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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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84



도시사람도 텃밭짓기를 해야 삶이 즐겁다

― 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가와구치 요시카즈·쓰지 신이치 이야기

 임경택 옮김

 눌민 펴냄, 2015.8.25. 14000원



  어릴 적부터 늘 바람을 생각했습니다. 하루라도 바람을 잊지 않으며 살았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코가 나빠서 이비인후과를 늘 들락거렸고, 철이 들 만한 나이가 되어도, 제금을 나고 아이를 낳은 뒤에도, 코는 늘 나빠서 숨을 쉬기가 벅찼습니다. 아무래도 코가 나빴기 때문에 바람을 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도 할 텐데, 숨을 쉴 만한 곳이 아니면 있기 어려웠어요. 그리고, 숨쉬기란 무엇인가를 놓고 늘 생각했어요. 숨을 쉴 때마다 숨쉬기를 생각하며 살았어요. 코가 나쁘니 숨을 한 번 쉬는 일조차 늘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러다 보니, 창문을 꼭꼭 닫은 곳에 있는 일이란 언제나 죽음하고 같았습니다. 바람이 드나들지 않는 곳에 있는 일이란 목을 옥죄는 일하고 같았어요. 한겨울에도 창문을 열어야 비로소 숨이 트였고, 날이 아무리 추워도 옷을 얇거나 가볍게 입으면서 바람을 느끼려고 했습니다.



농촌은 환금 작물을 대규모로 단일 재배하는 공장으로 바뀌, 거기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의 다수도 기계나 화학비료나 농약을 비롯한 공업 자재를 소비하는 측이 되어 많은 부채를 지고 거대한 사회 시스템에 의존도를 높여 가고 있을 뿐이다. (11쪽)


농가에서 자랐는데도 농민 자신을 낮게 자리매김해 버리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32쪽)



  나는 오늘 시골에서 삶을 짓습니다. 시골하고 도시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지내기도 했지만, 아주 시골에서 눌러산 지 다섯 해가 무르익습니다.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살며 가장 기쁜 일을 꼽자면 바로 바람입니다. 맑으면서 싱그러운 바람이 기쁘고, 언제 어디에서나 푸르면서 파랗게 부는 바람이 반갑습니다. 때때로 농약바람이 불기는 하지만, 농약바람이 불면 농약이 없는 데로 떠나서 지내요. 숨을 쉴 수 있도록 하는 바람이 있는 곳에서 살며 비로소 코가 트이고 몸이 트인다고 할까요.


  그런데 올해에 부는 바람을 찬찬히 살피니 올해에는 바람이 거의 안 붑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 주에 두어 차례는 바람이 제법 세게 불었는데, 올해에는 한 달에 한 차례조차 센바람이 안 붑니다. 올해에 부는 세다 싶은 바람은 지난해 분 바람에 대면 바람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바람입니다.


  문득 옛말을 떠올립니다. 예부터 큰바람이 여러 차례 불지 않으면 나락이 제대로 안 익는다고 했어요. 큰바람이 휘몰아쳐서 나락을 흔들어 주어야 볏줄기도 튼튼하고 나락도 알차게 맺는다고 했어요. 큰바람이 휘몰아치면서 풀벌레나 모기도 날려 버리기에, 시골에서는 꼭 큰바람이 불어 주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나 오늘날 시골에서는 바람을 걱정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옛날과 달리 오늘날 볍씨는 품종개량(유전자조작)을 해서 짜리몽땅합니다. 짜리몽땅하면서 열매를 더 많이 맺도록 하는 ‘품종개량 시킨 볍씨’이기 때문에 바람이 불든 안 불든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 아니라, 바람이 안 불어야 더 잘 된다고까지 합니다.



여름에는 소나기가 걷히고 나면 냇가에 넘치는 미꾸라지, 날아다니는 반딧불이, 매미, 하늘가재, 나비, 잠자리를 쫓아다녔습니다. (35쪽)


현대 예술의 다수는 추악의 극점의 양상을 찾고 있습니다. 미술관에 가면 현대 작가들의 추악한 작품이 많이 진열되어 있는데, 비평가들은 그것들이 “시대를 상징하고 있다.”, “개성이 대단하다.”라고 극구 칭찬하면서 어둠에 빠져버립니다. 작가도 비평가도 예술의 본질을 밝히지 않고 가치를 역전시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50쪽)



  가와구치 요시카즈 님하고 쓰지 신이치 님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그러모은 《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눌민,2015)을 읽습니다. 가와구치 요시카즈 님은 일본에서 ‘자연농’을 한 지 마흔 해 남짓 되었다고 합니다. 자연농 한길을 오랫동안 걸어오면서 느끼거나 생각한 이야기를 이 조그마한 책에 살뜰히 풀어냅니다.


  그러면, 자연농이란 무엇일까요? 자연농이나 유기농 같은 말은 일본에서 지었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농사법입니다. 자연농은 자연 그대로 자라도록 두는 농사입니다. 유기농은 똥오줌을 거름으로 삭혀서 주는 농사입니다. 자연농에서는 거름을 주지 않고 농약이나 비료도 쓰지 않습니다. 유기농은 거름을 쓰는 농사이기에 농약을 쓸 수도 있고 안 쓸 수도 있습니다. 농약을 안 쓰는 농사는 ‘무농약’이라 하고, 무농약이라고 하더라도 거름을 안 쓸 수 있고, 화학비료를 쓸 수 있습니다. 이밖에 ‘저농약’은 농약을 적게 쓴다는 농사이고, ‘친환경’은 ‘친환경 농약’하고 ‘친환경 비료’를 쓴다는 농사입니다. ‘관행농’은 농약과 비료를 마음껏 쓸 뿐 아니라, 비닐과 기계도 마음껏 쓰는 농사입니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자연농’일 때에는 거름도 비료도 농약도 비닐도 안 쓰지만, 농기계까지 안 씁니다. 오직 사람 손으로만 짓는 농사가 바로 자연농입니다. 그래서 유기농도 ‘무농약 유기농’일 때에 비로소 농약이 없이 똥오줌 거름을 쓰는 농사가 되는데, 똥오줌 거름도 ‘관행 축사’에서 화학사료를 먹은 소똥이나 돼지똥을 쓰는 유기농이 있고, ‘친환경 축사’에서 덜 나쁜 화학사료를 먹거나 볏짚(관행논에서 벼를 털고 남은 볏짚)을 먹인 소와 돼지가 눈 똥을 쓰는 유기농이 있습니다. 가게에서 파는 유기농 곡식이나 열매 가운데에서 ‘사람이 눈 똥오줌’만 쓰는 유기농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 똥오줌만으로는 드넓은 논밭에 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사히 신문에서 아리요시 사와코가 〈복합오염〉이라는 연재를 시작했습니다(1974년). 그것을 읽고 농약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무서워서 도중에 읽기를 그만뒀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사용하던 기계농업, 화학농업을 완전히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 자연농으로 쌀도 채소도 재배할 수 있게 되기까지 10년이 걸렸으므로 그 사이에는 수입이 전혀 없이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63∼64쪽)



  지난날에는 누구나 시골사람이었으니 누구나 시골일을 다 알았습니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도시사람이기에 누구나 시골일을 다 모릅니다. ‘자연농·유기농·친환경·관행농’ 같은 말조차 모르는 시골사람이 많고, 도시에서 생협 회원이면서 시골일을 스스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농사법이 저마다 어떻게 다른가를 찬찬히 아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을 함께 빚은 일본 농사꾼 가와구치 요시카즈 님은 처음부터 자연농을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따라서 농약을 신나게 치는 농사법을 물려받았다고 해요. 다만, 농약을 신나게 치는 농사법을 물려받기는 했어도, 농약을 칠 때하고 농약을 치고 난 뒤에 무척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때에는 왜 힘든지 몰랐다지요.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고요. 그러던 어느 날 〈복합오염〉이라고 하는 소설을 신문에서 읽었고, 이 소설에 나오는 ‘농약 피해 이야기’가 소름이 돋도록 무서워서 신문에 실리는 소설을 더 읽지 못했다고 하는데, 신문에 실린 소설을 읽고 나서 곧바로 ‘농약 한 방울도 안 쓰기’를 하자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어 혼인을 한 뒤에도 한동안 농약을 썼지만, 농약을 쓰고 난 뒤에는 언제나 앓았다고 해요. 〈복합오염〉이라는 소설을 읽기 앞서까지는 왜 앓는지 몰랐지만, 〈복합오염〉이라는 소설을 읽은 뒤에는 왜 앓는지 알았기에, 스스로 몸을 지키고, 가와구치 요시카즈 님 혼자만이 아니라 곁님과 아이들을 생각해서 ‘모두 튼튼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을 열려고 농약을 버렸다고 합니다.



유년기에서 소년기까지는 다른 풀에 깔리지 않도록 손을 빌려줍니다. 모든 작물은 개개의 성질이 있으므로 그 성질에 따라 바람직한 환경으로 저절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73쪽)


이 자연계는 논 언저리에 있는 양분만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나 물이나 공기 등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살아가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76쪽)



  한국 사회에서는 농약이 어떤 피해를 입히는지 알려주는 학교나 기관이 아직 없습니다. 시골에서 ‘농약 마시고 음독자살을 한다’는 신문글은 곧잘 나오지만, 농약이 어떠한 화학약품인가를 제대로 밝히거나 알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시골사람이 왜 농약을 마시면서 ‘스스로 죽으려’ 하는가를 제대로 깨달으리라 봅니다. 자, 생각해 보셔요. 농약을 마시면 죽습니다. 그렇지요? 빚 때문에 죽고 싶어서 농약을 마시는 시골사람이 있습니다만, 농약을 마시니 죽어요.


  마시면 죽는 농약을 뿌리면 어떻게 될까요? 농약을 뿌리는 시골사람은 농약을 뿌리면서 농약바람을 함께 마십니다. 농약이 얼굴이며 손발이며 몸이며 옷에 잔뜩 묻습니다. 온몸을 비닐옷으로 꽁꽁 싸매도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방독면을 입에 두르지 않고서야 농약을 마시기 마련입니다. 농약을 마시니 농약이 바로 몸속으로 스며들어요. 살갗으로뿐 아니라 코와 입을 거쳐서 온몸 구석구석 농약이 배어듭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방독면을 하든 비닐옷을 꽁꽁 두르든, ‘마시면 죽는 농약’을 논밭에 칩니다. 이 대목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시면 죽는 농약인데 논밭에 친단 말이에요. 그러니, 시골사람은 농약을 치면서 늘 앓을 수밖에 없습니다. 농약을 치면 칠수록 관절이며 호흡기이며 온갖 곳이 다 아프기 마련입니다. ‘늙어서 아프다’기보다, ‘힘든 일을 해서 아프다’기보다, 바로 농약을 치기 때문에 아픕니다.



