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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현의 얼굴 - 그의 카메라가 담는 사람, 표정 그리고 마음들
조세현 지음 / 앨리스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글·그림·사진이 아름다이 태어나는 길
 [찾아 읽는 사진책 25] 조세현, 《조세현의 얼굴》(앨리스,2009)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어느 사진보다 얼굴을 담은 사진을 더 좋아하거나 눈길이 끌릴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애써 얼굴을 담은 사진이 아니더라도 얼굴을 읽을 수 있으며, 사람 모습을 담은 사진이 아닐지라도 사람 모습을 읽을 수 있다고 느낍니다.

 사진쟁이 조세현 님은 《조세현의 얼굴(앨리스,2009)에서 “사진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을 닮습니다(4쪽).” 하는 말로 첫머리를 엽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사진찍기와 사진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읽는 사람 마음에 따라 사진을 받아들입니다. 읽는 사람 삶에 따라 사진을 맞아들입니다. 찍는 사람 마음에 따라 사진을 받아들일 테고, 찍는 사람 삶에 따라 사진을 맞아들이겠지요.

 조세현 님은 “사람의 표정만큼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5쪽).” 하고도 말합니다. 스스로 아름답다 느끼는 삶과 이야기를 스스로 아름답게 사진으로 담거나 글로 옮기거나 그림으로 펼치면 됩니다. 온누리에서 ‘더’ 아름답거나 ‘가장’ 아름답다 할 무언가는 따로 없습니다. 그저, ‘나한테 참으로’ 아름답다 느낄 무언가가 있을 뿐입니다.

 이리하여 나 스스로 참으로 아름답다 느끼는 무언가를 글로 쓰면 글이 아름다이 빛납니다. 나부터 참말 아름답다 느끼는 무언가를 그림으로 그리면 그림이 아름다이 반짝입니다. 내가 무엇보다 아름답다 느끼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 사진이 아름다이 태어납니다.

 사진이란 다른 삶이 아닙니다. 사진이란 사진기를 손에 쥔 삶입니다.

 조세현 님 말은 죽 이어집니다. “보통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찍는다. 하지만 사람을 찍는다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과 몸짓만을 촬영하는 것이 아니다. 한때는 나도 그랬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이며 ‘내’가 그를 어떻게 보는지, ‘내’가 그를 어떻게 찍고 싶어 하는지에만 관심을 쏟았다. 사진을 찍는 데 있어 가장 우선시했던 것은 바로 ‘나’였다(29쪽).”고. 그런데, 사진책 첫머리에서 했던 말하고는 어긋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대목이 앞에 적은 이야기하고 견주면 참으로 맞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사람 표정을 아름답다 여기며 사진으로 찍는 일’은 겉훑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조세현 님이 ‘사람 얼굴빛’을 사진으로 찍고 싶다 할 때에는 겉훑기로 드러나는 모습을 겉훑기로 찍고픈 마음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 드러내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 자리에서 느끼며 찍고 싶다’고 말해야 옳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누구나 겉훑기로 사람을 읽어 겉훑기로 사진을 찍거나 겉훑기로 글을 쓴다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그렇지만 겉훑기로 하는 일이나 겉훑기로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슬플까요. 사람을 사귀든 만나든, 또 사람 모습과 이야기나 얼굴을 사진으로 담든 차근차근 속으로 사귀거나 만나면서 속으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진은 ‘찍히는 사람 자리에 선다’고 해서 한결 아름답거나 더 아름답거나 참 아름답지 않습니다.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이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아름답습니다. 내 쪽도 네 쪽도 아닌 다 같은 쪽이어야 합니다.

 이리하여 “사진 속 인물이 치아를 드러내고 활짝 웃을 필요는 없다.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따뜻함이 묻어나온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런 사진은 찍는 나도 행복하지만 보는 이도 행복하게 만든다(75쪽).”는 말을 다시 하고야 마는 조세현 님입니다. ‘사진을 찍는 나’와 ‘사진을 찍는 네’가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사진을 생각하는 조세현 님 모습을 다시금 봅니다. 이렇게 같이 즐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찍히는 네’ 자리만이 아니라 ‘찍는 내’ 자리를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함께 생각하며 조용히 하나될 때에 바야흐로 서로서로 웃으면서 사진 한 장을 손에 쥡니다.

 사진찍기란 삶찍기이고, 사진읽기란 삶읽기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에 내 사랑하는 삶을 찍고 싶어 땀을 흘리고, 사진을 읽는 사람은 내 사랑하는 삶을 읽고 싶어 마음을 들입니다.

 사진을 읽고 글을 읽다가 문득 궁금합니다. 조세현 님 스스로 사진찍기와 사진읽기가 어떠한가를 모르지 않는 듯한데, 왜 자꾸 엇나가는 이야기를 글이나 사진으로 보여주고 말까 궁금합니다. 조세현 님 스스로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진을 찍는다 한다면, ‘더 아름답게 살아가는 조세현 님 삶’을 글과 사진으로 보여주거나 나누면 될 텐데요. “사진은 결정적인 한 컷을 얻어내기 위한 긴 여정이다. 결정적인 한 컷을 위해 우리는 셔터를 누르고 또 누른다(96쪽).”는 말은 앞에서 조세현 님 스스로 깨달은 사진길하고는 몹시 동떨어집니다. 찍히는 너와 찍는 내가 하나되어 서로 흐뭇한 사진으로 이르는 길하고는 만나지 않습니다.

 사진은 ‘결정적인 한 장’이 아니라, ‘서른 장이 되든 삼천 장이 되든 서로 함께 좋아하며 웃음이 묻어나는 사진이 되도록 찍는 일’이어야 조세현 님이 《조세현의 얼굴》이라는 책에서 들려주는 글과 보여주는 사진이 제대로 빛나도록 이끄는 말마디가 되리라 느낍니다.

 사진은 ‘이 사진 한 장’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이든 삶이든 ‘어느 하루 한 가지 모습’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고이 이어지는 사람이면서 삶입니다. 고이 어이지는 사람과 삶을 사랑하는 사진입니다.

 조세현 님은 “내가 작업한 사진의 느낌이 좋다는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한 번 촬영한 스타들은 다른 사진 작업에서도 내가 촬영해 주기를 바랐다(130쪽).”는 까닭을 제대로 느껴야 합니다. ‘인기스타가 사진쟁이 조세현을 저절로 찾아오는 일’을 기쁘게 생각하면 안 되고, 왜 ‘사진쟁이 조세현이 사진으로 담은 사람들이 사진쟁이 조세현 사진을 좋아하려 하는가’를 스스로 읽어야 합니다.

