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에 찰칵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유키 마사코 글, 서인주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종이에 앞서 마음에 담는 사진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10 : 이와사키 치히로·유키 마사코, 《마음속에 찰칵》(학산문화사,2002)

 


 이와사키 치히로 님이 ‘글에 맞춰 그린’ 그림이 아닌, 당신 스스로 좋아서 그린 그림을 살피면서, ‘그림에 맞춰 글을 넣은’ 그림책 《마음속에 찰칵》(학산문화사,2002)을 읽습니다. 안타깝다면, 2002년에 나온 책이지만 일찌감치 판이 끊어졌기에 헌책방에서 다리품을 팔아야 어렵사리 만날 수 있어요. 나도 이 그림책은 한 해 넘게 다리품을 판 끝에 드디어 한 권 만났습니다.

 

 《마음속에 찰칵》은 그림책입니다. 이와사키 치히로 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이녁 그림을 봄이랑 여름이랑 가을이랑 겨울에 맞추어 곱게 나눈 다음, 철 따라 어떠한 빛깔을 사랑하면서 사진찍기 놀이를 즐길까’ 하는 이야기를 붙인 그림책입니다.

 

 그림책이니까, 이 그림책을 읽는 아이들로서는 사진책을 본다고 할 수 없다 할는지 몰라요. 그런데, 《마음속에 찰칵》은 사진찍기 놀이를 하는 그림책이에요. 살가이 담은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아하, 이렇게 사진을 찍는구나.’ 하고 느껴요. ‘오호, 이러한 이야기를 사진으로 갈무리하는구나.’ 하고 깨달아요.

 

 이를테면, 꽃내음 물씬 누리는 봄날, “새로운 친구도 생기고 ……. 오늘을 기념하며 찰칵. 아주 좋아하는 꽃도, 찍는 김에 찰칵(5∼6쪽).” 하는 이야기를 펼칩니다. 그림책 한쪽에는 네모낳거나 동그랗게 구멍이 뚫립니다. 구멍에 따라 ‘사진기로 들여다보듯’ 그림을 새삼스레 바라봅니다. 종이 한 장을 넘기면 구멍은 앞쪽 그림을 네모낳거나 동그란 구멍에 맞추어 바라봅니다. ‘여기에서는 이렇게 사진이 되’고 ‘저기에서는 저렇게 사진이 되’는 줄 배웁니다.

 

 이리하여, 가을날에는, “저 아이의 옷은 단풍색. 마음속에 찰칵. 저 아이를 찰칵. 다가가서 찰칵. 크게 크게 찰칵. 달님도 가까이 있네요(15∼16쪽).” 하는 이야기가 이어져요. 가을날 단풍빛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내 눈에 아름답다고 보이는 모습뿐 아니라, 아름답구나 싶은 이야기를 나란히 담아요.

 

 무언가를 기리면서 사진에 담을 때에는 어느 날 누군가하고 어울리던 ‘모습’뿐 아니라 누군가하고 어울리던 ‘이야기’를 담는답니다. ‘이야, 예전에는 이와 같은 모습이었지.’ 하고 떠올리도록 이끄는 사진이 아니에요. ‘이야, 예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지.’ 하고 떠올리도록 이끄는 사진이에요.

 

 사진은 이야기입니다. 사진을 꾸준히 찍어서 사진첩으로 엮으면, 이 사진첩은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사진을 들여다볼 때에는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사진첩을 넘길 때에는 이야기꾸러미를 넘기는 셈이에요.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가 사진을 찍을 때에는 ‘아이가 예뻐 보이는 모습’을 담지 않아요. ‘아이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아요. 그래서 이 아이가 나중에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그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함께 누리고 부대꼈어.’ 하고 들려주는 이야기밭이 되는 사진입니다.

 

 옛날 옛적 모습, 이른바 추억을 담는 사진은 아닙니다. 사진은 추억을 만들려고 찍지 않아요. 사진은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고루 사랑할 내 삶을 아끼고 싶어 빚는 이야기샘입니다. 이야기가 샘솟는 샘인 사진이에요. 지난 한때에 머물도록 하지 않습니다. 옛날을 자랑하거나 우쭐거리려고 찍는 사진이 아니에요. 오늘 하루 즐겁게 누렸다는 보람을 기쁜 웃음과 눈물로 곱게 빚는 사진이에요.

 

 사진은 빛으로 일구는 그림이자 글이요 이야기입니다. 사진은 빛무늬와 빛결을 예쁘게 사랑하면서 가꾸는 꿈이자 넋이요 무지개예요. 사진기 있어 종이에 남기는 사진을 얻겠지요. 사진기 없으면 가슴으로 오래오래 아로새기는 이야기씨앗을 마음밭에 심어요.

 

 나는 우리 집식구들 사진을 찍으면서 종이로도 이야기를 아로새기지만, 이에 앞서 내 눈을 거쳐 내 가슴에 우리 집식구들 삶을 곱게 새깁니다. 먼저 내 가슴에 새기는 집식구들 삶이 아니라면 사진기를 들지 못해요. 언제까지나 내 마음밭에 고이 스미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사진으로 옮기지 못해요.

