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반은 꽃이다 문학동네 시집 78
박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시 한 조각은 사랑
 [책읽기 삶읽기 73] 박지웅, 《너의 반은 꽃이다》(문학동네,2007)



 내 아버지는 시를 썼습니다. 내 어릴 적 예쁜 보금자리였던 열세 평짜리 자그마한 아파트를 떠올려 봅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쓴 시를 손수 종이에 적바림하고 틀에 끼워 벽에 걸었습니다. 마루에도 큰 방에도 문간에도 이런 시틀이 여럿 걸렸습니다.

 내 어머니는 시를 쓰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머니는 글을 쓸 겨를이 없습니다. 집일하고 집살림하며 부업까지 해야 했습니다. 이러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손뜨개로 무엇이든 다 만들었습니다. 걸상다리 끌리지 말라며, 걸상다리에 받칠 싸개까지 손뜨개를 하셨고, 추운 겨울 손이 차가울 테니, 쇠붙이 문고리마다 싸개를 씌우려고 하나하나 뜨개질을 하셨습니다. 아주 빠른 손놀림으로 척척 빚어낸 문고리 싸개는 우리 집에 다 하고도 남아서 이웃집에 선물하기도 합니다. 꽃그릇 받침싸개도 손뜨개로 만듭니다. 형과 나와 아버지가 입을 옷을 척척 뜨개질로 만듭니다. 하룻밤만에 손뜨개로 예쁜 옷을 만듭니다. 나는 손뜨개 옷이 예쁘기는 하지만 쑥쓰러워서 이 옷을 입고 학교에 가기 부끄러웠지만, 학교에서 다른 동무들은 내 손뜨개 옷을 보며 몹시 부러워 했습니다. 부러워 하는 동무들을 볼 때마다 더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곤 했습니다.

 우리 형은 시를 썼습니다. 형이 쓴 시 가운데 하나는 형이 고등학생 때에 인천 새얼문화재단이 마련한 백일장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형이 쓴 시가 학교잡지(교지)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곰곰이 떠올립니다. 내 아버지가 쓴 시가 중앙일보 새봄글잔치 동시 갈래에서 뽑힌 적 있습니다. 아버지는 신춘문예라는 이름이 걸린 새봄글잔치에서 상을 받고 싶어 하셨고, 아버지 동무나 작은아버지 들은 그 나이에 무슨 그런 이름을 얻으려 하느냐고 핀잔을 했지만, 아버지는 이런 핀잔 저런 푸념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당신이 하고픈 일과 당신이 이루고픈 꿈을 바라보며 글길을 걸었으리라 느낍니다.

 나도 시랍시고 무언가를 끄적여 보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쓴 동시를 읽으며 나도 시를 쓰자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형이 쓴 시를 읽고 나서 ‘아, 그렇구나. 시란 이렇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형은 동생이 쓴 시를 읽으며 “종규야, 이건 시가 아니라 산문이네.” 하고 꼭 한 마디만 했습니다. “왜 시를 쓰려고 하니. 굳이 시를 쓰려고 하지 마.” 하는 말도 곁들였습니다.

 내가 시랍시고 무언가를 끄적이는 힘은 형이 들려준 두 마디입니다. 그래요. 나는 아직 시를 쓸 줄 모르지만 그냥 시라는 이름으로 무언가 글을 끄적이기도 합니다. 누군가한테 읽히거나 보여주려는 시가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나날을 사랑하고 싶어 문득 느낌이 꽃으로 필 때에 한 줄 두 줄 적바림합니다. 더 헤아리니, 형이 들려준 두 마디에 한 마디가 더 있습니다. “산문도 좋아.”


.. 꽁초를 버리고 침도 뱉으며 이 거리에 익숙해질 것이다 ..  (44쪽/청진동 골목에 자반고등어처럼 누워 있기)


 두 달쯤 지난 일인데, 첫째 아이를 수레에 태워 자전거를 몰며 읍내 장마당을 다녀오던 때였습니다. 빗속을 뚫으며 헉헉거리며 몹시 고단하던 날이었어요. 숯고개 오르막을 거의 다 오르며 땀을 비오듯 쏟다가 퍼뜩 한 가지가 떠올랐는데요, 나는 나대로 힘들다지만, 수레에 탄 채 아버지랑 비를 고스란히 맞는 이 어린 아이도 참말 힘들지 않겠느냐고, 자전거를 앞에서 끄는 사람 못지않게 수레에 가만히 앉아서 함께 돌아다니는 아이야말로 고단하지 않겠느냐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오르막 꼭대기를 삼십 미터쯤 남긴 자리에서 자전거를 멈추고 아이를 돌아보았습니다. 아이 얼굴에는 졸음과 고단함이 알뜰히 묻었습니다. 아이한테 살살 말을 걸었습니다. 이 시골길에 자동차 거의 없고, 이 멧자락 길 둘레로 온통 멧부리요 밭인데, 저 멧부리를 바라보면 구름이 있다고, 이제 좀 비가 그친다고. 이때에, 멧등성이에 걸린 구름이 보였고, 이 구름을 보면서 “구름이 산에 앉아서 쉬네.” 하고 얘기했습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하는 말을 똑같이 따라합니다. 아이는 이때부터 산과 구름을 볼 때면 아버지가 들려준 말을 되풀이합니다. “구름이 산에 앉아서 쉬네.”

 나도 좀 쉬고 싶어서, 이 힘겨운 길에서 다리쉼을 하고 싶어서, 살짝 자전거를 멈추며 저 구름과 같이 쉬고 싶어서, 가슴속에서 말이 한 마디 튀어나왔습니다.

 나는 이 말이 좋아 조그마한 수첩에 살며시 끄적였습니다. 수첩에 끄적일 때에는 ‘산’이라는 낱말이 아닌 ‘멧등성이’나 ‘멧기슭’이라는 낱말로 바꾸었습니다.


.. 문어는 하얗게 익어가는 발을 가슴에 얹는다 ..  (46쪽/문어)


 아이하고 자전거마실을 하며 능금밭 사이로 난 시골길을 지날 때에 “여기 봐. 푸른 사과야.” 하고 말하면, 아이는 뒤에서 “푸른 사과?” 하고 묻고, 나는 “응, 푸른 사과. 푸른 능금.” 하고 말하면 “푸른 능금?” “응, 푸른 능금, 푸른 사과.” 하고 말을 섞습니다. 이때부터 능금밭을 지날 때마다 아이는 아버지하고 말놀이를 합니다. “능금이다, 능금.” “응, 능금이야, 사과.” “사과?” “능금.” “능금?” “사과.”

 나는 우리 아이가 ‘사과’라는 낱말에만 길들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얏나무를 보면서도 똑같이 되풀이합니다. “오얏이야?” “응, 오얏이야. 자두나무.” “자두?” “응, 오얏.” “오얏?” “응, 자두.” 이 아이가 ‘자두’라는 낱말만 알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겠지요. 네 식구끼리 시골자락에서 조용히 지낸다면, 우리끼리 능금이며 오얏이며 말하며 살아가면 되고, 멧자락이니 멧부리이니 하고 이야기꽃을 피우면 됩니다. 그러나, 둘레 다른 사람들은 이 말들을 못 알아들어요. 모두 한국사람이지만 참말 한국말을 몰라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나는 아이한테 ‘두 갈래 한국말’을 들려주고야 맙니다.


.. 길에, 나비 하나 굴러다닌다 / 죽어서도 팔랑거린다 ..  (80쪽/슬프지 않은 시)


 아이하고 살아가며, 옆지기하고 살아내며, 둘째를 낳으며, 새 보금자리를 찾아 아버지 홀로 자전거를 끌고 춘천마실을 하면서, 여관에서 하루를 묵으며 지친 몸을 달래고 빨래를 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지친 몸이지만 여관에서도 어김없이 새벽 네 시에 눈을 뜹니다. 새벽 네 시에 부시시 일어나 여관 텔레비전을 켜서 ‘참으로 볼 만한 영화를 하나라도 보기를 꿈꾸’지만 볼 만한 영화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텔레비전을 다시 끄지 않습니다. 무언가 아쉬워서.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이무렵, 새벽 네 시, 다섯 시, 여섯 시에, 시골집에서 두 아이하고 부대끼는 옆지기는 잠에서 깼을까 하고. 얼마나 고단하면서 달콤한 잠자리에 들었을까 하고. 밥은 알맞고 맛나게 먹겠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집안을 치우지 못해 아주 어지럽다고 하는데, 부디 옆지기가 곱게 기운을 차리면서 첫째 아이하고 집안을 예쁘고 정갈히 돌볼 수 있기를 빕니다. 예쁜 넋과 예쁜 말로 우리 예쁜 삶을 사랑하는 새 하루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기를 빕니다. 부디 오늘은 맑은 햇살이 드리우면서 둘째 기저귀 빨래가 벅차지 않기를 빕니다. 멧자락에서 옆지기가 숲 기운과 풀 기운과 나무 기운을 어여삐 받아들여 착하며 참다운 어머니로 새 날과 새 이야기를 마음껏 길어올릴 수 있기를 빕니다.

