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맛 기행 2 - 바다에서 건져 올린 맛의 문화사 바다맛 기행 2
김준 지음 / 자연과생태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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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88



맑고 고운 바다맛을 물려주고 싶구나

― 바다맛 기행 2

 김준 글·사진

 자연과생태 펴냄, 2015.11.5. 16000원



  어머니 뱃속에서 곱게 열 달을 살다가 씩씩하게 이 땅으로 태어난 아기는 천천히 자라면서 수많은 맛을 보고 겪고 느끼고 생각하고 맞아들입니다. 마치 깊은 바다와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지내며 무엇보다도 사랑맛을 볼 테지요. 사랑맛으로 튼튼히 자라다가 빛이 가득한 이 땅에 태어난 뒤로는 젖맛을 봅니다. 젖맛을 뗄 무렵 밥맛을 보는데, 이동안 아기는 어버이가 일군 삶자리에서 바람맛하고 물맛을 함께 보아요.


  오늘날에는 아기가 태어나서 자라는 터전이 어떠한가 같은 대목을 찬찬히 살피는 어버이가 몹시 드문데, 아기는 사랑을 받으면서 자랄 뿐 아니라, 고운 밥을 먹으면서도 자라고, 무엇보다 바람이랑 물을 마시면서도 자라요. 교육이나 문화나 여러 가지 사회시설만 따질 일이 아니라, 늘 마시는 바람하고 물이 얼마나 깨끗하거나 아름다운가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밥맛이 늘 새로운 줄 깨닫습니다. 이윽고 아이 스스로 무엇이든 만지작거리며 짓고 싶은 꿈을 키워서 손맛을 배웁니다. 손맛을 배우면서 놀이맛을 보고, 일맛을 깨닫지요. 찬찬히 철이 들면서 새삼스레 삶맛을 보고, 삶을 스스로 짓는 길을 걸으면서 꿈맛을 누리려 합니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생일날이면 소금 독에 묻어 둔 고등어를 꺼내 구웠다. 지글지글 기름기가 불씨로 떨어질 때면 부뚜막의 옹기에 담긴 굵은 소금을 집어 한 토막에는 살살 뿌렸고, 다른 세 토막에는 팍팍 뿌렸다. (19쪽)


“아빠, 아빠, 우리 반 아이 중에 갈치가 네모라고 생각하는 아이가 있어요.” 식탁에 앉자마자 둘째 달이 호들갑스럽게 한 말이다.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이야기인가 … “그 친구는 마트에서 갈치도 못 본 모양이구나.” … 막내가 “마트에 있는 갈치는 모두 네모잖아.”라며 말을 받았다. (29쪽)



  김준 님이 쓴 《바다맛 기행》(자연과생태,2015) 둘째 권을 곰곰이 읽습니다. 김준 님은 이녁 곁님하고 아이들한테 ‘바다맛’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두 권째 선보이는 《바다맛 기행》은 바로 ‘바다맛’이 우리 삶자락에서 얼마나 넓은 자리를 차지하는가 같은 대목을 건드려요.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를 낚거나 잡아서 손질해서 먹는 맛을 들려줍니다. 물고기가 우리 곁에 있기에 밥상이 한결 소담스럽다는 대목을 알려줍니다. 맛있다고 마구 먹을 일이 아니라, 맛있기에 오늘 이곳에서 즐겁게 먹는 몸짓이 되면서, 앞으로도 오래오래 누구나 기쁘게 먹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옛날에는 대하를 살짝 쪄서 조기처럼 짚에 엮어서 말렸다. 가을볕에 잘 말린 대하는 겨울철에 훌륭한 양식이었다. (46쪽)


1980년대 명태 20여 만 톤을 잡을 때, 명태 새끼인 노가리는 40여 만 톤을 잡았다. 노가리를 그렇게 먹어댔으니 씨가 마를 만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남획보다도 기후변화 탓만 하고, 여전히 맥주를 마실 때 아무런 생각 없이 노가리를 찾는다. (117쪽)



  한국은 갯벌을 아주 많이 메워서 없애버린 바보스러운 나라로 손꼽힙니다. 한국은 갯벌이 대단히 훌륭할 뿐 아니라 아름답던 나라였습니다. 나는 1980년대 첫무렵에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한국은 아름다운 갯벌로 이 지구별에서 첫손가락으로 꼽을 만하다’ 같은 이야기를 배웠습니다. 그무렵 한국에서 내로라 할 만한 것은 거의 없어도, 무엇보다 갯벌만큼은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울 뿐 아니라, 한국에 있는 갯벌을 부러워하는 나라가 많다는 이야기를 배웠어요.


  2010년대를 살면서 한국을 돌아보면, 이 나라 갯벌은 매우 초라합니다. 그 드넓던 갯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돈으로만 쳐도, 이른바 ‘경제 논리’로만 따져도, 한국에 있던 갯벌은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값어치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갯벌을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엄청나게 메웠을 뿐 아닐, 2000년대로 접어들 적마저 또 어마어마하게 메우려 했고, 메웠습니다.


  요즈음은 인천 영종도를 모두 공항으로 알 테지만, 나한테 인천 영종도는 내 오랜 동무가 살던 섬이요, 언제라도 조개를 한가득 캘 수 있던 너른 갯터였습니다. 갯벌이 몹시 아름다운 영종섬인데다가 소금밭이 대단히 넓게 있던 터전이었는데, 영종섬하고 용유섬 사이 갯벌을 몽땅 메워서 아스팔트를 두껍게 까는 공항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마 한국처럼 바보스러운 나라도 드물지 싶어요. 스스로 바다를 망가뜨리고 갯벌까지 짓밟으면서 공항을 닦으려고 하는 나라는 다른 어디에도 없지 싶어요. ‘인천 앞바다’가 아닌 ‘인천 먼바다’를 더럽히는 짓이 앞으로 우리 아이들한테 어떤 ‘뻘짓’이 될는지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어요.



이제는 사라져 버린 마을, 군산시 하제. 새만금사업으로 바다와 갯벌을 잃고, 미군기지가 확대되면서 마을도 사라졌다. (89쪽)


그 많던 조기들이 계화도 간척 이후 사라졌다. 이어서 천수만, 영산강과 금강 일대의 갯벌이 간척되었고, 물길이 막혔다. 조기가 철산바다에서 사라진 것도 그무렵이었다. (188쪽)


홍합은 보통 2∼3년은 자라야 먹을 만큼 자란다. 진주담치는 1년 정도 양식하면 7cm 내외로 자라 시중에 유통된다. 진주담치가 홍합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하면서 식탁에서만 아니라 연안의 가까운 갯바위도 점령했다. (158쪽)



  인천에서 나고 자라며 크다가, 전남 고흥으로 삶터를 옮겨서 사는 요즈음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고흥에서 살고 보니, 고흥에는 무시무시한 ‘매립지’가 있습니다. 해창만이라는 곳입니다. 고흥은 해창만이라는 데를 메워서 모두 논으로 바꾸었는데, 해창만으로 드나드는 길목인 고흥 포두면 소재지에는 ‘쌀 수입개방과 수매’와 얽힌 가슴 아린 걸개천이 걸립니다.


  무슨 소리일까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이 나라 중앙정부와 지역정부는 ‘돈으로도 따질 수 없도록 값어치가 대단한 갯벌’을 함부로 짓밟듯이 메우면서 ‘논이나 공장 따위’로 바꾸었는데, ‘논으로 바꾼 갯벌’에서 거두는 쌀은 이제 ‘돈조차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드넓은 매립지 논에는 농약과 비료까지 엄청나게 써야 하지요.


  전남 고흥은 갯벌을 메운 데가 많아도, 아직 이 고장에서 나는 꼬막이 엄청나도록 많아서 전국 곳곳으로 아주 많이 팔립니다. 이름나기로는 ‘벌교 꼬막’이 으뜸일 테지만, 웬만한 ‘고흥 꼬막’은 바깥에 ‘벌교 꼬막’이라는 이름으로 팔립니다. ‘고흥 꼬막’이라는 이름을 쓰면 알아보거나 알아주는 데가 없거든요. 고흥에서 해창만 갯벌을 메우지 않았으면, 교통이 잘 뚫린 오늘날에 고흥 꼬막은 그야말로 그냥 ‘고흥 꼬막’으로 손꼽혔으리라 느낍니다.