다양한 풀들과 작은 동물이 동시에 살아야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많은 것들이 반년 안에 죽고 그 시체가 다음 생명의 무대가 되는 것입니다. 봄에 싹을 낸 풀이 자라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고 어미가 죽으면, 지금까지 없었던 다른 성분을 만들어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79쪽)


수입은 없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예술적인 시간을 보냈고, 올바른 것,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나날이었으며 매일 행복했습니다. 타인의 눈이나 언동이나 평가에 좌우되지 않았으니까요. (87쪽)



  도시사람도 생각해야 합니다. 마시면 죽는 농약을 시골에서 뿌립니다. 농협을 거쳐서 파는 모든 곡식과 열매는 ‘농협에서 시골사람한테 내다 판 농약을 뿌려서 얻은’ 곡식과 열매입니다. 생협이 아닌 모든 백화점과 가게에 놓인 곡식과 열매는 농약을 아주 신나게 뿌려서 거둔 곡식과 열매입니다.


  미국에서는 《침묵의 봄》이라는 책이 나왔다면, 일본에서는 《복합오염》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직 아무런 책이 안 나옵니다. 농약이 사람을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죽이는가 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 한국에서만큼은 아직 제대로 안 나옵니다.


  왜 그러할까요? 한국에서는 왜 농약 이야기를 안 다루거나 못 다룰까요? 사람들이 ‘참된 지식’을 얻으면 나라가 뒤집힐 테니까요. 농약으로 장사하는 농협과 정부기관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거나 크게 뒤흔들릴 수 있을 테니까요. ‘먹으면 죽는 농약’을 논밭에 뿌리면 괜찮을까요? 사람은 죽이지만 풀은 안 죽이는 농약일까요?


  포도밭이나 능금밭에 농약을 얼마나 많이 뿌리는지 사람들은 얼마나 아는가요? 배밭이나 딸기밭에도 농약을 얼마나 많이 치는지 사람들은 얼마나 아는가요? ‘가장 값싼 쌀’은 농약을 가장 많이 친 쌀입니다. 농약을 덜 칠수록 쌀은 값이 비싸다고 하고, 농약을 하나도 안 치고 유기농으로 지은 쌀은 값이 더 비싸다고 하며, 유기농조차 아닌 자연농으로 지은 쌀은 값이 가장 비싸다고 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농약도 비료도, 또 ‘유기질’이라고 하는 거름조차 사람 몸에는 ‘안 좋은’ 줄 도시 소비자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지식으로는 아직 잘 몰라도 ‘몸으로는 먼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골에서는 관행농을 버리고 적어도 유기농으로 간다면, 나아가 자연농으로 간다면 쌀도 푸성귀도 열매도 ‘가장 비싸게’ 팔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시골에서는 관행농을 못 버리고 안 버릴 뿐 아니라, 유기농이나 자연농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연의 보살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동안에는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114쪽)


한 번 갈게 되면 시간의 흐름과 함께 흙이 딱딱해져서 작물의 뿌리에 공기가 닿지 않게 되고 성장이 나빠집니다. 또는 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심는 작업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계속 갈아야 합니다. 갈지 않으면 흙은 딱딱해지지 않고 계속 말랑말랑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118쪽)



  한국 사회에서 농협이라고 하는 곳은 농사꾼 삶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농협이라고 하는 곳은 ‘더 많이 이익을 내려고 하는 수익기관’입니다. 그래서 농협은 시골사람한테 장사를 합니다. 첫째, 씨앗 장사를 합니다. 품종개량(유전자조작)을 한 씨앗을 팔아요. 농협에서 시골사람한테 파는 ‘품종개량 씨앗’은 이 씨앗을 심어서 거둔 ‘농산물’에서 나온 씨앗을 이듬해에 심으면 싹조차 트지 않도록 유전자를 건드렸습니다. 그리고, 농협은 농협에서 내다 파는 ‘품종개량 씨앗’으로 거둔 농산물이 아니라면 수매를 하지 않습니다.


  둘째, 농협은 농약 장사를 합니다. 우유회사가 축산 농가한테서 우유를 살 적에 ‘우유회사에서 만든 사료’를 소한테 먹이도록 팔듯이, 농협도 시골사람한테 ‘품종개량 씨앗’을 팔면서 ‘농협 농약’을 팝니다. 지자체에서 꾀하는 ‘친환경’은 친환경 농약을 쓰도록 하는데, 친환경 농약도 언제나 농협에서 파는 친환경 농약만 사서 뿌리도록 얽어매지요.


  셋째, 농협은 농기계 장사를 합니다. 오늘날 시골은 경지정지를 해 놓아서 기계를 다루기 좋도록 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씨앗과 농약(여기에 비료까지)과 농기계, 이밖에 온갖 다른 것들(비닐이라든지)을 시골사람한테 몽땅 팔아서 돈을 버는 농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골사람이 거둔 농산물을 오직 농협에서 ‘전매’를 하는 얼거리를 짰으니, 농협은 가만히 앉아서 ‘유통’ 한 가지만으로도 언제나 크게 목돈을 거머쥡니다.



춘하추동 꽃이 피고 나비가 춤추는 논밭에서, 부드럽고 맑게 퍼져가는 하늘 아래 바람이 스치고 물결이 빛나는 해변에서, 붉은색 노란색 녹색으로 색깔을 바꿔 가며 물드는 수풀과 숲에서, 생명 있는 것으로서 대답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즐겁고도 기쁜 나날을 보내고 싶은 것입니다. 이 별, 생명들이 빛나는 화원, 우주의 낙원에 태어났으니까요. (133쪽)



  자연농을 하는 까닭은 자연농이어야 비로소 흙이 살기 때문입니다. 흙이 살아야 농사를 짓는 시골사람이 스스로 튼튼하고 스스로 아름다운 곡식과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시골사람부터 스스로 튼튼해야 ‘시골사람이 지어서 얻은 곡식과 열매’를 도시 소비자한테 기쁘게 내다 팔 수 있습니다. 제대로 지어서 거둔 제대로 된 곡식과 열매이니 ‘제대로 된 값(제값)’을 받을 수 있어요.



해충과 익충을 구별하는 것은 전체인 자연계의 존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156쪽)


시골에 살고 있어도 우주를 얻지 못하고 자연을 얻지 못하면 진정한 평안과 평화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또한 도회지의 소비자와 시골의 생산자는 일체의 존재입니다. (214쪽)



  예부터 시골사람은 누구나 풀을 아꼈습니다. 예부터 시골에는 ‘잡초’가 없었습니다. 도시가 생기고 도시 문명이 퍼지면서 ‘잡초’라고 하는 뜬금없는 말이 불쑥 나왔습니다.


  예부터 시골에서는 언제나 그냥 ‘풀’입니다. 소나 염소나 토끼가 풀을 뜯습니다. 소나 염소나 토끼는 풀을 대단히 잘 먹습니다. 집짐승뿐 아니라 숲짐승도 풀을 뜯어요. 어디에나 풀이 흔하니 모두 풀을 먹습니다. 숲짐승이 구태여 ‘사람 마을’까지 내려와서 밭을 들쑤실 까닭이 없습니다.


  오늘날 시골에서 숲짐승이 왜 사람 마을로 몰래 내려와서 밭을 들쑤실까요? 숲에 먹을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숲마다 송전탑을 때려박고 고속도로와 고속철도 때문에 구멍을 뚫을 뿐 아니라 곳곳에 공장과 골프장과 관광단지와 대형 발전소 따위입니다. 숲짐승은 참말 숲에서 살 길이 없어요. 풀을 맛나게 먹던 숲짐승이 풀이 아니라 ‘사람 마을 밭’에 심은 것을 노릴 수밖에 없는 얼거리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면서 농약·화학비료·비닐·농기계를 쓰게 시키고 도시 개발을 일으키면서, 시골도 도시도 숲도 모두 망가지는 길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풀이 자라지 못하는 시골에서 풀내음도 없지만, 사람도 숲짐승도 모두 고단합니다. 시골에서 시골사람이 스스로 고단하니 도시사람도 소비자로서 고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화학물질에 의한 토지 오염을 과학으로 해결하려고 하여 새로운 화학물질을 투입해 정화하려고 하는데, 결코 정화가 되지 않을 뿐더러 반드시 새로운 문제를 초래합니다. 내버려 두면 되는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생명의 작용에 의해 잘못됨 없이 정화가 됩니다. (244쪽)



  시골이 무너지면 도시가 함께 무너집니다. 도시가 무너진대서 시골이 무너질 일은 없지만, 시골이 무너지만 도시는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 사람이 먹을 온갖 곡식이랑 푸성귀랑 열매를 짓는 시골이 무너져서 사라지면 참말 도시는 어떻게 될까요? 은행이 없어도 한국 사회는 멀쩡할 수 있지만, 시골이 없으면 한국 사회는 끝장입니다. 법원이나 청와대가 없어도 한국 사회는 튼튼할 수 있지만, 시골이 없으면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끝장이에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농사꾼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이끌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수많은 젊은이가 스스로 땅을 일구면서 삶을 사랑할 수 있도록 북돋아야 합니다. 도시 일자리를 늘리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친들 실업자나 일자리 문제는 풀 수 없습니다. 시골이 살기 아름다운 터전이 되도록 농약·비료·비닐·농기계를 몽땅 밀어내면서, 이 모든 시골일을 사람 스스로 가꾸고 돌보는 길을 새롭게 찾을 노릇입니다. 먼저 자급자족을 이루는 시골살이를 젊은이 누구나 깨닫도록 이끌면서, 자급자족 다음에는 ‘넉넉히 남는 곡식·푸성귀·열매’를 도시에 ‘착한 유통’으로 보급하는 길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된 관행농’이 아니라 ‘즐거운 자연농’을 누리는 길을 이제부터 새롭게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베어낸 풀을 쌓아두면 그 아래는 폭신폭신해집니다. 또한 논두렁길은 풀뿌리 때문에 무너지지 않을 뿐 아니라 딱딱하지도 않습니다. 풀을 없애버리면 풀뿌리가 없어지기 때문에 무너져버립니다. 땅을 갈지 않으면 흙은 부드러워진 곳과 만나게 되므로 ‘아, 역시 그랬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71쪽)



  바람을 읽으면 날씨를 읽습니다. 바람을 읽으면 흙을 읽습니다. 바람을 읽으면 풀하고 나무를 읽습니다. 바람을 읽으면 비하고 눈을 읽습니다. 바람을 읽으면 바다를 읽습니다. 바람을 읽으면 풀벌레랑 풀짐승을 읽습니다. 바람을 읽으면서 시골을 읽고 말을 읽으며 생각을 읽습니다. 바람을 읽기에 비로소 사람과 삶과 사랑을 읽습니다.