 이 비는 마음 모두를 그러모아 시랍시고 글을 수첩에 끄적입니다. 네 삶은 그예 시요, 내 삶 또한 착하게 산문입니다.


.. 살아가다 문득, 도시 바닥에 암매장된 ‘흙’을 본다. 도시의 나무들은 흙에 뿌리를 내렸다기보다는 그 위에 꽂혀 있다. 우리가 봉쇄한 땅에서 저 나무들은 살아간다 ..  (122쪽/시인 말)


 자그마한 시를 모은 작은 책 《너의 반은 꽃이다》(문학동네,2007)를 읽었습니다.이 시책을 내놓은 분은 ㅎ출판사에서 편집 일을 합니다. ㅎ출판사에서 편집 일을 하는 글쓴이를 꽤 예전부터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정작 이분이 ‘시를 써서 상도 받고 시책도 곱게 내놓은 줄’을 몰랐습니다. 시책을 한 권 선물로 받고 나서 오래도록 곰곰이 생각하고 옆지기와 함께 읽으며 새삼스레 돌아보았습니다. 그렇구나, 시를 쓰면서 살아가다가 책 만드는 일을 하시는구나.

 돌이키면, 책삶이란 시삶이고, 시삶이란 책삶이 되겠지요. 시를 만지고 시를 돌볼 수 있기에 책 하나 알뜰히 여밀 수 있고, 책 하나 알뜰히 여미면서 당신이 사랑하는 짝꿍하고 작은 살림집을 얻어 작은 사랑꽃을 일굴 수 있겠지요.

 여관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영화나 연속극이나 만화는 왜 하나같이 소리를 빽빽 지르고 억지스레 웃거나 울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겠다고 느낍니다. 엊저녁, 전과 17범이라고 밝히는 어떤 분이 곧 18범이 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17범이든 7범이든 700범이든 사람은 사람이잖아요. 사람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다 좋은걸요. 이분이 하는 ‘사업’이란 ‘색시집 사업’일 텐데, 당신이 하는 ‘회사’에서 쓸 ‘사훈’을 저보고 하나 써 달라 하셔서, 이 자리에서 곧바로 “맑은 아름다움으로 사랑스럽게”라고 종이조각에 적바림해서 드렸습니다.

 내 마음이 곧 “맑은 아름다움으로 사랑스럽게”이기 때문이에요. 맑은 아름다움으로 사랑스럽게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에요. 남들이 이렇게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아요.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싶어요.

 시책 《너의 반은 꽃이다》를 읽는 내내, 나는 맑은 아름다움으로 사랑스럽게 살아가고픈 내 삶길을 거듭 되뇌었습니다. ㅎ출판사에서 책을 만지며 하나하나 내놓는 글쓴이 박지웅 님 또한 종이에 아로새겨질 새로운 이야기에 맑은 아름다움으로 사랑스러울 마음을 차곡차곡 담겠다고 느꼈습니다.

 시 한 조각은 사랑일 테니까요. 산문 한 다발은 꿈일 테니까요.

 희뿌옇게 밝는 새벽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하늘에 가득한 구름 사이사이 파란 빛깔 하늘이 얼핏 보입니다. 이 하늘 틈바구니 어디에선가 맑은 햇살이 내리쬘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이 맑은 햇살이 아무쪼록 음성땅 멧부리 한켠에도 살그머니 내려앉아 우리 옆지기하고 두 아이 가슴녘에 따사로이 스미기를 빕니다. (4344.8.18.나무.ㅎㄲㅅㄱ)


― 너의 반은 꽃이다 (박지웅 글,문학동네 펴냄,2007.12.7./7000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08-18 10:42   좋아요 0 | URL
사과, 능금, 자두, 오얏... 너무 좋네요, 예뻐요.

그리고 '맑은 아름다움으로 사랑스럽게' 라는 글 담아봅니다.
지인들이 시끌시끌해서, 맘이 편하지 않았거든요. 현실이든 가상이든 말이죠.
하지만..... 그런게 삶이겠죠. 시끌시끌 아구아구 헤헤 거리는거.

숲노래 2011-08-18 13:54   좋아요 0 | URL
한동안 시끌시끌하다가
또 조용하겠지요.

힘들다가도 느긋해지고
천천히 흐르는 삶을
잘 받아들여 주셔요~~
 
나 혼자 자라겠어요
임길택 지음, 정승희 그림 / 창비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동차 버리고 동시책 하나 사요
 [푸른책과 함께 살기 82] 임길택, 《나 혼자 자라겠어요》(창비,2007)



- 책이름 : 나 혼자 자라겠어요
- 글 : 임길택
- 그림 : 정승희
- 펴낸곳 : 창비 (2007.8.10.)
- 책값 : 8000원


 (1) 어린이책과 그림


 어린이가 읽도록 만드는 동화책이나 동시책에는 그림을 꽤 많이 곁들이곤 합니다. 그림이 없으면 읽기가 힘들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더 어린 아이가 읽는 책은 글이 더 크고 그림이 더 많습니다. 더 나이든 아이가 읽는 책은 글이 더 작고 그림이 더 적습니다. 어른이 읽는 책에는 그림이 아예 없기 일쑤입니다.

 어린이는 글만 읽고서는 생각을 할 수 없기에 그림을 넣는지 모릅니다. 어린이가 읽는 책에 그림이 없으면 따분해 한다고 여겨 그림을 넣는지 모릅니다. 어린이한테 생각힘을 북돋우려고 그림을 넣는지 모르고, 어린이책을 예쁘장하게 빚고 싶어서 그림을 넣는지 모릅니다.


.. 해마다 봄이 오면 / 환하게 꽃 한번 피우려고 / 산모롱이 돌아 / 돌아 나오는 / 산골짜기 저 먼 곳에 / 산다네 ..  (산벚나무/10쪽)


 임길택 님 동시책 《나 혼자 자라겠어요》(창비,2007)를 읽으며 그림을 살짝살짝 바라봅니다. 이 동시책에 그림이 걸맞다 할 만한지 생각하고, 이 동시책에 꼭 그림이 있어야 했을까 헤아립니다.

 임길택 님 첫 동시책 《탄광마을 아이들》(실천문학사,1990)에는 그림이 하나도 없는 줄 압니다. 나중에 고침판을 내놓을 때에는 그림을 넣었을는지 모르겠으나, 1990년에 처음 나온 동시책에는 아무런 그림이 없었다고 떠오릅니다. 아무런 그림이 없었지만, 이 동시책을 읽으며 ‘생각힘을 북돋우지 못한다’든지 ‘따분하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어떤 그림을 곁들이면서 쓰면 좋을’ 동시가 아니었을 테니까요.


.. 마당가 한쪽을 참새에게 내주고 / 나비를 쫓아가다 뒤돌아오고 / 개울 건너 앞산을 훔쳐보다가 / 눈을 감고 머나먼 데 소리를 듣고 ..  (송아지/22쪽)


 동시책이든 동화책이든, 그림을 곁들이는 이들은 동시나 동화를 한결 깊이 사랑하거나 즐긴 다음에야 그림을 곁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국민학교를 다니며 교과서 시나 학급문고 동시책을 읽을 때에도 똑같이 느꼈는데, 어설피 붙이는 그림은 안 붙이느니만 못합니다. 사랑스레 붙여야 하고, 알맞게 붙여야 하며, 아름답게 붙여야 합니다.

 귀엽게 붙이는 그림은 시를 읽는 맛을 다치게 합니다. 앙증맞거나 예쁘장하게 붙이는 그림은 시를 즐기는 기쁨을 망가뜨립니다.

 시를 읽든 수필을 읽든 소설을 읽든 동화를 읽든 다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마음속으로 피어오르는 생각과 꿈이 있습니다. 글에 붙이는 그림이 되려면, 글꽃송이가 어떤 빛깔이고 글열매가 어떤 맛이며 글씨앗이 어떤 모양인가를 읽어야 한다고 느껴요.

 착한 사람 착한 글에는 착한 그림을 붙이고, 고운 사람 고운 글에는 고운 그림을 붙이며, 참다운 사람 참다운 글에는 참다운 그림을 붙여야겠지요.


.. 누누꼬? / 사람들 한마디씩 해 댈 때 / 일흔한 살 성조 할머니 / 만날 하는 일 막걸리나 한잔 먹자며 / 철벙철벙 논가로 나가신다 ..  (모 심던 날/36쪽)


 그림은 하나도 붙이지 않고 동시책이나 동화책을 내놓으면 어떠할까 헤아려 봅니다. 왜냐하면, 국민학교를 다니던 어린 날 교과서를 펼치고 동시를 가르치던 교사는 으레 ‘눈을 감기’고 동시를 읊었습니다. 옆 동무가 자리에서 일어나 교과서를 들고 동시를 읽든, 교사가 몽둥이를 흔들며 우리를 한 사람씩 일으켜세워 교과서 동시를 토씨 하나까지 틀리지 않게 똑똑히 외우는가를 살펴 제대로 못 외우면 어김없이 몽둥이질을 하던 때이든, ‘눈을 감’고 시를 들으며 ‘눈을 감’고 시를 읊으라 시켰어요(어쩌면, 눈을 뜨면 몰래 곁눈질을 할 테니까, 눈을 감기고 시를 외우도록 했겠지요).

