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55 : 김수정 ④ 1남 4녀 막순이



 어제(7/2) 인천 답동성당에서 ‘시국미사’를 올리고 ‘길거리 걷기’를 했습니다. 6월 30일에 서울 시청 앞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이름으로 시국미사를 올린 뒤 이틀 만입니다. 인천이라는 곳은 온통 서울에서 하는 일에 끄달리기만 하고, 인천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마음이나 힘을 못 쏟기 마련이었습니다. ‘나라에 일어나는 큰일’에는 힘을 보태곤 하면서도, 정작 ‘인천에서 일어나는 큰일’에는 바쁘고 힘들다며 모르는 척하기 일쑤였습니다. 인천사람이면서 인천에서 일하는 사람보다는,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일하고 놀고 사람 만나는 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 인천은 고유하거나 홀로설 만한 힘이나 뜻도 모자라서, 다른 어느 도시보다 시장 힘이 크고 공무원 콧대가 높습니다. 이런 인천에서 삼백이 조금 넘는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가 중심이 되어 시국미사를 올리고 길거리 걷기를 했습니다. 답동성당부터 동인천역까지 찻길 한쪽을 차지하면서 이만한 사람들이 걸어가며 무언가를 외치기는 스물한 해 만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시국미사를 마칠 즈음, 신부님은 “답동성당 문에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사절한다는 쪽지를 내다 붙였습니다. 여러분 댁에도 붙이셨습니까?” 하고 물은 뒤, 당신 본당인 강화섬 마니산성당이 있는 마을에는 신문이 조선일보 한 가지만 들어온다며, 어쩔 수 없이 자기도 이 신문을 보는데, 여섯 달 만에 조선일보 논조와 똑같이 생각하며 살게 되더랍니다. 그래서 그 성당에서 조선일보를 끊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조중동’이라고 하는 그 신문들이 얼마나 나쁘기에 신부님이 이렇게 이야기할까 싶고, 그렇게 나쁘다는 신문인데 여태껏 성당에서는 안 끊고 있었음이 놀랍고, 그렇게 사람을 바꾸어 놓는다고 하는데에도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그 신문들을 보고 있는 까닭이 궁금합니다. 설마 기자들이 나쁘겠습니까. 신문들이 나쁘겠습니까. 오랫동안 제도권 교육에 길들면서 우리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매무새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내로라하는 대학교를 마치고 나라밖에서 공부도 하고 머리에는 지식도 많으나, 이 모두를 아름답게 어우러 내지 못하며 이웃과 나누는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 탓 아니겠습니까.


 “자만하지 마시고,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하셔서 존경받는 배우가 되세요.(3권 182쪽)” 책꽂이에서 김수정 님 만화 《1남 4녀 막순이 (1∼3)》(서울문화사,1990)를 꺼냅니다. 그동안 삼백 번도 더 보아서 그림 하나 얼굴빛 하나 대사 하나 환하게 알지만, 다시 넘겨보면서도 눈물이 핑 돌고 웃음이 터져나옵니다. 김수정 님으로서는 만화쟁이로 더 살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울던 1980년에, 이 만화를 그려내며 비로소 ‘김수정’ 이름 석 자를 세상에 알립니다. 그리고 만화 맨 마지막에, 하숙하며 살던 ‘수복’ 씨가 영화배우로 뜻을 이룬 일을 기뻐하는 집임자 아주머니 말 한 마디처럼, 김수정 님 당신도 ‘우러름받는’ 사람이 되고자 부지런히 땀을 흘렸지 싶습니다. 만화를 그려 돈을 벌고 이름을 날리고 힘을 펼치기보다, 사랑받을수록 더 땀흘리고 다리품 파는 사람이 되고자. (4341.7.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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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54 : 김수정 ③ 아리아리 동동



 오르지 않는 물건값이 없습니다. 라면 한 봉지 값은 어느새 800원이 되고, 얼음과자 하나도 700원입니다. 시내버스를 타면 천 원이고, 전철을 타고 인천에서 서울까지 가자면 적어도 1500원은 찍힙니다. 웬만한 낱권책 하나가 만오천 원이 넘은 지는 벌써 오래된 일. 그나마 곡식과 푸성귀 값은 거의 제자리인데, 곡식값이 제자리인 만큼,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 벌이는 훨씬 형편없어진다는 소리입니다.


 물건값 오르는 빠르기에 발맞추어 집값이 오릅니다. 집값이 오르니 세들어 사는 사람들 달삯도 오릅니다. 어느 하나 오르지 않는 값이 없기 때문에,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단합니다. 장사하는 분들은 자기가 파는 값도 올림직하나, 그러다가는 서로서로 고달플 뿐더러, 물건을 한꺼번에 어마어마하게 쌓아 놓고 깎아팔기를 하는 공룡기업 가게에 손님을 빼앗길까 걱정되어 끙끙 앓습니다.


