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일터인 동네 도서관에 놀러오는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이 묻습니다. “남자가 왜 머리를 길러?” 어제는 한 아이가 묻습니다. “아저씨는 면도 왜 안 해요? 면도 좀 해요.”

 우리 나라를 빼고 ‘남자인데 왜 머리를 길러?’ 하고 묻는 나라는 어디에 있을까요. 어린아이들이 ‘남자는 머리가 짧게, 여자는 머리가 길게’로 생각하도록 하는 나라는 어디에 또 있을까요. ‘남자는 수염을 싹 밀어서 턱과 코 밑이 맨들맨들해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나라는 어디에 더 있을까요.

 이제 아이들한테 제가 묻습니다. “머리가 길면 남자가 아닌가? 여자는 왜 머리를 기르지? 수염은 왜 깎아야 할까? 수염을 안 깎으면 안 될까?”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후보로 나선 이들은 여러 가지 정책을 내놓습니다. 하지만 어떤 정책을 내놓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여론몰이와 얼굴밀기 말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신문 구석자리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를 찾고, 인터넷으로 끄적이며 훑습니다. ‘여성 정책’이라고 적힌 자리를 들여다봅니다. 어느 후보나 여성 정책은 ‘아이 돌보기’ 이야기에서 맴돕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여성 몫일까요? 교육이나 문화 몫이, 남자와 여자가 아닌 모든 사람이 마음 기울일 몫이 아닐는지요. 정책이나 공약을 곰곰이 살펴보노라면, 문화를 말하는 후보는 보이지 않습니다. 문화 가운데에서도 ‘여느 사람들이 여느 살림집에서 꾸려 가는 여느 문화’를 말하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예전에도 없었습니다. 모두들 ‘나는야 서민 대통령’이라고 외치기는 하지만, 정작 서민으로 이 땅에서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서민으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일까요. 서민으로 살 생각이 없기 때문일까요. 신동엽 시인은 1968년 11월에 쓴 〈산문시 1〉에서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하고 노래했습니다. 막걸리병을 자전거 꽁무니에 싣고 시인네 집에 놀러갈 수 있는 대통령, 소주병을 자전거 짐받이에 묶고 저잣거리 좌판을 하는 할머니네 집에 놀러갈 수 있는 공무원, 줄넘기와 축구공을 자전거 바구니에 담고 골목길 아이들 놀이터에 놀러갈 수 있는 교사, 이런 사람을 바라는 사람은 현대 사회를 거스르는 바보일는지.

 《여성○○》, 《레이디○○》, 《우먼○○》를 비롯해 책방 잡지칸을 울긋불긋 수놓고 있는 여성잡지는 대통령선거를 앞둔 요즈음 어떤 이야기로 기사를 채우고 있을까요. 여성잡지를 보는 분들한테는 아무나 대통령이 되어도 괜찮을까요. 어차피 여성들이 마음둘 곳은 몸치레 얼굴치레 집치레 밥치레 밤놀이 들이니, 나라일과 동네일은 바깥양반한테 맡겨 두면 넉넉할까요. 아이들은 어머니를 따라 머리집에 놀러갈 때 어머니들 보는 여성잡지를 함께 넘겨다봅니다. (4340.11.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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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든지 ‘서울로! 서울로!’ 가는 세상입니다. 지역에서 나고 자랐어도 지역에서 문화밭을 일구며 가꾸려는 사람보다는, ‘서울에 가서 이름을 날린다’든지, ‘서울에서 큰돈을 번다’든지, ‘서울에 사람이 많으니 이 무리에 섞이면 힘(권력)을 얻을 수 있다’든지 하면서, 자기 고향땅을 등집니다. 젊었을 때에는 더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며 서울에서 복닥복닥 부대끼며 세상을 배운다고도 말합니다. 생각해 보면, 저도 풋풋한 이십 대 젊은 날을 서울에서 살았군요. 참으로 서울에는 젊은이가 많습니다. 서울과 제법 먼 부산이나 대구나 대전쯤만 해도 젊은이가 많습니다. 하지만 인천에는 젊은이가 적습니다. 젊은 나이에 인천에 머물러 있으면, ‘머리가 나쁘다’든지, ‘어딘가 문제 있다’든지, ‘사고라도 쳤다’고 바라보기 일쑤입니다. 꼭 이래서만은 아니지만, 인천에서 산타는자전거로만이 아니라, 동네에서 생활자전거 문화를 조촐하고 조용하게 나누려는 모임이 터를 잡기 어려워요. 하지만, 누가 나서서 이런 모임을 만들어 줄 때까지 기다리지 말자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 만들자고 하면서 세 사람이 뭉쳐서 작은 모임을 열었고, 이제는 제법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어제, 쌀쌀해지는 날씨에 자전거는 집에 놓고 모임사람들을 만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눕니다. 서로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처음에는 삼겹살 집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두 번째로는 보리술을 마시러 갑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찾아간 보리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모두들 ‘윽, 이게 뭐야?’ 하고 술잔에서 입을 뗍니다. 보리술에 물을 타도 장난이 아니게 탔고, 김이 빠져도 보통이 아니게 빠졌기 때문입니다. 술집 일꾼을 불러다가 따져도 ‘새 술인데요?’ 할 뿐. 그렇다면, 서른 마흔 쉰 나이까지 살아온 모임 분들이 여태껏 술을 마셔 오면서 보리술 맛도 모른다는 소리일는지.