 으스스한 교실에서 말마디 예쁘장한 교과서 동시를 외우거나 들어야 할 때면 으레 등줄기가 쭈뼛쭈뼛합니다. 도무지 무슨 그림이든 떠올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를 읽든 동화를 읽든 소설을 읽든, 글을 읽는 사람 스스로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꽃그림과 삶그림과 사랑그림이 있어야 해요. 스스로 마음속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면 글을 읽지 못하는 노릇이고, 조용히 가슴속 그림을 엮지 못한다면 글을 사랑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 울타리도 없고 / 이웃도 없고 / 가을이면 / 억새꽃 바다를 / 이루는 곳에서 // 콩 심고 / 나락 심고 / 무를 심으며 / 엄마 아빠와 동생 / 이렇게 / 네 식구 산다 ..  (영미/56∼57쪽)


 봄날 아이와 함께 텃밭에 온갖 씨앗을 심으며 생각했습니다. 이 씨앗이 흙을 품에 안으며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어떻게 줄기를 올릴까. 어떻게 잎을 틔우고 어떻게 꽃을 피우며 어떻게 열매를 맺을까.

 큰비가 몰아치면 큰비에 씨앗이 씻기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날이 가물면 씨앗이 말라죽지 않을까 근심합니다. 앞으로 어떤 푸성귀로 자랄는지 생각하고, 텃밭 둘레 숱한 들풀과 들꽃은 또 어떤 모양으로 날마다 새롭게 바뀔는지를 어림합니다.

 참말 하루하루 다르게 쏙쏙 돋으며 커지는 풀이요 나무입니다. 가을부터 겨울까지 잎을 다 떨구어 앙상하던 나무라고는 여길 수 없습니다. 가을부터 겨울까지 얼어죽거나 말라죽어 아주 맨 흙만 있던 땅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풀은 조그마한 땅에 서로서로 옹기종기 돋으며 푸르디푸르게 물결을 칩니다. 사월부터 유월까지 고작 석 달인데, 어느새 네 살 아이 키보다 웃자란 풀이 꽤 많습니다. 오월까지는 아무렇지 않게 뛰놀던 논둑이나 숲속을 이제는 퍽 힘들게 풀섶을 헤치며 다녀야 합니다.


.. 담 어귀 저 끝에서도 / 맡을 수 있는 짙은 꽃내 ..  (오동꽃/74쪽)


 아이는 착한 사랑을 받아먹으면서 자랍니다. 어버이가 착한 사랑을 나누려 할 때에는 착한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어버이가 못난 사랑이나 일그러진 사랑을 나눈다면, 아이는 못나거나 일그러진 사랑을 그예 받아먹습니다.

 어린이가 읽을 시를 쓰는 어른은 글줄 하나에 어떤 사랑을 실을는지 돌아봅니다. 어른은 참으로 아이들이 착한 사랑밥을 먹거나 고운 믿음밥을 먹도록 참다이 삶을 일구면서 동시 하나 내놓는지 곱씹습니다.

 “담 어귀 저 끝에서도 맡을 수 있는 짙은 꽃내”다운 시를 써서 어린이랑 흐뭇하게 웃고 떠들면서 살아가는 어른인지 되새깁니다. “길러지는 것은 아무리 덩치가 커도 볼품없”다는 마음씨를 돌보면서 시를 쓰는 어른인지 가늠합니다.


.. 길러지는 것은 / 아무리 덩치가 커도 / 볼품없어요 / 나는 / 아무도 나를 / 기르지 못하게 하겠어요/ 나는 나 혼자 자라겠어요 ..  (나 혼자 자라겠어요/98쪽)


 이모저모 생각한다면, 아이하고 손 맞잡으며 살아가는 이 터전은 그닥 어여쁘지 않습니다. 동시를 읽는 어린이는 이내 중학생이 되어 미친 입시지옥 구렁텅이에 빠져야 합니다. 아니, 어른들 누구나 어린이를 미친 입시지옥 구렁텅이에 집어넣습니다. 쑤셔넣습니다. 처박습니다.

 어린이일 때만 어여쁜 동시를 읽도록 하면 되나요. 어린이한테만 예쁘장한 그림 곁들인 동시책을 읽히면 되는가요. 초등학교 육학년까지는 예쁘장한 그림에 예쁘장한 글을 먹이고, 중학교 일학년부터는 시커멓고 슬픈 그림에 시커멓고 슬픈 글을 먹이면 될는지요.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예쁘장한 그림에 길들이고, 아이들이 푸른 나날을 보낼 때에는 시커먼 그림에 길들이는 어른이란, 하나같이 밉살맞습니다.


 (2) 어린이책과 글


 어린이책을 이야기하는 어른 가운데 ‘어린이가 읽을 어린이책 비평’을 쓰는 어른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른이 읽을 어린이책 비평’만 쓸 뿐입니다.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 어린이책을 비평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살펴도 알 만합니다. 어린이책을 ‘이야기’하는 마당이지만, 언제나 어른책을 ‘비평’할 때처럼 낱말과 말투가 사뭇 다릅니다.


.. 이 가을에 별들은 / 하늘과 땅을 / 몰래몰래 오가는 것일까요 ..  (별/16쪽)


 “이 가을에 하늘과 땅을 오가는 별들”처럼 고우면서 맑은 빛으로 어린이와 어른 사이에서 착하게 오갈 ‘어린이문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란 왜 이토록 드물까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어린이문학 이야기를 나눌 때뿐 아니라, 어린이를 가르친다는 자리에 서는 어른부터 옳게 제자리를 못 찾는다고 해야 할 테지요. 어린이를 가르치는 일꾼을 키운다는 교육대학교나 사범대학교에서 어떤 말글로 일꾼을 키우던가요. 대학교재는 어떤 말글로 이루어졌나요.

 교육이론이든 교육비평이든 어떤 말글로 이루어졌는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어린이한테 문화나 예술이나 사회나 정치나 경제나 운동경기나 환경이나 철학을 들려준다 할 때에도 어떤 말글로 들려주려 하는지 더할 나위 없이 뻔합니다.

 어린이하고 어린이 말마디를 나누는 어른이란 드뭅니다. 그저 어른 말마디를 어린이한테 심습니다. 어린이가 어린이 말마디로 무럭무럭 자라면서 어린이 마음밭을 돌보고 어린이 생각밭을 일구도록 돕지 못합니다. 어린이일 때부터 어른 말마디에 익숙하도록 길들이기만 합니다. 어린이가 어린이답게 어린이 말마디를 즐기면서 앞으로도 이 어린이 말마디로 어린이 삶을 사랑하도록 어깨동무하지 못합니다.


.. 내리는 햇볕 / 온몸에 받고 있었다 ..  (고들빼기/23쪽)


 둘째를 낳은 옆지기 몸풀이를 도맡고 두 아이를 보듬으면서 하루 내내 등허리 펼 겨를이 없기에, 동시책 《나 혼자 자라겠어요》를 자리맡에 놓고도 하루에 한두 쪽 넘기기 벅찹니다. 졸려서 무겁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면서 날마다 한두 쪽씩 읽습니다. 두 아이와 살아가면서 두 아이가 즐길 말과 넋과 삶을 곱게 헤아리고 싶기에, 눈꺼풀에 쇳덩이가 얹혔지만 시 한 줄을 읽고, 시 두 줄을 읽으면서 하루를 마감합니다. 새우처럼 몸을 말고 엎드려 책을 펼치는 아버지 허리에 첫째 아이가 올라타며 놉니다.


.. 아무도 오지 않은 학교에서 / 신나게 그네를 탔다. / 언니들보다 멀리 / 날아가진 않지만 / 운동장도 움직이고 / 학교도 움직였다 ..  (1학년 정희/44쪽)


 동시책 《나 혼자 자라겠어요》를 일군 임길택 님은 집과 학교에서 어떻게 이 책에 담긴 시를 썼을까 생각해 봅니다. 임길택 님은 집식구가 모두 잠들고 나서 시를 썼을까요. 집안일을 하는 틈틈이 시를 썼을까요. 몸이 아파 자리에 드러누웠을 때에 시를 썼을까요. 밥을 먹다가 시를 썼을까요. 뒷간에서 똥을 누면서 시를 썼을까요. 아이를 등에 업고 시를 썼을까요. 새벽에 홀로 조용히 일어나 시를 썼을까요. 아이를 들판이나 숲속으로 데리고 나가 마실을 하면서 아이와 나란히 시를 썼을까요.


