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노동 이반 일리치 전집
이반 일리치 지음, 노승영 옮김 / 사월의책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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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43



‘말’을 빼앗겨 ‘자급자족’을 못하는 ‘그림자 삶’

― 그림자 노동

 이반 일리치 글

 노승영 옮김

 사월의책 펴냄, 2015.12.1. 15000원



  즐겁게 일하려고 하는 마음일 적에는 언제나 즐겁게 일할 수 있습니다. 즐겁게 일하려는 마음이 아니라면 아무리 돈을 많이 받는 일자리를 얻더라도 즐거움이 찾아들기 어렵습니다.


  즐겁게 먹으려고 하는 마음일 적에는 언제나 즐겁게 먹을 수 있습니다. 즐겁게 먹으려는 마음이 아니라면 아무리 대단한 곳에서 대단하다는 대접을 받더라도 즐거운 맛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남이 나를 즐겁게 해 주기에 즐거울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할까요. 내가 스스로 즐거운 삶으로 나아가기에 즐겁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셈이라고 할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학교 교육은 유전적 차이를 왜곡해 신분 하락 자격증을 발급하는 것과 다름없고, 건강의 의료화는 감당 가능하고 유효적절한 한도를 훨씬 넘는 의료 수요를 발생시킴으로써 상식적인 의미의 ‘건강’ 즉 환자의 유기적 대처 능력을 떨어뜨린다. 또한 운송 부문에서는 출퇴근 시간대에 차량이 몰림에 따라 허비되는 시간이 늘어나고, 이동 수단의 자유로운 선택 폭이나 상호 접근성 모두가 줄어든다. (21쪽)



  이반 일리치 님이 쓴 《그림자 노동》(사월의책,2015)이 새롭게 나옵니다. 이 책은 1988년에 분도출판사에서 처음으로 한국말로 옮겼지 싶은데, 그동안 몇 차례 새 옷을 입고 나오기도 했으나 이내 판이 끊어졌습니다. 널리 읽힐 만한 책이기에 꾸준히 새로 나오지만, 제대로 읽히지 못한 책이기에 자꾸 판이 끊어졌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인문책 《그림자 노동》은 어떤 줄거리를 다룰까요? 무엇보다도 책이름으로 붙은 ‘그림자 노동’이란 무엇인가 하는 줄거리를 다룹니다. ‘임금 노동’ 밑바닥에 그림자처럼 가려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시커멓게 짓눌린 채 끙끙 앓는 ‘그림자가 되어 버린 노동’을 다루어요. 그리고, ‘그림자 노동’이 태어나도록 이끈 몸짓과 사람들과 물결이 무엇인가를 다루지요.



자급자족 활동이 점차 희귀해짐에 따라 모든 무급 활동은 가사 노동과 비슷한 구조를 띠게 된다. 성장 지향적 노동은 유급이건 무급이건 획일화되고 관리되는 활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9쪽)


여성들은 집안일을 하면서 벌지 않고 소비만 하는 것이 과연 특권인지 묻는다. 다시 말해 의무적인 소비의 패턴에 매여 있느라 사실상 질 낮은 일에만 내몰리고 있는 게 아닌지 묻는다. 학생들은 학교 다니는 것이 배우기 위해서인지 스스로를 마비시키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인지 묻는다. (57쪽)



  지구별 곳곳에 ‘그림자 노동’은 왜 생길까요? 이반 일리치 님은 이 실마리를 풀려고 ‘엉킨 실타래’를 하나씩 벗기는데, 실마리를 하나씩 찾으려고 하면서 ‘말’이라고 하는 대목을 마주합니다.


  아니, ‘일(노동)’을 다루는데 ‘말’이라니? 왜 그림자 노동은 ‘말’에서 모든 실타래가 비롯하는지?


  그야말로 수수께끼라고 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말이 무엇이요 말을 정치권력자가 어떻게 다루려 했는가를 돌아보고 짚고 살피고 생각하고 헤아릴 수 있다면, 그림자 노동이 비롯한 자리를 알아차릴 만하고, 그림자 노동을 걷어치우는 길을 찾아낼 만합니다.


  이반 일리치 님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들한테 다시금 힘주어 말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서기(자급자족)’를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걸림돌을 살피는 실마리가 바로 ‘말’에 있고, 말을 어버이가 집에서 가르치지 않고 ‘국가기관이 세운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르치려고 하는 자리에서 그림자 노동이 태어난다고 외쳐요.



(스페인에서) 네브리하의 바람은 훗날 교회가 쓴 금지의 방법보다 훨씬 근본적인 차원에서 인쇄물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는 민중의 토박이말을 문법학자의 언어로 대체하고 싶어 했다. 이 인문주의자가 제안한 것은 구어를 표준화함으로써 인쇄라는 신기술을 토박이 영역으로부터 빼앗아버리는 것이었다. (73쪽)


네브리하가 문법을 가르치려고 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읽기를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여왕에게 권력과 권위를 달라고 청원한 이유는 자신의 문법을 이용해 읽기의 무정부적 확산을 가로막기 위해서였다 … 그의 계획이란 제국의 동반자를 침착하게 제국의 노예로 바꾸는 것이었다 … 토박이말로부터 가르치는 언어로의 근본적인 변화는 모유에서 분유로, 자급자족에서 복지로, 사용가치를 위한 생산에서 시장가치를 위한 생산으로의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78, 79, 80쪽)



  이반 일리치 님은 에스파냐(스페인) 이야기를 불쑥 꺼냅니다. 에스파냐 어느 지식인이 ‘에스파냐 곳곳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쓰던 고장말(사투리)’을 더는 못 쓰게 하면서 ‘표준 에스파냐말(국가 통제 표준말)’만 쓰도록 할 때에, 에스파냐 사람들(민중)은 ‘여왕 폐하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노예로 부릴’ 수 있다고 외칩니다. 중앙집권 권력을 이루고, 왕권을 더욱 튼튼히 다질 뿐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삶을 짓는 길을 가로막는 가장 놀라우면서 가장 무시무시한 일이란 바로 ‘국가 표준말’을 세워서, 사람들이 ‘국가 표준말’로만 ‘의사소통’을 하도록 시키는 데에 있다고 외쳤다고 합니다.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가 뚱딴지 같다고 여길 만하리라 봅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릎을 칠 만하리라 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그림자 노동》에서 잘 들려주는 이야기인데, 아주 먼 아스라한 옛날부터 ‘말’은 ‘여느 집’에서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아이한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말을 가르친다면서 나라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어 학교를 짓거나 교사를 키우거나 교과서를 엮을 까닭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을 비롯해서 집을 짓고 밥을 지으며 옷을 짓는 살림살이는 모든 마을 모든 집에서 스스로 가르치고 배우던, 돈으로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고 스스로 물려주고 물려받은 아름다운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는 정해진 대로 말하는 법을 배운다. 가난뱅이가 부자처럼 말하고, 환자가 건강한 사람처럼 말하며, 소수가 다수처럼 말하도록 하는 데 돈이 쓰인다. 우리는 아이와 교사의 언어를 개선하고 교정하고 확장하고 갱신하는 데 비용을 지출한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전문용어에는 더 많은 돈을 쓰고, 고등학교에서 십대들이 이 용어를 맛보도록 하는 데는 더더욱 많은 돈을 쓴다. (112쪽)


이 부부는 자녀 앞에서까지 ‘인 로코 마기스트리’ 즉 ‘교사의 입장에’ 서 있었다. 아이들은 부모 없이 자라는 셈이었다. 두 어른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향해 말끝마다 ‘교육’을 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도 끊임없이 자녀들에게 말하는 본보기를 보였고, 내게도 그리 해 달라고 부탁했다. (130∼131쪽)



  아이한테 말(을 비롯해서 온갖 지식)을 가르칠 적에 학교에 보내는 일이 ‘사람 역사’에서 대단히 짧습니다. 게다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친 어버이는 말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말을 가르친 어버이는 아이가 스스로 삶을 짓는 길을 모두 가르쳤어요. 여느 보금자리인 집에서 어버이한테서 말을 배운 아이들은 누구나 손수 집을 짓고 밥을 지으며 옷을 짓는 살림을 몽땅 배웠지요.


