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 땅과 사람을 이어주던 생명
최수연 글.사진 / 그물코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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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찾을 수 없기에 사진으로 찍을 만하지 않다
 [찾아 읽는 사진책 65] 최수연, 《소》(그물코,2011)



 최수연 님이 빚은 사진책 《소, 땅과 사람을 이어 주던 생명》(그물코,2011)을 들여다보면서 생각합니다. 소를 사진으로 담아 책으로 내놓은 분이 드문드문 있습니다만, 이 사진책 《소》처럼 흙에 두 발을 디디며 논밭을 일구는 일소를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사진으로 담은 분은 퍽 드물구나 싶어요. 그런데, 일소를 담은 사진책만 드물지 않습니다. 흙일꾼을 담은 사진책 또한 드물어요. 흙을 일구는 일꾼을 사진으로 담아 본들 신문이나 잡지에서 잘 실어 주기 어렵습니다. 어쩌다 한두 번 싣는다 하더라도 꾸준하게 실어 주기는 힘듭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 신문과 잡지는 흙을 일구면서 살아가는 사람 이야기를 다루어서는 돈벌이를 할 수 없거든요. 신문·잡지뿐 아니라 여느 책도 이와 마찬가지예요. 흙일꾼이든 일소이든 푸성귀이든 논밭이든 바다이든 갯벌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밑바탕이 될 터전과 땀방울을 다루어서는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대학교를 다니거나 나라밖으로 배우러 다니면서 사진길을 걷는다는 젊은이는 거의 모두 패션사진을 하려고 합니다. 드물게 다큐사진에 온삶을 바치겠다고 외치는 젊은이가 있습니다만, 패션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흙일꾼이나 일소를 사진감으로 삼지 않아요. 아니, 흙일꾼이나 일소를 사진감으로 삼아서야 돈벌이를 할 수 없겠지요.

 어찌 되든 먹고살아야 합니다. 누구나 밥을 먹으며 살아야 합니다. 밥을 굶으면서 사진길을 걸으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같이 패션사진으로 흐르는 한국땅 사진밭을 나무랄 수 없습니다.

 그저 한 가지를 말할 뿐입니다. 일소이든 흙일꾼이든 사진으로 담으려 한다면, 일소와 흙일꾼처럼 흙을 만지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스스로 흙땅을 보금자리로 삼아 시골에서 시골사람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흙을 믿고 흙을 사랑하며 흙을 아끼는 나날을 누리면 돼요. 사진이란 삶이고, 삶에서 태어나는 사진이며, 삶을 아낄 때에 사진을 아끼는 만큼, 흙을 사랑하면서 믿는 나날이면서 사진기를 가만히 손에 쥔다면, 일소하고 흙일꾼을 포근하게 사랑하는 따사로운 마음길로 어여쁜 사진 하나 차근차근 길어올리리라 생각해요.

 《소》를 빚은 최수연 님은 이야기합니다. “이제 일하는 소는 거의 볼 수 없다. 십여 년 전만 해도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은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들녘의 일꾼으로, 사람의 친구로 몇 백 년을 함께했던, 그러나 지금은 동화책에서나 만나게 된 일하는 소 이야기는 이렇게 사진으로 기록되면서 시작한다(4쪽).”고. 참, 그렇습니다. 그래도 일하는 소가 아예 없지 않습니다. 우리 식구 한 해를 살아온 충청북도 음성 멧골자락 건너편 마을에는 일소를 부려 논을 갈고 밭을 가는 할배가 있어요. 봄철에 시골버스를 타고 골골샅샅 천천히 지나다니다 보면, 어김없이 어느 시골자락에서든 일소를 부리는 흙일꾼을 만날 수 있어요. 옛날과 견주면 숫자가 무척 많이 줄었지만, 일소를 아끼는 착한 흙일꾼은 씩씩하게 살아갑니다.

 가만히 살피면, 최수연 님 말마따나 일소가 크게 줄었습니다. 왜냐하면 일소에 앞서 흙일꾼부터 크게 줄었으니까요. 흙을 일구며 살아가는 할매와 할배가 당신 딸아들한테 흙에서 일하도록 이끌기보다 흙을 떠나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며 펜대나 셈틀을 붙잡으라고 내몰기에, 더더욱 일소를 마주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시골마을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는 시골마을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한테 ‘너희는 커서 흙일꾼이 되어야지.’ 하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시골마을 초·중·고등학교는 이곳 아이들이 여느 때부터 흙일을 하면서 튼튼한 흙일꾼으로 자라도록 돕지 않습니다. 이것을 탓하거나 저것을 나무라기 앞서, 오늘날 이 터전에서는 흙일꾼으로 태어나 흙일꾼으로 살아가는 얼거리부터 무너졌어요. 돈벌이나 밥벌이에 휘둘리면서 삶짓기나 삶가꾸기를 헤아리던 마음결이 흔들려요.

 머나먼 나라에서 사진감을 찾는 젊은이를 꾸짖을 수 없습니다. 사진을 처음 익혀 사진기를 갓 손에 쥔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고 도시에서 살아가며 도시에서 어우러지는 사람들하고 섞입니다. 이들한테는 도시내기로 살아가며 패션사진을 찍거나, 도시에서 출사를 나가는 다큐사진을 찍는 길 말고는 스스로 알아보거나 찾아나설 사진길이 까마득합니다. 배우지도 가까이하지도 만나지도 스치지도 못하는 흙이자 흙일꾼이자 일소예요. 도시에서 살아가며 건물을 찍거나 자동차를 찍거나 자동차 옆에 선 모델을 찍는 사진쟁이는 많을 테지만, 시골에서 살아가며 호미를 찍거나 밭고랑을 찍거나 가랑잎을 찍는 사진쟁이는 있기나 있겠습니까.