  모든 사람이 대단한 자연농을 할 수 있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제 땅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제 텃밭을 마련해서 지을 수 있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제 보금자리에서 마당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넓은 평수 아파트에서 넓은 마루가 아니라, 그리 넓지 않은 평수인 아파트라 하더라도 ‘우리 보금자리 마당과 텃밭’이 있어야 합니다.


  손수 심어서 기른 푸성귀를 손수 거두어서 밥을 차려서 먹으면 참으로 맛있습니다. 누구나 이를 몸소 겪으면 그야말로 몸과 마음으로 아주 잘 압니다. 우리는 이 나라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손수 짓는 삶맛’을 알도록 이끌어야 하고, 이 나라 젊은이가 젊을 적에 ‘손수 짓는 삶노래’를 깨닫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자연농’을 배우거나 아는 일은, 바로 도시사람과 시골사람 모두 스스로 ‘삶짓기’를 하는 실마리를 푸는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4348.9.26.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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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로 사는 즐거움 - 농부 폴 베델에게 행복한 삶을 묻다
폴 베델.카트린 에콜 브와벵 지음, 김영신 옮김 / 갈라파고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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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82



아이를 ‘숲사람’으로 키우는 기쁨

― 농부로 사는 즐거움

 폴 베델 이야기

 카트린 에콜 브와벵 정리

 김영신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2014.9.11. 13500원



  구월이 깊으면서 시골 들녘은 한결 밝은 노란 빛깔로 물듭니다. 나락이 익기 때문입니다. 가을볕은 여름볕처럼 뜨겁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락은 구월 햇볕을 받으면서 알차게 익습니다. 새벽이슬을 마시고, 들바람을 들이켜며, 따사로운 햇볕을 듬뿍 받으면서 고개를 더욱 깊이 숙입니다.


  이즈음 시골에서는 농약을 치느라 부산합니다. ‘조금 젊은’ 할머니나 할아버지라면 손수 줄을 이어 농약을 치고, ‘많이 늙은’ 할머니나 할아버지라면 농협 헬리콥터를 빌려서 농약을 칩니다.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들판을 지나가면서 바라본다면 가을들이 더없이 예쁘면서 사랑스러워 보일 텐데, 마을에서 살며 들판을 바라보노라면 짙은 농약내음 때문에 창문조차 열 수 없습니다.



해시계를 보는 사람들은 계절의 리듬에 맞춰 살아갑니다.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서두르는 법이 없습니다 …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여야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쁜 것이 발전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건 환상입니다 … 옛날에 하루는 그냥 하루였습니다 … 바쁜 사람들 때문에 닭과 소들은 원하는 시간에 먹이를 먹을 수 없습니다. 옛날에 동물들은 자연의 리듬에 맞춰 일상을 살았습니다. (34쪽)


나는 밭에 일하러 갈 때 며칠간 바람의 방향을 살핀 후 갈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44쪽)




  프랑스 시골 농부 폴 베델 님이 입으로 들려준 이야기를 갈무리한 《농부로 사는 즐거움》(갈라파고스,2014)이라는 책은 참으로 ‘시골에서 흙 만지며 사는 즐거움’을 노래합니다. 폴 베델 님은 글을 쓰지 않습니다. 다만 편지는 즐겁게 쓴다고 합니다. 그러나 책에 싣는 글은 쓰지 않습니다. 언제나 입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합니다. 흙이랑 살아온 이야기를 이웃한테 들려주고, 흙을 사랑하면서 삶을 사랑한 이야기를 온누리 이웃한테 두루 들려주려고 합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살다가 시골에서 ‘새로운 흙’으로 돌아갈 마음인 폴 베델 님은 이녁이 발을 디딘 땅에 농약을 한 방울조차 안 씁니다. 왜냐하면, 맨손으로 만지는 흙이요, 맨발로 밟는 흙이기 때문입니다. 읍내나 도시에 내다 팔아서 목돈을 쥐려고 하는 시골일이 아니라 이녁 삶을 가꾸려고 짓는 들일이기 때문에 흙을 망가뜨리거나 풀하고 나무하고 벌레하고 새를 모두 죽이는 농약을 칠 까닭이 없기도 합니다.



파도의 흐름은 바다뿐만 아니라 땅에도 영향을 주거든요. 젖소에서 갓 짜낸 우유 한 잔을 마시면 파도의 흐름이 땅에도 영향을 주었음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47쪽)


열 살이 될 때까지는 남자 어른들보다 여자 어른들과 생활하는 시간이 더 많거나 하루를 온전히 그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우유 짜는 법, 갈퀴질하는 법, 나무다발 묶는 법, 김매는 법 등을 모두 여자 어른들에게서 배웠죠. 청소년이 되면서 선생님의 자리는 고모에서 삼촌으로 옮겨갔습니다. (51쪽)



  프랑스 시골지기 폴 베델 님은 손목시계를 안 찹니다. 해를 보면 때를 안다고 합니다. 프랑스 시골지기 폴 베델 님은 텔레비전을 안 본다고 합니다. 바람을 읽으면 날씨를 안다고 합니다.


  《농부로 사는 즐거움》을 천천히 읽다가 천천히 덮습니다. 해를 읽거나 바람을 읽는 시골지기 삶은 ‘프랑스 시골지기’한테서만 엿볼 수 있지 않아요. ‘한겨레 시골지기’도 먼 옛날부터 누구나 하늘을 읽고 땅을 읽으며, 해와 별과 비와 바람을 모두 읽었어요. 흙을 만지며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흙을 손바닥에 얹고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보면서 흙기운이 어느 만큼 되는가를 헤아렸어요.


  폴 베델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아이들은 ‘여자 어른’한테서 여러 가지 살림살이와 손일을 배웁니다. 그리고 ‘남자 어른’한테서도 여러 가지 집일과 손일을 배워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거나 배울까요? 아이를 낳아 돌보는 우리 어른들은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칠까요? 학교에 보내는 일 말고, 우리 어른들이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치는가요? 교과서와 학습지와 참고서를 아이한테 안기거나 사 주는 일 말고,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베푸는 가르침이나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우리가 사는 곳에서는 버려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언덕의 이야기는 물건들 속에 담겨 있지요. (84쪽)


사람을 보호하듯, 나는 야채와 과일도 소중하게 보관합니다. 하지만 절대 과대포장을 해서 보관하지는 않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나쁜 바람과 습기를 피하며 생활해야 합니다. (95쪽)


나에게 농부라는 직업은 자유를 의미합니다. 내가 원할 때 잠을 자고 내가 원할 때 씨를 뿌립니다. 그리고 내가 원할 때 죽을 겁니다 … 자연은 새로운 생명에게 영양을 주고 보금자리를 제공합니다. 자연은 그렇게 순환합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한결같지는 않습니다. 팔십 평생 지켜본 바, 자연은 반복되지만 그 모습은 똑같지 않습니다. (104, 290쪽)




  흙에 뿌리를 내려서 자란 풀과 나무를 베어서 마련하는 살림살이는 쓰레기가 안 됩니다. 풀과 나무로 빚은 살림살이는 오래되어 더 쓸 수 없을 적에는 땔감이 되어 활활 타오른 뒤 조용히 흙으로 돌아갑니다.


  공장에서 석유를 써서 뽑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은 쓰레기가 됩니다. 조금 망가지거나 깨지거나 부서지면 곧바로 쓰레기가 됩니다. 플라스틱으로 찍은 것은 오래되지 않아도 쓰레기가 되고, 오래되어도 쓰레기가 됩니다. 수많은 비닐봉지는 언제나 쓰레기이고, 공장 물건을 감싸는 포장재도 모두 쓰레기가 되어요. 이른바 도시 문화와 문명은 온통 쓰레기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땅을 아끼면서 돌본다면, 풀과 나무를 모두 아끼면서 돌보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흙을 가꾸면서 보듬는다면, 집과 마을이 아름다운 삶터가 되도록 가꾸면서 보듬기 마련입니다.


  시골 농사꾼도 밥을 먹고 도시 대통령도 밥을 먹습니다. 그런데 시골 농사꾼만 흙을 일구고, 도시 대통령은 흙을 하나도 모릅니다. 의사와 기자와 국회의원과 시장과 대학교수도도 흙을 하나도 모릅니다. 초등학교 교사와 유치원 교사도 흙을 하나도 모를 뿐 아니라, 공장 노동자와 버스 기사와 백화점 일꾼까지 흙을 하나도 몰라요. 그러나 우리는 모두 밥을 먹어요.



꽃들을 없애버리면 생물학적으로 땅이 죽어버립니다. 그 증거로 요즘 농지에는 야생화가 피질 않지요 … 지렁이나 두더지 같은 동물들은 땅을 갈아 숨을 쉬게 합니다. 3년 묵은 내 두엄처럼 야생화의 풀들은 나쁜 풀들을 덮어 말라죽게 합니다. 만약 야생화와 풀들을 없애버리면 땅은 죽을 겁니다. 더 이상 살아 있지 못하겠지요. 마구 다룬 땅은 단단해지고, 너무 많이 이어짓기를 하거나 땅을 너무 깊게 파면 땅이 오그라들어 더 이상 물이 스며들지 않습니다. (119쪽)


간혹 반듯반듯한 현대적인 농경지를 방문할 때가 있습니다. 멀리서부터 살충제 냄새가 코끝을 찌릅니다. 흙을 집어 코끝에 갖다 대면 흙에서 악취가 나죠 … 우리는 우리 땅과 마을에서 쓰던 사투리를 점점 잃어 가고 있습니다.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건 우리 땅과 우리 삶이 단절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투리를 되찾는 것은 ‘금문교’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126, 308쪽)




  풀밭이 없으면 들꽃이 피지 않습니다. 들꽃이 피지 않으면 벌이나 벌레나 나비가 살지 못합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셔요. 들꽃이 없는데 벌은 어디에서 꽃가루를 모아서 ‘꿀’을 빚을 수 있을까요? 설탕을 먹여서 빚는 꿀이면 될까요? 벌이 들꽃에서 모은 꽃가루가 아니라, 설탕으로 쟁여서 만드는 꿀이 되어도, 이러한 꿀을 꿀이라고 할 만할까요?


  감자와 고구마조차 비닐집에서 키워서 때도 철도 없이 아무 때나 먹어도 될는지요? 한겨울에 비닐집에서 석유로 난로를 때서 키우는 딸기를 아직 봄도 안 된 철에 먹어야 맛있을는지요?