 “먼 훗날 자신의 어린 시절이 담긴 사진으로 스스로의 세월을 돌아보며 행복해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189쪽).”고 스스로 적바림한 글을 스스로 되읽으면서 조세현 님 사진길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곱씹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골목은 중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습니다. 예쁘거나 아름다운 골목은 중국에도 있으며 한국에도 있습니다. 사람내음 물씬 나는 골목은 중국에도 한국에도 골고루 있을 뿐 아니라, 일본이나 프랑스나 버마나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이나 페루나 볼리비아에도 있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예쁜 사람 예쁜 삶 예쁜 골목입니다. 다만, ‘작가’와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한국에 있는 예쁜 사람 예쁜 삶 예쁜 골목이 무엇인지를 느끼지 않습니다. 아니, 느끼지 않는다기보다 예쁜 사람 예쁜 삶 예쁜 골목이 어디에 있는지 함께 살아가지 않으니 모를밖에 없습니다.

 예쁜 사람하고 함께 살아가며 저절로 예쁜 사진을 찍는 ‘이름없이 수수한’ 여느 사람들을 작가와 전문가만큼은 모릅니다. 중국이건 티벳이건 네팔이건 쿠바이건 신나게 나들이를 하는 숱한 작가와 전문가들은 막상 인천 숭의3동 191번지이건 숭의4동 7번지이건 걸어 보지 않습니다. 부산 골목이건 음성 골목이건 목포 골목이건 춘천 골목이건 얼마나 걸어 본 작가요 전문가일까요. 강운구 님은 이 나라 시골자락을 골골샅샅 누벼서 안 가 본 곳이 거의 없다 하는데, 한국땅 사진쟁이나 글쟁이나 그림쟁이는 한국땅 가운데 어디를 얼마나 두 다리로 천천히 거닐며 밟아 보았을까요.

 자가용을 몰며 지나간 마을이 아니라 두 다리로 거닐다가 한참을 못박힌 듯이 서서 바라본 마을이 얼마나 될까요.

 자가용을 몰며 지나가는 때에는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자가용에서 내려 두 다리로 걸어야 비로소 마을을 보며, 비로소 마을을 볼 때에 못박힌 듯이 제자리에 우뚝 서서 한참 들여다보아야 바야흐로 사진을 찍어 사진 한 장에 마을사람 사랑을 고이 받아들이는 내 사진이 태어납니다.

 조세현 님은 “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수업의 모든 과정이 끝날 무렵 학생들에게 그동안 배운 걸 토대로 사진을 찍어 오라는 과제를 준다. 어떤 친구는 풍경을 찍어 오기도 하고 어떤 친구는 오브제를 찍어 오기도 하고 어떤 친구는 인물을 찍어 오기도 한다. 뭘 찍어 오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사진을 보는 사람이 공감을 하느냐, 못 하느냐이다(166쪽).” 하고 말합니다.

 ‘공감(共感)’이라는 한자말은 “함께 느끼다”를 뜻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과 사진을 읽는 사람이 함께 느낄 수 있느냐를 살핀다는 소리입니다. 이는 곧, 사진을 찍는 사람과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 한마음이 되느냐를 살핀다는 소리요, 찍고 찍히는 사이와 찍고 읽는 사이는 한동아리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일 테지요.

 참말로 무슨 사진을 찍느냐는 아랑곳할 일이 아닙니다. 만듦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참말로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사진인지, 겉껍데기 시늉하는 사진인지를 대수로이 살펴야 합니다. 껍데기 사진인지 알맹이 사진인지를 가누어야 합니다. 사랑이 어린 사진인지 사랑을 꾸민 사진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뭘 느낄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는가요. 눈으로 본다 해서 사진으로 찍을 수 없고, 눈으로 본다 해서 사진을 읽을 수 없습니다. 눈이 아닌 마음을 길어올려 내 삶을 통틀어야 비로소 사진을 찍는 손길을 일으키고, 눈이나 말이나 입이 아니라 가슴과 몸뚱이와 삶으로 마주해야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 삶을 가만히 얼싸안습니다.

 다른 사람 사진을 읽을 때에는 ‘공감할 만하느냐’라든지 ‘함께 느낄 만하느냐’로 따질 수 없습니다. 대학교 사진학과 아이들한테도 이런 잣대를 들이댈 수 없습니다. ‘대학 교수인 내’가 함께 느낄 수 있든 없든 ‘삶이 묻어난 사진을 대학교수인 내가 내 삶을 쏟아서 읽을 수 있느냐’가 훨씬 큰 일입니다. 사진길을 걸어가려는 어린 학생들한테 ‘사진을 보는 내가 함께 느낄 수 있는 사진을 찍으라’고 말할 수 없어요. ‘사진교수인 내가 알아보든 못 알아보든 사진을 찍는 네 삶을 이 사진 한 장이 고이 담아, 네가 사진으로 찍은 이 사람(또는 사물)하고 함께 즐거울 수 있도록 하면 된다’고 말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조세현의 얼굴》이라는 책에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담았으니까요. 조세현 님 스스로 알면서도 모르기도 하는 이러한 사진길이야말로 이 나라에서 사진길을 꿋꿋하거나 씩씩하게 걸어가고파 하는 사람들한테 즐거운 도움말이 될 테니까요.

 글은 사랑이 있을 때에 태어납니다. 사랑이 없이 쓰는 글이란 죽은 글입니다. 그림은 믿음이 서릴 때에 태어납니다. 믿음이 없이 그리는 그림이란 죽은 그림입니다. 사진은 어느 때에 태어날까요. 사진에 무엇이 없으면 사진은 죽은 사진이 되고 말까요. 산 사진과 죽은 사진은 어느 자리에서 갈릴까요.

 한국땅에서 사진길을 걷는 사람은 살아숨쉬는 사진길을 걸어가는지 궁금합니다. 한겨레붙이로 한국땅에서 사진길을 걷는 사람은 숨막히는 사진길을 걸어가지는 않나 궁금합니다. (4344.3.13.해.ㅎㄲㅅㄱ)


― 조세현의 얼굴 (조세현 사진·글,앨리스 펴냄,2009.11.15./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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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 - 임영균의 사진과 삶의 대한 단상
임영균 지음 / 브리즈(토네이도)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사진학과에 사진교재는 부질없습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24] 임영균,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토네이도미디어그룹,2010)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임영균 님이 사진학과 학생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러모은 책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읽는다. 이 책은 사진책이라기보다 사진교재라 할 만하다. 글쓴이 스스로 머리말이나 꼬리말에서 밝히기도 하지만, 대학교 사진학과에 들어온 젊은이한테 ‘사진을 익히는 첫걸음’쯤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찬찬히 그러모은다.

