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삼베 치마 - 권정생 동시집
권정생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곱게 즐거운 꿈을 글줄에 담아서
 [어린이책 읽는 삶 17] 권정생, 《동시 삼베 치마》(문학동네,2011)

 


- 책이름 : 동시 삼베 치마
- 글·그림 : 권정생
- 펴낸곳 : 문학동네 (2011.7.14.)
- 책값 : 14800원

 


 (1) 동시꾸러미 《동시 삼베 치마》 읽는 삶


 아이가 밤에 쉬 마렵다며 잠에서 깨면, 옆지기는 이때에 아이보고 스스로 일어나서 오줌그릇으로 걸어가서 누이도록 시킵니다. 옆방에 불을 켜거나 손전등을 켜라고 시킵니다. 오줌을 누고 난 아이가 스스로 불을 끄고 잠자리에 다시 들며 이불을 스스로 여미도록 시킵니다. 아이는 제 어머니가 이처럼 시키면 잘 따릅니다.

 

 아이는 곁에 아버지가 있으면 아버지를 불러 안아 달라 이야기합니다. 오줌을 누고는 바지를 올려 달라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안쓰러이 여기고, 이 아이가 앞으로 한두 살 더 먹으면 이렇게 안기도 벅차도록 자라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아이를 안고 다닐 수 있는 날이란, 밤오줌 누는 아이를 안고 자리에 눕히는 일이란, 그야말로 몇 번 안 남았으리라 느껴요.

 

 아버지가 잘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아이가 스스로 씩씩하게 크도록 이끌어야 할 어버이로서 제대로 못한다고 느껴요. 제대로 아이 마음으로 다가서지 못할 뿐더러, 아이 키높이에 맞추며 바라보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 그라곤 / 고것 말있다 / 한창 보리고갯때 / 칡뿌리떡 쫌 안 준다꼬 / 쌈한 뒤 / 상굿 말 안 하고 지난 / 가스나아야! ..  (쑥절편)


 집안일을 한대서 더 낫다 싶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집안일을 안 한대서 더 못난 아버지가 아닙니다. 집안일을 군말없이 맡으면서 아이들도 알뜰히 보살핀다면 더 낫다 싶은 어머니일까요. 집안일은 허술하고 아이들도 알뜰히 아낄 줄 모른다면 더 못난 어머니일까요.

 

 사람이 먹는 감알을 주렁주렁 달 때에 좋은 감나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먹을 감알을 거의 맺지 못하니까 밉거나 나쁜 감나무이지 않습니다.

 

 가을걷이 코앞에 노란 들판을 휩쓰는 메뚜기는 나쁜 벌레일까요. 한창 무리익는 논에 무시무시하게 찾아오는 드센 비바람은 나쁜 자연일까요. 한겨울 찬바람이나 한여름 뙤약볕이 나쁘다고 느끼지 않아요. 여름날 끝없는 빗줄기나 겨울날 펑펑펑 흰눈이 나쁘다고 느끼지 않아요. 밭을 금세 집어삼키는 풀포기이든, 나무를 타고 오르는 덩굴줄기이든, 저마다 살아가는 뜻과 꿈과 넋이 있다고 느껴요.


.. 난 이렇게 / 눈이 커다만 말라굉이고 / 그래도 / 고까옷 입은 새야 / 나하고 동무해 줄래? ..  (고까운 입은 새야)


 나는 어떤 마음이 되어 우리 집 살붙이를 바라보는가 헤아립니다. 내 옆지기는 어떤 마음으로 나와 두 아이를 바라보는가 돌아봅니다. 두 아이는 저마다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저희 어버이를 바라볼는가 곱씹습니다.

 

 어떤 꿈이 우리 보금자리에 깃들도록 하는가요. 어떤 사랑이 이 보금자리에 감돌도록 하는가요. 어떤 빛이 이곳과 이 마을에 서리도록 하는가요.

 

 날마다 아침·낮·저녁으로 아이들 기저귀를 빨아 말리고 걷어서 갭니다. 첫째 아이는 세 해 남짓 기저귀를 내놓았고, 첫째 아이 기저귀 빨래가 끝나니, 곧이어 둘째 아이 기저귀 빨래가 나옵니다. 아침에는 엊저녁 기저귀 빨래를 갭니다. 낮에는 아침 빨래 기저귀를 갭니다. 저녁에는 낮 빨래 기저귀를 갭니다.

 

 아주 마땅히 날마다 집식구 밥을 헤아립니다. 오늘 하루 네 식구 무얼 먹으며 좋은 숨결 몸뚱이에 깃들도록 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기쁘게 먹으며 즐거이 살아가면 좋겠다고 꿈꿉니다. 그런데, 나는 이 밥을 조금 더 살뜰히 돌아보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밥을 깊이 헤아리지 못한 지난날이었기 때문일까요. 밥을 찬찬히 사랑하지 않던 나날이 오래도록 쌓였기 때문일까요.


.. 다섯 밤 자고 나서 / 양돼지 잡던 날 / 분홍치마 입은 누나는 / 꼬꼬재배 절하고 / 시집갔다 // 지난밤 / 꽃주머니랑 / 종이배랑 / 만들어 주며 / 찔끔찔끔 울던 누나 ..  (꽃가마)


 국민학생 때에는 노느라 바쁘니, 틈틈이 심부름을 한다지만 막상 부엌일을 선뜻 나서며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사내 아닌 가시내였을 때에도 바깥에서 뛰놀기만 할 수 있었을까 궁금하지만, 나 스스로 날마다 먹는 밥을 스스로 마련하거나 살붙이하고 나누도록 품과 땀과 겨를을 들인다는 대목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으로 지내는 동안, 오직 더 높다 하는 대학교에 붙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도시락만 날름 받아먹을 뿐, 스스로 도시락을 싼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에는 바깥밥 사먹기에 빠져듭니다. 그나마 신문보급소 배달 일꾼으로 지내면서 도시락을 손수 쌉니다. 그러나 안 하던 일은 익숙하지 않기 마련이라, 도시락 싸기는 이내 그만두고, 신문자전거를 타고 대학교와 보급소를 싱싱 달리면서 신문보급소에서 손수 낮밥을 차려 먹었어요.

 

 출판사에서 일하며 도시락 싸기를 다시 하는데, 밥이야 어릴 적부터 늘 했으니 어려울 일 없는데, 반찬 해서 싸는 일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밥하기에 마음과 품과 겨를을 내 버릇하지 않는 삶이었으니, 내 입맛이든 함께 밥먹는 사람들 입맛이든 돌아보지 못해요. 기쁘게 나눌 밥상을 꿈꾸지 못합니다.


.. 탑촌 마을에 / 봄이 와도 / 누나가 없어 / 쑥나물이 귀해졌단다 ..  (쑥나물)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꾸릴 삶을 생각하지 못해요. 착하게 누릴 삶을 꿈꾸지 못해요. 고맙게 즐길 삶을 헤아리지 못해요. 밥이라 한다면, 아름답게 꾸리는 삶에 아름답게 나누는 밥입니다. 옷이라 한다면, 착하게 누리는 삶에 착하게 입는 옷입니다. 집이라 한다면, 고맙게 즐기는 삶에 고맙게 보듬는 집이에요.

 

 나는 어린 나날부터 아름답게 꾸릴 삶과 밥, 착하게 누릴 삶과 옷, 고맙게 즐길 삶과 집을 듣지 못하고 배우지 못했으며 느끼지 못했어요.

 

 밥상에 반찬을 열 몇 가지 올려야 하지 않아요. 반찬은 소금과 간장으로도 넉넉해요. 들판과 멧자락에서 풀을 뜯어서 먹을 수 있어요. 곡식가루를 알맞게 오래 씹으며 먹을 수 있어요. 누런쌀을 백 번 넘게 야금야금 씹으며 먹을 수 있어요.

 

 가만히 돌이키면, 날쌀 그대로 먹을 때에 어떤 맛인가를 겪지 못했습니다. 둘레 어른 가운데 이렇게 먹는 사람이 없기도 했지만, 왜 나는 나 스스로 이 쌀을 굳이 물에 끓이지 않고 날로 먹어도 되는 줄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감이든 오이이든 능금이든 다들 날것 그대로 먹는데. 다만, 무와 배추를 왜 고추가루를 잔뜩 넣어 맵고 시큼하게 먹어야 하는가 궁금했습니다. 절이지 않고 날것으로 먹으면 될 텐데. 왜 김치로만 먹어야 하지?


.. 나랑 살잖고 혼자 갔기 때매 / 나 없이도 누난 좋아 갔기 때매 // 코딱지 동네 / 코딱지 동네! ..  (누나 사는 동네)


 인천에서 태어난 나와 형은 내 어버이 태어난 충청남도 당진이나 예산에 찾아가곤 했습니다. 인천에서는 달걀이 ‘닭이 낳은 알’인 줄을 알기는 해도, 달걀이라는 이름 때문에 알 뿐, 막상 닭이 알을 낳는 모습이라든가, 닭이 알을 품는 모습이라든가, 닭우리에서 달걀을 꺼내어 먹는다든가, 달걀을 품은 암탉이 스물하루 만에 새끼를 까서 병아리로 키우는 모습이라든가, 찬찬히 바라본 적이 없습니다. 내 어버이를 낳은 어버이가 태어나 자라던 시골집에서 ‘닭이 낳은 알’을 처음으로 느꼈어요.

