준 선생님이 있습니다. 그분한테 “오늘 ㅇ동 헌책방거리에서 송건호 님 책을 한 권 우연하게 만났어요(전집이 나오기 앞서까지 송건호 님 책은 거의 모두 절판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또 찾을 수 있으니, 선생님이 한번 읽어 보셔요.” 하고 말하며 《민족통일을 위하여》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께서는 “송건호요? 어떤 분이지요?” 하고 물으십니다. “……. 1975년에 동아일보를 그만두시고, 1988년에 한겨레신문을 만드셨던 분인데, 모르시겠어요?” “하하, 제가 책을 잘 안 읽어서요.” “책 읽을 틈은 없으셔도 신문 읽으실 틈은 있으실 텐데.” “저는 그 책을 받아도 읽을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최 선생님께서 그냥 읽으시지요.” “저는 예전에 읽은 책입니다. 오늘 모임에서 만나는 분한테 선물로 드리려고 일부러 한 권 샀어요. 우리 삶을 밝힌 훌륭한 어른 가운데 한 분인 송건호 님이에요. 바쁘시더라도 한번 살펴보시고, 학교에서 아이들한테도 이런 분 이야기를 들려드리면 좋으리라 생각해요. 읽어 보시고 괜찮으면 다른 선생님을 드리셔도 좋고, 그다지 마음에 안 드시면 헌책방으로 가지고 가 파셔도 좋고요.”

 그 뒤로 세 해가 지난 2007년 가을, 아직까지 송건호 님 《민족통일을 위하여》라는 책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분은 책 읽을 틈도 없고 송건호 님도 모른다고 했으니 그 책을 드리지 말았어야 했나 모르겠습니다. 송건호 이름 석 자만 알고 이분 삶과 생각을 잘 모르는 분한테 드리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송건호 님 이름과 삶을 조금은 알지만, 이분 생각과 발자취를 잘 모르는 분한테 드리는 편이 한결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민족통일을 위하여》는 거의 눈에 뜨이지 않지만, 《민족지성의 탐구》나 《한국현대사론》이나 《한국현대인물사론》 같은 책은 헌책방에서 곧잘 보입니다. 다만, 이 책들은 책이름을 한자로 적어 놓고 있어서 알아채는 분이 갈수록 줄어듭니다. ‘송건호 언론상’을 받는 분들한테 송건호 님 책을 드리면 반가이 받아들며 읽어 주실까요. (4340.10.1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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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20 : 어떤 책을 선물할까


 모리모토 코즈에코라는 사람이 그린 만화 《조폭 선생님》을 봅니다. 주인공은 조직폭력배 후계자인 딸이자 고등학교 수학선생. 조직폭력배 집안에서 태어나 조폭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세상사람들, 이 가운데 학교 교사들은 조폭을 쓰레기처럼 여겹니다. 어린 딸아이는 커서 교사가 되기로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잘못된 생각에 아이들이 물들지 않으면서 자기 꿈을 키우고 밝게 살아가기를 바라며.

 산바치 카와라는 사람이 그린 만화 《4번 타자 왕종훈》 쉰두 권을 다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배정서를 잘못 받아 엉뚱한 학교로 가게 된 시골아이 왕종훈은 야구 솜씨가 하나도 없었지만, 농사꾼 아들답게 땀방울 하나로 모든 어려움을 스스로 이겨내면서 자기가 사랑하고 아낄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갑니다. 키 160센티미터도 안 되는 땅꼬마이지만, 이 땅꼬마는 터무니없다고 할 만큼 연습과 훈련을 거듭하면서, 겉모습으로만 얕잡아보는 사람들 매무새를 속속들이 깨뜨립니다.

 “일본사람은 엉터리라서 일본만화가 재미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이 갑자기 하늘을 날아도 “네, 하늘을 나는군요” 하고 받아들일 뿐이랍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만화에서도 “사람이 하늘을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일”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한국만화 가운데 적잖은 숫자는 억지나 거짓으로 느껴집니다.