 

 이와사키 치히로 님 그림에 새 옷을 입히며 ‘사진 이야기 그림책’을 일군 유키 마사코 님이 더없이 고맙습니다. 좋은 그림에 좋은 이야기를 붙일 줄 아는 분이라면, 좋은 삶을 좋은 사진으로 옮기면서 활짝 웃을 줄 알겠지요. 마음속에 찰착 하고 담을 수 있어서 종이로 아로새길 모습과 이야기를 사진기로 찰칵 하고 담습니다. (4344.12.29.쇠.ㅎㄲㅅㄱ)


― 마음속에 찰칵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유키 마사코 글,서인주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2.12.15./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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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
사토 토미오 지음, 임향자 옮김 / 포토스페이스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사진을 꼭 잘 찍어야 하지 않아요
 [찾아 읽는 사진책 73] 사토 토미오, 《카메라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포토스페이스,2010)

 


 나는 사진을 따로 배운 적 없습니다. 나는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를 찬찬히 배운 적 없습니다. 다섯 학기를 다니고는 그만둔 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과 부전공 수업을 들으며 한 학기 동안 보도사진 강의를 들은 적 있습니다만, 이때에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를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이때에 배운 한 가지는 ‘사진으로 신문읽기’입니다.

 

 내 손으로 사진기를 처음 쥔 때는 국민학교 삼학년 무렵이었나 싶고, 그 뒤로 다시 쥔 때는 고등학교 1학년 수학여행 때였지 싶으며, 그 다음으로는 1998년 봄입니다. 군대에서는 몰래 사서 들여온 1회용사진기로 ‘바보스러운 군대살이 기리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때로는 이 1회용사진기로 ‘중대 기념 사진’을 찍었어요. 이를테면 진급 행사 사진이라든지, 훈련을 나가기 앞서 찍는 기념 사진을 1회용사진기로 담았습니다.

 

 곰곰이 돌이킵니다. 내가 가진 ‘바보스러운 군대살이 기리는 사진’은 몇 없으나, 이 몇 안 되는 사진으로 그무렵 군대살이가 그야말로 얼마나 바보스러웠는가를 또렷이 되새길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는 중대장이든 대대장이든 연대장이든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면 안 됩니다. 연대에는 ‘사진병’이 한 사람 있으나, 공식 행사만 찍도록 허락할 뿐, 다른 때에는 사진기를 들고 다녀도 안 돼요. 더군다나 제가 구르던 군대는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원당리 비무장지대였어요. 땅그림으로 치면 남녘땅 아닌 북녘땅이라 할 만한 데에서 군대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군대살이를 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런 데에서 군대살이를 한 줄 아무도 모를 테야. 그야말로 사진 하나라도 남겨야 해.’ 하고 말하기 일쑤였어요. 다들 휴가 나가서 돌아오는 길에, 또는 외박이나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1회용사진기 하나 어떻게든 몰래 숨겨 들여오려고 했습니다.

 

 비무장지대 철책에서 여느 때 경계근무를 서면 영하 삼사십 도는 우스웠어요. 한겨울 혹한기훈련이라면서 뛸 때에는 외려 영하 이삼십 도밖에 안 되었어요. 왜냐하면, 훈련은 새벽부터 저녁까지만 뛰니까, 이때에는 이삼십 도이고, 경계근무는 한밤에 서니 삼사십 도를 밑돌았어요. 갓 스물을 넘은 사람들이, 때로는 겨우 열여덟 열아홉밖에 안 된 사람들이, 드센 바람과 추위와 땡볕에 시달린 나머지 벌써 주름이 지고 시커맸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굳이 사진으로 담으려고들 했어요. ‘전역해서 사회로 돌아가면 아무도 우리 말을 안 믿지 않겠니?’ 하면서, 나중에는 하사관과 소대장과 중대장까지 ‘발벗고 나서서(?)’ 1회용사진기를 몰래 들여와 훈련이나 이런저런 자리에서 ‘기리는 사진(기념이라는 말은 어쩐지 안 어울립니다. 참말 기리는 사진이라고 해야 어울립니다)’을 신나게, 그렇지만 대대장한테 안 걸리도록 몰래, 마음껏 찍곤 했습니다.

 

 사토 토미오 님이 쓴 《카메라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포토스페이스,2010)를 읽고 나서, 어쩐지 군대에서 사진 찍히고 찍던 일이 떠오릅니다. 그때에도 사진을 찍은 셈이로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찍는 기쁨, 피사체와 마주쳤을 때의 기쁨,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었을 때의 기쁨, 자신의 사진을 누군가로부터 칭찬받았을 때의 기쁨, 이 모든 것들이 뇌를 활성화시키는 ‘마음의 비타민’이 된다(23쪽).”는 말 때문은 아닙니다. 어쩌면,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참말로, 모진 군대에서 ‘기리는 사진’ 하나는 새까맣게 죽은 얼굴이던 열여덟 살부터 스물여섯 살 사이 군인들한테 ‘죽음터 같은 곳에서 버티는 힘’이 되었구나 싶어요.

 

 제 군대 적 사진을 사람들한테 보여주면 백이면 백 한결같이 말합니다. “참 불쌍해 보인다.” 사진에 담긴 사람들은 참 어리고 젊습니다. 그러나 이 어리고 젊은 사람들 얼굴이, 모습이, 삶이, 그림자가 참 불쌍해 보인답니다.