  한국 사회를 돌아보아도 이 대목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겨레는 조선 봉건 사회일 적에도 일제강점기 사회에서도 분단이 되고 전쟁이 터지던 때에도, 시골에서 여느 마을 수수한 보금자리에서 아이를 낳아 돌보던 모든 어버이는 이녁 아이한테 ‘말을 바탕으로 집짓기·밥짓기·옷짓기’를 가르치고 물려주었습니다.


  학교 문턱을 밟은 적이 없는 시골마을 수수한 어버이입니다만, 책 한 권조차 읽은 적이 없는 시골마을 투박한 어버이입니다만, 쓰레기 하나 내놓지 않으면서 ‘손수 삶을 지어서 삶을 누리는 길(완전한 자급자족)’로 살림을 빚었어요.



점점 커지고 있는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산업화된 전통을 이용하는 것이 필요했다. ‘여성이 하는 일을 노동이 아닌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 비생산적인 여성은 재생산이라는 임무를 줘서 달랜다는 속임수가 통하게 된 것이다. (193, 194쪽)


자본가와 관료 모두 임금 노동보다는 그림자 노동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 성으로 결합된 가족은 이들에게 그림자 노동의 예속을 강화할 수 있는 청사진을 마련해 주었다. (202쪽)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오늘날을 돌아볼 노릇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집짓기나 밥짓기나 옷짓기를 못 배우고 못 하지요. 서울에 있는 내로라하는 대학교를 나온 젊은이 가운데 어느 누구도 대학교에서 집이나 밥이나 옷을 짓는 솜씨를 못 배웁니다. 이런 삶을 배울 생각조차 아예 못 하기까지 해요.


  이름난 대학교를 마친 젊은이는 연봉 높은 일자리를 얻어서 돈을 많이 벌는지 모르지요. 돈으로 집도 밥도 옷도 살는지 몰라요. 그러나, 돈으로 집과 밥과 옷을 사서 쓰는 삶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쓰레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돈으로 집과 밥과 옷을 사서 쓰는 삶에서는 ‘그림자 노동’을 하는 사람이 없으면 고작 하루조차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국가권력은 ‘말’을 표준말로 바꾸려고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으면서 사람들을 윽박지릅니다. 이러는 동안 국가권력은 학교와 문학과 예술과 언론매체를 빌어서 고장말(사투리)을 몽땅 짓밟아 사라지게 합니다. 고장말이 사라진 곳에서는 자급자족 얼거리가 모래알처럼 무너졌으며, 자급자족 얼거리가 무너진 곳에서는 ‘고향사랑’ 같은 마음이란 가뭇없이 흩어집니다. 이리하여 ‘서울로! 서울로!’를 외치면서 서울이나 큰도시로 몰려들어 회사원 일자리를 붙잡으려고 하는 불나비 사회로 내몹니다. 이러한 곳에서는 국가정책에 따라 사람들 삶이 휘둘립니다. 나라가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말지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었으니까요.


  ‘그림자 노동’이 태어난 자리는 바로 우리가 스스로 말을 잃은 자리라는 대목을 낱낱이 따져서 밝히는 책이 《그림자 노동》입니다. 우리가 ‘우리 말(토박이말을 가리키는 한국말이 아닌 우리 말)’을 찾아서 ‘우리 스스로 우리 생각을 담아 우리 삶을 짓는 길을 밝히는 넋을 북돋우는 말’로 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그림자 노동을 걷어내고 ‘참일(참다운 일·노동)’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말(내 말)’을 잃은 사람은 ‘스스로 서기(자급자족)’하고 언제까지나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녀야 하거나 안 다녀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삶을 배워야 할 뿐입니다. 아이들은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어야 하거나 안 얻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일어서서 스스로 웃는 삶으로 거듭나는 슬기로운 넋으로 자라야 합니다. 스스로 서지 못하는 삶이기에 모든 차별과 불평등과 따돌림이 그림자 노동 다음으로 잇달아 자라나고, 이런 자리에서는 전쟁과 경쟁이 불거질 수밖에 없습니다. 4348.12.2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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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식물 이름에 이런 뜻이?! - 어원과 생태를 함께 보는 동식물 이야기 철수와영희 어린이 교양 1
노정임.이주희 글, 안경자 그림 / 철수와영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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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40



서로 이름을 알기에 아끼고 사랑합니다

― 동물과 식물 이름에 이런 뜻이?!

 이주희·노정임 글

 안경자 그림

 철수와영희 펴냄, 2015.11.30. 13000원



  이름을 알 때하고 이름을 모를 때에는 사뭇 다릅니다. 사랑스레 지내는 두 사람이라면 서로 이름을 모를 수 없습니다. 아끼고 보살피는 사이라면 서로 이름을 살가이 부릅니다. 오순도순 살갑게 어우러지면서 어깨동무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서로 기쁘게 이름을 부르면서 활짝 웃습니다.


  이름을 모르면 서로 어떻게 부를까요? ‘저기’라든지 ‘거시기’라든지 ‘여보셔요’ 하고 부를 테지요. 때로는 ‘야’라든지 ‘너’라든지 ‘거기’라든지 외치면서 부를 테고요.


  어버이라면 아이한테 “야! 임마!” 하고 부르지 않습니다. 아이도 어버이한테 “너! 임마!” 하고 부르지 않아요. 어버이도 아이도 서로서로 사랑스럽고 따사로운 목소리로 이름을 부릅니다. 이웃이라면 이름을 알고, 동무라면 참말 이름을 알지요. 그리고, 이웃이나 동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아요. 이웃이나 동무가 되고 싶기에 이름을 묻고, 이웃이나 동무로 지내려고 마음 깊이 이름을 새깁니다.



‘크다’는 뜻으로 옛날에는 ‘하다’라는 말을 썼어. 우리가 잘 아는 ‘한강’은 한자로 쓰기도 하지만 본디 뜻은 ‘큰 강’이지. (16쪽)


어른들은 그 친구의 머리를 보며 ‘말총머리’라고 했어. 그때는 ‘말총’이 뭔지 잘 몰랐어. 말은 가축이지만, 우리 마을에서는 집에서 기르는 말이 없어서 말총을 본 적이 없었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말총은 ‘말 꼬리털’을 뜻하는 거였어. (35쪽)




  이주희 님하고 노정임 님이 글을 쓰고 안경자 님이 그림을 빚은 《동물과 식물 이름에 이런 뜻이?!》(철수와영희,2015)를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꽤 지난 일인데, 스님 한 분이 자그마한 멧자락하고 골짜기하고 숲을 지키려고 ‘꼬리치레도룡뇽’이라는 이름을 부르던 때를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그냥’ 도룡뇽도 아닌 ‘꼬리치레도룡뇽’이라는 이름은 무척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스님 한 분이 이 도룡뇽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면 그저 가뭇없이 사라질 뻔하던 작은 숨결 숲동무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무렵에 부쩍 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강원도 멧골을 휘감으며 흐르는 작은 물줄기 동강에서 사는 ‘쉬리’라든지 ‘비오리’ 같은 이름을 살가이 부르던 사람들 모습도 떠오릅니다. 쉬리라든지 비오리라는 이름은 ‘그냥’ 이름이 아닙니다. 이 숲동무요 숲이웃이 사는 터전을 곱게 지키거나 보살필 수 있을 적에, 사람들이 사는 보금자리하고 마을도 곱 아름다울 수 있다는 뜻이 흐르는 이름이지 싶습니다.


  《동물과 식물 이름에 이런 뜻이?!》라는 책은 바로 이 대목을 찬찬히 이야기합니다. 동물이나 식물하고 얽힌 이름을 말밑이나 지식이나 정보로 헤아리기보다는, 동물이나 식물하고 얽힌 이름을 차근차근 짚으면서 우리 삶을 둘러싼 깊고 너른 숨결 살피자는 이야기이지 싶어요.