 더 파고들면,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치고, 바깥으로 나다니며 돈벌이하기에 바쁜 나머지, 집에서 집식구들 사랑스러운 삶자락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즐거이 사진으로 담는 사람부터 퍽 드물어요. 내 보금자리부터 아름답게 느끼면서 아름답게 일구는 삶이 못 되기 일쑤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럴듯한 모습에 얽매이기 일쑤예요.

 최수연 님은 “13년 전 나는 전주를 지나고 있었고 내 앞에 나타난 풍경은 우연이었다. 처음 소 사진을 찍을 때는 이렇게 많은 것들이 사라질 줄 몰랐다. 그저 그 자리에 있었기에 셔터를 눌렀다. 그 세월이 벌써 15년을 흘렀고 많은 것이 달라졌다. 사라진 것들이 너무 많다(118∼119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지난 열다섯 해뿐 아니라 앞으로 맞이할 열다섯 해 사이에도 아주 많은 모습들이 달라지리라 봅니다. 언제나 달라지는 삶입니다. 늘 새로운 삶입니다. 달라지기 앞서 예전 모습이기에 더 멋스럽거나 더 애틋하지 않습니다. 새로 맞이할 모습이라서 더 어여쁘거나 더 값지지 않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내가 선 이곳이 가장 멋스럽고 더없이 어여뻐요. 오늘을 살아가는 내가 어깨동무하는 살붙이랑 이웃이랑 동무가 참으로 애틋하면서 그지없이 값져요.

 사진책 《소》는 잊혀지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사진책 《소》는 따뜻하게 사랑하면서 아낄 내 삶이 깃들 보금자리를 어떤 빛깔로 일구고 싶은가 하는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려줍니다. (4344.10.10.달.ㅎㄲㅅㄱ)


― 소, 땅과 사람을 이어 주던 생명 (최수연 글·사진,그물코 펴냄,2011.10.1./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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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컷, 꿈을 담는 카메라 - 아프리카 부룬디 아이들이 찍은 아프리카
손은정 지음 / 동녘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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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내가 찍고 내가 즐기는’ 삶이자 사랑
 [찾아 읽는 사진책 63] 손은정, 《27컷, 꿈을 담는 카메라》(동녘,2011)



 사진은 내가 찍습니다. 사진은 내가 봅니다. 사진은 내가 찍어 내가 즐깁니다. 어느 누가 찍어 주는 사진이 아닙니다. 남들 보라고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누군가한테서 돈을 받아 사진을 찍더라도 ‘찍어 주는’ 사진이 아니라 ‘찍어서 내가 즐기는’ 사진입니다. 혼인잔치나 돌잔치에서 사진을 찍을 때에도 ‘찍는 사진’이지 ‘찍어 주는 사진’이 아닙니다.

 신문사나 잡지사나 출판사에서 글 한 조각 써 달라고 연락하기에 쓰는 글이라 할 때에도 나 스스로 내 ‘삶을 쓰는 글’입니다. 돈에 따라 ‘써 주는 글’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즐기지 못할 때에는 글을 쓰지 못합니다. 나 스스로 내 나름대로 일구는 삶이 아니라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사귀지 못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흙을 일구지 못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배를 몰아 고기를 낚지 못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높고낮은 멧자락을 오르내리지 못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몰지 못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장사를 하지 못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아이들 웃음소리를 마주하지 못합니다.

 오직 내 사랑을 느끼고 내 사랑을 나누며 내 사랑을 꽃피우는 삶입니다. 사진찍기와 사진읽기는 내 사랑을 느끼고 내 사랑을 나누며 내 사랑을 꽃피우는 삶을 빛내는 숱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손은정 님이 빚은 《27컷, 꿈을 담는 카메라》(동녘,2011)를 읽습니다. 손은정 님은 차풍 신부님 입을 빌어 “결국 도움을 받은 것은 나였고, 우리 프로젝트 팀 멤버였던 것이지요(차풍 신부,50쪽).” 하고 적바림합니다.

 ‘인도 사창가’에서 아이들과 함께 꿈을 꽃피우고 싶어 사진기를 나누어 주면서 사진삶을 일군 이야기를 담은 영화 〈꿈꾸는 카메라, 사창가에서 태어나〉(2004)를 본 몇몇 한국사람이 아프리카땅에서 ‘또다른 꿈을 담는 사진삶’을 나누어 보자면서 조그맣게 모임을 마련했고, 아프리카땅 조그마한 나라 하나를 골라 찾아갔다고 합니다. 사진책 《27컷, 꿈을 담는 카메라》에는 영화 〈꿈꾸는 카메라, 사창가에서 태어나〉를 닮고 싶은 몸짓이 고스란히 뱁니다. 그러나, 글쓴이를 비롯해서 차풍 신부님이나 ‘꿈카 모임’ 사람들은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영화 〈꿈꾸는 카메라, 사창가에서 태어나〉는 인도땅 자그마한 골목동네에서 오래오래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자 벗이요 벗바리가 되면서 사진삶을 일굽니다. 한 번 스치듯 찾아와서 어느 결에 떠나고 마는 손님으로 마주하지 않습니다. 착한 이웃이자 좋은 벗인 한편 고마운 벗바리였기에 〈꿈꾸는 카메라, 사창가에서 태어나〉가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듯한 글월을 새긴 옷을 똑같이 맞춰 입고 아프리카땅 작은 나라 작은 마을로 찾아갔다면 〈꿈꾸는 카메라, 사창가에서 태어나〉가 태어날 수 없습니다. 작은 나라 작은 마을 사람들하고 이웃이 되어야지, 손님으로 찾아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부룬디땅 사람들이 쓰는 말을 한 마디조차 할 수 없으면서 어떤 꿈과 사랑과 믿음을 나눌 수 있을까요.

