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실천
게리 스나이더 지음, 이상화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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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26



학교에서 말을 가르치는 까닭은?

― 야생의 실천

 게리 스나이더 글

 이상화 옮김

 문학동네 펴냄, 2015.12.12.18. 13000원



  1990년에 미국에서 “The Practice of the Wild”라는 이름으로 나온 책을 한국말로 옮긴 《야생의 실천》(문학동네,2015)을 읽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00년에 《야성의 삶》이라는 이름으로 한 번 나온 적 있습니다.


  ‘야성(野性)’이라는 한자말은 “자연 또는 본능 그대로의 거친 성질”을 뜻하고, ‘야생(野生)’이라는 한자말은 “산이나 들에서 저절로 나서 자람”을 뜻합니다. 새로운 번역으로 나온 책에 붙은 ‘야생’은 ‘야생마·야생화’처럼 쓰기도 하는데, 이는 한국말로 ‘들말·들꽃’을 가리켜요. 그러니까 야생이란 ‘들’을 나타내는 셈이고, 야성이란 들 같은 숨결을 나타내는 셈입니다.


  지난날에 함석헌 님은 ‘들사람’을 말한 적이 있어요. ‘들사람’이란 바로 ‘야생인’이라 할 테고, 이는 야성으로 살거나 야생인 삶이라 할 테지요.



‘자연’이라는 말 자체는 위협적인 말이 아니지만, ‘야생’의 개념은 문명사회에서는 유럽이나 아시아에서나 똑같이 종종 제멋대로임, 무질서, 푹력과 연결됩니다. (29쪽)


야생지의 문화들은 자급자족 경제가 가르쳐 주는 삶과 죽음의 교훈에 맞춰 삽니다. 그러나 지금 ‘야생적인’이라든지 ‘자연’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요? (32쪽)



  우리는 들에서 나고 들에서 죽는 사람일까요? 사람이 살아온 발자국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예부터 지구별 삶을 돌아보면 누구나 들에서 나고 들에서 죽었지 싶습니다. 들에서 난 목숨은 들에서 자라는 목숨(풀, 열매)을 먹어요. 들에서 자라던 목숨은 들로 돌아가서 새로운 흙이 됩니다. 몸뚱이는 들에서 돌고 돕니다. 몸뚱이는 들에서 새로 깨어나고 새로 살다가 새로운 들이 되어요. ‘논밭’이란 ‘들’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고, 들판이나 들녘 같은 말은 우리 스스로 먼 옛날부터 누구나 들사람이었다는 대목을 넌지시 비추지 싶어요.


  그렇지만, 오늘날 지구 사회는 물질문명이 넘치면서 도시가 커집니다. 고작 서른 해나 쉰 해 앞서만 해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들에서 나고 자라다가 들로 돌아갔다면,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들이 아닌 도시에서 나고 자라다가 도시에서 자취를 감추어요. 이제 오늘날 지구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들을 볼 겨를이 없고 들길을 걸을 틈도 없으며 들내음을 맡을 말미조차 얻기 힘들어요.


  참말 오늘날 사회에서는 들바람을 쐬기가 어렵기에 어떻게든 틈을 내어 ‘올레 걷기’처럼 스스로 온몸을 맡기면서 숲이나 들을 걸으려고 하는구나 싶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시 사회나 문명 사회에서 버티기 어려울 테니까요.



학교에서 언어를 가르치는 목적은 우리를 얼마 안 되는 언어행동 영역의 울 안에 가두고 몇 가지 선호하는 특징들만을 양성하자는 것입니다. 직업을 구하거나 파티석상에서 사회적 신용을 주는 데나 도움이 될 문화적으로 한정된 엘리트 형식들인 것이지요. (51쪽)


걷는 일은 굉장한 모험이며 최초의 명상이며 인간에게는 으뜸가는 진심과 영혼의 실천입니다. (52쪽)



  《야생의 실천》을 쓴 게리 스나이더 님은 이 책을 빌어 ‘학교에서 말을 가르치는 까닭’을 찬찬히 짚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지어서 살지 못하도록,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급자족을 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도시에서 문명 사회로 스며들어 일자리를 찾거나 문화를 누리는 데에 얽매이도록 하려는 뜻으로 학교에서 말을 가르친다고 이야기해요.


  그러고 보면, 교과서에서 다루는 말이나 사회에서 쓰는 말은 ‘도시에서 지내기에 어울리는 말’입니다. 교과서를 비롯해서 수많은 인문책이나 신문이나 방송에서 흐르는 말도 ‘도시에서 문화를 누리기에 어울리는 말’이에요.


  참말로 교과서나 인문책에는 농사짓기하고 얽힌 말이 나오지 않아요. 고기잡이하고 얽힌 말도 나오지 않아요. 어머니가 아기를 낳아서 돌보는 살림하고 얽힌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씨앗을 심고 가꾸는 시골말뿐 아니라, 집을 짓고 밥을 지으며 옷을 짓는 살림살이를 두루 아우르는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풀이나 꽃이나 나무를 가리키는 말도 나오지 않고, 방아나 절구나 베틀이나 물레나 빨래나 낫이나 호미 같은 말도 교과서하고는 아주 동떨어진 말이거나 박물관에 갇힌 말이기 일쑤예요.



모든 전통 문화에는 춤이 있습니다. 춤을 공부하러 올 때 젊은이들은 그들의 비길 데 없는 영원한 아름다움과 힘을 함께 가져옵니다. (110쪽)


신성한 산과 그 산으로의 순례는 아시아에서는 깊이 자리잡은 민중종교의 특징입니다. (198쪽)



  ‘걷기’가 대단한 모힘이며 명상이고 실천이라고 밝히는 게리 스나이더 님은 지구별 모든 곳에서 오래도록 이어온 삶에서는 ‘춤’이라고 하는 기쁨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면서 ‘거룩한 산’을 이야기해요.


  춤이란 무엇일까요? 방송에 나오는 연예인이 궁둥이만 흔드는 몸짓이 춤일까요? 산이란 어디일까요? 온갖 장비와 옷을 갖춘 뒤에 오르락내리락하는 데가 산일까요?


  어떤 틀이 있어서 그 틀에만 맞추어야 하는 춤이라고 느끼지 않아요. 아이들이 즐기는 춤을 보면 그야말로 몸 가는 대로 손이며 발이며 뻗고 활짝 웃어요. 남 눈치를 보면서 춤을 추는 아이는 없어요. 그야말로 신나고 즐겁게 춤을 춥니다.


  산이라고 하는 곳은 ‘산’일 뿐 아니라 ‘숲’입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데를 놓고 ‘거룩한 산’이라 하지 않아요. 나무가 우거지고 풀이 곱게 드리운 숲일 때에 비로소 산다운 산이에요. 숲짐승이 있고 숲바람이 부는 고즈넉하고 그윽하며 고요한 곳이 바로 아름다운 숲이면서 산입니다.