 

 지구별 어느 곳에서는 고작 서너 살밖에 안 된 어린이가 모진 전쟁통에 시들거나 들볶이며 애늙은이 얼굴이 되기도 하겠지요. 한국땅에서는 군대로 끌려가는 사내들 얼굴이 참으로 들볶이고 시달리며 ‘젊은늙은이’ 얼굴이 되고 맙니다. 아무래도, 그때에 사진이라도 하나 있으니 억지스레 웃으면서 참거나 견디었겠지요.

 

 사토 토미오 님은 말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도 셔터만 누르기만 하면 누구나 사진은 찍을 수 있다. 하지만 사진은 소통의 도구이고, 피사체에 대한 공감이며 애정이다. 당신이 파인더를 통해 바라보는 것은 당신이 늘 바라보던 일상적인 시선에 의해서 드러난 풍경이다.어쩌면 꼬마는 항상 위에서 자기를 내려다보는 커다란 어른들에게 위압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진을 찍을 때뿐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아이들과 같은 시선으로 눈높이를 낮춰서 마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42∼43쪽).” 하고. 나는 군대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온 1998년 봄부터 대학교는 그만두고 신문배달 일꾼으로 일하며 작게 살아갈 생각이었습니다. 집에서는 어떻게 들어간 대학교를 왜 이리 일찍 그만두려 하느냐 말렸고, 한 해만 더 다니기로 하면서 전공 수업은 안 듣고 신문방송학과 부전공 수업만 챙겨 들었습니다. 이러며 함께 들은 보도사진 강의에서 ‘사진으로 신문읽기’를 처음 배우는 동안 ‘서울 10대 중앙일간지’ 사진기자와 편집기자가 어떠한 눈길과 어떠한 몸짓과 어떠한 생각과 어떠한 삶으로 ‘똑같은 사건·사고 똑같은 사람 똑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다 다른 목소리와 느낌과 모습으로 자르거나 엮거나 만지작거리는가를 깨닫습니다.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는 배우지 못했으나, 이보다 큰 무언가를 배웠어요. 내가 들려주는 말은 ‘내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으로 들려주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야말로 착하게 말할 수 있으나, 나는 더없이 모질거나 못되게 말할 수 있어요. 나는 꾸밈없이 바라보며 느낄 수 있지만, 나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눈길이나 눈썰미로 겉훑기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따사롭거나 사랑스레 바라볼 수 있는 한편, 아주 차갑거나 매몰차게 등돌릴 수 있어요.

 

 이제 와 돌이키면,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란 어느 누구도 가르칠 수 없는지 모릅니다. 대학교에서든 고등학교에서든, 외국에서든 문화강좌에서든, 사진을 가르칠 수 없다 할 만한지 모릅니다. 가르치려 한다면, 또 배우려 한다면 ‘삶’을 가르치거나 배웁니다. ‘사랑’을 가르치거나 배웁니다. ‘사람’을 가르치거나 배웁니다.

 

 사진은 배우거나 가르치지 못합니다. 글과 그림과 춤과 노래와 연극과 영화 또한 배우거나 가르치지 못합니다. 배우거나 가르친다면, ‘사진을 읽는 삶’을 배우거나 가르칩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랑’을 배우거나 가르쳐요.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떠한 사람인가를 배우거나 가르칩니다. 어디에서 살아가고 어디에서 사랑하며 어디에 선 사람인가를 배우거나 가르쳐요. 그래서, 나는 군대에서 사진을 배운 셈입니다. 군대에서 1회용사진기로 ‘기리는 사진’을 찍히고 찍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 사진을 배운 셈입니다. 군대를 용케 마치고 목숨을 건져 사회로 돌아온 뒤에는, 대학교에서 한 학기 보도사진 강의를 들으면서 ‘사진으로 삶읽기’를 배운 셈이에요.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피사체인 여성을 먼저 좋아하라는 것이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만, 카메라의 눈은 정직하다. 촬영자인 당신이 피사체에 대해서 관심도 애정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런 메마른 감정이 사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44쪽).” 같은 말을 찬찬히 되읽습니다. “느낀 그대로를 찍는다. 느낀 그대로 셔터를 누르면 그것이 최고의 표현이 된다. 일부의 고지식한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이 점을 오해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멋대로 규칙을 만들어 놓고, 그 틀에 얽매여 감각적인 촬영을 하지 못한다(77쪽).” 같은 말 또한 가만가만 곱새깁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내 삶과 발자국을 하나하나 되짚습니다. 나는 대학교에서든 중·고등학교나 국민학교에서든 사진찍기는커녕 글쓰기조차 배우지 못했고, 배우지 않았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없었고, 가르칠 사람 또한 없었어요. 문예창작이라든가 사진수업을 받지 못하다 보니, 언제나 사진길을 스스로 찾고 글길 또한 스스로 파헤칩니다. 나는 내 삶에 따라 사진을 찍고 글을 씁니다. 그래, 내가 얼마쯤 다닌 대학교라든지, 내가 겨우 목숨을 건지며 사회로 돌아온 군대라든지, 나와 함께 살림을 꾸리는 옆지기라든지, 옆지기와 사랑으로 빚은 두 아이라든지, 네 식구 살아가는 시골마을이라든지, 날마다 부대끼거나 스치거나 마주하는 이웃사람이라든지, 언제나 바라보는 밤하늘과 낮하늘과 들판과 멧자락이라든지, 이 모두가 나한테 ‘사진을 찍는 삶’과 ‘글을 쓰는 사랑’을 가르칩니다.