 

 국민학교 다니던 때에 학교 사육장을 사학년부터 돌보고 청소하는 일을 맡았어요. 이때에 두 번째로 달걀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어요. 닭한테서 고맙게 얻는 달걀이지, 공장에서 찍어내는 달걀이 아니었어요. 닭공장에서 암탉이 알 낳는 기계처럼 부린다지만, 공장에서 척척 뿜어내는 달걀이 아니라 ‘목숨 있는 암탉’이 ‘제 목숨을 나누어 내놓는 달걀’이었어요.

 

 사육장 청소당번을 육학년으로 끝내지 않고 중학생 때에도 이었다면, 내가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먹는 목숨’을 더 깊고 더 넓게 살피는 눈썰미를 스스로 찾으려 했을 수 있겠지요. 아니, 나 스스로 내 삶을 더 너그럽게 아끼며 사랑했다면, 나 스스로 ‘먹는 목숨’과 ‘먹는 삶’을 옳게 깨우치려고 힘썼겠지요.


.. 매운 바람은 불고 / 곡식은 거두어졌는데 / 허수아비 그대로 / 지키고 섰다 ..  (허수아비)


 인천에서 다닌 초·중·고등학교(1982∼1993)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교사들이 몽둥이를 휘두르고 손찌검과 발길질이 춤추었습니다. 동무들은 툭하면 다툼질이자 주먹질이고, 따돌리기와 괴롭히기는 끝이 없었어요. 교사들은 시험성적 높이는 데에만 마음을 쓸 뿐, 푸른 사람이 푸르게 빚는 꿈을 다독이지 못했어요. 둘레 어른들은 내 또래 동무들한테 버젓이 까치담배를 팔고 술을 팔았어요. 또래 동무들은 ‘아버지 심부름’이라는 핑계조차 안 대었어요. 그냥 ‘술 주세요.’ 하면서 술을 사다가 보충수업과 자율학습 땡땡이 치고는 어디에선가 숨어서 마셨어요. 나는 중·고등학교 여섯 해를 다니며 ‘생각하기’를 스스로 멈추었어요. 도시락도 밥도 옷도 집도 삶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폭력과 바보짓과 시험공부로만 가득하고, 햇볕 한 줌 쬘 수 없는 여섯 해를 따돌리기와 괴롭히기에서 홀가분하게 살아남자면, 아니 이런 구렁텅이에서 용케 살아남자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 생각하기’로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루 빨리 이곳(인천)을 떠나자, 어서 자라 이곳(인천)하고 멀리 떨어진 데에서 살자, 앞으로 이곳(인천)에서 무슨 돈을 벌 수 있겠니, 동네 깡패와 건달이 싫으며 무섭고, 그렇다고 스스로 자연을 찾아 길을 나선다는 꿈은 듣도 보도 못한 채 스무 살로 건너뛰는데, 이렇게 건너뛰면서 거쳐야 하는 곳은 군대입니다.

 

 남자이니까, 남자라서, 군대라는 스물여섯 고개를 어떻게 넘어야 하는가로 까마득한 나머지, 삶을 살리는 밥이든 삶을 북돋우는 옷이든 삶을 사랑하는 집이든, 하나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푸른 나날을 흘리고 말아요. 사람을 죽이는 재주를 가르친다며 주먹다짐과 우격다짐이 넘실거리는 스물여섯 고개 군대에서 젊은 나날을 보내면서, 또다시 ‘삶·사람·사랑’하고는 등을 진 채 생각을 또 멈춥니다.


.. 곰방대로 얻어맞고 / 담뱃재만 뒤집어쓰고 // “그래도 넌 좋니?” // “안 좋으면 어쩌니 / 본래 재떨이가 된 걸 뭐” ..  (재떨이)


 삶으로 읽는 책입니다. 지식으로 읽는 책이 아닙니다. 내 삶에 걸맞게 내 삶을 이끄는 책을 만납니다. 내 삶을 스스로 일굴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애써 책에 기대지 않아요. 스스로 땀을 흘리고 스스로 두 다리로 우뚝 서면서 살아가요.

 

 누군가는 종이책을 읽습니다. 누군가는 흙책을 읽습니다. 누군가는 전자책을 읽는다지만, 누군가는 호미책이나 괭이책이나 부엌칼책이나 기저귀책을 읽어요. 훌륭하다는 이름 박힌 종이책이나 전자책을 읽는대서 책읽기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 ‘독서’는 ‘지식읽기’예요. 책읽기라는 이름은 ‘삶읽기’일 때에 비로소 걸맞습니다.

 

 나는 아직 삶읽기를 올바로 할 줄 모릅니다. 삶읽기를 하고픈 꿈으로 하루하루 맞이할 뿐입니다. 그래서 나 또한 아직 삶읽기 아닌 지식읽기에 얽매인다고 느껴요. 지식읽기를 말끔히 털지 못했구나 싶어요. 먼저 삶읽기를 할 수 있어야 사람읽기를 합니다. 사람읽기를 한다면 바야흐로 사랑읽기를 할 수 있어요.

 

 권정생 할아버지 옛날 동시꾸러미를 책으로 만나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나는 이 동시꾸러미를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나는 이 동시꾸러미를 읽으며 우리 살붙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동시꾸러미를 다 읽고 나서 내 삶을 얼마나 돌볼 수 있을까.

 


 (2) 권정생 할아버지와 안도현 시인


 권정생 할아버지가 할아버지 아닌 젊은이였을 때에 적바림해 두었다는 동시를 그러모은 《동시 삼베 치마》를 읽습니다. 권정생 할아버지가 흙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비로소 책으로 나온 《동시 삼베 치마》인데, 아마 흙으로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도무지 책으로 나올 수 없었을 테지요. 권정생 할아버지와 이오덕 할아버지가 주고받은 편지 또한 두 분 모두 흙으로 돌아가고도 한참 지나고 또 한참 지나고 나면 책으로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혼자서, 또 동무하고 나누기만 할 뿐,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얘기일 때에는, 책으로 내지 않는 일이 아름답다고 느껴요.

 

 어떻든 《동시 삼베 치마》는 우리 앞에 선보입니다. 이 글꾸러미가 책으로 나왔대서 ‘빛을 보았다’고는 할 수 없어요. 권정생 할아버지는 부러 이 글꾸러미를 내놓지 않았으니까요. 선보일 마음이 아니라 가슴에 묻을 마음이었고, 드러낼 뜻이 아니라 곱게 아로새기려는 뜻이었겠지요.


.. 돌담 너머 / 대추나무 밑이 / 따사해서 / 아이들이 꼬마 살림 차렸다 ..  (소꼽놀이)


 책끝에 안도현 시인이 덧단 글을 읽으며 가슴 한켠이 싸합니다. 권정생 할아버지가 흙으로 돌아가고 난 다음에도 권정생 할아버지 마음을 이토록 몰라주어도 되나 싶어 가슴 한켠이 싸합니다.

 

 안도현 시인은 “남안동IC로 빠져나가면 단박에 조탑동 선생님 댁에 닿는다. 하지만 그냥 지나친 적도 많다.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 마음으로 반성문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두세 평쯤 되는 선생님의 방은 딱 한 사람이 누울 만한 잠자리,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게 쌓인 책, 조그마한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소반 하나(185∼186쪽)” 하고 말하는데, 권정생 ‘선생님’ 아닌 ‘할아버지’가 수수하게 살아간대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 앞에서 부끄럽다고 느낄 까닭이 없어요. 가난하게 산대서 더 거룩하지 않으니까요. 스스로 돈과 물질문명을 안 누린대서 더 훌륭하지 않으니까요.

 

 권정생 할아버지는 권정생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결대로 사랑하며 살아가요. 권정생 할아버지는 당신 몸에 맞게 당신 마음을 돌보면서 살아가요. 권정생 할아버지로서 가장 마음이 홀가분하면서 따뜻하고 넉넉한 살림을 꾸릴 뿐이에요. 안도현 시인은 안도현 시인대로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며 누리고픈 대로 삶을 일굽니다.


.. 바위 꼭대기에 올라서 보면 / 아랫바닷물도 파아랗고 / 윗하늘 빛도 파아랗고 ..  (바다와 하늘)


 안도현 시인은 “나는 나의 아파트 평수와 승용차, 냉장고 속에 든 식탐의 덩어리들, 그리고 신발장의 수많은 신발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자꾸 높은 곳을 쳐다보며 사는데 선생님은 자신을 낮추기 위해 살고 계신다는 생각! 그래서 나는 괴로웠다(185쪽).” 하고 또 이야기하지만, 이 말도 참 안타깝습니다. 안도현 시인이 ‘높은 곳’을 바라본다고요? 아니에요. 안도현 시인은 물질문명만 바라보잖아요.