.. 오동꽃 세 송이 / 머리에 꽂고 / 마실 나와 방긋 웃는다 ..  (민정이/62쪽)


 오동꽃을 머리에 꽂으며 놀 때에 오동꽃 시를 씁니다. 오동나무 튼튼하게 자라나는 터전에서 아이들이 오동꽃을 머리에 꽂습니다. 그렇지만 오동나무 오동꽃이 흐드러진 둘레에서 비바람에 오동꽃이 떨어지더라도 그저 밟는 아이가 꽤 많아요. 왜냐하면, 오동꽃이 길바닥에 후두둑 숱하게 떨어진 자리를 자동차는 아무렇지 않게 밟고 지나가거든요.

 아이들은 자동차가 오동꽃을 밟고 지나가듯, 저희도 오동꽃을 밟기만 할 뿐 머리에 꽂지 않습니다. ‘자동차가 밟는 꽃’을 머리에 꽂으면 서로서로 미친 짓 한다고 손가락질을 하겠지요. 아이들은 ‘꽃을 밟는 자동차’를 모는 어른하고 ‘자동차에 탄 채 오동꽃이 밟히는 줄 모르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숲에서 자라는 오동나무 오동꽃은 알아도, 골목동네 한켠에서 우람하게 자라는 오동나무 오동꽃은 모르기 일쑤예요.

 그러니까, 어린이는 오동꽃을 볼 수 없고, 어른은 오동꽃놀이를 하는 어린이를 볼 수 없으며, 어른은 어린이가 오동꽃을 못 보도록 가로막는데다가, 어린이는 어른이 오동꽃을 짓밟기 때문에 이 버릇을 고스란히 물려받습니다. 귀여운 가락에 귀여운 목소리로 오동꽃 노래를 부르더라도, 막상 머리에 오동꽃을 꽂지는 않습니다.


.. 골목 모퉁이를 돌아 / 시장 가시던 때처럼 / 할머니가 오늘 아침 돌아가셨다. // 아무 말도 없으셨다고 한다. 그냥 두 눈 꼭 감고 있다가 / 아버지 손 꼭 잡고 있다가 / 아무렇지도 않은 듯 / 그냥 돌아가셨다 ..  (할머니/94쪽)


 임길택 님 동시책 《나 혼자 자라겠어요》를 덮습니다. 지난밤 드디어 마지막 시까지 다 읽습니다. 새벽 세 시에 첫째 아이 똥기저귀를 갈며 잠에서 깨어 다시금 찬찬히 읽습니다. 유월 시골자락은 새벽 네 시만 되어도 동이 트고 네 시 반이면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환합니다. 환한 새벽 빛살에 기대어 동시책 《나 혼자 자라겠어요》를 차근차근 되씹습니다.

 이 동시책은 뜨거운 햇살을 버드나무 그늘에서 그으며 읽거나, 달 지고 해 뜨는 새벽나절 보오얀 멧골에서 읽거나, 산들바람에 한들거리다가 똑 떨어지는 오동꽃을 살며시 올려다보는 골목동네에서 읽을 만하다고 느낍니다. 차가운 교실바닥에서라든지, 자동차가 빼곡하게 들어찬 아파트마을이라든지, 덜컹거리고 복닥거리는 버스간에서는 읽을 만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아니, 어디에서라도 따스한 가슴으로 따스한 사랑을 나누고 싶다 할 때에는 읽을 만합니다. 어떠한 곳에서라도 넉넉한 손길로 넉넉한 꿈을 이루고 싶다 할 때에는 되새길 만합니다. 다만, 수수한 수수꽃다리 같은 동시인 줄 느낄 수 있으면 됩니다.

 수수꽃다리는 그야말로 수수합니다. 수수꽃다리는 눈부시지 않고, 수수꽃다리는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고운 빛이 수수한 수수꽃다리요, 착한 꽃망울이 작디작게 어우러져 빛나는 수수꽃다리입니다.


.. 아버지는 그곳에 차를 세우기 좋다고 / 차도 제 집이 있어야 한다고 / 과꽃 핀 땅을 집으로 삼았다. // 이제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은 / 차가 서 있는 그곳에 / 과꽃이 자랐다는 걸 모른다. / 그 과꽃 위에 이따금 / 나비가 찾아왔다는 건 / 더더욱 모른다 ..  (과꽃 네 포기/115쪽)


 동시를 읽을 아이들이 수수하게 살아가며 수수한 사랑을 수수한 동무랑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동시를 읽힐 어른들부터 수수하게 일하고 수수하게 놀며 수수하게 살림을 일구면 좋겠습니다.

 동시를 읽을 아이들한테 자가용을 태우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동시를 읽힐 어른들부터 자가용을 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자가용에 아이를 태우고 ‘멋지거나 좋거나 재미난’ 데에 데려가지 않아도 됩니다. 두 다리로 천천히 숲길이나 논둑길이나 골목길을 거닐면서 바람과 풀과 햇살과 물과 나무와 새와 벌레가 들려주는 가느다란 노랫자락을 가슴으로 삭이며 나눌 수 있으면 됩니다. 참새 지저귀는 소리가 동시이고, 바람에 사각이는 풀잎 소리가 동시입니다. 어린이가 읽을 동시가 있어 어른이 읽는 시가 있습니다. 어린이가 읽을 동화가 있어 어른이 읽는 문학이 있습니다. 동시가 없이는 어른들 시란 없고, 동화가 없이는 어른들 문학이란 없습니다.

 자동차를 떠나보내고 과꽃을 다시 심는 자리에 아리따운 시 하나 돋습니다. 자동차를 떠나보내며 남는 돈으로 동시책 하나 장만하여 읽는 손길에 사랑씨 하나 맺습니다. (4344.6.17.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요일의 노래
문병란 지음 / 일월서각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일흔다섯 늙쟁이가 부르는 시노래
 [책읽기 삶읽기 42] 문병란, 《금요일의 노래》



 어느덧 일흔다섯 줄 나이에 접어든 ‘늙은 시인’ 문병란 님 시를 그러모은 《금요일의 노래》를 읽습니다. 《금요일의 노래》라는 이름이 붙은 시집에 실린 시에는 ‘늙어가기’라는 꼬리말이 하나씩 붙습니다. 문병란 님은 마흔 쉰 예순 일흔, 이렇게 차츰 늙은 나이로 접어들면서 ‘늙는 맛’을 깨닫습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 젊은 사람은 늙는 맛을 느낄 수 없고, 어린 사람이 늙는 멋을 알아챌 수 없습니다.

 그러면, 늙은 사람은 젊은 맛이나 어린 멋을 느끼거나 알 수 있을까요. 젊은 날을 거쳤고, 어린 날을 지난 늙은 사람이 떠올리거나 헤아리거나 살피는 젊은 맛이나 어린 멋이란 무엇일까요.


.. 고향 참새 소리 들어 본 지 얼마만인가 ..  (고향 참새 : 늙어가기 1)


 하루에 책 한 권씩 읽을 수 있다면, 나이 일흔다섯인 사람이 읽은 책은 나이 열다섯인 사람이 읽은 책보다 훨씬 많습니다. 나이 스물다섯이나 서른다섯인 사람이 읽은 책하고 견주어도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늙은 사람은 젊거나 어린 사람하고 맞댈 때에 ‘어마어마하게 많다’ 싶도록 책을 읽었으니 한결 훌륭하다 할 만할까요, 훨씬 빼어나다 할 만할까요. 책을 더 읽은 사람은 책을 덜 읽은 사람보다 똑똑하다 할 만할까요, 뛰어나다 할 만할까요.

 늙은 사람은 이런 일도 해 보고 저런 사람도 겪어 봅니다. 젊은 사람이나 어린 사람이 사귀거나 만나는 사람으로는 ‘늙은 사람이 만나거나 사귄 사람 숫자이며 깊이이며 너비’를 좇거나 따르지 못합니다.

 늙은 사람이기에 더 많은 사람을 마주하거나 사귀었대서 ‘사람을 더 잘 알아보’거나 ‘사람들 마음을 한결 살뜰히 읽는다’ 할 만할까요. 젊은이는 사람을 볼 줄 모르고, 어린이는 사람을 사귀는 멋을 모른다 해도 될까요.


.. 내가 처음 배운 말은 / 맘마·밥·엄마·아빠. / 그 다음 배운 말은 / 응아·쉬야였다 ..  (하지 마라 : 늙어가기 6)


 스물다섯 나이로 시를 쓰는 사람하고 일흔다섯 나이로 시를 쓰는 사람이 같을 수 없습니다. 스물다섯 시쟁이가 일흔다섯 시쟁이를 흉내낼 까닭이 없고, 일흔다섯 시쟁이가 스물다섯 시쟁이를 좇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쟁이한테서 시를 받아 시집을 엮는다든지, 신문이나 잡지에 시를 싣는다는 사람들은 일흔다섯 나이가 아닙니다. 책을 만드는 일꾼이나 신문·잡지를 엮는 일꾼은 으레 스물다섯 언저리부터 마흔다섯이나 쉰다섯 언저리까지입니다. 예순다섯을 넘으면서 책을 만들거나 신문이나 잡지를 엮는 일꾼은 없습니다.