 

 그래요. 그렇군요. 사진을 꼭 잘 찍어야 하지 않아요. 삶을 잘 꾸려야지요. 사랑을 잘 해야지요. 나와 이 보금자리에서 예쁘게 살아가는 살붙이를 착하게 사랑해야지요. 우리 집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를 곱게 바라보아야지요. 논밭 푸성귀와 곡식을 아껴야지요. 까막까치와 멧새 들새를 상냥히 마주해야지요.

 

 차가운 겨울바람이 사진을 가르쳐 주는 스승입니다. 날마다 쏟아지는 빨래가 글을 가르쳐 주는 이슬떨이입니다. 아이들 목소리가 사진을 가르쳐 주는 길잡이입니다. 뜨개질하는 옆지기가 글을 가르쳐 주는 벗님입니다. 나는 사진을 잘 찍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사진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나는 글을 잘 쓰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글을 좋아하고 싶습니다. (4344.12.27.불.ㅎㄲㅅㄱ)


― 카메라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 (사토 토미오 글,임향자 옮김,포토스페이스 펴냄,2010.9.7./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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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1-12-27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책을 멋지게 소개해 주시네요.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피사체인 여성을 먼저 좋아하라는 것이다" - 이 말에 공감했던 경험이 있어요. 오래 전, 애 아빠가 둘째애 어렸을 때 찍은 사진이 있는데, 아이가 참 귀엽고 사랑스럽게 찍힌 사진이었어요.
제가 그때 이렇게 평했답니다. - " 이 사진은 아이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은 결코 찍을 수 없는 사진이야." 라고ㅋㅋ

잘 읽고 갑니다. 첫 추천은 제가...

숲노래 2011-12-28 04:54   좋아요 0 | URL
글도 쓰는 사람 스스로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읽는 사람이 즐거울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갈린다고 느껴요.

저는 사랑을 담지 않은 `작품`은 좋아하지 않아요~ ^^
 
가을에
이갑철 지음 / 류가헌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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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을날, 사진과 함께 숨을 쉬다
 [찾아 읽는 사진책 76] 이갑철, 《가을에》(류가헌,2011)

 


 이 겨울에 대청마루로 스미는 볕살을 누립니다. 우리 집 네 살 아이는 대청마루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노래를 합니다. 쿵쿵 발을 구릅니다. 이리 달리고 저리 내닫습니다. 나무널로 지은 대청마루 밟는 느낌이 좋을까요. 맨발로 쿵쿵 달릴 때마다 발바닥부터 머리카락까지 올라오는 느낌이 신날까요.

 

 아이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내 어린 날을 돌이킵니다. 인천에서 충남 당진으로 내 어버이를 따라 나들이를 하노라면, 대청마루 밟는 느낌이 새삼스러웠습니다. 곧장 해를 바라보는 대청마루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추운 대청마루입니다. 여름에 발바닥으로 느끼는 마루결이랑 겨울에 발바닥으로 받아들이는 마루결이 사뭇 달라요. 겨울날 쉬를 누러 대청마루에 발을 디디면, 또 신을 꿰려고 대청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저 밑 신발을 찾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 쉬를 누고 돌아와 대청마루에 손을 디디면, 이 차가운 기운이 얼마나 파르르 떨리면서 올라오던지요. 얇은 창호종이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또 얼마나 차가운데, 방바닥은 뜨끈뜨끈한 불이 올라오던지요.

 

 두 아이와 옆지기랑 살아가는 아버지로서 돌아봅니다. 이런 시골집에서 살아가리라 생각하지 못했을는지, 꿈꾼 적이 없었는지 돌아봅니다. 어린 날 살던 인천 오래된 아파트는 마루가 나무바닥이었습니다. 방은 시멘트바닥이었으나, 마루는 나무였어요. 5층 작은 아파트는 연탄을 때도록 되었는데, 연탄 한 장 집어넣어 바닥을 덥히더라도 워낙 추워 마루에 난로를 피우고 이불을 뒤집어써야 했어요. 우리 집은 툇마루 바깥창이 없었기에 방에 달린 창문에는 언제나 성에가 끼고 얼음이 두껍게 맺혔습니다. 아침마다 얼음을 떼내고 걸레질을 하느라 바빴습니다. 이렇게 안 하면 창문에 맺힌 얼음이 툭툭 떨어지거나 얼음 녹는 물이 벽을 타고 줄줄 흘렀어요.

 

 아버지 어머니 태어난 시골집으로 겨울 나들이를 가서 스무 날쯤 지내면, 유리 아닌 종이로 댄 창문에 성에가 끼거나 얼음이 얼 일이란 없습니다. 흙으로 지은 집은 나무로 불을 때고, 어디를 걷든 달리든 놀든 흙을 밟습니다. 내 어릴 적 내 어버이 시골집은 온통 흙누리였어요. 흙이랑 물이랑 풀이랑 바람이랑 햇살이 골고루 하나로 얼크러졌어요.