 

 물질문명은 높은 곳이 될 수 없어요. 그리고, 권정생 할아버지처럼 살림을 꾸리는 일은 ‘낮은 곳’이 되지 않아요. 더더구나, 권정생 할아버지처럼 살림을 돌보는 일이 ‘높은 곳’이라 할 수 없어요.

 

 저마다 꾸리는 삶이에요. 저마다 제 마음과 꿈과 사랑에 따라 살아가는 나날이에요.

 

 안도현 시인이 ‘승용차를 버리지 않는’대서 나쁜 사람일 수 없어요. 어떤 넋과 얼과 마음으로 승용차를 타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권정생 할아버지는 안도현 시인을 나무라지 않아요. ‘텅텅 빈 마음으로 허우적거리듯 물질문명에서 맴도는 사람’을 슬프게 바라볼 뿐이에요. 찬찬히 타이르면서 ‘좋은 곳’으로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 뿐이에요.


.. “난 누렁 물감 가지고 / 농사꾼 아빠들이 지어 논 / 곡식들로 갈 테야” // 가을바람들이 / 가만가만 얘기하고 / 제각기 흩어져 갔다 // 산이랑 들판을 / 곱기곱기 칠했다 ..  (가을바람)


 안도현 시인은 커다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가 보지요. 그래, 커다란 아파트이든 작은 아파트이든 무엇이 대수롭겠습니까. 하나도 대수롭지 않아요. 큰 아파트에서 살면 나쁘고, 작은 아파트에서 살면 좋은가요.

 

 오늘날은 거의 모두 아파트에서 살며, ‘아파트에서 아직 못 사는’ 사람은 아파트에서 살아가려 합니다. 그러면, 안도현 시인은 이런 사람들 마음을 달래면서 타이를 만한 글을 쓰면 되지요. 스스로 부끄럽다고 여길 일이 없어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요. 스스로 좋아하는 곳에서 스스로 사랑할 사람을 아끼며 글을 써서 사랑꽃을 피워야지요.


.. 딴 아이들이 두 자 쓸 동안 / 한 자밖에 못 쓰는 / 몽당연필 ..  (몽당연필)


 권정생 할아버지‘처럼’ 산다든지, 권정생 할아버지‘와 똑같이’ 살아야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에요. 안도현은 안도현처럼 살고 권정생은 권정생처럼 살 뿐이에요.

 

 권정생 할아버지가 늘 말씀하셨잖아요. 그렇게 ‘권정생이 부럽고 거룩하며 훌륭하다’면 ‘나처럼 아파’해 달라고요. 권정생 할아버지가 받아들여야 하는 아픈 몸뚱이를 함께 물려받으면서 아파해 달라고 말씀하셨어요.

 

 권정생 할아버지가 읊은 이야기만 듣고 부끄러이 여길 까닭이 없어요. 권정생 할아버지는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이에요. 이 나라 아이들이 걱정스럽고, 이 나라 아이들을 보살피는 어른들이 근심스러우니까,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이에요.

 

 해야 할 말을 할 뿐이니까, 에돌아 말하지 않아요. ‘승용차를 버려야 이라크 파병을 안 할 수 있다’는 말이 고갱이예요.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어떠할까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떨칠 수 있을까요. 4대강사업은 어떻지요. 국가보안법은 어떠한가요. 사람들 스스로, 그러니까 나 스스로 무엇을 어디에서 어떻게 해야 이 모든 슬픈 쇠사슬을 훌훌 털거나 벗을 수 있을까요.


.. 들길 바람 부는 숲 그늘에 / 코스모스 엄마도 없이 / 혼자 핐다 // 코스모스 고향은 / 서양 먼 나라 / 바다 건너 산 너머 / 아득히 먼 곳 // 달빛 고운 밤이면 / 고향 생각나 / 엄마 보고 싶어 / 울기도 하고 // 헤어진 동무들 / 꿈도 꿔 보고 // 그러다가 / 아침 해 화안히 뜰 때 / 여태껏 키워 준 / 이곳 강변이 고마워 // 코스모스 / 엄마 아빠 없어도 / 혼자 배시시 웃는다 ..  (코스모스)


 권정생 할아버지는 대단한 어른이 아니에요. 권정생 할아버지는 온삶을 아픔을 붙안으며 누린 어른이에요. 당신과 살가웠던 이오덕 할아버지라든지 전우익 할아버지 또한 대단한 어른이 아니에요. 이오덕은 이오덕대로 온삶을 수많은 일을 붙잡으며 누린 어른이고, 전우익은 전우익대로 온삶을 흙땅을 붙들며 누린 어른이에요. 저마다 가장 잘 할 수 있고, 가장 사랑할 수 있으며, 가장 누릴 수 있는 길을 걸었어요. 이 마음바탕이 삶바탕이 되고, 이 삶바탕이 사랑바탕이 되면서, 동무와 이웃을 곱게 껴안거나 어루만지는 빛줄기를 보았어요.


.. 아아니? / 호박 넝쿨 서로 고개 숙이고 / 사알짝 비키며 간다 ..  (호박 넝쿨)


 나는 《동시 삼베 치마》라는 동시책이 널리 읽히거나 두루 알릴 만한 동시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가만히 보면, 권정생 할아버지는 당신이 쓴 글을 더 널리 읽히거나 더 두루 알리려 한 적이 없어요. 몽당연필로 글을 쓰듯 겨우겨우 원고지 한두 장을 채운 권정생 할아버지는 이토록 아픈 몸으로도 꼭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말이 술술 흘러나왔어요. 술술 흘러나오는 말을 하나하나 그러모으면서 사랑꽃을 피우려 했어요.

 

 백만 사람이 읽든 천만 사람이 읽든 십만 사람이 읽든, 이렁저렁 널리 알려지거나 읽힐 만하지는 않다 싶은 권정생 할아버지 글이에요. 왜냐하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너무 껍데기와 겉치레에 얽매이잖아요.

 

 책은 지식이 아닌걸요. 책은 정보가 아닌데요. 책은 자격증이 아니잖아요. 책은 시험공부하고 동떨어져요.

 

 권정생 할아버지 동화책을 읽히는 어버이나 어른이 아이한테 독후감 숙제를 내놓으라 한다면, 권정생 할아버지 동화책을 왜 읽히는가 돌아봐야 해요. 동화책 독후감 숙제 때문에 권정생 할아버지 글을 읽힌다면, 얼마나 슬프며 모진 노릇인가요.

 

 명작이요 걸작이라서 권정생 할아버지 글을 읽히나요. 〈강아지똥〉을 그림책으로 만들고 만화영화로 만든다 해서 권정생 할아버지가 〈강아지똥〉에 담은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나요. 그림책과 만화영화를 보았기에 권정생 할아버지 넋과 눈물과 한숨을 읽나요.


.. 산은 숨을 쉬고 있다 / 산은 자라고 있다 // 그러길래 철마다 / 빨강 옷이랑 / 파랑 옷이랑 / 곱게 갈아입지 ..  (산)


 글과 그림과 만화로 민들레랑 강아지똥을 보아야 하지 않아요. 민들레와 강아지똥은 우리 둘레에 참 많아요.

 

 토박이 민들레는 얼마 없고 서양 민들레만 잔뜩 있다지만, 토박이 민들레는 언제부터 토박이 민들레였나요.

 

 박 아닌 호박은 언제부터 토박이 호박이었을까요. 감자는, 고구마는, 당근은, 토마토는, 배추는, 무는, 양파는, 고추는, 언제부터 이 나라 이 겨레가 즐기던 푸성귀나 먹을거리였을까요.

 

 권정생 할아버지 글을 새롭게 읽을 수 있기에, 고마우면서 반가운 《동시 삼베 치마》예요. 당신 목소리를 새삼스레 되돌아보면서 내 마음을 촉촉히 적실 수 있어, 기쁘면서 아름다운 《동시 삼베 치마》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 동시책을 읽은 내 삶은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가요.


.. 나팔꽃이 / 치마 입고 / 사진 찍어 달란다 // 해가 화다알짝 / 고울 때 찍어 달란다 ..  (나팔꽃)


 해가 화다알짝 곱습니다. 해님이 화안하게 예쁩니다. 해는 착하고 달은 착하며 구름은 착합니다. 누구한테나 똑같이 착한 손길입니다. 누구나 똑같이 착한 꿈과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그리고, 나는 누구한테나 똑같이 착한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 해님이 화안하게 / 쓸어 놓았다 // 두껍이가 외갓집 간다고 / 일찍 나섰다 ..  (아침길)


 1960년대에 쓴 글이든, 1980년대에 쓴 글이든, 2000년대에 쓴 글이든, 이 글이 더 좋거나 저 글은 좀 어수룩하거나 하고 가를 수 없습니다. 어떠한 글이든 읽는 그때에 나한테 가장 좋은 글입니다. 어떠한 글이든 내 눈으로 바라보고 내 귀로 들으며 내 가슴으로 스미는 그때에 가장 반가운 이야기예요.

 

 냉장고에서 며칠 묵은 시금치를 꺼내어 헹구고 무친다면, 오늘 먹는 시금치예요. 밭에서 막 따서 흙을 털어 곧바로 냠냠한다면, 이 또한 오늘 먹는 시금치예요.