한번은 누나와 함께 냇가에서 고마니 풀을 베다 또 일을 저질렀다.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감쌌지만 피가 뚝뚝 떨어져 개울물을 붉게 적셨다. 깜짝 놀란 누나가 냇가에서 하얀 뼈를 주워 돌에 갈아 가루를 뿌려 주었다. 보통 쑥을 찧어 상처에 동여 매는데 이날은 달랐다. (235쪽)


바지락 하나가 하루에 오염된 물 15ℓ를 정화한다고 한다. 바지락이 가득했던 사라진 새만금 갯벌 200㎢는 10만 톤의 물을 처리하는 하수종말처리장 40개와 같았다. (284쪽)



  김준 님이 쓴 《바다맛 기행》에 흐르는 바다맛과 바다내음을 곱씹습니다. 이 도톰한 책에서 흐르는 바다노래에 가만히 귀를 기울입니다. 이 조촐한 책에 깃든 바닷사람 손길이랑 숨결이 얼마나 살가운가 하고 되돌아봅니다.


  들에서 들맛이 들사람을 키웠고, 바다에서 바다맛이 바닷사람을 키웠습니다. 시골에서 시골맛이 시골사람을 키웠고, 숲에서 숲맛이 숲사람을 키웠습니다. 들맛하고 바다맛을 보면서 자란 아이들은 하나둘 크면서 모두 도시로 나갑니다. 이제 시골에 남아서 들맛이나 바다맛을 가꾸는 젊은이는 매우 드물고, 시골에서 나고 자라더라도 시골에 뿌리를 박으려는 어린이는 거의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다가 시골로 오는 이웃님은 있되, 시골에서 나고 자라면서 그대로 시골사람으로 사는 마을님은 거의 없다고 할 만해요.


  오래도록 손맛과 삶맛과 살림맛으로 물려주는 들맛이나 바다맛은 이제 이음고리가 끊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겨우 이음줄을 간당간당 잇는 곳마저 원자력발전소하고 화력발전소가 떡하니 들어서면서 보금자리와 삶자리를 잃습니다. 원자력발전소나 화력발전소가 우람하게 들어선 시골에 가서 살겠다는(귀촌하겠다는) 도시사람은 없으리라 느낍니다. 조용하면서 깨끗하고 아름다운 시골일 때에 비로소 도시사람도 시골에 가서 살아야지(귀촌해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조용하면서 깨끗하고 아름다운 시골일 때에 들맛도 살고 바다맛도 삽니다. 안 조용하고 안 깨끗하고 안 아름다운 시골에는 들맛도 없고 바다맛도 없어요. 오랜 삶을 물려받는 마을님은 자취를 감추더라도, 새롭게 시골마을을 가꾸려고 하는 이웃님이 시골에 뿌리를 내리려 하는 요즈음, 부디 골골샅샅 어느 시골에서든, 또 어느 바닷마을에서든, 사랑스러운 들맛하고 바다맛이 짙푸르게 흐를 수 있기를 빕니다. 아름다운 삶맛과 살림맛을 아이들이 물려받을 수 있기를 빕니다. 착하고 참된 꿈맛과 이야기맛을 우리 어른들이 슬기롭게 물려줄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1.3.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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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 - 생태적 전환과 해방을 위한 기본소득 팸플릿 시리즈 (한티재) 2
하승수 지음 / 한티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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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35



대한민국 모든 사람이 ‘달마다 40만 원씩’ 받을 권리

―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

 하승수 글

 한티재 펴냄, 2015.3.16. 8000원



  2015년 가을에 나라에서 ‘아이 수당’을 주었습니다. 아이마다 50만 원씩 주었습니다. 어느 모로 보면 놀랄 만한 일이지만, 곰곰이 보면 하나도 안 놀랄 만한 일입니다. 어떻게 이 나라 모든 아이 ‘머릿수’에 맞추어 50만 원씩 나라에서 줄 수 있었을까요? 이 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나라에서 주는 ‘아이 수당’은 2015년에 한 번 주고 끝일까요, 아니면 앞으로 해마다 줄까요, 아니면 두 해나 세 해에 한 차례씩 띄엄띄엄 또 줄까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2013년 연봉이 0원이라고 한다. 무보수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소득이 진짜 0원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연봉을 안 받는지는 모르지만, 이건희 회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식에서 배당받는 돈만 해도 1년에 1758억 원에 달했다(2014년). (6쪽)



  하승수 님이 쓴 조그마하면서 야무진 책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한티재,2015)를 읽다가, 문득 ‘아이 수당’이 떠오릅니다. 이 책을 읽고 보니, ‘아이 수당’은 한 해에 한 번이라든지 어쩌다가 한 번 주고 끝낼 만하지 않습니다. ‘아이 수당’은 다달이 50만 원씩 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참말 나라에서는 ‘아이 수당’을 다달이 50만 원 남짓 ‘집행’한다고 여길 만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아이를 낳아서 돌보는 거의 모든 어버이는 아이들을 유아원이나 보육원이나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맡기는데, 여기에 드는 돈을 나라에서 꽤 많이 댑니다. 한 아이마다 얼추 50만 원에 이르는 돈을 다달이 나라에서 대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볼 만합니다. 나라에서 유아원이나 어린이집 같은 ‘시설에 아이 수당을 집행’하지 말고, 아이를 돌보는 집에 계좌이체로 ‘아이 머릿수에 맞추어 아이 수당 50만 원을 다달이’ 넣을 만하겠다고 느껴요. 그래서,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유아원이나 어린이집’ 같은 보육시설에 아이를 맡길는지, 아니면 따로 사람을 사서 아이를 맡길는지, 아니면 할머니나 할아버지한테 아이를 맡기고 ‘다달이 주는 아이 수당’을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드릴는지, 이러한 ‘결정권’을 아이 어버이한테 주면 훨씬 아름다운 복지 정책이 되겠구나 싶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비로소 ‘어린이집 원장이 어린이집을 부동산처럼 사고파는 엉터리 같은 짓’을 곧장 끝낼 수 있겠지요.



조합원이나 주주가 아닌 사람은 도대체 누구로부터 배당을 받을 수 있는가? 나는 누구나 국가로부터 배당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본래 공유였던 것을 사유화해 버렸는데, 그로부터 나오는 이익이라도 공유화해서 시민들에게 배당을 주자는 것이다. (15쪽)



  다시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라는 책을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하승수 님은 대한민국 모든 시민이 나라한테서 다달이 40만 원씩 ‘기본소득(기본수당)’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은 뜬금없이 ‘내뱉지’ 않습니다. 낱낱이 차근차근 따져서 이 나라 중앙정부와 지역정부가 ‘엉터리로 흘려 버리는 세금’을 알뜰히 건사하면 모든 사람이 다달이 40만 원씩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다고 외칩니다.


  부자한테 더 특혜를 주는 엉터리 조세정책이 아니라, 불로소득에 제대로 세금을 매기라고 하는 기본소득 제도입니다. 월급이나 연봉을 받지 않으나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온 하루를 ‘가사노동’이나 ‘육아노동’에 바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림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도록 밑받침이 되도록 기본소득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조건 없이 65세 이상에게 매월 기초연금 20만 원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들고 나왔다. 일종의 노인기본소득이었다. 이처럼 대한민국에서도 기본소득은 언제든지 기득권 정치세력의 의제가 될 수 있다. 물론 기득권을 가진 정치세력은 진정성 없이 문제에 접근하기 때문에 믿을 수는 없다. 박근혜 대통령도 결국 공약을 스스로 어겼다. (20쪽)


아무리 사회복지제도가 있다고 한들, 매번 가난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은 고역이다. 그래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통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31쪽)



  하승수 님이 이 작은 책에서 찬찬히 짚고 따지기도 합니다만, ‘임금노동’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원자력 발전소를 늘려고 ‘일자리 만들기’를 하는 일은 참말 이 나라에 도움이 될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원자력 발전소를 늘리면, 폐기물 처리장도 지어야 하고, 송전탑도 박아야 하고, 한국전력 회사도 커져야 하지요. 이래저래 ‘일자리는 늘어납’니다. 공사와 건축이 끊이지 않으니 ‘막일을 하는 일자리’도 늘 테지요. 그러나 그뿐이에요. 이러한 임금노동은 삶을 북돋우지 못합니다.