 《기독교의 전도자 6인》(신구문화사,1976)을 읽으니, 조선 시대에 천주교를 받아들여 온몸으로 믿고 따르던 정하성이라는 분은, 천주교리 참뜻을 헤아리며 착하고 올곧게 살아가려고 애쓸 뿐, 자기 뱃속을 차리려는 생각이 없었다고 합니다. 《자살에 관한 어두운 백서》(종로서적,1981)를 읽으니, 프랑스 사회에서도 엉터리 같은 일이 참 흔히 일어나는군요. 공무원들은 ‘공무집행’만 하고, 자기가 하는 공무집행 때문에 삶이 무너지고 살아갈 빛을 잃으며 목숨을 끊는 사람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거야 댁의 문제지요. 저는 돼지고기 상점의 보건 상태를 조사할 뿐입니다. 시설개조를 못하신다면 영업을 계속 하실 수 없을 겁니다.(150쪽)”라고 말하며.

 《오카방고의 숲속학교》(갈라파고스,2005)라는 책을 읽습니다. 아직 초중고등학교를 다닐 아이들이 어머니를 따라 아프리카로 삶터를 옮깁니다. 세계지도를 펴놓고도 보츠와나가 어디 있는지 찍지 못하던 아이들이었는데, “차 뒷자석에 앉아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아주 작은 것들(170쪽)”을 보게 되고, 저마다 자기한테 무엇이 중요하고 아름답고 고마운지 몸으로 깨닫습니다.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삼성미술문화재단,1994)를 읽습니다. 독재정권이 그림 그릴 자유를 억눌렀지만, 이 억누름은 이응노 님 스스로 새 그림세계를 열도록 도와주기도 했군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예비후보들이 펴낸 책이 하나둘 나와 출판기념잔치를 벌입니다. 이 책들은 누구한테 주려고 만들까요. 이 책들에는 무슨 이야기를 담을까요. 선거가 끝난 뒤에도 살가운 동무한테 선물할 만한 책으로 이어갈까요. (4340.9.1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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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명에서 볼일을 본 어제 낮, 자전거를 몰고 남구로를 지나고 대림동을 지나고 보라매공원을 스쳐서 영등포에 이릅니다. 영등포역을 웃지르는 고가도로를 탑니다. 영등포역 둘레에 조용히 자리한 지붕 낮은 집이 몇 군데 보입니다. 비바람에 지붕 날아가지 말라며 벽돌로 꾹꾹 눌러놓았네요. 어느덧 여의도를 지나 당산역. 한강시민공원으로 잠깐 접어듭니다. 여섯 달 만에 지나가 봅니다. 그때나 이제나 자전거 타고 시민공원 들어가는 길은 참 알쏭달쏭입니다. 길이 익숙한 사람 아니고는 들어갈 구멍을 찾을 수 없습니다. 길알림판이란 보이지 않으니까요. 가파른 구름다리 계단을 끙끙거리며 자전거를 밀고 올라갑니다. 차라리 들고 올라가는 편이 나을까. 한강다리를 건너고 합정동으로 나옵니다. 자전거가 안쪽 길로 들어가도록 마음써 주는 자동차가 좀처럼 없었으나 그예 한 대가 살살 멈춰 줍니다. 고개 꾸벅. 홍대전철역 앞을 지날 무렵, 뒤에서 자전거를 들이받을 듯 마구 모는 스포츠카 한 대. 버스는 정류장에 반듯하게 대지 않아 뒷차는 하는 수 없이 길에 뻘쭘하게 서고. 차방귀와 자동차에서 내는 뜨거움을 옴팡 뒤집어쓰며 동교동에 닿습니다.

 오랜만에 서울 시내를 자전거로 달렸습니다. 다른 곳에서 달릴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아이를 낳아 기르는 아버지 어머니들은 자기 딸아들이 자전거를 몰고 볼일을 보러 다녀도 앞뒤옆에서 윽박지르거나 괴롭히거나 갑자기 끼어들까요. 당신한테 아버지나 어머니 되는 사람이,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되는 사람이, 또는 살가운 벗님이 자전거를 타고 다녀도, 골목길에서 불쑥 튀어나와 놀래킬까요.