 

 가게에서 산 시금치랑 밭에서 딴 시금치는 맛이 다르겠지요. 풀약과 비료를 머금은 시금치랑 흙하고 햇살을 먹은 시금치는 맛이 또 다를 테지요.

 

 스스로 어느 쪽이 더 좋은가를 생각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면 돼요. 어느 쪽으로 갔기에 더 모자라거나 바보스럽다 가를 수 없어요. 어느 쪽으로 갔으니까 더 훌륭하거나 거룩하다 여길 수 없어요. 내가 선 이곳에서 씩씩하며 튼튼하게 살아가면 즐거워요.


.. 설날은 / 착한 나라에서 / 오시는 손님 / 누구에게나 꼭 같이 / 나이 한 살 갖다주고 / 아름다운 꿈을 / 안겨다 준다 ..  (설날)


 곱게 즐거운 꿈을 글줄에 담아서 살아온 권정생 할아버지라고 느껴요. 밝게 따스한 넋을 글줄에 실으며 살아온 권정생 할아버지로구나 싶어요.

 

 이래저래 가르지 말아요. 요리조리 금을 긋지 말아요. 참말 가장 맑은 물을 마셔요. 참말 가장 빛나는 햇살을 먹어요. 참말 가장 구수한 밥을 먹어요.

 

 밤마다 번쩍번쩍 빛나는 서울이라지만, 서울이 이토록 밤별을 밀어내며 전깃불만 가득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서울에서도 밤하늘 빛무지개가 넘실거리던 때는 아주 먼 옛날이 아니에요. 아름다움이 몽땅 시멘트랑 아스팔트 밑에 묻혔다지만, 사람들 가슴에서까지 꽁꽁 묻히거나 갇히지는 않아요. 마음속에서 조용히 살아숨쉬는 사랑씨 곱게 보듬으면 좋겠어요. 서로서로 아끼면서 보살피는 어여쁜 사랑씨 착하게 보살피면 좋겠어요. 《동시 삼베 치마》를 고맙게 읽으면서 내 손길이 내 둘레 살붙이랑 동무랑 이웃 누구한테나 따사로우면서 너그럽도록 빙긋 웃으며 살아가면 좋겠어요. (4344.12.29.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주 선 나무
유경환 지음, 이혜주 그림 / 창비 / 200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으로 쓰는 시 한 줄
 [어린이책 읽는 삶 14] 유경환, 《마주 선 나무》(창작과비평사,2002)

 


- 책이름 : 마주 선 나무
- 글 : 유경환
- 그림 : 이혜주
- 펴낸곳 : 창작과비평사 (2002.11.30.)
- 책값 : 6500원

 


 (1) 삶이 드러나는 시


 모든 글에는 글을 쓴 사람 삶이 깃듭니다. 글쓴이 삶이 깃들지 않는 글이란 없습니다. 어떤 일을 해 보았다든지, 어디를 가 보았다든지 하는 삶부터, 아이들이나 동무들하고 어울리는 삶까지 두루 담는 글입니다. 먹어 본 밥이 어떤 느낌이었나 하는 삶을 담고, 해 본 일이 어떠했다는 삶을 담으며, 만난 사람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하는 삶을 담습니다.

 

 아무개 삶이 가장 거룩하지 않습니다. 저무개 삶은 부질없지 않습니다. 저마다 아름다운 삶이요, 누구한테나 다 달리 고마운 삶입니다.


.. 나무들 / 손짓으로 말하고 있다 ..  (강변 나무들)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봅니다. 우리 시골마을인 전라남도 고흥에는 푸른잎을 떨구지 않은 나무가 많습니다. 보름쯤 앞서 서울마실을 하면서 바라보니, 서울 쪽으로 갈수록 나뭇가지가 앙상합니다. 늘푸른나무를 빼고는 아마 거의 모든 나무가 잎을 떨구었겠지요.

 

 인천에서 살던 때에는 동백나무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마 인천에도 동백나무를 돌보는 골목집이 있었을 텐데, 나는 골목동네 동백나무를 옳게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시골에서 얻은 작은 집 대문 옆에서 자라는 동백나무를 날마다 바라보면서, 비로소 아하 동백나무는 이렇구나, 동백나무는 추운 날 꽃을 피우는구나, 동백나무는 추운 날 잎을 떨구지 않고 이렇게 짙푸른 잎사귀를 뽐내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동백나무는 꽃을 피우고, 곁에서 자라는 후박나무는 아직 꽃을 안 피웁니다. 후박나무도 머잖아 꽃을 피우려고 꽃망울이 부풀었는데, 좀처럼 꽃잎을 벌리지 않습니다. 날이 더 추워야 꽃망울을 터뜨릴까요.


.. 울타리 / 나무들이 / 베를 짠다 / 할머니처럼 ..  (나무 울타리)


 이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들면 집 둘레에 자라는 나무들이 새 잎과 새 눈을 틔우겠지요. 온누리 숱한 나무가 새로운 풀빛 옷을 입겠지요.

 

 감 한 알 맛나게 먹고 나서 생각합니다. 이 감알을 작은 꽃그릇에 심어 볼까. 능금과 배도 한 알씩 사서 먹은 다음 능금씨와 배씨도 꽃그릇을 마련해서 심어 볼까. 이 씨앗에서 싹이 돋고 줄기를 올리면, 마당 한켠에 옮겨심어 볼까.

 

 왜 진작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지만, 아직 어리석은 내 삶이니까, 천천히 하나씩 깨달으리라 믿습니다. 어리석은 먼지를 시나브로 털면서 내 삶을 곱게 다스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천천히 자라듯, 어버이로서 천천히 무르익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날마다 말을 하나둘 익히듯, 어버이답게 나날이 넋과 얼과 뜻과 꿈을 조금씩 살찌우리라 믿습니다.


.. 아가 앞니 쪼끔 돋았다 / 새봄 연둣빛 / 속잎처럼 ..  (아가 앞니)


 글을 쓰는 사람은 글에 이녁 삶을 담습니다. 흙을 일구는 사람은 흙 묻은 손으로 논이랑 밭에 이녁 삶을 담습니다. 자가용을 모는 사람은 싱싱 붕붕 내달리는 찻길에서 이녁 삶을 드러냅니다. 손전화를 쥔 사람은 누군가하고 전화기로 이야기를 나눌 때에 이녁 삶을 보여줍니다.

 

 언제나 담는 내 삶입니다. 어디에서나 보여주는 내 삶입니다. 늘 드러나는 내 삶입니다. 노상 함께할밖에 없는 내 삶이에요.

 

 사랑하는 만큼 사랑스레 가꾸는 내 삶입니다. 아끼는 만큼 돌보는 내 삶입니다. 못마땅해 한다면 못마땅한 길을 걷는 내 삶입니다. 내팽개친다면 그야말로 아무 데서나 나뒹구는 내 삶이에요.


.. 이파리 퍼진 만큼 / 햇살 머물고 // 이파리 넓이만큼 / 햇살 담긴다 ..  (담쟁이 넝쿨)


 따뜻한 기운 올라오는 방바닥에 둘째 갓난쟁이 기저귀를 펼칩니다. 밤새 잘 마른 기저귀는 방바닥 따순 기운을 받으며 보송보송해집니다. 네 살 첫째 아이가 깨어나 쉬를 눈 다음, 이 기저귀를 함께 갤 생각입니다. 나는 이 빨래를 언제나 혼자 후다닥 개곤 했는데, 곰곰이 생각하니, 집일을 혼자 하려고 들면 안 돼요. 함께 해야지요. 함께 누리고 함께 즐기며 함께 나누어야지요.

 

 밥할 때에 아이한테 자그마한 심부름을 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옆지기 말을 되뇝니다. 그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차려 주어서는 안 되는 줄 생각하지 않으며 살았습니다. 참말 그래요. 나는 집일을 도맡는다 하지만, 막상 집일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하나하나 알뜰히 짚지 못하는 삶입니다. 이러다 보니, 애써 집일을 도맡는다 하지만 더 알차며 푸근하게 돌보지 못해요.

 

 그러면 아이한테 무슨 일을 시킬까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합니다. 푸성귀를 헹구라고 해 볼까. 종지에 간장을 부어 보라고 할까. 주걱으로 밥을 푸라고 할까. 국자로 국을 뜨라고 할까. 국 간을 맞출 때에 숟가락에 소금을 얹으라고 할까. 찬찬히 돌아본다면 아이한테 맡길 만한 일이 많습니다. 콩나물을 헹구라고 시킬 수 있습니다. 작은 칼로 두부를 썰라 맡길 수 있습니다. 시켜 버릇하지 않으니까, 아이가 맡을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혼자 후딱 해치우자는 생각에 사로잡히니까, 막상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면서 나 스스로 더 홀가분하거나 기쁘지 못했구나 싶어요.


.. 도토리 한 개 / 씨로 심었더니 / 떡갈나무 잎 두 쪽 / 나왔다 ..  (오늘)


 시골집 뒤꼍 낡은 집 허문 자리에서 슬레이트 조각을 주울 때에, 첫째 아이도 곁에서 아버지가 줍듯 따라서 줍습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안 시켜도 스스로 심부름거리를 찾습니다. 마당에서 빨래를 널 때에도 아이는 어느새 좇아나와 빨래를 집어 건네고, 빨래집게를 잡아서 내밉니다. 아이 키에 맞는 빨래대에 아이가 손수 빨래를 집어 널곤 합니다.