 그런데 궁금하다. 이만 한 ‘사진 밑지식’조차 사진학과 학생들은 갖추지 못했는가 하고. 대학교 사진학과쯤 들어가려 하는 새내기 대학생들은 고등학생 때까지 이만 한 이야기조차 스스로 깨닫거나 헤아리지 못하는가 하고. 이리하여, 대학교 사진학과에서는 고작 이런 밑지식을 한 해에 걸쳐 가르쳐 주어야 하는가 하고.

 사진학과 교수 임영균 님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스스로 가장 고민하고 느꼈던 삶이 그대로 배어난 것이다(17쪽).” 하고 말한다. 이 말은 더없이 마땅하다. 다만, 더없이 마땅한 이 말을 끌어내기까지 너무 많은 길을 거쳐야 하는구나 싶다. 게다가 더없이 마땅한 이 말은 굳이 사진학교에서 가르칠 이야기가 아닐 텐데 하고 느낀다. “좋은 카메라를 선택하는 기준은 나를 가장 잘 아는, 내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카메라를 만나는 것이다(29쪽).”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몹시 마땅한 대목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깊이가 얕다고 느낀다. 대학교 사진학과라면 누구나 사진기를 다룰 텐데, 사진기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나 스스로 잘 다루지 못하는 장비를 다루려는 학생이 있을 수 있는가. 사진학과 교수이든 전문 사진쟁이이든 나 스스로 잘 다루지 못하는 사진기를 쓸 수 있는가.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내 몸에 안 맞는 자전거를 아무렇게나 타고 다닐 수 있는가. 밥을 먹는 사람이 내 손에 안 맞는 수저로 밥을 먹을 수 있는가.

 그러나, 내 몸에 안 맞는 수저일지라도 쓰다 보면 익숙해진다. 내 몸에 안 맞는 자전거라 하더라도 타다 보면 익숙해진다. 내 몸에 어울리지 않던 사진기라 하지만 오래오래 쓰다 보면 익숙해진다.

 임영균 님은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이라는 이름을 붙여 책 하나 내놓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임영균 님 스스로 사진학교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배웠기 때문에, 다시금 사진학교 젊은이한테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임영균 님이 다른 사진을 배웠다면 다른 사진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테지. 틀림없이 임영균 님도 ‘사진 = 삶’인 줄을 어느 만큼 헤아리기는 하지만, 아직 온몸으로 깊숙하게 느낀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스스로 가장 고민하고 느꼈던 삶이 그대로 배어난 것이다”라는 말은 ‘내가 가장 좋아하거나 사랑할 사진이란 스스로 일구는 삶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진’이라는 소리이고, 한 마디로 간추리면 ‘내가 좋아할 사진은 내가 좋아할 삶’이며, ‘내가 사랑하는 사진은 내가 사랑하는 삶’이라는 소리이다. 곧, 내가 사람을 사랑하는 삶이 그대로 내 사진이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 사진으로 담고, 내 사랑이 내 삶이 되며, 내 사랑하는 사람하고 내 삶을 함께 일구는데, 내 사진은 이러한 삶흐름을 고스란히 담는 이야기보따리인 셈이다.

 오늘날 고등학교 아이들을 생각해 본다. 오늘날 고등학교 아이들은 꿈이나 삶이나 넋을 품을 수 없다. 아이들은 오로지 대학바라기만 해야 한다. 대학교 사진학과에 들어가려 한다 해서 고등학생 때이든 중학생 때이든 초등학생 때이든 푸른 꿈이나 푸른 사랑이나 푸른 삶을 일구지 못한다. 아이들은 입시 성적에 따라 대학교에 들어간다. 아이들이 어떤 꿈과 삶과 사랑을 품느냐에 따라 ‘하고픈 공부’를 하든 ‘하고픈 일’을 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대학교 사진학과에서는 아이들한테 ‘사진은 바로 네 삶이란다’ 하고 들려줄밖에 없다. 아이들 스스로 ‘사진은 바로 내 삶이야’ 하고 느끼면서 ‘내가 사진으로 담을 내 삶을 어떠한 이야기가 드러나도록 내 손길을 가다듬으면 좋을까’ 하고 돌이키도록 이끌지 못한다. 이럴 겨를이 없는 대학교 사진학과가 되고 만다. 아이들은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너무도 슬픈 시험기계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생각이 갇히고 마음이 닫히며 삶이 쪼그라들었으니까, 이 갇히고 닫히며 쪼그라든 넋을 천천히 풀어내야 할 테니,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에 담긴 아주 가벼운 밑지식을 대학교 사진학과에서 가르칠밖에 없다 하리라.

 그래도 이 책은 여러모로 아쉽다.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다 다른 삶을 일구면서 백 가지 다른 사진이 태어나야 할 텐데, 저마다 다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다 다른 사진길을 걷도록 얼마나 잘 타이르면서 북돋우는지는 모르겠다.

 임영균 님은 말한다. “미술의 역사가 서양미술사와 동양미술사로 확연하게 구분되는 지금, 서양사진사와 동양사진사의 구분은커녕 동양사진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는 사진사 도서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161쪽).”고. 그러면, 임영균 님 스스로 말하면 된다.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조차 서양 사진쟁이 이야기로 그득하다. 고작 일본 사진쟁이 한두 사람 이름이 얼핏 나올 뿐이다. 일본 사진밭조차 더 넓거나 깊게 다루지 못한다. 베트남 사진이라든지 버마 사진이라든지 인도네시아 사진은 아예 건드리지 못할 뿐 아니라, 중국 사진이나 대만 사진이나 재일조선인 사진은 조금도 다루지 못한다.

 조금 더 바지런히 아시아 여러 나라 사진책을 사서 모으고 읽히면서 임영균 님 사진넋과 사진학과 대학생 사진얼을 끌어올려야 하지 않느냐 생각한다. 말로만 ‘동양사진사’ 걱정을 하지 말고, 아름다우며 재미나고 즐거운 동양사진사 이야기를 들려주면 된다. 말로만 앞세우는 걱정을 넘어야 하고, 말부터 ‘임영균 님 스스로 사랑하며 아끼는 숱한 한국·일본·아시아 사진 이야기’를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에 담으면 된다. 이러한 이야기를 담지 못한다면 이 사진교재는 교재로서도 그리 아름다울 수 없다. 아니, 그저 교재로 그치고 만다.

 대학생한테 교재란 부질없다. 대학교 미술학과에 교재가 쓸모있을까. 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교재가 쓸데있을까.