 “미람뱌에 처음 도착했을 때 뛰어나오는 아이들이 너무나 반가웠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우리는 ‘아마호로’ 다음에 한 단어조차 이어가질 못하고 있었다. 키룬디어를 전혀 모른다는 건 그렇다치고, 우리는 불어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41쪽).” 같은 말을 적어서는 안 됩니다. 부룬디말이든 프랑스말이든 옳게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부룬디를 찾아가야지요. 부룬디를 찾아가려 했다면 모임 사람들 누구나 부룬디말을 익혀야지요.

 한국땅을 찾아와 ‘한국사람 삶과 꿈과 넋을 사진으로 담겠다’고 하는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이 한국말을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면서 사진을 찍거나 사진꿈을 키우겠다고 할까 궁금합니다. 꼭 ‘다큐멘터리’라서가 아니라 ‘사진’을 어떻게 찍어야 하는가를 모르는 채 어떤 사진삶을 나눌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부룬디가 되든 수단이 되든 콩고가 되든 나미비아가 되든 모로코가 되든, 아무것도 모를 뿐 아니라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웃이 되거나 벗이 되거나 벗바리가 될는지 궁금합니다.

 가만히 보면, 《27컷, 꿈을 담는 카메라》는 “사진이 주는 기쁨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절대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을 잡아서 내 곁에 둘 수 있다는 것(130쪽).”이라는 말처럼, ‘한국땅 큰도시에서 내 삶길을 어떻게 가다듬어야 좋을는지 몰라 헤매는 넋을 다잡는 여행이나 자원봉사’라는 테두리에서 ‘가난한 아프리카땅 찾아가기’를 했을 뿐 아닌가 싶습니다. 사진도 꿈도 사랑도 삶도 사람도 모르는 채 허둥지둥 〈꿈꾸는 카메라, 사창가에서 태어나〉를 흉내내거나 따라했을 뿐 아닌가 싶어요.

 더 많은 아이들한테 더 많은 사진기를 나누어 준대서 더 놀랍거나 더 뜻있거나 더 아름답다 싶은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애써 부룬디까지 찾아가지 않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동네에서 이웃집 아이 하나한테 사진기 하나를 선물하면서 이 사진기 하나로 내 이웃집 아이 하나가 사진삶으로 사진꿈을 북돋아서 사진빛을 일구도록 이끌면 돼요. 인도에서 뼈를 묻은 테레사 수녀님이 ‘사람들이 자원봉사를 하러 테레사 수녀님이 있는 인도로 오기’보다는 ‘사람들 스스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고향나라 고향마을에서 고향이웃을 알아보며 어깨동무하기’를 바랐듯, 영화 〈꿈꾸는 카메라, 사창가에서 태어나〉는 ‘인도 사창가나 뒷골목으로 찾아가서 사진꿈을 키우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 고향나라 고향마을 고향이웃과 어깨동무하는 길을 찾자’고 하는 이야기인 줄 느껴야 합니다.

 손은정 님은 “내 사진에 담을 최고의 순간을 찾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하고 감사하다 보면 내 삶은 행복해지는 것 아닐까(29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모로 보면 맞는 이야기이지만, 가만히 보면 틀린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내 삶을 꾸밈없이 사랑하면 내 삶은 내 꿈이 자라나는 아름다운 사랑으로 빛납니다. 이러한 내 삶을 나 스스로 따사로이 보듬는다면 내 손에 쥔 사진기로 내 삶을 사랑스레 담을 수 있습니다. 다만, 사진을 찍는 나는 내 삶을 찍는 내 사진이 “최고의 순간을 찾”는 사진이 될 수 없습니다. 내 삶은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나날’이거든요. 오늘이 더 아름답고 어제가 덜 아름답지 않습니다. 어제가 참 아름다웠지만 글피가 훨씬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언제나 고마운 하루요 언제나 빛나는 삶입니다. 모자라거나 엉성한 사진이란 없습니다. 잘나거나 돋보이는 사진 또한 없습니다. 모두 삶을 담는 사진입니다. 내가 내 삶을 좋아한다면 내가 찍는 사진은 참으로 나 스스로 좋아할 만한 사진입니다. 내가 내 삶을 좋아하지 못한다면 내가 찍는 사진은 참으로 나부터 좋아할 수 없는 사진입니다.

 거듭 이야기하자면, 사진은 ‘내가 찍고 내가 즐기는’ 삶이자 사랑입니다. 사진은 남한테 보여주는 사진이 아니요, 내가 나를 사랑하려는 사진입니다.