  전쟁무기를 만들어 군대를 키울 적에도 ‘군대 일자리’는 늘 텐데, 군대 일자리는 사회를 아름답게 가꾸지 못합니다. 전쟁무기를 개발하는 과학자와 기술자는 보람이 있을 만한 일을 하는 셈일까요, 아니면 바보짓으로 임금노동을 하는 셈일까요?


  시골에서는 돈이 되는 농사를 지으려고 농약과 비료를 엄청나게 써대는데, 시골 농사꾼이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으면, 억지로 농약과 비료를 함부로 안 쓰리라 느낍니다. 억지스레 곡식과 남새를 내다 팔아서 돈을 벌어야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욱 깨끗하고 좋은 곡식과 남새를 자연농이나 유기농으로 키우는 밑틀이 생길 수 있어요. 그리고,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서 조용하면서 수수한 살림을 지으려고 하는 사람이 꾸준히 늘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도시는 밀집 문제나 주택 문제나 교통 문제도 조금씩 풀릴 테고, 시골은 시골대로 빈집이나 빈마을을 없애면서 마을이 새롭게 살아날 길이 열릴 테지요.



우리는 가사노동, 돌봄노동 같은 말을 쓴다.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도 임금을 받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여전히 많다. 자기 집의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 자기 가족을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은 ‘임금’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일’을 하고 있다 … 모든 임금노동은 가치 있는 일인가? … 어떤 일자리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원전을 많이 지어 그곳에서 나오는 방사성폐기물이 늘어나면, 그것을 처리할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다. 대량살상 무기를 더 만들어도 일자리는 늘어난다. 사회가 더 불평등해져서 범죄율이 늘어나도 일자리는 늘어난다. 교도소도 더 지어야 하고 교도소를 지킬 사람들도 더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78∼79쪽)



  나라에서 기본소득 40만 원을 다달이 준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그러면, 아이를 낳은 어버이 가운데 ‘아버지 자리’에 있는 사람도 한 달에 며칠쯤 느긋하게 쉬면서 집에서 아이를 함께 돌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도 아이를 함께 돌보면서 아이하고 누리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가를 온몸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한 달에 40만 원을 기본소득으로 받는다면, 책마을을 살린다느니 출판산업을 살린다고 바둥거리지 않아도 됩니다. 이러한 기본소득을 다달이 대주면, 사람들은 스스로 한 달에 책을 한두 권이라도 사서 읽기 마련입니다. 40만 원이라는 기본소득을 바탕으로 적어도 한 달에 하루나 이틀을 말미를 내어 몸을 쉬려 하고, 가볍게 여행을 다녀올 수 있고, 영화도 홀가분하게 볼 만하겠지요. 그리고 이 기본소득은 고스란히 ‘마을 가게에서 고기 한 번 구워 먹는다’든지 ‘차 한 잔 마신다’든지 ‘옷 한 벌 산다’든지 하는 소비로 이어질 테니, 지역살림도 저절로 살릴 만합니다.



제주도의 지하수는 공유재다. 본래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자연이 준 선물이다. 그런 지하수를 무분별하게 쓰는 것에 대해서는 규제가 필요하다. 골프장이나 리조트의 지하수 사용에 대해서는 매우 무거운 부담금을 물려야 한다. (56∼57쪽)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낭비되는 공적인 재원들이 너무 많다.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불필요한 도로를 닦고, 건물을 짓고, 댐을 건설하고, 온갖 부패로 찌든 공공사업을 추진하는 데 낭비되는 돈이 너무 많다. 이 돈만 줄여도 기본소득을 지급할 상당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각종 토건사업에 쓰는 예산이 1년에 40조 원 정도 된다. (117쪽)



  나라에 돈이 없다면, 세금을 제대로 걷을 노릇입니다. 나라에 돈이 없다면, 쓸데없는 토건사업을 줄일 노릇입니다. 나라에 돈이 없는데, 왜 원자력 발전소를 자꾸 지으려 할까요? 나라에 돈이 없다면, 사람들더러 전기를 덜 쓰라 하면서 오히려 발전소를 줄일 노릇이지요. 나라에 돈이 없는데, 전쟁무기는 언제까지 자꾸 만들 생각이며, 값비싼 전쟁무기를 왜 자꾸 사들이려고 할까요? 전쟁무기가 평화를 끌어들일까요, 아니면 끝없는 전쟁과 전쟁무기만 자꾸 끌어들일까요?


  나라에서 아직 기본소득을 펴지 않는 까닭이라면, 나라에서 이 나라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누구나 사람답게 살고, 누구나 즐겁게 어울리며, 서로서로 보금자리와 마을을 알뜰살뜰 가꾸는 길을 생각한다면, 기본소득 같은 제도를 이제부터라도 꼼꼼히 살피고 챙겨서 펼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이자소득이나 배당소득을 많이 올리는 사람에 대한 과세도 대폭 강화해야 한다. 2015년부터 정부가 배당소득을 많이 받는 대주주가 오히려 낮은 세율(25%)로 세금을 낼 수 있도록 특혜를 주고 있는데, 이런 부분은 당연히 폐지해야 한다. 그리고 근로소득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해야 한다. (131쪽)



  돈을 더 많이 벌어야 삶이 즐겁지 않습니다. 경제성장이나 경제발전을 이루어야 나라가 아름답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제 삶자리에서 웃고 노래할 수 있는 하루를 누릴 때에 삶이 비로소 즐겁습니다. 도시사람도 시골사람도 저마다 제 보금자리와 마을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스스로 가꿀 때에 비로소 이 나라가 아름답습니다. 이름난 관광지 몇 군데만 개발해서 관광객을 끌어모아야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라, 골골샅샅 어느 도시나 시골이나 모두 ‘살고 싶은 곳’이 될 수 있어야 참으로 아름다운 나라예요.


  삶에 즐거움과 보람과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이 피어나도록 북돋울 만한 조그마한 정책이 될 기본소득 제도가 머잖아 펼쳐지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4348.10.31.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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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는 마을 - 좋은 삶을 살아낸 아미쉬 공동체의 기록
스콧 새비지 지음, 강경이 옮김 / 느린걸음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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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87



우리가 사는 마을에는 어떤 이야기가 흐르나

― 그들이 사는 마을

 스콧 새비지 엮음

 강경이 옮김

 느린걸음 펴냄, 2015.10.2. 13000원



  다섯 살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서 까마중을 훑습니다. 잠옷을 입은 채 까마중을 신나게 훑습니다. 곧 십일월이지만 우리 집 마당과 뒤꼍은 까마중밭입니다. 이 까마중은 참으로 재미있는데, 사람이나 새가 열매를 훑으면 자꾸자꾸 새 줄기가 오르거나 돋습니다.


  사람이나 새가 열매를 훑지 않으면 조금 자라다가 더 자라지 않아요. 작고 새까만 알을 훑으면 곧 새 줄기가 나오면서 천천히 하얀 꽃이 피고, 하얀 꽃이 지면서 푸른 알이 영글고, 푸른 알은 이내 보랏빛으로 바뀐 다음에, 곧 새까만 알로 거듭나요. 이리하여 이 까마중은 십일월을 지나서 십이월까지 열매를 맛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까마중 열매를 먹고, 나는 까마중 잎사귀를 먹습니다. 아이들도 까마중잎을 먹지요. 왜냐하면, 까마중잎은 날풀로도 먹고, 반찬을 할 적에 함께 넣기도 하니까요.