‘밝은 쥐’, 그러니까 ‘밤눈이 밝은 쥐’라는 뜻인 거지. 어떤 학자는 ‘밤’ + ‘쥐’가 합쳐진 거라고 주장하기도 해. (42쪽)


고라니와 비슷한 노루는 ‘노랗다’라는 말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해. 일본에서는 노루가 살지 않는데, 이름을 ‘노로’라고 해. 우리나라 말인 노루가 일본에 건너간 거야. (64쪽)




  《동물과 식물 이름에 이런 뜻이?!》에서 다루기도 합니다만, ‘고니’라고 하는 새를 아직 한국에서는 ‘백조’라는 일본 한자말로 가리키기 일쑤입니다. 어린이한테 읽히는 책에도 “백조의 호수” 같은 말을 씁니다. 한국말은 바로 ‘고니’이고, 고니가 노니는 못은 ‘고니못’이에요. 일본말로 “白鳥の湖水”를 한글로 “백조의 호수”처럼 적는다고 해서 한국말이 되지 않습니다. 연잎이 떠다니고 연꽃이 피는 못을 ‘연못’이라고 하듯이, 고니가 자주 찾아오는 못이라면 ‘고니못’이라고 해야 올바릅니다. 개구리가 많이 살면 ‘개구리못’이 될 테고, 잉어가 많이 살면 ‘잉어못’이 돼요. 못에 있는 물은 못물이요, 못 둘레에서 논다면 못가로 놀러 가는 셈입니다.


  그래서, 풀이름을 놓고 살피면 민들레는 민들레일 뿐, ‘포공영’이 아닙니다. 한방에서 ‘蒲公英’이라 쓴다 하더라도, ‘포공영’은 한국말도 풀이름도 될 수 없습니다. 중국에서라면 ‘蒲公英’을 쓸는지 모르나, 한국에서는 한국말로 ‘민들레’라 해야지요. 콩은 콩일 뿐 ‘대두’가 아니에요. ‘大豆’라고 써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쓸 때에 즐겁고, 한겨레가 예부터 사랑한 이름을 고이 물려받아서 쓸 때에 사랑스럽습니다.



신발을 벗어 놓은 댓돌 바로 위에 집을 지었지. 거기에 집을 지으면 제비가 싼 똥이 신발에 떨어진다는 게 문제였어. 봄마다 있는 일이니까 어른들은 잘 알고 계셨어. 그래서 제비가 집을 짓기 시작하면 제비집 바로 아래에 얇은 나무판을 대었지. (104쪽)


‘갗’은 무슨 뜻일까? 바로 까치의 ‘갗갗’ 우는 울음소리야. ‘갗갗 하고 우는 새’가 까치인 거지. 제비의 이름에는 ‘졉졉하고 우는 새’라는 뜻도 있었지? 꾀꼴꾀꼴 꾀꼬리, 뻐꾹뻐꾹 뻐꾸기처럼 울음소리로 이름을 지은 새들이 많아. (114쪽)




  해마다 사월이면 전남 고흥에 있는 우리 집에 제비가 찾아들어요. 우리 마을에도 이웃 마을에도 제비는 무리지어 바다를 건넌 뒤 이곳저곳으로 퍼집니다. 해마다 봄에 다시 찾아오는 제비 숫자는 크게 줄어들지만, 우리 집 처마 밑은 봄마다 어미 제비하고 새끼 제비가 부산스레 어우러지면서 복닥복닥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봄하고 여름 내내 제비 노랫소리를 듣고 제비 날갯짓을 지켜보지요. 애벌레를 잡고 나방하고 나비를 잡으며 잠자리나 풀벌레를 잡는 제비를 놀랍게 쳐다봅니다.


  우리 집은 마당이나 텃밭에도 풀약을 뿌리지 않기에 애벌레가 많이 삽니다. 요즈음에도 애벌레를 봐요. 십이월이지만 애벌레가 갓잎하고 유채잎하고 모시잎을 갉아먹거든요. 겨울에도 포근한 고장이라 한겨울에도 새 풀이 돋고, 새 애벌레가 깨어나서 풀잎을 갉아먹을 뿐 아니라, 이 새로운 애벌레는 어느새 번데기를 틀어요.


  봄부터 첫가을까지는 개구리 노랫소리를 듣지요. 논뿐 아니라 풀밭과 텃밭에서도 개구리가 노래합니다. 참개구리가 있고 풀개구리가 있어요. 그리고 개구리가 우리 집에서 사니까 구렁이도 함께 살아요. 비가 많이 온 날이면 마당 한쪽이나 자전거 밑에서 구렁이가 웅크리면서 쉬기 일쑤입니다.


  늦가을하고 겨울에도 번데기를 봅니다. 새로 봄을 맞이하고 여름이 찾아올 적에는 초피나무나 후박나무 한쪽에 대롱대롱 매달린 번데기를 보고요. 나는 아이들하고 우리 집에서 새로 깨어나는 나비를 오래도록 지켜봅니다. 나비 한 마리는 그야말로 오랫동안 번데기에서 잠이 들어 새로운 몸으로 거듭난 뒤에 더없이 눈부신 새 몸으로 깨어나서 훨훨 날아요. 부전나비도 범나비도 제비나비도 팔랑나비도 흰나비도 노랑나비도 네발나비도 우리 집 마당하고 텃밭을 저희 보금자리로 삼습니다. 이 고운 나비를 바라보면서 먼 옛날부터 옛 한아비가 나비한테 붙인 이름을 가만히 부릅니다. 우리 집에서 태어나 주어 고맙다고 말합니다.



달래를 ‘참꽃’이라고도 했는데 진달래와 비슷한 철쭉을 ‘개꽃’이라고 불렀지. ‘참꽃’의 ‘참’ 자가 한자어 ‘참 진(眞)’ 자로 바뀐 거야. (144쪽)


산들바람이 부는 가을 길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보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살살이꽃이라고 말한다면 언젠가는 이름도 바뀔 수 있겠지. (179쪽)




  들국은 들에 피기에 들국입니다. 산국은 산에 피기에 산국입니다. 우리는 들국이나 산국을 ‘들국’이나 ‘산국’이라고 할 수 있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서 붙일 수 있습니다. 검은등지빠귀를 그냥 ‘검은등지빠귀’라 할 수 있고, 이 새한테 우리 나름대로 새 이름을 지어서 붙일 수 있어요. 꾀꼬리나 소쩍새한테도 이 새가 부르는 노랫소리를 살펴서 새로운 이름을 붙여 볼 만합니다.


  서울말로는 ‘부추’라 하더라도, 경상도에서는 ‘정구지’요, 전라도에서는 ‘솔’입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마당 한쪽에서 봄이랑 여름에 실컷 나물로 먹고 늦여름부터 꽃 구경을 하는 하얀 숨결을 바라보면서 ‘솔꽃(경상도라면 정구지꽃, 서울이라면 부추꽃)’이라고 말해요. 이름을 제대로 살피고 마음에 새길 적에 이 자그마한 이웃이자 동무를 한결 살가이 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과 식물 이름에 이런 뜻이?!》는 모두 서른여덟 가지 이름을 새롭게 바라보자고 하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책끝에는 서른여덟 가지 이름을 ‘책 속 작은 동식물 사전’으로 꾸며 놓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짐승이나 새나 꽃하고 얽힌 이름을 돌아볼 수 있고, 예부터 늘 우리 곁에 있었으나 이제 우리 곁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짐승이나 새나 나무하고 얽힌 이름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서로 이름을 알기에 서로 깊이 사랑하고,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서로 따스히 어깨동무합니다. 이 넋을 우리 모두 곱게 생각할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4348.12.10.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숲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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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왜 돼지 세 마리를 키워서 고기로 먹었나 - 우리가 먹는 고기에 대한 체험적 성찰
우치자와 쥰코 지음, 정보희 옮김 / 달팽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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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91



손수 길러서 잡는 돼지가 가장 맛있다

― 그녀는 왜 돼지 세 마리를 키워서 고기로 먹었나

 우치자와 쥰코 글

 정보희 옮김

 달팽이출판 펴냄, 2015.11.5. 14000원



  우리는 누구나 밥을 먹습니다. 더러 밥을 안 먹고 바람만 마시면서 목숨을 잇는 분이 있습니다만, 이 지구별에서 나고 죽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습니다. 밥을 먹어야 목숨을 이을 만하며, 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까지 누구나 손수 흙을 가꾸어서 밥을 얻었습니다. 손수 흙을 가꾸지 않고도 밥을 얻은 이는 권력자하고 부자뿐이었고, 몇몇 지식인도 손에 흙을 안 묻히고 밥을 얻었어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손에 흙을 묻히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권력자나 부자나 몇몇 지식인이 아니어도 손에 흙을 안 묻히면서 밥을 얻습니다. 오늘날에는 돈이 있으면 손에 흙을 안 묻히고도 밥을 얻습니다.