 동교동 헌책방에서 가쁜 숨을 가라앉히며 책을 구경합니다. 제 뒤로 지나가다가 툭 치는 책손이 있습니다. 제가 책을 구경하는 자리에 밀치고 들어오는 책손도 있군요. 마침 그림책을 살피고 있는데, 책방 문을 열자마자 제 옆자리로 밀치고 들어온 분은 아이들 영어 그림책을 고릅니다.

 신촌에 있는 헌책방 한 군데 더 들릅니다. 오늘은 몸이 찌뿌둥해서 책 구경은 이쯤에서 접기로 하고, 다시 자전거를 몰아 신촌닷거리에서 애오개로 내닫습니다. 덩치 큰 버스는 자전거한테 1미터를 내주기보다는 빵빵거림으로 주눅들게 합니다. 노란 학원버스는 어디에서나 신나게 내달립니다. 저 버스에는 틀림없이 아이들이 타고 있을 테지요. 아이들은 뒷날 운전면허증을 따서 차를 몰게 될 때에 어떤 매무새일까요.

 어린이책은 나날이 수없이 쏟아지고 아버지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부지런히 ‘좋은 책’을 많이 사 주십니다. 비록 중학교 들어가는 때부터는 ‘좋은 책’은 뚝 끊어지고 ‘학습지와 참고서’로 바뀌긴 해도. 그나저나 우리 어버이들은 당신 스스로 어린이책을 읽고 삭이고 되뇌인 뒤 아이들 손에 쥐어 주고 있을까요. 어린이책에서 말하는 가르침은 ‘이웃과 자연을 사랑하고, 나보다 가난하거나 힘없는 이를 돕고, 잔꾀 부려 남을 괴롭히지 말며, 오순도순 서로 아끼며 살라’일 텐데. (4340.9.1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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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여름 ㅎ출판사에 원고뭉치를 보냈습니다. 계약서를 쓰고 책 한 권 내기로 합니다. 그렇지만 ㅎ출판사 분들은 이 일에 치이고 저 일에 바빠서 제 원고뭉치를 책으로 묶어낼 낌새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원고를 보내고 반 해가 지나도록 제 원고를 살펴볼 틈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먹고살 돈이 바닥을 칩니다. 이 원고뭉치로 책 하나 묶어내면 그나마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데. 애가 타고 혀가 타고 입술이 타고 온몸이 바싹바싹 마릅니다.

 그러다가 지난달, 예전 원고뭉치는 없애기로 하고 새 원고꾸러미를 마련하기로 이야기합니다. ㅎ출판사 분들은 제 원고를 읽어 보지 않으셨으니 그 글 그대로 책 하나 묶어도 좋은지 모자란지 모르실 테지요. 반 해가 지나고 한 해가 되어 가는 동안 제 스스로 느낍니다. 예전에 쓴 제 글이 참 엉성하다고, 어줍잖다고, 어설프다고. ㅎ출판사에서 제 원고뭉치를 곧바로 책으로 묶어 주었다면, 저는 적잖은 글삯에다가 책 하나 세상에 더 내놓았다는 훈장을 가슴에 달 수 있었겠지요. 어쩌면 어렵지 않게 살림이 펴지면서 제 글을 좀더 단단하게 여미거나 튼튼하게 추스르는 쪽으로는 마음을 덜 기울여 버렸겠지요.

 프랑스 만화가 ‘기 들릴’이라는 분이 일 때문에 평양 나들이를 하게 되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일을 만화로 담아낸 《평양》(문학세계사,2004)을 보고 있습니다. 평양 시내에 큼직하게 걸린 포스터 하나를 17쪽에 옮겨 그렸는데, 포스터 아래쪽에 적힌 ‘한글’을 한국사람이 못 알아볼 만큼 옮겼습니다. 프랑스사람한테 한글은 낯설고 어렵고 꼬불탕꾸불탕거리는 지렁이 움직임이었을까요.