 문화를 말하건 예술을 다루건 교재가 있을 수 없다. 문화나 예술을 이야기하는 학과에서 ‘교재 = 삶’일 뿐이다. 문화쟁이나 예술쟁이가 되려는 학생은 학생 스스로 학생 삶을 교재로 삼아야 한다. 학생 스스로 학생 몸뚱아리와 마음밭을 교재로 삼아야 한다. 학생 스스로 부대끼거나 부딪히는 하루하루가 송두리째 교재가 되며 책이 되고 삶이 된다. 학생들이 만나거나 사귀는 모든 사람이나 짝꿍이나 이웃이 교재가 되고 책이 되며 삶이 된다.

 살림하는 사람한테는 요리책이나 육아책이란 부질없다. 살림하는 사람은 하루하루 맞아들이는 온갖 일거리가 곧바로 교재 노릇을 하고 책 구실을 한다. 그저 몸으로 부둥켜안는 삶이다. 아이랑 노는 법을 책을 읽어 배울 수 있겠는가. 그냥 아이 손을 잡고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된다. 구슬치기를 할 때이든 고무줄놀이를 할 때이든 놀이책을 옆에 놓고 구슬을 치거나 고무줄을 넘겠는가.

 사진하는 사람 가운데 사진교재를 곁에 끼면서 사진을 찍는 바보란 없다. 사진하는 사람은 ‘늘 들고 다니기에 알맞을 사진기’를 하나 옆구리이든 어깨이든 손에 끼거나 쥐거나 걸치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삶과 사랑’을 사진꽃으로 맺으면 된다. 굳이 교재가 있어야 한다면 이 나라가 교재이고 내 동네가 교재이며 내 어버이가 교재이다.

 교과서나 교재는 한 시간쯤 들여 가볍게 읽어서 치우는 심심풀이 땅콩일 뿐이다. 교과서나 교재 하나를 한 해나 들여 가르치려 한다면,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슬프다. 굳이 어느 책 하나를 교재처럼 삼으려면 강의를 하는 한 시간에 사진책 두어 가지를 보여주면서 가르치고, 한 해를 통틀어 사진책 이삼백 권은 보여주면서 가르칠 때에 비로소 ‘교재를 써서 가르친다’고 말할 수 있다.

 사진을 배우거나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대학교 사진학과 같은 데에는 들어갈 까닭이 없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시험기계가 되고 만 아이들로서는 대학교밖에 갈 데가 없다고 잘못 안다. 이 어리숙한 철부지들한테 철이 들도록 할 몫이 대학교 교수한테 있다. 사진학과 교수라면 어리숙한 철부지한테 교재를 버리고 대학교 졸업장을 버리면서 ‘아이들아, 너희는 너희 삶을 찾아야지.’ 하고 가르칠 줄 알아야지 싶다. ‘교재 읽히기’가 아니라 ‘아이들이 저마다 스스로한테 가장 알맞을 수많은 교재가 어디에 있는지를 제힘으로 알아내도록 이끄는 길동무이자 이슬떨이 몫’을 할 수 있는 임영균 님으로 거듭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4344.3.11.쇠.ㅎㄲㅅㄱ)


―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 (임영균 글·사진,토네이도미디어그룹,2010.1.5./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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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s (Hardcover)
Steve McCurry / Phaidon Inc Ltd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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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좋은 사진은 따로 없다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1] 스티브 맥커리(Steve McCurry), 《Portrait》(Phaidon,1999)



 사진을 잘 찍는다 할 만한 사진쟁이는 따로 없습니다. 사진을 못 찍는다 할 만한 사진쟁이 또한 따로 없습니다. 사진쟁이는 저마다 다 다르게 사진을 찍기 때문에, 누가 더 잘 찍거나 누가 더 못 찍는다 이야기하거나 가르지 못합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대로 찍는 사진이기 때문에 ‘이 사진이 참 좋다’고 한다면, 나로서는 ‘이 사진쟁이가 살아가는 결이 참 좋다’고 느낀 셈입니다. ‘이 사진은 그닥 좋지 않다’고 느끼면, 나로서는 ‘이 사진쟁이가 나아가는 삶이 그닥 좋지 않다’고 느낀 셈이에요.

 사진쟁이는 누구나 사진쟁이 나름대로 선 자리에 알맞게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즐김이는 누구나 사진즐김이 나름대로 선 자리에 걸맞게 사진을 읽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사진을 읽는 사람이든, 서로서로 선 자리에 따라 사진을 마주합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제 삶자리를 고이 맞아들이면서 사진을 껴안습니다.

 책을 읽든 일을 하든 말을 하든 글을 쓰든 똑같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는 만큼 책을 읽거나 일을 하거나 말을 하거나 글을 씁니다. 아는 만큼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사는 만큼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아는 만큼 일을 하지 않고, 내가 살아가는 만큼 일을 해요. 아는 만큼 말을 하거나 글을 쓰지 않아요. 이제껏 살아온 만큼 말을 하거나 글을 씁니다.

 살아가는 눈이 사진하는 눈입니다. 살아가는 손길이 사진하는 손길입니다. 온누리를 따숩게 껴안고픈 꿈으로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온누리를 따숩게 껴안고픈 꿈이 사진으로 녹아듭니다. 다만, 사진길을 걸은 지 아직 얼마 안 된 이라면, 온누리를 따숩게 껴안고픈 꿈이 사진으로 깊이 녹아들지는 못합니다. 조금 어리숙하겠지요. 어느 모로 보면 좀 지나치거나 넘칠 수 있고, 때로는 모자라거나 엇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 삶길에 따라 내 사진길인 만큼, 사진으로 담는 솜씨가 모자라더라도 사진을 이루는 넋은 처음이나 끝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살아가는 매무새 그대로 사진을 합니다. 살아가며 사람을 사귀는 매무새 그대로 사진을 하면서 사람을 만납니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뭇목숨이든 사진으로 예쁘게 담으려는 꿈을 품으면, 언제나 예쁘게 담습니다. 다만, 이때에도 처음에는 손재주는 좀 어설프겠지요. 차근차근 손재주를 가다듬으면서 내 사진을 빛냅니다.

 먼저 어떻게 살아가려 하는가 하고 내 삶을 단단히 뿌리내리지 않고서는 사진을 하지 못합니다. 먼저 내 삶을 어떻게 일구려 하는가 하고 내 다짐을 굳세게 다스리지 않고서는 사진뿐 아니라 자전거라든지 달리기라든지 살림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배움이라든지, 어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좋은 사진이 따로 없듯이 좋은 삶은 따로 없습니다. 좋은 사진이 따로 없는 만큼 좋은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좋은 사진을 생각할 수 없듯이 좋은 사랑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더 돋보이는 사람을 찍었기 때문에 사진이 더 돋보일 까닭이 없습니다. 더 이름난 사람을 찍었으니까 사진이 더 이름날 까닭이 없습니다. 더 예쁘장한 사람을 찍었다 해서 더 예쁘장한 사진이 되지 않아요.