돼지는 생후 약 6개월, 소는 생후 약 2년 반 만에 도축장으로 출하되어 고기가 된다. 번식용 가축은 식용가축보다 오래 살기는 하지만 정자를 계속 채취당하고 지속적으로 출산만 하는 처지를, 백 번 양보하더라도 ‘타고난, 자연스러운 환경’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15쪽)


원래는 잔반과 밭에서 못 쓰게 된 채소를 처리하는 가축으로 쉽게 기를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은 삼엄하게 격리된 공간에서 남모르게 키워지는 동물이 되어 살아 있는 돼지를 만지기는커녕 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18쪽)



  우치자와 쥰코 님이 빚은 《그녀는 왜 돼지 세 마리를 키워서 고기로 먹었나》(달팽이출판,2015)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책을 쓴 일본사람 우치자와 쥰코 님은 ‘고기 먹기를 즐깁’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글을 쓰고 자료를 살피고 취재를 다니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왜 일본사람은 스스로 돼지나 소나 닭을 길러서 스스로 잡아서 먹지 않는가?’ 하고.


  시골에 살지 않기 때문에 손에 흙을 안 묻힌다고 할 만할까요? 시골에 살지 않으니 집짐승을 키울 까닭이 없다고 여길 만할까요? 귀염둥이로 삼는 짐승은 기르면서, 왜 ‘잡아서 먹을 고기’기 될 짐승은 안 기를까요? 집을 비울 적에는 귀염둥이 짐승을 이웃집이나 동물병원 같은 곳에 며칠씩 맡기듯이, ‘고기로 먹을 짐승’도 며칠쯤 이웃집이나 다른 곳에 맡길 수 있지 않을까요?



교배할 때 드는 수고를 생각하면 인공수정이 훨씬 효율적이다.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어디부터가 가엾고 어디까지가 괜찮은 건지, 그 경계는 대체 누가 정하는 건지 모호해진다. (50쪽)


태어난 지 여러 시간이 지난 녀석들부터 태어난 마릿수와 성별 등을 기록하고 약을 주사했다. 목에 한 대, 허벅지 안쪽에 한 대. 그리고 먹이는 액체약이 있었는데 지사제와 빈혈방지 철분제였다. (67쪽)



  《그녀는 왜 돼지 세 마리를 키워서 고기로 먹었나》를 쓴 분은 소를 키워 보고 싶었으나, 차마 소를 혼자 키우기는 어렵다고 여깁니다. 돼지라면 키울 만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고, 새끼 돼지 세 마리를 받아서 키우기로 합니다. 다만, 새끼 돼지 세 마리를 키우되, 여느 ‘돼지우리(돼지 농장)’처럼 여섯 달만 키워서 잡기로 합니다. 일본에서는 꼭 여섯 달만 피둥피둥 살을 찌워서 고기로 잡는다고 해요.


  그러고 보면, 서양에서도 집돼지를 잡는 때는 얼추 비슷하지 싶습니다. 《샬롯의 거미줄》에 나오는 새끼 돼지는 겨울을 날 수 없다고 나오지요. 왜냐하면 겨울에 있는 성탄절에 고기로 잡혀서 ‘살코기와 소시지’로 바뀌어야 하니까요. 고기로 잡혀야 하는 돼지는 ‘겨울을 모르는 채’ 산다고 할 만합니다. 고기로 잡히는 돼지는 눈이 올 무렵 죽음길로 가야 한다고 할 만하지요.



“저, 돼지가 흙을 굉장히 많이 먹고 있는데, 괜찮을까요? 배탈 안 나요?” “괜찮아요. 돼지는 원래 흙을 먹는 동물이에요!” (81쪽)


돼지는 3킬로그램을 먹으면 1킬로그램이 찐다. 예컨대 도축 전 체중이 115킬로그램인 돼지라면 먹이를 345킬로그램 먹었고, 도축 후 70킬로그램의 고기를 얻었다면 분뇨를 980킬로그램 배출했다는 의미다. (90쪽)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까지는 도시에서도 집에서 닭을 치거나 토끼를 키웠습니다. 사람이 먹는 밥하고 똑같은 먹이를 받은 집짐승입니다. 밥찌꺼기도 받아서 먹은 집짐승이에요. 밥을 지을 적에 쓰지 못하는 푸성귀를 받아서 먹은 집짐승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는 밥찌꺼기(음식물 쓰레기)가 넘치지만, 지난날에는 밥찌꺼기가 남을 겨를이 없습니다. ‘고기로 먹을 짐승’한테 밥찌꺼기를 모조리 주었으니까요.


  이렇게 따지고 보면, 도시마다 밥찌꺼기가 크게 넘칠 뿐 아니라 골칫거리가 되는 까닭 가운데 하나도 ‘밥찌꺼기를 집집마다 치울 길’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만합니다. 함께 살며 밥을 나누던 집짐승이 사라졌기에, 이 밥찌꺼기는 그만 ‘쓰레기(음식물 쓰레기)’가 되고 맙니다. 집짐승한테 먹이로 주지 않더라도 거름으로 삼거나 흙한테 돌려주면 될 테지만, 도시에서 텃밭을 일구는 사람은 매우 적어요. 높다란 아파트에서는 툇마루 한쪽에 ‘상자 텃밭’을 할 수 있을 테지만, 상자 텃밭만으로는 여느 도시 살림집에서 나오는 밥찌꺼기를 다 삭히기 어려울 만합니다.



웅크린 자세로 (돼지) 신과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응시한 순간, 신의 표정이 달라졌다. 갑자기 표정이 풍부해졌고,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내게 다가왔다. 역시 너희들은 내가 서서 내려다보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140∼142쪽)


많은 사람들이 엄연히 다르다고 믿는 애완동물과 가축의 경계를 나는 감히 무너트리고 싶었다. 이름을 불러 주고 그들의 본성을 파악하며 충분히 마음을 나눈 뒤에 잡아먹어 보고 싶었다. 수십 년 전 서양의 소규모 농가에서도 그랬고 지금의 변두리 지역 농가에서도 매우 일반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148쪽)



  사람이 ‘고기로 먹는’ 짐승은 살점입니다. 이른바 단백질이라고 하는 살점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까지 ‘집짐승 살점’은 ‘사람이 먹는 밥’하고 같았습니다. 단백질이기는 하되 ‘사람이 먹는 밥하고 같은 먹이를 받아서 자란 단백질’입니다. 풀을 먹고 자란 고기를 사람이 먹는다고 할까요. 여기에다가 풀벌레나 애벌레나 굼벵이를 곁들여 먹는데, 풀벌레나 애벌레나 굼벵이도 으레 풀을 먹어요. 닭이나 돼지나 소가 먹는 ‘움직이는 것’도 가만히 따지면 모두 풀에서 비롯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풀을 먹고 자란 고기를 먹는 사람은 ‘한쪽에서는 날풀’을 먹고, ‘다른 한쪽에서는 풀로 살점을 이룬 고기’를 먹는 셈이기에 언제나 풀을 먹는다고 할 만합니다.


