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금치 학교 삶의 시선 22
서수찬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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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읽는 책
[시를 노래하는 시 32] 서수찬, 《시금치 학교》(삶이보이는창,2007)

 


- 책이름 : 시금치 학교
- 글 : 서수찬
- 펴낸곳 : 삶이보이는창 (2007.3.30.)
- 책값 : 6000원

 


  내가 아이였을 적, 내 어머니가 나한테 자장노래를 얼마나 자주 들려주었는지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 어머니가 나한테 자장노래를 들려주었다고 몸으로 떠올리고, 몸으로 떠올리는 만큼 내 아이들한테 자장노래를 들려줍니다. 우리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 푸름이가 되고 어른이 될 무렵 저희 어릴 적 저희 아버지가 자장노래를 날마다 얼마나 불러 주었는가를 떠올리지 못하더라도, 몸에 따사롭게 아로새겨지는구나 하고 느끼며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이 속을 썩일 적에 나는 그만 내가 아버지요 어버이인 줄 잊고는 소리를 빽빽 지릅니다. 마치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내가 아이인 줄 잊고 나를 다그치고 꾸짖으며 회초리질을 하셨듯, 나는 내 아이들한테 소리를 빽빽 지르고 맙니다. 그러나, 나는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를 때렸듯이 내 아이들을 때리지는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바보스런 어버이로서 소리를 빽빽 지르고 말면서 나 스스로 너무 속이 아프고 괴롭다고 느끼는데, 차마 때리는 짓까지 할 수 없습니다. 내 어버이가 나한테 회초리질을 물려주었다 하더라도 내 아이들한테 회초리질을 물려줄 수는 없어요.


  그런데, 회초리질을 물려주지 않더라도 빽빽 소리를 지르는 어버이로 지낸다면, 조금도 사랑스럽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 두 대를 때릴 적에 나는 한 대를 살살 때린대서 ‘더 낫다’고 할 수 없어요. 손찌검은 안 한달지라도 마음으로는 ‘이 녀석 한 대 쥐어박고 싶구나’ 하고 생각한다면, 손찌검을 하는 짓하고 똑같아요.


.. 밤새 비린내를 이불로 덮어 주는 / 아버지의 손길이 참 많이 늙어 있었다 ..  (그리운 이불)


  폭력은 폭력이고 사랑은 사랑입니다. 폭력은 폭력으로 되풀이되고, 사랑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나도 아이도, 또 나도 내 어버이도, 서로서로 사랑으로 얼크러질 때에 참으로 아름다우리라 느껴요. 나부터 사랑을 좋아하고 사랑을 즐기며 사랑을 누릴 때에 더없이 아름답구나 싶어요.


  요 며칠, 우리 집 큰아이가 참말 왜 이러나 싶도록 말썽을 부립니다. 말썽 부리는 큰아이를 바라보는 아버지는 낯을 찡그립니다. 웃는 낯이 없습니다. 저녁나절, 큰아이가 홀로 조용히 공책에 무언가를 한참 끄적이더니 아버지한테 와서 보여줍니다. “웃는 토끼예요. 아버지 보세요. 미안해요.” 하고 말합니다. 나는 그만 내가 얼마나 부끄럽고 못난 짓을 했나 싶어 “아니야. 서로 미안한 것 없어. 우리 예쁜 아이야.” 하고 말하며 아이를 살살 안으며 토닥입니다.


  곰곰이 떠올려 봅니다. 나는 내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웃는 얼굴”로 ‘웃는 이야기’를 지어서 살그마니 들려준 적 있는가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 진즉에 어항들이 젊은이들에게 / 말뚝이 되어주지 못했을까 / 일생을 그 말뚝에 옹골차게 묶고 / 마음놓고 저 먼 바다까지 나가서 / 풍랑을 다스리게 하지 못했을까 / 어항은 노인네마저 놓치겠다 싶어 노인데 가슴에만 / 매듭을 아주 굵게 매어 놓았다 ..  (말뚝)


  날마다 빨래를 합니다. 아이가 둘이 되고부터 빨래감이 무척 많습니다. 아이가 하나일 적에도 빨래가 퍽 많았지만, 둘일 적하고는 견줄 수 없습니다.


  아이가 셋이거나 넷이라면, 또는 다섯이나 여섯, 일곱이나 여덟이라면 어떠할까 헤아려 봅니다. 요즈음이야 아이가 적다지만 예전에는 아이가 참 많았아요. 예전 사람들은 옷가지가 얼마 없었다지만, 아이 숫자가 많은걸요. 게다가 모두 손으로 바느질을 하고 손으로 이불을 누볐는걸요.


  예전 사람들은 집에서 물꼭지 틀어 빨래하지 못했어요. 냇가에 빨랫감을 이고 가서 빨래를 했어요. 예전 사람들은 그날그날 방아를 찧어 쌀겨를 벗긴 다음 밥을 지었어요. 예전 사람들은 나무를 해서 땔나무로 불을 피우고는 밥을 짓고 국을 끓였어요.


.. 삼복을 지나도 우리 마을에 / 늘어나는 것은 개와 빚뿐이다 ..  (내 마음의 보물창고 2)


  나는 열아홉 살 적부터 빨래와 밥을 혼자 건사했습니다. 서른여덟 살이 된 2012년에 비로소 빨래기계를 집에 들였어요. 스무 해 가까이 모든 빨래를 손으로 했어요. 이불이든 담요이든 청바지이든 잠바이든 무엇이든 손빨래로 주물렀어요.


  손으로 빨래를 할 적마다 생각했어요. 여름에는 빨래가 얼마나 시원하고 겨울에는 빨래가 얼마나 손 시린가를 생각했어요. 내 어머니는 집식구 빨래를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고, 내 어머니가 아이였을 적 당신 어머니는 또 어떻게 빨래를 하셨을까 생각했어요.


  뜨거운 물을 쓸 수 없이 겨울빨래 하던 나날에는 얼음장 깨고 빨래를 해야 했을 내 어머니와 내 어머니 낳은 어머니 들을 생각했어요. 한겨울에 아이들이 밤에 이불에 오줌을 누면 어머니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했어요. 한겨울에도 이불빨래를 하셔야 했다면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했어요.


  빨갛게 얼어붙으면서 찌릿찌릿 저려 따가운 손가락을 느끼며 겨울빨래를 생각했어요. 예전 어머니들은 빨갛게 언 손가락으로 방아를 찧었을 테고, 소죽을 끓였을 테며, 바느질을 했겠지요. 역사책에는 몇몇 사대부 집안 여자들 이야기만 적바림하지만, 역사책에 안 적힌 내 어머니들, 내 할머니들, 이 겨레 여자들 삶을 가만히 생각했어요. 빨래를 하면서, 밥을 지으면서, 이 밥을 아이들한테 먹이면서, 다 마른 옷가지를 개면서, 으레 내 어머니들과 할머니들과 이 겨레 여자들을 생각했어요.


.. 전에 살던 사람이 버리고 간 / 헌 장판을 들추어내자 / 만 원 한 장이 나왔다 / 어떤 엉덩이들이 깔고 앉았을 돈인지는 모르지만 / 아내에겐 잠깐 동안 / 위안이 되었다 / 조그만 위안으로 생소한 / 집 전체가 살 만한 집이 되었다 / 우리 가족도 웬만큼 살다가 / 다음 가족을 위해 / 조그만 위안거리를 남겨 두는 일이 / 숟가락 하나라도 빠트리는 것 없이 / 잘 싸는 것보다 / 중요한 일인 걸 알았다 ..  (이사)


  책을 읽을 적에도 생각합니다. 책을 쓰는 사람이 으레 남자로구나 하고 느끼며, 이이가 책을 쓰는 동안 밥은 누가 지어서 차려 주고, 옷은 누가 빨아서 입혀 주며, 집안은 누가 쓸고닦으며 갈무리를 할까 생각합니다. 우리 집 큰아이가 소꿉놀이를 하듯 설거지놀이나 빨래놀이나 청소놀이를 한다며 이냥저냥 복닥일 적에, 이 예쁘장한 놀이를 바라보는 내 눈길은 얼마나 따사로울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 아버지들은 ‘어머니가 사라지’면 어떻게 살아갈까요. 어머니 몫을 맡는 여자들이 숨을 거두거나 어디로 떠나면, 이때부터 이 나라 아버지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어머니가 없어도 ‘아이가 어떻게 되건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회사에 가서 돈 버는 일을 하려나요. 어머니가 없어도 ‘전화 걸어 밥을 시켜서 먹으’며 하루를 보내려나요. 어머니가 없어도 ‘빨래꾸러미를 잔뜩 짊어지고 빨래방에 가서 맡기’면 그만이려나요.


  회사에 가는 동안 아이들은 유치원 ‘종일반’에 집어넣다가, 종일반을 마칠 무렵 ‘친어머니이자 친할머니’한테 아이들을 맡기면 되려나요. 친할머니가 아이들을 하루 내내 맡아 주기를 바라면서 다달이 돈 백만 원씩 드리면 되려나요.


.. 콩알 할머니 / 길 한 편에 / 콩알만하게 앉아 / 콩알을 팝니다 ..  (콩알 할머니)


  이웃 할머니들이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으레 “저기 꽃이 걸어오네.” 하고 말씀합니다. “이 꽃은 어떤 꽃인데 이렇게 귀엽게 안기나.” 하고 말씀합니다. 이웃 할머니들이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며 ‘꽃’이라고 말하기 앞서까지, 아이들 아버지이자 어버이로서 우리 아이들을 ‘꽃’이라고 느낀 적이 얼마나 될까 하고 되새깁니다. 늘 내 곁에서 반짝이는 꽃이요 향긋한 꽃이며 해맑은 꽃인 줄 얼마나 느끼는가 하고 되새깁니다.


  아이들은 어버이한테 꽃처럼 다가옵니다.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나무처럼 다가옵니다. 아이들은 꽃이고 어른들은 나무입니다. 아이들은 꽃답게 삶을 누리고, 어른들은 나무답게 삶을 누려요.