 일흔다섯 나이를 고이 헤아리면서 일흔다섯 나이를 사랑하는 시를 엮자면 일흔다섯 나이여야만 하지는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열다섯 나이에 쓴 시라든지 다섯 나이에 쓴 시를 어여삐 돌아보면서 이들 푸름이와 어린이 시를 엮을 때에 열다섯 나이이거나 다섯 나이여야만 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늙은 사람 시를 읽어 가슴으로 담자면, 늙은 사람 몸과 마음으로 내 삶을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시를 읽는 나는 내 눈길과 눈썰미와 눈높이에 따라 받아들이지만, ‘시가 태어나 우리 앞에 놓이기’까지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가를 읽어내자면, ‘늙은 사람 시를 읽을 때에는 늙은 사람 삶’이어야 하고, ‘푸름이 시를 읽을 때에는 푸름이 삶’이어야 하며, ‘어린이 시를 읽을 때에는 어린이 삶’이어야 합니다.


.. 좋은 시라니? / 좋은 일 없는 나라에서 / 그런 욕심 금물 아닐까 ..  (경칩 : 늙어가기 14)


 이 나라에서뿐 아니라, 이웃 일본을 비롯해 온누리 여러 나라에서는 ‘만화책을 책으로 안 여긴다’든지 ‘어린이책은 어린이만 보는 책으로 여긴다’든지 하는 얕은 울타리를 아직 높직하게 쌓습니다. 사진책을 사진책으로 바라보며 이야기 나누는 한편, 사진책을 사진책대로 즐기는 매무새를 찾아보기란 몹시 힘듭니다.

 ‘사진을 한다’고 하면 으레 ‘예술 하시나 보네요’ 하고 여기지, ‘어떠한 사진을 찍어 어떠한 사람들하고 어떠한 이야기를 나누는가’를 살피지 못합니다.

 만화책을 읽는다 한다면, ‘어떠한 만화책을 장만해서 만화에 깃든 어떠한 이야기를 곰삭이며 어떠한 이웃하고 어떠한 삶을 꾸리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림책을 읽을 때이든 어린이책을 읽을 때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시집을 읽는다 한다면,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삶을 일구면서 어떠한 넋을 담은 시인가’를 읽으면서, 내 삶과 내 이웃 삶을 가만히 톺아보아야 알맞습니다.

 싯말을 요리조리 잘라서 이 대목은 무슨무슨 수사법을 썼다라든지, 이 싯말에서는 무슨무슨 주의주장을 담았다든지 하고 외는 일이란 ‘시 비평’도 ‘시읽기’도 아닙니다. 그예 뭇칼질입니다.


.. 2007년 8월 17일 금요일 창작과 비평 6년 전 묵은 호 111호 54년생 후배의 시를 더듬더듬 읽고 있는데, 고장난 뻐꾹시계가 멋대로 정오를 알린다 외출할 것이냐 말 것이냐 내 마음은 점점 외로워져 가는데 살기도 힘들고 나의 내장은 먹은 것이 잘 안 내린다 읽는 시가 설컹설컹 목구멍에 걸린다 무슨 놈의 서정시가 이렇게 꼬장꼬장 어렵기만 한담! 혓바닥에 깔깔하고 눈알이 울울하다 창비에 시를 게재한 지 수 년이 지났는데 그 사이 필진이 많이 바뀌었구나 ..  (금요일의 노래 : 늙어가기 47)


 “좋은 일 없는 나라”에서는 “좋은 시”가 없다 했습니다. “좋은 삶 없는 나라”에서는 “좋은 시 읽을 일” 또한 없습니다.

 나 스스로 좋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 좋은 삶을 일구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 좋은 넋으로 좋은 글을 읽거나 써야 합니다.

 누가 해 주는 “좋은 나라 만들기”가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좋은 대통령감이 나타나서 좋은 대통령 한 사람이 모든 개혁과 혁명과 혁신 따위를 이루어 줄 일이란 없습니다. 내 보금자리에서 내 살붙이랑 천천히 “좋은 집 일구기”를 해야 합니다. 내 이웃과 동무하고 “좋은 삶 함께 지내도록 어깨동무하기”를 이루어야 합니다.

 나부터 좋은 삶을 즐길 때에 좋은 나라가 되면서 좋은 시가 태어납니다.


.. 이틀째 궂은비는 내리고 / 김소월의 두 배를 살아온 지루한 삶 ..  (똥파리 사냥 : 늙어가기 52)


 김소월 님보다 세 곱을 산다 해서 더 뛰어나지 않겠지요. 거꾸로 김소월 님보다 일찍 흙으로 돌아간대서 더 알차지 않습니다. 김소월 님만큼 살았으니까 비로소 해맑거나 말끔하다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삶을 일굽니다. 나는 나한테 주어진 하루를 고맙게 맞아들입니다. 나는 내 몸과 마음에 맞추어 내 나날을 보냅니다. 내가 몸이 튼튼하면 튼튼한 대로 더 바지런히 일하거나 놉니다. 내가 몸이 여리다면 여린 대로 골골 앓으면서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누군가는 조금만 일해도 돈을 왕창 벌겠지요. 누군가는 새벽부터 밤까지 몸이 망가지도록 일하지만 돈 몇 푼 못 쥐겠지요.

 돈을 더 번대서 더 기쁜 삶이 아닙니다. 이름을 드날리니까 참 좋은 삶이 아닙니다. 튼튼하다는 몸으로 술을 엄청나게 퍼마신대서 신나는 술잔치가 아닙니다. 내 길이 무엇인지를 또렷하게 깨달아, 씩씩하고 꿋꿋하게 걸어가야 비로소 기쁘며 좋은 삶이에요.


.. 서울은 소문을 만드는 곳 / 그 소문을 밑천 삼아 / 떼돈을 버는 곳 ..  (소문의 도시 : 늙어가기 54)


 문병란 님이 서른을 살짝 넘겼을 무렵 쓴 시하고 일흔을 훌쩍 넘긴 때에 쓴 시는 같으면서 다릅니다. 마음이 같다 할 수 있으나, 마음이 달라졌다 할 수 있습니다.

 서른다섯 살부터 일흔다섯 살까지 한결같이 잇는 마음이 있지만, 이동안 거듭나거나 부딪히거나 곰삭이면서 새롭게 거듭나는 마음 또한 있어요.

 한우물을 판대서 한마음이기만 할 수 있습니다. 한우물을 파며 걸어온 삶 또한 숱한 갈래 수많은 생각과 꿈과 사랑이 피고 집니다.

 소문을 밑천 삼아 떼돈을 벌어들인 문병란 님이라 한다면 일흔다섯 나이에까지 시를 붙잡을 까닭이 없었는지 모르며, 떼돈을 벌었으니까 더 돈을 붙잡고 싶어 돈내음 구리게 나는 시를 더 매캐하게 뿜어댈는지 모릅니다.

 모르기는 모르지만, 문병란 님으로서는 소문을 붙잡기는커녕 돈자락 꽁무니조차 그닥 붙잡지 못한 ‘어수룩하’고 ‘어리석’으며 ‘어설픈’ 시쟁이 삶을 고만고만하게 보내지 않느냐 싶습니다.


.. 아내는 내 시의 애독자 / 책에 나오면 내가 먼저 읽고 / 그 다음 나의 아내가 읽는다 ..  (아내는 외출 중 : 늙어가기 60)


 못난 놈은 못난 놈끼리 논다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돈쟁이는 돈쟁이끼리 놀고, 정치꾼은 정치꾼끼리 놉니다. 공무원은 공무원끼리 어울리며, 농사꾼은 농사꾼끼리 어깨동무합니다.

 서로서로 한마음이 되는 동무하고 놀며 어울리고 어깨동무하는 삶입니다. 서로서로 한마음이 되지 못하면서 겉치레로 손을 맞잡는 일은 옳지 않고 즐겁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끼리 어울립니다. 짓궂은 사람은 짓궂은 사람끼리 복닥입니다. 도시사람은 도시사람끼리 마음이 잘 맞고, 시골사람은 시골사람끼리 생각이 잘 맞습니다. 두 다리로 걸어다니는 사람은 저처럼 두 다리로 걸어다니는 사람이 반갑습니다. 자가용을 씽씽 모는 사람은 저처럼 자가용을 씽씽 모는 사람이 반가울 테지요.


.. 늙는다는 것 / 젊어서는 몰랐네 ..  (무지개 노래 : 늙어가기 119)


 그나저나, 문병란 님은 당신 일흔다섯 나이에 내놓는 시집에 왜 “금요일의 노래”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궁금합니다. 금요일에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금요일을 맞이하면 흥얼거리는 노래이기 때문에?