정보고속도로가 미래의 물결이라면 저는 정보시골길을 만들어 여행자들이 더 느린 걸음으로, 더 빨리 진실에 닿을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41쪽)


저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아버지, 저 말들을 없애고 다른 걸 이용하면 열 마리가 넘는 젖소를 키울 수 있어요.” 아버지의 대답은 늘 똑같았지요. “하지만 그러면 그 좋은 말똥거름을 얻지 못하잖니. 게다가 말 대신 트랙터를 쓰면 땅이 너무 굳어지고 만단다.” (47쪽)



  스콧 새비지 님이 엮은 《그들이 사는 마을》(느린걸음,2015)을 읽습니다. 이 책은 미국에 있는 아미쉬 마을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를 담는데, 〈플레인(Plain)〉이라는 잡지에 실은 글을 갈무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플레인〉이라는 잡지는 손으로 활자를 모아서 엮고, 나무판그림을 새기며, 햇볕힘을 쓰는 수동인쇄기로 찍는다고 해요. 더군다나 이 잡지를 받아보고 싶은 사람이 늘어나도 발행부수를 늘리지 않는다지요.


  더 많은 독자를 받아서 더 많은 돈을 벌겠다고 하는 잡지가 아니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알맞게 엮어서, 함께 나눌 이야기를 사랑스러운 이웃하고 조촐하게 주고받는다고 할까요.



평균적으로 1달러를 벌어야 60센트 어치 채소나 에너지를 살 수 있다. 그 정도의 돈을 벌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이 들어갈 때도 종종 있는데, 통근비나 옷 구입비까지 써야 하기 때문이다. (65쪽)


좋은 일을 하는 사람, 가치 있는 상품을 만드는 사람에게 우리 돈을 쓸 때 그들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 (67쪽)


휘발유 자동차는 마차만큼 오래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재생불가능한 연료는 지상의 모든 사람이 전형적인 미국 시민처럼 낭비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 (85쪽)



  《그들이 사는 마을》은 이야기책입니다. 수수한 꿈을 수수한 사랑으로 가꾸어 수수한 삶으로 일구려는 사람들이 나눈 이야기를 모은 책입니다. 이 책에 실은 글이 처음 실린 잡지 〈플레인〉에서 ‘plain’은 ‘수수한’을 뜻한다고 하고, ‘꾸미지 않은’이나 ‘있는 그대로’를 뜻한다고도 합니다. 《그들이 사는 마을》이 이웃한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바로 이 말마디처럼 ‘수수한’ 노래이고, ‘꾸미지 않은’ 웃음이며, ‘있는 그대로’ 어우러지는 바람결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수수한 노래일까요? 손수 흙을 가꾸는 하루가 수수한 노래입니다. 무엇이 꾸미지 않은 웃음일까요? 아이랑 오순도순 어깨동무하면서 놀고 일하고 살림을 짓는 하루가 꾸미지 않은 웃음입니다. 무엇이 있는 그대로 어우러지는 바람결일까요? 하늘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하며 숲이랑 냇물이랑 바다랑 들을 모두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그대로 어우러지는 바람결입니다.



우리는 분명 건강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 위기를 유발한 자들이나 치유한다는 자들이나 이 위기로부터 엄청나게 높은 수익을 올린다는 것이다. (107쪽)


왜 우리는 화학성분 없는 식품보다 무지방이나 무균식품을 훨씬 좋아할까? 왜 의료산업계는 흡연에 대해선 그토록 격렬히 반대하면서 항생제를 비롯한 약품을 육용동물에 대량 사용하고 유독 물질을 작물에 살포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가? (114쪽)



  수수한 사람은 도드라져 보이지 않습니다. 수수한 사람은 도드라지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수수한 사람은 그저 하루를 찬찬히 짓습니다. 더 나아가려 하지 않고 뒤로 가려 하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차근차근 한 걸음씩 걷습니다. 한 걸음을 가만히 내딛고, 두 걸음을 새롭게 내딛습니다. 세 걸음을 웃으며 내딛고, 네 걸음을 노래하며 내딛어요. 다섯 걸음을 춤추며 내딛다가는, 여섯 걸음을 꿈꾸며 내딛지요.


  스스로 삶을 짓기에 수수할 수 있습니다. 수수함이란 꾸밈없음이기도 한데, 오늘 하루가 언제나 즐거우면서 새롭기 때문에 부러 꾸밀 까닭이 없습니다. 수수함이란 있는 그대로이기도 한데, 나 스스로 언제나 사랑스러운 살림을 가꾸기 때문에 애써 덧보태거나 겉치레를 해야 하지 않아요.


  잘나 보이는 옷을 입지 않습니다. 멋져 보이는 자동차를 몰지 않습니다. 대단해 보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놀랍구나 싶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한 걸음을 차근차근 내딛으면서 천 리 길을 가듯이 한결같은 숨결이기에 수수합니다. 백 걸음을 한 걸음처럼 늘 첫머리를 돌아보기에 수수합니다.



기업식 농업에는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사고방식이 따라올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런 관계를 피하고자 한다. (142쪽)


이곳 미국에서는 TV를 보고 싶다면 거의 모든 사람이, 심지어 교도소 수감자들도 볼 수 있다. 미국인은 하루 평균 세 시간 이상을 TV 앞에서 보내는데, 일하고 잠자는 것 다음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셈이다. (168쪽)


고요를 채울 것이라곤 나의 목소리밖에 없었기에 나는 노래를 시작했다. 이제 두 살이 된 딸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노래를 불러 주곤 했지만 그냥 이 노래 저 노래를 조금씩 불렀을 뿐이었다 … 무엇보다 나는 내가 노래 부르길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루 종일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세 살짜리 딸아이도 그렇다. (174∼175쪽)



  밥을 빨리 지어서 먹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날그날 즐겁게 밥을 지어서 먹으면 즐겁습니다. 밥을 많이 지어서 먹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기쁘게 밥을 차려서 알맞게 먹으면 기쁩니다.


  바깥에서 즐거움이나 기쁨을 찾으려고 하면 막상 즐거움이나 기쁨을 찾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합니다. 오늘 내가 누리는 삶이 어떻게 즐겁고 얼마나 기쁜가 하고 돌아보면서 바라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즐거움이나 기쁨이 언제 어떻게 샘솟는가를 찾거나 느끼거나 압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노래하면 됩니다. 가수가 된 뒤에 노래를 부를 일이 아닙니다. 그저 내 목소리를 즐겁게 뽑아서 함께 노래하면 됩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악기를 켜면 됩니다. 전문 연주가로 된 뒤에 악기를 켜지 않아도 됩니다.


  선수처럼 잘 달려야 하지 않고, 선수처럼 자전거를 잘 타야 하지 않아요. 언제 어디에서나 홀가분하게 달리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웃을 수 있으면 돼요. 멋진 올레길이나 둘레길을 찾아가서 관광이나 여행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 사뿐사뿐 걸어서 마실을 하면 됩니다. 우리 집 마당을 가만가만 거닐면 됩니다.



자동차를 끌면 보험이나 면허증과 관련된 비용도 들어간다. 자동차 대신에 말과 마차를 이용해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일한다면 멀리 떨어진 직장에 출퇴근할 때보다 수입이 수천 달러는 줄겠지만 사실상 돈이 더 많이 남는다. (214쪽)


여러 세대 동안 간단한 수공구만을 사용하던 평범한 사람들도 집에서 아이들과 연로한 부모님을 돌볼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 모든 발명품과 노동 절약형 장비를 갖추고도 병든 부모님을 돌볼 시간이 없다. (232쪽)



  고단한 날에는 세탁기 힘을 빌어서 빨래를 합니다. 고단하지 않은 날에는 틈틈이 손빨래를 합니다. 나는 두멧시골에서 살고, 우리 마을 어귀에는 오래된 빨래터가 있기에, 아이들을 이끌고 빨래터로 가볍게 나들이를 와서 빨래를 할 만합니다. 빨래터에 물이끼가 끼면 막대솔을 어깨에 이고 노래하면서 찾아온 뒤에 신나게 빨래터를 치워요. 이러고 나서 물놀이를 하지요.


  수영장이나 워터파크라 하는 데도 재미있을 텐데, 빨래터도 재미있습니다.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서 마을 뒷산 골짜기로 나들이를 간 뒤에 그곳에서 골짝물놀이를 해도 재미있어요.