오늘날 지중해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잿빛 암산이 한때는 작은 숲과 야생동물이 풍부한 곳이었다는 것조차 모릅니다. 집중적인 파괴는 농업 유형의 한 기능이었습니다. (255쪽)


딸기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딸기는 새와 곰을 유혹해서 기꺼이 먹힙니다. 그것은 선물입니다만 또한 답례이기도 합니다. 열매의 씨앗이 그들에게 실려 멀리 갈 것이기 때문이지요. (315쪽)



  《야생의 실천》을 읽으면서 오늘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차분히 되새깁니다. 오늘 우리가 얻은 것이라면 컴퓨터와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자가용과 고속도로과 텔레비전 같은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잃은 것이라면 자급자족과 두레와 품앗이와 마을과 사랑 같은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돈을 벌고 쓰는 살림을 얻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을 가꾸고 사랑을 나누는 살림을 잃습니다. 오늘 우리는 학교를 다니면서 졸업장과 자격증을 얻습니다. 오늘 우리는 집에서 어버이가 사랑으로 가르치고 물려주는 살림을 잃습니다. 오늘 우리는 도시라고 하는 문명 사회를 얻습니다. 오늘 우리는 시골과 숲과 산과 들이라고 하는 터전과 보금자리를 잃습니다.



커다란 정신의 내부에 있는 것처럼 동물과 인간은 모두 말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이곳을 통과한 자는 남을 치유하고 도와줄 힘을 갖게 됩니다. (320쪽)


우리 문화가 불을 밝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현실의 일을 함께하고, 혹은 놀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문제를 일으킬 때, 또는 누군가가 아프거나 죽거나 태어날 때, 혹은 추수감사절 같은 모임에서입니다. (347쪽)



  나는 우리 집 두 아이하고 시골에서 살며 이 아이들을 학교나 유치원이나 학원 어느 곳에도 보내지 않습니다. 우리 집이 고운 보금자리가 되면서 즐거운 삶터가 되고 앞으로는 너른 숲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집에서 아이들이랑 함께 배우고 가르칩니다. 아이들이 졸업장을 따기보다는 말다운 말을 삶에서 배우기를 바라면서 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아요. 아이들이 문명인이나 사회인이 되기보다는 슬기로운 어른이 되고 씩씩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면서 집에서 함께 배우고 가르칩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에 앞서 나부터 들사람이나 시골사람이나 숲사람으로 거듭나려는 꿈으로 사는 셈입니다. 나도 아이도 함께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고운 들사람으로 거듭나고 예쁜 시골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며 슬기로운 숲사람으로 살림을 가꾸려는 꿈을 키웁니다.


  “야생의 실천”이란 “들을 살다”를 가리키지 싶습니다. 들내음을 맡고 들바람을 마시면서 들꽃을 마음밭에서 피울 수 있는 살림일 때에 “들을 살다”라 말할 수 있지 싶습니다. 손수 흙을 일구고 손수 씨앗을 심어서 손수 살림을 짓는 하루를 누릴 적에 바야흐로 “들을 살다”라 말하면서 가없는 기쁨으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할 수 있지 싶어요. 내 넋이 ‘들넋’이 되기를 빕니다. 내 손길이 ‘들결’ 같은 사랑이 되기를 빕니다. 내 몸짓이 ‘들춤’처럼 흐드러지기를 빕니다. 4349.1.15.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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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숨겨진 삶
짐 더처.제이미 더처 지음, 전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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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숲책 읽기 95



늑대가 사라진 숲은 어떻게 무너졌는가

― 늑대의 숨겨진 삶

 짐 더처·제이미 더처 글·사진

 전혜영 옮김

 글항아리 펴냄, 2015.12.7. 22000원



  숲에서 늑대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는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좀처럼 생각해 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늑대를 숲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우나 이리나 곰이 사라진 숲은 어떤 모습이 될는지 생각해 보기도 어렵습니다. 범이 사라진 숲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생각해 보기 어렵지요. 작은 짐승을 잡아서 먹는 큰 짐승이 숲마다 마음껏 돌아다니던 때를 살지 않았으니, 이러한 큰 짐승이 없는 오늘날 숲에서는 이러한 큰 짐승이 널리 있는 숲을 그리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헤아려 볼 만합니다. 큰 짐승이 있는 숲에는 그야말로 온갖 짐승이 두루 있습니다. 큰 짐승이 없는 숲에는 그야말로 몇몇 짐승만 있습니다.


  ‘포식자’라고 하는 큰 짐승은 먹이사슬에서 거의 꼭대기에 있습니다. 얼핏 생각한다면 이 포식자가 없으면 먹이사슬 아래쪽에 있는 작은 짐승은 ‘살기 좋다’고 여길 테지만, 찬찬히 생각한다면 이런 얼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포식자가 없는 먹이사슬에서는 작은 짐승이 끝없이 불어나다가 스스로 무너지기도 하고, 포식자가 없기 때문에 먹이사슬 아래쪽에 있는 짐승은 뒷걸음치기도 하는데, 먹이사슬 아래쪽에 있는 짐승은 거의 풀을 먹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먹이사슬 꼭대기 쪽에 있는 포식자가 사라지거나 줄어들면 ‘풀도 함께 사라지거나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먹이사슬 얼거리가 깨지기 때문에 모두 뒤틀리거나 망가집니다.



소투스 무리의 중간 서열 늑대 모토모. 모토모는 우리가 일을 할 때면 빤히 쳐다보곤 했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도, 우리의 관심을 끌려고 애쓰지도 않았으며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35쪽)


늑대 무리는 서열을 통해 질서를 유지한다. 소리와 몸짓이 혼합된 여러 가지 소통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지배와 복종을 표현하며, 질서를 꾸준히 강화시킨다. 늑대는 소통을 통해 서열을 표현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언어를 포악하고 악한 것으로 해석하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70쪽)



  짐 더처 님하고 제이미 더처 님이 함께 빚은 《늑대의 숨겨진 삶》(글항아리,2016)을 읽으면서 늑대와 숲과 사람은 어떻게 이어진 삶인가를 곰곰이 짚어 봅니다. 이 책은 늑대 무리 사이에서 늑대를 오래도록 꾸준히 지켜본 끝에 태어납니다. 한두 해라든지 몇 해쯤 지켜본 뒤에 나온 책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늑대를 먼발치에서 구경하고 나온 책도 아닙니다. 늑대 무리가 일구는 삶을 건드리지 않되 늑대 무리 한복판에 오두막을 마련해서 조용히 늑대 무리하고 이웃이 되어 살며 바라보고 마주한 이야기를 글하고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숨겨진 삶”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제껏 사람들이 늑대라고 하는 숲짐승을 제대로 살피거나 헤아리거나 알려 하지 않으면서 엉뚱한 생각만 했다는 대목을 건드리거든요.