 ‘늙어가기 47번’으로 “금요일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문병란 님 일흔다섯 나이 시집이란 “늙은 시인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늙은 시인이 이 땅에서 얼레벌레 일흔다섯이 되도록 용케 안 죽고 용하게 잘 살아서 시도 쓰고 술도 마시며 당신하고 똑같이 늙은 옆지기하고 오순도순 살아간다고 기쁘면서 슬프게 부르는 노래입니다.

 당신 젊을 때에는 젊은 시를 썼고, 당신 늙을 때에는 늙은 시를 씁니다.

 서른다섯에도 시집을 한 권 내고, 일흔다섯에도 시집을 또 한 권 낼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싶습니다. 여든 살에도 시집을 다시 한 권 낼 수 있다면, 스무 살이나 마흔 살에 낼 수 있던 시집 못지않게, 또는 열 살이나 서른 살에 냄직한 시집하고는 새삼 다르게 웃음과 눈물이 아리땁게 스미리라 생각합니다. (4344.2.27.해.ㅎㄲㅅㄱ)


― 금요일의 노래 (문병란 글,일월서각 펴냄,2010.12.23./12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까불고 싶은 날
정유경 지음, 조미자 그림 / 창비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시·어린이시·어른시·문학을 사랑하는 길
 [책읽기 삶읽기 41] 정유경, 《까불고 싶은 날》



 넘겨짚기는 동시가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겪거나 부대끼거나 살아내지 않고 넘겨짚고서야 동시를 썼다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을 스스로 겪어야 다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겪어 보지 않고 책으로 읽거나 남한테서 얘기를 들어도 다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내 눈으로 안 보았고, 내 몸으로 부대끼지 않았으나, 책에 적힌 이야기로 머리에 지식으로 담았으니 안다고 말하는 일은 얼마나 올바를까요. 내 동무나 이웃이나 살붙이 마음을 ‘내 동무나 이웃이나 살붙이한테서 속속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로 듣지 않고 넘겨짚을 때에 나는 얼마나 내 동무나 이웃이나 살붙이 마음을 안다고 할 만할까요.


.. 선생님 질문에 답을 몰라 / 얼굴 빨개졌을 때 / 뒤에서 작은 소리로 / 답을 불러 주었지. // 쉬는 시간에 어떤 애가 / 날 놀리고 달아날 때는 / 그 애 발을 슬쩍 걸어 / 엉덩방아를 찧게 했고. // 왜 그랬을까? / 왜 그랬지? / 아, 궁금해. / 내일 한번 물어볼까? ..  (날 좋아하나 봐)


 어린이시는 어린이가 손수 쓰기도 하지만 어른이 써서 어린이한테 읽히기도 합니다. 어린이시는 어린이가 읽도록 쓰는 시입니다. 어린이가 읽도록 쓰는 시인 만큼 어린이가 알아듣기 어려운 낱말이나 어린이가 알아챌 수 없는 이야기를 담는다면 어린이시가 되지 않습니다.

 어른시를 쓰는 사람들은 ‘시를 읽는다며 이런 말도 못 알아듣느냐?’고 윽박지르듯이 쓰기도 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알아내거나 알아차리지 못할 이야기를 어른들 스스로 잘 모르는 어려운 말을 섞어 쓰기도 합니다.

 어린이시나 어른시나 모두 시이면서 문학입니다. 문학이란 말재주나 말놀이가 아니라 문학입니다. 말재주를 부리면 말재주요, 말놀이를 하면 말놀이입니다. 문학은 이 땅에서 고운 목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나날이 부대끼면서 이루는 이야기를 글이라는 그릇에 담은 넋입니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기에 문학입니다. 살아가는 이야기는 꾸밈없이 적바림할 수 있으나, 살을 붙여 적을 수 있습니다. 살아가는 이야기는 수수하게 쓸 수 있으며, 맑게 빛나는 무지개처럼 눈부시게 쓸 수 있어요.

 수사법이 돋보일 때에 훌륭한 문학이지 않습니다. 수사법을 한 가지도 모르니까 엉터리 문학이지 않습니다. 문학은 수사법이 아니며, 수사법을 잘 쓴다고 문학이 빛나지 않습니다.


.. 난생처음올 파마를 했다. / 내 머리가 뽀글뽀글 / 라면 머리가 됐다. / 엄마랑 누나가 날 보고 / 연예인 같다고 했다. / 히히. / 기분 좋았다. // 미용실 누나가 한 이틀은 / 머리를 감지 말랬는데 / 아차차! / 오늘 아침에 그만 / 감아 버렸다. // 으흑. / 풀린 내 머리 / 불은 라면이 됐다 ..  (라면)


 어떠한 문학이든 삶을 밑바탕으로 깝니다. 삶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공상과학문학이든 추리문학이든,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삶을 밑바탕으로 쓰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꿈으로 헤아리는 누리를 글로 쓴다 하더라도 ‘몸으로 살아가는 누리’를 밑바탕으로 삼아 ‘몸으로 살아가지 않는 누리’를 떠올리지, 지식이나 정보로 아무렇게나 짓거나 만들 수 없습니다.

 또한, 문학을 읽는 사람은 몸으로 이 땅에 발을 붙이면서 살아갑니다. 살아가는 사람들이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읽는 문학입니다. 삶이 없거나 삶무늬가 없거나 삶결이 없다면, 이러한 작품을 가리켜 문학이라 이름붙일 수 없습니다.

 재미있게 읽을 만하도록 쓴다 해서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낱말을 입에서 또르르 굴릴 만하게 썼기 때문에 괜찮은 어린이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운율을 맞추거나 노래하듯이 쓴다 하기에 어린이시가 되지 않아요.


.. 아! 망했다. / 게임기랑 피자, 치킨 / 다 날아갔다. // 모르는 건 그냥 틀리고 싶은데 / 선생님은 자꾸만 생각을 해 보래. / 그래서 자꾸자꾸 생각을 하니까 / 머리에서 펄펄 김이 나는 것 같아. / 친구들 머리에서도 김이 나겠지? / 선생님 머리에서도 김이 날 거야. / (우리가 못 푸는 걸 보고 열 받아서.) ..  (시험)


 누구나 살아가는 곳에서 바라보고 부대끼며 이야기를 이룹니다. 이야기는 좋거나 나쁘거나 맞거나 틀리거나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삶이냐에 따라 어떤 이야기인가만 있습니다. 살아가는 곳에서 마주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엮기에, 늘 내 테두리에서 삶·사람·사랑을 봅니다.

 훌륭한 삶이나 좋은 사람이나 예쁜 사랑이란 따로 없습니다. 내 삶과 내 사람과 내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 아이들과 어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나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착하거나 참답거나 아름다울까요?

 아이들이 읽을 동시나 동화를 쓰는 어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인가요? 아이들이 앞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동시나 동화를 쓰는 어른인가요?


.. 방금 파마한 머리가 / 마음에 안 들어 / 엄마도 나도 / 시무룩. // 엄마 머리는 금방 풀릴 것 같고 / 내 머리는 너무 뽀글거려 / 거울 속 엄마 얼굴, 내 얼굴이 / 쀼루퉁. // 그랬는데 // 아주머니가 만 원을 깎아 주니 / 엄마 입이 쏙 들어갔다. / 엄마가 예쁜 머리띠를 사 주어서 / 내 입도 쏙 들어갔다 ..  (룩*퉁*쏙*쏙)


 머리로 쓸 수 없는 시입니다. 입으로 시를 쓴다고도 하는데, ‘입으로 쓰는 시’란 ‘마음으로 쓰는 시’요, 마음으로 쓰는 시란 ‘내가 날마다 일구는 삶으로 쓰는 시’입니다. 내가 선 곳이 흙땅이라면 흙땅 기운과 내음과 소리와 빛깔을 담으면서 쓰는 시입니다. 내가 선 데가 시멘트나 아스팔트라면 시멘트나 아스팔트 기운과 내음과 소리와 빛깔을 실으면서 쓰는 시예요.

 흙기운이 배었대서 더 나은 시가 되지 않습니다. 시멘트자국이 난대서 더 못난 시이지 않습니다. 흙기운을 배었으나 어설프거나 어처구니없는 시가 많습니다. 시멘트자국이 덕지덕지 묻었으나 아리땁거나 사랑스러운 시가 있습니다.

 동시책 《까불고 싶은 날》에 실린 작품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동시책은 글쓴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기를 바라는가를 곱씹습니다.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쓴 초등학교 교사 정유경 님은 아이들이 동시를 읽으며 어떠한 넋 어떠한 꿈 어떠한 삶이기를 헤아리는가 돌아봅니다.