 한 가지 덧붙여, 영화 〈꿈꾸는 카메라, 사창가에서 태어나〉는 1회용사진기를 아이들한테 건네지 않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필름을 갈아끼우는 ‘참 사진기’를 건넵니다. 사진책 《27컷, 꿈을 담는 카메라》는 1회용사진기를 기념품처럼 건네고 맙니다. 코닥회사에서 도움을 받았다면 1회용사진기 말고 ‘작고 값싼 참 사진기’를 받아서 부룬디 아이들한테 건네야지요. 한 번 찍고는 끝인 어설픈 놀잇감이 아니라, 참말로 꿈을 꾸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부룬디 아이들 스스로 담으면서 살아가도록 손길을 뻗어야지요. (4344.10.4.불.ㅎㄲㅅㄱ)


― 27컷, 꿈을 담는 카메라 (손은정 글·사진,동녘 펴냄,2011.8.5./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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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S. Curtis (Hardcover) - The Women
Christopher Cardozo / Bulfinch Pr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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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스러운 삶을 사랑스러운 사진으로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5] 에드워드 커티스(Edward S.Curtis), 《the Women》(Buffinch,2005)



 마흔 살 일소와 여든 살 흙일꾼 할아버지가 나오는 영화 〈워낭소리〉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퍽 많은 사람들 가슴을 촉촉히 적셨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없습니다. 시골에는 극장이 없고, 극장을 찾아 도시로 마실을 가기도 힘드니까요. 아마 시골마을 여느 흙일꾼도 이 영화를 볼 일은 없겠지요. 〈워낭소리〉를 찍은 영화감독은 이 영화를 시골마을 흙일꾼한테 차근차근 보여줄 마음이었을까요, 도시사람한테 널리 내보일 마음이었을까요.

 새 보금자리를 찾아 온 식구를 이끌고 전라남도 고흥으로 찾아와서 여관에 묵는 동안 여관 텔레비전으로 〈워낭소리〉를 봅니다. 조용한 이야기를 조용한 눈길로 바라보며 담은 영화 〈워낭소리〉로구나 하고 느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시골에서는 어디를 가나 이렇게 늙은 소와 사람이 있고, 이 나라 시골 어디에서나 이처럼 늙은 소와 사람 이야기가 애틋합니다. 다만, 이제껏 시골자락 늙은 소와 사람 이야기를 글로든 그림으로든 사진으로든 영화로든 연극으로든 춤으로든 노래로든 담으려 애쓴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님과 권정생 님은 시골자락 일소 이야기를 어린이시로 썼으나, 이 같은 이야기를 찬찬히 곰삭이며 연속극이나 소설이나 뮤지컬로 일구는 일은 없습니다.

 시골자락에서 소는 한식구입니다. 보배로운 한식구입니다. 시골집 소마다 기나긴 나날에 걸친 많디많은 이야기가 깃듭니다. 〈워낭소리〉는 많디많은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한겨레 문화·예술인은 한겨레 일소를 들여다볼 줄 모르면서 갈비를 뜯거나 등심을 먹거나 꼬리곰탕을 즐기는데, 이제 겨우 일소 이야기 하나가 영화로 태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염소 이야기라든지 돼지 이야기라든지 닭 이야기라든지 고양이 이야기라든지 개 이야기라든지 살뜰히 다룬 적은 아직 없습니다. 더욱이, 〈워낭소리〉가 되든 〈트랜스포머〉나 〈아바타〉가 되든, 이들 영화는 으레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만 봅니다.

 이 나라에서는 무엇이든 도시로 보냅니다. 사람도 도시로 보내고 물건도 도시로 보냅니다. 유기농 곡식이든 화학농 곡식이든 온통 도시로 보냅니다. 물고기도 도시로 보내고 뭍고기도 도시로 보냅니다. 온통 도시에서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립니다. 책도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읽히다가 도시에서 버려집니다. 사진도 도시에서 찍고 도시에서 즐기며 도시에서 이야기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시골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사진찍기 나들이’를 다니는 사람이 더러 있을 뿐입니다.

 도시는 돈이 샘솟는다는 곳이고, 돈이 샘솟기 때문에 돈을 마음껏 쓰는 곳이 되기도 합니다. 시골 논밭을 사진으로 담아 시골 논밭에서 사진잔치를 여는 일이란 없습니다. 파란 빛깔 바다를 사진으로 담아도 바닷마을 사람들하고 즐기도록 사진잔치를 마련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삶이란, 사람이란, 사진이란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에드워드 커티스(Edward S.Curtis) 님이 빚은 사진을 그러모은 《the Women》(Buffinch,2005)을 펼칩니다. 2011년 8월 한국땅에서 드디어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책이 《북아메리카 인디언》(눈빛,2011)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습니다. 낱장으로 몇 장씩 나누어 책이나 신문에 쓰기는 하지만, 이렇게 책 하나로 묶은 적은 처음입니다. 어떤 분은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을 저작권 계약을 맺지 않고 함부로 100장 가까이 넣으며 책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너무 모르는 에드워드 커티스 님이고, 아는 사람은 제대로 헤아리지 않던 에드워드 커티스 님입니다.