 즐거웠던 모임이 확 나빠지려고 합니다. 지역에서 지역사람한테 장사하면서 어째 이럴 수 있는지. 그러나 ‘술은 알맞게 마시라’는 하늘 뜻인지 모를 일. 이제 그만 마시고 집으로 가라는.

 한 해 두 해 세 해, 이렇게 술을 마시는 가운데 술맛이 혀에 달라붙어, 냄새만 맡아도, 눈으로만 보아도 술맛이 어떻겠구나 하고 헤아리게 됩니다. 자전거를 한 해 두 해 세 해, 이렇게 타는 가운데 모두들 손떨림이 줄고 안전하게 즐기게 됩니다. 요즈막에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 《백 가지 친구 이야기》, 《해와 같이 달과 같이》, 《황새울 편지》 들을 꼭 세 번 되읽었습니다. 앞으로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까지 거듭 읽으면, 줄거리며 글쓴이 뜻이며 더 짙게 내 마음에 아로새겨지며 그려지겠지요.

 책을 다 읽고 나서 소개글을 쓸 때, ‘한 번 더 읽어 보고 쓸까?’ 싶어 한 번 더 읽고, ‘두 번 더 읽으면 좀더 나으려나?’ 싶어 두 번 더 읽고, ‘내 안에서 조금 더 삭이자’ 싶어 세 번 더 읽습니다. 이야기문이 솔솔솔 열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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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으로 살림을 옮긴 올 4월부터 아침 또는 낮 또는 저녁에 틈틈이 동네 골목길 마실을 합니다. 으레 사진기를 한쪽 어깨에 메지만, 사진기를 놓고 다닐 때도 있습니다. 사진기를 들고 나오지 않을 때면 꼭 ‘이 모습은 사진으로 찍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쉽지만, 이런 아쉬움을 느끼는 일도 좋다고 느낍니다. 사진은 발자국이 되어, 제가 이 세상을 떠나고 없을 때에도 뒷사람들이 살펴보고 요즈음 인천 삶터를 느끼도록 해 줄 테지만, 제 눈으로 비춰지고 제 마음에 담긴 인천 골목길 삶터 모습은, 비록 ‘눈으로 그려 볼 수 있는’ 발자국으로 남지 못할지라도, 제가 만나는 사람들한테 하나하나 펼쳐지겠지요. 사람과 사람으로 부대끼고 복닥이고 어울리는 느낌이 건네지면서.

 달동네 골목길 밤마실을 하면, 저기 시내가 한눈에 펼쳐지고, 깊어가는 밤에 반짝이는 전기불빛 가운데 도드라지는 붉은 십자가, 하얀 십자가가 많이 보입니다. 예배당이 참 많구나, 하는 소리가 절로 터져나옵니다. 보고 보고 또 보아도 이런 소리가 터져나옵니다. 그러던 지난주, ‘저 예배당 사람들도 설교를 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 지구가 많이 아파하고 환경이 더러워지고 있음을 이야기로 듣고 할 텐데, 왜 밤에도 십자가 불을 켜 놓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밤길이 어두워서? 깊은 밤에도 동네사람들한테 따순 사랑과 믿음을 나누어 주고 싶어서?