  우리는 무슨 짓을 하는 셈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먹는 셈일까요? 능금이나 배나 복숭아나 포도를 먹는가요, 아니면 비료와 농약과 항생제를 먹는가요? 햇볕과 비와 바람과 흙이 베푸는 기운으로 자란 능금이나 배나 복숭아나 포도가 아니라, 비료랑 농약이랑 항생제로 자란 능금이나 배나 복숭아나 포도를 먹으면 우리 몸에 무슨 이바지를 할까요?


  빗물이 아닌 수돗물을 마시며 자라는 벼를 쌀로 깎아서 지어 먹는 밥이 우리 몸을 살찌울 수 있을까요? 빗물도 못 마시고 햇볕도 못 쬐며 바람 한 줄기조차 모르는 채 비닐집에서 아무 때나 척척 나오는 애호박이나 상추나 오이나 가지나 토마토를 먹는 몸은 얼마나 튼튼하거나 씩씩할 수 있을까요?



농촌 사람들은 밭에서 일하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 요즘 젊은 농부들은 여유도 없고 자유도 없습니다. 온갖 서류와 장려금에 얽매여 있습니다. (155, 303쪽)


장담하건대 땅은, 대지는 어린이들에 의해 꾸준히 보전될 것입니다. (165쪽)



  아이들은 맨발로 놀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맨발로 흙을 밟으며 놀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맨발로 풀밭에서 뒹굴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맨발로 나무를 타며 놀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쇠붙이와 플라스틱과 합성수지를 써서 만든 놀이터에 아이들을 내몰기만 합니다. 어른들은 골목을 아이들한테 빼앗고는 ‘돈 내고 들어가야 하는 놀이시설’에 아이들을 한꺼번에 집어넣고 빽빽 소리만 지리도록 시킵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연날리기는 할 줄 모르지만 학원을 다닐 줄 압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팽이를 깎을 줄 모르지만 학교를 다닐 줄 압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빗물을 혀로 받아서 마실 줄 모르지만 손전화를 다룰 줄 압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풀벌레 노랫소리를 귀여겨들을 줄 모르지만 대중노래와 광고노래를 똑같이 따라할 줄 압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구름을 올려다볼 줄 모르지만 찻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를 가려낼 줄 압니다.



자동덧문을 산다고 해서 무슨 즐거움이 있을까요? 편리함은 보장할 수 있겠지만 행복까지 보장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182쪽)


풀도 꽃도 먹지 않는 가축이 싸는 똥과 오줌에서는 더 이상 자연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197쪽)


시골에 살면 알러지라는 것은 전혀 생기질 않아. 오히려 각종 면역력이 생기지. (206쪽)




  어른들은 무슨 일을 하느라 바쁠는지 궁금합니다. 어른들은 어른들 스스로 삶이 즐거운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을 ‘학습지 인생’과 ‘학원 인생’으로 길들여서 ‘대입수험생 인생’으로 내모는 어른들은 아이를 낳아 돌보는 보람을 얼마나 누릴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내 집 장만’이 아니라 ‘마당하고 텃밭이 있는 우리 집 장만’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 차 장만’이 아니라 ‘아이도 어른도 맨발로 마음껏 뛰고 달리면서 놀거나 일할 수 있는 숲 장만’부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파트가 없어도 죽지 않습니다. 자동차가 없어도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논밭이 없으면 죽기 마련이고, 숲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논밭이 있더라도 숲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어요. 왜 그러한가 하면, 숲이 있어야 나무를 얻고, 나무를 얻어야 집을 짓고 땔감을 얻으며, 숲에서 나무가 자라야 비로소 한 해 내내 싱그러운 바람을 마실 수 있습니다.



공장이 들어선 곳은 앞으로 사람이 먹는 음식을 경작할 수 없는 땅이 될 것입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 이 세상에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 땅에 관심을 가져 주세요.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이 방사능을 비롯한 각종 오염 없는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 주세요. (234, 236쪽)


가치가 있건 없건 상관이 없습니다. 장소가 그 가치를 높여 주는 것입니다 … 우리 조상들에게 하늘은 닿을 수 없이 높고 푸르렀으며, 우리 아름다운 자연은 전쟁의 아픔도, 상처도 잊게 할 만큼 아주 아름다웠던 게지요. (255, 270쪽)



  아이는 ‘숲사람’으로 자라야 아름답습니다. 어른은 ‘숲사람’으로 슬기롭게 살림을 가꾸어야 사랑스럽습니다. 아이는 어버이와 어른한테서 숲사람 슬기를 사랑으로 물려받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어버이와 어른은 아이한테 숲사람다운 살림살이를 곱게 물려줄 수 있을 때에 사랑스럽습니다.


  먼 옛날부터 어버이는 아이한테 ‘숲을 이룬 집과 논밭’을 물려주었습니다. 먼 옛날부터 아이는 어버이가 물려준 ‘숲을 이룬 집과 논밭’을 물려받으면서 한결 기름지고 푸르게 돌보았습니다.


  어버이와 아이가 ‘숲을 이룬 집과 논밭’을 물려주고 물려받던 수십만 해에 이르는 사람 역사에서는 전쟁이나 싸움은 끼어들지 않았어요. 권력자가 나타나고 정치기가 불거지며 문화와 전문가와 사회와 경제 따위가 생기면서 ‘숲을 이룬 집과 논밭’을 망가뜨리거나 흔드는 무리가 커졌고 전쟁과 싸움도 터집니다.


  프랑스 시골지기 폴 베델 님은 《농부로 사는 즐거움》을 이야기하면서 프랑스 어린이하고 젊은이한테 꿈과 사랑을 물려주고자 합니다. 이 나라 시골지기는 이 나라 어린이하고 젊은이한테 무엇을 물려줄 만할까요. 이 나라 지식인과 전문가는 이 나라 어린이하고 젊은이한테 무엇을 물려줄 생각일까요. 이 나라 모든 어른과 어버이는 이 나라 어린이하고 젊은이한테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요. 4348.9.13.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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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무도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았나 - 신혜정 시인의 대한민국 원자력발전소 기행
신혜정 지음 / 호미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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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28



‘원전’이 얼마나 비싸고 무서운지 누가 알까?

― 왜 아무도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았나

 신혜정 글

 호미 펴냄, 2015.6.10. 12000원



  모기를 잡으려고 뿌리는 모기약은 모기를 잡고, 나비와 벌을 함께 잡습니다. 논이나 밭에 치는 농약은 나락이나 남새만 살리려고 뿌리는데, 나락이나 남새는 살린다고 하되 온갖 풀벌레와 개구리를 죽이고, 갖은 들새까지 모조리 죽입니다.


  그런데, 모기약이나 농약이 우리 삶터를 어떻게 일그러뜨리는가를 다루는 교과서는 제대로 없습니다. 모기가 있으면 모기약을 뿌리고, 파리가 있으면 파리약을 뿌리며, 바퀴벌레가 있으면 바퀴벌레약을 뿌려요. 이러한 약을 뿌릴 적마다 사람이 마시는 바람이 얼마나 망가지는가를 아무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더군다가 다 쓴 빈 깡통이나 농약병은 어떻게 될까요?


  시골 논도랑이나 길가를 보면 빈 모기약병이나 농약병이 어지러이 뒹굽니다. 비가 오면 다른 곳으로 쓸려갑니다. 아마 거의 모두 바다로 갈 테지요. 한국에서 버린 쓰레기는 바다를 타고 일본이나 태평양으로 갑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버리는 쓰레기는 몽땅 바다 건너 한국으로 옵니다.



내가 발견한 원자력발전의 모든 과정은 한마디로 ‘차별’이었다. (29쪽)


그러나 자연은 길 위에 선 자의 마음을 너그럽게 풀어 주었다. 나는 천천히 풍경을 느끼고 싶어 속도를 늦췄다. 높고 낮은 능선들이, 잔잔한 바람이 나뭇결을 스치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33쪽)



  시인 신혜정 님이 쓴 《왜 아무도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았나》(호미,2015)라는 책을 읽습니다. 도톰한 듯하면서도 작고 가벼운 이 책은 “왜 아무도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았나?” 하고 물으면서 여행길에 나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여행길인가 하면 ‘원전 여행’입니다. ‘핵발전소 여행’이에요.


  사회에서는 ‘원전(원자력발전소)’하고 ‘핵발전소’라는 두 가지 이름을 섞어서 쓰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이 이름이 아니라 참말 ‘원자력’을 쓴다고 하는 ‘핵’이란 무엇인가를 알지 않고서 이름만 따지는 일이란 덧없기 때문입니다.


  시인 신혜정 님은 수수께끼를 풀려고 ‘국도 7번’을 따라서 여행을 합니다. 아름답다고 하는 국도 7번이 아닌, 무시무시하고 끔찍끔찍한 핵발전소가 가득한 ‘국도 7번’을 달리면서 여행을 합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원자력발전소는 해안가에 건설되었다. 전력 수요가 많지 않은 작은 어촌 마을에서 대단위 전력을 생산하여 멀리 떨어진 도시로 보내는 것은 언뜻 보아도 효율적이지 않다. (36쪽)


핵에너지가 상용화되지 못한 이유를 간단히 말하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핵분열에서 생성되는 폐기물은 방사능 덩어리인,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죽음의 재’이기 때문이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 인류는 이를 효율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 (37쪽)



  교과서와 정부는 원자력발전소로 얻는 전기가 깨끗하며 값싸다고 으레 외칩니다. 그렇지만 계산서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계산서는 안 보여주면서 깨끗하면서 값싸다고 외쳐요.


  그런데, 깨끗한 전기를 얻는다는 핵연료 전기인데 송전탑을 어마어마하게 박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이 나라 멧봉우리마다 ‘쇠말뚝’을 박은 짓이 나쁘다고들 목소리를 높이던 때가 그리 멀잖은 옛날 같은데, 한겨레 스스로 이 나라 곳곳에 ‘일제강점기 쇠말뚝’은 우습지도 않은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송전탑’을 끝없이 박고 또 박습니다.


  이러면서 정부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마을이나 마을사람한테 보상을 해 주지도 않아요. 다만, 홍보를 합니다.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은 해마다 ‘깨끗한 원전’을 홍보하느라 100억 원이 넘는 돈을 쓴다고 해요.