 《the Women》은 에드워드 커티스 님이 빚은 사진 가운데 ‘여성’ 이야기를 간추립니다. 어쩌면, ‘남성’이라든지 ‘어린이’라든지 ‘할머니’라든지 ‘자연’이라는 테두리로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을 살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북아메리카 옛 토박이 삶자락을 찾아 북아메리카땅을 골골샅샅 누비던 에드워드 커티스 님이니, 토박이 겨레에 따라 사진책을 나누어 살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에드워드 커티스 님은 무슨 사진을 찍은 사람일까요.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은 어느 갈래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에드워드 커티스 님은 틀림없이 ‘북아메리카 옛 토박이’를 사진으로 적바림하고 글로 아로새겼습니다. 다른 여느 미국사람은 옛 토박이를 눈여겨보지 않을 뿐 아니라 옛 토박이를 끔찍하게 죽이거나 모질게 땅을 빼앗습니다. 여느 미국사람과 다른 삶이고 여느 미국사람과 다른 눈길이며 여느 미국사람과 다른 넋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문화인류학’이라는 테두리로 다가설 만합니다. ‘생활문화’나 ‘생활역사’라는 테두리로 들여다볼 만합니다.

 이야기를 바꾸어, 어느 한국 사진쟁이가 한국땅 골골샅샅 누비면서 ‘한겨레 토박이’를 사진으로 적바림하고 글로 아로새긴다면, 이러한 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궁금합니다. 이 또한 문화인류학이나 생활문화나 생활역사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사진과 글을 바라보아야 할는지요.

 사진은, 사진을 찍으려 하는 사람과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 서로 만나며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사람부터 스스로 내 삶을 알뜰히 일구어야 무엇을 사진으로 담아 누구하고 사진을 나누려 하는지를 또렷이 깨닫습니다.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 또한 이들 스스로 당신 삶을 알차게 돌보아야 이들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아름다운 빛줄기가 살가이 깃듭니다.

 억지로 어떤 모습을 지을 수 없습니다. 억지로 어떤 모습을 지을 때에는 그럴듯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지만, 그럴듯한 그림에 머물 뿐, 사람들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자리매기지 못합니다. 서로서로 삶을 사랑하면서 아끼는 길을 걸을 때에 비로소 ‘가슴 촉촉 이야기’입니다. 서로서로 삶을 보살피면서 일구는 나날을 누릴 때에 바야흐로 고운 꿈이 열매를 맺습니다. 잘 일구는 삶에서 잘 찍는 사진이 비롯합니다. 사랑스레 돌보는 삶에서 사랑스레 담는 사진이 비롯합니다. 바보스레 팽개치는 삶에서 바보스레 팽개치는 사진이 불거집니다. 겉치레로 꾸미는 삶에서 겉치레로 꾸미는 사진이 맴돕니다.

 《the Women》은 사랑스러운 삶을 사랑스러운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사랑스러운 삶으로 이어가도록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내(사진쟁이) 삶 또한 사랑스레 돌볼 때에 다 함께 아름다이 살아갈 온누리 무지개빛을 어깨동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보여줍니다. 기록사진은 사진이 아닌 ‘기록’이고, 문화인류학은 삶하고 동떨어진 ‘학문’이며, 생활문화나 생활역사는 삶과 문화와 역사하고 등지는 ‘지식’입니다. 사진은 기록이나 학문이나 지식이 아닌, 그예 사진으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찍는 사진이요, 살아숨쉬면서 나누는 사진이며, 살아내면서 사랑하는 사진입니다. (4344.9.3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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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
고영일 사진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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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길을 열 때에 천천히 드러나는 사진길
 [찾아 읽는 사진책 62] 고영일, 《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한울,2011)


 서울에서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과 대전에서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은 둘레 터전이 다릅니다. 찍은 사진을 받아들이는 둘레 사람들 느낌이나 마음이 다르고, 찍은 사진을 곱게 가다듬어 어느 한 자리에 그러모아 조그맣게 잔치를 마련할 자리가 다릅니다. 서울과 인천은 또 다르고, 서울과 목포는 또 다릅니다. 서울과 전주는 또 다르며, 서울과 구례는 또 다릅니다. 서울과 거창은 얼마나 크게 다를까요. 서울과 해남은, 서울과 고성은, 서울과 양양은, 서울과 문경은, 서울과 제천은 또 얼마나 다를까요.

 문화밭이나 예술밭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서울에서 사진을 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랑 ‘전라남도 고흥에서 사진을 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에 무엇을 생각하거나 헤아릴까 궁금합니다. ‘울산에서 사진을 합니다’라든지 ‘음성에서 사진을 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에는 무엇을 살피거나 돌아볼까 궁금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사진을 한다는 사람과 시골에서 지내며 사진을 한다는 사람은 서로 얼마나 어떻게 다르다고 느낄는지요. 바닷마을에서 살아가며 사진을 한다는 사람과 멧골자락에서 지내며 사진을 한다는 사람은 저마다 어떻게 다르다고 어림할는지요.

 ‘사진을 한다’고 할 때에는 이이한테서 무엇을 느껴야 아름다울까 궁금합니다. 어느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왔는가를 먼저 살펴야 할까요. 사진학과 아닌 다른 학과를 다녔다면, 왜 사진으로 발을 옮겼는가를 알아야 할까요. 나라밖 어느 곳에서 사진을 배웠는지 알아야 하나요.

 ‘사진을 한다’는 사람이 고등학교만 마쳤다면, 중학교만 마쳤다면, 초등학교만 마쳤다면,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않았다면, 이녁이 하는 사진을 여느 사람이나 예술쟁이나 문화쟁이는 어떤 눈길과 눈높이로 바라볼는지요.