 집은 끊임없이 지어지는데, 집없는 사람이 깃들어 살아갈 집으로 짓지 않고, 집있는 사람이 덤으로 여러 채 더 사들여서 달삯 받아 방구석에서 돈굴리기 할 수 있는 부동산으로 지어집니다. 사람 살 집이 아닌 돈굴리기 부동산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집(아파트)은 오랫동안 간수하지 않습니다. 열 해쯤 지나면 슬슬 재개발 입김을 부추기고, 스무 해쯤 지나면 으레 허물고 새로 지어야 하는 듯 여깁니다. 또, 이렇게 허물고 다시 지어야 집값을 껑충 올릴 수 있어서 좋다고 법석입니다. 정작 자기가 깃들이며 살 집이거나 동네라 한다면, 함부로 재개발을 밀어붙이지 않을 텐데.


 따지고 보면, 집 한 채 자기 이름으로 올려놓고 살아가는 사람 숫자보다는, 다른 이가 돈굴리기하려고 장만한 집에 깃들어 사는 사람 숫자가 훨씬 많을 터이나, 힘겹거나 어려운 사람들 자리에서 정책이 꾸려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김수정 님이 1985년에 그렸던 만화 《아리아리 동동》(서울문화사,1990)을 펼칩니다. “추운데 왜 나와 있니?” “누나 기다렸어.” “점심밥은 잘 챙겨 먹었니?” “응.” “잘했다.” “오늘은 호떡 안 사 왔어?” “매번 사 올 수 있니? 돈 아껴 써야지.” “에이.” “누나가 김치찌개 맛있게 끓여서 밥해 줄게.” …… “커튼 닫을까?” “아니.” “바람이 찬데.” “엄마도 저 별을 보고 계실까?” “그럼.” “엄마 많이 나았어?” “그래, 희원이 보고 싶다시더라.” “나도 엄마 보고 싶어.” “백 밤만 자면 오실 거야.” “왜 병원에선 우리 같은 꼬마는 못 오게 해?” “병원 규칙 때문이지.” …… (2권 13∼27쪽).


 만화에 나오는 ‘동동’은 나어린 저승사자입니다. 저승에서 뒷간 똥을 똥바가지로 똥장군에 퍼담아 치우는 일을 하는 형이 심부름을 시켜서 ‘죽을 때가 다가온 사람을 데려오라는’ 일을 맡습니다. 그런데 동동은 어느 한 번도 시킨 대로 사람들을 데려오지 못합니다. 일찌감치 이승에 내려가서 ‘데려갈 사람’을 지켜보며 기다리지만, 막상 데려갈 사람은 안 데려가거나 다른 저승사자가 데려가는 사람을 빼돌리기도 합니다. 누구나 때가 되면 이 땅을 떠나기 마련이라, 동동과 함께 저승에 가야 할 텐데, 동동 눈에 비친 서민들을 쉬 저승으로 불러들이기에는 가슴이 짠했는지 몰라요. 아직 이승에서 더 땀흘려 빛을 보고 열매 맺을 일이 많다고 느꼈는지 모르고요. (4341.6.2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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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53 : 김수정 ② 귀여운 쪼꼬미



 엊그제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휴머니스트,2008)라는 책을 덮었습니다. 원자폭탄 피해자 2세 환우로 살다가 2005년에 끝내 숨을 거두고 만 김형률 씨를 기리는 자그마한 책입니다. ‘원폭 2세 환우’. 사할린에 남아서 고향나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아리랑만큼이나, 외국사람이니 지문을 찍어야 한다는 차별법에 시달리는 ‘일본에 남은 한겨레’만큼이나, 자치주에서 풀렸고 자치문화도 나날이 무너지고 있는 중국 연길시 한겨레만큼이나, 이 땅 곳곳에서 ‘일한 대가나 보람이 아닌 푸대접과 괴롭힘’에 들볶이면서도 한국땅에서 돈버는 꿈을 품고 있는 이주노동자 못지않게 푸대접과 괴롭힘에 들볶이는 비정규직노동자만큼이나, 몸 어느 한 곳이 아프다는 까닭으로 어린 날부터 늙어 죽는 날까지 외롭고 힘들어야 하는 장애인들만큼이나 팍팍하고 모진 삶을 꾸려야 했던 사람들이 ‘원폭 2세 환우’입니다. 그나마 다른 ‘아픈이’는 왜 아픈 줄이나 알지만, 원폭 2세 환우는 아픈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성노예로 시달린 할머님들을 도우면서 일본군과 일본 정부, 여기에 한국 정부 잘못을 꾸짖는 손길과 눈길이 모자라나마 있기는 해도, 일본에 억지로 끌려가 징용살이를 해야 했던 사람들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서 애꿎게 원자폭탄을 맞아서 자기뿐 아니라 딸아들과 그 딸아들이 낳는 딸아들한테도 피해가 이어지는 현실을 놓고 무어라 따질 길이 없는 사회입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에서 아프지 않은 사람, 따돌림받지 않은 사람, 외롭지 않은 사람, 푸대접받지 않은 사람은 어찌 살아가고 있을는지요. 아프지 않으니 즐거운가요. 따돌림받지 않으니 신나는가요. 외롭지 않으니 시원한가요. 푸대접받지 않으니 홀가분한가요.