핵발전의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한국원자력문화재단에서는 해마다 홍보비로 100억 원이 넘는 비용을 지출한다 … 홍보의 핵심 내용은 바로 원자력발전은 깨끗하고 안전하다는 것인데, 곰곰 헤아려 보자니 더럽고 위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100억 원이 넘는 자금을 들여 ‘깨끗한 원전’을 홍보하고 있을까. (39쪽)


한전이 보상을 비현실적으로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제대로 보상을 하면 765킬로볼트 송전선로는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가서 그 자체로 타당성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0쪽)




  시인 신혜정 님은 ‘원전 여행’을 하면서 원자력발전소에 들어가 보기도 합니다. 빛도 그늘도 없는 원자력발전소에 ‘미리 마련된 옷’을 갖추어 입고서 들어가 보는데, 이동안 귀를 찌링찌링 울리는 소리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밖으로 나온 뒤에 큰숨이 절로 나왔다는데, 이러면서 “창문 없는 밀실에서 3교대로 일을 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81쪽).” 하고 말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비정규직 사회’입니다. 원자력발전소도 똑같아요. 정규직은 ‘원전에서 더 안전한 곳’에서 일하고, 비정규직은 ‘원전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서 일한다고 합니다.


  문득 책을 덮고 돌아봅니다. 교과서에서 이런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들려줄까요? 핵연료로 얻는 전기가 ‘깨끗하다’고 홍보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한테 알려줄까요?



폐쇄된 전 세계 원자력발전소의 평균 수명은 22년이다. (95쪽)


2005년 한수원에서는 고리 1호기의 폐로 비용을 약 1억 8800만 달러로 추산했다. 환율을 1200원으로 계산하면 2천억 원이 넘는 금액이다. (98쪽)


원자로 돔이 보이는 마을에서 그 지역의 특산품을 먹었다. 미역과 물가자미, 산나물과 유기농 채소까지. 은연중에 방사능 피해를 생각했던 나 자신을 나직이 꾸짖은 시간이었다. 나는 그 음식들을 먹으면서 핵을 안고 사는 주민들의 마음을 몸으로 느꼈다. (101쪽)



  원자력발전소 평균 수명이 고작 스물두 해라고 하지만, 한국은 이 평균 수명을 훌쩍 넘기면서 돌린다고 합니다. 위험을 무릅쓴 짓일 텐데, 한국은 왜 이런 위험한 짓을 할까요? 바로 돈 때문입니다. 고작 스물두 해를 돌려서 ‘폐로 비용’으로만 2천억 원이 넘는 돈을 써야 하는데, 이 돈으로 ‘폐로를 마무리짓지’도 못합니다. 방사능이 수십만 해 동안 못 새어나오게 지켜보아야 하니까, 2천억 원이라는 돈은 어림도 없지요.


  그러면 한국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셈일까요? 엄청난 돈을 들여서 짓고, 또 엄청난 돈을 들여서 방사능폐기물 처리장을 지어야 하며, 다시 엄청난 돈을 들여서 ‘폐로’를 해야 하는 원자력발전소인데, 왜 이런 ‘돈 먹는 도깨비’가 ‘깨끗하다’고 하면서 해마다 100억 원이 넘는 돈을 다시 쏟아부어야 할까요? 오직 건설회사 밥그릇만 불려 줄 듯한, 이러면서 정치권력자 기득권만 단단하게 할 듯한, 원자력과 핵을 왜 자꾸 붙들려고 할까요?



원전 지역의 주민들이 살기 위해 핵의 위험성을 습득해 나가는 동안, 국가권력은 원자력발전이 주는 경제적 효과에 대해 계산기를 두드렸다. (110쪽)


“앞바다엔 고기가 없다”, “이제 열대 어종도 보인다”, “옛날엔 멸치가 떼로 올라왔는데 이젠 안 잡힌다”, “바로 앞에서 잡히던 굴비도 이제 멀리 나가야 잡힌다” 원전 지역을 돌며 온배수에 대해 물을 때마다 돌아오는 답변의 내용은 이랬다. 이론적 가능성을 지역민들은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127쪽)




  시골마을 어르신은 이녁이 젊을 적에 농약이나 비료나 비닐이 앞으로 흙을 어떻게 망가뜨리는가 하는 대목을 한 번도 배우거나 들은 적이 없습니다. 시골마을 어르신은 이녁이 젊을 적이든 요즈막이든 ‘석면(슬레트) 지붕’이 얼마나 몸에 나쁘거나 무서운가 하는 이야기를 한 번도 배우거나 들은 적이 없습니다.


  새마을운동 바람은 그저 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개를 숙이도록 하면서 분 새마을운동 바람입니다. 그냥 석면 지붕으로 올려야 했습니다. 마을길을 그냥 시멘트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숲정이를 그냥 베어서 없애야 했습니다. 물길 흐름에 따라 다 다른 모습으로 짓던 논밭을 그냥 반듯하게 펴야 했습니다. 양수기가 없어도 물길 흐름에 따라 골고루 물이 돌던 옛 논밭이지만, 억지로 삽차가 들어가서 반듯하게 편 뒤에는 양수기 없이는 논밭에 물을 못 댑니다. 요새는 ‘시골 복지’라는 이름을 내건 토목건설이 한창인데, 논도랑을 시멘트도랑으로 바꾸어요. 흙으로 된 도랑을 시멘트로 바꾸면 어떻게 되는가를 아는 군청 일꾼도 없고 건설회사 일꾼도 없습니다. 시골 농사꾼도 이를 모릅니다. 나라에서 돈을 대어 이렇게 해 주니까 ‘복지’로구나 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참말 아무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아무도 ‘참거짓’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알아내려고 하지 않으면 참거짓을 알 수 없습니다. ‘석면 지붕’으로 바꾸도록 농사꾼을 들볶은 짓을 뉘우친 정치꾼이나 공무원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시멘트도랑’은 앞으로 스무 해쯤 뒤에 크게 말썽거리가 될 테지요. 물이 늘 흐르는 시멘트도랑은 머잖아 삭아서 논마다 시멘트조각이 처박힐 텐데, 이 말썽거리를 어떻게 풀어야 할는지 아는 정치꾼이나 과학자나 기술자나 전문가는 아무도 없을 테지요.



누군가는 말한다. 원전의 위험성이 과장되어 있다고. 반대로 원전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말한다. 그렇게 안전하면 서울에 핵발전소를 지으시라고. (130쪽)


공교롭게도 우리나라 정부는 스리마일과 체로노빌에 더해 후쿠시마 사고까지 점점 더 강력해지는 핵 참사가 발생할 때도 꾸준히 원전 신규 후보지를 발표하고 또 확정지었다. (151쪽)




  ‘원전’이 얼마나 비싸고 무서운지 누가 알까요? 어쩌면 한국전력 공무원조차 모르는 일은 아닐까요? 그들 스스로 아무도 모르니까 ‘깨끗한 원전’만 홍보하지 않을까요?


  아는 사람은 벌써 다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알 길이 없어서 모두 모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일이라는 나라는 유럽에서 볕이 안 들기로 손꼽히는 나라인데, 얼마 앞서부터 독일에서는 ‘여느 살림집과 건물 옥상’에 붙인 햇볕전지판으로 ‘독일 전체 전기수요 50% 넘게’ 얻는다고 합니다. ‘대형 햇볕발전소’가 아니라, 그냥 여느 살림집하고 건물 옥상에 붙인 전지판만으로 말이지요. 독일에서는 아직 모든 집과 건물 옥상에 다 붙이지 못했을 테니까, 모든 집과 건물 옥상에 전지판을 다 붙이면, 독일에서는 ‘거짓말 아닌 참말로 깨끗한 전기를 100% 자급’하고도 남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데에 들인 돈은 그야말로 얼마 안 됩니다.


  한국에서는 무엇을 할까요? 해마다 100억 원이라는 돈을 어디에 쓸까요? 송전탑 하나 세우는 데에 드는 돈은 얼마일까요? 원전 한 기를 짓는 돈이나 폐로를 하는 데에 드는 돈은 얼마일까요? 시설유지비와 인건비는 얼마일까요?



영덕의 바다에 처음 닿았을 때, 나는 블루 로드라는 말을 그대로 느꼈다. 물빛이 참 예뻤다. 해안선을 따라 쭉 내려갔는데 지역마다 물빛이 달랐다. 영덕은 제주도에서 본 바다와 비슷한 에메랄드빛을 띠면서도 동시에 동해의 깊고 푸른빛이 감돌았다. (159쪽)


독일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 90퍼센트는 가정과 기업, 건물 옥상에 설치되어 있다(이 태양광 패널로 독일 전기 수요 50%가 넘는 전기를 얻는다). (186쪽)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정치권력자가 알려주지 않으면 스스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참말 알아야 합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머리띠를 질끈 둘러매고 밤새우며 공부하듯이 알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 빨리 알아야 합니다. 참을 알고 거짓을 알아야 합니다. 거짓말쟁이는 참을 알려주지 않아요. 거짓말쟁이가 참을 털어놓을 때까지 기다리시렵니까? 거짓말쟁이는 죽음을 앞두고 참을 털어놓기도 하지만, 웬만한 거짓말쟁이는 죽을 때까지도 거짓말만 합니다. 거짓말쟁이는 언제나 스스로 무서워하니까 거짓말만 하거든요.



서해안에 밀집한 대형 화력발전단지에서도 그 고통은 때마다 불거져 나온다. 원전이 잠식한 우리 사회의 대형화 바람은 지역을 식민화했다. 그리고 중앙은 지방을 식민지화했다. 지역의 이러한 고통 없이 이 사회는 온전할 수 있을 것인가? (189쪽)



  그리고, 시인 신혜정 님이 《왜 아무도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았나》라는 책에서 밝히듯이, ‘시골(지역)을 식민지로 삼은 도시(대형화)’라는 얼거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부끄러워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는 99%가 도시에 몰려서 살아야. 이 대목을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도시에서는 논도 밭도 없고, 도시에서는 맑은 시냇물도 골짜기도 없는 줄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시골이 없으면 도시는 모두 굶어야 하고, 배기가스에 갇힌 채 기침만 해야 합니다.


  시골(지역)을 식민지로 삼아서 온갖 공장과 골프장과 고속도로와 고속철도와 발전소와 쓰레기매립지에다가 대형축사까지 몽땅 몰아세우는 짓을 이제는 그쳐야 하는 줄 깨달아야 합니다. 도시 한복판에 누가 대형송전탑을 박을까요? 그 따위 짓은 아무도 안 하지요. 그런데 왜 시골마을 한복판에는 대형송전탑을 박을까요? 시골을 식민지로 삼은 도시 사회 얼거리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아픈 이웃’이 어떻게 아픈지 제대로 읽어야 원전 실마리를 풉니다. 이 나라에서 ‘슬픈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길을 제대로 찾아야 ‘전기 자급’을 비롯해서 모든 아름다운 길을 새롭게 열 수 있습니다. 4348.9.8.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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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5-09-08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안타깝습니다ㅜㅜ

숲노래 2015-09-08 18:56   좋아요 0 | URL
우리 모두 뜻있는 삶을 바라보면서
대형발전소 아닌
옥상 전지판으로 가는
슬기로운 길만 생각해도
엄청난 돈이 엉뚱한 데로 새어 나가는 일이
없으리라 느껴요..
 