 고영일 님이 빚은 사진을 그러모은 《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한울,2011)을 들여다봅니다. 제주에서 태어나 기자로 일하며 제주 삶터와 사람을 사진으로 담았다고 하는 고영일 님입니다. 한국땅에서 바라볼 때에 고영일 님은 ‘제주에서 나고 자라 제주를 사진으로 담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바라본다면 ‘한국 사진’이지 ‘제주 사진’이 아닙니다. 프랑스나 독일이나 네덜란드나 스위스나 룩셈부르크나 오스트리아에서 바라본다면, 고영일 님 사진은 ‘한국 사진’이면서 ‘동양 사진’입니다. 미국이나 멕시코나 칠레나 아르헨티나에서 바라본다면, ‘아시아 사진’입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네팔이나 티벳이나 버마나 필리핀이나 라오스나 베트남에서 바라볼 때에는 ‘지구별 사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을 읽는’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에 따라 《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은 저마다 달리 느끼거나 받아들입니다. 필리핀 뭇 섬 가운데 어느 한 곳에서 나고 자라며 사진을 찍은 누군가 빚은 사진책을 읽는다 하면, 이 사진책 하나는 ‘필리핀 뭇 섬 가운데 한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보금자리를 곱게 보여준다 하면서, ‘작은 섬 하나를 바탕으로 필리핀이라는 터전’을 드러내는 사진이라고 여기겠지요. 마다가스카르 한켠을 찍은 사진을 읽을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라다크 가는 길을 찍은 사진을 살필 때에도 이와 매한가지입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찍은 사진을 생각할 때에도 이와 똑같아요.

 고영일 님은 “또 한 가지 나로 하여금 카메라를 놓지 못하게 한 마음은 이른바 ‘개발’ 때문에 사라져 가 버리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다. 사실 사진인치고 촬영지로서의 제주도를 한 번이나마 생각 안 해 본 적이 없으리라. 거기서 자연 풍경으로서의 제주도는 언제까지나 이어 줄 것이지만 ‘사라져 가는 제주도’는 바로 지금부터가 가장 이른 출발일 수밖에 없다(6쪽).”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은 고영일 님이 스스로 낸 책이 아니라, ‘예전에 적바림한 글’과 사진이 실립니다. 돌아가신 넋을 기리면서 여민 책이기에 고영일 님이 더 보여주고 싶었을 모습이나, 고영일 님이 더 들려주고 싶었을 이야기까지는 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두툼한 사진책 하나로 ‘제주섬 속살’을 어느 만큼 돌아볼 만합니다.

 그러면, 이 사진책을 손에 쥔 사람들은 어떤 ‘제주섬 속살’을 읽을 만할는지요. 참말 이 사진책을 읽을 때에 ‘제주섬 속살’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나는 내 사진을 나 스스로 들여다보거나 내 이웃이 들여다볼 때에 가만히 생각합니다. 나는 내가 나고 자란 인천을 사진으로 찍었다 할 때에 ‘오직 인천이라는 터전만 이 사진에 담긴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인천이라는 곳을 발판으로 삼아 ‘한겨레가 저마다 제 삶터에서 어우러지거나 복닥이는 이야기’가 시나브로 깃든다고 느낍니다. 한겨레가 지내는 모습이 살며시 드러나는 ‘내 인천 사진’이면서, 한 해 두 해 무르익는 동안 ‘인천이나 한겨레 울타리를 넘어’ 지구별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취가 고즈넉히 감돈다고 느낍니다.

 잘 찍었다는 사진이건 잘 못 찍었다는 사진이건 늘 같습니다. 즐겁거나 예쁘다 여길 만한 사진이건, 슬프다거나 어설프다 여길 만한 사진이건 언제나 같습니다. 사람들은 어여삐 어깨동무하기도 하지만, 안타까이 해코지하거나 바보스레 다투기도 합니다. 어느 사람 사진에는 따스한 사랑이 깃들지만, 어느 사람 사진에는 어줍잖게 겉멋내는 껍데기가 넘칩니다. 어느 사람 사진에는 포근한 꿈이 서리지만, 어느 사람 사진에는 그럴듯한 흉내내기나 그림그리기가 춤춥니다.

 어쩔 수 없어요. 착하며 예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나, 비싸고 까만 차를 몰며 으스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흙을 일구며 햇살을 받아들이는 일꾼이 있으나, 서울 종로 높은 건물에서 양복을 빼입고는 자판을 두들기는 일꾼이 있어요.

 골목길이나 고샅길 사진만 ‘옛이야기(추억)’가 되지 않습니다. ‘관제 홍보’ 사진 또한 옛이야기가 됩니다. 투박한 사람들 수수한 삶만 옛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똑같은 교복 차림에 똑같은 머리 모양으로 빼곡하게 줄지어 서서 누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도록 찍는 경주 불국사 수학여행 모둠사진도 옛이야기가 됩니다.

 “동네에 들어서면 촬영자가 오히려 구경거리다. 몰려다니며 찍어 달랜다. 다 모아 놓고 막상 찍으려면 오히려 숨는 녀석이 있다. 장년이 되었을 이들 중에 몇이나 이 사진을 반길 형편이 되었을까(7쪽)?” 하는 고영일 님 이야기를 읽으면서 빨래터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봅니다. 제주섬에서 이렇게 수많은 아주머니들이 한 자리에 모여 빨래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두 번째로 봅니다. 맨 먼저 일본사람이 찍은 사진을 보았습니다. 일본에서 1960년대 첫무렵에 내놓은 ‘세계 문화 여행’ 이야기를 다룬 스물 몇 권짜리 ‘전집 사진책’ 가운데 한국 이야기를 다룬 권에서 ‘제주섬 사람들 여느 삶’을 보여주면서 빨래터 사진을 실었어요.