  꽃을 바라보며 나무가 튼튼하게 우뚝 섭니다. 나무를 바라보며 꽃이 씩씩하게 자랍니다. 꽃을 바라보며 나무는 열매를 싱그럽게 맺습니다. 나무를 바라보며 꽃은 씨앗을 알차게 빚습니다.


  곧, 서로서로 얼크러지며 숲이 됩니다. 나무와 꽃이 얼크러진 숲이 됩니다. 꽃이랑 나무랑 예쁘게 빛나는 숲이 됩니다.


.. 어머니는 시금치 밭에 늘 / 앉아 계시는 거로 우리 형제들을 가르쳤습니다 ..  (시금치 학교)


  새벽별은 유난히 빛납니다. 한쪽 하늘은 보랏빛으로 바뀌며 차츰 하얗게 동이 트지만, 다른 하늘은 아직 깜깜한 채 별이 반짝거려요. 보랏빛 새벽하늘이든 아직 까만 하늘이든 별빛이 초롱초롱해요. 그러다가 이내 뭇별 반짝거림은 갑작스레 사라지면서 허옇게 새벽빛이 밝고, 어느덧 새벽빛조차 사라지며 노오란 아침볕이 온 마을을 덮어요.


  두 아이 어버이로 시골에서 살아가며 새벽마다 아침마다 새삼스레 놀라요. 그런데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어요. 새벽과 아침에 새삼스레 놀랄 만한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고 느낀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우리 아이들은 어린 나날부터 시골에서 살아가니까 저희 어버이하고는 사뭇 다른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겠지요. 빛을, 그늘을, 바람을, 햇살을, 물을, 흙을, 이야기를 아이들 나름대로 삭히면서 하루하루 새 꿈을 빚겠지요.


  그러고 보면, 도시에서는 아침이슬이나 새벽이슬을 거의 못 느꼈어요. 아니, 도시에서는 밤별도 새벽별도 느낄 수 없었어요. 얼마나 많은 별이 얼마나 까만 하늘을 덮는가를 조금도 느낄 수 없었어요.


.. 들판은 설령 콘크리트로 메울 수 있을지언정 / 우리들 속에 들어와 있는 들판은 / 시퍼렇게 눈뜨고 있다는 것을 / 그들만은 까마득하게 모릅니다 ..  (대추리 도두리 만인보 1)


  내가 올려다보지 않아도 별은 뜨고 지겠지요. 아니, 지구에서 바라보지 않더라도 이웃 은하계 별들은 저마다 제 빛을 뽐내겠지요. 지구별 사람들은 스스로 살아가는 데에 너무 바쁜 나머지, 다른 은하계 별 가운데에 문화와 문명이 빼어나게 발돋움한 곳이 있거나 없거나 아랑곳하지 않아요. 아니, 생각할 틈조차 없어요. 지구별은 지구 있는 은하계에서 사람이 예쁘게 살아가는 별이듯, 다른 별은 다른 은하계에서 다른 목숨이 예쁘게 살아가는 터전이 되겠지요.


  어쩌면, 지구별은 문명이나 물질이나 문화가 좀 뒤떨어졌다고 할 수 있어요. 어쩌면, 다른 별은 지구별하고 견줄 수 없이 문명이나 물질이나 문화가 대단하다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삶은 달라요. 지구별에서도 어마어마한 부자라 해서 즐겁게 살아가지는 않아요. 꽤 부자라 하는 이들도 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지는 않아요. 나는 우리 아이들이랑 시골에서 ‘천만 원짜리 집을 사서’ 오붓하게 살아가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은 도시에서 ‘십억이나 이십억짜리 집을 사서’ 살아가면서도 오붓하거나 즐겁거나 한갓지거나 기쁜 나날을 못 누린다고도 해요.


  자가용을 몬대서 즐거울 수는 없어요. 버스나 전철을 탄대서 안 즐거울 수는 없어요.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니까 즐거움하고 동떨어지지는 않아요. 즐거움은 스스로 빚어요. 스스로 찾고 스스로 아끼며 스스로 누리는 즐거움이에요.


  옷을 사서 입어도 즐거웁겠지만, 옷을 얻어서 입어도 즐거워요. 사거나 얻거나 대수롭지 않아요. 옷을 입는 사람 스스로 즐거운 꿈을 키울 수 있을 때에 즐거워요.


.. 우리 손주 머릿속이 / 온통 폭탄으로 가득 차 버린다면 / 남을 죽이는 음모로 철책 속에 숨어 버린다면 / 그건 내가 이 땅에서 평생 배운 언어가 / 아니다 ..  (대추리 도두리 만인보 8)


  서수찬 님 시집 《시금치 학교》(삶이보이는창,2007)를 읽습니다. ‘시금치 학교’라니 뭔 소리인가 알쏭달쏭합니다. 서수찬 님 시 〈시금치 학교〉를 읽지 않고서야 뭔 소리인지 짚을 수 없습니다.


  나긋나긋한 싯말을 천천히 읽습니다. 옳거니. 서수찬 님한테 학교란 ‘시금치밭’이었다고 합니다. 당신 어머니가 시금치를 돌보며 나눈 사랑을 듬뿍 배우면서 당신 삶을 일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시금치 학교, 시금치 학교, 가만가만 읊으며 생각합니다. 그러면, 당근 학교라든지 배추 학교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설거지 학교나 빨래 학교도 있을 테지요.


  노래 한 가락이 학교가 될 수 있어요. 춤 한 사위가 학교가 될 수 있어요. 글 한 줄도 학교가 되고, 이야기 한 자락도 학교가 돼요.


.. 봄에 저 꽃들이 / 마을에서 사라졌다 해 보라 ..  (대추리 도두리 만인보 11)


  가을날 가을꽃이 눈부십니다. 봄이나 여름과 달리 가을에는 꽃이 얼마 안 보이지만, 곳곳에 드문드문 보이는 가을꽃은 더없이 눈부십니다. 들판과 멧자락 가을꽃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네가 구절초이니? 네가 쑥부쟁이이니? 나는 참 너희 이름을 모르겠구나.’


  참말 꽃잎만 보고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꽃잎이 아닌 풀잎을 보면서 똑똑 따서 먹어 보면 이 아이들 이름을 잘 알 텐데, 다시 생각해 보면, 들판이나 밭뙈기에서 뜯어서 먹는 풀마다 이름이 무엇인지는 잘 몰라요. 이름을 모르지만, 맛나구나 싶어 뜯어서 먹는 풀도 제법 많아요. 아니, 나는 이름을 굳이 생각하지 않아요. 풀잎을 뜯어서 먹을 때마다 ‘아하, 너희는 이런 맛을 나한테 나누어 주는 풀이로구나.’ 하고 여겨요. 온갖 풀을 골고루 뜯어서 나물버무림을 해서 먹을 때에는, 그야말로 온갖 풀내음이 얼크러진 밥을 즐겨요.


  풀이기에 너희는 풀이로구나 하고 말합니다. 곧, 겨울날,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너희는 눈이로구나 하고 말합니다. 숲마다 우거진 나무를 바라보며, 너희는 나무로구나 하고 말합니다.


  어느 북중미 토박이는 ‘눈’을 가리키는 스물일곱 가지 낱말이 있다고 하는데, 아프리카 케냐사람한테는 눈을 가리키는 낱말이 거의 없을는지 몰라요. 아무래도 도시사람한테는 시골자락 풀이 다 비슷해 보여 그냥 풀이라고만 여길는지 몰라요. 시골사람한테는 도시에 넘치는 자동차마다 비슷해 보여 그냥 자동차라고만 여길 수 있겠지요.


.. 들풀 속에는 / 얼마나 너른 들판이 있는지 /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리는 / 생명이 들어 있는지를 ..  (대추리 도두리 만인보 16)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습니다. 열 가지 풀을 뜯으면 열 가지 풀은 저마다 다른 맛을 뽐내지만, 한 자리에 비비거나 무치면 사뭇 다른 내음과 맛으로 새롭게 태어나요.


  오, 그러니까, 시금치밭이라 하더라도 시금치만 있지 않아요. 이런 풀 저런 풀 함께 자라요. 바람은 이웃마을을 거쳐 우리 밭으로 스며요. 저 머나먼 바다에서 풍기는 내음을 바람이 실어서 날리고, 제비들 날아다니던 내음도 실어서 날리며, 골프장에서 뿌리는 농약 내음도 실어서 날리겠지요. 반가운 내음이 있고 달갑잖은 내음이 있어요. 그러나저러나, 바람은 우리 숨결을 푸르게 북돋아요.


  학교는 어떤 곳일까요.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어떻게 이끌까요.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다른 빛을 뽐내면서 새삼스럽고 새로운 빛줄기 하나로 환하게 거듭날 수 있을까요. 그저 모두 똑같은 톱니바퀴가 되도록 거칠거나 우악스럽게 등을 떠밀까요.


  ‘시금치 학교’는 어떤 학교일까요. 시금치 학교는 모든 아이들을 똑같은 몸짓과 모양과 말투로 길들이는 데일까요. 시금치 학교는 다 다른 아이들을 다 다른 몸짓과 모양과 말투로 사랑스레 살아가도록 돕는 데일까요.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어디에서나 다 같은 ‘어머니’이지만, 이 나라 어머니들이 빚는 고추장이나 된장이나 간장이나 김치는 맛이 모조리 달라요. 이 나라 어머니들 밥맛과 국맛과 반찬맛은 몽땅 달라요. 똑같다 싶은 재료로 밥이나 국이나 반찬을 짓더라도 맛이 죄 달라요. 참말 어머니들은 어느 분이나 사랑스러워요. (4345.10.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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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위하여 민음의 시 77
문정희 지음 / 민음사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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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살아갈 아이들한테
[시를 노래하는 시 33] 문정희, 《남자를 위하여》

 


- 책이름 : 남자를 위하여
- 글 : 문정희
- 펴낸곳 : 민음사 (1996.2.10.)
- 책값 : 7000원

 


  학교는 얼마나 아이들을 사랑하는 곳이 되나 하고 헤아려 보곤 합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나를 비롯한 동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 곳이었나 하고 돌아보곤 합니다. 요즈음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지난날과 달리 아이들을 알뜰살뜰 사랑하는 곳이 되었나 살펴보곤 합니다.