  풀만 먹든 풀하고 고기를 함께 먹든, 또는 고기만 실컷 먹든, 사람이 사람다운 몸을 지키면서 살자면 무엇보다도 ‘싱그러운 풀’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농약이나 풀약 묻은 풀을 먹으면 사람 몸이 망가지겠지요. 이는 짐승한테도 똑같아요. 짐승이 먹을 풀을 함부로 주지 않지요. 농약이나 풀약이 묻은 풀을 짐승한테 주면 어떻게 될까요? 짐승도 배앓이를 하다가 죽지요.


  집짐승이 예부터 먹은 풀이란 모두 깨끗하며 싱그러운 풀입니다. 집짐승도 사람도 언제나 깨끗하며 싱그러운 풀을 먹을 만한 터전에서 삶을 짓습니다. 풀밭이나 들판이 있어야 사람도 짐승도 삽니다. 풀밭과 들판, 그리고 이 모두를 어우르는 숲은 이 지구별에 있는 목숨이 목숨다이 삶을 누리도록 이끄는 바탕입니다.



많은 ‘동물애호가’ 학생들이 생각하는 동물은 자연보호지역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야생동물이거나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이다. (197쪽)


한 마리 돼지에서 고기 그 자체로 소비자에게 팔리는 건 (돼지 한 마리 110킬로그램 가운데) 고작 23킬로그램에 불과하다. 너무나 적은 양이다. 밭에서 수확하면 거의 통째로 소비자에게 팔리는 채소와는 이 점이 많이 다르다. (258쪽)



  돼지 세 마리를 키우려고 한 분은 돼지를 키우기 앞서 집부터 마련합니다. 돼지는 여섯 달 만에 백 킬로그램 남짓으로 살이 찐다고 하니까, 돼지우리가 함께 딸린 집부터 제대로 갖추어야겠지요. 돼지는 그동안 먹은 먹이 무게보다 세 곱에 이르는 똥오줌을 눈다고 해요. 그러니, 돼지가 누는 똥오줌을 건사할 자리도 마련해야지요. 돼지우리를 짓고, 돼지가 지낼 바닥도 꾸미며, 돼지한테 어떤 밥을 줄는지도 헤아려야 합니다.


  자, 손수 무엇을 키워서 먹는다고 하면 무엇을 먹일까요? ‘곧 내 입으로 들어올 밥’이 되는 남새나 짐승이라면, 우리는 남새밭에 무엇을 치고 집짐승한테 무엇을 먹일까요? 아무것이나 함부로 안 뿌리고 안 먹일 테지요. 제대로 된 것을 뿌리거나 먹일 테지요.


  다시 말하자면, 손수 씨앗을 심어서 남새를 키우는 사람은 가장 맛난 남새(풀)를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손수 새끼를 받아서 집짐승을 키우는 사람은 가장 맛난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스스로 가장 낫고 좋으며 깨끗한 것으로 남새하고 집짐승을 돌볼 테니까, 이러한 손길을 받은 남새나 고기는 아주 맛나면서 아름답기 마련입니다.



그럼 수익을 가장 많이 얻는 건 대형마트라는 말인가? 고기는 작게 잘라 팔수록 확실히 비싸진다. 부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돼지의 시장가격이 킬로그램당 400엔이라는 말은, 단순계산을 하면 100그램에 40엔. 대형 마트인 ‘우에노 요시이케’의 전단지를 보면 국산돼지의 등심은 100그램에 158엔. (277쪽)


오늘도 돼지들은 전기와 석유, 물, 사료를 쉬지 않고 소비하면서 자라고 출하되고 도축되어 소매점에 고기로 진열된다. 그리고 나는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변함없이 맛있는 고기가 먹고 싶어진다. (313쪽)



  오늘날 도시에서 집집마다 집짐승을 키우기는 어려우리라 느낍니다. 그러나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 있습니다. 시골 한쪽에 마치 감옥처럼 꽁꽁 가로막은 곳에서 숨기듯이 공장 얼거리로 소나 돼지나 닭을 키워서 고기로 잡아서 먹을 때에 맛이 있을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사랑스러운 손길로 돌보는 집짐승을 적에 맛이 있을까요. 오늘날 돼지우리(돼지 농장)는 더 적은 돈을 들여서 더 많은 돈을 얻으려고 하는 얼거리로만 흐르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도 ‘맛있는 고기’가 아니라 ‘값싼 고기’만 바라는 탓에 ‘공장 같은 돼지우리’에다가, ‘공장 + 감옥 같은 얼거리’인 닭우리와 소우리에서 닭이나 소도 똑같이 고단하고 괴롭게 살점만 찌우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값이 싸기에 나쁘지 않으며, 값싸게 얻는 고기라서 나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 함께 생각할 대목이 있습니다. 고기 한 점을 값싸게 만들어 내어서 값싸게 장만할 수 있도록 하는 얼거리에서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짓도록 이끄는 ‘밥’ 한 그릇은 무엇이 될까요? 우리는 영양소만 먹으면 되는 목숨일까요, 아니면 즐거운 삶을 노래할 줄 아는 숨결일까요? 4348.12.3.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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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 모둠 산꽃 도감
김병기 지음 / 자연과생태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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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90



꽃하고 함께 살아야 꽃이름을 안다

― 모둠 모둠 산꽃도감

 김병기 글·사진

 자연과생태 펴냄, 2013.5.27. 33000원



  어릴 적에 어머니하고 나들이를 다니면 재미있고 즐거웠습니다. 어머니와 나들이를 다니면서 “어머니, 이 꽃은 이름이 뭐예요?”라든지 “어머니, 이 풀은 뭐예요?” 하고 뻔질나게 여쭈었습니다. 어머니는 늘 이름을 알려주셨고, 잘 모르시겠으면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꽃이름이나 풀이름을 알려주어도 몇 차례 듣고는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요즈음은 꽃도감이나 풀도감이 꽤 많이 나오지만, 1980년대에는 마땅한 꽃도감을 찾기도 어려웠고, 이런 책을 내려고 하는 출판사도 드물었어요. 그나저나 아무리 이름을 외우려고 하더라도 잘 못 외우겠더군요. 그무렵에는 꽃이름이나 풀이름을 왜 외우기 어려운지 제대로 몰랐습니다. 꽃이나 풀을 그리 안 좋아해서 이름을 못 외울 수도 있지만, 꽃이나 풀하고 언제나 함께 사는 하루가 아니었으니 이름을 알기 어려울밖에 없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나물로 먹는다든지 짐승한테 뜯어서 준다든지 했다면 꽃이름이나 풀이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아마 나 스스로 온갖 이름을 꽃하고 풀한테 붙여 주었을 테지요.



돌나물은 씨앗을 잘 맺지 않는 성질이 있으며, 포기를 뽑아 버려두어도 말라죽지 않고 마디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아갈 정도로 강인하다. 주로 양지바른 돌 틈에서 자라고, 나물로 이용할 수 있어 돌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돗나물 또는 돈나물이라고도 부른다. (30쪽)


(둥근바위솔은) 예전에는 동해안의 방품링 밑이나 바위틈에서 많은 개체가 흔하게 발견되었으나 암 치료 좋다는 속설 때문에 자생지가 훼손되어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38쪽)




  김병기 님이 글하고 사진으로 묵직하면서 야무지게 묶은 《모둠 모둠 산꽃도감》(자연과생태,2013)을 읽습니다. 책이름처럼, 이 ‘산꽃도감’은 멧꽃(산꽃)을 모둠으로 엮어서 보여줍니다. 꽃을 하나씩 따로 떼어서 살피지 않고, 비슷한 갈래에 있는 꽃을 한자리에 모아서 보여주지요.