 김수정 님 만화 《귀여운 쪼꼬미》(서울문화사,1990)를 펼칩니다. 1989년에 〈아이큐 점프〉라는 주간만화잡지에 싣던 ‘어린이 성교육’ 만화입니다. “아마 여성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거나, 여자를 하찮게 여기는 나쁜 습성을 갖고 있기 때문일 거야. 여자나 남자나 다 똑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란다(157쪽).”


 만화쟁이 황미나 님도 성교육 만화를 그린 적이 있습니다. 2003년에 《루나레나의 비밀편지》(동아일보사)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황미나 님은 책끝에 “처음엔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저 내가 늘 그려 오던 꿈의 세계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하고 밝힙니다. 당신은 글을 써 준 교수님한테 ‘먼저 교육을 받고’ 성교육 만화를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만화를 그리는 동안, “나이든 저도 모르는 것과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이렇게나 많은데” 하면서 한숨을 쉽니다. 그나마 황미나 님은 부탁을 받아 만화를 그리게 되어서, 여태껏 모르거나 잘못 알던 일 하나를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우리들이 낳아서 기르는 아이들은? 우리 둘레에서 늘 얼굴을 부대끼는 아이들은?


 세상을 올바르게 꿰뚫거나 읽어내면서 자기 길을 걷는 우리들이온지요. 이웃과 아이들이 제 길을 아름답게 걷도록 돕거나 이끄는 우리들이온지요. 김수정 님은 “아니란다. 사람은 따뜻한 가슴으로 (사랑을) 한단다(78쪽).” 하고 말합니다만. (4341.6.1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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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52 : 김수정 ① 일곱 개의 숟가락

 전국이 촛불모임으로 들끓고 있으나, 제가 사는 인천에서는 촛불이 아주 조그맣게, 또 조용하게 타고 있습니다. 인천에서 나오는 신문들은 촛불모임 소식을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천 바로 옆에 붙은 서울은 날마다 어마어마한 숫자가 몰려듭니다. 인천에서 사회운동을 한다는 분들조차 인천에서 모이지 않고 서울로 먼길을 떠납니다. 이리하여 서울 촛불모임에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분들이 모일 터이나, 정작 인천 촛불모임은 외롭기만 합니다.

 지난 6월 10일, 인천시의회에서 ‘성공적인 도시관리를 위한 시민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이날 나온 여러 가지 이야기 가운데 하나를 살피면, “인천경제자유구역을 포함해 오는 2015년까지 추진되는 개발사업지구는 215곳이고 면적은 259㎢에 달한다. 시의 계획대로라면 분당신도시(1.65㎢) 만한 도시 157개가 10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서울도 곳곳에서 재개발 법석이지만, 인천에서 이루어지는 ‘재개발 + 재생사업’ 법석과 견주면 발가락 때만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천이라는 데가 토박이가 드문 곳이라고 합니다만, 그나마 있던 토박이마저 제 삶터에서 내쫓기게 되는 ‘옛 도심지 없애고 새 아파트 올리는’ 일이 몹시 끔찍하다고 할 만큼 밀어닥칩니다. 워낙 한꺼번에 온갖 곳에서 쇠삽날 바람이 불고 있으니, 걷잡을 수도 없지만 숨 한 번 느긋하게 쉴 수조차 없습니다.

 “명주야, 여기 저금통장과 도장 놓고 간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필요할 때 찾아 쓰도록 해라. 여러 가지로 힘들겠지만, 내일을 위해 우리 조금만 더 고생하자. 오빠가.(6권 93쪽)” 김수정 님이 1990년 3월부터 1992년 12월까지 그렸던 만화 《일곱 개의 숟가락》(태영문화사,1994)을 꺼내어 봅니다. 서울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다섯 아이와 할아버지 이야기를 담은 이 만화책을, 한 해에 한두 번씩 꺼내어 몇 번씩 다시 보곤 합니다. 보고 또 보아 낡아버린 만화책이지만, 다시 보고 거듭 보는 동안, 1990년 앞뒤로 우리네 도시 서민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골목길에서 고누와 금긋기놀이를 하고, 고무줄과 긴줄넘기를 하며, 밥이 없으면 김치로만 배를 채웁니다. 따뜻한 부모와 걱정없이 살다가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하나둘 세상을 몸으로 부딪히면서 스스로 헤쳐나가는 길을 찾고, 고등학생 일룡이와 중학생 명주는 둘 나름대로 홀로서기를 배우는 한편, 사랑스러운 식구들을 더욱 짙게 깨닫습니다.