인간과 말 봄날의책 세계산문선
막스 피카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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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27



토박이말, 우리말, 국어, 한국말, 숲말

― 인간과 말

 막스 피카르트 글

 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펴냄, 2013.6.24. 13000원



  내가 쓰는 말은 나를 낳은 어버이가 물려준 말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은 우리를 저마다 낳은 다 다른 어버이가 다 다른 우리한테 물려준 말입니다. 그래서, 고장마다 말이 달라 ‘고장말’이 있습니다. 커다란 고장에는 작은 고을이 있으니, 작은 고을에서는 ‘고을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을은 작은 마을이 모여서 이루어지니, ‘마을말’이 있습니다. 마을에서도 집집마다 다 다른 삶이기에, 다 다른 ‘집말’이 있습니다. 내가 쓰는 말은 바로 ‘집말’이 바탕입니다. 내가 태어난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쓰는 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쓰는 말, 언니가 쓰는 말, 이러한 집말이 맨 밑바탕입니다. 이 밑바탕인 집말에 마을말이 스며듭니다. 집말과 마을말이 어우러진 자리에 고을말이 깃듭니다. 집말과 마을말과 고을말이 어우러지는 곳에 고장말이 찾아들지요. 마지막으로 ‘한 나라에서 표준으로 삼는 말’이 ‘내가 쓰는 말’에 젖어듭니다.



인간의 기본구조에 속하는 모든 요소는 앞서 주어진 것이다. 인간이 그것을 취하여 사용하기 이전인 태초부터 이미 인간을 위해 마련되어 있었다 … 인간이 말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언어는 인간 속에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간은 처음부터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16쪽)



  얼마 앞서까지 사람들은 그저 ‘말’을 했습니다. 얼마 앞서까지 사람들은 제 보금자리나 마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제 보금자리나 마을을 떠났을까요? 요즈막에는 ‘더 나은 사회 환경이나 교육 환경이나 문화 환경’을 따져서 보금자리나 마을을 떠납니다. 1970∼80년대는 새마을운동 바람이 모질게 불어서 보금자리나 마을을 떠나도록 부추겼습니다. 1960∼70년대에는 산업화와 공업화를 내세우는 경제발전 정책이 보금자리나 마을을 떠나도록 내몰았어요. 1950년대에는 전쟁이 보금자리와 마을을 떠나도록 떠밀었지요. 1800년대 끝무렵부터 1940년대까지는 일본 제국주의 군홧발이 휘두르는 식민지 정책이 보금자리와 마을을 떠나도록 들볶았어요.


  사람들이 제 보금자리와 마을을 떠나야 하는 때부터 말이 흔들립니다. 사람들이 먼먼 옛날부터 손수 집을 짓고 마을을 가꾸며 살림을 지을 적에는 모든 곳에서 ‘제삶짓기(자급자족)’를 했습니다. 가까이 1980년대 무렵까지도 깊은 두멧시골 작은 마을 사람들은 굳이 면소재지나 읍내에 볼일을 보러 다니지도 않으면서 언제나 손수 지은 흙에서 손수 거두는 밥을 먹었어요. 기껏해야 호박알을 내다 팔아 고무신 한 켤레쯤 장만했을 테지요. 닭 한 마리 내다 팔아 손자한테 초코파이를 사 주었을 테지요(영화 〈집으로〉에 나오듯이).



의사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선에서 그치고 마는 인공언어는 인간을 최소한의 세계, 축약된 세계로 이끌게 되며 그로 인해 인간 자체를 최소한의, 축약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27쪽)



  막스 피카르트 님이 빚은 이야기책 《인간과 말》(봄날의책,2013)을 읽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사람하고 말이 어떻게 이어지는가 하는 대목을 곰곰이 돌아보면서 빚은 이야기가 흐르는 책입니다. 사람이 지은 말이 삶을 빚고, 말은 새롭게 사람을 가꾸며,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말을 새삼스레 빚으며, 새삼스레 태어난 말은 더욱 눈부시게 삶을 가꾸는 얼거리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차근차근 짚는 《인간과 말》입니다.


  한국에서 국어학자는 어원 연구도 하고 문법 연구도 합니다. 그런데 몇 가지 낱말을 놓고 말밑(어원)을 살피거나 밝힌다 한들 거의 모두 덧없기 마련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국어학자는 거의 다 ‘옛책에 남은 글’을 바탕으로 말밑을 살피기 때문입니다.


  아직 어느 국어학자도 ‘말’이라는 말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못 밝힙니다. ‘밥’이나 ‘집’이나 ‘옷’이라는 말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아무도 못 밝힙니다. ‘해’와 ‘하얗다’를 같이 놓고 살핀다 한들, ‘하얗다’를 누가 언제부터 썼는지 아무도 알지 못해요. ‘먹다’라든지 ‘보다’라는 낱말을 언제부터 누가 썼을까요? 쑥은 왜 ‘쑥’이고, 마늘은 왜 ‘마늘’일까요? 감나무는 왜 ‘감’이고, 배나무는 왜 ‘배’일까요? ‘일’이나 ‘노래’는 무엇이며, ‘두레’나 ‘나락’은 무엇일까요? ‘씨앗’이나 ‘꽃’이나 ‘풀’이나 ‘나무’는 그야말로 언제부터 누가 지어서 썼을까요?



소리가 정신에 복무하는 것에 대한 보상인 양, 정신은 소리에게 정신처럼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선사한다. 그로 인하여 소리는 소리 이상의 것이 된다. 즉 소리는 음악이 될 수가 있다. (60∼61쪽)



  한국에서는 한국사람이 쓰는 말을 놓고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곤 합니다. 이른바 개화기라고 하는 때까지는 그저 ‘말’이라고만 했습니다. 이 땅에 사람이 처음 나타나서 삶을 지을 무렵부터 1800년대 끝무렵까지는 그냥 ‘말’이었습니다. ‘우리말(또는 우리 말)’이라고 하는 이름은 왜 태어났을까요? 이 땅에 아프고 슬픈 발자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총칼을 앞세운 제국주의 권력 때문에 모질게 아프고 더없이 괴롭도록 슬픈 나날을 보내던 이 나라 사람들은 ‘우리 삶(이 나라)’을 지키고자 ‘우리말’을 외쳤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쓰던 말을 되찾고 일본말을 몰아내고자 독립운동을 하며 ‘우리말’이라는 이름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목숨을 바치는 독립운동은 아주 오랫동안 펼쳐야 했고, 이동안 아주 많은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일본 한자말이나 일본 말투에 젖어들었어요. 해방이 되었어도 제 말을 제대로 찾은 사람이 몹시 드뭅니다. 이리하여 ‘토박이말’을 찾자는 물결이 일어납니다. 나라도 되찾았는데 왜 말을 되찾지 못하느냐고 하는 몸부림이라고 할 만합니다.


  게다가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 권력자는 ‘국어’라는 말을 바보스레 퍼뜨렸어요. 중국에서는 ‘중국말(중국어)’이었고, 조선(아직 한국이 아닌 조선)에서는 ‘조선말(조선어)’으며, 일본에서는 ‘일본말(일본어)’이었는데, 일본 제국주의 권력자는 ‘아시아는 이제 천황 폐하를 섬기는 나라가 되어야 하고, 천황 폐하를 섬기는 백성(국민)은, 천황 폐하를 받드는 말(국어)’을 쓰도록 교육칙어라는 것을 내리지요. ‘국어’는 ‘국민’이 쓰는 말이에요. ‘국민’은 바로 ‘천황폐하를 섬기는 나라에서 사는 사람’이고, ‘국어’도 바로 이러한 얼거리입니다. 그래서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초등학교’로 바꾸자고 하는 물결이 일었고, 이 물결은 ‘민주가 아니었던 정부’하고 오랫동안 싸운 끝에 비로소 학교 이름에서는 ‘국민’을 몰아냈습니다. 다만, 학교 이름은 ‘초등학교’가 되었어도, 아직까지 정치꾼들은 ‘국민 여러분’을 외칩니다. 신문사 가운데에도 ‘국민’을 이름으로 쓰는 곳이 아직 있지요. 다들 한겨레 발자국을 너무 모르거나 아예 생각을 안 하니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언어가 단순한 상징이라면, 인간에게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82쪽)


언어는 그런 급격함을 원하지 않는다. 정신의 변화 속도와 언어의 표현 능력 사이의 괴리가 너무나 커서 언어는 감히 변화를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때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말없는 비명이나 침묵뿐이다. (134쪽)



  막스 피카르트 님은 《인간과 말》이라는 책에서 스물한 가지 갈래를 지어서 ‘사람과 말 사이에 얽힌 수수께끼’를 천천히 풉니다. 갈래는 스물한 가지로 지었으나, 첫 갈래부터 마지막 갈래에 이르기까지 모두 ‘같은 이야기’입니다. 조금씩 말투를 바꾸었을 뿐, 한결같이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수수께끼를 풀어냅니다.


  막스 피카르트 님은 우리 마음속에 ‘말’이 없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 사랑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마지막으로, 우리 마음속에 ‘시(노래)’가 없다면 아무 시(노래)도 부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스도가 사물의 이름을 부르면서 사물은 상승하였고, 저절로 시적인 존재가 되었다. 아이의 영혼은 그림으로 충만하다. 그래서 아이의 영혼은 수줍어한다. (207쪽)



  모든 말은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모든 말이 우리 마음속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모든 말을 몽땅 처음부터 새로 배워야 합니다.


  누구나 아기로 태어나서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말을 새롭게 배우니, 언뜻 보자면 ‘모든 말을 몽땅 처음부터 새로 배운다’는 대목이 맞다고 여길 수 있겠지요. 그러나, 어떤 아기도 ‘모든 말을 몽땅 처음부터 새로 배우’지 않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르는 대로 말을 하나씩 배우는 듯하지만, 아기 마음속에 ‘그 말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아기는 ‘그 말을 압’니다. ‘그 말’이 마음속에 없는 아기는 끝끝내 말을 못 배웁니다.