 


 (2) 못난 삶도 잘난 삶도 없어요


 겉치레라 해서 나쁜 삶은 아닙니다. 겉꾸밈에 치우친다 해서 못난 삶이 아니에요. 겉발림이 가득하기에 모자란 삶일 수 없습니다.

 

 유경환 님 동시집 《마주 선 나무》(창작과비평사,2002)를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책 뒤쪽에는 “참 맑은 마음, 참 깨끗한 시”라는 추천글이 적힙니다. 나는 이 추천글이 참말 옳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합니다. 글이 어떠할 때에 맑거나 깨끗하다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삶이 드러나는 글인데, 이러한 추천글이라 한다면, 동시를 쓰는 유경환 님 삶이 맑거나 깨끗하다는 소리인지 궁금합니다.

 

 나는 어린이시이고 어른시이고 늘 마찬가지라고 느낍니다. 맑게 살아갈 때에 맑다고 느낄 시를 씁니다. 맑지 않게 살아갈 때에 맑지 않다고 느낄 시를 씁니다.

 

 예쁜 낱말을 골라서 시를 쓰기에 예쁜 시가 되지 않습니다. 맑구나 싶은 낱말을 골라서 시를 엮는다고 맑다고 할 만한 시가 되지 않아요.


.. 졸음에 잠긴 / 간이역 // 기차가 들어오자 / 하품한다 // 할머니와 아이가 내리고 / 기차는 조용히 떠나고 // 매암 매암 // 남기고 간 기적 소리 / 매미가 / 따라 운다 ..  (매미)


 간이역은 졸음에 잠기지 않습니다. 서울역이나 용산역이나 부산역이나 대전역은 어떠할까요. 내가 느끼기로는 외려 서울역이나 부산역이 졸음에 잠겼습니다. 너무 힘겹고 너무 고단해서 졸음에 잠긴 서울역이로구나 싶어요. 하루 스물네 시간 잠잘 겨를이나 쉴 틈이 없어요. 늘 꾸벅꾸벅 조는 서울역이에요. 시골 간이역은 일할 때에 신나게 일하고 쉴 때에 느긋하게 쉽니다.

 

 왜 시골 간이역을 졸음에 잠긴다고 생각하거나 바라보거나 느낄까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어른들 섣부른 생각이나 치우친 마음이 아닌가요.

 

 나는 이러한 시를 맑은 시라고 느낄 수 없습니다. 나는 이러한 글을 맑은 삶에서 우러나오는 맑은 시라고 여길 수 없습니다.


.. 들판 / 가득히 / 풀꽃 자리하였지만 // 뿌리 내린 / 넓이만큼밖엔 // 욕심이 / 없다 // 들판 가득히 / 풀꽃 덮인 까닭이 보인다 ..  (들꽃)


 풀꽃한테 욕심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잴 수 없습니다. 풀꽃은 꼭 풀이 뿌리를 내려 줄기를 올릴 만한 자리에 풀포기 삶만큼 자랍니다. 봄에 먼저 돋는 풀이 있고, 여름에 잇따라 돋는 풀이 있으며, 가을에 천천히 돋는 풀이 있어요. 참 조그마한 자리에 수많은 풀이 끝없이 자랍니다. 흙은 이 풀 저 풀 골고루 밥을 내어주고, 햇살은 모든 풀에 따사로이 볕을 나누어 줍니다.

 

 아이들이 욕심 없이 자라기를 바라며 이렇게 풀꽃 시를 쓴다 하겠지요. 그러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어른들은 욕심이 없나요. 어른 스스로 욕심이 없기에 아이들한테 욕심 없이 내 자리를 찾으라는 동시를 써서 내밀 수 있나요.

 

 시험과 성적과 숙제와 체벌과 규칙으로 얽매인 학교에서 아이들은 참말 따스하거나 너른 꿈을 꾸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아이들한테 착한 꿈과 맑은 삶을 어른들이 얼마나 보여주면서 이끄는지 아리송합니다.


.. 가뭄 끝에 내린 / 벼 포기 잘 자란다 // 목말라 마신 빗물 / 짙푸르게 퍼진다 // 똑바로 줄 선 벼 포기 / 줄줄이 앞으로 나란히 // 우리도 일학년 때엔 / 저렇게 줄을 섰었지 ..  (줄줄이 앞으로 나란히)


 오늘날 여름에 가뭄은 없습니다. 오늘날 여름은 끔찍한 막비입니다. 하루이틀 사흘나흘 아닌 열흘 스무 날 서른 날 지치지 않고 퍼붓는 막비예요. 이 동시집 나온 2002년이라 해서 그닥 다르다고 느끼지 않아요.

 

 우리 어른들이 동시를 머리로 함부로 짓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벼를 노래하려면 참말 벼하고 함께 살아가는 매무새와 넋으로 벼를 그리기를 바랍니다.

 

 더구나, 오늘날 논자락 벼포기는 기계로 심어요. 기계로 줄을 맞춰요. 몹시 억지스러운 줄이요, 기계다운 줄입니다. 이러한 줄이랑 일학년 운동장 줄서기를 견주는 일이란 얼마나 끔찍한가요.

 

 왜 아이들을 줄세워야 하나요. 줄세우던 일이 얼마나 애틋하게 그릴 만한 일이 될는지요.

 

 논자락을 찬찬히 들여다보기를 바랍니다. 제아무리 기계로 심은 볏모라 하더라도 똑같이 생긴 볏모란 없습니다. 풀포기는 하늘을 바라보며 뾰족뾰족 서지 않습니다. 모든 풀은 하늘을 바라며 줄기를 올리지만 살짝살짝 옆으로 퍼집니다. 조금조금 옆으로 퍼지다가는 키가 커지면서 가만히 눕습니다. 다 다른 씨에서 다 다른 싹이 돋아 다 다른 벼가 돼요. 다 다른 사랑씨로 다 다른 아이가 태어나서 다 다른 삶으로 자라요.


.. 숲 속은 노래 연습실 / 새들 음정 같지 않다 // 숲 속은 노래 연습실 / 제각기 음정 고른다 // 숲 속은 노래 연습실 / 화음 안 맞아도 곱다 ..  (숲 속 노래방)


 새들은 지저귑니다. 새들은 노래한다고 합니다. 새들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주 마땅하지요. 다 다른 새이니까 다 달리 지저귀지요. 참새라 하더라도 같은 참새는 없어요. 까치라 하더라도 같은 까치란 없어요.

 

 아이들이 같은 아이들이겠어요. 어른들도 같은 어른들인가요.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삶에 걸맞게 다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리면서 다 다른 목소리로 다 다른 말을 빚습니다.

 

 그야말로 “맑은 시”나 “깨끗한 시”라 할 때에는 예쁘장하게 보이는 말솜씨로 빚는 시가 아닙니다. 맑은 시는 맑은 넋으로 맑은 삶을 일구는 맑은 꿈에서 시나브로 피어납니다.

 

 동시집 《마주 선 나무》에 붙은 추천글을 더 읽으면 “자연 앞에 한없이 겸손하고 순수해지는 짧은 동시”라는 글줄이 있습니다. 아마 유경환 님은 자연 앞에 그지없이 고개숙이는 매무새로 짤막하게 동시를 썼달 수 있어요. 오래오래 자연 앞에 몸을 숙이면서 아이들하고 동시를 나누려 했달 수 있어요.

 

 자연 앞에 고개숙일 줄 알기에, “어느새 우리 마음도 아기처럼 해맑고 깨끗해진답니다” 하는 추천글처럼 유경환 님 동시를 읽을 만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달리 느낍니다. 아기들은 풀이나 나무하고 겨루기를 하지 않습니다. 아기를 낳는 어버이 또한 새나 벌레하고 다툼질을 하지 않습니다. 누가 높고 누가 낮지 않아요. 서로 돌보고 서로 아낍니다.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잣나무가 거룩하고 참나무는 덜 떨어지지 않아요. 소나무는 우쭐하고 대나무는 쭈뼛쭈뼛할 수 없어요.

 

 사람은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은 사람을 사랑하면 즐겁습니다. 서로 착하게 아끼면서 참다이 얼싸안으면 기쁩니다.

 

 해맑은 사랑씨를 빚는 삶이라면 어느 어른이라도 해맑은 나날을 누리면서 해맑은 꿈과 빛줄기를 아이들하고 나눕니다. 동시라는 글줄만 해맑게 보일 수 없어요. 동시를 쓸 때에만 곱다 싶은 낱말을 고른다 해서 해맑게 거듭나지 않아요.


.. 겨울 느티나무 / 잔가지들이 / 조금씩 나누어 입는 / 햇볕 // 느티나무 밑에서 / 우리도 나누기를 배우자 // 한 뼘씩의 / 따순 하늘 // 한 줌 씩의 / 따순 볕 // 느티나무도 / 우리도 // 이렇게 겨울을 / 함께 나자 ..  (겨울 느티나무)


 나는 우리 아이들이 말재주를 배우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가르침이나 일깨움에 어설피 휘둘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따스하고 넉넉한 품을 아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삶으로 쓰는 시 한 줄인 줄을 느끼며 자라기를 바랍니다.