  가만히 돌아보니, 이제껏 나온 수많은 꽃도감은 ‘비슷한 갈래’를 묶기는 하더라도, 이 꽃도감처럼 낱낱이 견주어서 저마다 어떤 풀이나 꽃인가를 제대로 알려주는 구실까지는 못했구나 싶습니다. 참말로 들이나 숲에는 비슷해 보이는 꽃하고 풀이 많거든요. 그래, 이 아이는 이 꽃이었지 하고 똑똑히 가르기 어려울 만하다고 할까요.



(백작약은) 커다란 흰 꽃이 피어나는 모양이 함박웃음을 짓는 것 같다고 함박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81쪽)


들바람꽃은 경기도 북부와 백두대간 중부 이북지역 일부 높은 지대의 한정된 장소에만 자생해 만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와 달리 중국 동부지역과 러시아에서는 습기 있는 들판에서 자상해 들바람꽃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07쪽)



  ‘백작약’은 ‘함박꽃’이라고도 한다는데, 문득 이런 꽃이름은 몇 해쯤 되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이를테면, 오백 해 앞서 한겨레 옛사람은 그 꽃을 보며 어떤 이름으로 가리켰을까요? 천 해나 이천 해 앞서 한겨레 옛사람은 어떤 이름으로 꽃 한 송이를 가리켰을까요? 한자가 들어오기 앞서 ‘백작약’이라는 이름을 쓴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함박웃음이나 함박이나 함지박 같은 낱말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들바람꽃’이라는 이름을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들에 피는 꽃이면서 바람하고 얽힌 꽃이기에 들바람꽃일 테지요. 그야말로 수수한 이름이면서 수수한 꽃입니다. 오늘날에는 이 들바람꽃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는데, 백 해나 이백 해 앞서는 어떠했을까요? 그때에도 이 들꽃이나 멧꽃은 찾아보기 어려웠을까요? 오백 해나 천 해 앞서도 이 들바람꽃을 만나기 어려웠을까요?




바디는 예전에 베나 가마니를 짤 때 날줄에 씨줄이 촘촘하게 짜지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직기의 구성품이며 빗살 모양으로 생겼다. 바디나물의 줄기에 난 세로줄이 이 바디의 빗살을 닮아 바디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214쪽)


(매미꽃은) 뿌리부터 뭉쳐서 올라오는 잎은 작은잎 3∼7개로 구성된 홀수깃꼴겹잎으로 잎 가장자리에 피나물보다 깊고 날카로운 톱니가 있고, 줄기를 자르면 붉은색 유액이 나온다. 이 액체 색깔로 보아 피나물과 이름이 뒤바뀐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하며. (235쪽)



  꽃하고 함께 살면 꽃이름을 잘 압니다. 풀하고 함께 살면 풀이름을 잘 알아요. 나무나 물고기나 새나 벌레가 어떤 이름인가 궁금하다면, 나무나 물고기나 새나 벌레하고 함께 살면 돼요. 함께 살기에 이름을 압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거의 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지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한테는 ‘자동차 이름’이나 ‘아파트 이름’이 낯익습니다. ‘가게 이름’이나 ‘갖가지 공산품 이름’이 낯익지요. 도시에서 늘 보는 것이 자동차요 아파트요 가게요 공장 제품이니까요.


  《모둠 모둠 산꽃도감》을 빚은 김병기 님이 멧꽃에 흠뻑 빠져들었다고 해요. 그래서 골골샅샅 골짜기와 멧자락을 뒤지고 다닐 뿐 아니라, 아예 스스로 씨앗을 받아서 멧꽃을 심어서 돌본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김병기 님 스스로 멧꽃하고 함께 누리는 삶을 짓기 때문에 멧꽃을 알뜰살뜰 가눌 줄 알고, 이처럼 모둠으로 그러모아서 여러 멧꽃을 나란히 살피는 이야기를 들려줄 만하구나 싶습니다.



눈개승마 잎은 승마의 잎과 닮았지만 미나리아재비과의 승마속과는 관계가 없는 식물이므로 눈개승마라는 이름이 붙었다. 울릉도에서는 어릴 때의 잎 모양이 산삼을 닮았다 해 삼나물이라 부르고, 깊은 산속에서 자라므로 눈산승마라 부르기도 한다. 강원도 산촌에서는 봄에 삐쭉 내민 새싹을 노인들도 쉽게 뜯을 수 있다 해 삑쭉바리라고 부른다. (251쪽)


금낭화는 비단주머니처럼 아름다운 꽃이라는 뜻이다. 모란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만 꽃줄기가 등처럼 휘어진다 해 등모란 또는 덩굴모란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원도 산촌에서는 꽃의 생김새가 예전에 여인네들이 치마 속에 차고 다니던 복주머니를 닮았다 해 며느리주머니라 부르기도 하고, 나물로 먹을 수 있다 해 며늘취라 부르기도 한다. (304쪽)




  먼 옛날부터 꽃이나 풀에 붙인 이름은 고장과 고을과 마을마다 다릅니다. 때때로 꽃이나 풀을 놓고 똑같은 이름을 쓰기도 하지만, 거의 모든 꽃이나 풀을 놓고 사람마다 다르게 이름을 붙입니다. 왜냐하면 고장마다 말이 달라 고장말이고, 고장에서도 고을마다 말이 달라 고을말이며, 고을에서도 마을마다 말이 달라 마을말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투리라고 하지만, 곳에 따라 쓰는 말이 다를 수밖에 없기에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사투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표준말은 다 다른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다 같은 한 가지 말을 익혀서 생각을 나누자는 뜻으로 세웁니다. 이를테면 ‘민들레’나 ‘냉이’는 표준말로 쓰는 이름이 되지요. 도감에는 이런 표준말 이름이 오르고요. 학문을 하는 이들이 이런 표준말 이름으로 꽃이나 풀을 살핍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한 가지를 잘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 학문 틀거리에서는 학계에 처음으로 어느 꽃이나 풀을 알린 사람이 학술 이름에 이녁 이름을 나란히 적곤 합니다. 식물학자나 생물학자는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꽃이나 풀’을 살펴서 맨 먼저 보고서로 올리면 이녁 이름이 꽃이나 풀에 붙는 학술 이름에 나란히 붙을 텐데, 학자가 그 꽃이나 풀을 학계에 올리는 일은 맨 처음일는지 모르나, 그 고장이나 고을이나 마을에서 사는 사람은 먼 옛날부터 그 꽃이나 풀을 보고 살피고 누리고 함께하기 마련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꽃이나 풀이나 나무를 놓고, 또 벌레나 물고기나 새나 짐승을 놓고,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오래된 이름’이 있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도 이와 같습니다. 모든 겨레는 저마다 ‘오래된 이름’이 있어요. 이러한 이름은 먼먼 옛날부터 그 꽃이나 풀이나 나무나 벌레나 물고기나 새나 짐승을 눈여겨보았다는 뜻이면서, 사람들하고 이웃이 되는 숨결로 함께 살았다는 뜻입니다.




(솜다리는) 이름의 ‘다리’는 순 우리말로 예전에 여인네들이 머리숱이 많아 보이게 하기 위해 덧대던 땋은 머리를 뜻한다. 꽃차례가 다리를 넣은 것처럼 탐스럽다고 붙인 것이다. (395쪽)


(산부추는) 전국에 분포하며 조금 깊은 산속의 햇빛이 잘 들고 물 빠짐이 좋은 사질토양에서 다른 식물과 함께 자란다. 잎은 긴 송곳 모양으로 생겼으며 단면은 삼각형이고 2∼3장이 위쪽으로 비스듬히 퍼지며 자란다. 잎이 기다랗고 소나무 잎처럼 생겨 솔나물 또는 산솔나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512쪽)



  듬직하면서 예쁘장한 《모둠 모둠 산꽃도감》은 그저 멧꽃 이름을 잘 가누거나 살피는 길잡이 구실만 하지 않습니다. 숲을 아끼고 들을 사랑하며 시골을 보듬을 줄 아는 손길로 곁에 둘 책이라고 느낍니다. 모든 풀은 약풀이라는 오래된 시골말처럼, 모든 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나무는 다 함께 모여서 숲을 이룹니다. 모든 사람은 오순도순 살림을 꾸리면서 마을을 이루지요.


