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살이 - 느리고 고유하게 바다의 시간을 살아가는 법
김준 지음 / 도서출판 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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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101



바닷빛을 읽으며 물고기를 알던 섬살림

― 섬: 살이

 김준 글·사진

 도서출판 가지 펴냄, 2016.4.22. 16000원



  광주전남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김준 님은 어느덧 스물여섯 해째 ‘섬 연구’ 외길을 걷는다고 합니다. 《물고기가 왜?》나 《바다 맛 기행》이나 《한국 어촌사회학》이나 《섬 문화 답사기》나 《김준의 갯벌 이야기》 같은 책을 쓰셨는데, 《섬: 살이》(가지,2016)라고 하는 책을 새롭게 선보입니다.


  섬을 연구한 발자취를 따라서 물고기 이야기가 책으로 태어나고, 물고기와 바닷것을 올리는 밥상 이야기가 책으로 태어납니다. 섬에 보금자리를 틀어서 이룬 살림살이 이야기가 책으로 태어나고, 섬과 뭍을 오가는 길목에 드리운 갯벌 이야기가 책으로 태어나요. 그리고 섬이라는 터전에서 어떤 삶이 예부터 고이 흘렀는가 하는 이야기를 그러모아서 《섬: 살이》가 태어나요.



할머니들이 아직도 걸을 수 있는 것은 바구니에 채워야 할 굴이 있기 때문이다. 팔순 할머니가 겨울에도 기어이 조새를 쥐고 갯벌로 걸어가는 것은 거기에 굴밭이 있기 때문이다. (43쪽)



  《섬: 살이》라는 책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이, 김준 님은 ‘서울살이’나 ‘시골살이’나 ‘마을살이’처럼 ‘섬살이’를 쓰지 않고 ‘섬: 살이’처럼 느슨하면서 길게 말소리를 잇습니다. 그냥 살면서 드러나는 살림살이가 아니라, 오래도록 차근차근 다스리면서 천천히 피어난 물살이와 바닷살이를 들려주려고 했구나 싶습니다.



가파도, 마라도, 우도처럼 언덕도 없고 피할 곳이 전혀 없는 섬에서는 이중벽을 쌓기도 했다. 안과 밖에 이중으로 돌담을 쌓고 가운데 틈에 잡석을 넣었다. 그렇게 담을 쌓고 나무를 심어 바람을 어느 정도 막고 나서야 농사를 짓고 살림집도 지었다. (73쪽)



  바람이 많은 곳이라면 어디나 돌로 담을 쌓습니다. 바람이 그리 많지 않다면 가볍게 울타리를 하겠지만요. 제주섬은 돌담이 높아 거의 지붕까지 올라가기도 하는데, 바닷바람도 막아야 하지만, 때로는 물결이 넘치기도 하니, 이도 함께 막아야 합니다.


  돌담을 쌓은 적이 있는 분이라면, 묵직한 돌을 날라서 하나하나 쌓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리는가를 잘 아시리라 생각해요. 묵직한 돌을 나를 적에는 이 무거운 돌을 꽤 날랐구나 싶지만, 정작 담을 쌓으려고 하다 보면 얼마 안 되어요. 자주 수없이 자꾸자꾸 나르고 나른 끝에 비로소 돌담을 쌓을 수 있습니다.


  담으로 쌓는 돌은 멀리서 가져오기도 하겠지만, 땅을 일구면서 땅에서 캐기도 합니다. 집터를 다지면서, 밭을 일구면서, 섬에서 논을 지으려 하면서 그야말로 수많은 돌을 자꾸자꾸 캐내고, 이 돌을 바탕으로 돌담을 쌓지요.



감태는 민둘이 들어오는 오염되지 않은 갯벌에서 잘 자라기에 옛날에는 흔했지만 지금은 귀하다. 과거에는 김 양식장에서 파래, 매생이와 함께 잡태로 취급되었다. 밭농사로 말하면 잡초에 해당한 것이다. (134쪽)



  숲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나뭇가지나 나뭇잎이나 나뭇줄기만 보아도 숲바람을 알거나 읽을 수 있습니다. 흙을 만지는 사람이라면 흙빛과 흙내만 살펴도 날이나 날씨를 알거나 읽을 뿐 아니라, 언제 씨앗을 심어서 거두느냐도 알 수 있어요.


  하늘을 바라보기에 하늘을 읽으면서 하늘을 알고, 별을 바라보기에 별을 읽으면서 별을 알아요. 다만, 그냥 바라보기만 한대서 하늘이나 별을 쉽게 알기는 어려울 테지요. 두고두고 바라볼 뿐 아니라 온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음을 깊이 쏟아서 바라보다가, 어느새 그윽한 사랑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리하여 섬사람은 바닷물을 바라보면서 바닷물을 읽어요. 바닷빛을 읽고, 바닷내(바다 내음)를 읽어요. 바다를 끼고 살면서 바다를 읽어서 알지 못한다면 바닷마을이나 바닷집을 이룰 수 없을 테니까요. 《섬: 살이》를 쓴 김준 님은 지난 스물여섯 해에 걸쳐서 ‘섬사람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섬사람과 닮으면서 섬사람하고 어깨동무하는 마음이 되’어서 섬을 바라봅니다.


  섬을 바라보면서 찬찬히 마음을 기울입니다. 섬을 바라보며 찬찬히 기울이던 마음은 이윽고 사랑으로 거듭납니다. 이 사랑은 시나브로 따사로운 눈길이 되고, 살가운 손길이 됩니다.