  이제 웬만한 교실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놓입니다. 분필가루 날리지 말라면서 하얀 글판이 붙곤 합니다. 에어컨이나 난방기가 놓이면서, 나무나 석탄으로 난로를 때면서 그을음이 나올 일이 없습니다. 도시락을 두 통씩 싸고 다니느라 가방이 무거울 일이 없으며, 어머니들은 새벽 일찍 도시락 싸느라 애먹지 않아도 됩니다.


  흙으로 된 맨땅인 운동장에서 넘어지면 무릎이 까지거나 다친다며, 모든 학교는 운동장에 인조잔디를 깝니다. 학교 교사를 헤아리며 자가용 대는 터를 넓히고, 체육관이나 강당이나 여러 가지 건물을 번듯번듯하게 세웁니다. 도서관 운동이 퍼지며, 도서관 없는 학교가 없습니다.


.. 유식한 시인들은 / 그 후 이러쿵저러쿵 써 주기도 하지만 / 그 사람은 원래 쇠똥내 온몸에 풍기는 / 농사꾼일 뿐. / 시퍼런 낫으로 벼포기를 베면 / 그 아래 수없는 별이 떨어지는 / 일꾼 중의 상일꾼 / 쌀가마 척척 들어 / 온다리에 힘줄 선 농투성이일 뿐 ..  (천둥 같은 사나이를 위하여)


  시설이 달라지고 건물이 늘어나는 학교입니다. 교사가 늘고 학급 아이들 숫자가 줄어드는 학교입니다. 그렇지만 예나 이제나 학교는 ‘대학바라기’라는 틀이 그대로입니다. 고등학교는 마땅히 대학바라기라 할 테지만, 중학교 또한 고등학생이 되기 앞서 대학바라기를 하는 자리일 뿐이요, 초등학교마저 중·고등학생 때 대학바라기를 더 알차게 해내도록 밑바탕을 닦는 자리일 뿐입니다.


  아이들은 왜 대학생이 되어야 할까요. 모든 아이가 대학생이 되어야 할까요.


  그토록 대학생이 대단한 이름이라 한다면, 모든 아이가 대학교 의무교육을 받아야지 싶습니다. 대학입시가 지옥이 아닌 즐거운 삶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대학생이 엄청난 자격증 구실을 한다면, 누구나 대학교를 다니도록 해서 입시에 얽매이지 않도록 해야지 싶습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모두 마치고 ‘어른’이라는 자리에 들어선다 할 때에, 이 모든 아이들이 회사원이 되거나 공무원이 되어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농사꾼도 되고 고기잡이도 되어야 해요. 아이들은 청소부도 되고 시인도 되어야 해요. 아이들은 빵집 일꾼이나 김밥집 일꾼도 되어야 해요.


.. 딸아이가 피아노를 사 달라고 조르는 오후, / 나는 피아노를 사기도 전에 피아노를 팔아 버리고 싶어 괴롭다. / 그 시꺼멓고 무거운 괴물을 집 안에 들여 놓고 / 도레미로부터 체르니를 통과할 일이 검은 터널처럼 숨막히다. / 혀 짧은 선생들이 드나들며 말끝마다 〈즈〉 발음을 내며 /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한 칼날 손톱으로 건반을 두드릴 일이 / 폭풍 전야처럼 무덥다 ..  (피아노를 기다리는 오후)


  무엇보다 아이들은 ‘돈을 버는 어떤 일자리’를 얻기 앞서 ‘스스로 우뚝 서는 오롯한 사람’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이를테면, 날마다 먹는 밥을 어디에서 어떻게 얻는가를 짚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쌀 한 줌을 어디에서 누가 어떻게 일구어 얻는지를 깨닫고, 감알이나 능금알이 어떤 씨앗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어떤 빗물과 햇살과 바람을 먹으며 자란 다음 맺는 열매인지를 깨달아야지 싶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짝꿍을 사귑니다. 사내가 사내를 사귀고 가시내가 가시내를 사귀든, 사내가 가시내를 사귀고 가시내가 사내를 사귀든, 저마다 짝꿍으로 삼는 벗을 사랑스레 아끼고 보살피면서 서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을 스스로 익혀야지 싶습니다. 짝을 지어 살아가며 낳은 아이를 너른 사랑과 밝은 믿음으로 돌보면서 씩씩한 사람으로 크도록 이끄는 길을 살펴야지 싶습니다.


  그러니까, 학교에서는 ‘돈을 버는 일자리’, 이른바 ‘직업’을 얻는 길로는 이끌지만, 직업조차 회사원이나 공무원 가운데 한 가지 길로만 이끌 뿐이에요.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서로를 사랑하는 길’은 안 보여주고 안 알려주고 안 가르쳐요.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어른 되어 아이를 낳을 적에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고 믿으며 아낄 때에 즐거운가를 못 보여주고 못 알려주며 못 가르쳐요.


  굳이 걱정할 일은 없지만, 아이들이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사랑하는 길’을 곁에서 바라보거나 둘레에서 느끼거나 교사와 어버이한테서 배우지 못하는 흐름인데, 이렇게 흐르며 스무 살이 되거나 서른 살이 된 다음, 어떻게 살아갈까 아리송해요. 사랑을 안 배우고 사랑을 안 겪으며 사랑을 생각하지 않으며 어른이 된 오늘날 아이들이 성평등뿐 아니라 ‘참평등’을 이루는 누리를 어떻게 일굴 만한지 알쏭달쏭해요.


.. 낯익은 술 냄새 그 쌍거풀 / 아침과 저녁의 그 기침 소리 / 30년을 헤치고 꺼내어서 / 이 손으로 한 번만 만져 보고 싶은 것은 / 하얀 뼈 붙들고 울고 싶은 것은 ..  (그리운 뼈)


  사람으로 살아갈 아이들입니다. 어느덧 어른으로 지내는 오늘날 사람들 누구나 ‘사람으로 살아갈 아이’로 태어나서 어린 나날과 푸른 나날을 누렸습니다. 사람으로 살아갈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사람다움을 마음껏 누릴 때에 환하게 빛납니다.


  보육원이나 유아원이나 어린이집에 가야 할 아이들이 아닙니다. 사랑을 받으며 살아갈 아이들입니다. 일찌감치 영어를 배우거나 무슨무슨 학습을 할 아이들이 아닙니다. 천재교육이나 조기교육이나 영재교육 따위에 휘둘릴 아이들이 아닙니다. 너르고 따스하며 애틋한 사랑을 먹고 자랄 아이들입니다. 맑은 풀잎을 만지고 고운 흙알갱이를 쓰다듬으며 튼튼한 나무와 얼크러지며 자랄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느껴야 하고,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사랑으로 자라야 하고,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으로 땀흘려야 합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노래해야 하고,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을 심어야 합니다.


  전쟁무기를 만들면서 거짓 평화를 거짓 정치를 일삼으며 내세우는 어른이 될 일이 아닙니다. 직업군인도 안쓰럽지만 전쟁무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거리 얻는 어른도 안타깝습니다. 온 나라 멧자락에 구멍을 뚫어 고속도로나 고속철도 짓는 어른도 안쓰럽지만, 자가용 씽씽 몰며 고속도로를 달리는 어른도 안타깝습니다. 이 나라 옛 어른은 왜 들판 한복판에 송전탑을 버젓이 세우면서 시골을 망가뜨리는가요. 이 나라 요즘 어른은 왜 숲을 싹 밀며 아파트를 아무렇게나 올리는가요.


  사람이 살아갈 집은 어떤 보금자리여야 아름다울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살아갈 마을은 어떤 터전이어야 사랑스러울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저마다 맡는 일이란 어떤 삶이어야 즐거울까 생각해 봅니다.


.. 새로 수염자리 돋아 난 아들과 함께 / 오랜만에 TV를 끄고 / 마루에 누워서 별을 바라본다. / 별보다는 아무래도 자동차의 불빛이 / 더 빛나 보이는 아들은 그만 지루해서 / 두 번이나 하품을 한다 ..  (우렁이 이야기)


  새삼스레 학교를 떠올립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학교란 아이들을 사랑하는 곳이 못 된다고 느낍니다. 한국에서 학교는 아이들한테 입시공부를 시키는 곳일 뿐, 아이들을 사랑하는 곳이 아니로구나 싶습니다. 학교에서 교사는 아이들 앞에서 교과서 지식을 들려주기만 할 뿐, 아이들 하나하나가 어떤 숨결인가를 헤아려 저마다 아름답게 사랑할 길을 찾는 몫을 하기 힘들겠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학교도 사람이 살아가는 터예요. 대학교만 바라보도록 하는 초·중·고등학교라 하지만, 아침부터 저녁이나 밤까지 사람들이 얼크러지는 터예요. 회사원이나 공무원 되는 길만 보여주는 대학교라 하지만, 아침부터 밤까지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터예요.


  초등학교이든 대학교이든 사람들이 모입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온갖 사람들이 북적입니다. 입시공부만 하든 영어에 휩쓸리기만 하든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 함께 밥을 먹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터인데, 뜻밖에 이들 학교에서는 시험성적에 따라 서로를 계급으로 나누고 말아요. 사람이 어깨동무하는 자리인데, 얄궂게 이들 학교에서는 스스로 감옥 죄수인 마냥 똑같은 옷차림에 똑같은 몸차림에 똑같은 말씨를 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도록 길들여져요.