 

 인천을 떠나 두 해째 시골에서 살아갑니다. 처음 한 해를 보낸 충청북도 멧골자락에서든 올 새 한 해를 보내는 전라남도 시골자락에서든, 마당이나 고샅이나 모두 시멘트길입니다. 애써 도시를 벗어나 시골살이를 누리지만, 흙으로 된 땅을 밟기 만만하지 않아요. 집이며 벽이며 바닥이며 시멘트입니다. 흙이랑 나무로 따로 집을 짓지 않는다면, 하루 내내 시멘트에 둘러싸인 채 시멘트내음을 맡아야 합니다.

 

 흙을 시멘트나 아스팔트나 쇠붙이나 대리석으로 덮어야 문명이 될까요. 흙을 밟지 않아야 세계시민이나 문화시민이 되나요. 나는 ‘시민’이 아니라 ‘군민’이고 ‘면민’이자 ‘마을사람’인데, 조그마한 시골마을 사람으로서 흙을 누리는 길은 꽁꽁 틀어막혀야 하나요.

 

 어릴 적 국민학교 운동장은 흙땅입니다. 어릴 적 으레 갯벌에 놀러다니고, 흙 있는 자리를 찾아다니며 동무들하고 놀았습니다. 흙이 있어야 땅바닥에 금을 긋고 놉니다.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된 땅바닥에서 놀자면 학교에서 분필 몇 자루 훔쳐야 합니다. 또는 바닥에 대고 그을 때 하얗게 묻어나는 돌멩이를 어디에선가 주워야 합니다.

 

 학교 운동장 흙땅에서 공차기를 하고 공놀이를 하며 즐거웠습니다. 달리다가 넘어져도 조금 까질 뿐, 때로는 피가 살짝 날 뿐, 어디 뼈가 부러지거나 으스러지지 않아요. 사내아이는 누구나 얼굴 몇 군데 흙땅에 넘어지거나 미끄러지며 긁힌 자국이 있습니다. 긁혀 피가 나더라도 모두들 똑같으니 옷섶으로 슥슥 문지르고 끝납니다. 무릎이 까지면 살짝 이맛살 찡그리고 절뚝이다가 어느새 아까와 똑같이 내달리며 놉니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인천 중구 신흥동3가 연탄공장 바로 곁, 철길하고 이웃한 국민학교에서 맞이한 운동회는 언제나 두근두근 설레는 놀이마당입니다. 운동회를 앞두고 봄부터 가을까지 날마다 ‘방과 후 연습’을 두어 시간 남짓 해야 했지만, 운동회 하루 놀 생각으로 이 고단한 ‘훈련 같은 연습’을 잘 치렀습니다. 운동회를 한 달 앞두면 연습은 네 시간으로 늘어났고, 각목을 무시무시하게 휘두르는 교사들 앞에서 움찔거리면서도 운동장 흙땅에서 온몸이 누렇게 바뀌어도 잘만 뒹굴었어요. 날마다 체육복을 빨아도 날마다 방과 후 연습을 하느라 체육복은 너덜너덜 흙투성이가 되고, 연습을 마치면 이 너덜너덜 흙투성이 체육복차림으로 또 몇 시간 신나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갔어요.

 

 이갑철 님 사진책 《가을에》(류가헌,2011)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사진책 《가을에》에 담긴 모습은 시골마을 운동회라 하는데, 시골마을 같지 않은 시골마을 운동회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연대를 살그머니 거슬러오르면, 시골마을 아닌 여느 도시에서도 이와 얼추 비슷한 모습을 쉬 보았으니까요. 1970년대이든 1960년대이든 1950년대이든, 큰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국민학교가 아니라면 으레 작은 동산 한둘쯤 옆에 낀 학교였고, 학교 둘레로 풀밭이나 논밭이 있기 마련이었으며, 여느 도시라면 멧꼭대기까지 빼곡하게 들어차는 다닥다닥 작은 집이 있었어요. 어르신들도 손주 운동회 뛰는 모습을 구경 나오고, 조촐히 동네잔치를 이루었어요.

 

 그러고 보면, 《가을에》는 시골마을 운동회를 담는데, 막상 ‘여느 도시 작은 국민학교 작은 운동회’이든 ‘커다란 도시 큰 국민학교 큼지막한 운동회’이든 알뜰살뜰 사진으로 남겨 이야기자락 하나 빚은 일이 거의 없구나 싶습니다. 이 나라 자그마한 분교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분은 있으나, 이 나라 여느 도시 여느 초등학교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이는 없습니다. ‘내가 다닌 학교’ 운동회를 두고두고 다시 찾아가며 사진으로 담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모두들 멀디먼 옛날 옛적 이야기만 헤아릴 뿐, 바로 오늘 바로 이곳 바로 우리 아이들 요즈막 웃음꽃과 눈물바람이 깃든 운동회 파란하늘 흙땅을 살피는 사진이야기 피어나기란 너무 벅찬 노릇이구나 싶어요.