어린 늑대들에게서 놀이가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새끼는 굴에서 나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린다. 많은 생물학자는 유년기의 놀이가 근력을 키우고 협동력을 향상시키며, 사냥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게 하고, 새끼가 서열 구조에서 자리를 매기는 데도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94쪽)


레오폴드와 몇몇 사람은 자연에서 늑대의 존재가 파괴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늑대를 제거하자 자연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149쪽)



  늑대는 무리를 지어서 산다고 합니다. 늑대는 홀로 떨어져서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늑대는 ‘그리 센 짐승’이 아니기에 여럿이 힘을 모아서 사냥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먹잇감을 헤아려서 알맞게 무리를 지키거나 거느린다고 하지요.


  늑대 이야기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미국에서 퍼진 이야기가 무척 많다고 느낍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드넓은 들판에서 울타리를 치고 소나 양 같은 짐승을 기르면서 ‘늑대한테 잡아먹힌 소나 양’ 때문에 앙갚음을 하려고 늑대를 마구 사냥하던 이야기가 많이 퍼졌을 테지요.


  그런데 말이지요, 늑대가 사냥을 해서 잡아먹는 짐승 숫자보다 ‘농장에서 자연스레 죽는 짐승’ 숫자가 더 많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늑대로서도 농장 짐승을 모조리 잡아서 죽인다든지 많이 잡아서 죽인다면, 늑대 무리를 지킬 수 없을 테니까요. 사람이 건사하는 농장이 있어도 이 농장에 있는 짐승이 늘 어느 만큼 숫자를 지키도록 하겠지요. 더군다나 오늘날 과학과 조사로 살피니, 미국에서는 늑대 무리를 숲에 다시 들이고 난 뒤에 다른 숲짐승 숫자가 오히려 더 늘었다고 합니다. 이러면서 사냥꾼은 ‘사냥할 짐승이 줄었다’고 해요. 왜 그러한가 하면, 늑대 무리가 사라진 미국 숲에서 ‘풀 먹는 숲짐승’은 포식자 걱정이 없이 느긋하게 지내느라 몸놀림이 뒷걸음을 치면서 숲을 망가뜨리기에 개체 숫자가 늘 수 없었지만, 포식자가 다시 나타나면서 몸놀림이 다시 ‘진화’를 했고, 이러면서 숲이 차츰 살아날 뿐 아니라, 개체 숫자가 껑충 뛰어올랐다고 해요. 이러니 사냥꾼으로서는 예전에는 느긋하게 옐크 같은 숲짐승을 쉽게 사로잡았다면, 이제는 옐크가 ‘늑대라는 포식자한테 잡히지 않으려고 진화를 한 탓’에 사냥하기에 무척 까다롭다고 합니다.




늑대를 죽이기 위해 대자연에 수천 톤의 독성 물질을 뿌린 이유가 무엇일까? 늑대 한 마리를 죽이기 위해 가축의 목숨은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는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늑대를 멸종시키려고 수천수만 달러를 쓸 수 있을까? 오늘날 자연재해로 죽는 소와 양이 늑대의 공격을 받아 죽는 숫자보다 훨씬 많은데도 목장 주인이 오직 늑대에게만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54쪽)



  한국에서도 숲에 늑대나 범이 다시 살 수 있으면 어떻게 될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오늘날 한국은 멧돼지나 노루나 고라니나 멧토끼가 마을로 몰래 내려와서 밭을 다 파헤치거나 망가뜨린다고 하는데, 울타리를 높이 세우든 울타리에 전기가 흐르게 하든 독약이나 덫을 놓든 뾰족한 수가 되지 않습니다. 총을 쏘아 이런 짐승을 잡는다고 해서 달라질 일도 없어요.


  한국에서도 늑대나 범 같은 짐승이 숲에서 살면 어떠할까요? 그러면 멧돼지나 노루나 고라니나 멧토끼도 섣불리 마을로 내려오지 못하겠지요. 숲에 먹잇감이 줄어들어서 멧돼지나 노루 같은 짐승이 마을로 내려온다고 할 수 있지만, 미국에서 늑대가 사라진 숲이 망가져서 ‘숲짐승 스스로도 먹이가 사라진 얼거리’를 돌아볼 수 있다면, 한국에서도 ‘포식자 노릇을 할 짐승이 사라진 탓’에 ‘풀을 먹는 숲짐승 스스로 누릴 먹이’가 숲에서 차츰 줄거나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07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몇몇 특정 지역에서 엘크 수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늑대가 재도입되고 난 후 처음 12년 동안 엘크는 총 9만 마리에서 12만 마리로 오히려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2011년에는 14만 613마리로 집계되었다. (207쪽)



  늑대가 다시 무리를 지어서 마음껏 살 수 있는 옐로스톤 국립공원 둘레에는 늑대 무리뿐 아니라 수많은 여러 숲짐승이 차츰 골고루 늘어났다고 합니다. 이러면서 숲이 새롭게 깨어났다고 해요.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이 새로 깨어난 숲은 그야말로 아름답고 ‘볼거리’가 늘어난 만큼, 국립공원이나 관광지 ‘수입’이 눈에 띄도록 부쩍 늘었다고 합니다.


  호텔을 짓거나 놀이시설을 갖추었기에 늘어나는 관광객이 아닙니다. 숲이 숲대로 되살아나도록 마음을 기울여서 살짝 손길을 뻗었을 뿐인데, 이러한 손길이 숲을 살리면서 마을도 사회도 모두 살리는 길이 되었다고 해요. 굳이 경제논리를 살필 까닭은 없지만, 경제논리를 따지기 좋아하는 오늘날 한국 사회를 돌아본다면, 경제논리로서도 숲을 제대로 살리고 숲짐승이 고루 어우러지도록 하는 길이야말로 우리 모두 아름답게 거듭나는 길이라고 할 만합니다.





늑대 도입 이후 그 지역에 버드나무와 사시나무가 다시 활발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먹이와 집 지을 재료가 많아지자 비버의 개체 수 또한 늘어났고, 넓은 습지가 조성되면서 개구리와 백조, 캐나다두루미가 몰려들었다. 한때 개울둑은 엘크에 의해 풀이 사라지고 침식되었는데, 그 때문에 곤충이 들끓는 야생화가 너무 많이 자라나 고창증을 유발했다. (212쪽)



  《늑대의 숨겨진 삶》이라는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주 뚜렷합니다. 사람만 살려고 하면 사람도 죽습니다. 이웃(사람을 비롯해 모든 짐승과 벌레와 풀과 나무)하고 어깨동무하면서 살려고 하면 사람도 삽니다. 이웃을 알려고 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도 어떤 숨결이거나 목숨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웃을 알려고 한 걸음을 내딛을 적에 비로소 이웃을 비롯해서 우리 스스로 어떤 넋인가를 슬기롭게 깨달을 만합니다. 4349.1.1.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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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6-01-01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많은 생각을 품게 하네요!!