  우리 삶을 둘러싼 수많은 꽃과 풀은 우리한테 밥도 되고 약도 됩니다. 우리가 밥이나 약으로 삼지 않아도 숲짐승이나 풀벌레는 이 꽃과 풀을 밥이나 약으로 삼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하지 않아도 꽃가루받이가 되어 씨앗을 퍼뜨릴 수 있는 까닭은 벌이랑 나비랑 벌레가 그 꽃한테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숲이나 들에는 몇 가지 꽃이나 풀만 있을 수 없어요. 그야말로 온갖 꽃이랑 풀이 함께 어우러지기에 비로소 숲입니다. 이 꽃하고 저 풀이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면서 자라기에 아름다운 숲이지요.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종이 된 멧꽃을 함부로 캐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기를 빕니다.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종이 아닌 산국이나 들국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풀약으로 죽인다거나 시멘트를 들이부어서 없애는 몸짓은 나오지 않기를 빕니다. 눈으로 볼 적에는 눈부신 기쁨을 베푸는 꽃을 사랑할 수 있기를 빌고, 코와 살갗으로는 맑고 고운 냄새와 바람을 베푸는 꽃을 아낄 수 있기를 빌어요. 시골이나 숲이나 멧자락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올망졸망 들꽃이나 멧꽃이 씨앗을 퍼뜨리면서 다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1.19.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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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숲의 왕을 찾아서 - 흰부리딱따구리와 생태 파수꾼 이야기 생각하는 돌 13
필립 후즈 지음, 김명남 옮김 / 돌베개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숲책 읽기 89



새가 사라진 마을에는 노래가 없다

― 사라진 숲의 왕을 찾아서

 필립 후즈 글

 김명남 옮김

 돌베개 펴냄, 2015.11.2. 15000원



  새 한 마리가 있으면 집안이 시끌시끌합니다. 처마 밑에 제비가 찾아와서 둥지를 틀거나, 참새나 박새가 처마랑 지붕 사이 빈틈에 들어가서 새끼를 까면, 새벽부터 밤까지 새소리를 듣습니다. 마당에 우람한 나무가 한 그루 있으면, 숲에서 아침을 여는 멧새가 마을로 내려올 적에 이 나무에 내려앉아서 다리쉼을 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이 새들은 모두 벌레를 좋아하기 때문에 나무마다 샅샅이 뒤지면서 벌레잡이를 합니다.


  오늘날에는 논밭뿐 아니라 나무에도 농약을 무척 많이 쓰는데, 예부터 시골사람은 새를 곁에 두면서 벌레잡이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새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면서 하루를 더 아름답게 누릴 줄 알았습니다.




부리는 뼈로 이루어졌고, 그 위에 케라틴이라는 특수한 단백질이 덮여 있다. 굵은 밑동은 나무를 두드릴 때 받는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서 두꺼운 머리뼈에 깊숙이 박혀 있다. 콧구멍은 작은 틈처럼 찢어져 있고, 둘레에 털이 나 있어서 톱밥이 들어가는 것을 막아 준다. 흰부리딱따구리에게 이렇게 크고 단단한 쇠지레 같은 상아색 부리가 필요했던 것은 나무껍질을 벗겨내기 위해서였다. (22∼23쪽)


알렉산더 윌슨이 흰부리딱따구리를 그리기 위해서 총을 쏘아 잡았던 1809년부터 조지 바이어가 그 새를 박물관에 진열하기 위해서 총을 쏘아 잡았던 1899년까지 90년 동안, 흰부리딱따구리의 세상은 완전히 무너졌다. (30쪽)



  필립 후즈 님이 쓴 《사라진 숲의 왕을 찾아서》(돌베개,2015)를 읽습니다. 이 책은 미국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 ‘흰부리딱따구리’하고 얽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쩌다가 흰부리딱따구리가 모조리 자취를 감추어야 했는가를 살피는데, 미국에서는 흰부리딱따구리만 모조리 사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그네비둘기 같은 새도 몽땅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사람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모두 죽고 말아 사라져야 한 새가 퍽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한국은 어떠할까요? 한국에서는 ‘흰부리딱따구리’ 못지않게 자취를 감춘 큼지막한 딱따구리로 ‘크낙새’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크낙새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고, 한국에서는 광릉수목원 언저리에서 한 쌍이 산다고 하는데, 한 쌍만 있어서는 크낙새가 더 퍼지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새가 여럿 살려면 숲이 넓어야 하지요. 조그마한 숲에서 이런저런 새가 한두 쌍쯤 산다고 하더라도 새끼를 퍼뜨리기 어렵습니다.




남부 목재에 대한 열광은 1849년의 금광열에 뒤지지 않는 기세로 타올랐다 … 돌아온 목격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혀가 꼬여 더듬거리면서 보고했다. 그곳에는 수백만 에이커의 삼림이 펼쳐져 있고, 숲 천장은 하늘을 완전히 가리며, 나무 둥치는 어른 남자 둘이 팔을 맞잡은 것보다 굵다고 했다. 자유인이 된 노예들과 가난한 백인들은 하루에 50센트만 주면 기꺼이 숲에서 일하겠다고 줄을 선다고 했다. (49쪽)


아서 웨인은 왜 흰부리딱따구리를 마흔네 마리나 죽였을까? 윌리엄 보르수트넌 왜 흰부리딱따구리 표본을 예순한 점이나 샀을까? 그 새가 멸종할 위기라는 사실을 몰랐나? 몰랐다면, 관심이 없어서였을까? 당연히 그들은 흰부리딱따구리가 귀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65쪽)



  흰부리딱따구리나 크낙새 같은 새가 숲에서 사라지는 까닭은, 이들 새가 살 만한 숲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숲이 사라지는 까닭은, 사람들이 나무를 너무 모질게 많이 베어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숲을 밀어내어 아파트나 공장이나 발전소나 고속도로나 골프장을 지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새를 지키자면서 집도 짓지 말고 공장이나 발전소도 없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헤아려 볼 노릇입니다. 왜 숲을 밀어서 아파트를 지어야 할까요? 왜 숲을 밀어서 공장이나 발전소가 들어서야 할까요? 숲이 아닌 다른 땅이 틀림없이 있을 텐데요. 숲이 없이는 사람도 살 수 없을 텐데요.


  사람은 누구나 숨을 쉽니다. 숨을 쉬자면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아무리 물건을 써야 하거나 전기를 써야 하더라도, ‘깨끗한 바람’이 없으면 사람은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려면 맨 먼저 깨끗한 바람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 맑은 물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뒤에 정갈한 밥이 있어야 하지요.


  개발을 하든 건설을 하든 무엇을 하든, 짙푸른 숲하고 깨끗한 냇물하고 넓은 들과 갯벌하고 아름다운 바다부터 곱게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숲에는 새가 날고 짐승이 달릴 수 있어야 하고, 냇물과 바다에는 물고기가 노닐 수 있어야 하지요. 이런 터전일 때에 비로소 사람도 사람다운 삶을 누립니다.




(앨런 박사는) 손가락을 진정시키고 새에게 겨눴다. 산탄총이 아니라 카메라였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흰부리딱따구리 사진을 찍었다. (82쪽)


싱어 보호구역의 흰부리딱따구리 서식지가 팔린 것은 사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건이었다. 태너는 감정을 쉽게 비치지 않는 편이었지만, 오듀본 협회의 존 베이커에게 보낸 연례 보고서에서는 좌절감을 드러냈다. (146쪽)



  새가 사라지는 숲에서는 노래가 사라집니다. 숲에서 새가 사라지면, 숲을 감도는 고운 숨결이 사라집니다. 무엇보다도 새가 사라진 숲에는 벌레가 들끓을밖에 없습니다. 헬리콥터로 농약을 뿌린다 한들 숲에서 사는 벌레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사람으로서는 ‘벌레먹은 나무’를 베는 일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새가 홀가분하게 살 수 있는 숲이 있어야, 도시에 있는 사람도 마음과 몸을 달랠 만합니다. 매캐한 바람이 가득한 도시를 벗어나서 몸을 쉬고 마음을 다스리고 싶다면 숲으로 갈 테니까요. 시골에 숲이 없으면 도시사람도 쉴 데가 없지요. 시골에 숲이 없으면 도시에서 부는 매캐한 바람을 씻어 주지도 못하지요. 숲에서 비롯하는 바람이 도시마다 어루만져 주기 때문에, 도시에서도 누구나 숨을 쉬면서 삶을 지을 수 있습니다. 코앞에서 숲을 바라보거나 마주하지 않더라도, 브라질에 있는 숲이, 인도네시아에 있는 숲이, 부탄에 있는 숲이, 서울 한복판에 고인 매캐한 먼지를 찬찬히 다독여 줍니다.




