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스러진다



  오늘은 작은아이를 이끌고 집 뒤쪽으로 가서, 뒷문 두 군데를 손질합니다. 한쪽 뒷문은 앞뒤로 창호종이를 새로 바릅니다. 겨울을 앞둔 늦가을이라 집 뒤쪽에는 해가 들지 않으니 제법 춥습니다. 작은아이는 뒷문 한쪽에 풀을 바르고 종이를 붙이는 아버지를 알뜰히 도와줍니다. 이러고서 다른 뒷문 안쪽에는 두꺼운상자를 펼쳐서 받친 뒤에 널을 둘 대고는 커다란 나무로 문을 눌러서 안 열리도록 해 놓습니다. 뒷문 두 군데를 이렇게 하니 집안이 한결 따스합니다. 어제는 헛간 문을 새로 짜려고 나무질하고 못질을 했습니다. 날마다 조금씩 집일을 건사하는데, 하루에 한 가지씩 몇 시간 말미를 내어 몸을 쓰다 보면 저녁 즈음이면 ‘으스러지네’ 하고 느껴요. 그렇지만 밤에 아이들하고 함께 곯아떨어지고 새벽에 이르면 어느새 이 몸이 말끔히 낫습니다. 새 하루에는 새로운 몸으로 새 일거리를 잡을 수 있어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지난날 이와 같으셨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김치를 담글 적에도, 칼을 쥐고 부엌일을 할 적에도, 어머니 손끝하고 할머니 손길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내 몸에 흐르는 오래된 핏줄을 되새깁니다. 2016.11.24.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살림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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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내음



  들마실을 할 적에 산국을 꺾어서 두 손 가득 품는 꽃순이는 곳곳에 꽃내음을 퍼뜨립니다. 노란 산국을 부엌에 놓으면 부엌이 꽃내음으로 맑고, 노란 산국을 도서관학교에 두면 도서관학교가 꽃내음으로 환하며, 노란 산국을 평상에 올려놓고 마당에서 뛰놀면 온 집안이 꽃내음으로 즐겁습니다. 꽃순이가 꺾은 산국을 바라보며 밥을 짓고 청소를 하며 빨래를 합니다. 2016.11.16.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살림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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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꾸러미



  서울마실을 마치고 고흥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가방은 선물꾸러미로 바뀝니다. 두 아이한테 아기자기한 기쁨이 될 만한 선물을 헤아려 하나씩 장만합니다. 곁님한테 새로운 웃음이 될 만한 선물을 생각해 하나씩 마련합니다. 끝으로 내가 나한테 신나는 노래가 될 만한 선물을 돌아보며 한 가지쯤 챙깁니다. 돈이 얼마나 드느냐 하는 대목은 내려놓고서, 이 선물이 오늘 우리한테 어떤 생각이나 마음을 새롭게 일으켜서 즐거운 이야기꽃으로 거듭나는 이음돌이 될 만한가를 살핍니다. 내 가방은 책도 노트북도 옷가지도 물병도 이것저것 들었으니 꽤 무거운데, 이 선물을 고르고 저 선물을 넣느라 무척 묵직합니다. 낑낑거리며 시외버스에 올랐고, 이 시외버스가 곧 고흥 읍내에 닿으면, 사뿐사뿐 군내버스로 갈아타서 고요한 시골 밤길을 달려 우리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테지요. 2016.11.11.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살림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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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아이



  열두 시에서 한 시로 넘어갈 즈음, 작은아이가 똥을 눕니다. 밑을 닦아 줍니다. 작은아이는 이제 똥그릇을 스스로 비울 줄 압니다. 그런데 곧 크게 우는 소리가 납니다. 작은아이가 뒷간에서 똥그릇을 비우다가 뭔 일이 생겼나 봅니다. 곁님도 큰아이도 무슨 큰일이 벌어졌는가 싶어서 마루문을 열고 내다보는데, 나는 문득 알아차립니다. 아이가 말을 하지 않아도 아하 하고 깨닫습니다. 작은아이는 울기만 했고, 한참 뒤에 뭔 일인가 하고 말을 하는데, 나는 일찌감치 알아차렸기에 ‘뒷간에 빠진 작은아이 똥그릇’을 건질 생각만 했어요. 처음에는 쉽게 건질 만하겠구나 싶더니, 뒷간에 빠진 똥그릇을 건지기가 생각처럼 쉽지는 않네요. 그래도 몇 분 뒤에 손으로 건졌고, 잘 씻고 헹구었어요. 제 똥을 뒷간에 부으려 하다가 그만 똥그릇까지 빠뜨린 작은아이는 처음에는 마을이 떠나가라 울었지만, 그 뒤로는 생글생글 잘 울고 잘 놀아요. 요놈 보라지, 네 똥그릇은 네 손으로 네가 건질 수 있어야 하지 않아? 하고도 생각하다가 나 혼자 속으로 웃고 지나가기로 합니다. 얘야, 밥도 똥도 모두 네 몸을 거치는 흐름이야, 이 대목을 잘 헤아리렴, 그러면 돼. 2016.1.6.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살림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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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으로



  엊저녁에 반쯤 설거지를 마치고 새벽에 나머지를 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기운을 새로 내어 모든 설거지를 마칩니다. 이러고서 두 아이하고 가볍게 말놀이를 익히고는 먼저 자리에 눕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다시마하고 표고버섯을 물에 불립니다. 아침에 끓일 국을 생각하면서 국물을 우립니다. 엊그제부터 다시 마시마랑 표고버섯 국물을 우리는데, 한동안 이 국물을 안 우렸네 하고 깨닫습니다. 몸이 바빴나 마음이 바빴나, 아니면 다른 일에 몸도 마음도 빼앗겼나 하고 돌아봅니다. 며칠 앞서 새 스텐냄비를 하나 장만했고, 어제는 부엌칼도 새로 한 장만했습니다. 어느새 우리 집 부엌은 은빛이 넘실거립니다. 처음부터 모두 은빛(스테인리스) 살림이지는 않았고, 하나씩 둘씩 장만하다 보니 은빛 살림이 제법 늘어납니다. 부엌살림을 나무빛이나 은빛으로 돌볼 적에 정갈할 수 있는 줄 헤아린 지는 얼마 안 됩니다. 곁님이 자꾸 일깨우고 가르쳐 주기에 비로소 이렇게 헤아립니다. 스스로 조금 더 마음을 쓰고, 손수 이것저것 더 새롭게 짓자는 생각을 고요히 마음자리에 심습니다. 2016.11.6.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살림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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