.. 홍 동 백 서, 주 과 포 혜 / 몇백 년을 루머처럼 떠도는 지령에 따라 / 바삐 손을 놀리는 나에게 / 어린 효자 아들이 말했다. / “엄마, 제사상에 짜장면 시켜다 놓자. / 탕수육도 한 접시” ..  (파를 다듬으며)


  학교급식을 하고 도시락을 안 싸도 되니까 ‘무언가 나아진’ 학교일까 궁금합니다. 교육방송국에서도 입시교육을 시켜 주니까 ‘여러모로 좋아진’ 나라일까 궁금합니다. 도시에서는 온갖 학원이 넘치고, 시골에서는 군청에서 돈을 대어 서울 강남 이름난 강사를 불러들여 주말마다 특강을 하니까 ‘참으로 발돋움한’ 사회일까 궁금합니다.


.. 아가야, 눈부신 아가야. / 어디에서 왔기에 / 이리도 환한 햇살로 안기느냐 ..  (새로 태어난 아가를 위한 노래)


  돈이 좀 있는 나라마다 우주선을 쏜다고 애씁니다. 우주선 하나를 쏘려고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습니다.


  가만히 생각합니다. 우주선을 쏠 만한 돈으로 우리가 할 일은 ‘우주선 쏘기’일는지요. 우주선을 쏠 만한 어마어마한 돈은 참말 우주선을 쏘는 데에 써야 할 노릇인지요.


  볼일 있어 전남 고흥에서 서울이나 부산이나 인천을 다녀올 적에 시외버스로 고속도로를 지나며 으레 생각합니다. 서울이나 경기도나 부산 언저리는 자동차가 엄청나게 많아, 이런 데에는 고속도로가 있을 만하구나 싶지만, 전라도를 넘어서면 고속도로에도 자동차는 아주 적어요. 자동차가 아주 적은 전라도에 굳이 고속도로가 있어야 하나 모르겠어요. 지역차별이나 지역편중이나 뭐 이런 말을 떠나, 구태여 전라도 시골마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가 있어야 할까 궁금해요. 전라도 도시와 다른 곳 도시를 잇는 고속도로조차 아무 보람없는 일 아닌가 궁금해요.


  그러니까, 전라도에서는 고속도로 닦는다며 들일 어마어마한 돈을 참으로 ‘고속도로 닦는 일’에 써야 하는지 궁금해요. 고속도로 닦는 데에 들일 어마어마한 돈은 참말 ‘다른 곳’에 써야지 싶어요. ㅇㅁㅂ 정권이 꾀하는 4대강사업도 이와 같아요. 왜 4대강을 비롯해 시골 작은 냇물에까지 시멘트 들이붓는 공사를 해야 할까 궁금해요. 한국이라는 나라는 돈이 얼마나 많아 숲과 들과 멧골을 온통 시멘트범벅으로 만들어야 하나 궁금해요.


.. 나무와 나무 사이엔 / 푸른 하늘이 흐르고 있듯이 / 그대와 나 사이엔 / 무엇이 흐르고 있을까 ..  (초여름 숲처럼)


  이제, 나는 숲을 생각합니다. 숲에서 지낼 적에 스스로 얼마나 푸른 숨결을 기쁘게 들이마시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자그마한 나무가 있든 우람한 나무가 있든, 숲에 서면 내 귀와 눈과 코와 입과 살결이 얼마나 환하게 트이거나 열리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숲이 싱그러울 때에 내 몸도 싱그럽습니다. 숲을 곱게 보살피거나 아낄 때에 내 마음도 곱게 보살피거나 아낍니다.


  ㅇㅁㅂ 정권이 숲과 들과 멧골을 죄다 망가뜨리며 시멘트를 퍼붓는 까닭을 알 만합니다. ㅇㅁㅂ 정권에 맞선다는 야당에서도 굳이 ‘시멘트 막개발 공사’를 막지 않는 까닭을 알 만합니다. 숲이 사라져 나무가 죽으면 사람들 넋도 함께 죽어요. 들이 망가져 송전탑 전자파가 춤추면 사람들 얼도 함께 망가져요. 멧골에 구멍이 뚫려 고속도로와 고속철도 숭숭 지나가면 사람들 마음도 함께 구멍이 뚫려요.


.. 남자들은 /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릉거리던 짐승과 / 결별한다. /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 아기가 나오는 곳이 /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 딸에게 뽀뽀를 하며 /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 남자들은 /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 화해한다. /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  (남자를 위하여)


  사람으로 살아갈 아이들을 생각하는 길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어른을 생각하는 길이라고 느껴요.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른은 아이를 가르치기 앞서 ‘아이 낳은 어른’인 나 스스로를 가르친다고 느껴요. 아이들한테 이것저것 보여주는 어른이 아니라, 어른 스스로 이것저것 아름다이 누리는 기쁨을 찾는구나 싶어요. 어른으로서 맑고 밝게 살아가기에, 아이들한테 맑고 밝은 꿈을 알려주는구나 싶어요. 어른 스스로 착하고 참된 길을 알지 못하면, 아이들 앞에서도 착하고 참된 길을 열어 주지 못해요.


.. 냉장고에 콜라와 쇠고기를 넣어 놓고 / 대문 앞에 한 대의 자동차를 세워 놓았다 해서 / 20세기가 눈부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 오, 20세기 / 우리는 그 반을 남의 밑에서 식민지로 살았고 / 또 나머지 반을 허리 잘리운 채 / 형제끼리 총 겨누고 살고 있다 ..  (마감 뉴스)


  문정희 님 시집 《남자를 위하여》(민음사,1996)를 읽습니다. 문정희 님은 ‘남자를 생각하며’ 시를 썼다고 하지만, 시를 하나하나 읽는 동안 ‘남자’라기보다 ‘사람’이 떠오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노래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랑할 길은 어디에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 가령 귀뚜라미를 시인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 아무 힘도 없이 /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 그 울음 하나로 / 가을을 우리 곁에 갖다 놓으니까 / 진부하지만 / 가령 풀잎을 시인이라고 해도 좋겠지. / 가녀린 입술로 / 꽝꽝 언 흙을 밀치고 / 푸른 눈을 떠서 / 날카로운 빌딩 사이 초록을 풀어 / 봄을 우리 곁에 갖다 놓으니까 ..  (귀뚜라미와 메가폰)


  아침이 밝습니다. 어제는 제법 드센 바람과 비가 몰아쳤으나, 오늘은 새파란 하늘이 환하게 열리는 아침으로 찾아옵니다. 언제나 이 들판과 멧골에서 함께 살아가는 멧새와 들새가 아침노래를 들려줍니다. 한겨울에는 흙으로 돌아가지 싶은 풀벌레가 이곳저곳에서 나긋나긋 아침노래를 함께 부릅니다. 바람은 나뭇가지를 살랑살랑 흔들며 아침노래를 나란히 들려줍니다. 우리 집 아이들도 아침을 맞이해 일어나 이래저래 개구지게 떠듭니다.


  풀잎이 푸릅니다. 나뭇가지는 흙빛입니다. 하늘은 파랗고, 맑은 바닷물도 하늘처럼 넓디넓게 파랗습니다. 구름은 하얗고 내 마음도 하얗게 젖어드는데, 까만 밤하늘에서 마주하는 달이랑 별도 하얗습니다.


  나는 새벽녘에 누런쌀 씻고 불렸습니다. 이제 아이들과 함께 먹을 아침밥을 생각합니다. 아침밥 먹고 나서 서로 하루를 어떻게 누릴지를 가늠합니다. 네 식구 함께 멧길을 걸어 볼까. 우체국에 자전거 타고 다녀와 볼까. 마당에 앉아 해바라기를 해 볼까.


  생각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게 즐기는 하루입니다. 꿈꾸기에 따라 늘 아름답게 피어나는 이야기요, 빛이며, 삶입니다. (4345.10.2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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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창비시선 250
노향림 지음 / 창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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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삶쓰기
[시를 말하는 시 4] 노향림,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 책이름 :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 글 : 노향림
- 펴낸곳 : 창비 (2005.7.20.)
- 책값 : 6000원

 


  새벽 일찍 별을 보고 학교에 가는 대입 수험생 푸름이는 새벽별 학교길을 늘 겪으면서 이러한 삶을 곰곰이 헤아립니다. 누군가는 새벽길을 걸어가며 참말 새벽별을 올려다봅니다. 도시에서는 밤별이고 새벽별이고 구경하기 어렵지만, 저 하늘 어딘가에 별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길을 걸어요. 누군가는 새벽길이건 밤길이건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더라도 하늘을 빛내는 별을 느끼지 않거나 살피지 않아요.


  별을 보고 싶은 사람은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별을 봅니다. 햇볕을 누리고 싶은 사람은 도시에서 일하든 시골에서 일하든 햇볕을 누립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삶을 이루고, 삶을 이루는 대로 사랑을 빚어요.


  하루에 몇 분 해를 쬐더라도 해바라기예요. 하루에 몇 초 별을 본다 하더라도 별바라기예요. 꼭 몇 시간 해바라기나 별바라기를 누려야 즐겁지 않아요. 다문 몇 분이나 몇 초라 하더라도 스스로 즐길 수 있는 마음그릇이어야 참으로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스스로 즐길 수 있는 마음그릇이 아니라면, 하루 내내 느긋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 하더라도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리라 느껴요.