 

 사진책 《가을에》는 사랑스럽습니다. 가을날, 사진과 함께 숨을 쉬는 사람들 싱그러운 꿈을 느낄 만합니다. 누군가 “겨울에”나 “봄에”나 “여름에”를 뒤이어 빚을 수 있다면, 누군가 저마다 다 다른 자리 다 다른 이야기 서린 다 다른 “가을에”를 예쁘게 바라보며 얼싸안을 수 있다면, 산들바람 부는 가을빛과 눈바람 부는 겨울빛과 꽃바람 부는 봄빛과 햇살바람 부는 여름빛을 곱다시 무르녹일 수 있으면, 참 재미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 얼굴이 흙을 닮아 흙빛일 때에 그지없이 사랑스럽습니다. (4344.12.21.물.ㅎㄲㅅㄱ)


― 가을에 (이갑철 사진,류가헌 펴냄,2011.10.31./4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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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 - 채승우의 사진교실
채승우 지음 / 넥서스BOOKS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사진을 뜯거나 잘라서 읽으면 안 즐겁다
 [찾아 읽는 사진책 74] 채승우,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넥서스BOOKS,2004)

 


 〈조선일보〉 사진기자인 채승우 님이 낸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넥서스BOOKS,2004)을 되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인천에서 충청북도 충주로 옮긴 책짐을 겨우 다 풀었다 싶을 무렵 다시 책짐을 꾸려 전라남도 고흥으로 옮겼습니다. 살림짐과 책짐을 하나하나 끌르고 갈무리한 지 석 달쯤 되는 오늘 낮, 여러 책상자와 책덩이를 끌르다가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이 보여 다시 한 번 꺼내어 읽습니다.

 

 책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이 책을 처음 장만하여 읽던 때하고 오늘 다시 들출 때하고 어떻게 바라보며 받아들이는가를 되짚습니다. 2004년에는, 2007년에는, 2011년에는 이 책이 나한테 어떻게 스며드는가를 돌아봅니다.

 

 책을 한창 읽다가 빈 자리에 몇 마디 끄적입니다. ‘시를 줄·연에 따라 나누거나 표현법을 살피며 읽을 수 있겠지만, 이렇게 해서는 시를 즐길 수 없습니다. 이래서는 시를 즐길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엊저녁, 동시를 쓰는 어느 분이 낸 ‘동시 즐겁게 읽기 책’을 읽고 나서도 이와 거의 같은 느낌으로 글을 한 줄 적었습니다. 시이든 사진이든 읽는 사람 마음이지만, 읽는 사람 마음대로 자르거나 나누거나 가르다 보면, 정작 ‘읽기’부터 참다이 못할 뿐 아니라, ‘즐기기’는 아예 잊기 일쑤요, ‘사랑하기’하고는 멀찌감치 떨어지는구나 싶어요.

 

 “책에 사용할 사진을 찍기 위해, 소형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한동안 무척 즐거웠습니다. 동네가 이렇게 재미있는 곳임을 다시 알았고, 도로 분리대에 계절 따라 다른 꽃이 핀다는 것도 새로 알았습니다(머리말).”를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다른 어느 곳보다 내 보금자리가 깃든 작은 동네에서 작은 사람이 되어 작은 발걸음으로 조금 짬을 내어 거닐다 보면 재미나게 사진을 즐기곤 합니다. 인도를 가거나 필리핀을 가거나 몽골을 가야만 그럴싸한 사진을 빚지 않아요. 나 사는 동네에서 재미난 사진을 얻고, 나 사는 작은 집에서 아름다운 사진을 일구어요.

 

 곧, 사진기자 채승우 님은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을 내면서 막상 채승우 님 스스로 ‘재미나게 사진을 누리면서 즐기기’를 못했다고 밝히는 셈입니다. 이제껏 사진기자로 일하면서 정작 ‘작은 곳을 사랑하거나 좋아하거나 아끼는 길’을 찬찬히 헤아리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예쁘지 않아도 좋습니다. 어떻게 ‘사진 찍기’를 해내었는지 보는 일이 즐겁습니다(14쪽).” 같은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사진기자 채승우 님은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에서 사진을 즐겁게 받아들이자고 말하지만, 이 사진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뭔가 내가 다른 사람하고 다르게 사진을 찍거나 뭔가 조금 더 잘 보여질 만한 사진을 찍는 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진찍기법’과 저런 ‘사진찍기법’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다르게 사진을 찍거나 누리는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하면서, 가만히 보면 ‘이런저런 사진찍기법’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휴일날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가 담아 오는 깔끔한 풍경사진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읽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처음으로 찾아가 본 풍경사진이 나와 무슨 관계인가요? 그보다는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사진이 좋은 사진입니다. 내 생활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나의 가장 치열한 생활 속에 좋은 사진거리가 있습니다(110쪽).” 같은 생각을 알뜰살뜰 여민다면 좋겠습니다. 그야말로 겉치레로 내보이는 사진이 아니라, 내 깊은 사랑을 나누는 사진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에는 안쓰럽다 싶도록 겉멋을 부리는 사진이 적잖이 실립니다. 그러나, 퍽 재미나다 싶은 애틋한 사진 또한 제법 실립니다. 이쪽으로 엉뚱하게 기울어지다가, 즐거운 사진길로 돌아오다가, 이런저런 길헤맴을 되풀이해요.