 사진은 그예 사진이고, 사람은 그예 사람이며, 사랑은 그예 사랑입니다.

 있는 그대로 사진을 맞아들이지 않는다면, 나한테든 남한테든 사진이란 사진이 아니라 껍데기이거나 겉치레에 그칩니다. 있는 그대로 사진을 가슴으로 삭여 내 삶 한 자락으로 살포시 녹일 때에 바야흐로 나한테든 남한테든 살가이 사진으로 젖어듭니다.

 스티브 맥커리(Steve McCurry) 님이 일군 사진책 《Portrait》(Phaidon,1999)를 들여다봅니다. 사진책 《Portrait》에 담긴 사람들 가운데 돋보인다거나 이름났다거나 한 사람도 틀림없이 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사진책으로 담긴 사람들 바로 옆에 있었을 다른 사람을 사진으로 담았어도 《Portrait》는 똑같이 이루어집니다.

 누구를 찍었기에 《Portrait》가 되거나 누구를 못 찍거나 안 찍었대서 《Portrait》가 안 되지 않습니다.

 영어사전에서 ‘Portrait’를 찾아보면 ‘초상화’나 ‘인물 사진’이라고 풀이합니다. 아마 그림만 있던 지난날에는 ‘얼굴그림’을 ‘Portrait’라 했겠지요. 우리는 말뜻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 말이나 함부로 쓰며 살아가는데, ‘肖像畵’란 “초상 그림”이고, “초상 그림”에서 ‘肖像’이란 “얼굴을 그리는 일”입니다. 아득히 먼 옛날 이 나라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쉽거나 바른 한국말을 하기보다는 중국사람을 섬기며 중국말을 하거나 중국글을 쓰기를 즐겼습니다. 이러다 보니, 여느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肖像’ 같은 한자말을 중국에서 받아들였으며, 이 중국말은 아직까지 이 땅에서 버젓이 살아숨쉽니다. 이제 우리 한국사람은 중국사람 중국말이 아닌 한국사람 한국말을 해야 할 테니, ‘초상화’가 아닌 ‘얼굴그림’이라 말해야 하며, ‘인물 사진’ 또한 아닌 ‘얼굴사진’이라 일컬어야 제대로 쓰는 말이 됩니다.

 곧, 《Portrait》는 ‘얼굴사진’이란 소리입니다. 그러나, 사진책을 내놓을 때에 《얼굴사진》처럼 쓰는 사람은 없으니, 그냥 《얼굴》이라 하겠지요. 또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티브 맥커리 님은 영어로 ‘human’이라 하지 않고 ‘portrait’라 했습니다. ‘사람’이라 할 때에는 사람 모습이나 얼굴 모습뿐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나 ‘사람이 살아가는 터’까지 두루 담는 사진이요, ‘얼굴’이라 할 때에는 얼굴 모습이나 얼굴이 드러나는 사람 모습을 담는 사진이지,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이나 보금자리까지 넓게 살피는’ 사진이 아닙니다. 애써 ‘사람’으로 하지 않고 ‘얼굴’로 하더라도 ‘사람삶’을 담을 수 있다는 뜻으로 《Portrait》이고, 이에 걸맞게 온누리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면서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사진을 책 하나로 도톰하게 엮습니다.

 《Portrait》에 담긴 얼굴사진을 살피면, 어린이 얼굴사진이 어른 얼굴사진보다 조금 많고, 계집아이 얼굴사진이 사내아이 얼굴사진보다 살짝 많으며,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와 버마 사진이 거의 모두를 차지합니다. 사이사이 티벳과 미국 사진이 깃듭니다. 니제르나 말리나 인도네시아나 유고슬라비아나 네팔 사진도 드문드문 섞입니다.

 사진을 찍는 스티브 맥커리 님을 가만히 바라보는 눈빛이든, 사진쟁이가 사진을 찍는 줄 모르는 사이 찍힌 사람들 눈빛이든, 이 나라 사람들 눈빛이든 저 나라 사람들 눈빛이든, 《Portrait》에 얼굴이 실린 사람들 눈빛은 무척 말갛습니다. 미국사람이라서 게슴츠레하지 않습니다. 배고픈 어린이라서 뿌옇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라서 슬프지 않습니다. 돈있는 사람이라서 기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삶 그대로 보여주는 눈빛입니다.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두 손을 곱게 모아 무슨 이야기를 소곤소곤 들려줍니다. 사진으로 찍히면서 이렇게 두 손을 곱게 모을 수 있구나 하고 새삼 깨닫습니다. 사진쟁이가 사진을 잘 찍었으니 이와 같은 모습을 얻기도 할 테지만,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 마음을 한껏 열어 ‘아무쪼록 사랑과 기쁨이 찾아드소서’ 하는 비손이 담기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여러 나라 여러 겨레 사람들을 이처럼 한 자리에 모아서 두루 돌아보면서 생각합니다. 몸피와 얼굴과 살결이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같은 겨레 사람일지라도 옷차림이 똑같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이 물레를 잣고 베틀을 밟아 바느질을 하여 얻은 옷일지라도 두 사람이 입으면 두 가지 옷이 다릅니다. 얼핏 보면 똑같다 생각하겠으나, 다른 두 사람이 입은 옷인 만큼 다른 두 가지 옷입니다. 그러나, 다른 두 사람이지만, 두 사람 몸에 흐르는 기운과 넋이란 한동아리로 아름답습니다. 두 사람 모두 따순 피가 흐르며 따순 사랑이 감돕니다.

 흙땅을 맨발로 뒹굴든, 아스팔트바닥을 구두를 신으며 자가용을 모느라 밟을 일조차 없든, 두 사람 모두 몸에는 따순 피가 흐릅니다. 차가운 피가 흐르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더 거룩해 보이는 얼굴을 찾으려고 티벳이나 인도나 아프가니스탄을 찾아갈 까닭이 없습니다. 더 슬퍼 보이거나 가녀리다 싶은 얼굴을 찾으려고 미국이나 프랑스를 떠돌 까닭이 없습니다. 저마다 선 자리에서 돌보는 삶을 느끼면서 손을 잡을 수 있으면 됩니다. 누구나 제 나라 제 겨레 터전에 걸맞게 살아가는 결을 사랑할 수 있으면 됩니다.