섬 노인의 기억과 경험은 예사롭지 않다. 박물관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풍성하다. 별과 달을 보고 며칠 날씨는 귀신같이 맞췄다. 바다 색깔만 보고 조기가 오는 길을 알았다. 어디 기뿐인가. 배를 짓는 일을 제외하면 고기잡이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건 스스로 만들어 썼다. (18쪽)



  처음에는 ‘바닷마을 연구자로 있으면서 논문을 썼다’고 할 테지만, 이제는 ‘바닷사람이나 섬사람과 같은 자리에 서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할 만한 김준 님이 펼치는 《섬: 살이》이지 싶어요. 김준 님은 섬에서 만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마다 이녁 한 사람이 훌륭하고 놀라운 ‘박물관 사람’이라고 깨닫거든요.


  건물로 서지 않으나, 섬에 우뚝 서서 살림을 지은 ‘박물관 사람’입니다. 건물로 우람하게 있지 않으나, 섬에서 조촐하고 다부지게 삶을 지은 ‘박물관 사람’이에요. 섬 할아버지와 할머니 가슴속에 아로새긴 이야기는 모두 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스스로 두 손으로 지은 삶이요 살림이며 사랑이에요.



돔 종류가 다 그렇듯 뼈가 억세서 잘 발라먹어야 한다. 이 때문에 고흥 녹동에서는 ‘뻣센고기’라 한다. 여수에서는 군평선이를 꽃돔이라고도 부르고, 목포에서는 쌕쌕이, 통영엥서는 꾸돔이라고도 한다. 지역에 따라 딱돔(닭돔), 딱때기, 챈빗, 얼게빗등어리라는 이름도 있다. (226쪽)


소, 돼지, 닭. 인간에게 이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닭은 학용품을 사야 하는 아이들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연필이 필요하면 달걀 한 개, 노트가 필요하면 달걀 두 개, 그리고 남은 알은 골망태에 모아두면 예쁜 병아리로 변신했다. (279쪽)



  섬에 바람이 붑니다. 때로는 관광바람이나 개발바람이 붑니다. 섬에 바람이 붑니다. 때로는 ‘모든 아이와 젊은이는 도시로 보내자’는 바람이 붑니다. 아이도 젊은이도 거의 도시로만 쏠리는 오늘날 바람이 붑니다. 그렇지만 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예나 이제나 섬에 고요히 서서 섬살이를 ‘섬: 살이’로 꾸립니다.


  갯것을 거두고, 바닷것을 거둡니다. 갯살림도 바닷살림도 모두 정갈하게 다스립니다. 바닷빛을 읽으며 물고기를 알던 섬살림이란, 바로 이 섬에서 아이를 낳아 돌보고 키우고 가르치고 얼크러지던 작으면서 예쁜 살림이지 싶습니다. 이 작으면서 예쁜 살림살이 이야기가 도톰한 책에서 새롭게 피어납니다. 2016.5.19.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숲책 읽기)


* 글에 붙인 사진은 가지 출판사에 말씀을 여쭈어서 고맙게 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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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플라시보다 - 원하는 삶을 창조하는 마음 활용법
조 디스펜자 지음, 추미란 옮김 / 샨티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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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54



할머니는 어떻게 ‘약손’이 될 수 있는가

― 당신이 플라시보다

 조 디스펜자 글

 추미란 옮김

 샨티 펴냄, 2016.4.20. 23000원



  조 디스펜자 님이 쓴 《당신이 플라시보다》(샨티,2016)는 ‘플라시보’가 무엇인가를 놓고 과학으로 꼼꼼하게 따지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책을 쓴 조 디스펜자 님은 뇌·신경학·세포학 과학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 디스펜자 님은 여느 과학자하고는 좀 다르지 싶습니다. 무엇이 다른가 하면, 이녁이 겪은 일이 달라요.


  이녁은 어떤 일을 겪었는가 하면, 1986년 어느 날이라고 하는데, 철인 3종 경기를 뛰다가 그만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자전거 사고를 치렀다고 해요. 헤엄치기를 끝내고 자전거를 달리는데, 그만 뒤에서 자동차가 달려들어 이녁을 들이받았고, 들이받은 데에서 그치지 않고 18미터나 질질 끌고 가다가 자동차가 멈추었다고 해요.


  이 자전거 사고로 조 디스펜자 님은 일어서지도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척추뼈가 부서졌다고 합니다. 병원에서는 손을 쓰기 어려웠다고 해요. 뼛속에 어떤 물질을 집어넣어서 굳히거나 버티도록 해야 한다고 했대요. 그러지 않으면 척추뼈가 와르르 무너져서 두 번 다시 걸을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이때에 조 디스펜자 님은 병원 치료나 수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침대에 실린 채 집으로 돌아와서 ‘마음속으로 그림 그리기’를 했다고 합니다. ‘부서진 척추뼈’가 아닌 ‘튼튼한 몸’을 마음속으로 그렸다는데(그렇다고 이 ‘마음속으로 그림 그리기’가 처음부터 잘 되지는 않았답니다. 침대에 누운 채 꼼짝하지도 못 했으니 늘 이 일만 하면서 차츰 잘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두 달이 지날 즈음 침대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고 해요. 이러고 얼마 뒤에는 다시 예전처럼 일할 수 있었고, 끔찍한 자전거 사고를 치른 지 석 달 뒤에는 ‘다시 자전거를 타는 몸’이 되었는데, 부서진 척추뼈가 제대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믿기지 않을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참말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해요.