.. 충남 당진의 깊은 산골로 / 선산이 옮겨 간 뒤 수북한 잡초 속에 / 몇기의 무덤이 앉아 있다 / 그 발치 아래 자투리땅은 감자밭이다. // 그곳에서 캐낸 감자 한 상자가 / 내가 사는 고층 아파트까지 올라왔다. / 붉은 황토가 묻은 감자알들은 / 임부의 배처럼 튼실했다. / 속에다가 무슨 희망을 잉태하고 있는지 / 모두가 크고 둥글었다 ..  (감자를 삶으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지난날을 떠올립니다. 언제나 새벽별을 바라보며 집을 나섰고, 밤별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왔어요. 어느 날 학교에서 생각합니다. 한창 자율학습을 하던 저녁 아홉 시인가 열 시쯤이었을 텐데, 새벽 다섯 시 반에 집을 나서서 밤 열두 시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삶이라면, 집에서 보내는 겨를은 고작 다섯 시간밖에 안 될 텐데, 이마저 거의 잠을 잘 뿐, 어머니나 아버지나 형하고 얼굴 마주치기조차 어렵구나 싶더군요. 이런 삶이 얼마나 내 삶이라 할 만할까 궁금했어요. 이렇게까지 해야 대학교에 갈 수 있나 궁금했어요. 이렇게 중학생 때부터 집식구 누구하고도 말을 못 섞고 얼굴조차 못 보며 여섯 해 푸른 나날을 보내야 대학교에 간다면, 대학교란 무슨 뜻이나 값이 될까 궁금했어요. 푸른 여섯 해를 오로지 대학입시 시험공부에만 바쳐야 한다면, 이토록 푸르고 싱그러운 나날 내 꿈과 사랑은 어떻게 될까 궁금했어요.


  그런데, 중학생 때에도 고등학생 때에도, 둘레 동무들은 이러한 대목을 놓고 생각을 기울이지 않아요. 마음을 틀 만한 동무일까 여기며 이런 이야기를 살며시 풀어놓고 보면, 다들 한결같이 하는 말이, ‘야, 대학교에는 가야지.’였어요. 그래서, ‘대학교에 꼭 가야 하니?’ 하고 물으면 ‘대학교에 안 가면 어떻게 하려고?’ 하고 되물어요. ‘대학교에 안 간다고 내가 사람이 아니니?’ 하고 말하면 ‘그건 아닌데.’ 하면서도, ‘내가 대학교에 가지 않으면 너하고 나는 동무가 아니냐?’ 하고 말할 적에는 동무들이 딱히 대꾸하지 않아요.


  모두들 대학바라기가 되도록 길들여지는 나날이라 할까요. 삶바라기가 아닌 대학바라기가 되고, 사랑바라기가 아닌 입시바라기가 되며, 꿈바라기가 아닌 숫자바라기가 되고 말아요.


  교사들이 동무들을 이렇게 내몰았을까 헤아려 보는데, 아마 여느 교사들 또한 스스로 성적바라기나 성과바라기로 구르지 않았으랴 싶어요. 이를테면, 담임을 맡은 이들은 학생 몇을 대학교에 보냈느냐 하는 성적이나 성과나 실적을 바라보았겠지요. 과목 교사는 이녁이 맡은 과목을 배우는 아이들이 시험성적이 얼마나 오르느냐 하는 숫자를 바라보았겠지요.


.. 입주민 환영 플래카드 아래 / 발꿈치 들고 흔들거리던 수국, 부처꽃, 붓꽃들 / 이사꾼들에 짓밟혀 뭉개어졌다. / 빈 터 뒤 휴게소가 저 스스로 뒤집어져 / 폐허이다. / 저 스스로 해체된 슬픔이다 ..  (도원일기)


  햇볕 한 줌 쬘 수 없던 고등학교 수험생으로 지내는 동안 늘 한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 또 대학생 가운데에도 서울에서 제법 이름난 대학교 학생이 되고, 이렇게 둘레 사람 모두 바라 마지 않는 ‘대학생 신분’을 거머쥐는 내가 된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이 신분을 누리거나 펼치거나 쓰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대학교를 마친 뒤에는 ‘졸업장’을 이력서 같은 데에 안 쓸 수 있겠느냐 하고, 또는 대학교를 그만두어 아예 졸업장이 없도록 하며 살아가면 어떠할까 하고 생각했어요.


  다 같이 휩쓸리는 물결이 도무지 내키지 않았어요. 모두들 스스로 생각을 멈추고 대학입시 시험공부만 외우는 모습이 도무지 반갑지 않았어요.


  열다섯 푸름이는 열다섯 푸름이한테 걸맞는 삶과 꿈과 사랑을 배우면서 빛내야 한다고 느꼈어요. 열일곱 푸름이는 열일곱 푸름이한테 알맞는 삶과 꿈과 사랑을 익히면서 빛내야 한다고 느꼈어요. 나는 나이를 하나하나 손으로 꼽으면서 이러한 나이에 들어맞을 만한 삶과 꿈과 사랑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했어요. 오직 ‘나’이고 싶지 ‘고2’나 ‘고3’이고 싶지 않았어요. 내 이름으로 내 삶을 누리고 싶지, ‘36번 학생’이나 ‘45번 학생’ 같은 숫자라든지 ‘몇 등 학생’이나 ‘몇 점 학생’이라는 숫자로 나를 부르는 일은 기쁘지 않아요.


.. 바다에 사람을 놓아주는 일이 그의 일이었다. / 죽은 사람들은 왜 바다로 가는 것일까. / 육체에서 영혼에서 벗어나면 사람은 비로소 자유로운 / 물결이 되는 것일까. 바다 깊이 심해어가 되는 것일까 ..  (바닷가에서 보낸 한철)


  시험이란 시험일 뿐입니다. 대학교란 대학교일 뿐입니다. 시험을 치러 성적이 이러하다면 성적이 이러하다뿐, 성적이 사람을 말하지 않아요. 백일장이나 신춘문예 같은 자리가 있어, 누군가 백일장이나 신춘문예에 뽑힌다 한다면, 그저 뽑히는 일일 뿐, 어떤 글잔치 자리에서 글 한 꼭지 뽑힌다 해서 그 글이 훌륭하거나 놀랍지 않을 뿐더러, 그 글을 쓴 사람이 훌륭하지도 놀랍지도 않아요.


  아주 마땅한 소리인데, 글은 그 글을 쓴 사람 삶이에요. 그 글을 쓴 사람 삶은 좋다 나쁘다 가르지 못해요. 멋지다 안 멋지다 금긋지 못해요.


  더 아름답다 할 삶은 없어요. 더 어여쁘다 할 사람은 없어요. 더 아리땁다 할 사랑은 없어요.

  삶이면 다 삶이요, 사람이면 다 사람이고, 사랑이면 다 사랑이에요.


  시험성적이 잘 나온다 해서 착한 아이가 아니에요. 대학교에 붙었다 해서 좋은 아이가 아니에요. 스스로 삶을 착하게 일굴 때에 착한 아이예요. 스스로 사랑을 좋게 보살필 때에 좋은 아이예요.


  좋고 나쁨이란 없지만, ‘좋은 나날’이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슬기를 갈고닦는 이들은 참말 ‘좋음’을 깨달으면서 누리고 빛내요. 기쁘고 안 즐겁고 하는 금이란 없지만, ‘참다운 기쁨’이란 무엇인가 헤아리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이들은 참말 ‘기쁨’을 알아채면서 환히 밝히면서 누려요.


.. 애기똥풀꽃! 하고 속삭여주자 / 하늘은 어느덧 배경음악처럼 / 은은히 깔리고 미풍에 흔들리는 / 또다른 푸른 커튼이 되어주었지요 ..  (맑은 날)


  삶은 스스로 짓습니다. 내 삶은 내가 짓지, 다른 사람이 지어 주지 않습니다. 밥을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먹고 밥그릇을 스스로 치우듯, 내가 오늘 하루 누리는 삶은 언제나 스스로 짓고 스스로 누리며 스스로 마감해요.


  글은 스스로 짓습니다. 내 글은 내가 짓지, 다른 사람이 지어 주지 않아요. 내가 짓는 삶에 따라 글을 지어요. 내가 짓는 생각에 따라 내 글을 내가 지어요. 누리는 하루에 따라 글이 달라져요. 나누는 사랑에 따라 글은 언제나 달라져요.


  삶짓기를 누가 누구한테서 배우지 못하듯, 글짓기를 누가 누구한테서 배우지 못해요. 소설짓기이든 수필짓기이든 시짓기이든, 어느 누구도 아무한테도 가르치지 못해요.


  가르친대서 배우지 못하는 글이요 꿈이며 사랑이에요. 배우려 한대서 가르쳐 줄 수 없는 글이고 꿈이면서 사랑이에요.


  스스로 살아가는 하루가 온통 글이에요. 똥을 누고 빨래를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하루가 온통 글이에요. 아이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부르며, 아이를 업고 들마실을 하고, 아이를 새근새근 재우는 하루가 온통 글이에요.


.. 베란다 화초에 물을 준다. / 물을 흠뻑 받아먹고 / 굶주렸던 화분들이 지상의 풀밭마냥 / 싱그럽다 ..  (살아 있는 날의 슬픔)


  이론이란 허울이라고 느껴요. 글을 잘 쓰는 이론이란 참말 허울이라고 느껴요. 글을 다루는 이론, 이른바 문학비평이나 문학평론이란 모두 허울이라고 느껴요. 왜냐하면, 스스로 짓는 삶에 따라 스스로 짓는 글이기에, 이러한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읽은 글이 어떠한가 돌아보면서 찬찬히 적바림하는 글’ 또한 ‘비평과 평론도 삶을 녹아내어 쓰는 글’이 될밖에 없어요. 독후감이든 비평글이든 서평이든 모두 ‘삶글’일밖에요.


  삶글이란 느낌글이요 생각글이며 사랑글이에요. 삶글을 이론에 맞추어 쓰지 못해요. 이론에 맞추어 쓰는 글이란 삶글이 아니고, 느낌글도 생각글도 사랑글도 아니에요.


  이론에 맞추어 시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주의주장에 맞추어 시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문예사조에 발맞추어 시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러한 싯말은 무슨무슨 이야기를 나타낸다고 하는 비유나 은유 같은 틀에 따라 시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러한 싯말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하는 상징이나 반어 같은 굴레에 따라 시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리는 삶을 쓰는 글이에요. 빚는 삶을 쓰는 글이에요. 즐기는 삶을 쓰는 글이에요. 바라보는 삶을 쓰는 글이에요. 어깨동무하는 삶을 쓰는 글이고, 사랑하고 싶으며 참말 사랑하는 삶을 쓰는 글이에요.