 스물네 살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박병태란 분 글조각을 모아 엮은 《벗이여, 흙바람 부는 이곳에》(청사,1982)를 읽다가 “만약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의 발전을 막고, 인간으로서의 가치의 발현을 제거해 버렸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그 자를 벌해야 할까.(82쪽)” 하는 물음에 잠깐 책을 덮습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한 사람은 법에 따라 죄를 물린다지만, 마음에 생채기를 입히고 그지없는 꿈을 짓밟은 사람은 어떤 법으로 죄를 물릴 수 있을까요.

 서울 대방동에 있는 헌책방에서 《서울의 양심》(시인사,1988)이라는 시모음 하나 만납니다. 반가운 마음에 집어들어 만지작만지작하다가 제자리에 놓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제 책꽂이에서 《서울의 양심》을 찾아내어 처음부터 찬찬히 다시 읽습니다. 세상은 정희수 시인을 절름발이라고 가리키지만, 정희수 시인을 가리켜 절름발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눈매가 바로 ‘절름발이’ 아니겠느냐고, “자네가 만든 그 팻션 중에 / 장애자가 입을 수 있는 것이 있는가(증인신문 4―앙드레 김에게)”라는 말처럼 비장애인들이야말로 절뚝절뚝 걷고 있지 않느냐고 되뇌입니다. 〈시민사회신문〉 18호 1쪽에 실린 광고를 봅니다. “20년 간 안심할 수 있는 신개념 주택”이 “사기 위한 집이 아닌 살기 위한 집”이랍니다(SH공사가 지은 아파트). (4340.9.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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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소개하는 글’이란 뭘까?


 새로 나오는 수많은 책들 가운데 누구나 읽으면 좋겠다 싶은 책을 하나 고를 수 있을까요. 수많은 책들은 수많은 ‘다 다른 읽을이’를 겨냥해서 세상에 나오지 않을까요. 어쩌면, 지금 우리 세상에서는 ‘자기 계발’이라는 탈을 쓰고 ‘돈벌이-이름내기-권력 얻기’에 매달리는 사람들 읽을거리를 바라는지 모릅니다. 이런 책만이 읽힐 만한 책이라고 이야기하는지 모릅니다. ‘자기 계발’이란 무엇일까요. 철학책을 읽으면 자기 계발이 안 될까요. 교육 이야기를 읽으면, 어린이책을 읽으면, 수필이나 시를 읽으면 자기 계발이 안 될까요. 이 세상 모든 책은 처음부터 ‘그 책을 읽는 사람한테 자기 계발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이끄는 눈길과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교훈’이라는 말도 곰곰이 짚어 봅니다. 이 세상 어느 책도 ‘교훈 없는 책’이란 없습니다. 문제는,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교훈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어떤 갈래로 나눌 만한 책인지, 어떤 이야기감을 어떤 눈높이와 생각과 마음밭으로 곰삭여서 펼쳐냈는지라고 느낍니다. 어떤 자리에서 써 내려간 이야기인지, 어느 곳에서 담아낸 그림과 사진인지가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지율 스님이 밥굶기저항을 하며 썼던 글을 묶은 《초록의 공명》(삼인)이 있고 《지율, 숲에서 나오다》(숲)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책을 읽으면서 지율 스님 이야기와 성철 스님 이야기가 다르지 않구나 하고 느낍니다. 깊이가 다를까요, 너비가 다를까요. 두 분이 있던 자리가 다를 뿐, 그 다른 자리에서도 세상과 사람과 우리 삶터를 바라보는 눈매와 손매는 한결같구나 싶어요.