새들은 굶어죽고 있었다. 털룰라에 있는 시카고 제재 및 목재 회사의 거대한 띠톱은 최고 속도로 통나무를 집어삼키면서 흰부리딱따구리가 둥지를 짓고 잠을 자고 먹이를 구하는 데 쓸 최후의 나무들을 없애고 있었다. (163쪽)


태너는 숲이 결국 사라질 운명일 것 같아서 두려웠다. 머지않아 큰 나무가 듬성듬성해지고 숲이 조각조각 나뉘어서 흰부리딱따구리 한 쌍도 못 먹일 만큼 좁아질 것이었다. 진주만에 떨어진 폭탄은 텐사스 늪지 국립공원 설립 법안도 날려 버렸다. 다들 전쟁 말고는 딴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177쪽)



  흰부리딱따구리를 찾아나선 사람들과 흰부리딱따구리를 지키려 애쓴 사람들은 바로 이녁 스스로를 사랑하려는 몸짓이었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 가슴에 고운 바람이 불 수 있기를 바라는 몸짓이었다고 느낍니다. 기껏해야 새 한 마리가 아닙니다. 새 한 마리가 지구별에서 모두 사라질 적에는 지구별 삶고리(생태순환고리)가 끊어지거나 흔들립니다. 어느 한 가지 목숨붙이가 모두 사라지는 지구별이라면, 아름다움이 차츰 깨지거나 빛이 바랜다는 뜻입니다. 다양성이 사라지는 곳에는 아름다움이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라진 숲의 왕을 찾아서》에서도 다루는데, ‘나쁜벌레(해충)’를 잡아서 죽이겠노라 하면서 뿌린 DDT는 메뚜기를 거치고 ‘메뚜기를 잡아먹는 다른 생물’을 거치고 거쳐서 송골매한테까지 이른다고 합니다.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는 송골매는 이 때문에 껍데기가 흐물흐물한 알을 낳고, 이 탓에 송골매는 사라질 뻔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이 논밭에 뿌리는 농약은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는 ‘사람’한테 도로 돌아옵니다. 나락에 뿌리는 농약은 쌀밥을 먹는 사람한테 돌아오고, 밀밭에 뿌리는 농약은 빵을 먹는 사람한테 돌아오며, 이런 농약은 빗물에 씻겨 바다로 들어가면서 바닷물고리를 먹는 사람한테 돌아옵니다.




사람들이 해충 방제 용도로 작물에 뿌렸던 DDT는 작물을 먹는 메뚜기 같은 생물의 몸에 오래 남았고, 나중에 그 메뚜기를 먹는 생물을 중독시켰으며, 계속 그런 식으로 먹이사슬 꼭대기까지 도달했다. 그렇게 하여 송골매에게 도달한 DDT는 알껍데기를 약화시켰고, 그 때문에 부모가 알을 품다가 제 알을 깨뜨리곤 했다. (232쪽)



  아침저녁으로 새가 노래하는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새소리를 흉내내어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날갯짓하는 새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달랬고, 쉴 새 없이 새끼한테 먹이를 물어 나르는 어미 새를 보면서 사랑을 헤아렸습니다. 새가 짓는 집을 가리켜 ‘둥지’나 ‘보금자리’라 하는데, ‘둥지·보금자리’ 같은 말마디는 따스한 기운이 넘치는 사랑스러운 집을 가리키곤 합니다. 그러니까, 한겨레는 예부터 새를 늘 곁에 두면서 아름다움을 배우고 사랑을 돌아보면서 살림을 가꾸었다는 뜻입니다.


  참새가 나락을 좀 쪼더라도 참새는 가을 한철에나 나락을 좀 쫄 뿐, 한 해 내내 벌레를 엄청나게 잡아먹으니 귀엽게 바라보며 ‘참새’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콩 석 알을 심을 적에 한 알은 새가 먹고 한 알은 벌레가 먹으며 한 알은 사람이 먹는다는 옛말은 괜히 나오지 않았습니다. 새도 벌레도 이 땅에서 저마다 맡은 구실이 있다는 뜻입니다. 벌레가 있기에 거름이 삭고, 벌레가 있어서 수많은 주검이나 나뭇잎이나 풀잎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흰부리딱따구리를 마지막으로 본 (1997년) 뒤에도 열 번 넘게 탐사를 이끌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전 세계에서 숲이 쓰러지고 있으니, 조류학계에서 쿠바의 흰부리딱따구리를 찾는 일은 청춘의 샘이나 앨도라도를 찾는 것에 비할 만한 중대한 모험이 되었다. (210쪽)



  미국에서 끝끝내 흰부리딱따구리를 건사하거나 지키지 못하고 만 이야기를 다루는 《사라진 숲의 왕을 찾아서》를 덮으면서 생각합니다. 흰부리딱따구리를 지키지 못한 미국은 그리 아름답지 못한 길을 걸었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흰부리딱따구리를 지키려고 애쓴 사람들은 ‘아름답지 못한 정책과 경제발전’이 춤추는 미국에서 숲과 마을과 사람을 지키는 새로운 길을 씩씩하게 열기도 했습니다. 오듀본 협회가 태어나고, 국립공원을 세우자는 물결이 일었으며, 지구 삶터를 새롭게 바라보려는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1940년대에 미국에서 터진 전쟁(진주만 폭격 뒤에 일어난 전쟁)은 그예 흰부리딱따구리가 살 숲을 모두 밀어내는 끔찍한 일로 이어지고 말았다고 하는 얘기를 돌아봅니다. 전쟁은 새도 사람도 모두 죽음이라는 구렁텅이로 밀어넣습니다. 전쟁무기를 만드는 동안 사람들은 바보가 되고, 전쟁무기를 손에 쥐고 서로 죽이고 죽는 짓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멍텅구리가 됩니다. 평화가 아닌 전쟁으로 나아갈 적에는 너와 내(아군과 적군)가 모두 죽지요. 전쟁이 아닌 평화로 나아갈 적에 비로서 너와 내가 함께 삽니다.


  우리 삶에 아름다운 숨결이 흐르려면 마을에 새가 날아들 수 있어야 합니다. 시골마다 숲이 넓게 드리울 수 있어야 합니다. 도시에도 곳곳에 크고작은 ‘숲 공원’이 있어야 합니다. 작은 손길 하나로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고, 작은 새 한 마리가 날면서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줍니다. 작은 마음 하나로 꿈이라는 씨앗을 심으며, 작은 새 한 마리가 짝을 찾아 노래를 부르는 사이에 웃음꽃이 활짝 핍니다. 4348.11.17.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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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u:Do 2015-11-17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서평을 멋지게 작성해주시네요 ㅎ 저는 주로 모바일사용자라 피씨로 작성해야 가능할 것 같은 멋들어진 서평입니다. 감사합니다 ㅎ

숲노래 2015-11-17 10:56   좋아요 0 | URL
사진을 얻고 손질하느라 좀 품이 많이 들었습니다.
흰부리딱따구리 서식지가 줄어든 지도도
포토샵에서 오려서 붙이기를 하고 그랬습니다 ^^;;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책은 필립 후즈 님 다른 책과 함께
무척 알차고 아름다운 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