나는 하루에 두 번 각각 두 시간씩 내면으로 들어가 내가 의도한 결과의 그림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당연히 완전히 치유된 척추 그림이었다. 물론 나는 내가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살고 있고 또 산만한지도 알게 되었다. (24쪽)


나에게는 내 안의 지성과 접촉하고 그것을 통해서 내 마음으로 내 몸을 치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27쪽)



  ‘플라시보(placebo)’는 ‘위약 효과’라고도 합니다. 어느 모로 보면 ‘약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겨레는 예부터 “할머니 손은 약손”이나 “어머니 손은 약손” 같은 말을 해요. 약을 쓰지 않아도 할머니나 어머니가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살살 어루만지면 어느새 아픔이 가신다고 해서 ‘약손’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다치거나 아픈 몸’을 낫게 할 적에는 약만 써서는 보람을 얻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약이나 병원 시설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치거나 아픈 사람 스스로 ‘생채기를 씻고 일어서려는 마음’이 없다면 다치거나 아픈 데에 안 낫는다고 하거든요.


  《당신이 플라시보다》를 쓴 뇌 과학자인 조 디스펜자 님은 이녁 스스로 ‘끔찍한 자전거 사고’를 겪어야 했을 적에, 이 사고를 수술이 아닌 ‘마음 다스리기’로 나은 일을 겪은 뒤, 뇌 과학·신경학·세포학을 새롭게 바라보았다고 하지요. 이녁이 과학자였기에 ‘어떻게 마음으로 꿈을 그리는 것’만으로 이녁 몸을 새롭게 고칠 수 있었는가를 과학 이론으로 풀어내려고 했답니다. 여기에 양자역학 원리를 받아들여서 ‘아픈 사람이 아픔을 스스로 씻는 길을 과학 원리를 바탕으로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야기해’ 주려고 했구나 하고 느낍니다.



매일 자동 인형처럼 살고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가? 그렇다면 정확하게 들은 것이다. 같은 생각이 같은 선택을 이끈다. 같은 선택이 같은 행동을 이끈다. 같은 행동이 같은 경험을 창조한다. (116쪽)


새로운 선택은 또 새로운 행동을 부른다. 새로운 행동은 새로운 경험을 부른다.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감정을 창조하고, 새로운 감정과 느낌은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당신을 고취한다. 바로 그때 ‘진화’가 이루어진다. (120쪽)



  조 디스펜자 님은 《당신이 플라시보다》라는 책을 빌어서 우리가 ‘생각·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는가 하고 묻습니다. 우리 스스로 ‘늘 똑같은 생각’인 채 ‘늘 똑같은 하루’를 보내지 않느냐 하고 묻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지 못하는 까닭은 ‘새로운 생각’을 스스로 품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물어요.


  이 물음을 찬찬히 받아들이면서 참말로 내 생각과 마음을 새삼스레 되짚어 봅니다. 기쁨이란 먼 데에 있지 않겠지요. 나 스스로 기쁘게 생각해야 기쁨이고, 나 스스로 기쁘게 생각하지 않으면 기쁨이 아닐 테니까요.


  이를테면,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하면서 소꿉밥을 흙으로 지어서 나한테 내미는데, 빙글빙글 웃으며 두 손으로 ‘흙밥(소꿉밥)’을 내미는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하고 생각한다면, 나는 아이들하고 즐겁게 소꿉놀이를 하면서 웃을 만합니다. 이와 달리 ‘집안에 흙덩이를 들고 들어오다니!’ 하고 나무란다면, 나한테는 기쁨도 웃음도 샘솟지 못할 테고, 아이들한테도 기쁨이나 웃음이 아니라 ‘서운함’을 심고 말 테지요.



우리는 정말 이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이렇게 살고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걸까? (154쪽)


당신이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이는 곳에 당신의 에너지가 놓인다. 가능성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의식이나 마음을 둔다면 당신은 그 가능성에 에너지를 주는 것이다. (278쪽)



  우리는 스스로 어떤 마음이 될 때에 즐겁거나 기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면서 지낼 때에 즐겁거나 기쁠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고 보니, ‘힘들다’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면 뭘 해도 힘들어요. 밥을 짓든 잠을 자든 그저 힘들어요. 이와 달리 ‘신난다’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면 뭘 해도 신나요. 밭일을 하든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서 나들이를 다니든 신나요.


  내가 스스로 어떤 마음이 되는가에 따라 내 삶이 달라진다고 할까요. 내가 스스로 어떤 마음이 되는가를 나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면 내 삶은 엉망이 된다고 할까요. 내가 스스로 기쁜 마음일 적에는 언제 어디에서나 어떤 일을 겪더라도 스스로 기쁨이지만, 내가 스스로 안 기쁜 마음일 적에는 언제 어디에서나 어떤 일을 마주하더라도 안 기뻐요. 어려운 지식이나 이론이 아니지요. 참으로 쉬운 지식이나 이론이지요. 그런데 이 쉬운 지식이나 이론을 ‘쉽기 때문에 너무 쉽게 잊고’ 지나치는구나 싶습니다.



완전한 치유는 양자장 속에 미지의 가능성으로서 이미 존재한다.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고 깨닫고 구체화시킬 때까지 말이다. (338쪽)


감정과 생각이 급기야 습관적 혹은 자동적이 되고, 그 시점에서 태도가 형성된다. 태도들이 모여 믿음이 되고, 관련된 믿음들이 모여 인식이 된다. 이런 과정이 오래 반복되면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세계에 대한 관점이 형성된다. (400쪽)



  남이 나한테 뭘 해 주기 때문에 기쁘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어떤 마음인가에 따라서 똑같은 일을 놓고도 이때에는 기뻐도 저때에는 안 기쁘구나 하고 느껴요. 다시 말해서, 내 마음이 기쁨일 적에는 작은 들꽃 한 송이를 보더라도 웃지만, 내 마음이 기쁨이 아닐 적에는 어마어마한 장미꽃다발을 받아도 웃지 않아요. 내 마음이 기쁨일 적에는 주머니에 돈이 없어도 노래를 부르지만, 내 마음이 기쁨이 아닐 적에는 주머니에 돈이 가득해도 ‘아직 돈이 모자라!’ 하는 생각에 젖어 조금도 노래를 못 부르고 안절부절하기 마련이지 싶어요.