숲노래님!
그래도 새해이니 새해인사 올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댁네 평안과 건강을 기원합니다
복 된 하루,하루 되소서^^

숲노래 2016-01-01 10:51   좋아요 0 | URL
책읽는나무 님 보금자리에도 언제나 고운 노래와 웃음이 넘치는
새해가 되기를 빌어요. 고맙습니다 ^^

박현규 2016-01-01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이쁘네요...ㅋ

숲노래 2016-01-01 10:51   좋아요 0 | URL
네 사진이 아주 훌륭하도록 이쁩니다

빈수레 2016-02-15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년전 장룽저 늑대토템이란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몽골에서 늑대와 생활하며 발견한 늑대의 지혜,용맹스러움
그리고 늑대가 초원의 생태를 보호하고 있다는 진실을
알려주어 늑대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되었습니다.

이책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숲노래 2016-02-15 10:53   좋아요 0 | URL
저도 <늑대토템>이라는 책을 찾아보아야겠네요.
말씀 고맙습니다 ^^
 
할머니 탐구 생활 - 할머니라는 지혜의 창고에서 발견한 삶의 보물들, 2015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 선정작(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정청라 지음, 임종진 사진 / 샨티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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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94



할머니한테서 받은 사랑을 돌아보기

― 할머니 탐구 생활

 정청라 글

 임종진 사진

 샨티 펴냄, 2015.11.30. 15000원



  내 어릴 적을 더듬으면, 나는 할머니한테서 사랑을 받은 일을 거의 못 떠올립니다. 갓난쟁이일 무렵에는 여러 할머니한테 둘러싸여 사랑을 받았을는지 모르나, 어느 만큼 나이가 든 뒤에는 우리 집 할머니를 마주할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작은아버지 댁에서 살던 할머니는 설이나 한가위가 되어야 비로소 얼굴을 보다가, 병원에서 몸져누운 뒤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았을 뿐입니다.


  할머니가 곁에 없이 지내던 어린 나날 왜 우리 집에서는 할머니가 함께 안 사나 하고 생각해 보는데, 할머니 한 분이 큰집과 작은집에 함께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형제 자매가 함께 살면 할머니가 함께 계시겠지만, 형제 자매가 따로 사니까 할머니는 여러 형제 자매 가운데 한 집에 사셔야겠지요.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안 계셨지만 마을에서는 할머니를 어디에서나 마주했습니다. 할머니는 누구나 느린 걸음이었고, 짐을 잘 들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누구나 찬찬히 말씀을 하고, 따사로운 목소리와 손길로 다가오셨습니다.



“여그서 걸어갈 때는 아파 죽겄어. 근디 산에 들어가믄 아픈 줄도 몰라. 꼬사리 끊다 보믄 오지가꼬 암시랑토 않당께. 내일은 집이도 같이 가. 고롱구테(골짝 이름)로 갈라니께.” (19쪽)


어쩌면 하느님도 고사리며 산더덕 같은 나물을 미끼로 사람들을 산으로 불러들이시는 게 아닐까? (24쪽)




  정청라 님이 멧골자락에서 오붓하게 지내는 살림살이 이야기를 담고, 이러한 살림살이를 임종진 님이 사진으로 살가이 담은 《할머니 탐구 생활》(샨티,2015)을 가만히 읽습니다. 정청라 님은 곁님하고 아이들하고 시골자락에서 조용히 지냅니다. 시골자락에는 거의 모두 할머니와 할아버지입니다. 아니, 시골자락에는 젊거나 어린 사람은 모조리 도시로 나가고 없다고 해야겠지요. 마을에서 한 시간쯤 걸어서 나와야 비로소 군내버스가 지나가는 곳에 이른다고 하니, 이런 멧골에서 조용히 살려고 꿈을 키우는 어린이나 젊은이는 매우 드물다고 할 만합니다. 자가용 없이 이런 멧골에서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주 드물다고 할 만하고요.


  그렇지만 정청라 님네 집안에 처음부터 자동차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자동차가 있었어도 이 자동차를 탈 수 없는 살림이 되었다고 할까요. 돈이 없어서라기보다 그냥 자동차하고 살며시 멀어진 살림이라고 할까요.


  자동차를 달려서 읍내나 면내를 다녀올 적에는 이대로 재미있습니다. 두 다리로 걷거나 버스를 타고 읍내나 면내를 다녀올 때에는 이대로 즐겁습니다. 마을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먼먼 옛날부터 걸어서 그 길을 오가셨겠지요. 마을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이녁이 어릴 적부터 고개를 넘고 골짜기를 지나면서 마실을 다니셨겠지요.



지난봄, 마침 아울이와 산에 오르다가 할머니가 고추 이랑 만드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가운데 괭이질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고, 할머니는 천천히 한 줄씩 고랑을 그려 나갔다. 고요히 숨을 내쉬는 것처럼, 한 땀씩 바느질을 하는 것처럼, 너무나 편안하고 가벼운 괭이질에 나는 가슴이 숙연해졌다. (44쪽)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꽃과 함께 살아가는 동래 할머니를 바라보며 꽃이 주는 위안이 얼마나 큰지 생각했다. (60쪽)





  멧길을 걷는 동안 멧내음을 마십니다. 들길을 걷는 사이 들내음을 마셔요. 숲길을 걷는 내내 숲내음을 받아들입니다. 나무를 하고 나물을 하면서 멧자락도 들도 숲도 모두 마음으로 고이 안습니다. 오랜 나날 나무를 하고 나물을 하던 길이기에 멀지도 힘들지도 않습니다. 철 따라 어느 나물을 훑을 만한지 서로 알고, 철 따라 어떤 숨결이 멧골과 숲에 깃들어 이웃이 되는가를 가만히 헤아립니다.


  《할머니 탐구 생활》을 쓴 정청라 님으로서는 마을 이웃이 모두 할머니요 할아버지이니, 할머니하고 할아버지를 살펴봅니다. 마을 할머니는 마을 젊은 집안을 찬찬히 살펴볼 테지요. 젊은 아낙은 늙은 할매를 지켜보고, 늙은 할매는 젊은 아낙을 지켜보아요. 젊은 아낙은 늙은 할매를 따사로이 마주하고, 늙은 할매는 젊은 아낙을 따사로이 마주합니다. 아이들은 어머니 아버지뿐 아니라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 사이에서 함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랍니다. 마음으로 이웃이 되고 사랑으로 동무가 되는 살림살이를 찬찬히 물려받고 지켜보면서 자라요.