.. 바람 한점 없이 놀 꺼진 서녘 하늘 / 이팝꽃 핀 사이 불쑥 얼굴 내민 고봉밥별 / 그 흰 쌀밥 푸려고 깨금발을 내딛었다가 그만 / 돌부리에 넘어지고 말았네 ..  (개밥바라기별)


  노향림 님 시집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창비,2005)를 읽습니다. 시를 쓰는 노향림 님은 어떤 삶을 누리면서 어떤 이야기를 싯말에 알알이 담는가를 헤아립니다. 작은 시집 한 권에 노향림 님 삶이 얼마나 깃들었을까 헤아립니다. 이 글월 저 글월에 노향림 님이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누리는 삶이 얼마나 스며들었을까 헤아립니다.


  시를 쓰는 사람 스스로 이녁 삶을 사랑스레 담았다고 느끼면, 이녁이 쓴 시는 사랑스러우리라 생각합니다. 시를 쓰는 사람 스스로 이녁 삶을 고달프게 담았다고 느끼면, 이녁이 쓴 시는 고달프리라 생각합니다.


  생각이 삶을 이끕니다. 삶에서 생각이 태어납니다. 생각이 사랑을 일깨웁니다. 사랑이 생각을 길어올립니다. 생각이 꿈을 꽃피웁니다. 꿈결에 따라 생각결이 날갯짓을 합니다.


  해가 들려주는 소리는 깨진 종소리일 수 있습니다. 듣는 사람이 이렇게 느끼면 이러한 소리가 참으로 들려요. 해가 들려주는 소리를 포근한 할머니 밥짓는 소리로 듣는 사람이 있으면, 참말 이러한 소리가 들릴 테지요.


  가슴을 열어 시를 써요. 가슴을 빛내어 시를 써요. 가슴을 살살 어루만지며 시를 써요.


  엊저녁, 다섯 살 큰아이를 품에 안고 한가위 보름달을 보았습니다. 달달 참 밝구나 하고 노래하는데, 보름달 밑으로 살별 하나 반짝 하고 지나갔어요. 마침 큰아이는 다른 데를 쳐다보다가 살별을 못 보았어요. 그런데, 내가 본 빛살이 살별인지, 아니면 지구별 바깥에서 누군가 찾아오며 지나가는 빛꼬리인지는 알 길이 없어요. 그래도, 나는 반짝 하고 빛난 어여쁜 살별이라고 느꼈어요. 보름달 바라보며 큰아이가 착하고 예쁘며 씩씩하다 하고 노래를 불렀는데, 이 노래를 부르는 사이에 지나갔으니, 우리 아이는 한가위 보름달과 함께 이 이야기들을 하나둘 가슴에 품으며 새근새근 잠들었는지 몰라요.


  바야흐로 동이 터요. 뿌옇게 낀 안개가 온 멧자락을 덮어요. 소나무에도 굴참나무에도 잣나무에도 안개가 허옇게 내려앉아요. 오늘 하루는 어떻게 즐길까 하고 생각하며 아침을 열어요. (4345.10.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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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세계사 시인선 41
신현림 지음 / 세계사 / 1994년 6월
평점 :
품절


이 모두를 사랑해
[시를 노래하는 시 30] 신현림,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 책이름 :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 글 : 신현림
- 펴낸곳 : 세계사 (1994.6.1.)
- 책값 : 5500원

 


  선선한 가을 아침은 따스한 가을볕과 함께 새롭게 열립니다. 가을이 무르익으며, 이제 새벽 다섯 시 반을 지나고 여섯 시 가까울 때까지 퍽 어둑어둑합니다. 여섯 시 반쯤 되어야 비로소 환하게 날이 샙니다.


  저녁에는 다섯 시 즈음 되면 선선한 바람이 감돕니다. 말리는 이불이나 빨래가 있으면 네 시 반쯤 모두 걷어야 합니다. 처마 없는 마당에 두는 물건은 저녁부터 이슬이 내려앉습니다. 아침 아홉 시가 넘어도 밤새 내린 이슬을 맞은 들풀과 나뭇잎마다 물방울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나물비빔을 하려고 들풀을 뜯으며 손끝으로 풀이슬을 느낍니다.


.. 후후 / 당신은 여지껏 환상을 보고 있었다 / 어쩌면 生과 死란 없다 // 홀연히 사라질 나는 / 공중에 불타는 구름막대기 ..  (bottle woman)


  가을볕은 누구만 더 사랑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을볕은 시골 들판만 사랑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을볕은 도시 한복판 높다란 빌딩숲도 사랑합니다. 고속도로를 누비는 자동차도 사랑합니다. 원자력발전소 지붕과 화력발전소 지붕도 사랑해요. 가을볕은 푸른기와 이은 집도 사랑하고, 천막으로 이은 집도 사랑해요. 누구한테나 골고루 따순 사랑을 드리우는 가을볕입니다.


  가을쑥이나 가을나물은 누구를 더 좋아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골사람한테만 반가울 가을나물이 아니에요. 도시에서 살림하는 사람한테도 반가울 가을나물이에요. 가을꽃도 가을나무도, 모든 사람한테 고운 빛을 베풀고 싶으리라 느껴요.


.. 제 한 줄의 시가 누군가에겐 동병상련 술이 되게 / 그대 장칼로 내 가슴 거듭거듭 휘저어주시기를 ..  (황혼의 지구병동)


  사랑하기가 가장 쉬우며 즐겁고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사랑받기가 가장 반가우며 기쁘며 좋다고 느낍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나를 사랑할 때에 더없이 빛난다고 느껴요. 이른바 평화도 평등도 민주도 통일도,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할 때에 천천히 이루어지리라 생각해요.


  미워하기란 참 어렵고 힘들며 괴로우리라 생각합니다. 싫어하거나 못마땅히 여기기 또한 참말 까다롭고 고단하며 슬프리라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주어지는 삶이란 하루하루 웃음으로 누리는 삶이에요. 하루하루 누리는 삶이란 하루하루 맑고 밝게 일구는 삶이에요.


  가을에는 가을사람이 됩니다. 겨울에는 겨울사람이 됩니다. 봄에는 봄사람 되고, 여름에는 여름사람 돼요. 언제나 가장 좋게 꿈을 꾸고, 늘 가장 살가이 사랑을 키우며, 노상 가장 곱게 말을 빚어요.


.. 금연방송을 비웃는 듯 / 내 앞의 사내가 계속 담배를 피웠다 / 담배연기는 얼어가는 파도처럼 / 머리를 휘감아 죄었다 문득 담배를 / 그의 위법의 법을 숨통을 비벼끄고 싶었다 / 신도림 역을 떠날 때였다 / 하모니카 부는 장님이 오고 있었다 / 껌팔이 소녀가 구호상자 든 노인이 / 허기진 손들이 장례식의 화환처럼 몰려왔다 / 내 것과 다른 가난을 사는 그들이 낯설었다 / 아무도 그들의 가난에 관심갖지 않았다 / 궁핍의 냄새가 지겨웠다 화가 치밀었다 ..  (호소의 表裏)


  가을날 들새는 가을철에 걸맞게 바쁩니다. 겨울날 멧새는 겨울철에 걸맞게 바빠요. 사람들은 가을과 겨울은 어떤 철을 헤아리고 어떤 날씨를 살필까요. 들새한테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온통 다른데, 사람한테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스스로 얼마나 다르다고 느낄까요.


  아침과 저녁이 다를까요. 낮과 밤이 다를까요. 새벽과 어스름이 다를까요. 구름과 햇살이 다를까요. 바람과 무지개가 다를까요. 달과 별이 다를까요.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내 삶이 한결같이 새로우면서 새삼스럽다고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오늘 하루를 맞이하면서 내 삶을 한결같이 새롭고 새삼스럽게 돌보는 바탕은 어디에 있을까요.


.. 바다는 엄청 큰 가야금이다 / ―둥기당당 두둥기당당― / 젖은 가야금소리 / 어머니 긴 머리칼처럼 진하고 따뜻해라 / 바다란 말처럼 부드러워라 아아 아파라 ..  (나는 물고기가 될테야)


  밥을 합니다. 식구들 먹을 밥을 합니다. 밥상을 차립니다. 식구들을 부릅니다. 밥을 먹는 사람은 밥을 하는 사람 마음을 알까요. 거꾸로, 밥을 하는 나는 밥을 먹는 식구들 마음을 알까요.


  나는 내 살붙이나 이웃한테 말을 건넵니다. 나는 내 말투가 어떠한가를 잘 헤아릴까요. 나한테서 말을 듣는 사람들은 어떤 느낌이요 마음이며 생각인가를 환하게 깨달을까요.


  밭자락에서 풀을 뜯으며 풀포기한테 고맙다고 말합니다. 너도 먹고 너도 먹어야겠다, 생각합니다. 이렇게 오래오래 푸르게 자라서 나와 살붙이 모두한테 좋은 밥이 되어 고맙다고 말합니다. 가을 늦게까지, 또 겨울까지, 이 밭자락 풀들이 싱그럽고 기운차게 돋으면 참 기쁘겠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 붑니다. 새가 노래합니다. 풀내음이 날립니다. 풀벌레가 속삭입니다. 아이들이 칭얼거립니다. 빨래하고 집일하는 내 발자국 소리가 콩콩 울립니다.