  《당신이 플라시보다》라는 책은 우리가 스스로 마음속에 ‘이루고 싶은 꿈을 스스로 그려서 담으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느낍니다. 대단한 꿈이든 수수한 꿈이든, 우리가 스스로 마음속에 ‘꿈을 그려야 꿈을 이룬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구나 싶어요. 그러니까, ‘꿈을 안 그리는 사람은 이룰 꿈이 없어서 꿈을 못 이룬다’는 얼거리가 되는구나 싶어요. 꿈을 그리기에 언제나 그 꿈을 바라보면서 한 걸음씩 걷는 셈이고, ‘내가 그 꿈을 어떻게 이뤄? 말도 안 되지!’ 하는 생각을 마음속에 심으면, 그만 나는 내 꿈을 그리지 못하면서 아무 꿈도 못 이루는 삶, 늘 똑같은 몸짓만 되풀이하는 나날이 되는 셈이지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 ‘할머니 약손’처럼 따사로운 사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이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을 차분히 다스리고, 내 몸을 고요히 가꾸는 길로, 언제나 따스하고 넉넉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마주할 수 있는 마음이 되자고 생각합니다. 예부터 할머니는 아이를 따사로이 보살피려는 사랑을 마음으로 한가득 품었기 때문에 언제나 상냥하고 넉넉한 ‘약손’이 되어 우리를 보듬어 주었으리라 느껴요. 2016.5.16.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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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철도 저 너머에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정임 옮김 / 너머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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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51



“난 누구지?” 하고 물으며 길을 걷다

― 은하철도 저 너머에

 다카하시 겐이치로 글

 박정임 옮김

 너머 펴냄, 2016.4.28. 17000원



“어쩌면 그런 가설만이 살아남은 것에 지나지 않지. 어쩌면 지금의 가설도 시간이 흐르면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는 거야. 우리는 필사적으로 생각하지. 하지만 그 앞에는 다시 무언가가 있어.” (15쪽)



  아이가 입을 삐죽입니다. 아이가 환하게 웃습니다. 아이 눈에서 싫다는 티가 뚜렷합니다. 아이 눈에서 기쁘다는 노래가 흐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널을 뛰듯이 달라지거나 바뀌는 모습을 보이는 아이들을 마주하면서 생각합니다. 나도 이 아이만 하던 지난날에는 우리 어버이한테 이와 같은 모습이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그리고, 나를 낳은 우리 어버이가 아이였을 무렵에는 두 어버이를 낳고 돌본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인 우리 어버이’를 마주할 적에 어떤 느낌이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이러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였을 무렵을 떠올려 봅니다. 그 할머니 할아버지를 낳은 또 다른 어버이를 떠올리고, 자꾸자꾸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문득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며 생각을 기울이고 보니, 나는 어릴 적에 학교에서도 이런 생각을 으레 했습니다. 수업은 안 듣고 ‘옛날 옛적 사람들은 어떤 모습 어떤 삶 어떤 사랑’으로 하루를 보냈을까 하고 생각했지요. 몸은 교실에 있지만 마음은 아주 먼 옛날에 있습니다. 선생님은 교실에서 신나게 ‘떠드’시지만, 나는 아뭇소리를 안 듣고 고요하게 내 꿈에 빠집니다.


  이러다가 몽둥이나 자나 주먹으로 머리통을 세게 얻어맞고는 번쩍 하고 깨어나지요. 수업을 하다가 딴생각에 빠져서 맞았다는 아픔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생각에 잠기며 ‘내 뿌리’를 찾는 일이 갑자기 끊겼기 때문에 못마땅합니다.



안다고 하면 아는 것이지만 그러면 정말로 알고 있는지 묻는다면 모른다고밖에 대답할 수 없다. 모르는 ‘말’이 늘어나 빈번하게 사전을 펼치는데, 펼치고 있을 때는 아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 곧바로 모든 것이 희미해져 가는 기분도 든다. (117쪽)


난 지금까지 생각하는 척하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어. 무언가를 아는 척했지만 사실 아무것도 몰랐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하고 그것만 신경 썼기 때문이야. (137쪽)



  다카하시 겐이치로 님이 쓴 《은하철도 저 너머에》(너머,2016)를 읽습니다. 이 책을 쓴 다카하시 겐이치로 님은 미야자와 겐지 님이 쓴 《은하철도의 밤》을 마음에 품으면서 이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은하철도 저 너머에》라는 책을 낸 ‘너머’ 출판사는 《미야자와 겐지》 전집을 차근차근 펴냅니다.


  가만히 헤아리니, “은하철도 저 너머에”를 그리는 이야기를 한국말로 옮긴 출판사 이름도 ‘너머’입니다. ‘너머’는 ‘넘다’에서 비롯한 낱말이고, ‘넘다’는 때나 곳이나 사람을 벗어나면서 지나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높은 곳이 있어도 더 높이 오르거나 날듯이 지나가는 모습을 가리키는 ‘너머(넘다)’요, 무시무시한 울타리가 있어도 가뿐히 지나가는 모습을 가리키는 ‘너머(넘다)’입니다. 벽도 한계도 끝도 없다고 여기며 지나가는 ‘너머(넘다)’이고, 어려움이나 고비나 힘겨운 삶도 어느새 훌훌 털고 지나가는 ‘너머(넘다)’예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모든 몸짓이 바로 ‘너머(넘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거나 서거나 있는 ‘이(이쪽) 차원’에서 다르거나 새로운 곳으로 가는, 그러니까 ‘다른(저쪽) 차원’으로 가는 몸짓도 ‘너머(넘다)’이지요.