 아룬다티 로이 님이 쓴 《9월이여 오라》(녹색평론사)를 거듭 다시 읽고,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시울)를 꼼꼼히 되짚으면서, 왜 우리 나라에서 ‘여성 작가’라고 하는 분들은 이렇게 ‘너른 어머니 자연’ 같은 마음을 스스로 다독이며 둘레에 나누지 못할까 싶어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은 제가 우리 삶터와 세상을 좀더 곰살맞게 헤아리지 못해서 드는 느낌이겠지요. 이효재 님 발자취만 더듬어도, 고정희 시인 발자국만 되밟아도, 그림을 그리는 박인경 님이라든지, 소설을 쓰는 공선옥 님 살아가는 이야기만 엿보아도 이런 말은 함부로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 나라에는 ‘글쓴다는 여성’, ‘기자라고 하는 여성’, ‘활동가라고 말하는 여성’, ‘대학교수라는 이름쪽 내미는 여성’만을 곧잘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일본사람 우자와 히로후미 님이 쓴 《지구온난화를 생각한다》(소화)를 읽으며 울컥 합니다. 첫째, 이런 이야기를 우리들은 우리 삶터에 걸맞게 우리 스스로 엮어내지 못한다는 슬픔 때문에. 둘째, 이런 이야기를 형편없는 번역으로 망가뜨려 놓았다는 짜증 때문에.

 1990년대 첫머리에 나온 《녹색평론》 서너 권을 헌책방에서 삽니다. 벌써 읽었던 글이 있고, 낯선 글도 있습니다. 뒷날 낱권책으로 묶인 글도 보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국사람이 쓴 글은 세월이 흐를수록 해묵었구나 싶은 느낌이 짙은데, 나라밖 사람이 쓴 글은 세월이 흘렀어도 빛이 안 바래네 하는 느낌이 짙습니다. 뭘까요. 문화제국주의에 찌든 눈길이라서 이럴까요.

 일본 그림쟁이 도미야마 다에코라는 분이 한국 그림쟁이 이응노 님을 파리에서 만나며 나눈 이야기를 갈무리한 책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삼성미술문화재단)를 일곱 달에 걸쳐서 야금야금 읽으며 어젯밤 마무리지었습니다. 이응노 님이 펼친 이야기가 거의 막바지가 될 무렵, 다음처럼 한 마디 불쑥 합니다.


.. 도미야마 씨는 그렇게 서베를린에도 동베를린에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어떤 나라라도 여행할 수 있으며,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서 발표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일본사람은 행복한 거예요. 내 인생은 36년 간을 일제 지배 하에서 보냈고, 해방이 되자 이번에는 분단국가와 독재정권 속에서 내 나라에도 돌아갈 수 없는 상태로 30년을 지내 왔어요. 우리들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 발표하면 박해를 받게 되니 표현의 자유도 없는 겁니다 ..  (175쪽)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서슬퍼렇게 있습니다. 다만, 요즈음은 숨을 죽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자기가 담아내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담아낼 자유’가 제대로 없습니다. 저마다 담아내는 이야기가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떠나서, 이런 옳고그름 가르기는 나중 일이고, 어떤 생각이든 이야기이든, 저마다 자기 깜냥을 살려서 나타낼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권리조차 없습니다. 아니, 자유와 권리를 느끼며 생각하고 살아가는 마음밭부터 일구어지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자기가 담아내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냈다가는 굶어죽기 딱 알맞다고 합니다. 꿋꿋하게 가난과 싸우거나 가난과 하나가 되어 즐기는 사람이 몇 사람 있으나, 웬만한 사람들은 가난은 구질구질하다고만 여겨 쉬 내동댕이치고 돈사랑으로 끄달립니다.

 제도권 교육을 받으면서 우리들 마음밭은 무너질 대로 무너졌습니다. 남자는 군대에 이끌리며, 여자는 상업주의로만 치닫는 자본주의에 물들며 젊은 날을 ‘돈’ 하나에 매달리도록 나뒹굴어야 합니다. 자기 먹을거리, 입을거리, 잠잘곳, 쓸거리를 손수 장만하거나 갖출 수 있는 터전이 온통 무너졌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제 손으로 먹을거리를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을 아예 안 합니다. 유기농곡식을 찾아도 생협 매장을 찾아가려고 하지, 텃밭농사를 일군다거나 스트로폼농사를 한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옷 한 벌을 입어도 값싼 옷이든 예쁜 옷을 입으려 하지, 손수 천을 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실을 자아서 옷을 짓는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어쩌면 ‘실을 잣다’라는 말도 못 알아들을지 모르겠습니다). 실을 자아서 입든 말든, 이렇게 할 생각을 처음부터 안 하도록 빈틈없이 제도권 교육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살아갈 집을 마련하는 일도 그렇지요. 변기를 어떻게 쓰는지, 부엌을 어떻게 쓰는지, 방은 어떻게 쓰는지, 불은 어떻게 때는지, 창문은 어떻게 다는지, 마당은 어떻게 꾸미는지, 처마는 어떻게 다는지, …… 이 모두를 우리 손으로 하지 않아요. 물은 어떻게 마시겠습니까. 천장은 얼마만큼 높이겠습니까. 2층으로 할까요? 지하실을 놓을까요? 문은 어떻게 달지요? 바닥과 벽은?