  어른 사이에서도 이와 같아요.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고 하지만, 정작 서로 ‘들려주는 말’을 못 알아듣기 일쑤입니다. 낱말만 떼어놓고 보자면, ‘모두 아는 낱말’일 테지만, 다 아는 낱말을 엮은 ‘말’을 주고받는 ‘의사소통’을 하는데 두 사람은 아주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다른 뜻을 헤아려요. 아주 쉬운 말을 나누었다고 하지만, 서로 엉뚱하게 생각한 나머지, 그만 다툼이 생겨요. ‘의사소통’만 생각하는 말은 으레 ‘시시비비’가 붙고 ‘토론’이 붙다가 그만 ‘싸움박질’로까지 나아가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그 말’이 서로서로 마음속에 없으면, ‘지식으로는 안다고 여기는 낱말’이 있어도, ‘그 말이 들려주려는 뜻’을 서로서로 알 수 없다는 소리입니다. 서로서로 ‘그 말’이 마음속에 있을 때에는 말없이 빙그레 웃으면서 한마음이 되지만, ‘그 말’이 마음속에 없을 때에는 천 마디나 만 마디 말을 주고받아도 그저 마음만 다치면서 틈이 벌어지고 싸울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말을 의사소통을 하려는 뜻으로만 쓸 수 없어요. 의사소통만 해야 한다면 이진법 기호나 숫자만 쓰면 되겠지요. 사람이 ‘말’을 하는 까닭은 의사소통만 하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마음속에 품은 말’을 새롭게 가꾸거나 빚으면서 주고받으려고 하는 까닭은 ‘삶을 새롭게 지어서’ 하루를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국사람으로서 애먼 일본 말투나 일본 한자말을 털어낸다든지, 지식자랑처럼 영어를 함부로 쓰지 말자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더 나은 의사소통’ 때문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스스로 제대로 그려서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삶’으로 나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모든 말을 매번 원천으로부터 새로이 퍼올려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신의 흔적에 가까이 있다. 원초적 말에는 신의 흔적이 더욱 선명하므로, 그것이 시인이 얻는 은총이다. (225쪽)



  이제 한국사람한테는 ‘한국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도 국어도 토박이말도 아닌 ‘한국말’이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는 이주노동자나 ‘이주며느리’가 무척 많습니다. 이주노동자나 이주며느리는 한국사람일까요 아닐까요? 한국사람이지요. 한국말은 무엇일까요? ‘한 가지 핏줄기 한겨레’만 쓰는 한국말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함께 살며 서로 아끼는 사람들이 쓰는 한국말입니다.


  한때 ‘토박이말 찾기 바람’이 불었으나, 이 바람은 이내 가라앉았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토박이말’에서 ‘토박이’는 ‘한자 + 한국말’ 얼거리인데, ‘土’는 “흙”이에요. ‘토박이’란 ‘흙박이’입니다. 흙박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시골박이’입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가꾸고 흙을 먹는 삶을 짓는 사람이 쓰는 말이 ‘시골박이말’이고 ‘흙박이말’이며 ‘토박이말’입니다. 그러니까, ‘시골말’이자 ‘흙말’을 두고 ‘토박이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토박이말 찾기 바람’을 일으킨 분들은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살지 않았어요. ‘토박이말 찾기 바람’은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만 불었어요. 마땅한 노릇인데, 시골사람은 그저 예부터 시골말을 썼으니 이런 바람이 불 까닭이 없었어요. 도시에서만 신문과 방송과 책과 학교에서 ‘토박이말 찾기 바람’이 불었고, 도시에서도 사무직이나 전문직으로 일하는 사람이 이 바람을 일으켰지요. 흙이나 시골을 모르거나 등진 채 지식으로만 ‘깨끗한 토박이말을 찾아서 쓰자’고 하니, 이러한 시골말(흙말)은 다른 이웃인 도시사람한테는 너무 어렵습니다. 마치 외국말처럼 모두 새로 외워야 하는 말이 되었어요. 시골(흙)하고 동떨어진 사람들이 지식논쟁으로만 ‘토박이말 찾기’를 따지는 일은 너무 부질없기 때문에, 이 바람은 얼마 못 가서 어영부영 잠들었어요.



언어는 언어를 말하는 당사자의 의지를 넘어서 그 이상을 창출한다. (19쪽)



  나는 시골에서 곁님이랑 아이들하고 살면서 말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오늘은 시골에서 살지만, 나를 낳은 어버이는 도시에서 나를 낳았습니다. 나는 서른 살까지 도시에서 살았고, 서른을 넘은 뒤부터 차츰 시골에서 일하고 지내다가 아예 시골에 눌러앉았습니다. 내가 쓰는 말은 아직 ‘시골말(흙말)’이 아닙니다. ‘도시말 티를 조금씩 걷어내는 시골말’로 나아갑니다.


  시골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도록 하면서 아이들하고 ‘말을 섞는’ 동안, 아이들이 어버이한테서 어떤 말을 배우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사랑말’을 배우려 합니다. 어버이가 아이를 따스하게 아끼면서 보살피려고 하는 말을 기쁘게 웃으면서 배운 뒤, 새롭게 노래하면서 온몸으로 익히려고 해요. 이 모든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다가 한 가지를 새삼스레 알아차립니다. 사람은 이 지구별에서 다 다른 겨레나 나라를 이루면서 태어납니다. 다 다른 겨레나 나라는 다 다른 말을 씁니다. 어느 겨레나 나라에서도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제삶짓기(자급자족)를 하던 사람들은 책이나 글이나 학교 없이 어머니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쳤습니다. 온누리 모든 어머니는 바로 이녘 마음결이 책과 글이 되었습니다.


  어떤 어머니도 아이한테 어원이나 문법을 안 가르칩니다. 어떤 어머니도 아이한테 그저 말을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어머니한테서 어원이나 문법이 아닌 ‘말’만 배우는데, 이 말은 언제나 ‘사랑말’이요 ‘꿈말’이며 ‘기쁨말’인데다가 ‘노래말(노랫말)’입니다.



인간은 앞서 주어진 사랑으로 사랑을 한다. 그는 사랑하기 이전에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모든 “앞선” 것과 “나중” 것은 사랑 안에서 나란히 있다. (38쪽)



  어머니가 아이한테 물려주는 말은, 어머니가 아이한테 물리는 젖이 ‘어머니젖’이듯이 ‘어머니말’입니다. 그리고 온누리 모든 겨레와 나라는 저마다 다른 ‘숲’을 이루면서 ‘숲’을 가꾸고 돌보아요. 제삶짓기를 하는 사람들은 들도 일구지만, 들만 일구지 않고 숲에 깃들어 작은 보금자리와 작은 마을을 사랑하면서 살지요.


  지구별 모든 사람들은 전쟁무기 아닌 평화와 사랑으로 아주 오랫동안 삶을 지었습니다. 오직 평화와 사랑으로 삶을 지은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나서 자랄 곳이 ‘숲’이어야 하는 줄 몸과 마음으로 압니다. 그러니까, 이 지구별에서 다 다른 겨레와 나라는 ‘다 다르면서 새로운 숲말’을 쓴 셈입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에서 한국다운 ‘숲말’을 쓰고, 일본사람은 일본에서 일본다운 ‘숲말’을 쓰지요.


  숲말을 물려주거나 물려받는 어버이와 아이는 책이나 글이 없어도 됩니다. 아니, 숲말을 배울 적에는 책이 덧없지요. 오직 삶으로 배우는 숲말입니다. 밥짓기와 옷짓기와 집짓기는 책으로 안 배워요. 언제나 삶으로만 배웁니다. 사랑을 책으로 배우는 사람은 없어요. 꿈을 책으로 배울 수 없어요. 모두 삶으로 배웁니다.


  삶으로 배우는 숲말이니, 어원이나 문법을 따질 까닭이 없으면서도, 온누리 모든 것을 누구나 다 알면서 서로 아끼고 돌보는 사랑이 흐르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넘칩니다. 지식이 아닌 삶일 때에 비로소 ‘말다운 말’이요, 어원이나 문법을 내려놓고서 ‘어머니가 아기한테 가르치는 말’일 때에 비로소 ‘사람말’입니다. 숲에서 사랑을 짓는 삶으로 나누는 말이기에 ‘사람이 쓰는 말’인 사람말이에요.



인공언어를 사용해서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단지 진술을 할 뿐이다. (29쪽)



  아이들한테 ‘말’ 때문에 자격시험을 치르도록 하지 않기를 빌어요. 영어 능력 점수나 한자 능력 점수를 왜 따야 할까요? 어른도 아이도 ‘말’을 말답게 해야 할 뿐입니다. 한국말을 누가 더 잘 하느냐를 따지는 ‘한국말 자격(능력) 시험’ 따위가 생긴다면, 그야말로 끔찍합니다. 그저 서로 사랑하면서 말을 나누면 될 뿐입니다. 아니, 오직 서로 사랑하면서 말을 나누어야 할 뿐입니다.


  영어도 한문(한자가 아닌 한문, 또는 중국말)도 일본말도 새롭게 배워서, 새로운 이웃하고 사귀는 징검다리가 되도록 할 때에 아름답습니다. 억지스레 지식이나 시사상식 따위로 아이들 머릿속에 쑤셔넣지는 말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우리말 달인’이나 ‘한자 달인’ 따위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영어 박사’나 ‘영어 천재’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스레 삶을 지으면서 서로 아끼는 따뜻하고 넉넉한 사람으로서 말을 아름답게 쓰는 넋’이면 됩니다. 어른도 아이와 함께 ‘삶을 온통 기쁨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꿈을 물려주는 숨결’이면 돼요. 4348.8.29.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숲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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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들의 수다 - 정부희 박사의 곤충 에세이
정부희 지음 / 상상의숲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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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83



‘귀여운 벌레’를 사랑해 주셔요

― 곤충들의 수다

 정부희 글

 상상의숲 펴냄, 2015.7.20. 15000원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가까운 바닷가로 나들이를 다녀옵니다. 우리 집에서 면소재지까지 5킬로미터이고, 면소재지에서 바다까지 7킬로미터입니다. 자전거를 신나게 몰아서 바닷가에서 실컷 논 뒤에 새롭게 기운을 내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바닷가에서 면소재지로 접어드는 내리막에서 사향제비나비 한 마리가 찻길 한복판에서 아슬아슬하게 나는 모습을 봅니다. 샛자전거에 앉은 큰아이도 나비를 봅니다. 그런데 나비는 제대로 날지 못하고 비틀거립니다. 얼마 날지 못하고 길바닥에 내려앉습니다. 그나마 새까만 길바닥이 아닌 한복판 노란 금이 있는 곳에 내려앉습니다.