.. 이불 속에서는 / 아이 하나가 / 얼굴을 쏙 내밀고 / 나갈까 말까 / 나갈까 말까 // 가지 눈 틈으로는 / 어린 잎 하나가 / 둘레를 살피며 / 나갈까 말까 / 나갈까 말까 ..  (이른 봄날)


 〈이른 봄날〉이라는 작품 하나는 어른 삶과 어린이 삶이 살며시 들여다보입니다. 썩 좋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부자리에서 나갈까 말까 망설이지 않습니다. 어른들한테 길든 아이들이나 이렇습니다. 아이들은 추운 겨울이면 추운 대로 뛰쳐나가고, 더운 여름이면 더운 대로 박차고 나옵니다. 이부자리에서 꼼지락거리는 사람은 도시에서 회사일을 하는 어른들입니다. 시골에서 밭일 논일 하는 어른 또한 새벽 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열어요.


.. 하늘에 / 해와 달과 별은 / 매일매일 / 내 머리 위에 나타나 // 내가 사는 곳이 / 우주라는 걸 / 살짝살짝 / 알려 주지요. // 내가 볼 때도 / 안 볼 때도 ..  (해와 달과 별)


 동시책 《까불고 싶은 날》 책날개를 보면, 글쓴이는 “춘천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고 적힙니다. 출판사에서 이처럼 적었는지 글쓴이 스스로 이렇게 적었는지 모르는 노릇인데, “선생님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초등학교 교사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선생님이에요.” 하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선생님’이라는 낱말은 배우는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을 높이고자 ‘-님’을 붙이는 부름말이지, 스스로 ‘선생님’이라 말하거나 나를 소개하는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자리에서 ‘선생님’이라 할 수 없어요.

 동시이든 어린이시이든 어른시이든 문학이든 모두 말을 다룹니다. 말 한 마디를 갈고닦기도 하지만, 말 한 마디에 꿈과 넋과 사랑과 믿음을 싣기도 합니다. 말 한 마디에 따스한 손길과 너그러운 마음밭을 담습니다. 말마디마다 고운 이야기씨가 깃들고, 말마디에는 너른 이야기숲이 우거집니다.

 “내 머리가 뽀글뽀글 / 라면 머리가 됐다. / 엄마랑 누나가 날 보고 / 연예인 같다고 했다. / 히히. / 기분 좋았다.” 하고 생각하는 아이들도 틀림없이 있을 테고, 이런 생각을 글로 담아 동시를 쓴다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 / 왜 그랬지? / 아, 궁금해. / 내일 한번 물어볼까?” 하고 헤아리면서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알아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떤 사랑을 어디에서 누구하고 나누려 하는가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어떤 삶을 보여주면서 사랑을 이어주려 하는가요. 이 나라 아이들은 앞으로 서로서로 어떻게 사랑을 나누면서 아름다이 살아가는 길을 일구면 좋다고 생각하는가요.

 말놀이 아닌 말사랑으로 어른인 내 삶을 먼저 차분히 되새기고, 말재주 아닌 말나눔으로 아이들이 살아가는 하루를 가만히 톺아보면서, 착한 마을과 흙빛 손길을 보듬는 글밭을 돌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잔소리를 늘어놓아도 동시가 될 수 없지만, 잔솜씨를 부려도 어린이시는 되지 않습니다. (4344.2.22.불.ㅎㄲㅅㄱ)


― 까불고 싶은 날 (정유경 씀,창비 펴냄,2010.8.20./85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ㄹ 받침 한 글자 사계절 저학년문고 42
김은영 지음, 김수현 그림 / 사계절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입으로 쓰고 마음으로 읽는 시
 [책읽기 삶읽기 38] 김은영, 《ㄹ받침 한 글자》



 (1) 동시 한 자락, 슬픈 얼굴


 나날이 ‘어른이 써서 어른하고 나누어 읽는 시’를 마주하기 힘들다 합니다만, 어른시를 쓰는 사람은 제법 있습니다. 예나 이제나 ‘어른이 써서 어린이하고 나누어 읽는 시’는 참으로 드물다 하는데, 참말 어린이시를 쓰는 사람은 몹시 적습니다.

 어린이가 즐기는 시는 어른이 쓰기도 하고, 어린이가 스스로 쓰기도 합니다. 어린이가 쓴 시를 문학으로 여겨 처음으로 갈무리하여 선보인 분은 이오덕 님입니다. 《일하는 아이들》이라는 책은 오로지 어린이시로 이루어집니다.

 이오덕 님은 아이들이 ‘글쓰기’를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살아가는 터전에서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거나 느낀 이야기를 고스란히 적도록 도왔습니다. 말을 치레해야 문학이 아니요, 말을 꾸며야 일기가 아니며, 말을 덧발라야 재미나지 않음을 아이들이 깨닫도록 살폈습니다.

 문학이란 이야기입니다. 문학이란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살아가면서 꿈꾸는 이야기이든, 살아가면서 부대낀 이야기이든, 문학이란 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인 이야기입니다. 어린이한테는 어린이대로 어린이 눈높이에 따라 바라보거나 마주하며 살아가는 나날이 있습니다. 이러한 나날을 어린이로서 어린이답게 글로 담으면 곧 어린이문학입니다.

 어른이 써서 어린이하고 나누기에 어린이문학이요, 어린이 스스로 써서 어린이 스스로 즐기기에 어린이문학입니다.

 어린이가 읽을 시는 말놀이로 쓸 수 없습니다. 시는 말놀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화이든 소설이든 말놀이가 아닙니다. 말재주를 피운다 해서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말재주는 한낱 말재주입니다.


.. 설 쇠러 가네 / 친척들 만나러 가네 // 어서 가서 / 사촌들 보고 싶은데 // 길이 막혀 / 차들이 설설 기네 // 자동차에 / 날개가 달렸으면 좋겠네 ..  (설)


 동시책 《ㄹ받침 한 글자》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ㄹ받침으로 끝맺는 외글자 낱말을 글이름으로 삼아 짤막한 시를 잇달아 씁니다. 참 돋보이는 글이로구나 싶으나, 돋보인다뿐, 일부러 재미나게 쓰려고 하는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너무도 뻔한 틀에 더없이 얽매인 생각에서 헤어나지 않습니다.

 자칫, ‘수수한 여느 삶’을 ‘흔한 삶’으로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한테 명절날 자가용 타고 ‘시골(고향)’로 가는 일이 수수한 여느 삶이라 해도 틀리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 이러한 삶도 얼마든지 시로 적바림할 만하지요. 시로 잘 갈무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ㄹ받침 한 글자》에서 다루는 〈설〉이라는 동시는 얼마나 문학답거나 시다울까 궁금합니다. 꽉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우리 집 자동차만 날개를 달면 무엇이 좋을까요. 왜 이 아이 어버이는 명절날 고속도로가 자가용으로 가득 막히는 줄 알면서 자가용을 끌고 나왔을까요. 시외버스나 기차를 탈 수 없었으려나요. 여느 때 여느 자리에서도 이처럼 자가용을 몰고 이리 다니고 저리 누비고 하겠지요. 요새 웬만한 집에는 다 있다는 자가용이라지만, 우리 집에는 자가용이 없고, 우리 집마냥 자가용 없는 가난한 살림은 어김없이 있습니다. 자가용으로 시골을 찾아가는 사람도 많을 터이나, 버스나 기차를 타고 찾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껏 버스나 기차를 타고 시골로 찾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는 도무지 찾아낼 길이 없습니다. 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고 시골집으로 찾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는 문학으로 태어나지를 못합니다. 문학하는 이들은 이러한 삶을 겪지도 않고 치르지도 않으니 모를 테고, 이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은 문학을 하지 않으니 ‘수수한 여느 삶’이 문학으로 나오지 않겠지요.

 살아가는 자리에서 바라보는 만큼, 살아가는 자리가 어떠한가에 따라 글이 달라지고, 아이를 바라보는 눈매가 달라지며, 아이하고 나눌 수 있는 이야기 깊이 또한 달라집니다. ‘설설’ 기는 이 한 마디 말놀이 때문에 ‘설’이라는 낱말을 이렇게밖에 다루지 못하는 일은 슬픕니다.


.. 이순신 장군이 / 활시위를 당기네 // →→→→→ / →→→→→ // 적들이 쓰러지네 / 우리나라를 지켰네 ..  (활)


 시에 문자표를 넣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문자표도 얼마든지 알뜰살뜰 넣을 만합니다. 아무래도 아이들한테 읽히는 위인전에 나오는 이순신 장군이며, 왜놈이며, 나라사랑이며를 밝힐밖에 없는 제도권 학교 울타리인 터라, 〈활〉이라는 동시는 “우리나라를 지켰네” 같은 실마리 하나로 끝맺는구나 싶습니다.