 그 어느 것도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가꿀 수 없게 되어 있는 한국 사회입니다. 개성이란 조금도 없는 한국 사회입니다. 대학교까지 안 나온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 사회이지만, 대학교까지 다닌 사람들 깜냥(지식)이란 무엇입니까. 대학교까지 나온 사람들 마음밭(정신세계)이란 무엇입니까. 대학교까지 지낸 세월은 우리들한테 무엇으로 아로새겨진 슬기인가요, 경험인가요.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글로 쓰고 싶은 것’은 무엇이며, ‘사진으로 담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이유경 님이 쓴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인물과사상사)을 읽다가 책을 덮었습니다. 집어던지려다가 말았습니다. 〈시민의 신문〉이나 〈시민사회신문〉에 실린 글은 이렇지 않았다고 느꼈는데. 뭘까? 왜 그렇지? 글이 왜 이러지? 외국물 먹었다고 외국물 먹은 티를 내나? 아무래도 내 눈이 삐었는가? 아무리 요즘 한국사람들 글은 줄거리만 보아야지 문장을 보아서는 한 줄도 읽어낼 수 없다고 하지만, 줄거리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글을 이렇게 버려 놓으면 어쩌지?

 한국에서 사진하는 분들 가운데 ‘기무라 이헤이’를 아는 분은 몇 안 되리라 봅니다. 저도 이이를 잘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헌책방에서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책 하나를 운좋게 만난 뒤로, ‘이이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사진이 참 좋구나’ 싶어서 가슴을 쓸어내린 적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거의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 사진평론가 와타나베 츠토무 님이 쓴 《현대일본 사진가》(해뜸)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실립니다.


.. 이른바 신인 시대라는 것이 없이 젊었을 때부터 하나의 경쟁 목표가 되어 언제나 쫓기는 마음으로 근대사진의 길을 개척하면서, 반세기에 걸친 작가 활동을 계속하여 오늘날에 이른 사람이 기무라 이헤이다 ..  (203쪽)


 아무것도 없는 맨땅, 풀도 자라지 않는 모래땅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했던 기무라 이헤이 님 같은 삶이었다면, ‘내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그리고 무엇을 찍고’ 하는 골치아픈 싸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힘겨워하리라 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삶터는, 나라는, 사회는 어떠할까요.

 일본에서 서른한 해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그만둔 평교사가 남긴 《교실 일기》(양철북)라는 책을 보면, 일본이나 한국이나 어쩔 수 없는 아이들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왜들 이렇게 영어를 좋아하는지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즉각 대답이 나온다. “멋있잖아요!” 그러고 보니 인기 가수들의 노래에도 영어가 잔뜩 들어가 있다. 아마도 그 영향일 것이다. “선생님, ‘미래’가 영어로 뭐예요? ‘출판’은요?” 아이들은 쉴 새 없이 질문을 해댄다. 나는 영어 사전이 아니다. 그냥 아는 단어만 나열해 보았지만 솔직히 말해 자신은 없다 ..  (193쪽)


 하, 저는 멋없이 살고 싶습니다. 아니 내멋대로 살고 싶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배가 고프니 쌀을 씻어 아침을 얹어 놓고 밥부터 먹어야겠습니다. (4340.9.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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