  “차에 치였나 봐, 어떡해? 어휴, 그러게 차를 잘 보고 다녀야지.” 얘야, 나비는 자동차가 지나가는 빠르기를 알아채지 못한단다. 자동차가 이 시골길에서 얼마나 빠르게 내달리는데. 나비는 꽃을 찾아 여느 때처럼 가볍게 팔랑거리며 날았을 테고, 이 찻길에서 ‘뜸하게 다니던 자동차’에 그만 저도 모르게 치이고 말아서 이렇게 아파한단다.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말안장 꾸미개는 너무도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말안장 꾸미개를 만들기 위해 나무판을 고운 비단 천으로 싼 다음 그 위에 비단벌레 딱지날개를 일렬로 가지런히 줄맞춰 깔아 붙입니다 … 말안장 꾸미개 하나 만드는 데 비단벌레가 무려 2000마리가 희생되었다니 놀랍기 이전에 가슴이 쓰립니다. (20∼21쪽)



  내리막을 달리는 자전거를 세웁니다. 사향제비나비가 내려앉은 곳으로 올라갑니다. 자전거를 길가에 세웁니다. 차에 치여서 아파하는 나비는 날갯짓마저 거의 못 하고 길바닥에 납작 붙습니다. 얼른 길바닥에서 풀밭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마침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려 합니다. 아, 왜 이럴 때 자동차가 지나가나?


  부디 자동차가 곱게 지나가기를 바라지만, 자동차는 길 한복판을 알리는 노란 금을 밟으면서 지나갑니다. 자동차를 모는 분은 길바닥 노란 금에 새까만 것이 있는 줄 못 보았을까? 볼 겨를이 없었을까요?



개미귀신은 대부분 산자락 주변의 흙길, 강변이나 모래 해변처럼 포슬포슬한 흙이 있는 곳, 특히 사람들이 덜 다니는 탁 트인 땅을 좋아합니다. 그런 개미귀신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이 점점 없어지고 있습니다. (89쪽)



  정부희 님이 쓴 《곤충들의 수다》(상상의힘,2015)를 읽습니다. 이 책은 ‘정부희 곤충기’라는 이름으로 나온 여섯째 책입니다. 2010년에 《곤충의 밥상》을 처음 선보였고, 《곤충의 유토피아》(2011), 《곤충 마음 야생화 마음》(2012), 《나무와 곤충의 오랜 동행》(2013), 《곤충의 빨간 옷》(2014)을 잇달아 선보였어요. 《곤충들의 수다》는 앞선 다섯 권과 마찬가지로, 이 지구별에 어마어마한 숫자로 있는 벌레를 따사로운 눈길로 살피면서 헤아린 이야기를 담습니다.



지금은 웬만한 시골길도 다 포장되어 풀도 살기 힘들고 땅이 터전인 두꺼비메뚜기도 살기 힘들어졌습니다. (33쪽)


따뜻한 남쪽에서만 사는 새노란실잠자리. 개발 몸살에 자그마한 연못과 둠벙들이 야금야금 사라지고 때만 되면 농약 세례가 쏟아지니 녀석들은 점점 보금자리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52쪽)



  빠르기를 줄이지 않고 무시무시하게 내달리는 자동차 바퀴에 다시금 짓밟히면서 힘없이 바람 따라 구르는 나비를 바라봅니다. 자동차가 나비를 밟을 적에는 아이하고 함께 그만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말았습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주검이라도 건사해야겠다고 찻길로 들어섭니다. 그런데 나비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가느다란 다리를 그야말로 가늘게 떱니다. 에그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나비 날개를 살며시 쥐고는 천천히 길가로 옵니다. 풀밭으로 나비를 옮깁니다. 나비 날개에는 자동차한테 밟힌 자국이 굵게 새겨졌습니다.


  나비는 자동차에 치이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나비는 자동차한테 밟히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꽃을 사랑하는 나비는 풀과 나무가 꽃가루받이를 해서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면서 저도 맛난 꿀이랑 꽃가루를 조금씩 얻으려고 태어납니다. 나비는 온갖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기쁘게 지켜보면서 제 아름다운 날개를 팔랑이면서 바람을 타고 놀려고 태어납니다.



살짝수염벌레는 영지를 주식으로 삼는 딱정벌레 식구입니다 … 아이러니하게도 직접 키우면서 연구해 보니 살짝수염벌레는 몸에 좋다는 불로초를 먹는데도 한 달을 채 못 삽니다. (76, 78쪽)


도시마다 봄이면 얼마나 살충제를 뿌려대는지 개나리잎벌이 씨가 다 마를 지경입니다. 개나리잎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녀석이 사라지면 도시에서 개구리나 새도 보기 힘들어집니다. 개나리잎벌 애벌레가 활동하는 시기는 새들이 낳은 알에서 새끼 새들이 깨어나 자라는 시기와 맞물립니다. (113쪽)



  정부희 님이 쓴 《곤충들의 수다》를 읽다 보면 ‘농약’하고 ‘살충제’를 걱정하는 이야기가 자꾸자꾸 나옵니다. 천연기념물이 된다 한들, 아무리 씨가 말라서 더 찾아보기 어렵다 한들, 시골사람은 농약을 자꾸 쓸 뿐이고 도시사람은 살충제를 자꾸 쓸 뿐입니다.


  시골사람은 남새 아닌 풀이 자라지 않기를 바라면서 농약을 쓰고, 도시사람은 벌레가 생겨서 꼬물거리는 꼴을 볼 수 없다면서 살충제를 씁니다.


  그런데, 벌하고 나비하고 개미하고 온갖 벌레가 없이 꽃가루받이를 어떻게 할까요? 벌이나 나비나 개미나 벌레가 없이 어떻게 꽃가루받이가 될까요?


  사람이 나락꽃을 하나하나 건드려서 꽃가루받이를 해야 하나요? 사람들이 보리꽃이나 밀꽃을 하나하나 흔들어서 꽃가루받이를 해야 할까요? 고추꽃도 깨꽃도 사람들이 하나씩 손으로 꽃가루받이를 해야 할까요?


  오이밭이고 참외밭이고 토마토밭이고 능금밭이고 포도밭이고 모두 똑같습니다. 온갖 벌과 나비와 개미와 벌레가 있어 주어야 꽃가루받이가 되면서 열매를 맺습니다. 벌레가 조금, 때로는 제법 많이 갉아먹더라도, 이 벌레는 사람하고 함께 살려고 열매를 나누어 먹습니다. 이 대목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이 지구별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멀리 보고 크게 보면, 생태계에서 곤충과 초식동물은 결코 자신의 밥인 식물을 죽이지 않습니다. 오리나무잎벌레 또한 자신의 밥인 오리나무를 다 먹어치워 죽였다간 자신도 굶어죽을 건 뻔하기 때문이지요. (127∼128쪽)


된장잠자리가 바람을 타고 우리나라에 날아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일본이나 중국까지도 날아가고 심지어 태평양을 건너기도 합니다. (193쪽)



  여름이 저물면서 마을마다 제비는 한곳으로 모입니다. 그동안 집집마다 처마 밑에서 새끼를 보살피던 제비는 새끼를 알뜰히 키우고 날갯짓을 가르쳐서 제비떼로 움직입니다. 이 제비떼는 곧 태평양을 가로지릅니다. 봄부터 여름까지 이 나라 들에서 수많은 벌레를 날마다 어마어마하게 잡아서 새끼한테 먹이던 제비는 제 일을 마치고 중국 강남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제비는 봄부터 여름 사이에 이 나라 들에서 들끓을 벌레를 솎아 주는 구실을 합니다. 어미 제비 한 마리가 새끼 제비 너덧 마리나 대여섯 마리를 먹이려고 벌레를 얼마나 많이 잡는가를 세어 본다면, 제비처럼 놀라운 ‘벌레잡이’가 다시 없는 줄 알 수 있습니다. 참새가 가을에 ‘나락알’을 쫀다고 하더라도, 나락이 익을 때까지는 시골마을에서 수많은 벌레를 신나게 잡아서 먹어요.


  다시 말하자면, 이 나라 들과 숲에서 사는 모든 새는 사람하고 사이좋은 이웃입니다. 사람은 새를 아끼고 새는 사람을 아낍니다. 콩 석 알을 심은 사람이 한 알을 새한테 준다는 말은 사람이 거두는 몫 가운데 1/3을 새한테 주어도 넉넉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콩알뿐 아니라 다른 열매도 1/3만 거두더라도 얼마든지 배부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농촌에서는 새나 벌레한테 열매를 얼마나 나누어 주려고 할까요? 1/10은커녕 1/100조차 안 나누려고 하지는 않나요?



앞서가던 사람이 “으아악!” 비명을 지릅니다. 무슨 큰 일이 일어났나 싶어 급히 달려가 보니 헛웃음만 나오네요. 공중에 매달려 뱅뱅 돌며 꼼지락거리는 귀여운 자벌레를 보고 바들바들 떨고 있으니 말이지요. ‘얼음’이 된 애벌레를 거두어 귀엽다고 쓰다듬으며 참나무 잎 위에 놓아 주자 그 사람의 눈이 동그래집니다. (207쪽)


원래 도토리는 도토리거위벌레의 밥이었습니다. 곤충이 그 누구보다도 지구에 먼저 나왔으니 말이지요. 녀석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가을이면 신나는 건 다람쥐와 배고픈 멧돼지입니다. (233쪽)



  들꽃 한 송이를 따사롭게 바라보는 사랑스러운 평화가 이 땅에 깃들기를 빕니다. 들풀 한 포기를 보드랍게 보살피는 아름다운 평화가 이 나라에 뿌리내리기를 빕니다.


  사람만 배불리 먹는 삶이 아니라, 지구별 모든 숨결이 사이좋게 어깨동무할 수 있는 삶을 바랍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부자와 가난뱅이가 따로 없이 서로 평등하고 평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는 삶을 바랍니다.


  벌레가 속삭이는 목소리를 우리 모두 함께 들을 수 있기를 빌어요. 벌레가 사람한테 들려주려는 노랫소리를 우리 모두 함께 귀여겨듣기를 빌어요. 나무를 아끼고 숲을 보듬으면서 도시와 시골 모두 착하고 참다운 삶터가 되도록 가꿀 수 있기를 빌어요.


  귀여운 벌레가 우리를 바라보면서 눈웃음을 칩니다. 조금 더 천천히 가자고 말하면서 어깨에 내려앉습니다. 전쟁무기는 걷어치우고 두레와 품앗이가 골골샅샅 춤추는 삶을 이루자는 이야기를 속삭이려고 잠자리가 내 팔뚝에 내려앉아서 나를 말똥말똥 쳐다봅니다. 자동차에 치이고 밟혀서 죽음을 앞둔 나비 한 마리가 이 땅을, 이 마을을, 이 나라를, 이 별을, 온누리를 모두 사랑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면서 눈을 사르르 감습니다. 4348.8.19.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숲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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