 1960년대 일본 사진책에서 ‘제주섬 빨래터 사진’을 보고는 입이 쩍 벌어지며 벙 떴습니다. 일본사람은 1960년대에도 한국에 와서 이런 사진을 찍는데, 한국사람은 1960년대나 1970년대나 1980년대나 1990년대나 2000년대나 2010년대나 무슨 사진을 찍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오늘 이곳’에서 사진으로 담은 적이 있는지 그야말로 알쏭달쏭합니다. 스스로 투박하거나 수수하게 살아가면서 ‘투박하거나 수수한 내 삶’을 비롯한 ‘투박하거나 수수한 내 이웃 삶’을 꾸밈없이 사진으로 담는 길을 찾는 사진쟁이가 몇 사람쯤 있을까 아리송합니다.

 문화를 하건 예술을 하건, 사진길을 열려면 내 삶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내 삶을 먼저 깨닫는 길에 서야 바야흐로 내 사진길이 어느 문화나 예술 갈래에서 빛이 날 만한지를 알아차립니다. 무턱대고 문화길이나 예술길부터 걸을 수 없습니다. 사진뿐 아니라 그림이나 만화나 글이나 춤이나 노래나 연극이나 영화나 서로 매한가지입니다. 내 삶길부터 똑똑히 아로새기고 나서야 문화이든 예술이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을 못 깨닫고 내 삶을 말할 줄 모를 때에는 아무런 문화도 예술도 말하지 못합니다. 내 삶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문화이든 예술이든 사랑할 수 업습니다. 내 삶을 꿈꾸면서 일굴 때에 비로소 문화이든 예술이든 꿈꾸면서 일굴 수 있어요.

 고영일 님은 제주에서 나고 자라 제주섬 사람과 터전과 자연을 찬찬히 사진으로 담으면서 시나브로 사진길을 엽니다. 천천히 사진길을 열며 삶길을 북돋우기에 뒷날에는 사진비평을 하는 눈길을 트면서 글 몇 자락 남길 수 있습니다. 삶이 먼저요 사랑이 먼저입니다. 삶이 첫걸음이요 사랑이 두걸음입니다. 삶에서 샘솟는 따스한 손길이요 사랑에서 비롯하는 넉넉한 사진길입니다. (4344.9.27.불.ㅎㄲㅅㄱ)


― 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 (고영일 사진,한울 펴냄,2011.3.30./4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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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그 후 - 사진작가 지영빈의
지영빈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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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동안 찍지 못하는 사진이라면
 [찾아 읽는 사진책 60] 지영빈, 《워낭소리, 그후…》(책이있는마을,2010)



 하루 동안 찍지 못하는 사진이라면, 한 달이나 한 해뿐 아니라 열 해나 스무 해가 걸려도 못 찍는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무엇을 찍건 누구를 찍건, 나한테 주어진 겨를만큼 사진을 찍어야, 나 스스로 더 넉넉히 말미를 마련해서 사진을 찍을 때에 제 목소리가 살아숨쉬는 제 이야기가 태어난다고 느낍니다.

 집에서 두 아이를 사진을 담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내가 집에 머무는 겨를이 고작 1분이나 10분이라 하더라도 이동안 사진 열 장이나 서른 장을 찍을 수 있습니다. 찍기 나름입니다. 그냥 마구 눌러대는 사진이 아니라, 내 아이를 내가 사랑하는 마음그릇만큼 사진으로 찍어요.

 내가 참말 내 아이를 아끼며 사랑하는 넋이라 할 때에는, 고작 하루 몇 분 사이에 열여섯 장 사진을 찍어, 이 열여섯 장으로 사진책 하나 묶을 수 있습니다. 꼭 백육십 장에 이르는 사진을 열 달이나 열 해에 걸쳐 찍어야 사진책으로 묶을 만하지 않습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아이하고 함께 지내는 이야기를 가만히 사진으로 담아 사진책 하나로 묶을 수 있어요. 내 아이가 갓 태어나 학교에 들어가고 어른이 되어 혼인을 할 때까지 사진으로 담아야 사진책 하나 빚을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쥔 우리들은 ‘사진으로 이야기를 일구는 일’을 하지 ‘더 많이 찍은 사진’이나 ‘더 오래 찍은 사진’으로 겨루기나 숫자놀이나 등수매기기를 하지 않습니다.

 지영빈 님이 일군 사진책 《워낭소리, 그후…》(책이있는마을,2010)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지영빈 님은 영화 〈워낭소리〉가 나온 뒤, 이 영화에 나온 할아버지네 막내아들한테서 ‘아버지 사진 찍어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설레는 마음으로 서울과 봉화를 수 차례 오가며 카메라에 이르신의 모습을 담았다(머리말).”고 합니다. 사진책 《워낭소리, 그후…》를 읽다 보면, 참말 “수 차례 오가며” 찍은 사진이로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꼭 이만큼 찍은 사진입니다.