 사진쟁이는 사진이기 때문에 글이나 그림이 이루지 못하는 이야기를 빚습니다. 글이나 그림으로는 온누리 여러 나라와 겨레 삶자락을 두루 찾아다니며 마주하는 동안 이렇게 숱한 빛깔 숱한 얼굴 이야기를 낳지 못합니다.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 다 다른 얼굴빛과 ‘얼굴에 서린 이야기’를 두루 느끼도록 돕습니다.

 좋은 사진은 따로 없습니다. 좋은 삶이라고 느끼며 즐거이 꾸리는 사람이 있다면, 좋은 사람으로서 좋은 삶이요, 이 좋은 사람 좋은 삶을 어깨동무하는 사진쟁이는 전문작가이든 다큐작가이든 풋내기이든 새내기이든 아무것 아닌 사람이라 하든, 사진기를 들 때에 누구나 다 다르게 좋은 사진을 얻습니다. (4344.3.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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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건축 7 - 수원성
주명덕 사진 / 광장 / 198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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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을 찍는 발자국인 사진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18] 주명덕, 《수원성》(광장,1981)



 수원에는 수원성이 있습니다. 수원성은 자그마한 성입니다. 자그맣지만 야무지고, 한국전쟁 때에도 씩씩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수원성은 수원시내 한복판에 자리합니다. 사람들이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고, 수원성을 따라 버스며 자동차며 수없이 오고갑니다.

 우리 나라에 사진이 들어온 첫무렵부터 수원성은 으레 좋은 사진감이 되었습니다. 한국사람이건 일본사람이건 서양사람이건 수원성을 즐겨찍습니다. 한국전쟁 무렵 사진 가운데에도 수원성 둘레 모습을 담은 사진을 어렵잖이 찾아봅니다. 꽤 예전 사진을 찾아보면, ‘오늘날 보기에 수원성이 몹시 작아 보이’지만, 지난날 수원성 둘레 풀집들이 지붕 낮은 채 빙 두른 모습을 볼 때면, 이 수원성은 ‘하나도 안 작은 성’이었구나 싶습니다.

 생각해 보고 찾아서 살피면 수원성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많습니다. 수원사람 가운데 수원성을 뒤로 하며 사진 한 번 안 찍은 사람은 드무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수원성을 곰곰이 돌아보면서 구석구석 낱낱이 사진으로 담아내어 사진책으로 일구는 일 또한 드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 성곽을 사진으로 담는 분이 꽤 있기는 하지만, 우리네 성곽을 담은 사진이 사진책으로 나오는 일도 퍽 드물기는 합니다. 더욱 깊이 담아내지 못한 사진이기 때문에 사진책이 못 나온다 할 만합니다. 애써 사진책을 내놓지만 즐거이 장만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출판사로서는 책 만드는 돈을 거둘 수 없으니 선뜻 마음을 기울이지 못한다 할 만합니다. ‘기록’으로 찍거나 ‘예술’로 담기는 하지만, 정작 성곽을 성곽답게 바라보거나 껴안으며 사진으로 빛내기까지는 못하는 탓인지 모릅니다.

 중국 만리장성을 사진으로 일구는 모습을 보면 무척 남다릅니다. 만 리라는 길이가 되는 기나길고 크디큰 성이기 때문에 만리장성을 사진으로 일굴 때에 무척 남다르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큰 성이건 작은 성이건 그닥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 마음이 대수롭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조금 더 깊이 보듬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성이든 큰 성이든, 모습이 알뜰히 남아 사람들 삶터에 절로 녹아든 성이든 산속 깊이 파묻힌 성이든, 사진으로나 그림으로나 글로나 알뜰살뜰 실어내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주명덕 님이 담은 《수원성》(광장,1981)을 봅니다. 이 사진책이 처음 나오던 때에 얼마나 사랑받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저로서는 이 사진책이 새책방에서 자취를 감춘 지 서른 해가 지나고서야 헌책방에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저, 한 가지는 생각합니다. 누군가 이 사진책을 그무렵에 새책으로 한 권 사 준 분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사진책을 1981년부터 서른 해가 지난 어느 날 헌책방에서 몹시 고맙게 만날 수 있습니다.

 사진책 《수원성》은, 수원에 깃든 수원성을 차분히 돌아봅니다. 멀고 가까이, 코앞에서 밀찍이서, 겨울날 여름날, 온갖 얼굴 온갖 느낌이 감도는 수원성 이야기를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다만, 1981년에 나온 사진책 《수원성》은 수원성을 ‘건축 테두리’에서만 살핍니다. 건축 테두리에서 한 걸음 나아가, 수원성이 깃든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까지는 다루지 않습니다.

 마흔여덟 쪽짜리 얇은(그렇지만 판짜임은 큰) 사진책에서 풀이말을 뺀 마흔두 쪽으로만 사진을 담으니까, 건축 출판사에서 내놓은 이 사진책이 건축 테두리 아닌 사람 테두리에서 수원성을 담기란 어렵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사람 테두리를 살피지 않았다고 여길 만합니다. 사람 테두리에서 수원성을 다룰 사람은 나중에 누구라도 하면 될 노릇이고, 으레 수원성을 ‘한국 건축 발자취’에서 놀랍고 빼어난 예술이라고 일컫지만, 막상 얼마나 놀랍거나 빼어난 예술인가를 드러내는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은 많지 않습니다. 참 드물다고 해야 옳습니다.

 수원성 둘레에서 살아가며 수원성을 마주하고 지낸 이야기를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길어내는 수원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이들 가운데, 수원 가까이에서 사는 터라 수원마실을 즐기면서 수원성 이야기를 적바림해 내는 이들은 그다지 안 보입니다. 다 안다 할 만하고, 이름이야 흔히 듣는다지만, 수원성을 가까이와 멀리에서 곰곰이 되새기면서 사진꽃으로 피우는 손길이 아주 드물어요.

 사진책 《수원성》은 이 한 권으로 수원성에 깃든 모든 이야기 실타래를 풀지 않습니다. 48쪽짜리 얇은 책에 걸맞게 이야기를 보듬습니다. 1981년까지 우리 스스로 일군 땀방울 값만큼 알뜰히 엮습니다.

 서른 해가 지난 오늘날 이 자리에서 생각합니다. 사진책 《수원성》 이야기를 이때 1981년부터 새삼스레 꾸준하게 더 이었으면 2011년에는 어떠한 사진이야기가 꽃을 피울 만할까 하고. 1981년부터 2011년까지 ‘사진으로 읽는 수원성 이야기’를 누군가 바지런히 적바림했으면, 수원성을 말하는 사진으로뿐 아니라, 한국 성곽을 말하는 사진으로도, 또 한국 성곽뿐 아니라 세계 성곽을 말하는 사진으로도, 더욱이 성곽뿐 아니라 건축 사진으로도, 이리하여 사람들 살림터를 말하는 사진으로도, 마침내 사람을 말하는 사진으로도 참으로 돋보이면서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새로운 사진삶을 이룩했겠지 하고 느낍니다.