 지난 목요일,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한다며 전철길에 오릅니다. 인천에서도 서쪽 끝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로 가는 길. 참 멉니다. 걸상이 천이 아닌 쇠붙이로 된 열차가 드문드문 있어서, 이런 열차를 타고 가자면 엉덩이도 시렵지만 기분이 나쁩니다. 누가 불지를까 걱정된다고 전철 깔개를 쇠붙이로 한다면, 버스 깔개와 기차 깔개도 이렇게 해야 하지 않나요? 비행기는 어떻고? 궁시렁궁시렁 중얼중얼 투덜투덜 하면서 책을 읽습니다. 그즈음, 양복을 쪼옥 빼입은 머리 벗겨진 아저씨가 긁직한 목소리로 ‘하느님 찬양’과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읊습니다. 전철을 함께 탄 옆지기는, 저 아저씨 예전에도 보았다고 옆구리를 쿡 찌르며 이야기합니다. “그런가?” 하고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읽던 책에 다시 머리를 박습니다. 조금 뒤 책을 덮고 고개를 듭니다. 참사랑이라면, 믿는 사람한테만 축복을 내리는 사랑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한테도 축복을 내리는 사랑일 텐데,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참사랑이라면, 믿지 않는 사람한테 저주를 퍼붓는 사랑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잡아끌지 않으며 더욱 아끼고 지켜볼 수 있는 사랑일 텐데, 하는 생각이 꼬물꼬물. 하느님을 믿는다기보다 자기 이익을 믿기 때문에, 하느님 사랑을 믿는다기보다 자기 이름과 돈과 힘을 믿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다기보다 하느님 말씀을 자기 좋을 대로 풀이해 버리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읽히는 책이 성경이라고 해도 전쟁이 끊이지 않고, 외려 ‘하느님 이름’으로 전쟁이 판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모락모락. (4340.10.24.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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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에서 띄우는 글]
 3 ― ‘책 싸게 사는 길’ 여쭙는 님이시여



 사람들이 묻는다. 책을 싸게 사는 길을. 인터넷으로 묻는다. 아니, 인터넷 모임 게시판에 글을 남기며 묻는다. 인터넷새책방에 책소개 글을 띄워서 5만 원짜리 상품권에 뽑히라는 둥, 여러 인터넷새책방을 두루 살피며 마일리지와 쿠폰을 어떻게 주는가를 살피라는 둥, 이런저런 도움말을 들려준다. 인터넷 모임 게시판에 댓글을 남기면서.

 어떤 책을 사고 싶기에 싸게 사고 싶을까. 자기가 바라는 책은 얼마짜리 책이기에 값싸게 사고 싶을까.

 책을 싸게 사면 좋을까. 좋다면 무엇이 좋은가.

 책을 싸게 사면 더 잘 읽을 수 있는가. 책을 싸게 사면, 그 책에 담긴 줄거리를 한껏 넉넉하게, 한결 속깊이 헤아리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

 책을 엮어내어 파는 책마을 사람들은 왜 쿠폰을 붙이는가. 인터넷새책방은 왜 마일리지를 쌓아 주는가. 이들은 왜 책소개 글을 띄워 주었다고 몇 만 원에 이르는 선물을 베풀까.




 인터넷 모임 게시판에 올려진 ‘묻기’ 글에 엉뚱한 댓글을 남기는 나. “저는 동네책방에 주문해서, 책에 적힌 값대로만 책을 사기 때문에 책을 싸게 사는 길은 모르겠네요. 님께서는 책을 싸게 사는 길을 인터넷으로 알아보기보다, 그 책을 살 수 있도록 알바를 하시는 편이 좀더 슬기롭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헌책방 나들이를 하는 분들 가운데 절반 조금 웃돌 만큼은, ‘책을 싸게 살 수 있어 좋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헌책방에서 책을 값싸게 사는 이들이, ‘자기가 헌책방에서 사서 읽은 책’을 헌책방에 되팔려 할 때에는 무척 아까워한다. ‘2000원 주고 산 책’이라면, 이 책을 헌책방에 되팔 때 얼마쯤 받을 수 있을까? 얼마쯤 받아야 알맞을까?