 이를테면, 봉화에서 ‘어르신하고 함께 살면서’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봉화에서 ‘어르신하고 한 달이고 석 달이고 함께 먹고자면서’ 찍은 사진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어르신하고 몇 달이건 몇 해이건 함께 어울리면서 사진을 찍을 때에 가장 빛나거나 가장 훌륭하거나 가장 돋보이거나 가장 사랑스러울 만한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워낭소리, 그후…》 같은 사진책이 《굴피집》(안승일 사진책)만 한 깊이가 담긴 사진책이 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다만, “수 차례 오가며” 찍은 사진이라면, 이렇게 “수 차례 오가며” 만날 수 있는 깊이와 너비가 어떠한가를 사진쟁이 삶으로 녹이면서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돼요. 어르신하고 마흔 해를 살아온 이웃처럼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안 됩니다. 어르신 이야기를 영화로 담은 감독처럼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안 돼요. 오직 몇 차례 만날 수 있는 틈에서 살릴 수 있고 살아낼 만한 사진을 헤아리면서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됩니다.

 “어르신을 카메라에 담는 것은 기다림과의 싸움이었다. 며칠을 찍었는데도 거의 같은 사진뿐이었다(머리말).”는 말을 되새깁니다. 짧지 않은 나날을 사진을 찍은 지영빈 님이요, 조용필·이광조·장동건·이승연처럼 이름난 연예인을 사진으로 찍는다는 지영빈 님입니다. 마땅한 노릇인데, 조용필·이광조·장동건·이승연처럼 이름난 연예인은 당신들 스스로 ‘아주 바쁜 틈을 내어 사진으로 찍혀야’ 합니다. 봉화마을 어르신이라 해서 안 바쁜 나날이 아니에요. 그러나, 봉화마을 어르신은 ‘당신한테 바쁜 나날에 지영빈 님한테 굳이 틈을 쪼개어 사진으로 찍혀 줄 까닭이 없’습니다. 어르신네 막내아들이 당신 사진을 찍어 주기를 바라건 말건, 어르신으로서는 누가 당신을 찍거나 말거나 아랑곳할 일이 없기도 하며, 퍽 귀찮거나 싫을밖에 없습니다. 나하고 사랑스레 만나면서 따스히 어우러질 이웃이나 벗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으로 보기 좋은 썩 괜찮다 싶은 사진 몇 장 후다닥 얻어’ 돌아가려는 사람으로 다가온다면, 봉화마을 어르신뿐 아니라 대통령이나 서울시장도 사진 찍히기를 달가이 여길 수 없을 뿐 아니라, 애써 사진 몇 장 찍더라도 ‘사진을 찍은 사람부터 스스로’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고 사귀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 사랑해야 합니다. 남녀 사이에 살을 섞는 사랑놀이가 아니라,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과 사진기를 바라보는 사람이 마음으로 이어지는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지영빈 님은 “똑같은 일상, 똑같은 동선에서 어르신의 변화를 담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머리말).”고 말하지만, 정작 《워낭소리, 그후…》에는 어르신 하루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밤에 잠자리에 드는 ‘하루 삶’을 사진으로 담지 못했어요. 아니, 처음부터 이러한 ‘하루 삶’을 담을 마음이 없었다고 해야 옳습니다. 이 ‘하루 삶’을 바라보거나 살피지 않았으니까, 이 ‘하루 삶’을 ‘똑같은 동선’이라고 여길 뿐, 이 움직임과 모습과 삶에서 어떠한 이야기가 샘솟는가를 가슴으로 깨닫지 못해요. 사진으로 꽃피우지 못합니다.

 “옷 좀 바꿔 입고 찍자고 해도 한사코 당신이 좋아하는 옷만 고집하시던 이 시대 최고의 멋쟁이(머리말).”라는 말은 아주 덧없습니다. 시골마을 할아버지를 찍는 사진은 연예인을 찍는 사진하고 다른데, 할아버지한테 옷을 갈아입으라고 말하다니요. 이것 참 버르장머리없는 노릇입니다. 아니, 사진을 찍는다는 사람으로서 밑바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전쟁터에서 군인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 “이봐, 전투화 코가 벗겨졌잖아. 다른 전투화 신고 와.” 하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나요. 다쳐서 어깨를 붕대로 감싼 군인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 “이봐, 붕대가 제대로 안 감겼잖아. 다시 감아.” 하면서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능금밭에서 능금을 따는 일꾼한테 “여보시오. 좀 고운 옷을 입고 능금을 따시오. 그래야 사진이 잘 나오지.” 하고 말해도 될는지요. 새마을운동 사진을 찍는 일이 아니라면, 관청에서 겉만 번지르르하게 내세우는 홍보사진을 찍는 일이 아니라면, 할아버지 삶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똑똑히 헤아려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을 텐데, 지영빈 님은 ‘워낭소리 할아버지 삶’을 사진으로 어떻게 보여주도록 그려야 아름다운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가벼운 손재주를 부려 포토샵 사진을 몇 끼워넣기까지 합니다. 사진책 《워낭소리, 그후…》는, 영화 〈워낭소리〉가 극장에 걸린 뒤부터 봉화마을 어르신이 얼마나 시달리거나 고달프거나 힘겹거나 짜증스럽게 살아야 하는가를 낱낱이 보여주는 슬픈 얼굴입니다. (4344.9.21.물.ㅎㄲㅅㄱ)


― 워낭소리, 그후… (지영빈 사진,책이있는마을 펴냄,2010.2.23./23000원)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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