 사진은 사진입니다. 사진은 어제를 찍지 않습니다. 사진은 앞날도 찍지 못합니다. 사진은 오로지 오늘만 찍습니다. 사진은 오늘 하루 내가 살아가는 발자국을 가만가만 찍습니다. 오늘을 찍어 하루가 흐르고 나면 오늘 찍은 이야기는 어느 누구도 두 번 다시 찍을 수 없는 삶자국입니다. 잘난 기록이나 못난 기록이 아닙니다. 그저, 나 스스로 살아가며 남기는 사진이요 발자국입니다.

 사진이 사진으로 되는 까닭은 돋보이거나 밉보이는 모습을 찍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수수하게 내 삶을 사랑하는 결을 고스란히 담아서 엮기 때문에 사진이 사진으로 됩니다. 누군가 1981년부터 2011년까지 수원성을 알차게 사진으로 담았다면, 이 사진은 틀림없이 훌륭하며 멋진 사진책으로 태어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오늘 2011년부터 2041년까지 누군가 차근차근 새롭게 사진길을 걸어가려 한다면, 이러한 사진은 또 이러한 사진대로 2011년부터 2041년까지 아름다운 발자국와 이야기를 나누는 좋은 사진책으로 태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찍어야 하거나 저렇게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2011년에 수원에서 태어난 아이를 안고 수원성 앞에서 한 장 찍고,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식구들이 모여서 사진을 한 장씩 찍기를 서른 해쯤 하기만 해도 멋진 ‘수원성 이야기 감도는 사진’입니다. 이러한 사진찍기를 꾸준히 잇는다면, 한 집안 사람들 살아낸 발자국이 사진책에 알알이 스미겠지요. 2011년부터 2111년까지 이와 같이 사진찍기를 한다면, ‘수원성은 그대로이지만 수원사람은 늘 달라지는 흐름’을 보여줍니다. 사진은 사진이기에 사진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 대단히 많습니다.

 사진은 만들지 못합니다. 사진은 꾸미지 못합니다. 사진은 치레하지 못합니다. 사진은 그저 찍을 뿐이고, 사진은 그예 찍기만 하며, 사진은 그대로 찍으며 이야기가 됩니다. (4344.3.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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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윤의 비밀 정원
박지윤 사진.글 / 엘컴퍼니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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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미가 될 수 없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20] 박지윤, 《박지윤의 비밀정원》(엘컴퍼니,2007)



 예쁘다 싶은 모습을 보는 눈이 참말로 내가 보는 눈인지, 누군가한테서 듣거나 본 다음 ‘남들이 예쁘다 말하니’까 나도 예쁘다고 생각하면서 따라서 보는 눈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찍은 사진 한 장을 남한테 내보이면서 ‘예쁘게 봐 주셔요’ 하고 바라는 마음인지, 나 스스로 내 삶을 예쁘게 일구면서 나부터 참으로 예쁘구나 하고 느껴 절로 웃음이나 눈물이 흐르는 사진을 찍는 마음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진은 취미가 될 수 없습니다. 사진은 ‘내가 좋아하는 삶’이 될 뿐입니다. 사진은 취미가 아니기 때문에, 시간죽이기를 하듯 할 수 없습니다. 사진은 취미가 되지 않기 때문에, 멋을 낸다거나 겉치레를 하듯 할 수 없습니다. 사진은 취미하고 동떨어지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꾸미거나 돋보이도록 치레할 수 없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내가 좋아해서 내 모든 마음과 몸을 바치며 즐기는 삶’이 될 뿐입니다.

 내가 보내는 하루하루는 ‘취미로 여기듯’ 보내지 않습니다. 내가 보내는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은 ‘취미로 삼으며’ 보내지 못합니다.

 내가 보내는 스물한 살 적 1월 15일은 이날 하루뿐입니다. 내가 맞이하는 서른두 살 적 2월 23일은 이날 하루뿐입니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뿐더러, 언제라도 돌이킬 수 없는 나날입니다. 그냥 좋아서 한다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냥 좋으니까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냥 좋기 때문에, 이 좋은 느낌을 사랑하거나 아끼면서 늘 곁에 둡니다.

 늘 곁에 두기에 삶입니다. 늘 곁에 두면서 생각하거나 보듬기에 삶이에요. ‘삶’이라 해서 무겁지 않습니다. ‘삶’이기에 더 가볍지 않습니다. 삶은 그예 삶입니다. 사진을 하는 삶이란 한결같이 똑같은 삶입니다. 프로사진가라 해서 더 돋보이거나 놀라운 삶이 아닙니다. 아마사진가라 해서 더 어설프거나 모자란 삶이 아니에요. 사진기를 쥐었으면 누구나 사진삶을 보냅니다. 이 사진삶은 그냥 재미 삼거나 장난 삼아서 보내지 못합니다. 누구한테나 더없이 거룩하면서 기쁜 하루 한때를 즐기면서 보내는 사진삶이에요.

 아직 서투르기 짝이 없어 엉성하게 사진을 찍더라도 좋은 사진삶입니다. 오래도록 가다듬었기에 익숙하게 사진을 찍어도 좋은 사진입니다.

 사진찍기는 틀이 없습니다. 어떻게 찍어야 좋은 사진이 된다거나 어떻게 찍으면 나쁜 사진이 된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대로 찍는 사진이요, 내가 살아가는 대로 담는 사진입니다.

 그래서, 사진기를 들기 앞서, 나 스스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 삶에 따라 찍는 사진이지, 손놀림이나 손재주에 따라 찍는 사진이 아니에요. 내가 무엇을 하면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인가에 따라서 ‘내가 사진기를 쥐어 사진기를 들여다볼 때’에 ‘사진기를 거쳐 내 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나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은 사진기를 쥐어 들여다볼 때에 ‘내 눈에 아름답다 느껴지는 모습’이 가득합니다. 나 스스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은 사진기를 쥐어 들여다볼 때에 ‘내 눈에 힘들다 느껴지는 모습’이 넘칩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디에서 누구를 찍든 무엇을 찍든 사랑이 어립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느 자리에서 어떤 물건을 찍든 믿음이 서립니다.

 몸이 홀가분한 사람은 홀가분하게 일합니다. 몸이 무거운 사람은 무겁게 일합니다. 몸이 홀가분할 때에 사진기를 들면 홀가분한 넋이 사진으로 스밉니다. 몸이 무거울 때에 사진기를 쥐면 무거운 얼이 사진으로 파고듭니다.