 헌책방에서 책을 사며 ‘책값이 싸서 좋다’면, 자기로서는 참으로 자기 마음밭을 추스르거나 가꾸는 데에는 썩 좋은 책까지는 안 찾는다는 소리인가. 책을 살 때 헤아리는 첫 번째 잣대는 그저 ‘싼 책값’ 때문인가. 그래서 자기 마음이며 머리며 몸뚱아리며 아름답게 가꾸어 줄 수 있는 좋은 책이 있다고 해도, ‘비싼 책값’이면 도리질을 칠 생각인가. 그러면, 얼마쯤 되는 책값이 싼 편이며, 얼마쯤 되는 책값이 비싼 편일까.

 자기가 읽고픈 책을 한 권 장만하고자, 부지런히 일해서, 땀흘리며 일해서, 돈을 차곡차곡 모을 수는 없을까. 갖고는 싶은데 돈이 없는 터라 슬그머니 도둑질을 해서라도 갖고 싶은가. 갖고는 싶고 도둑질하기도 싫어서, 그 책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 빌린 다음, ‘어, 잃어버렸는데?’ 하면서 안 돌려주고 자기 책으로 삼고 싶은가.

 내가 느끼는 ‘책을 싸게 사는’ 가장 좋은 길이 있다면, 새책방이든 헌책방이든 도서관이든 찾아가서 두 다리가 아프도록 서서 읽는 길이 하나 있다. 다음으로는, 내 다른 씀씀이를 모두 줄이면서, 이를테면 머리를 머리집에 가서 깎지 않고 내 손으로 가위질해서 깎는다든지. 옷을 더는 사지 않고 바느질로 기워서 입는다든지. 또는 이웃사람한테 헌옷을 물려받거나 얻어서 입는다든지. 자가용은 아예 타지도 말고, 대중교통조차도 웬만하면 타지 말고 두 다리로 걸어다니든가 자전거로 다닌다든지. 밥을 밖에서 사먹지 말고 도시락을 챙겨서 먹는다든지. 과자부스러기 군것질을 하지 만다든지. 찻집에서 차를 사 마시지 말고 보온병에 담아 들고 다니면서 길거리 걸상에 앉아서 마신다든지. 비싼 술집에서 술 마시지 말고 가게에서 술을 사서 집에서 마신다든지. 노래방에 가지 말고 집에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뜯는다든지. 이러저러하게 돈씀씀이를 줄이고 아낀 돈으로 책을 사는 길, 이 길만큼 ‘책을 싸게 사는’ 좋은 길은 없다고 느낀다.

 뭐, 생각해 보면, 책을 꼭 우리 집 책시렁에 꽂아 놓아야만 하지는 않아. 마음에 담아야 책이 아닐까. 머리에 새겨야 책이 아닐까. 내 두 손에, 내 두 다리에, 내 발바닥에 콱 박혀야 책이 아닐까. 내가 품는 생각에, 내가 움직이는 몸뚱이에, 내 모든 몸짓에 하나로 녹아들어야 책이 아닐까. 책에 담기는 지식 가운데 잊어버리는 것이 있으면 어떠랴. 다시 들춰보지 못하면 어떠랴. 그러면 자그마한 공책을 늘 들고 다니면서, 이 공책에 ‘자기가 읽은 책에서 마음에 와닿은 대목’을 가지런하게 옮겨 적으면 된다. 이렇게 해서 ‘내 나름대로 반갑다고 생각하는 글귀를 모은 내 책’을 새롭게 엮으면 된다.




 내가 인천 배다리 한쪽 귀퉁이 자그마한 자리에 연 도서관에는 내 나름대로 고등학생 때부터 읽어 온 책을 그러모아 놓았다. 이곳을 찾아오는 분 가운데 “여기에 책이 몇 권이나 있어요?” 하고 묻는 분이 으레 있고, 이렇게 묻는 분한테 으레 “책 권수가 그렇게 중요하나요? 그냥 읽고픈 책이 있으면 이곳에 와서 읽으시고, 이 책 저 책 죽 둘러보며 반가운 책을 찾아보셔요.” 하고 대꾸한다.