  해수욕장에 여름철에 맞추어 가야 즐겁지 않습니다. 군내버스를 타고 여느 바닷가에 가서 바닷바람을 쐬다가 도시락을 먹어도 즐겁습니다. 네 식구가 자전거를 천천히 달려서 바닷가 나들이를 해도 즐겁습니다. 함께 햇볕을 쬐고, 나란히 바람을 마시며, 다 같이 들내음을 맡으면 즐거운 하루입니다.



두 살짜리 딸 사라에게 물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이 뭐니?” “아빠.” 이튿날에는 일곱 살인 딸 줄리아에게 물었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이 뭐야?” “내 동생 사라.” (256∼257쪽)


오늘날 학교 교육 옹호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이들을 집단으로 모아 둔다고 사회성이 자라는 게 아니다. 우리가 도처에서 목격하듯 오히려 적대감을 키울 때가 많다. (269쪽)



  이야기책 《그들이 사는 마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주 쉽습니다. 누구나 쉽게 하면서 누릴 수 있는 삶을 가만히 들려줍니다. 너도 나도 함께 사랑스러운 이웃이 되어 기쁘게 어깨동무하는 살림을 찬찬히 이야기합니다.


  아이한테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장난감이 될 만합니다. 거꾸로 어머니나 아버지한테는 아이가 장난감이 될 만합니다. 아이는 어머니 등을 타거나 아버지 목을 타면서 놉니다. 어머니는 아이 배를 간질이면서 웃고, 아버지는 아이 궁둥이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면서 노래합니다.


  학교는 졸업장을 따려고 다니지 않습니다. 학교는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기쁨이 흐르는 놀이마당이라고 할 만합니다. 집은 부동산이 아닌 보금자리요, 마을은 좋은 학군이나 첨단시설이 있는 데가 아니라 오순도순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삶자리입니다.


  미국에 있는 이쁘장한 아미쉬 마을에서 피어난 이야기가 《그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책으로 태어난다면, 한국에 있는 어여쁘고 작은 마을에서 “우리가 사는 마을” 같은 이야기가 조촐히 태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손으로 짓고, 사랑으로 지으며, 꿈으로 짓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알뜰살뜰 해맑게 태어날 수 있기를 빌어요. 4348.10.29.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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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2015-10-29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을 집단으로 모아둔다고 해서 사회성보단 적대감을 키울때가 많다는 말.. 리뷰보다가 오오 하고 멈춰지게 되었습니다.. 진짜 공감가는 말이네요! 수수하고 정말 플레인스럽게 살아간다면 모두가 행복감을 느끼며 욕심부리지 않고 살아갈 것 같네요ㅎㅎㅎ

숲노래 2015-10-29 20:32   좋아요 1 | URL
서로 아낄 줄 아는 아이(어른)들이 모인 자리일 때에 비로소
따스한 사랑이 흐를 수 있다고 느껴요.

그냥 집단으로 모아 놓으면...
이런 데에서 사회성을 키우기란 그야말로
어려운 노릇이나 말이 안 되는 노릇이지 싶어요.
 
10대와 통하는 환경과 생태 이야기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20
최원형 지음 / 철수와영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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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86



몸과 마음에 ‘숲’이라는 밥을 주세요

― 10대와 통하는 환경과 생태 이야기

 최원형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5.10.18. 13000원



  내가 먹는 밥은 언제나 내 몸이 됩니다. 내 몸은 내가 이제껏 먹은 밥으로 이루어집니다. 내 몸이 튼튼하다면 이제까지 튼튼한 밥을 먹었다는 뜻이요, 내 몸이 안 튼튼하다면 이제까지 안 튼튼한 밥을 먹었다는 뜻이에요. 이를테면, 방사능이나 수은을 먹으면 내 몸은 어떻게 될까요. 틀림없이 방사능으로 망가지고 수은으로 뒤틀어질 테지요. 몸에 받아들인 대로 몸이 바뀔 테니까요.


  그런데, 사람은 밥을 물질로만 먹지 않아요. 사람은 밥을 마음으로 함께 먹습니다. 똑같은 밥을 먹어도 한 사람은 튼튼하고 한 사람은 아픕니다. 똑같은 밥을 먹는데 한 사람은 활짝 웃고 한 사람은 아무 느낌이 없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기쁜 마음이 되어 밥을 먹으면 언제나 기쁨이 흐르지만, 기쁨이 없이 밥을 먹으면 몸속에 물질이 들어와서 배고픔은 가실 수 있으나 말 그대로 기쁨이 흐르지 않아요.


  몸이 작거나 여린 사람이 때때로 놀라운 힘을 내곤 해요. 왜 그러한가 하면 마음으로 새 기운을 끌어내기 때문입니다. 몸이 크거나 힘이 세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몸이 작거나 여린 사람을 이길 수 없기 마련입니다. 몸이 작거나 여리더라도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어떤 고비나 가시밭길도 씩씩하게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려면 밥을 먹어야 하는데 그 밥은 어디서 올까? 밥을 지으려면 벼가 있어야 하고 벼는 햇볕과 공기와 흙, 그리고 물이 없다면 자랄 수 없지. 거기다 꽃가루를 옮겨 주는 곤충이 없다면? (19쪽)


숲에 가면 나무는 물론 다람쥐, 새나 다양한 곤충들을 만날 수 있잖아.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과 만나면서 우리는 살아 있다는 기쁨을 얻고, 생명의 조화로움과 안정감을 느껴. (30쪽)



  최원형 님이 쓴 《10대와 통하는 환경과 생태 이야기》(철수와영희,2015)를 읽습니다. 이 책은 푸름이 눈높이를 헤아리면서 환경과 생태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무엇이든 도시로만 몰려서 문화도 문명도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과학도 예술도 모조리 도시에만 가득한 오늘날 사회에서 환경과 생태를 왜 돌아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해요. 도시에서 나고 자라는 거의 모든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환경과 생태를 찬찬히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스스로 가꾸면서 일구고 사랑할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이야기합니다.



열대야와 철모르는 매미의 울음 때문에 잠을 설친 도시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나부터 에어컨을 켜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얼른 돈을 벌어서 냉방 장치가 잘된 고급 아파트로 이사 갈 생각을 할까? (41쪽)


사막화가 최근 급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인간이 숲을 없애 버렸기 때문이야. 나무가 자라는 땅은 결코 사막이 되지 않아. (56쪽)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90퍼센트가 훨씬 넘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삽니다. 그나마 시골은 거의 모두 늙은 할매와 할배이기 때문에, 어린이와 푸름이는 95퍼센트나 99퍼센트가 도시에서 나고 자란다고 해야 옳지 싶습니다. 그런데, 고작 1퍼센트나 5퍼센트가 될까 말까 한 시골 아이라 하더라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숲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시골내기조차 숲하고 동떨어진 곳에서 살기 마련이에요. 도시가 아닌 군 단위에서 살더라도 읍내나 면소재지에서 사니까요.


  들이나 숲을 옆에 낀 마을이나 두멧자락에서 태어나서 사는 어린이나 푸름이는 거의 없습니다. 시골내기라 하더라도 학교를 오가느라 바빠서 숲을 돌아보거나 바닷바람을 쐬거나 냇가에서 물놀이를 하는 어린이나 푸름이는 거의 없지요. 더군다나 4대강사업으로 냇가는 모조리 망가졌고, 골짜기까지 파헤쳐졌습니다. 바닷가는 관광사업이나 공장이나 핵발전소나 군부대가 가득한 탓에 제대로 가까이할 수도 없습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든 도시에서 나고 자라든 참말 오늘날 한국에서는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환경도 생태도 하나도 모르는 채 살기 일쑤입니다. 교과서를 옆에 끼기는 하되 나무나 풀꽃을 옆에 끼지는 못합니다. 학교버스나 학원버스를 타더라도 두 다리로 흙길을 밟거나 풀밭을 밟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맨발로 들판을 달리거나 모래밭을 거닐면서 노는 어린이나 푸름이는 찾아볼 수 없어요.