 

 “느린 셔터일 때, 카메라를 손으로 들고 찍는 걸 겁내지 마시기 바랍니다(201쪽).” 하는 말처럼, 채승우 님 스스로 느린 셔터빠르기로 찍으며 흔들린 사진을 몇 보여줍니다. 일부러 흔들어 찍은 사진이 있고, 애써 안 흔들리도록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은 ‘즐거운 사진길’을 이야기하겠다고 하면서 ‘사진기 다루는 솜씨’ 쪽에 너무 기울어졌다고 하겠어요. ‘사진을 바라보는 마음결’로는 좀처럼 손을 뻗지 못합니다.

 

 그래서, “느낌을 만들어 내는 주된 선들이 있습니다. 그 선들을 점선으로 표시해 봤습니다. 사진은 이런 선들을 화면의 프레임 안에 넣을 것인지, 뺄 것인지, 어디에 넣을 것인지 결정하는 작업에서 시작합니다(25쪽).” 같은 글을 읽으면서 슬픕니다. 사진은 무엇을 넣거나 빼자고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그저 내 이야기를 담습니다. 무엇을 더 넣은들 무엇을 더 뺀들 사진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 이야기는 군더더기가 있건 군살이 빠졌든 똑같이 내 이야기예요. 도마질을 하다가 손끝을 베건 도마질을 느릿느릿 하건 언제나 똑같이 내 밥차림이에요. 젓가락질을 잘 해야 밥을 잘 먹지 않아요. 젓가락질이 참 서툴어도 밥은 잘 먹습니다. 숟가락으로 먹을 수 있고, 찍개로 먹을 수 있어요. 그냥 손으로 먹어도 됩니다.

 

 밥상 앞에서 밥을 먹는 몸가짐과 마음씨에 사랑을 담습니다. 사진기를 쥔 손으로 어떤 이야기에 어떤 내 사랑을 담느냐를 생각할 노릇입니다.

 

 이리하여, “좋은 사진은 세상맛을 충분히 본 사람들이 잘 찍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진은 늦게 시작할 수 있고, 늦게 이루어지는 분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181쪽).” 같은 말은 참 터무니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자면, 동네 어린이한테 사진기를 쥐어 주면서 사진놀이를 할 까닭이 없어요. 로버트 프랭크가 뭐 얼마나 잘났기에 미국사람 사진을 내놓을 수 있었나요. 스티글리츠는 얼마나 나이를 먹은 다음 사진기를 쥐었기에 ‘사람들한테 알려진 사진을 그 나이’에 찍었을까요.

 

 제발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진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노래이든 연극이든 춤이든 무엇이든, 내가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는 이야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진장비 때문에 사진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렌즈나 필름이나 컴퓨터 때문에 사진이 바뀌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만지는 내 손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사진기를 움켜쥐며 바라보는 내 눈길에 따라 사진이 바뀝니다.

 

 〈조선일보〉 기자 아무개와 〈경향신문〉 기자 아무개가 한 자리에 있어도, 둘은 사진을 달리 찍고 글을 달리 씁니다. 〈조선일보〉 기자 저무개랑 〈한국일보〉 기자 저무개가 나란히 회사를 박차고 나와 취재를 하러 떠나더라도 서로 다른 곳에서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다른 이야기를 신문에 싣습니다. 어느 신문사 어느 기자가 옳거나 그르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다 다른 사람에 따라 다 다른 사랑을 다 다른 이야기꽃으로 피울 뿐입니다.

 

 살아가는 결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살아가며 사랑하는 꿈에 따라 사진이 바뀝니다. 살아가며 사랑하는 꿈을 받아들이는 몸가짐에 따라 사진이 거듭납니다.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은 사진찍기를 즐기려 하는 이들한테 이모저모 도움이 될 만한 ‘사진찍기법’을 여러모로 손쉽게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사진을 사랑하며 좋아하고 아끼는 길은 한 가지도 들려주지 못합니다.

 

 사진이론이나 사진실기나 사진비평이나 사진강의나 사진해설에서 홀가분해지면 좋겠습니다. 사진삶과 사진사랑과 사진꿈을 담는 ‘사진 즐김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고맙겠습니다. (4344.12.16.쇠.ㅎㄲㅅㄱ)