.. 여자인 것이 싫은 오늘, 부엌과 / 립스틱과 우아한 옷이 귀찮고 몸도 귀찮았다 / 사랑이 텅 빈 추억의 골방은 비에 젖는다 / 비오고 허기지면 푸근할 내 사내 체온 속으로 / 가뭇없이 꺼지고 싶다는 공상뿐인 내가 싫다 ..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나 스스로 이 모두를 사랑하기에 오늘 다시금 눈을 뜰까 하고 되뇌어 봅니다. 나 스스로 이 모두를 안 사랑한다면 오늘 나는 눈을 못 뜬 채 어디론가 사라질까 가누어 봅니다. 나 스스로 이 모두를 사랑하려는 따스한 넋이기에 새롭게 기운을 차릴 수 있는가 궁금합니다. 나 스스로 이 모두를 안 사랑하는 차갑거나 매몰차거나 메마른 몸가짐이라면, 내가 발을 디딘 이곳은 무척 쓸쓸하며 어둡겠지요.


.. 그야말로 나는 아름다운 악기가 돼 / 이 모든 것을 사·랑·해라고 노래하면 ..  (철로변의 가을)


  신현림 님 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세계사,1994)를 읽습니다. 신현림 님은 1994년에 이 시집을 낼 적과 스무 해 지난 2014년에 서로 어떤 모습일까 그려 봅니다. 다시 스무 해가 지난 2034년이 되면 또 어떤 모습이 될까 그려 봅니다. 1994년에 처음 나온 시집을 2012년에 처음 읽는 나는, 또 앞으로 스무 해 지난 2032년이나 다시 스무 해 더 지난 2052년에 어떤 눈길과 눈빛과 눈높이로 내 삶을 마주할까 그려 봅니다.


  나는 지겨운 이 땅에 불길 활활 오르는 고무신짝 던지는 사람일까요. 나는 즐거운 이 터에 불길 활활 오르는 풀짚으로 불을 밝히며 멧길을 걷는 사람일까요.


.. 밥 한 사발엔 / 해뜨는 바다와 조상의 살냄새와 단비가 / 매일 일하다 저무는 쓰라린 손그림자가 있다 ..  (밥 한 사발)


  나는 내 삶이 지겹거나 따분하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슬프거나 고단하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기쁘거나 놀랍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흐르는 삶이 스며들고, 나부끼는 삶이 노래한다고 느껴요. 푸른 물결 되어 춤을 추고, 파란 하늘이 무지개 되어 손짓을 하는구나 싶어요.


  왜 그럴까, 왜 이렇게 느낄까, 왜 이처럼 생각할까, 하고 돌아보곤 하는데, 온누리에는 딱히 좋음이나 싫음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바라봅니다. 좋거나 싫거나로 가를 수 없이, 좋으면서 싫고 싫으면서 좋달까요. 즐거우면서 서운하고 서운하면서 즐겁달까요.


  자전거로 언덕길을 오르며 허벅지가 터질 듯하지만 온몸에 땀이 쏟으면서 즐겁습니다. 자전거로 달리는 즐거움을 느끼다가는 허벅지가 터질 듯하며 고단합니다. 마음은 두 갈래가 아니라 하나요, 이때에는 이렇고 저때에는 저렇지 않습니다. 늘 똑같이 움직여요. 그래서, 진보와 보수라든지, 왼쪽과 오른쪽이라든지, 어떻게 가리거나 따질 수 있을까 알쏭달쏭하다고 느껴요. 지구별에서 왼쪽으로 왼쪽으로 왼쪽으로 가면 어디로 갈까 싶고,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또 어디로 갈까 싶어요. 어디로도 안 가고 한 자리에 있대서 ‘한 자리(중립)’가 아니라, 왼쪽에서 볼 때에는 오른쪽이 되고, 오른쪽이 볼 때에는 왼쪽이 돼요. 한편, 나와 얼굴을 마주한 아이는 나한테 왼쪽이 아이한테 오른쪽이요, 아이한테 왼쪽이 나한테 오른쪽이에요.


.. 북풍이 거칠게 몰아친다 / 나는 내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 깨닫기 위해 시를 쓰는지 몰라 ..  (북풍과 은장도)


  신현림 님은 예전이나 오늘이나 똑같이 ‘아무것 아닌’ 숨결일까 궁금합니다. 또는, 아무것 아니기에 모든 것일까 궁금합니다. 깨달으려고 시를 쓰는 사람은 없지 싶어요. 깨닫기에 시를 쓰고, 시를 쓰다가 깨닫지 싶어요. 깨달으려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겠지요. 깨닫기에 살아가고, 살아가며 깨달아요. 깨달으려고 밥을 짓지 않고, 깨닫기에 밥을 지으며, 밥을 지으며 깨달아요.


.. 결혼해서 애를 낳아봐야 인생을 안다구요? / 당신은 인생 좀 아세요? ..  (활짝 핀 살코기의 공허함을 아세요?)


  아이들이 개구지게 놉니다. 이른아침부터 늦은저녁까지 마음껏 놉니다. 이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넣는다면, 나는 이 아이들이 얼마나 개구지고 얼마나 힘차며 얼마나 맑은 넋인가를 낱낱이 깨닫지 못했으리라 생각해요. 하루하루 새롭게 살아가는 아이들 모습에 비추어 내 삶을 헤아리고, 내 삶에 비추어 아이들 마음을 헤아려요.


  저녁거리로 텃밭에서 돗나물을 큰아이하고 뜯습니다. 내 손은 아이 손이고, 아이 손은 내 손입니다. 아이가 뜯는 돗나물은 싱그럽게 바구니에 담기고, 내가 뜯는 돗나물 또한 싱그럽게 바구니에 담겨요. 이 돗나물은 벌써 봄부터 가을까지 우리 집 밥거리가 됩니다. 날마다 조금씩 자라며 줄기를 뻗는 돗나물을 날마다 이곳저곳 돌아보며 조금씩 뜯어 먹습니다. 돗나물은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돗나물이 돼요.


  쑥을 뜯을 적에도, 모시풀을 뜯을 적에도, 부추풀을 뜯고 까마중풀을 뜯으며 망초풀을 뜯을 적에도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으레 망초풀을 어찌 먹느냐고 하지만, 나는 ‘왜 못 먹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왜 못 먹을까 하고 생각한 지 퍽 오래 흐르고서야 비로소 망초풀 한 닢 뜯어 잘근잘근 씹었고, 망초풀은 망초풀맛이 나네, 하고 생각하면서 나물비빔을 하거나 풀물을 짜서 먹습니다.


.. 우리는 탐구하지 않을 때 시간을 잃어버린다 / 밭갈고 씨뿌리는 농부의 손길을 배우지 않을 때 / 내 안에 깊이 생각하는 얼굴이 없을 때 / 시간을 잃어버린다 / 우리가 저 강물 저 나무그늘에게 고마워할 때 / 세월의 무덤에 환한 창문을 보리라 / 더 이상 시간을 놓치진 않으리라 / 강렬한 오늘을 살기 위해 나는 사랑하련다 / 내 가족과 벗들을 겨울이 오는 도시를 / 내게 주어진 상황과 고달픔을 / 서럽게 죽고 사는 모든 것을 안으련다 ..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창문, 입시생을 위해)


  이제 물을 덥힙니다. 큰아이를 씻길 생각입니다. 작은아이도 같이 씻길까요. 그러고 나서 나도 씻을까요. 나는 내 몸을 씻으며 빨래를 할 수 있겠지요. 날마다 새벽 아침 낮 저녁 밤, 이렇게 조금씩 손빨래를 하면 빨래가 천천히 알맞게 마르고, 굳이 기계빨래를 하지 않아도 좋아요. 날마다 틈틈이 물을 만지면서, 이 물방울이 내 몸과 내 삶에 얼마나 고마우며 즐겁고 반가운가 하고 생각해요. 물을 만지고 물을 마셔요. 물을 다루고 물로 씻겨요. 물을 헤아리고 물을 누려요.


  물을 따숩게 덥히며 내 마음을 따숩게 덥힙니다. 아이들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마실을 다녀온 다음 찬물로 내 몸을 씻으면서 머리를 시원하게 식힙니다. 좋은 마음이 되고 착한 머리가 되며 슬기로운 몸이 되자고 생각합니다. 맑은 눈길이 되고 밝은 눈빛이 되며 고운 눈높이가 되자고 생각합니다.


  씻기 앞서, 두 아이는 또 개구지게 놉니다. 아마, 씻고 나서도 다시금 개구지게 놀겠지요. 말끔히 씻은 다음에도 땀을 낼 테고, 이렇게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흐르며 이 아이들은 무럭무럭 클 테며, 나 또한 아이들 곁에서 사랑이 무엇인가 그리면서 크겠지요. 이 모두를 사랑하는 하루란 밝고 따스합니다. (4345.9.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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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일반판) 문학동네 시인선 2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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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글쓰기
[시를 말하는 시 3]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 책이름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 글 : 허수경
- 펴낸곳 : 문학동네 (2011.1.20.)
- 책값 : 8000원

 


  어떻게 살아가는 재미로 시를 쓸까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생각하는 사랑으로 시를 쓸까 헤아려 봅니다.


  누군가는 시를 머리로 쓰겠지요. 누군가는 시를 이리저리 글과 지식을 엮어서 쓰겠지요. 누군가는 살아가는 하루가 고스란히 시로 태어나겠지요. 누군가는 꿈꾸는 삶이 하나둘 시로 거듭나겠지요.


  시 아닌 다른 글이라 해서 이러쿵저러쿵 찧고 빻듯 쓰지 못합니다. 시험문제를 만들면서 문제 글을 쓸 적이라 하더라도 아무렇게나 글을 만들거나 쓰지 못합니다. 아이들마다 따분하다고 일컫는 ‘교장선생님 아침모임 말씀’이라 한들 아무렇게나 만들거나 써서 읽지 못합니다. 대통령이 내놓는 글이나 경찰총장이 내놓는 글이나 대법원 판결글이라 해서 아무렇게나 만들거나 쓰지 못해요.


  그리운 벗한테 띄우는 글월을 아무렇게나 꾸미거나 쓰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어버이한테 띄우는 글월을 아무렇게나 짜깁기하거나 쓰지 못합니다. 반가운 옆지기한테 띄우는 글월을 아무렇게나 때우거나 쓰지 못합니다.