 그러다가 그끄제쯤, 이런 생각 하나가 났다. 우리 도서관에 있는 책 권수를 묻는 분이 있으면, “음, 날마다 꼬박꼬박 세 권씩 읽을 때, 당신께서 서른 해 동안 읽어도 다 못 읽을 만큼 있습니다.” 하고 대꾸해 볼까 하는. (4340.10.19.쇠.ㅎㄲㅅㄱ)

***
이 글은 <사진책 도서관 : 함께살기> 지킴이가 띄웁니다. <사진책 도서관 : 함께살기>는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켠에 있으며, 금-토-일에만 열어 놓습니다. 찾아와서 책을 읽는 값은 따로 받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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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첫머리에 날씨가 확 쌀쌀해지며 가을 없이 겨울로 접어드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나날이 날씨가 풀리며 마치 겨울에서 봄으로 되어 간다는 느낌입니다. 11월을 코앞에 두고 있는 날이건만. 다가오는 11월 날씨는 어떻게 될까요. 12월에는 겨울이 될지 포근한 날이 이어지며 모기와 파리가 끊어지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해마다 뒤죽박죽 날씨로 변덕이 죽을 끓고 있잖습니까. 올봄과 올여름은 지난해와 견주어, 지지난해와 견주어, 지지지난해와 견주어 참 알쏭달쏭 오락가락이었습니다. 장대비가 여러 날 동안 쉬지 않고 퍼붓지 않나, 그러다가 확 맑아지지 않나, 태풍이 몰아닥치다가도 날이 짠 개지를 않나. 어쩌면 우리 나라에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뚜렷하게 나뉘어 네 철 네 옷을 갈아입는 산과 들과 내와 바다는 멀찌감치 사라져 버렸을까요. 이름만 남은 범과 곰과 이리와 늑대와 여우입니다. 오소리와 너구리와 족제비와 수달을 어디에서 얼마나 만날 수 있는가요. 참새조차 자취를 감추며 비둘기와 까치만 맴도는 도시에서, 개구리가 왁왁 우는지 개골개골 우는지 꾹꾹 우는지 두 귀로 살펴 들을 수 없는 이 땅에서, 뜸부기며 소쩍새며 헤아려 볼 길 없는 시골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요.

 지금 우리한테는 ‘먹고살아야 한다’는 큰 목표가, 아니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큰 목표가, 아니 ‘남보다 내가 더 많은 돈을 가져야 한다’는 큰 목표가, 아니 ‘나 홀로 1등이 되어 떵떵거리며 지내다가 드문드문 가난뱅이들한테 돈 몇 푼 쥐어 주며 으시대자’는 큰 목표가 이 나라 모든 사람을 휘감고 있습니다. 어른들만 휘감지 않고 아이들도 휘감습니다. 아니, 어른들 스스로 자기를 다그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들이 낳아 기르는 딸아들을 서너 살부터 영재와 천재로 만들어 ‘네 이웃과 동무를 밟고 올라서서 너 혼자 잘 먹고 잘 되는 길로 걸어가는’ 버릇을 익히게 하도록 채근하고 있습니다.

 문득, 요즈음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어떤 줄거리가 담기나 궁금합니다. 집 앞에 있는 헌책방에 가서 5학년 2학기 〈사회〉 교과서를 펼쳐 봅니다. ‘우리 나라의 경제 성장’과 ‘정보화 시대의 생활과 산업’과 ‘우리 겨레의 생활 문화’ 세 가지를 다룹니다. 첫 단원에서는 ‘자유와 경쟁-우리 경제의 발자취-세계 속의 우리 경제-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을 다루는데, 모두 기업에서 돈 많이 벌고 공장에서 물건 많이 팔고 자동차 대수가 늘어나는 일이 ‘발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6학년 〈생활의 길잡이〉 교과서를 펼칩니다. 7단원 ‘자연 사랑’을 보니, 우리 나라에 디젤 자동차가 많아 공기가 많이 더러워진다고, 이 문제를 풀려면 나무를 많이 심으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무가 하루아침에 자라지도 않지만, 자동차 줄일 생각은 아예 없고, 정작 공기가 더러워지는 큰 뿌리는 안 짚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도 꺼내어 펼치다가 제자리에 꽂아 놓습니다. 손이 덜덜 떨립니다. 아이를 낳으면 학교에 보내야 하나요? (4340.10.1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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