 

 삶을 쓰는 시이면서 삶으로 쓰는 시입니다. 삶을 찍는 사진이며 삶으로 찍는 사진입니다. 삶을 그리는 그림이나 만화이면서 삶으로 그리는 그림이나 만화예요.

 

 글매무새 가꾸기 앞서 삶매무새 가꿀 노릇입니다. 아니, 삶을 알뜰살뜰 일굴 때에는 내 글과 말을 알뜰살뜰 일굴 수 있어요. 삶을 착하고 참다이 돌볼 때에는 내 글과 말을 착하고 참다이 돌볼 수 있어요.

 

 우리 말글을 바르게 쓰는 지식을 배운다면 덧없습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익히는 일이란 부질없습니다. 말에 담는 넋을 삶으로 느껴야 합니다. 글에 싣는 사랑을 삶으로 깨우쳐야 합니다.

 

 아이들은 동시를 읽기 앞서 착한 삶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어른들은 동시를 쓰기 앞서 착한 삶을 일굴 줄 알아야 합니다. (4344.12.15.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배고픈 웃음 시와시학사 시인선 18
박상률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2년 11월
평점 :
품절




 (도시에서) 시만 쓰는 사람은 배고픕니다
 [책읽기 삶읽기 88] 박상률, 《배고픈 웃음》(시와시학사,2002)



 그제 낮 봉우리가 터질 듯 말 듯하던 동백꽃인데, 어제 아침에는 봉우리가 살며시 벌어지더니, 낮에는 봉우리가 활짝 열립니다. 이제부터 날마다 새 꽃봉우리가 발그스름잔치를 이루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집 네 식구는 12월을 맞이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동백꽃이랑, 이 동백꽃 곁에서 함께 피어날 후박꽃을 누릴 수 있어요.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이웃집 너머로 바라보던 ‘마당 안쪽 꽃’을 처음으로 ‘내 집 마당 꽃’으로 맞이합니다. 이웃집 꽃이었을 때에도 ‘너 참 곱다’ 하고 말하면서 쓰다듬었고, 내 집 꽃일 때에도 ‘너 참 어여쁘다’ 하고 말하면서 쓰다듬습니다. 흰눈 함초롬히 쌓일 때에도 동백꽃 핀다는 말을 비로소 느낄 수 있구나 싶습니다.


.. 나를 바라보자. 지독한 도시의 먼지가 나의 얼굴과 두 눈의 안경에 가득 묻어 저물도록 나를 대신한다. 별 탈 없이 내리 십 년을 이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 도시의 속살과는 거리가 멀어 ..  (방생)


 날마다 고이 여기며 바라보거나 쓰다듬으니까, 날마다 고이 여기며 바라보거나 쓰다듬는 사랑 살며시 피어납니다. 저절로 동백 이야기와 후박 이야기를 글로 적습니다. 시나브로 동백꽃 시와 후박꽃 시를 씁니다. 동백꽃잎 스치는 바람 내음과 후박꽃잎 감도는 바람 빛깔을 온몸으로 누리면서 시 한 줄 적바림합니다. 공책을 펼쳐 “따순 햇살 먹으며 자라는 동백꽃은 따순 사랑을 나누어 주는구나.” 하고 끄적입니다. 내가 나한테 선물하는 글줄입니다. 내가 내 하루를 좋아하면서 내 마음껏 즐기는 글월입니다.

 겨울에 곱게 피는 꽃을 바라보다가는 이 꽃나무 처음 심은 사람 손길과 넋을 헤아립니다. 맨 처음에는 어떻게 이 꽃나무를 심었을까요. 어린나무를 얻거나 사들여 심었을까요. 동백씨를 받아 한 알 알뜰히 심고 한 땀 알뜰히 흘리면서 돌보아 이렇게 어른나무로 키웠을까요. 나는 우리 집 아이들하고 어떤 씨앗 심어 어떤 나무를 키우면서 내 아이들과 이 아이들이 낳을 아이들한테 고운 꽃잎 물려줄 수 있을까 꿈을 꿉니다.


.. 되는 대로 석사흘쯤 쏟아지는 저 말들 / 저 웃음들 ..  (환절기)


 네 살 딸아이는 밤오줌이건 낮오줌이건 아주 잘 가립니다. 똥을 예쁘게 누고 웬만한 심부름 척척 해냅니다. 동생이 태어나고 한동안 밤에 이불에 쉬를 했지만, 이제 이런 일은 없습니다. 예전에는 밤에 쉬를 누이고 나서 좀처럼 다시 잠이 들지 않아 애먹이곤 했으나, 이제는 쉬를 누고 나서 곧바로 꿈나라를 찾아갑니다.

 이 착한 아이는 어디에서 착한 싹이 움트는지 궁금합니다. 어머니랑 아버지한테 있을 착한 씨앗이 아이한테 옮아갔을까요. 어머니랑 아버지를 낳은 어머니랑 아버지한테서 천천히 물림하면서 아이한테까지 옮겼을까요. 아이가 곧잘 부리는 억지와 땡깡이라면, 이 또한 이 아이를 낳은 어머니랑 아버지, 또 이 아이를 낳은 어머니랑 아버지를 낳은 어머니랑 아버지한테서 찬찬히 이어온 억지와 땡깡일까요.


.. 그가 죽어 그의 꽃 망태기도 같이 묻혔다. 그의 무덤에 꽃이 피어났다 ..  (꽃 동냥치)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사랑이 어리는 빛을 담는 씨앗을 빚습니다. 미움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슬픔이 감도는 눈물이 깃든 씨앗을 일굽니다. 흙을 만지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흙기운 서린 땀방울을 흘립니다. 기계를 만지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기름내 풍기는 땀방울을 흘립니다. 사무실에서 펜대나 셈틀을 만지작거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시멘트와 플라스틱 내음 짙게 밴 땀방울을 흘립니다.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터전에서 꿈을 꿉니다. 사랑스러운 꿈이건 돈내 나는 꿈이건, 저마다 제 삶자리에 알맞게 꿈을 꿉니다. 아름다이 어깨동무하는 꿈이건 홀로 밥그릇 차지하며 떵떵거리려는 꿈이건, 저마다 제 일자리에 걸맞게 꿈을 꿉니다. 살가이 이야기꽃 피우는 이웃이 되어 오순도순 북돋우는 마을살이 꿈이건, 빽빽한 시멘트 층집 귀퉁이에서 위아래층 소리에 시달리다가는 나 또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서로 악다구니가 되는 도시살이 꿈이건,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 마땅하게 꿈을 꿔요.


.. 등에 업은 것 하나 보고 살아온 당신은 ..  (어머니)


 우리 아이들은 어디에서 누구랑 무슨 꿈을 어떻게 꾸나요. 우리 아이들은 늘 곁에서 바라보며 살을 부비는 어버이한테서 어떤 꿈을 읽나요. 우리 아이들은 이웃집 동무나 오빠 누나 언니 동생한테서 어떤 꿈을 듣나요. 우리 아이들은 이웃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한테서 어떤 꿈을 보나요.

 난 어린이집이 아주 무섭습니다. 노란버스에 아이들 태우며 집집을 돌며 태우거나 데려다주는 어린이집이 몹시 무섭습니다.

 왜 어린이집에 버스가 있어야 하나요. 왜 학원에 버스가 있어야 할까요. 왜 아이들은 저희 두 발로 이 땅을 거닐거나 박차거나 뛰놀 수 없나요. 왜 아이들은 저희 두 손으로 이 땅을 만지거나 부비거나 껴안을 수 없는가요.

 어린이집은 아이들한테 무슨 꿈을 어떻게 보여주는지 궁금합니다. 어린이집은 아이들한테 어떤 삶을 느끼도록 이끄는지 궁금합니다. 어린이집 교사가 되기까지 어린이집 어른들은 어디에서 무얼 배우며 어떤 꿈을 키웠는지 궁금합니다.


.. 꼭 그 시간이면 나타나 새벽을 내려놓고 대신 내 어두운 찌꺼기는 남김없이 치워 가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 ..  (청소원 아무개 씨)


 노란버스 한 대 굴리지 않는 어린이집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학원버스 없는 학원이 있을는지, 자가용을 타지 않는 원장이나 교사가 꾸리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나 학교가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버이가 아이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서 찾아가는 어린이집이 있는지, 어버이가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함께 찾아오는 어린이집이 있는지, 원장과 교사 모두 자전거로 일터를 오가는 어린이집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을 자가용에 태우는 일은 끔찍합니다. 아니, 아이들이 아파트에 살도록 하는 일부터 끔찍합니다. 무엇보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들이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일이란 참 끔찍합니다. 보금자리가 될 수 없는 데에서 살아가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보금자리를 보여주거나 느끼도록 하거나 깨닫도록 하지 못합니다. 보금자리는 쉽게 허물고 쉽게 다시 세우는 부동산이 아닙니다. 보금자리는 값이 껑충 뛰거나 폭삭 주저앉는 부동산이 아닙니다. 보금자리는 어버이와 아이 모두 느긋하게 쉬면서 삶을 예쁘게 일구는 곳입니다. 보금자리는 나무를 심어 땅을 살리는 곳이요, 보금자리는 흙을 어루만지며 숨을 돌보는 곳입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어떤 사람이 되어 무슨 꿈을 누리는가를 잊는 어른이라면, 아이를 둘 셋 넷 다섯을 낳는대서 어버이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돈이 넉넉하거나 가방끈이 기니까 어버이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얼굴이 예쁘거나 힘줄 끗발이 있기에 어버이 자리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씨앗이 자랄 수 있는 터에서 나무를 보듬는 손길일 때에 바야흐로 어버이요 어른입니다. 씨앗을 심을 수 있는 자리에서 풀꽃을 사랑하는 마음길일 때에 비로소 사람이며 목숨입니다.