 이 시가 잘못이라거나 어디가 틀린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 시는 그저 슬픕니다. 틀에 박힌 생각을 틀에 박힌 짜임새로 선보일 뿐인데, 이러한 시를 시라고, 더욱이 동시라 할 수 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어린이가 읽는 문학을 어른들께서는 너무 얕게 보거나 가볍게 보거나 섣불리 보지 않나 걱정스럽습니다. 어린이가 읽는 문학에 ‘이 문학을 빚는 어른들 삶과 넋과 꿈과 뜻과 빛과 얼과 살과 피와 뼈’가 고스란히 녹아들도록 애쓰는지 힘쓰는지 용쓰는지 근심스럽습니다.

 지난날 이오덕 님이 어린이시를 책으로 묶어 아름다운 문학임을 보여줄 때에도 익히 이야기하셨는데, 어린이문학은 어린이만 보는 문학이 아니라 어린이부터 모두 보는 문학입니다. 어린이부터 어른 누구나 즐기는 문학이 어린이문학입니다. 어린이시라면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즐기는 시입니다. 어린이문학을 다루는 글(평론)은 어른문학을 다루는 글하고 똑같이 써야 하며, ‘문학인가 아닌가’와 ‘문학다운가 문학답지 않은가’를 헤아려야 합니다.


.. 사슴아 / 사슴아 // 뿔이 예쁜 / 꽃사슴아 // 왜 뿔이 없니? / 누가 잘라 갔니? ..  (뿔)


 이 나라 들판이나 멧자락에는 들사슴이 없습니다. 들여우도 들늑대도 없습니다. 시골에서 가끔 마주하는 사슴들은 사슴우리에서 풀린 녀석들입니다. 한창 사슴고기가 유행처럼 퍼지던 때에 기르다가, 사슴고기 유행이 지나면서 돈벌이가 안 되어 문닫은 우리에서 사슴들이 굶어죽기 싫어 뛰쳐나온 녀석들이 새끼를 치고 퍼지며 조금 돌아다닙니다. 노루도 매한가지입니다. 다, 사람들이 고기며 가죽이며 뿔이며, 이렁저렁 쓰려고 우리에 가두어 키우던 녀석입니다. 가만히 보면 들짐승이 들짐승다이 살아갈 터전이란 한국에는 모조리 사라졌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몸피가 작아 먹이가 조금 적어도 괜찮다 싶은 짐승만 살아남지만, 이마저도 들과 멧자락에서 먹이를 얻기 힘들어 사람 사는 마을로 내려와야 합니다.

 문학이란, 이 가운데 시란, 또 어린이시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다룰 때에도 얼마든지 문학이요 시요 어린이시가 되지만, 겉훑기로 그친다면 참말 문학인지 시인지 어린이시인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으면서, 눈에 안 보이는 마음과 생각을 살며시 실을 때에 비로소 문학이며 시이며 어린이시입니다. 사슴 머리에 난 뿔을 다루려는 〈뿔〉이라 한다면, 남자 어른들이 사타구니 힘을 기르겠다며 먹는다는 뿔만이 아니라, 사슴들 삶과 이 나라 자연 터전 삶을 함께 아우르면서 생각하여 짧은 글줄에 아름다이 담아내야 합니다. ‘자연보호를 하자. 휴지를 줍자.’ 같은 낡은 독재시대 계몽구호와 같은 글을 적어 놓고, 이러한 글이 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2) 동시 두 자락, 보듬을 얼굴


 동시책 《ㄹ받침 한 글자》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책에 실린 글을 우리 아이한테 읽힐 만한지 가만히 생각합니다. 굳이 이 책에 실린 글을 읽지 않아도 되겠다고 느끼지만, 꼭 세 가지 글은 찬찬히 읽어도 흐뭇하리라 생각합니다.

 어린이 입에서 터져나오는 말은 모두 시라 할 만하고도 하는데, 어린이 입에서 터져나오는 말이란 둘레 어른한테서 배운 말을 어린이 스스로 짜고 맞추며 엮은 말입니다. 티없이 바라보거나 생각하는 어린이 말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티있으며 모난 어른들 말을 아이들이 삭이거나 걸러서 길어올린 말이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이 입에서 터져나오는 말이 모두 시라기보다, 어른 스스로 얼마나 티없으며 아리땁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어린이 말이 시가 되기도 하지만, 그저 군소리가 되기도 합니다. 곧, 어른들 스스로 어른 입에서 터져나오도록 하는 말이 모두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린이라서 시가 되고 어른이라서 시가 안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살아가는 결이 어떠한가에 따라 이이 말이 시가 되지만 엉터리가 되기도 합니다.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나온 사람 입에서 터져나와야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대학교는커녕 중·고등학교 문턱을 못 밟은 사람 입에서 터져나와도, 이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문학이 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어야 어린이 삶을 잘 헤아리며 좋다 할 만한 시를 쓰지 않습니다. 학교하고는 담 쌓은 여느 아저씨일지라도, 이이 스스로 살아내는 하루하루가 아름다우면서 해맑을 때에는 이이 입에서 터져나오는 온갖 말이 고스란히 시이자 문학이자 어린이시입니다.

 글을 몰라 종이에 글을 적바림하지 못하더라도, 살아낸 나날이 아리따운 사람들은 입으로 글을 쓰고 입으로 문학을 합니다.


.. 홀로 사는 옆집 할머니 / “홀몸이니 홀가분해.” 하시지만 /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집에 놀러 오셔요 // 홀로 사는 옆집 할머니 / “혼자 먹으니 입맛이 없어.” 하시면서 / 나물 반찬 들고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오셔요 ..  (홀)


 〈홀〉이라는 동시는 제법 눈여겨볼 만합니다. 홀로 사는 할머니 삶을 잘 짚습니다. 다만, 더 살가이 짚지는 못해 아쉽습니다. 이만큼 적바림한 동시로도 고맙습니다만, 이만큼 적바림하며 끝맺을 수는 없는 ‘홀’이 아닌가 싶습니다. 홀로 살아가는 나날을 ‘혼자 = 외롭다’로 못박아도 괜찮은지 궁금합니다. 할머니가 홀로 살아오기까지 걸어온 길과 홀로 살면서 부대낀 아픔과 홀로 살아내며 일구는 아름다움을 함께 드러낼 때에 비로소 〈홀〉이 마무리됩니다.


.. 나는 딸이야 / 엄마도 딸이었어 / 할머니도 딸이었어 // 나도 커서 / 딸 낳고 싶어 / 딸은 엄마가 되거든 ..  (딸)


 〈딸〉은 〈아들〉로 바꾸어도 똑같은 글과 글 얼개입니다. 세 딸을 보듬으며 세 여자 삶을 단출한 글월로 품었기에 퍽 좋구나 하고 느끼면서, 막상 ‘세 딸 세 여자’ 삶이란 무엇인지를 마지막 한 줄에서 다루지 못해 아쉽습니다. 초등학생쯤 되면 이제 아기말 ‘엄마’를 털고 ‘어머니’라 말해야 옳습니다만, 요새 사람들은 워낙 말을 말다이 못 쓰니 어쩔 수 없는 대목이고, 이보다 “딸은 엄마가 되거든”이라는 말마디에서는 미처 짚지 못하는 ‘어머니로 살아가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밝힐 한 마디를 넣으면 한결 빛날 동시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엄마는 잠결에도 / 아기 숨결 느끼고 // 아기는 꿈결에도 / 엄마 살결 느끼고 ..  (결)


 잠든 아기 숨결을 느끼는 사람은 어버이입니다. 아이를 낳았대서 모두 어버이가 되지는 않아요. 아이를 낳기 앞서부터 작은 목숨씨를 사랑으로 보듬으며 사랑으로 기다린 끝에 사랑으로 낳아 사랑으로 기르는 이들이 어버이입니다.

 어버이는 아이 숨결뿐 아니라 손결과 마음결과 이야기결을 나란히 한몸 한마음이 되어 받아들입니다. 어버이 말결이 아이 말결이 되는 줄 몸으로 알고, 어버이 삶결이 아이 삶결로 이어가는 줄 마음으로 깨닫습니다. 아이가 먹도록 마련하여 차린 밥자리는 영양소를 아이 몸에 집어넣는 자리가 아니라, 어버이 손결이 담긴 목숨결을 따사로이 받아들이는 자리입니다.

 동시집 《ㄹ받침 한 글자》를 하나하나 따지면, 썩 괜찮다 여길 만한 동시일지라도 아쉬운 대목이 참 많이 보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아쉽다 할지라도 참으로 ‘수수한 여느 삶자리’를 톺아보면서 나누려는 매무새일 때에는 반갑습니다. 억지스런 말놀이가 아니라 살가운 삶나눔인 동시라는 옷을 입으면 고맙습니다.

 머리로 쓰는 시가 아니라 입으로 쓰는 시입니다. 머리로 읽는 시가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 시입니다. 머리로 빚는 말놀이가 아닙니다. 삶으로 일구는 이야기입니다. (4344.2.1.불.ㅎㄲㅅㄱ)


― ㄹ받침 한 글자 (김은영 글,김수현 그림,사계절 펴냄,2008.8.5./78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