두 발로 걷는 길에서는 풍경과 하나로 어우러져 숱한 이야깃거리를 주워 담을 수가 있었다 … 차가 없어진 것을 무척 서운해 했던 다울이도 자전거나 수레를 실컷 탈 수 있어서 좋은지 나들이 갈 때마다 연신 노래를 불렀다. (91쪽)


잘은 몰라도 도시에 나가 길 가는 젊은 사람 붙잡고 나락이 뭔지 아냐고 물으면 대답 못할 사람도 수두룩하지 않을까 … 나는 그와 같은 무지와 무관심이 ‘쌀 수입 전면 개방’이라는 황당무계한 정책을 펼치게 하는 거라고 본다. 백성이 어리석으면 권력자가 백성을 함부로 보고 제 뜻대로 쥐고 흔들게 마련이니까. (107∼108쪽)





  할머니는 저마다 이야기꾼입니다. 할머니마다 오랜 나날 천천히 걸어온 살림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서로서로 노래꾼입니다. 할머니마다 오랫동안 찬찬히 일하고 살림하며 부른 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눈물이 젖은 이야기이든, 웃음이 묻어나는 노래이든, 할머니는 이녁한테 아이와 같을 젊은 아낙한테 도란도란 말을 걸고 받습니다. 두멧자락 할매가 쓰는 투박한 고장말을 모두 다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어도, 포근하면서 살가운 숨결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귀로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듣고 몸으로도 듣습니다. 할머니는 말에 앞서 몸이요, 이론이나 지식이 아닌 삶으로 모두 다 보여주고 알려주거든요.



“이것도 모르간디? 나는 통 이렇게 꿰매서 신어. 비 오는 날이믄 양말 꿰매는 것도 재미져.” (122쪽)


가지러 온다면 모를까 뭐하러 보내느냐고 그랬더니 “주고 자픈디? 뭐 있으믄 다 주고 자퍼”라고 대답하시며 그리움에 젖은 눈망울을 보이신다. (162쪽)


“너무 뜨거와도 안 되고 덜 뜨거와도 안 돼아. 너무 뜨거우믄 메주가 안 뜨고 거죽만 깨까시 말라붙더랑께. 메주가 추우믄 검은곰팡이가 나불고. 그란께 불 조절을 잘해야 써.” “어떻게 잘이요?” “워따, 그걸 어떻게 말로 혀. 집이가 적당히 알아서 해야제.” (177쪽)



  몸으로 겪은 삶을 몸으로 들려줍니다. 몸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몸으로 듣습니다. 《할머니 탐구 생활》을 쓴 정청라 님은 멧골마을에 깃든 작은 집에서 그야말로 작은 풀꽃 같은 할머니들을 마주하면서 이 작은 풀꽃 한 송이에서 온누리를 포근히 감싸는 기운을 느낍니다. 크고 밝으며 따스한 해님이 지구별을 감싸고, 작고 낮으며 조용히 피어나는 풀꽃이 지구별을 덮으면서 해님을 마주 바라봅니다. 넉넉하고 푸르며 싱그러운 숲이 마을을 어루만지고, 조그맣고 여리며 고요한 풀씨 한 톨이 지구별이 고루 퍼지면서 숲이 새롭게 자라도록 북돋웁니다.


  할머니 한 분은 풀꽃이요 풀씨라고 할 만합니다. 할머니 한 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풀꽃 같은 노래이고 풀꽃 같은 사랑이라고 할 만합니다. 할머니 한 분한테서 듣는 이야기는 풀꽃 같은 사랑이 어리는 이야기이고, 할머니 한 분한테서 받는 사랑은 숲을 이루는 작은 풀씨 같은 품에서 피어나는 사랑이라고 할 만합니다.





“걱정 안 해도 되겄네. 애기 배꾸리가 든든허니 꽉 찼구만. 배 곯은 아그는 배꾸리가 이러지를 않는단 말여. 내가 새대기 때, 이 마을 아그들 동냥젖 많이 묵여봐서 안당께.” (254쪽)


내가 밭일에 지쳐 고단해 하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쉬다 해라!” 하는 설매실 할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그때가 쉬는 시간이 된다. 할머니가 어르신 몰래 가져온 소주병을 꺼내 큰 컵으로 하나 가득 따라 주시면 얼떨결에 받아 마시고는 알딸딸하게 취한다. (262쪽)



  오늘날 시골은 젊은이도 어린이도 자꾸 사라지는 고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시골은 할매와 할배한테서 살가우면서 슬기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고장이기도 합니다. 손수 삶을 짓는 살림살이를 보고 듣고 배우면서 마주할 수 있는 곳이 시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손수 사랑을 길어올린 보금자리를 보고 듣고 배우면서 어깨동무할 수 있는 곳이 시골이라 할 만합니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 한 마디에 마음이 놓이고, 할머니가 건네는 이야기 한 마디에 마음이 다사롭습니다. 가슴으로 아기를 품은 숨결로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로 살며 아이를 돌보는 사이에 할머니가 되며, 할머니는 다시 천천히 아이다운 마음으로 거듭나면서 흙내음 어린 웃음을 짓습니다. 시골 아낙으로 살림을 짓는 정청라 님은 이 흙내음 어린 웃음을 날마다 보고 듣고 마주하는 사이에 아주 천천히 나이를 먹고 살림을 먹고 슬기를 먹고 이야기를 먹으면서 아이들하고 새롭게 자랄 테지요. 먼 뒷날 아이들이 씩씩하고 의젓하게 자라서 짝님을 만나 아이를 낳을 무렵이 되면, 멧골마을을 예쁘면서 알뜰히 지키고 가꾸는 새로운 할머니가 되실 테고요. 4348.12.28.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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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생태 개념수첩
노인향 지음 / 자연과생태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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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93



숲에서 도롱뇽이 사라지면 사람은 어떻게 될까

― 자연생태 개념수첩

 노인향 글

 자연과생태 펴냄, 2015.9.1. 12000원



  한 해가 저무는 섣달 끝자락에 갈퀴덩굴이 돋습니다. 갈퀴덩굴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많지 않으나, 한겨울에도 푸른 잎사귀를 내놓으면서 고마운 나물이 되어 줍니다. 볕이 안 드는 자리에서는 봄이 되어야 돋지만, 볕이 잘 드는 자리에서는 한겨울에도 씩씩하게 올라와요. 갈퀴덩굴은 무척 보드랍기 때문에 한손으로도 얼마든지 톡톡 훑을 만합니다. 두 손을 써서 훑으면 더 빨리 훑을 수 있습니다. 아침에 밥을 차리면서 냄비에 불을 올린 뒤에라도 가볍게 슥 훑어서 나물 한 접시를 올릴 만합니다.


  그러면 갈퀴덩굴은 무슨 맛일까요? 갈퀴덩굴 맛이지요. 딱히 남다르다 싶은 냄새나 맛까지 나지는 않는다 싶도록 옅은 냄새나 맛입니다. 풀먹기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아주 쉽게 먹을 만한 나물이라고 할 만해요. 무엇보다도 한겨울 밥상을 푸르게 돋보이도록 해 주는 고마운 풀입니다.


  아마 먼 옛날부터 사람뿐 아니라 풀짐승 모두 이 갈퀴덩굴 같은 들풀을 무척 반가이 여기고 고마이 누렸으리라 생각합니다. 볕발라서 눈이 쌓이지 않는 자리에 돋는 이 예쁘장한 풀포기는 수많은 목숨을 고이 살리면서 이 땅에서 씨앗을 퍼뜨렸으리라 생각해요.