  어떤 글이라 하더라도 내 모든 삶을 기울여서 씁니다. 어떤 글이라 하더라도 내 모든 마음이 찬찬히 스며듭니다.


.. 유전인자 관리하던 실험실도 잠기고 그 안에서 태어나던 늑대들도 잠기고 / 나의 도시 나의 도시 울고 그 안에서 그렇게 많은 전병이나 만두를 빚어내던 이 방의 식당도 젖고 ..  (나의 도시)


  밤과 새벽에 빗줄기가 들었습니다. 밤에는 잠결에 빗소리를 들으며 생각합니다. 마당에 뭐 내놓아서 비에 젖을 만한 무언가 있나, 하고. 없지? 하고 생각하며 다시 차분히 꿈나라로 접어듭니다. 새벽에는 잠결에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새벽에 비가 와서 마당이 젖으면 빨래를 해서 널기 나쁜데.


  하늘에 낀 먼지를 씻고, 나무들 잘 자라라며, 비가 내려요. 하늘을 덮은 때를 벗기고, 풀들 잘 크라며, 비가 찾아와요.


  사람들은 나무와 이웃하면서 비를 즐깁니다. 사람들은 풀과 벗삼으며 비를 누립니다.


.. 차비 있어? / 차비는 없었지 / 이별은? / 이별만 있었네 ..  (수수께끼)


  오늘은 모처럼 빨래기계를 씁니다. 여러 날 바깥마실을 마치고 돌아온 터라 빨래감이 많습니다. 내 어버이와 옆지기 어버이, 곧 아이들 할머니랑 할아버지를 만나러 멀디먼 길을 버스와 기차에서 시달리느라 모두들 고단하고 지칩니다. 손빨래를 하며 몸을 풀고 마음을 가다듬을 만합니다만, 오늘은 늦잠을 자고 싶어요.


  늦잠을 자더라도 새벽에 쌀을 씻어서 불립니다. 게으름을 부리더라도 아침에 마른표고버섯 냄비에 넣고 물에 불립니다. 음성 할머니가 표고버섯을 손수 길러 따고는 예쁘게 말려서 봉지에 담아 주셨습니다. 마른표고버섯을 한손으로 움켜쥐어 냄비에 넣으며 내 할머니 손길을 떠올립니다. 내 할머니는 어떤 마음을 이 표고버섯에 담아서 기르고 따서 갈무리했을까요. 어떤 꿈을 지으면서 이 표고버섯을 예쁘게 말리셨을까요. 내 할머니가 품은 마음과 빚은 꿈은 옆지기와 아이들한테 솔솔 스며들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별도 구워 먹으리라 했어요 / 70년대 초반 / 가장 어린 나 가운데 하나가 별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어요 / 뒤에서 내려다보면 먹다 만 고구마 형상이었어요 /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곰별자리였어요 ..  (고구마별)


  먼 바깥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택시길에 참으로 홀가분합니다. 기차길을 끝내고 버스길을 끝낸 우리 식구는 읍내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옵니다. 짐이 무겁고 몸이 무거우며 군내버스가 끊기기도 합니다. 시골에서 택시를 타는 사람은 으레 할머니랑 할아버지라 하지만, 우리 식구는 자가용을 굴리지 않으니 즐겁게 택시를 탑니다. 굳이 우리가 자가용을 몰 까닭은 없으니까요. 애써 우리가 자가용을 굴리느라 이쪽에 마음을 기울일 까닭은 없으니까요.


  택시에서는 에어컨 아닌 창문바람을 쐽니다. 오랜만이로구나 싶습니다. 여러 날 기차와 시외버스에서 에어컨바람에 시달린 탓인지 창문바람이 더없이 싱그럽습니다.


  택시는 고흥읍을 벗어나 포두면을 달립니다. 포두면을 벗어나 도화면으로 접어듭니다. 포두면을 달릴 적까지도 창밖 풀숲에서 풀벌레 노랫소리를 못 듣습니다만, 도화면으로 접어드니 바야흐로 풀벌레 노래잔치입니다. 달리는 택시에서도 풀벌레 노랫소리가 온몸과 온마음으로 훌훌 스며듭니다.


  눈을 틉니다. 귀를 틉니다. 마음을 트고 몸을 틉니다. 그동안 갇히거나 막히거나 닫힌 구멍을 틉니다.


.. 석유를 찾기 위해 피곤한 사내들이 바닷속으로 철의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구멍을 뚫어야 지속되던 문명이 있었다고, 우주의 먼 곳에서 우주의 역사를 기록하던 빛이 있었다 // 콩나물시루도그곳에두었어요어떤콩은썩어서뿌리조차아기처럼젖을보채다잠이들었지만 ..  (오후)


  옆지기는 아이들을 씻깁니다. 나는 배앓이를 합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밥을 차리기 힘들 듯해 읍내 중국집에 들렀는데, 옆지기가 건넨 찬콩국수 가락이 속에서 부글거리며 괴롭힙니다. 찬국수도 동치미도 안 받는 내 배는 여러 날 바깥밥·바깥바람에 휘둘리다가 마지막에 찬기운 머금은 국숫가락을 만나니 펑 하고 터진 듯합니다.


  아이고 배야 하며 똥을 누다가 문득, 이렇게 뱃속을 시원스레 털면 한결 느긋하게 잠들면서 새 하루를 반가이 누리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그렇구나, 배앓이는 나를 보살피려고 찾아오는구나.


  아이들은 몸을 씻고 나서도 뛰어놉니다. 아이들도 고단한 몸일 텐데, 새롭게 땀이 돋을 만큼 뛰어놉니다. 참 놀라운 아이들이네, 하고 생각하다가, 나도 아이들 나이였을 적에는 그야말로 놀라운 아이들답게 끝없이 놀고 뛰고 날고 기며 살았잖니, 하고 떠오릅니다.


  놀 수 있을 때까지 놉니다. 놀다가 까무룩 잠들 때까지 놉니다. 놀 수 있는 모든 힘을 씁니다. 놀다가 까무룩 잠들도록 힘이 다 떨어질 때까지 놉니다.


.. 무리를 이루며 사는 우리들은 무엇보다 무리에 속할 이들의 안녕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살아남기 위한 미덕. 흩어지면 육식동물의 표적이 되므로 우리라는 종이 이 지상에서 태어나던 처음부터 배려라는 미덕을 우리는 본능처럼 갖는다. 그 본능은 인간이 우리를 사육화했던 역사 속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  (카라쿨양의 에세이)


  시를 쓰는 마음을 헤아립니다. 아이들과 같은 넋이 되어 시를 쓰는 이라면, 아이들이 온힘을 다 내어 놀듯, 온힘을 다 내어 시 한 줄을 쓰겠지요. 아이들 보살피는 어버이와 같은 넋이 되어 시를 쓰는 이라면, 아이들 노는 양을 말끄러미 지켜보며 하루를 더 기운내어 열고 누리듯, 씩씩하고 다부지게 시 한 줄을 쓰겠지요.


  어느 넋이 좋고 어느 넋이 나쁘다고 따질 수 없습니다. 그저 저마다 스스로 즐기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가난을 즐기고 재산을 즐깁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쳇바퀴를 즐기고 한갓짐을 즐깁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바쁜 톱니바퀴를 즐기고 따사로운 사랑을 즐깁니다. 즐기는 결이 고스란히 시로 태어납니다. 즐기는 꿈이 하나하나 시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즐기는 넋이 시나브로 시라는 옷을 입고 환하게 빛납니다.


.. 아마도 내가 당신을 잊어버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야 이렇게 잠 속에 든 당신 옆에 내가 누워 있겠는가. 이제 당신을 나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  (여기는 그림자 속)


  허수경 님은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2011)이라는 시집 하나 내놓습니다. 책이름에 ‘빌어먹을’이라니, 스스로 무엇을 ‘빌어먹을’이기에 이렇게 시를 내놓을까 아리송합니다. 그러나, 참말 허수경 님으로서는 ‘빌어먹을’밖에 없어 이렇게 시를 쓰고 시집을 내겠지요. 스스로 ‘차가운 심장’이라 느끼며 삶을 맞아들여 누리니까 ‘차가운 심장’ 이야기를 시로 쓰고 책으로 내겠지요.


.. 저녁에 흙을 돋우다가 나비를 보았네 / 저녁에 흙을 부드럽게 만져 / 막 나오는 달리아를 편하게 하려다가 / 나비를 보았네 ..  (저녁에 흙을 돋우다가)


  허수경 님 스스로 흙을 만질 때에는 ‘흙을 만지는’ 시를 씁니다. 허수경 님 스스로 누군가와 헤어질 때에는 ‘헤어지는’ 시를 씁니다. 눈물을 흘리는 날에는 ‘눈물 흘리는’ 시를 씁니다. 공항에 머물 적에는 ‘공항에 머물던’ 시를 써요.


  더 좋은 삶이란 없고 더 나쁜 삶이란 없습니다. 스스로 즐기는 삶일 뿐입니다. 스스로 즐기는 삶이 스스로 즐기는 시로 태어납니다.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기에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는 시를 쓰겠지요. 그리운 누군가를 잊기에 ‘그리운 누군가’를 잊는 시를 쓰겠지요.


  나는 고즈넉한 시골마을에서 두 아이랑 복닥이면서 요모조모 살림을 꾸립니다. 곧, 내가 시를 쓸 적에는 고즈넉한 시골마을 삶을 드러내고, 두 아이랑 복닥이는 사랑을 드러내며, 요모조모 꾸리는 살림을 빛냅니다. 그래요, 나는 이 삶을 좋아하기에 이렇게 살아요.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삶을 마음껏 누리면서 내 웃음꽃을 이곳에서 길어올려요. 내가 바라는 꿈은 내가 좋아하는 삶터에서 누리는 이야기 그대로 이루어져요. 시를 쓰는 사람은 삶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4345.9.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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