―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 (채승우 사진·글,넥서스BOOKS 펴냄,2004.9.20./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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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그러나 남아 있는 Camera Work 16
강운구 사진 / 한미사진미술관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사라지지 않을 사진이란
 [찾아 읽는 사진책 72] 강운구·김기찬·이갑철, 《사라진 그러나 남아 있는》(한미사진미술관,2011)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반화와 빈번한 국제교류전은 한국사진의 패러다임을 다양하게 변모시켰고, 30∼40대 작가들로 하여금 사진의 세계적 추세들을 재빨리 수용케 했다. 특히 영화적 연출 혹은 설치작업에 기반을 둔 사진작업은 그들의 지속적 관심을 끌고 있다. 그리고 세대를 불문하고 많은 작가들이 디지털 사진의 열기에 동참하며 창조적 상상력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그 결과 미술과 사진의 경계는 사라지고, 조작된 허구와 사진의 실재론은 그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희미해졌다(머리말).”는 이야기로 머리말을 여는 《사라진 그러나 남아 있는》(한미사진미술관,2011)이라는 얇은 사진책을 읽습니다. 머리말은 “사진예술의 세계적 추세에 합류하는 한국사진의 열기 속에서 흑백 은염사진, 다큐멘터리에 기반을 둔 한국 모더니즘 사진의 위상은 양적으로 축소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사진적 성과는 전혀 빛을 잃지 않았다(머리말).”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머리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2010년대로 넘어서는 한국땅 사진은 하나같이 ‘설치예술’ 모습을 보여줍니다. ‘연출사진’이나 ‘설치사진’이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아요. ‘연출예술’이나 ‘설치예술’이라는 이름이 걸맞습니다.

 

 오늘날 한국사진이라는 이름이 붙는 작품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사진기를 쓰고 사진으로 뽑는다 해서 모두 사진이라 할 만한지 곰곰이 생각합니다.

 

 나는 연필을 손에 쥐어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내가 연필을 손에 쥐어 쓰는 글은 말 그대로 글입니다. 이 글은 제품설명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사진비평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사진을 빛내는 사진말이 될 수 있어요.

 

 나는 연필을 손에 쥐었기에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내가 연필을 손에 쥐어 그리는 그름은 말 그대로 그림입니다. 가벼운 밑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신나는 만화가 될 수 있습니다. 살가운 얼굴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투박하지만,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네로가 그리듯 연필 하나로 이루는 무지개빛 그림이 될 수 있어요.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디수많은 온누리 사진쟁이는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어 말 그대로 사진을 하는 사람이 있고, 사진기를 빌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으며, 사진기를 써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연필을 손에 들고는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사진을 빚듯, 사진기를 손에 들고는 사진도 찍고 그림도 그리며 글도 씁니다. 사진 한 장은 글이 되기도 합니다.

 

 조그마한 사진책 《사라진 그러나 남아 있는》을 읽습니다. 강운구, 김기찬, 이갑철 세 분 사진을 몇 장씩 그러모은 자그마한 사진책을 읽습니다. 이 사진책에 깃든 사진은 앞으로 사라지지 않을 모습이 될까요. 이 사진책에 담긴 사진은 앞으로 잊히지 않을 이야기가 될까요.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가 되면 값지다 할 만할까 궁금합니다. 사라지는 이야기가 되면 값없다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사라진다 할 때에는 어디에서 어떻게 사라지는 이야기라 할까요. 사라지지 않는다 할 때에는 어디에서 어떻게 안 사라지는 이야기라 하나요.

 

 평론가가 잊으면 사라지나요. 대중이나 군중이 잊으면 사라지나요. 사진역사에 아로새기지 못하고, 사진문화를 들먹일 때에 나타나지 못하면 사라지나요.

 

 갤러리나 전시관이나 박물관에 걸리면 사라지지 않을 사진이라 할까 모르겠습니다. 시골마을 작은 집 작은 방에 걸리면 사라지는 사진이라 할까 모르겠습니다.

 

 필름으로 찍었든 디지털로 찍었든, 꼭 한 장만 종이로 뽑아 방문 위쪽에 붙인 ‘내 아이 돌 사진’은 처음부터 드러나지 못하거나 알려지지 못했기에 사진이라 하기 어려운지 궁금합니다. 다큐멘터리라 해서 필름으로 찍으란 법이 없을 뿐 아니라, 흑백필름으로 쓰라는 법이 없습니다. 패션사진이라 해서 값비싼 중형디지털사진기를 써야 하는 법이 없습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입니다. 그림은 그예 그림입니다. 글은 그대로 글입니다. 백만 사람이 읽어야 잊히지 않는 글이 아닙니다. 십만 사람이 보아야 잊히지 않는 그림이 아니에요. 만도 천도 아닌 백 사람이 보았대서, 아니 열이나 한두 사람이 보았대서 잊힐 만한 사진이지 않아요.

 

 가슴으로 읽히기에 오래도록 건사하는 글입니다. 300권 가까스로 찍어 50권 겨우 팔았다지만, 이 가운데 꼭 열 사람 가슴에 아로새겼다면, 이만 한 글이라 하더라도 사람들 가슴에 언제까지나 곱게 이어집니다.

 

 강운구, 김기찬, 이갑철 세 분이 빚은 사진으로 엮은 《사라진 그러나 남아 있는》은 사라진 모습을 담지 않습니다. 남은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모습이 남고 이야기가 사라졌을는지 모릅니다. 모습도 이야기도 자취를 감추었는지 모릅니다. 모습이랑 이야기랑 싱그러이 살아숨쉴는지 몰라요.

 

 어느 쪽이든 좋아요. 이 사진을 두루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흐뭇합니다. 이 사진을 오래 아끼는 사람들이 있으면 기쁩니다. 사진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찍고,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생각하면서 읽습니다. (4344.12.13.불.ㅎㄲㅅㄱ)


― 사라진 그러나 남아 있는 (강운구·김기찬·이갑철 사진,한미사진미술관 펴냄,2011.7.28./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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