곤충은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하늘을 날았고, 전체 동물 수의 80퍼센트를 웃돌며, 지구 생태계 순환을 돕는 데 이바지한다. 또한 먹지 않고도 자랄 수 있으며,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모습을 바꿀 수도 있다. 이쯤은 되어야 지구의 주인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32쪽)


도롱뇽, 제주도롱뇽, 고리도롱뇽, 꼬리치레도롱뇽, 그리고 이끼도롱뇽. 우리나라에 사는 도룡뇽 무리는 이 아이들이 모두다. 이 중 제주도롱뇽과 고리도롱뇽은 우리나라 고유종이고, 꼬리치레도롱뇽은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산다. (45쪽)



  노인향 님이 쓴 《자연생태 개념수첩》(자연과생태,2015)을 읽습니다. 책이름처럼 ‘자연생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그마한 책입니다. 어린이와 푸름이도 이 책을 수첩처럼 곁에 두고 찬찬히 읽으면서 ‘사람을 둘러싼 숲’을 돌아보도록 돕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가만히 보면 《자연생태 개념수첩》에 깃든 줄거리는 예부터 여느 어버이가 여느 아이한테 삶으로 물려주거나 들려주던 이야기입니다. 옛날에는 ‘책이 없었’으니 그저 삶으로 가르치거나 보여주었을 테지만, 책이 없었어도 누구나 손수 삶을 지었기에 아이들은 어버이 곁에서 삶을 찬찬히 지켜보면서 배워요. 풀이나 벌레나 짐승한테 붙인 이름도 어버이가 하나하나 알려주고, 풀이나 벌레나 짐승이 사람하고 어떤 사이인가 하는 대목도 어버이가 하나하나 가르칩니다.



관속식물의 전체 종수가 약 23만 종인 것에 비하면 (이끼식물은) 수가 매우 적지만, 지구를 푸릇푸릇하게 유지시켜 주는 데는 관속식물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하는 무리다. (81쪽)


목적 없이 우연히 발생한 돌연변이가 유전되는 것도 진화의 일부다. 사람의 눈에나 ‘발전’ 혹은 ‘퇴화’처럼 보일 뿐, 이유가 있든 없든 세대를 거듭하며 변하는 것은 모두 진화이다. (115쪽)



  도롱뇽 이야기를 다루는 대목에서 한동안 생각에 잠깁니다. 천성산에서 꼬리치레도롱뇽을 보았다고 하는 얘기가 퍼질 무렵, 고작 도롱뇽 한 마리 때문에 고속철도 공사를 멈추거나 공사구간을 바꿀 수 없다는 소리가 여러 매체에서 여러 지식인들 입과 손으로 넘쳐났습니다. 아마 ‘꼬리치레도롱뇽’이라는 이름조차 처음 들은 사람이 많을 테며, 도롱뇽을 두 눈으로 본 사람은 몹시 드물었겠지요. 한국하고 일본에만 산다고 하는 꼬리치레도롱뇽을 왜 지키거나 돌보아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퍽 많지 않았으랴 싶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도롱뇽 한 마리가 이 땅에서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이 땅에서 늑대나 이리나 여우나 범이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는데, 이러한 숲짐승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회색늑대가 멸절된 (옐로스톤) 공원은 잠시 평화로워진 듯했으나, 이내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공원에서 나무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남아 있는 나무는 대부분 키가 2미터가 넘고 수령이 70년이 넘는 고목들뿐이었다. 이는 초식동물의 공격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키 큰 나무만 생존했고, 회색늑대를 전멸시킨 이후에는 나무가 아예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130쪽)



  오늘날 시골에서는 멧돼지나 고라니나 노루가 마을까지 내려와서 밭을 헤집는다면서 걱정하거나 푸념하는 목소리가 큽니다. 자, 그러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늑대나 이리나 여우나 범이 이 나라에서 ‘사라지지 않았’어도 멧돼지나 고라니나 노루가 함부로 마을까지 내려왔을까요? 숲에서 멧돼지나 고라니나 노루를 틈틈이 잡아서 먹는 짐승이 사라지면서 멧돼지니 고라니니 노루니 함부로 마을까지 내려오지 않을까요? 미국 옐로스톤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 나라 이 땅에 큰 숲짐승이 사라지면서 숲이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농약을 함부로 치거나 개발을 마구 하기 때문에도 숲이 달라지지만, 숲을 고이 이루는 여러 목숨붙이 가운데 이 아이가 사라지고 저 아이가 사라지면서 그만 먹이사슬이 깨지고, 숲이 시름시름 앓아요.


  꼬리치레도롱뇽뿐 아니라 개구리 한 마리도 섣불리 잡아서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뱀 한 마리도 함부로 잡아서 죽일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뱀 한 마리가 잡는 쥐가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직도 시골에서는 제비집을 허무는 분들이 많은데, 왜 제비집을 허무느냐 하면 1970년대부터 무시무시하게 불던 새마을운동 때문입니다.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면서 시골이며 도시이며 제비집을 허물어서 ‘집과 마을을 깨끗하게 하라’는 지시와 명령이 퍼졌거든요.


  제비가 사라지는 마을에서 날벌레가 날뜁니다. 제비뿐 아니라 들새나 숲새가 사라지는 곳에서 애벌레가 들끓습니다. 애벌레는 어떤 약으로도 물리치지 못해요. 사람만 괴롭지요.



외래종이 생태계교란생물로 변하는 데는 난개발과 남획 등으로 인해 자연환경이 훼손된 탓도 크다. 아직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잘 보존된 숲이나 산에서는 외래종이 쉽게 터를 잡지 못한다고 한다. (139쪽)



  함께 사는 지구별이기에 함께 즐거운 삶을 누리는 길을 생각할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터전을 이룹니다. 사람만 살 수 없고, 몇몇 힘센 나라만 잘살 수 없습니다. 서로 사이좋게 어우러질 때에 아름다운 삶이고, 서로 아끼고 보살피는 손길이 될 때에 사랑스러운 삶입니다.


  이 지구별에서 누구나 똑같은 바람을 마신다는 대목을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나 똑같은 물을 마시고, 누구나 똑같은 흙을 밟으며, 누구나 똑같은 풀을 먹습니다. 누구나 똑같은 햇볕을 쬐고, 누구나 똑같은 비와 눈을 맞이합니다. 사람과 사람도 이웃이고, 사람과 벌레도 이웃입니다. 사람과 물고기도 이웃이고, 사람과 짐승도 이웃이에요. 《자연생태 개념수첩》은 ‘개념을 생각하’도록 도우려 합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너와 내가 저마다 아름다운 숨결이라는 대목을 생각하도록 살며시 이끕니다.