 “오늘은 처음으로 밥상 위에 일곱 개의 숟가락이 놓였다. 늘 이렇게 일곱 개가 놓였으면 좋겠다.(7권 160쪽)” 아이들이 가난하면서도 서로 돕고 살던 달동네는 하나둘 사라집니다. 자가용은 없으나, 모두 똑같은 높이에서 똑같은 이웃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삶터가 사라집니다. 번듯한 장난감은 없으나, 돌멩이 하나와 나뭇가지 하나로도 놀잇감을 삼던 아이들 놀이터가 사라집니다. 큰돈은 못 벌지만, 누구나 조금씩 벌면서 살가이 어깨동무를 하던 일터가 사라집니다. 높은학교를 다니지 못했어도, 동네 언니와 아저씨가 길잡이요 스승이 되기도 하던 조촐한 배움터가 사라집니다. (4341.6.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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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를 느긋하게 달리는 사람은 책도 느긋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자전거를 빠르게만 내달리는 사람은 책을 손에 쥘 틈이 없습니다. 자동차를 몰아도 알맞는 때에 알뜰하게 모는 사람은 책을 손에 쥐는 넉넉함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몰아도 그저 자기가 맨앞에서 싱싱 달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사람은 책하고는 담을 쌓으며 삽니다.

 더 많은 지식을 얻으려고 읽는 책이 아닙니다. 더 빨리 가야만 하기에 타는 자동차가 아니요 자전거가 아닙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 흐느적흐느적 걸어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운동 삼아서 자전거를 타지는 않습니다.

 세상을 느끼고 싶기에 걷습니다. 세상을 껴안고 싶기에 자전거를 탑니다. 땅기운을 느끼고 싶기에 걷습니다. 우리 사는 둘레를 고이 보듬고 싶기에 자전거를 탑니다. 겨울꽃을 보고 봄꽃을 기다리고 있기에 걷습니다. 겨울눈과 겨울바람, 봄비와 봄바람을 기다리고 있기에 자전거를 탑니다. 따사로운 햇볕이 좋기에 걷습니다. 따순 햇볕에 얼굴이며 팔뚝이며 허벅지며 새까맣게 타는 맛이 좋기에 자전거를 탑니다. 어깨와 다리와 팔과 허리가 내 몸뚱이로구나 느끼기에 걷습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이 처음에는 주르륵 흐르다가 그예 방울로 맺히며 똑똑 떨어지는 짭쪼름한 맛이 좋기에 자전거를 탑니다.

 곰곰이 돌이켜봅니다. 저는 요즈음 자전거를 통 못 타고 있습니다. 왼어깨와 오른팔꿈치가 꽤 아프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쓰는 데에도 힘겹습니다. 오른손목이 저리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뺑소니 교통사고를 겪었습니다. 1998년 9월, 신문배달을 하며 살던 때, 새벽일을 마치고 신문사지국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까맣고 큰 차가 뒤에서 제 짐자전거를 쳤습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저는 하늘을 날았고 몇 초쯤 뒤 길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그때 ‘아, 머리는 깨지면 안 돼’ 하고 생각하며 오른팔로 머리를 감싸서 머리는 안 깨지고 오른손목이 나갔습니다. 2004년 여름, 내리막길에서 짐차 한 대가 제 앞에 확 끼어들었습니다. 차와 부딪히지 않으려고 서둘러 멈추었다가 차와는 가까스로 안 부딪히고 길바닥에 어깨가 질질질 갈렸습니다. 여섯 달 뒤 비슷하게 들이미는 차 때문에 다시금 뒹굴며 오른팔꿈치가 나갔습니다.

 한동안 그럭저럭 참으며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그러나 어깨를 쓰고 팔을 쓰고 손을 쓸 때마다 뜨끔뜨끔 아픔이. 책만 볼 때는 몰랐던 세상 마음씀이 몸뚱아리 깊숙히 배어듭니다. 자전거로 달리며 바라보고 느낀 삶터와 사람 매무새는 책에는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자전거를 쉬게 되니 전철이나 버스를 탑니다. 어디 오갈 때 책읽는 시간이 늡니다. 그렇지만 답답합니다. 훌륭한 이야기를 가슴으로 받아먹으니 즐거웁지만 해와 바람과 비와 흙과 달별을 못 부대끼니 서운하면서 쓸쓸합니다. 그래서 제가 즐겨타던 자전거 두 대를 아는 분한테 빌려드렸습니다. 내 몸이 다 낫는 날을 맞이하면 돌려받기로 하고. (4341.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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