.. 율곡 할아버지와 퇴계 할아버지 초상화도 있지만 품격은 역시 왕이 높으시다. (거참 희한하지? 왕조 시대도 아닌데) ..  (세종대왕 초상화 1)


 박상률 님이 지은 시를 그러모은 《배고픈 웃음》(시와시학사,2002)을 읽습니다. 박상률 님은 서울에서 살아가는 결을 보듬으며 시를 꽃피웁니다. 박상률 님이 서울 아닌 진도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삶을 보듬었으면, 또다른 이야기 피어나는 말꽃을 돌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박상률 님을 비롯해, 글깨나 쓸 줄 아는 사람은 하나하나 서울로 몰립니다. 글줄 읽고 글월 아낄 만한 사람은 하나둘 서울로 끌립니다.

 시골집에서 동백나무 동백꽃 누리면서 시를 쓰는 사람은 아주 줄어듭니다. 도시에서라도 오동나무 오동꽃 느끼면서 시를 쓰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동백꽃하고 멀어지면서 오동꽃이든 장미꽃이든 풀꽃이든 바라볼 겨를을 잃습니다. 동백꽃하고 등지면서 할미꽃이든 참꽃이든 머위꽃이든 들여다볼 틈을 잊습니다.

 시집 《배고픈 웃음》에서 샘솟는 웃음이 풀씨 하나 만날 수 있으면 어떠했을까 하고 꿈꿉니다. 시집 《배고픈 웃음》에서 꼬르륵거리는 몸이 흙을 일구어 푸성귀랑 곡식이랑 열매를 거둔다면 어떠했을는지 꿈꿉니다.

 (도시에서) 시만 쓰는 사람은 배고픕니다. (시골에서) 시를 쓰는 사람은 배부릅니다. (4344.12.1.나무.ㅎㄲㅅㄱ)


― 배고픈 웃음 (박상률 글,시와시학사 펴냄,2002.11.10./55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한모 시전집 - 전2권
정한모 지음 / 포엠토피아 / 2001년 2월
평점 :
절판


<아가의 방>은 오래되어 안 뜨기에, 다른 책에 이 느낌글을 걸칩니다. 



 시를 읽는 사람은 시를 써요
 [헌책방에서 만난 책 10] 정한모, 《아가의 방》



- 책이름 : 아가의 방
- 글 : 정한모
- 펴낸곳 : 문원사 (1970.10.30.)



 시를 읽는 사람은 시를 써요. 사랑을 읽는 사람은 사랑을 나눠요. 꿈을 꾸는 사람은 꿈을 키워요. 돈을 버는 사람은 돈을 낳아요.

 묵은 시집 하나 꺼내어 읽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앞서 태어난 시집 하나 읽습니다. 350킬로미터 넘는 길을 짐차에 실리다가 일꾼들 등짐에 얹혀 새 터에 내려지던 책꾸러미 가운데 꼭 하나 풀려, 이 책꾸러미 책들이 바닥에 와르르 쏟아집니다. 이 책들을 추스르다가 묵은 시집 하나 눈여겨봅니다. 등짐을 나르느라 땀이 줄줄 흐르기에, 젖고 지저분한 손은 옷섶으로 슥슥 닦고는 묵은 시집 하나 창가에 세웁니다. 새벽녘 일을 끝마치고 이 시집 하나 살림집으로 가지고 돌아옵니다.


 문은 닫혀 있었다 //
 거울속에 우물울 / 우물속에 하늘을 / 하늘속에 아가를 //
 아가는 ‘아가’와 / 살고 있었다 / 풀잎 이슬 반짝이는 /
 아침의 들길을 / 노을비낀 저녁하늘 / 잠겨 있는 바다빛을 //
 아가는 ‘아가’와 / 살고 있었다 //
 메아리는 숨죽여 / 기다리고 있었다 //
 바람을 / 목소리를 / 몸을 떨며 / 산을 흔들 /
 산만큼한 보람을 / 쩌렁쩡 울어볼 / 눈이 부신 / 금빛을 //
 메아리는 귀를 세워 / 기다리고 있었다 //
 소리는 빛을 몰고 / 다가오고 있었다 ..  (서시)


 한 번 쓰고 버리는 물건을 장만하는 사람은 쓰레기를 낳습니다. 유기농 푸성귀를 유기농 물건 파는 가게에서 장만하더라도, 비닐봉지 쓰레기가 나옵니다. 물건 싸게 파는 가게에서 봉지라면 다섯 개들이를 사더라도 라면 다섯 봉지 비닐에다가, 다섯 봉지를 따로 묶은 큰 봉지 하나 쓰레기로 나옵니다. 이 라면꾸러미를 담은 까만 비닐봉지 또한 쓰레기가 됩니다. 라면공장에서는 어떤 쓰레기가 태어났을까요. 라면공장에서는 어떤 쓰레기물을 흙과 냇물에 흘렸을까요. 라면공장에서는 어떤 쓰레기바람을 바깥으로 내보냈을까요.

 사람들은 쓰레기를 만들고 쓰레기를 쓰며 쓰레기를 버립니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대구이든, 서울시장 부산시장 대구시장 없더라도 서울이며 부산이며 대구이며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울과 부산과 대구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일꾼이 하루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도 두 손 들며 일손을 멈추면, 이들 도시는 그만 꽝 하고 터집니다. 건물을 비질하거나 걸레질하는 청소 일꾼이 일손을 멈추든, 쓰레기차 몰며 쓰레기를 거두는 일꾼이 일손을 멈추든, 쓰레기터에 쓰레기를 묻는 일꾼이 일손을 멈추든, 쓰레기물을 걸러 바다로 버리는 일꾼이 일손을 멈추든, 누구 하나 ‘쓰레기 치우는 일꾼 일손’이 멈출 때에는 크고작은 모든 도시가 와르르 무너집니다.

 돈이 있으면 쓰레기봉투를 살 테지요. 그렇지만 돈으로는 맑은 바람을 살 수 없어요. 돈으로는 밝은 햇살을 살 수 없어요. 돈으로는 시원한 물을 살 수 없어요.

 돈으로는 사랑을 살 수 없어요. 돈으로는 꿈을 살 수 없어요. 돈으로는 이야기를 살 수 없어요. 오직 사랑으로 사랑을 빚어요. 오직 꿈으로 꿈을 일구어요. 오직 이야기로 이야기를 낳아요.


.. 굴 안에 퍼지는 / 햇살같은 마음소리 //
 울음은 가두었다 / 꿈길에나 터트리고 //
 한 줌 가슴 / 산을 안고 /
 발돋움 돋음하는 / 작은 새야 ..  (작은 새)


 묵은 시집 《아가의 방》(문원사,1970)을 읽습니다. 묵은 시집, 작은 시집, 조촐한 시집을 찬찬히 읽습니다. 이 시집은 어느덧 마흔 해 남짓 묵은 시집이 되는데, 이 시집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요. 이 시집이 갓 태어나던 때 애틋이 사랑하던 손길은 얼마나 있을까요. 이 시집에 깃든 말보배를 하나하나 구슬로 엮어 목에 걸거나 마음에 심은 분은 얼마쯤 있는가요.

 오늘도 어김없이 동이 틉니다. 눈부신 햇살이 우리 마당으로 흘러듭니다. 따사로운 남녘 고운 햇살을 느낄 무렵, 네 살 첫째 아이는 크게 하품을 합니다. 이제 곧 일어나겠군요. 아이는 제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으면 사랑을 먹으며 씩씩하게 자랍니다. 아이는 제 어버이한테서 꾸지람을 받으면 꾸지람을 먹으며 밉게 큽니다.

 시를 읽는 사람은 시를 쓰듯, 사랑을 먹는 아이는 사랑을 일굽니다. 책을 읽는 어버이는 책으로 마음밭을 꾸리듯, 믿음을 먹는 아이는 믿음을 예쁘게 보듬습니다.


 얼어붙은 노여움들이 /
 때묻은 겨울의 누더기를 걸치고 /
 저기 가고 있다 ..  (봄)



 빨래하는 소리 복복복, 온 집안을 울립니다. 손으로 빨래하는 소리 북북북, 부엌을 지나 마루를 건너 방으로 흘러듭니다. 아이들은 빨래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아마 어버이 스스로 받아들이는 만큼 받아들일 테고, 어버이하고는 또 다르게 새로운 결과 무늬와 소리와 내음으로 맞아들이겠지요.