“이래서는 안 돼.” 조반니는 자신을 격려하듯 말했습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아빠와 엄마를 추억하는 일이 아니야. 내가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하는지를 아는 일이야. (152쪽)



  아이를 바라보면서 나를 생각하고, 나를 생각하면서 우리 어버이와 곁님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 어떤 사이였기에 이렇게 한집을 이루면서 함께 살까요? 우리는 예전에 서로 어떤 사이로 살았기에 오늘 이곳에서 한살림을 지으면서 함께 먹고 자고 입고 말을 섞을까요?


  오늘 이곳에서 우리는 ‘어머니와 딸’이라든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모습이지만, 지난날 저곳(옛날 다른 차원이나 세계)에서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었다든지 ‘미워하는 두 맞잡이’였는지 모릅니다. 짝사랑으로 그리다가 오늘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로 지낼는지 모릅니다. 지구에서 아주 머나먼 어느 별에서 살다가 이 지구로 다시 태어나서 한집을 이루는지 모릅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지요. 우리 머릿속에는 우리 ‘예전 삶’이 어떠했는가 하는 실마리가 거의 안 남았다고 할 만하니까요. 역사책을 읽으면서 역사를 배우지만, 정작 ‘나’라고 하는 사람이 걸어온 발자취는 도무지 알 길이 없어요.


  이를테면, 내가 예전에 임금님이었는지, 도둑놈이었는지, 군인이었는지, 군인 가운데에서도 무시무시한 살인마 같은 사람이었는지, 질그릇을 빚던 사람이었는지, 수수하게 땅을 일구던 사람이었는지, 배를 몰고 고기를 낚던 사람이었는지, 아기를 줄줄이 낳던 어머니였는지, 동생을 살뜰히 돌보다가 그만 냇물에 휩쓸려 일찍 숨을 거두었는지, 화산이 터져서 불에 타 죽었는지, 공룡한테 잡아먹혔는지, 참말로 내 지난 발자취를 오늘 이곳에서 하나도 ‘알아차리’거나 ‘알나내’지 못합니다.



“그레, 우리는 책을 읽는 방법조차 몰랐어. 아니 배우지 못했어. 왜냐하면 사실을 알려주면 안 됐으니까. 이 책의 작가나 시인이 이 소년들을 만들어낸 게 아니야. 이 소년들은 존재하고 있어.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방법으로, 그리고 두 소년은 지금도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거야!” (234쪽)


대유동 이후 세계를 뒤덮은 것은 너무도 눈부신 빛이었다. 우리는 그 빛 속에 단지 떠 있을 뿐이다. 영원에 가까울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그 빛에 질린 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빛이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변화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285쪽)



  이야기책 《은하철도 저 너머에》는 이야기책이면서 문학책이고, 또 인문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어느 한 갈래로 넣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또렷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은하철도 저 너머에》는 우리가 저마다 어떤 숨결로 이 땅에 처음 태어나서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어떤 삶을 지으면서 어떤 꿈을 가슴에 담으려 하는가를 돌아보도록 살며시 이끈다고 할 만해요. ‘빛이 아닌 어둠’을 생각하도록 이끄는 《은하철도 저 너머에》이고, ‘눈부심 아닌 고요’를 마음에 담도록 이끄는 《은하철도 저 너머에》라고도 할 만합니다.


  밥을 먹으면서, 수박 한 조각을 먹으면서, 국을 마시면서, 골짝마실을 가서 골짝물을 두 손에 모두어 마시면서, 마당을 쓸면서, 텃밭을 일구면서, 파랗게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크게 들이켜면서, 제비 날갯짓을 바라보면서, 딱새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씨앗을 심으면서, 부전나비 얌전한 날갯짓을 지켜보면서, 아이들이 집 안팎을 마음껏 드나들면서 뛰노는 모습을 살펴보면서, ‘나’라고 하는 넋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자꾸자꾸 생각합니다. 어떤 뜻을 품고 이 땅에 오늘 새롭게 태어났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어떤 길을 걸으려고 오늘 이곳에서 호미를 쥐고 밭을 갈아 씨앗을 심으려 하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어떤 꿈을 키우려고 시골살림을 지으면서 책을 한손에 쥐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보려고 하는 건 중요해. 눈을 감을 필요는 없어. 하지만 정말로 무언가를 보려고 한다면 그것만을 봐서는 안 돼. 전부를 보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그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해.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넌 누구지?” 그리고 당신은 자신을 ‘보는’ 것이다. 보려고 애쓰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직접 보는 것은. 하지만 당신은 난감한 듯 고개를 흔들다가 불현듯 어떤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 창문을 보는 것이다. 그곳에는 자신이 비치고 있지 않겠는가. (362∼363쪽)



  ‘보다(봄)’를 새삼스레 되새깁니다.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한다고도 말하는데, 눈을 감고도 볼 수 있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몸에 있는 눈으로도 보아야 할 뿐 아니라, 마음에 있는 눈으로도 보아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러니까, 두 눈을 뜨면서 ‘마음눈’을 오롯이 떠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나는 너를 바라보고, 너는 나를 바라보아요. 우리는 서로 다른 몸이요 목숨이고 사람이라 할 텐데, 어쩌면 너하고 나는 같은 숨결이거나 넋일 수 있어요. 겉으로는 둘로 나뉜 몸이고 목숨이지만, 속으로는 같은 마음이면서 하나인 숨결일 수 있어요.