오늘날은 돈이 되는 작물 위주로 단일 작물을 대량 재배한단다. 그런데 단일 종만 심을 경우 기후 변화라든가 특정 전염병에 만약 그 작물이 취약하다면 어떻게 될까? (78쪽)


곡물 자급률은 1990년 43.1퍼센트, 2000년 29.7퍼센트로 하락했고 2012년 23.6퍼센트, 2013년에는 23.1퍼센트로 계속 떨어지고 있어 … 우리가 먹는 밥과 고기, 채소 이런 것들의 77퍼센트가 수입된 곡물에 의존하고 있다는 얘기니까. (80쪽)



  입시를 걱정해야 하는 푸름이한테 《10대와 통하는 환경과 생태 이야기》는 어떤 책이 될 만할까요? 대학 입학 시험에서 ‘환경 문제’를 다루는 문제가 있다면, 그런 문제를 풀도록 도와주는 책이 될까요? 입시에 바쁜 푸름이는 환경이나 생태 같은 이야기에는 등을 돌리면서 시험문제만 들여다보면 될까요?


  어린이와 푸름이로 싱그러운 10대를 보낼 아이들이 환경이나 생태를 제대로 모르는 채 대학생이 된다면, 그리고 대학교를 마친 뒤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된다면, 이 젊은이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할까요? 4대강사업을 꾀한 우두머리가 한 사람 있었다지만, 이 4대강사업에서 실무를 맡거나 홍보를 맡거나 건설이나 건축이나 용역이나 온갖 일을 맡은 공무원하고 회사원하고 노동자가 함께 있습니다. 대학생이 되도록 환경과 생태를 제대로 살피거나 배우지 못한다면, 공무원 시험을 치르거나 입사 시험을 치르기 앞서까지 환경도 모르고 생태도 모른다면, 이런 몸과 마음으로 어떤 행정이나 정책이나 영업이나 기획을 마련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환경과 생태에 등돌린 정치 우두머리가 바보스러운 정책을 밀어붙이더라도, 공직에 서는 젊은 일꾼이 환경과 생태에 등돌리지 않는다면 바보스러운 정책을 막거나 끝장낼 수 있습니다. 환경과 생태에 모르쇠인 정치 우두머리나 정치꾼이 나오더라도, 기자로 일하거나 여느 살림꾼이나 노동자로 일하는 젊은이가 환경과 생태를 똑바로 알거나 살필 줄 안다면 바보스러운 모든 흐름을 멈추게 하면서 아름다운 삶을 짓는 길을 열 수 있습니다.



공장식 축산은 자동차를 만들듯이 커다란 축사에서 대량으로 가축을 길러내는 방식이야. 덕분에 우리는 많은 양의 고기를 충분히 먹을 수 있게 됐지. 그런데 제한된 공간에 많은 수의 가축을 기르다 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 … 공장식 축산을 위해 숲을 밀어내고 사료 작물을 심어야 해. 그리고 막대한 양의 사료를 생산하기 위해 단일 작물에 집중해야 하지. 그 과정에서 화학 비료와 제초제, 살충제 등을 사용하고, 이는 땅은 물론 지하수 오염을 불러온단다. (85, 87쪽)


인간이 마음대로 땅을 변형시키는 게 과연 올바른 일일까. 오랜 세월 동안 쌓여 온 자연을 한순간에 뒤바꾸는 간척 사업은 오만하고 위험한 행동이야. (111쪽)



  이 나라 어린이는 예비 수험생이 아닙니다. 이 나라 푸름이는 수험생이 아닙니다. 어린이는 어린이요, 푸름이는 푸름이입니다. 그리고, 젊은이는 젊은이입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뛰놀 수 있는 터전이 되어야 하고, 어린이로서 아름다운 삶과 사랑을 둘레 어른한테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푸름이는 푸름이로서 싱그러운 꿈을 꿀 수 있는 삶터여야 하고, 푸름이로서 아름다운 길을 새롭게 갈고닦거나 여는 슬기를 둘레 어른한테서 배울 수 있어야 해요.


  《10대와 통하는 환경과 생태 이야기》 한 권이 모든 이야기를 다루거나 들려줄 수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삶을 슬기롭게 바라보는 눈길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같은 실마리를 헤아리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고, 시험문제에 나오지 않으며, 대학입시에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야기에 눈을 뜨면서 어린이와 푸름이가 제 삶을 스스로 사랑하는 길을 밝히는 길동무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라면 아이가 무엇을 배울 때에 즐거운 삶이 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를 맡아 가르치는 어른이라면 아이한테 무엇을 물려줄 때에 기쁜 삶이 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나이에 맞추어 학교를 보내는 일 말고, 마음을 헤아리면서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어야지요. 아이들이 삶을 읽고 꿈을 짓도록 어른들이 어깨동무를 해야지요.



우리나라에서 종이컵을 쓰느라 5384만 그루의 나무가 벌목되고 1만 2656리터의 물이 사용된단다. 여기에 9만 7369톤의 쓰레기는 덤으로 생기는 거고. (120쪽)


사람들은 올림픽을 개최하면 엄청난 이익을 볼 줄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 이제 많은 나라들은 올림픽 유치를 꺼리고 있단다. 동계올림픽 개최를 두고 평창과 경쟁했던 독일의 뮌헨 시민들은 개최 도시로 평창이 선정되자 환호성을 질렀다고 해. (125쪽)



  종이 한 장을 쓰기까지 나무를 얼마나 베고 석유와 전기를 얼마나 쓰는가를 아이들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종이컵을 비롯한 일회용품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아이들이 제대로 느껴야 합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운동경기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아이들이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스포츠와 연예인이 어떤 산업이요 이 사회에서 어떤 구실을 하는가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바람을 알고 물을 알며 땅을 알아야 합니다.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먹는 밥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알아야 해요. 하루 스물네 시간 늘 마시는 바람이 무엇인가를 참답게 알아야 하고, 수도물하고 냇물이 어떻게 다른가를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전기를 알아야지요. 도시에서만 나고 자라고 지내는 아이들이 ‘전기를 쓰려면 어디에 발전소를 짓고 어디에 송전탑을 박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들이 ‘도시 문명을 누리도록’ 시골이 얼마나 짓밟히거나 괴로운가를 올바로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 동안 쓰이는 일회용품의 양은 얼마나 될까? 자그마치 1035톤. 한 해에 38만 톤이나 돼. 일회용품 쓰레기 처리 비용만 연간 약 1000억 원에 이른다니 이 정도면 거의 중독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137쪽)


우리나라 남해 연안 바닷속의 미세 플라스틱 오염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니?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유류유해 물질연구단이 조사한 내용을 보면, 거제도 해역 바닷물 1세제곱미터에는 평균 21만 개의 미세 플라스틱 입자가 들어 있었어. 같은 방법으로 조사한 싱가포르 해역 바닷물 속 미세 플라스틱 평균보다 100배 넘게 많아. (149쪽)



  《10대와 통하는 환경과 생태 이야기》라는 책에서 미처 다루지는 못하는데, 사람들이 김을 먹을 수 있도록 하자면 염산을 씁니다. 염산을 바다에다가 풀지요. 한국사람이 먹는 김 가운데 ‘염산을 안 쓴 김(무산 김)’은 아주 드물어요. 김을 먹을 때마다 이 나라 바다는 염산으로 망가집니다.


  겨울에 딸기를 먹으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이 겨울에 딸기를 찾으면 찾을수록 겨우내 비닐집에서 석유로 불을 때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늦봄(5월)이나 첫여름(6월)이 아닌 한겨울이나 이른봄(3월)에 딸기를 찾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비닐집을 자꾸 지어야 하고 비닐집에서 석유를 어마어마하게 때야 합니다. 사람들이 여름이 아닌 봄에 토마토를 먹으려고 하니까 시골 비닐집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한겨울부터 석유를 엄청나게 때야 합니다.


  어쩌면 한두 사람 몸짓으로는 못 바꾼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한두 사람부터 바꾸어야 비로소 다 함께 바꿉니다. 한두 사람부터 스스로 제대로 깨달아서 삶을 슬기롭게 바꿀 때에 다 함께 시나브로 바꿀 수 있습니다. 두 번 먹을 것을 한 번으로 줄인다든지, 한 번 먹을 것도 횟수를 줄일 수 있어요.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이대로 무너지는 길을 갈 테고, 한걸음을 씩씩하게 뗄 때에 비로소 모든 것을 바꾸는 새 길을 엽니다.