 파리 잡는 소리 탕탕탕, 온 집안에 퍼집니다. 날이 폭한 남녘땅에는 파리가 제법 많습니다. 이 녀석들, 이 집이 따뜻하니까 자꾸 집으로 들어오나. 잡혀 죽는 파리한테 미안하지만, 파리를 잡으며 미안하다고 여기지 못하고, 얼마나 빨리 이 녀석들 씨를 말리나 하고만 생각합니다.

 잠에서 깬 아이 볼을 부비면 저절로 노랫소리 흐릅니다. 잠에서 깬 어른들 볼을 부빌 때에도 시나브로 웃음소리 터질까요. 이제 아침햇살은 온 들판과 멧자락을 노랗게 물들입니다.


 지금쯤 / 흙 속에 묻혀 있는 /
 달래알만한 크기를 하고 /
 아가는 보얀 진주의 밝음으로 /
 아지랑이 같은 생명의 실에 매달려 /
 피어오르며 숨쉬며 하고 있을까 //
 개나리가 피고 / 이파리가 돋아나고 /
 환한 웃음으로 봄이 만개하듯이 /
 밤의 어둠을 가르며 /
 대낮의 밝음을 뒤흔들며 /
 커다랗게 터져나올 울음이여 ..  (목숨의 소리)


 정한모 님 시집 《아가의 방》은 어떤 시집일까 헤아립니다. 정한모 님 사랑을 담은 시집일까요. 정한모 님 꿈을 담은 시집일까요. 정한모 님 삶을 담은 시집일까요. 정한모 님 하루하루 살가운 이야기를 담은 시집일까요.

 이 시집 《아가의 방》을 읽는 사람들은 무엇을 읽을는지 곱씹습니다. 이 작은 시집을 읽으며 사랑을 읽을까요. 이 묵은 시집을 들추면서 꿈을 읽을까요. 이 낡은 시집을 읽으며 살가운 이야기를 읽을까요. 이 조촐한 시집을 읽으면서 내 삶을 되새길까요.


 무덤 속에서 울려나오는 / 지훈의 목소리가 /
 초록빛 바람에 나부낀다 //
 1년이 지났는데 / 아직도 숨찬 쉰 목소리 //
 “묻혀서 사는 이의 / 고운 마음을 //
 아는 이 있을까 / 저허허노니” //
 그래서 / 백금의 보자기에 / 싸가지고 갔겠지 //
 이제는 아무도 다치지 못하는 / 그 고운 마음을 ..  (그 고운 마음을)



 착하게 살아가고 싶기에 착하게 말을 하며 착하게 생각합니다. 아름다이 어깨동무하고 싶기에 아름다이 글을 쓰고 아름다이 생각합니다. 좋은 빛을 누리고 싶을 때에는 좋은 넋을 살찌워 좋은 무지개꽃을 키웁니다. 좋은 바람 나누고 싶을 때에는 좋은 얼을 일으켜 좋은 풀꽃을 돌봅니다.

 이 고운 마음을 아껴 주셔요. 이 고운 글줄을 보살펴 주셔요. 이 고운 이야기 하나 마음밭에 건사하는 아이들을 사랑해 주셔요. 이 고운 삶을 이어갈 어여쁜 사람들 오늘 하루를 살가이 어루만져 주셔요. (4344.11.15.불.ㅎㄲㅅ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11-15 23:38   좋아요 0 | URL
네, 하고 대답하고 싶어지는 마지막 글귀였습니다.

인용하신 시가 너무 아름답네요, 입으로 가만가만 읽어봅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고, 책은 쉬엄쉬엄 푸시구요.

숲노래 2011-11-16 05:20   좋아요 0 | URL
스스로 예쁘게 살아가고픈 꿈을
사람들 누구나 착하게 아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시인 신동엽
김응교 지음, 인병선 유물 보존.공개.고증 / 현암사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삶과 사람과 삶터를 읽는 책이라면
 [책읽기 삶읽기 66] 김응교, 《시인 신동엽》(현암사,2005)


 이야기책 《시인 신동엽》(현암사,2005)은 지난 2005년 12월 30일에 나왔습니다. 나는 이 책을 2006년 앞겨울에 서울 명륜동에 자리한 인문사회과학책방 〈풀무질〉에서 장만했습니다. 시인 신동엽을 좋아하며 아끼기 때문에, 누군가 당신을 이야기하는 책을 내놓을 때에 곧바로 눈길이 갔고, 이 책에는 당신이 손수 적바림한 글이며 편지가 알알이 깃들어 더 애틋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선뜻 다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처음 장만해서 읽던 2006년부터 마지막 쪽을 덮은 여러 달 앞서인 2011년 봄까지 내내 더부룩합니다.


.. 이 사진을 보고 신동엽이 친일을 했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몰역사적이고 무분별한 태도다. 오히려 우리는 이 사진에서 군국주의가 한 아이에게 강요한 ‘국가의 폭력’을 볼 수 있다 . “우리도 자라서 어서 자라서 / 소원의 군인이 되겠습니다 / 굳센 일본 병정이 되겠습니다(이원수-지원병을 보내며,1942.8.)”라는 동시처럼, 당시 제국주의 일본은 군대식 놀이를 통해 아이들을 병정으로 의식화시켰다 ..  (24쪽)


 글쓴이 김응교 님은 시인 신동엽 님이 ‘친일을 한 사람이 아님’을 잘 헤아려야 한다면서, 역사와 사회와 삶과 사람을 읽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먹이면서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님이 일제강점기에 쓴 시를 ‘보기’로 듭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왜 이렇게 해야 했을까요.

 시인 신동엽 님이 태어나서 어린 나날을 보낸 일제강점기에 시인 신동엽 님을 둘러싼 여러 삶과 사회와 터전을 읽어야 한다면, 어린이문학가 이원수 님을 둘러싼 온갖 삶과 사회와 터전 또한 읽어야 할 텐데요. 어린이문학가 이원수 님은 왜 〈지원병을 보내며〉처럼 슬픈 시를 써야 했을까요. 슬픈 시를 쓴 이원수 님 삶은 해방 앞뒤로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 신동엽이 민족적 주체성을 탐구하고, 나아가 동학을 연구하며, 민족서사시 〈금강〉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상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어떤 이들은 이 시를 퇴행적 복고주의니 배타적 민족주의라는 말로 비판한다. 김수영도 신동엽이 “쇼비니즘으로 흐르지 않을까?” 하고 염려했다. 하지만 그의 시를 논할 때는 지금의 잣대로 비판하기보다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 시인이 왜 이러한 정언적 호명을 남겼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시를 이방인에 대한 배타주의로만 읽는 것은 지나친 오해이다 ..  (25, 154쪽)


 《시인 신동엽》을 내놓은 김응교 님은 “이러한 (일제강점기)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민족적 주체성”을 살찌우면서 “민족서사시”를 쓸 수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요. 맞습니다. 마땅한 말입니다.

 그러면,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님은 어떠한가요. 독재자 이원수와 박정희를 나무라면서 전태일을 노래하고 참다운 민주와 평화와 통일과 평등과 해방을 바라는 넋을 어린이문학에 담은 이원수 님은 어떠한가요.

 그지없이 아름다운 글꽃을 앞에 두고도 정작 신동엽 문학에 얽힌 빛과 그림자를 살가이 풀어내지 못하는 모습은 너무 안타깝습니다. 아니, 안쓰럽습니다. 빛이 있기에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림자가 지기에, 이 그림자를 돌아보면서 따사로운 빛을 품에 안습니다. 그림자라 하지만, 나무 그림자는 좋은 그늘이 됩니다. 그늘이 있어 더위를 식히고 땀을 훔칩니다. 꽃잎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있어 무당벌레와 지렁이와 여치가 한여름을 이겨냅니다.

 편가르기를 하는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편가르기를 하면서 뭇칼질을 하는 사람들이 무시무시합니다.

 삶을 읽어야 시요, 사람을 읽어야 문학이며, 사랑을 읽어야 넋입니다. 시인 신동엽 님은 어떠한 삶을 일구면서 어떠한 사람을 사귀면서 어떠한 사랑을 나눈 분이었을까요. 《시인 신동엽》을 읽는 내내, ‘신동엽 시인 삶·사람·사랑’을 제대로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부디, 앞으로 더 곰삭이거나 아로새기면서 시인 신동엽 님 꿈과 넋과 빛을 오롯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글꾼 하나 태어날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4344.9.9.쇠.ㅎㄲㅅㄱ)


― 시인 신동엽 (김응교 씀,현암사 펴냄,2005.12.30./12000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9-09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1-09-09 17:51   좋아요 0 | URL
달덩이 같은 사진이라면 더 좋지요 ^^;;;;;

올 여름에는 끝없는 비가 쏟아졌는데
한가위 때에는 달을 못 보더라도
구월 들어 비가 없는 일만으로도
고맙다고 느껴요.

언제나 즐거우며 좋은 한가위가 되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