  “창문을 보”면서 “내 앞에 있는 새로운 나”를 마주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넌지시 들려주는 《은하철도 저 너머에》를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내가 걸어가는 이 삶길에서 내가 늘 나한테 묻고 되물을 이야기는 “난 누구지?”라고 하는 대목을 새롭게 되새겨 봅니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하며, 나는 무엇을 사랑하며, 나는 어떤 삶을 지으며, 나는 어떤 사람으로서 무엇을 꿈꾸려 하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슬기롭게 찾으면서 ‘너하고 내가 다른 숨결이 아닌 하나인 숨결’이라는 대목을 깨닫는다면 전쟁이나 미움이란 어느새 씻은듯이 사라지만서 평화와 사랑이 시나브로 깨어날 만하지 않을까 하고 느낍니다. 봄을 마무르는 오월바람이 싱그러우면서 따뜻합니다. 2016.5.7.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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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권이 들려주는 참 쉬운 곤충 이야기 철수와영희 생명수업 첫걸음 2
조영권 글.사진 / 철수와영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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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100



‘징그러운 벌레’ 아닌 ‘고운 이웃’이 되고 싶어

― 조영권이 들려주는 참 쉬운 곤충 이야기

 조영권 글·사진

 철수와영희 펴냄, 2016.4.21. 18000원



  비가 그치고 나면 시골마을에는 몇 가지가 새삼스레 바뀝니다. 첫째, 저녁나절부터 개구리 노랫소리가 우렁찹니다. 둘째, 손수 심은 씨앗이며 흙 품에 안겼던 들풀 씨앗이며 쑥쑥 올라옵니다. 셋째, 봄바람은 한결 싱그러우면서 푸르고 맑게 달라집니다. 넷째, 바야흐로 수많은 풀벌레가 더욱 많이 기지개를 켜고, 겨우내 잠들었던 나비가 신나게 깨어납니다.



곤충들은 경쟁이 심해지거나 견뎌 내기 힘들 정도로 자연환경이 변할 때 그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적응하거나 피하는 방법을 선택했어. 바로 탈바꿈하며 주어진 상황에 맞춰 몸과 습성을 변화시키는 거지. (37쪽)



  비가 그치고 난 도시에서는 무엇이 바뀔 만할까요? 도시에서는 시골과 달리 개구리 노랫소리라든지 싹이나 풀이 우거진다든지 바람결이 사뭇 달라진다든지 하는 날씨를 알거나 느끼기는 쉽지 않으리라 느껴요. 그렇지만 도시에도 나무가 있고 골목밭이 있어요. 공원에서 돋는 풀에 풀벌레가 있고, 꽃가루를 찾는 벌하고 나비가 드문드문 날아요.


  《조영권이 들려주는 참 쉬운 곤충 이야기》(철수와영희,2016)를 아이들하고 함께 읽습니다. 아이들은 우리 집하고 마을에서 으레 마주치는 풀벌레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나도 우리 집하고 마을에서 자주 만나는 풀벌레마다 어떤 이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름만 안다고 해서 풀벌레를 안다고 하기는 어려워요. 이름뿐 아니라 한살이를 알아야 하고, 한살이를 넘어서 이 풀벌레가 짝을 짓는 결이나 알을 낳고 흙밭에서 어떤 일을 하는가도 찬찬히 알 수 있어야지 싶어요.



곤충은 1차 생산자인 식물을 먹고 자신은 더 큰 동물에게 잡아먹히며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역할을 해. (47쪽)


나비 무리는 몸통에 비해 날개가 유난히 크고, 날개는 털로 덮여 있으며, 애벌레 시기에 입으로 실을 토해 낼 수 있는 곤충이야. (76쪽)



  밭둑이나 마당 한쪽에서 들풀을 뽑아서 뿌리를 하늘로 보도록 해서 눕힐라치면, 언제나 온갖 풀벌레가 가득합니다. 밭을 갈 적에는 지렁이뿐 아니라 쥐며느리와 집게벌레와 달팽이에다가 아직 안 깨어난 풀벌레 알이 잔뜩 있어요. 조금 큰 돌을 들어서 옮길 적에는 으레 개미가 바글거려요. 아차, 또 개미집을 건드렸네 싶다가도, 개미들은 저희 집 뚜껑으로 삼던 돌이 사라지면 어느새 새로운 곳을 찾아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일구어요.


  그런데, 시골살이를 하면서 풀벌레하고 흙이 어떻게 얽히는가 하는 대목을 좀 새롭게 바라봅니다. 무엇보다도 ‘흙이 살아서 숨쉰다’고 하는 데에는 풀벌레가 많아요. ‘흙이 메마르거나 죽었네’ 싶은 데에는 풀벌레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까무잡잡하면서 구수한 냄새가 나는 흙에는 수많은 풀벌레하고 흙벌레가 어우러져요. 허옇거나 시뻘건 흙에서는 풀벌레나 흙벌레를 좀처럼 찾아보지 못해요. 왜 그러한가 하고 여러 해에 걸쳐서 살펴보았는데, 풀벌레나 흙벌레는 가랑잎이나 마른 풀줄기나 풀잎을 갉아먹기도 해요. 마른 잎을 좋아하는 풀벌레나 아주 작은 벌레(이른바 미생물)가 마른 잎을 흙으로 천천히 바꾸어 주고, 이 자리에 ‘조금 큰 풀벌레’가 찾아들어요.