지금의 화력 발전이나 핵발전소는 짓는 데 많은 자원과 비용이 들어. 게다가 여기서 만드는 전기는 소비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사람들이 사는 도시로 날라야 하지. 그런데 전기는 그 특성상 이동 과정에서 손실이 일어난단다. (223쪽)



  대형발전소는 처음 지을 적에도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지만, 유지관리비도 어마어마하게 들고, 송전탑을 세울 적에도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며, 대형발전소 목숨이 다 되어 폐기하려고 할 적에도 돈이 어마어마하게 듭니다. 그런데 정부와 기업에서는 대형발전소 사업을 멈추지 않습니다. 정부와 기업은 대형발전소를 ‘짓고(1), 관리하고(2), 폐기하는(3)’ 건설사업을 꾀하면서 돈을 번다고 여기거든요. 그러면 이런 돈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바로 우리 주머니에서 나오지요.


  집집마다 자력발전을 하는 얼거리를 세운다면, 또 집을 지을 적부터 건축폐기물이 나올 집이 아니라, 다시 말하자면 쓰레기가 나올 집이 아니라, 오래된 집을 허물 적에 ‘집을 지은 재료’를 모두 흙으로 돌려줄 수 있는 얼거리를 세운다면, 도시와 시골 모두 아름다운 삶터가 될 수 있습니다. 일회용품을 만들어서 쓸 생각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두고두고 쓸 만한 것을 지어서 쓸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책 한 권도 이와 같아요. 한때 반짝하듯이 읽고 버리는 처세책이나 유행책이 아닌, 도서관에 백 해나 이백 해를 거뜬히 건사해서 두고두고 읽힐 만한 책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는 책을 써서 지어야 하고,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는 ‘집’을 짓고 가꾸어야 합니다. 부동산이나 돈이 아닌 ‘아름다운 집’을 짓고 가꾸어서 물려주어야지요. 아름다운 들과 숲과 내와 바다를 가꾸어서 이 모든 기쁨을 아이들이 물려받도록 해야지요.



길고 긴 싸움 끝에 2008년 서울시는 골프장 계획을 철회하고 대신 공원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단다. 지금의 상암동 노을공원이 바로 그곳이야. 지금 그곳은 주말이면 시민들이 자연을 만끽하는 공간이 되었어.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공원은 얼마나 소중한 공간이니? 만약 그때 환경단체에서 싸우지 않았다면 철조망 너머 몇몇 부유층이 골프를 치는 모습을 보고 있어야 했을 거야. (237쪽)



  어린이하고 푸름이를 둔 어버이라면 《10대와 통하는 환경과 생태 이야기》 같은 책을 이녁 아이하고 함께 읽을 수 있기를 빕니다. 바로 오늘부터 우리가 무엇을 하면서 삶을 기쁘게 가꾸어 아름답게 살아갈까 같은 이야기를 아이들하고 함께 생각할 수 있기를 빌어요.


  몸과 마음에 어떤 밥을 주는 삶인지 돌아보아야 해요. 몸만 살찌우는 밥이 아니라 마음을 함께 살찌우는 밥을 먹는지 짚어야 해요. 몸과 마음을 사랑으로 아름답고 슬기롭게 가꿀 수 있어야 해요. 다 함께 모여서 어우러지는 이 지구별을, 이 나라를, 이 마을을, 웃음과 노래가 흐르는 짙푸른 숲집이 되도록 돌볼 때에 비로소 사람다운 꿈을 이루리라 느껴요. 4348.10.22.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환경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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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의 자연 치유 - 치유를 위한 비움과 알아차림 명상, 요가, 그리고 자연식
문숙 지음 / 샨티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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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85



스스로 자연인 줄 알 적에 스스로 아름답다

― 문숙의 자연 치유

 문숙 글

 샨티 펴냄, 2015.9.25. 16000원



  아침에 빨래를 합니다. 겨울을 앞두고 옷장에서 두꺼운 옷을 꺼내어 마당에 넙니다. 엊저녁에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워 바깥마실을 하면서 모자를 씌우고 장갑을 끼웠더니 냄새가 난다고 해서 오늘은 아침부터 겨울옷이랑 모자랑 장갑을 마당에 내놓아 해바라기를 시킵니다.


  가을볕은 시골자락 들녘을 따뜻하게 어루만집니다. 벼베기를 마치고 길가에 말리는 나락한테도 따순 볕이 내리쬐고, 벼베기를 앞둔 들판에도 따순 볕이 내리쬡니다. 그리고 겨울옷을 미리 말리려는 마당에도 따순 볕이 내리쬐어요.


  빨래를 하고 옷가지를 널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늘 손으로 빨래를 하는데, 손빨래가 힘들다고 여기는 사람은 언제나 힘듭니다. 그리고 손이 아닌 기계로 빨래를 할 적에도 힘들다고 여기는 사람은 언제나 힘들어요. 손을 쓰든 기계를 쓰든, 우리 마음에 따라 살림하고 삶이 바뀝니다. 다시 말하자면, 스스로 기쁨이 가득한 마음으로 지낸다면 손빨래를 하든 기계빨래를 하든 언제나 기쁨이 넘쳐서 살림살이를 아기자기하게 가꿀 만합니다.



멀리 바다가 내다보이는 언덕배기에 허름하게 서 있는 작은 농가를 대강 수리해 ‘내 집이다’ 하고 눌러앉으니, 우주가 나를 가운데 둔 채 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곳이 바로 지구 표면의 중심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15쪽)


꽃의 얼굴에서 천국을 본다. 그리고 신의 모습을 본다. 풀숲에 피어 있는 작은 꽃의 얼굴에서 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것에서도 신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잔디 위에 피어 있는 작은 꽃에서 환희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신의 찬양은 들리지 않을 것이다. (24쪽)



  문숙 님이 쓴 《문숙의 자연 치유》(샨티,2015)를 읽습니다. 문숙 님은 어느덧 예순이라는 나이를 넘었습니다. 예순 고개로 오기까지 영화배우로도 일했고, 화가도 되었고, 요리사 자격증도 땄다고 해요. 그런데, ‘남 앞에 서서 남한테 얼굴과 몸짓과 열매(성과물)’를 보여주는 삶이었을 적에는 늘 아픈 곳투성이에 근심이나 걱정이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넘치도록 돈을 벌고, 넘치도록 옷이며 가방이며 신이며 잔뜩 꾸미면서 ‘예쁜 얼굴이나 몸’을 남 앞에서 드러내는 동안 기쁨이나 즐거움이 샘솟던 적은 아주 드물었다고 해요.


  그러면, 문숙 님은 언제 기쁨이나 즐거움이 샘솟았을까요? 우리는 언제 기쁨이나 즐거움을 스스로 길어올려서 누릴 만할까요? 넘치도록 돈을 벌어야 기쁠까요? 예뻐 보이거나 멋져 보이는 옷차림에 자가용에 아파트를 거느려야 즐거울까요?



‘습관’이나 ‘병의 의지’로부터 오는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순수하게 지켜보는 마음의 눈’이 필요하다.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내려고 애쓰지 않으면서 조용히 내면을 지켜보는 것이다. (87쪽)


요가를 연습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지켜야 할 중요한 마음의 상태가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초보자의 마음’이다 … “무엇인가로 꽉 차 있는 전문가적인 마음에는 새로운 가능성이란 없다. 그러나 초보자의 마음에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요가를 연습하는 사람들은 이 법칙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미 배워서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그것을 비워 가능성으로 가득 찬 공간을 마련하는 작업에 전념해야 한다. (120, 121쪽)



  한국말사전에 ‘자연 치유’라는 말은 없으나, 오늘날 ‘자연 치유’는 아주 널리 쓰는 낱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병원이나 약국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제 몸을 살펴서 다스리도록 이끄는 몸짓인 ‘자연 치유’란 무엇인가 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연이라고 하는 대목을 이야기합니다.


  아마 학교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얼핏 이야기할 테지요. 그러나 학교에서는 병원이나 약국에 가야 한다고 힘주어 이야기해요. 학교에서는 병원이나 약국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몸을 다스리고 스스로 마음을 아끼는 길은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의사나 약사가 되는 길을 걸어가기는 하되, 의사와 약사가 없을 적에 스스로 몸이랑 마음을 살뜰히 가꾸는 길은 배우지 못해요.