일본어로 자연을 의미하는 ‘시젠’은 “산이나 강, 풀, 나무 등 인간과 인간의 손이 닿은 것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이자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뜻하는데, 순서가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국어사전의 정의와 거의 똑같다 할 만큼 비슷한 것 아닌가! (195쪽)


지금 우리가 쓰는 ‘자연’이라는 말은 서양의 ‘네이처’를 일본이 ‘시젠’으로 도입했고, 그것을 우리가 다시 ‘자연’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이라는 단어뿐만 아니라 그 안에 내포된 서구적 자연관도 그대로 흡수한 것이다. (196쪽)



  오늘날 한국에서 흔히 쓰는 ‘자연보호’ 같은 외침말은 일본에서 들어왔습니다. 시골에서는 ‘자연보호’ 같은 외침말이 없었어도, 또 ‘새마을운동’ 같은 바람이 불지 않았어도, 사람들 스스로 쓰레기 없이 정갈하며 아름답고 즐거운 마을살림과 두레살림을 북돋았습니다. 비닐이나 농약이나 비료나 기계가 아니라 구슬땀 흘리는 손길로 알뜰살뜰 흙을 가꾸던 시골살림이었다고 할까요. 자연보호나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기 앞서는 누구나 수수하게 따사로운 손길로 흙이며 숲이며 풀을 사랑하던 나날이었다고 할까요.


  ‘자연’이나 ‘생태’는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자연이든 생태이든 네이처이든, 이런 외국말이 아닌 한국말 숲이든, 모두 이 지구별과 우주에서 서로 어깨동무하는 삶과 사랑을 나타냅니다. 밥을 먹는 사람은 자연을 먹고 생태를 먹으며 네이처나 숲을 먹습니다. 나락 한 톨이 어디에서 나오겠어요? 바로 흙에서 나오지요. 나락 한 톨이 무엇을 받아들이며 자라겠어요? 해님하고 비님하고 흙님을 받아들이지요. 사람뿐 아니라 지구별 모든 목숨붙이가 늘 마시는 바람(공기)이 자연·생태·네이처·숲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마치 ‘자연’이라도 되는 듯이 잘못 알거나 가르치기 때문에, 또 ‘자연보호’는 도시에서 쓰레기를 안 버리거나 줄이는 길이라도 되는 듯이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어른들부터 자연이 무엇이고 숲이 무엇인가부터 처음부터 새롭게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숨이 있는 모두가 자연이고, 다른 목숨(밥)을 받아들이는 모두가 숲입니다. 사람은 사람 손길이 닿은 것도 먹고 다루며 곁에 둘 뿐 아니라, 숲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튼튼합니다. 숲은 숲대로 흐르기도 하지만, 사람이 사랑스레 어루만지는 손길을 받으면서 한결 푸릅니다. 숲을 볼 줄 알 때에 숲을 알고, 숲을 알 때에 숲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사람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를 느낍니다. 4348.12.26.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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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의사에게 가르쳐준 것 - 하버드 의학박사가 농장에서 찾은 치유 비결
대프니 밀러 지음, 이현정 옮김 / 시금치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숲책 읽기 92



항생제와 첨단장비로는 ‘아픈 데’를 못 고쳐

― 땅이 의사에게 가르쳐 준 것

 대프니 밀러 글

 이현정 옮김

 시금치 펴냄, 2015.11.25. 18000원



  ‘내 땅’을 누리는 사람하고 ‘내 땅’을 못 누리는 사람은 그야말로 삶이 다릅니다. 내 땅 한 뙈기라도 있는 사람은 삶을 새롭게 가꾸는 꿈을 키울 만하지만, 내 땅 한 뙈기조차 없는 삶은 삶을 새롭게 가꾸는 꿈을 좀처럼 못 키웁니다.


  땅이 없어도 돈이 있으면 되지 않느냐 하고 여길는지 모르나, 돈은 있되 땅은 없는 사람은 아직 삶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돈으로 사서 얻을 수 있는 살림은 ‘끝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사서 얻는 모든 것은 ‘땅에서 나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마당이 한두 평이라도 있는 집하고 마당이 한두 평조차 없는 집은 사뭇 다릅니다. 마당이 있어 텃밭이나 꽃밭을 둘 수 있는 집하고 마당은 손바닥만큼조차 없어서 텃밭도 꽃밭도 두지 못하는 집은 그야말로 달라요.



나는 이때 처음 ‘공장형 농업’에 대응하는 ‘공장형 의료’라는 말이 떠올랐다. (33쪽)


“이 땅에 대해 걱정이 엄청 많았죠. 황폐해져 있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 ‘나는 양분이 부족한 농산물을 기르는 많은 사람들 중 일부가 되기를 원하는가?’ 양분이 부족한 흙에서 양분이 풍부한 음식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거든요.” (47쪽)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는 대프니 밀러 님이 쓴 《땅이 의사에게 가르쳐 준 것》(시금치,2015)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땅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의사로 일하는 대프니 밀러 님은 환자를 마주할 적에 항생제 같은 약품이나 여러 첨단장비만으로는 ‘아픈 곳’을 모두 다스릴 수 없다는 대목을 깨닫습니다. 의사인 대프니 밀러 님 스스로도 어디가 아프거나 힘들 적에 항생제 같은 약품만으로는 하나도 낫게 하지 못할 뿐 아니라 되레 아픈 데를 도지게 하거나 다른 데까지 더 아프게 한다는 대목을 깨닫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의사 스스로도 아픈 데가 있다는 뜻입니다. 의사 스스로도 아픈 데를 바로잡거나 고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바보스러운 노릇일까요? 아니면 ‘자기고백’이나 ‘내부고발’일까요?



전통적인 농부들은 살충제, 제초제, 화학비료 없이 땅을 일구었고, 거름을 만들어 땅으로 돌려보내는 농사를 지었다. 이런 농사 시스템은 여러 세대 동안 지속되었는데, 그것은 그 방식이 땅과 가축의 건강, 그리고 사람의 건강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61쪽)


큰 유통 체인이 제공하는 유기 농산물은 거의 예외 없이 엄청 큰 규모의 농장에서 생산된 것이고, 유기농 인증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지켜서 재배한 것이다 … 그리고 무경운 농법을 활용하는 대신 해마다 밭을 갈아엎어서 비옥한 표토가 강으로 쓸려가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땅이 다음 작물에게 영양분을 줄 수가 없게 된다. (66쪽)



  의사이자 어머니인 대프니 밀러 님은 ‘환자가 아픈 데를 말끔히 터는 길’을 찾으려는 뜻에서 ‘땅’을 찾아나섭니다. 환자도 환자이지만 의사인 이녁 스스로 ‘아프지 않은 삶’을 살피고 ‘아프지 않은 삶을 넘어서 즐거운 삶’을 생각하고 싶어서 땅을 돌아봅니다.