파리 무리는 앞날개 한 쌍만 남아 있어. 뒷날개는 퇴화해서 작은 돌기로 남았는데, 이것이 평형감각을 유지해 주며, 끝이 봉긋한 곤봉처럼 생겼다고 해서 ‘평균곤’이라고 불러. 딱정벌레들이 쓰지 않는 날개 한 쌍을 보호용 갑옷으로 바꿨다면, 파리들은 날개 한 쌍을 평형감각 기관으로 바꾼 거지. (78쪽)



  《조영권이 들려주는 참 쉬운 곤충 이야기》는 우리를 둘러싼 풀벌레가 얼마나 많은가 하는 대목을 사진으로 차근차근 보여주면서, 이 풀벌레는 ‘그냥 징그러운 벌레’가 아니라 ‘지구라는 별을 아름답게 가꾸는 이웃’이라고 하는 대목을 글로 밝힙니다. 이러면서 사람 곁에서 쉽게 찾아볼 만한 벌레마다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알려주고, 잠자리나 딱정벌레뿐 아니라 모기나 파리는 어떠한 한살이로 어우러지고, 날개나 몸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암컷 입장에서는 쓸모없어진 수컷을 잡아먹어 새끼를 돌보는 데 필요한 에너지로 쓰는 게 더 효율적인 거지. 나중에 새끼들이 자라 먹이가 많이 필요해지면 암컷은 자신의 몸도 새끼들의 먹이로 내어 줘. (103쪽)


(벌과 파리) 암컷이 나방이나 나비 애벌레, 하늘소 애벌레 등의 몸에 산란관을 꽂고 알을 낳으면 그 안에서 알들이 깨어나 기생한 애벌레의 몸을 파먹고 자라는 거야.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지만, 벌들의 이런 행동 덕분에 식물에 해를 입히는 곤충의 양이 조절되기도 해. (107쪽)



  시골집에는 집 안팎으로 벌레가 많습니다. 거미는 집안에도 집밖에도 어디에나 있습니다. 부엌에 뭐만 떨어뜨려도 어느새 개미가 찾아옵니다. 나방은 어느 틈을 비집고 들어왔는지 저녁에 불을 켜는 자리를 붕붕 납니다.


  마당에 있는 후박나무 둘레에는 으레 애벌레가 나뭇가지나 나뭇잎에서 미끄러졌는지 애벌레가 기어다닙니다. 비가 온 뒤나 바람이 세게 분 날에는 애벌레 한두 마리쯤 쉽게 찾아봅니다. 마을이나 숲에서 사는 새는 바로 이 애벌레를 잡으려고 우리 집 나무를 찾아오지 싶어요.


  애벌레는 자라는 동안 잎을 갉고, 번데기나 고치를 튼 뒤에는 마음껏 하늘을 날며 꽃마다 찾아들어 꽃가루받이를 합니다. 자그마한 풀벌레나 흙벌레는 마른 잎이나 줄기를 갉아서 새로운 흙으로 바꾸는 구실을 합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밥이 흙에서 나온다면, 흙에 씨앗을 심는 시골지기 손길뿐 아니라, 이 흙을 함께 돌보며 곁에 있는 풀벌레가 있구나 싶어요. 그러니까 수많은 벌레가 있어서 우리(사람) 모두 밥을 기쁘게 먹을 수 있구나 싶습니다.


  얼핏 ‘징그러운 벌레’로 여길 수 있지만, 이 작은 벌레가 하는 일이라든지 이 작은 벌레가 제 몸을 지키려고 여러 몸빛을 보여주는 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운 이웃’이 우리 곁에 있어서 지구가 푸르네 하고 느낄 만하지 싶어요. 오늘도 새로운 풀벌레를 만나면서 가만히 속삭입니다. 얘야, 네 이름은 뭐니? 2016.4.29.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숲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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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수업 - 따로 또 같이 살기를 배우다
페터 볼레벤 지음, 장혜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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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99



‘나무가 자라는 마당’이 있는 집에서

― 나무 수업

 페터 볼레벤 글

 장혜경 옮김

 이마 펴냄, 2016.3.10. 13500원



숲에 있는 흙 한 줌에는 지구에 사는 사람의 숫자보다 많은 생명체가 들어 있다. 찻숟가락 하나에도 1킬로미터가 넘는 균사체가 들어 있다. 이 모든 생명들이 땅에 영향을 주어 땅을 나무에게 소중한 곳으로 만든다. (117쪽)



  마을 빈논에 꽃을 심고 돌보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도시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고향마을을 꽃하고 나무로 가꾸려는 분입니다. ‘꽃할배’라 할 수 있는 분인데, 우리 집에 흰수선화를 한 꾸러미 선물로 주셨어요. 고운 꽃을 고마이 바라보면서 마당 한쪽에 옮겨심습니다. 이러면서 마당 한쪽하고 텃밭에 돋은 ‘여느 풀’을 꽤 뽑습니다.


  ‘여느 풀’이라고 했는데 사회에서는 흔히 ‘잡초’라고 일컫습니다. 사회에서 잡초라고 할 적에는 ‘심어서 길러 먹으려고 하는 풀’이 아닌 풀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오이밭에 돋는 돌나물도 잡초가 될 수 있고, 고들빼기나 씀바귀도 마늘밭에서는 잡초가 되지요. 민들레도 따로 나물이나 약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면 성가신 잡초가 될 뿐입니다.


  오늘 내가 우리 집 마당하고 텃밭에서 뽑은 ‘여느 풀’은 곰밤부리하고 갈퀴덩굴하고 꽃마리하고 쑥하고 모시입니다. 모두 즐거우면서 고마운 나물로 삼는 풀인데, ‘수선화를 옮겨심’는다든지 ‘우리 집에서 씨앗을 심을 자리’에 돋으면 어쩌는 수 없이 ‘뽑는 풀’로 삼아요. 한쪽에 잘 쌓아서 햇볕에 바짝 말린 뒤에 밭둑이나 밭고랑에 놓지요.