 저는 집에서 아이를 날마다 수십 장쯤 사진으로 담는데, 때때로 아이 모습을 안 찍을 때가 있습니다. 아이가 지나치게 땡깡을 부리거나 고달프도록 말을 안 들을 때에는 아이가 미운 나머지 사진기를 들지 않습니다. 어버이로서 아이를 미워한다니 말이 안 된다 할 테지만, ‘너 말야, 참말 엄마랑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맞니?’ 하고 묻고플 때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어버이로서 아이를 참다이 사랑하거나 아끼지 못하니까, 그만 아이 마음을 더 살피지 못하고, 아이 마음을 더 살피지 못하면서 더 따사로이 보듬거나 놀지 못했기에, 아이는 아이로서 골을 부리거나 딴청만 피울 수 있습니다. 밑뿌리를 따지면 아이 탓이라기보다 어버이 탓입니다. 저 스스로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아이가 밉게 보일 때에는 내 마음밭이 엉망진창이라는 소리인 만큼 사진기를 들지 못해요.

 운동선수는 몸이 흐트러지면서 마음 또한 흐트러지는 때를 맞이하곤 합니다. 영어로 ‘슬럼프’라 하는데, 이때에는 무엇을 해도 다 안 됩니다. 이때에는 아예 운동이나 연습을 안 해야 합니다. 그저 푹 쉬면서 몸과 마음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사진을 찍는 우리들은 전문가일 수 있고 풋내기일 수 있습니다. 전문가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흐트러진 때에도 놀랍다 싶은 사진을 찍어낸다 할 만한지 모릅니다. 사진기자 일을 하는 사람은 집에 무슨 일이 터졌든 어떤 아픈 일을 맞이했든, 사진기자한테 주어진 몫을 사진기자로서 빈틈없이 해내야 합니다. 일은 일대로 마친 뒤에 눈물을 흘리든 웃음을 터뜨리든 해야 한답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지친 채 사진을 찍으면 어찌 되려나요. 이냥저냥 볼 만한 사진이 나오려나요.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싶은 사진을 만들 수 있는가요. 보도사진에는 사진기자 넋이, 아니 사진을 찍는 내 마음이 깃들지 않을까요.

 보도사진일지라도 사진을 찍은 사람이 어떠한 마음이었는가 하는 이야기가 살포시 묻어납니다. 만듦사진이라 해서 사진을 만든 사람 손길과 마음길이 안 묻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사진에는 모든 사람들 하루하루 이야기가 스며듭니다.

 사진을 바라볼 때에 좀 따분하다 싶다면, 사진을 찍은 사람 마음이 좀 따분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바라보면서 ‘이 사진은 영 재미없는데’ 하고 느낀다면, 참말로 이 사진을 찍은 사람부터 삶을 재미없게 꾸리기 때문입니다.

 박지윤 님 사진이야기를 담은 《박지윤의 비밀정원》(엘컴퍼니,2007)을 읽습니다. 박지윤 님은 사진을 무척 좋아하고 사진기를 여럿 모은다고 합니다. 일하는 틈틈이 사진기를 만지며, 사진기 다루는 솜씨가 꽤 뛰어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다만, 박지윤 님이 낸 《박지윤의 비밀정원》이라는 사진책에서 박지윤 님이 ‘사진으로 살아가는 내 넋’으로 무엇을 나누거나 보여주려 하는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사진찍기란 겉멋이 아닌데, 박지윤 님은 이 사진책 하나로 ‘사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어떠한 이야기를 들려주는가요.

 “살면서 사랑을 속삭이는 중 얼마만큼 진심이었을까. 얼마만큼 진실이었을까. ‘사랑해’ 하고 수천 번 내뱉는 동안 나는 정말 얼마만큼의 진짜 사랑을 했던 것일까(51쪽).” 하는 이야기는 박지윤 님이 겪은 사랑을 놓고만 하는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박지윤 님 스스로 찍는 사진을 놓고도 똑같습니다. ‘살면서 사진을 찍을 때에 얼마만큼 내 마음을 담았을까? 나는 얼마만큼 참다이 사진을 찍었을까?’ 하고 스스로 묻는 소리입니다.

 “진심은 진실한 마음을 통해 전해진다 믿었는데 그 진심마저 거짓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211쪽).”고 생각한다면, ‘내가 찍은 사진은 내 마음을 그대로 담았다고 믿었는데, 내가 찍은 사진마저 참말 내 마음을 담은 예쁜 사진이 아닌 듯하다.’고 느낀다고 스스로 뉘우치는 셈입니다.

 박지윤 님은 책끝에 “나는 이 사진들이 단순히 내가 주인공인 것에 대해 기억되길 바라지 않는다. 단순한 재현이 아닌 나 스스로를 다시 깨닫게 하고 떠오르게 하고 그렇게 기억되길 바라는 온전한 마음이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또 “처음 사진을 시작하면서는 주로 멋진 풍경이나 세팅된 사물들을 찍었는데, 언젠가부터 아무런 의미 없는 시멘트 바닥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생명체가 하나 들어 있는 것만으로 사진이 숨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사진은 ‘다시 보여주기’일 수 없습니다. 사진에는 사진을 찍은 사람 마음이 담깁니다. 사람을 찍는다 해서 살아숨쉬는 목숨을 찍었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찍은 사진이라지만 메마르거나 차갑거나 뻣뻣한 기운만 느낄 수 있습니다. 나무를 찍은 사진이라지만 따뜻하거나 보드랍거나 살가운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을 찍더라도 내 마음과 삶이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지는 사진입니다. 벽돌 한 장을 찍는대서 정물사진이 아닙니다. 사람을 찍어도 정물사진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찍으나 풍경사진일 수 있고, 너른 들판을 찍었는데 사람사진일 수 있어요.

 바라보는 눈에 따라 사진이 달라지고, 바라보는 눈이란 바로 내가 일구는 하루하루가 그러모이는 삶입니다. 이리하여 사진은 취미가 될 수 없습니다. 사진은 오직 내 삶이 될 뿐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든 이야기가 내가 찍는 사진 곳곳에 차곡차곡 담깁니다.

 내 삶을 사랑해 주소서. 내 삶을 사랑해야 내 사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하루를 사랑하여 보살펴 주소서. 내 하루를 사랑하여 보살필 때에, 내가 찍은 사진을 나부터 좋아하면서 나한테 새힘을 북돋우는 기쁜 이야기보따리로 꽃피웁니다. (4344.3.3.나무.ㅎㄲㅅㄱ)


― 박지윤의 비밀정원 (박지윤 사진·글,엘컴퍼니 펴냄,2007.10.15./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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