  곰곰이 돌아보면, 사람들이 학교를 따로 다니지 않던 지난날에는 병원이나 약국을 찾는 일이 없었다고 할 만합니다. 지난날에는 병원이나 약국도 없었으니까요. 지난날에는 마을에서 마을사람 스스로 몸하고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지난날에는 시골사람 스스로 풀을 살피고 헤아리면서 스스로 밥을 짓고 약을 지었습니다.


  어느 모로 생각하면, 학교가 생기고 병원하고 약국이 생기면서 ‘아픈 사람’이 자꾸 생긴다고 할 만합니다. 아픔을 없애는 병원이나 약국이 아니라 아픔을 키우면서 장사가 되는 병원이나 약국이라고 할까요. 오늘날 학교는 배움을 베풀기는 하지만, 입시지옥으로 모든 아이들을 내몰거나 밀어댑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즐겁게 배우기도 할 테지만, 입시교육과 시험문제에 짓눌리거나 시달리면서 시름시름 앓아요. 병원이나 약국에서 아픈 곳을 다스려 주기는 하되 돈을 지나치게 많이 받고, 또 항생제를 지나치게 많이 쓰면서 ‘사람들 스스로 몸을 다스리는 길’을 잊거나 잃게 하기 일쑤입니다.



대형 식품점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장바구니를 들여다보면 더욱 재미있다. 모두가 하나같이 자신의 생긴 모습이나 건강 상태를 그대로 말해 주는 듯한 식품들로 바구니를 채우고 있다. (138쪽)


(어릴 적에) 아직 흙냄새도 가시지 않은 촌스런 풀과 채소, 밭에서 뒹구는 과일들만 먹던 나보다는 깡통을 따서 빵과 함께 먹고 예쁜 그림이 붙어 있는 야릇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을 먹는 그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나는 늘 부러워했다. (145쪽)



  아이들이 뛰놀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집니다. 피가 흐르기도 하고 때때로 살갗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때에 아이들은 약을 발라서 무릎을 다스릴 수 있으나, 그냥 두면서 무릎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풀잎이나 풀줄기를 갈아서 무릎을 다스릴 수도 있고요.


  지난날에는 어디나 흙길이었고 풀밭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날 아이들은 뛰놀다가 넘어져도 무릎이 깨지거나 피가 철철 나도록 다치는 일이 드물었어요. 돌에 찧지 않고서야 무릎이 깨지지는 않지요. 오늘날에는 어디나 시멘트나 아스팔트 바닥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아이들은 살짝 넘어져도 무릎이 깨지기 마련이에요. 지난날에는 피를 아물게 하는 풀이 무엇인지 누구나 알았고, 어디나 풀밭이었으니, 피가 나도 아이고 어른이고 쉽게 다스렸어요. 오늘날에는 풀밭을 보기 어렵고, 시골에서는 농약이나 풀약을 너무 쳐대기 때문에 풀을 뜯어서 다친 곳을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


  《문숙의 자연 치유》를 조용히 읽습니다. 문숙 님은 이 책에서 요가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자연식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문숙 님이 살던 하와이 섬마을에서 사탕수수 산업을 어떻게 하는가 같은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사탕수수밭에서는 농약을 엄청나게 쓰고, 이 농약은 바다로 흘러든다지요. 한국에서도 농약은 엄청나게 씁니다. 한국에서 쓰는 농약도 모두 흙으로 스미고 바다로 스밀 테지요.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바닷가에 원자력 발전소가 있으니 일본 미나마타병하고 한국 온산병에 이어서 ‘원자력병’이나 ‘핵병’이 생길 수 있어요.



진정으로 치유를 원한다면 몸을 해치고 학대하는 행위를 멈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화를 원하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겠다는 절실한 마음이 필요하다. (166쪽)


전갈도 강한 독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이긴 하지만 그건 그냥 그들의 상황일 뿐 일부러 우리를 괴롭히려고 들이대지는 않는다. 단지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만 하지 않으면 된다. 그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그러면 다들 알아서 거리를 두고 피해 가기 마련이다. (189쪽)



  ‘자연식’ 이야기에 이어 ‘자연 치유’ 이야기를 들려주는 문숙 님은 누구보다 문숙 님 스스로 이녁 몸이 바로 자연인 줄 깨닫는 길을 걸었습니다. 스스로 자연인 줄 모르던 때에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뽐내는 길을 걸었다면, 스스로 자연인 줄 알아차리면서 배우는 요즈막에는 ‘내가 나를 스스로 바라보는’ 길을 걷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식이나 자연 치유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농약이나 항생제나 비료에 젖어들지 않은 밥을 먹거나 요가만 익히면 될까요? 돈을 넉넉히 벌어서 자연 식단을 짜거나 요가 학원을 다니면 될까요?


  스스로 자연인 줄 알려면 스스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일 때에 스스로 자연, 바로 ‘숲’이 됩니다. 남이 나를 사랑해 주어야 사랑이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 때에 사랑입니다. 남이 나한테 뭔가를 선물로 주어야 사랑이지 않습니다. 스스로 기쁨을 짓고, 스스로 노래를 지으며, 스스로 삶을 지을 때에, 언제나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자연 치유는 바로 스스로 짓는 기쁨이요 스스로 짓는 노래이며 스스로 짓는 삶입니다.



사탕수수밭에 뿌려진 대량의 농약들은 얼마 가지 않아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천국인 양 평화롭게 내다보이는 새파란 남태평양의 바닷물도 실제로는 벌써 오래전부터 농약으로 오염되고 죽어 가는 바닷물일 뿐이다. (197∼198쪽)


이곳에서 우리를 구하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나 하나가 알아차리는 것이 주변의 변화를 초래하며, 나 하나가 빛을 발하면 어두운 주위가 같이 밝아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205쪽)



  ‘자연 치유’라는 말에서 ‘자연(自然)’은 한국말로 ‘숲’을 가리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사람이 건드리지 않고 스스로 생겼다고 하는 멧자락이나 바다나 냇물이나 풀이나 짐승이나 나무는 모두 ‘숲’ 품에서 태어나거든요. 숲이 있을 때에 뭍이랑 바다가 함께 있습니다. 숲이 없으면 뭍도 바다도 있지 못합니다. 풀과 나무가 돋고, 벌레와 짐승이 살며, 싱그러운 바람과 흙과 햇볕이 어우러지는 기운이 바다로 흘러들기에 바닷속도 싱그러운 터전이 됩니다.


  오늘날 도시문명이 죽음으로 치닫는 까닭은 도시 스스로 숲을 밀어내면서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플라스틱과 쇠붙이만 끌어들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도시를 둘러싼 시골에 공장과 발전소와 쓰레기터와 골프장과 고속도로와 군대 따위를 엄청나게 때려지으면서 시골자락 숲을 함께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도시에도 숲이 있어야 하고, 시골에도 숲이 있어야 합니다. 수목원이나 공원이 아닌 숲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보금자리에 마당을 건사하면서 텃밭도 일구고 해바라기를 할 수 있어야 숲노래를 부르는 숲사람이 됩니다.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숲바람을 마시고 숲살이를 할 수 있을 때에 튼튼합니다.


  병원이나 약국이 늘어야 사람들이 튼튼하지 않아요. 사람들 스스로 튼튼할 때에 비로소 튼튼합니다. 사랑을 다루는 영화나 문학이나 연속극을 보기에 ‘사랑을 알거나 나누’지 않습니다. 스스로 마음속에서 사랑을 길어올려서 기쁘게 웃고 노래할 때에 비로소 ‘사랑을 알거나 나누’는 삶이 되어요.


  자연 치유란 스스로 숲이 되려는 몸짓입니다. 자연 치유를 하려는 마음이란 스스로 숲으로 거듭나려는 사랑짓입니다. 자연 치유를 하면서 기쁘게 웃으려는 삶이란 스스로 숲노래를 부르면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려는 생각짓기입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 숲(자연)인 줄 깨달으면서 스스로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길을 꿈꿉니다. 4348.10.19.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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