  오늘날 불거진 관행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땅과 사람을 살핍니다. 이런 뒤에는, 먼먼 옛날부터 이어온 자연농법으로 흙을 가꾸는 땅과 사람을 살펴요. 공장 축산이 이루어지는 땅을 찾아가서 몸소 살펴보고, 자연 방목을 펼치는 땅을 찾아가서 몸소 살펴봅니다.


  의사로서 대프니 밀러 님은 ‘두 가지 땅’이 얼마나 어떻게 다른가를 새삼스레 헤아립니다. 어마어마하게 커지는 도시에서는 조그마한 텃밭조차 받아들일 틈이 없고, 이러한 도시에서는 시골에 커다랗게 지은 ‘관행농법 농장’에서 한꺼번에 엄청나게 많이 거두는 곡식이나 고기를 받아들이는 얼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달리 경제와 사회 모두 ‘작은 고장’이나 ‘작은 마을’ 얼거리로 나아가는 곳에서는 돈을 투자해서 더 큰 돈을 버는 얼거리가 아니라 즐겁게 일해서 즐겁게 나누는 삶이 됩니다.



앨리는 자신이 냉동 요리, 테이크아웃 음식, 에너지 바, 보조제에 그만큼 많은 돈을 쓰고 있다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다. (80쪽)


“정말 개처럼 열심히 일했지만, 호르몬, 백신, 구충제, 인공수정 비용, 사료, 질소비료, 트랙터 연료 따위에 점점 더 돈이 많이 들어가더군요. 그런데도 쇠고기 가격은 20년간 변하지 않았고요.” (93쪽)


“쓰레기가 들어가서 쓰레기가 나오는 것과 같아요. 많은 소들이 똥이 배에 닿도록 가득 찬 곳에 살고 있고, 영양가 있는 것을 먹지 못해요. 그 소젖을 살균한 것은 인간이 섭취하기에 적당하지 않아요. 맞아요. 그런 우유는 살균해야 돼요.” (112쪽)



  《땅이 의사에게 가르쳐 준 것》을 쓴 의사는 농사꾼이 아닙니다. 이 책을 쓴 분은 흙을 잘 안다거나 풀이나 나무를 잘 알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흙이나 밥이나 땅이 어떠한가를 느낄 줄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조차 없는 ‘공장 양계장’에 갇힌 닭이 어떠한가를 살핀 뒤에, 자연 방목을 하는 닭이 어떠한가를 살필 적에, 두 닭이 어떻게 다를 뿐 아니라 두 닭이 낳은 달걀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대목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이 있어요.


  의사로서는 처방전만 쓰면 될는지 모릅니다. 의사로서는 진찰만 하면 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사도 사람이기에 아플 수 있겠지요. 의사 스스로 아플 적에는 의사 스스로 항생제 처방만 하면 다 나을까요? 의사 스스로 아플 적에는 다른 의사한테 진찰을 받고 처방만 받으면 다 나을까요?


  《땅이 의사에게 가르쳐 준 것》이라고 하는 책은 ‘뭔가 아니다’ 하고 느끼는 마음에서 태어납니다. 항생제와 처방전과 첨단시설로는 ‘아픈 데’를 낫게 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마음에서 태어납니다.



일찍 젖을 뗀 송아지들이 풀을 먹지 않으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어미 소와 함께 풀을 뜯는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코디는 자신 있게 말했다. (128쪽)


“닭들이 스트레스를 덜 받고 더 행복해 하니까 달걀이 좋아요. 나도 행복하고, 경제적으로도 더 낫습니다.” (150쪽)


앤드루는 방울뱀을 보이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가끔 뱀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렸다. 새로 묘목을 심은 포도밭에 조그만 땅굴이 움푹움푹 파여져 묘목들이 땅속에서부터 눈에 안 보이는 적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212쪽)



  햇볕을 쬐고 빗물을 마시면서 자란 남새하고, 비닐집에서 석유난로와 비료와 수돗물로 자란 남새는 생김새도 맛도 냄새도 모두 다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비닐집에서 석유난로와 비료와 수돗물을 써서 남새를 키워도 얼마든지 유기농 인증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유기농 인증은 ‘유기농’으로 짓기만 하면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햇볕을 못 쬔 유기농 남새나 열매를 먹는 사람은 무엇을 먹는 셈일까요? 사료만 먹고 자란 고기를 먹는 사람은 무엇을 먹는 셈일까요? 항생제와 촉진제로 한 달 만에 몸뚱이가 불어나서 고기닭으로 잡히는 살점을 먹는 사람은 무엇을 먹는 셈일까요?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물어볼 만합니다. 어미 소하고 들판을 노닐며 풀을 뜯은 적이 없는 송아지는 사료에만 길들기 때문에 나중에 풀밭에 풀어 놓아도 어찌할 줄 모르면서 풀을 안 먹거나 못 먹는다고 합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은 어릴 적부터 보육원과 어린이집과 학교와 학원에서 아주 오랫동안 지내는데, 이 아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거나 무엇을 할 줄 모를까요?



“저는 도시농업이 질병 예방 역할을 한다고 봐요.” 캐런은 이렇게 말하고는 뉴욕 시의 독립구 중에 브롱스만큼 질병 예방이 필요한 곳도 없다고 덧붙였다. (254쪽)


“그렇지만 한 종류의 성분에 지나치게 집착하지는 마세요.” 애니가 주의를 주었다. “그렇게 되면 제약회사와 똑같이 사고하는 거예요. 허브로 약품을 만들려고 하는 것과 같지요.” (302쪽)



  사람들이 저마다 ‘내 땅’을 누릴 수 있다면 삶도 사회도 마을도 송두리째 바뀔 만하리라 봅니다. 사람들이 층층이 올린 건물에서만 살지 말고,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며 저마다 나무를 심고 텃밭을 조그맣게라도 가꿀 수 있으면, 삶이며 사회며 마을이며 나라며 모두 새롭게 거듭날 만하리라 봅니다.


  곰곰이 살피면, 정부에서는 ‘주택 정책’을 세우면서 ‘마당 없는 아파트’만 지으려 합니다. ‘마당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하려는 길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주차장은 없어도 마당이 있어야 할 노릇이고, 도시가 아닌 시골이어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삶터입니다. 아파트를 때려지은 뒤에 나무 몇 그루 장식품처럼 박는 겉치레가 아니라, ‘내 땅’과 ‘내 집’을 누리는 사람들이 스스로 나무를 심어서 보금자리하고 나무하고 땅을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는 사회 얼거리가 될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삶이 태어나리라 봅니다.


  ‘아픈 데’를 낫게 하려면, 아니 처음부터 ‘아픈 데’가 없는 삶이 되도록 하려면, 우리는 누구나 내 땅을 누릴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내 땅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내가 먹을 남새나 곡식이나 열매에 섣불리 항생제나 비료나 농약을 치지 못합니다. 가장 좋으며 가장 나은 밥을 먹으려 할 테니까요. 4348.12.23.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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