  등허리가 살짝 결릴 만큼 밭일을 하고서 평상에 가만히 눕습니다. 허리를 편 뒤 다시 흙을 만져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한동안 흙일을 쉬는 사이 《나무 수업》이라는 책을 새삼스레 펼칩니다. 페터 볼레벤 님이 쓴 《나무 수업》(이마,2016)인데, 이 책은 나무한테서 배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글쓴이 페터 볼레벤 님은 독일에서 ‘숲지기 공무원’으로 스무 해 넘게 일했다고 해요. 농약을 안 쓰고 기계도 안 쓰면서, 오직 말이나 사람 힘을 빌어서 나무를 살피고 돌보며 아끼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이러는 동안 페터 볼레벤 님을 비롯해서 ‘차분하고 조용한 숲지기’는 나무가 들려주는 말을 들었고, 나무가 속삭이는 노래를 들었으며, 이 말과 노래를 차곡차곡 글로 옮겼다는군요.


  나무가 들려주는 말을 듣는다니 ‘바보’ 아니냐고 물을 분이 있을까요? 나무가 속삭이는 노래를 듣는다니 ‘거짓말’ 아니냐고 따질 분이 있을까요? 그렇지만 마음을 열고 나무를 가만히 껴안으면 나무가 숨을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즐겁거나 기쁘거나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나무한테 다가가서 뺨을 대거나 손을 대면 나무가 두근두근거리면서 반가워하는구나 하는 숨결을 느낄 수 있어요. 나무뿐 아니라 꽃이나 풀도 그런걸요. 씨앗 한 톨도 그렇고요.



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허약해지고 허리가 굽고 병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활기가 넘치고 능률도 높아진다. (130쪽)


토종 숲 생태계가 그런 변화에 맞서 건강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인간이 함부로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 사회 공동체가 완벽할수록, 숲의 미기후가 안정될수록 이국의 침입자들이 발을 내리기가 힘들어질 테니 말이다. (269쪽)



  나무를 조금 더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우리 집에서 우리하고 함께 사는 나무를 헤아리고, 우리 마을에 있는 나무를 헤아리며, 우리 고장에 있는 나무를 헤아립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우리하고 함께 사는 나무하고, 이 지구라는 별에서 우리하고 함께 숨을 쉬는 나무를 헤아립니다.


  사람과 사람을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는 살붙이를 헤아리고, 우리 마을 이웃 할머니하고 할아버지를 헤아립니다. 우리 고장 사람들을 헤아리고, 이 나라 사람들을 헤아리며, 이 지구라는 별에서 우리하고 함께 숨을 쉬는 사람들을 헤아립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마음을 열지 않으면 서로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알기 어렵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마음을 열어야 비로소 서로 어떤 느낌이거나 생각인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과 나무 사이에서도 사람이 마음을 안 열면 나무가 들려주는 말이나 노래를 들을 수 없어요.


  나무한테서 배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무 수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이 대목을 짚습니다. 나무한테서 기쁘게 배우자고 말해요. 나무하고 함께 ‘기쁜 살림을 짓는 슬기’를 다스리자고 말해요. 오백 해는 거뜬히 살 뿐 아니라 수천 해도 넉넉히 사는 나무와 같은 결로 나무를 바라보자고 말해요. 그러니까 ‘백 해를 살 동 말 동하는 사람 목숨’이 아니라 ‘즈믄 해를 넉넉히 사는 나무’라는 테두리에서 나무를 바라보아야 ‘나무 돌보기’나 ‘나무 가꾸기’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즈믄 해는커녕 이백 해도 살기 어려운데, 어떻게 나무 마음을 나무처럼 헤아리느냐’ 하고 물을 만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어버이와 나와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고, 또 우리 아이들이 낳을 새로운 아이들을 찬찬히 생각할 수 있다면, ‘나무를 사랑하는 길’도 헤아릴 만하지 싶습니다. 두고두고 물려줄 만한 숲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삶을 짓고 살림을 가꾸는 길을 헤아려 보면 아름다운 나날이 될 만하리라 생각해요.


  《나무 수업》을 조용히 덮고 등허리를 토닥이면서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우리 집 마당에 짙푸른 그늘을 드리우는 후박나무를 바라봅니다. 마당에 나무 한 그루가 우람하니 여름에는 뜨거운 볕을 가려 주고 바람이 시원합니다. 우람한 나무 한 그루는 겨울에는 매서운 바람을 가려 주면서 집 둘레에 포근한 기운이 서리도록 해 줍니다. 이 큰 나무에는 온갖 멧새가 찾아들면서 하루 내내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나무가 떨구는 잎은 다시 이 나무한테도 돌아가지만, 밭흙을 기름지게 가꾸는 거름이 되기도 해요. 후박나무 껍질로 엿을 고기도 하고, 치약을 빚기도 해요. 그리고 이 후박나무 잎에는 파란띠제비나비가 알을 낳지요. 해마다 멋진 나비가 깨어나는 보금자리 구실도 하는 나무 한 그루예요. ‘마당이 있는 집’도 훌륭하지만, ‘나무가 자라는 마당이 있는 집’이야말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집이 되리라 생각해요. 2016.4.23.흙.ㅅㄴㄹ



죽은 가문비나무와 소나무는 어린 활엽수 숲의 탄생을 돕는 조산원이다. 그것들의 죽은 몸통에 저장된 물은 뜨거운 여름날에도 대기를 참을 수 있을 정도로 서늘하게 만들어 준다. 쓰러진 줄기는 천혜의 울타리가 되어 노루나 사슴의 침입을 막아 준다. (290쪽)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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