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불의 책장수
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 지음, 권민정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 책이름 : 카불의 책장수
- 글쓴이 : 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
- 옮긴이 : 권민정
- 펴낸곳 : 아름드리미디어(2005.11.1.)
- 책값 : 12000원


 지난주 서울 나들이를 갔을 때입니다. 서울에 머물 땐 으레 홍제동에 사는 선배 집에서 지냅니다. 선배들은 텔레비전과 영화를 즐겨보는 터라, 이 집에 머물 땐 텔레비전과 영화도 함께 보게 됩니다. 지난주에는 우리 나라에도 곧 들어온다는 〈보랏〉이라는 영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 술탄이 파키스탄에 있는 사이에 그의 책방은 공공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약탈을 당했다. 귀한 책들이 헐값으로 수집자들에게 넘어갔고, 탱크나 총알이나 수류탄과 맞바꿔지기도 했다. 술탄 자신도 책방을 챙기기 위해 파키스탄에서 돌아왔을 때 국립도서관에서 약탈된 책을 몇 권 사들였다. 정말 수지맞는 장사였다. 수백 년 된 작품들을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이 중에는 우즈베키스탄의 500년 된 원고도 있었는데, 나중에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이 원고를 되사기 위해 술탄에게 2만5천 달러를 제시했다. 술탄이 발견한 작품 중에는 자히르 샤 국왕의 소장본이자 애독서인, 서사 시인 피르다우시의 《왕서》도 있었다. 술탄은 제목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도둑들로부터 아주 헐값에 책 여러 권을 사들였다 ..  〈36쪽〉


 영화 〈보랏〉은 카자흐스탄사람이 미국에 와서 겪는 일을 우스꽝스럽게 그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느끼기로는 ‘우스꽝스럽게’ 그리지 않았습니다.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를 아주 바보로, 얼간이로, 질낮고 쓰레기와 다를 바 없는 나라처럼 그렸습니다. 이와 달리 미국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앞서고 멋있고 아름답고 깨끗하고 평등과 평화가 넘치는 나라로 그렸습니다.


.. 샤킬라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용기를 내어 결혼 후에도 다시 일하러 나가겠다고 하면 허락하겠느냐고 묻는다. 와킬이 그러겠다고 대답하지만 샤킬라는 믿지 않는다. 이 사람은 아마 결혼하자마자 마음을 바꾸겠지. 하지만 와킬은 샤킬라를 안심시킨다. 일하는 게 행복하다면 자기는 괜찮다고, 물론 아울러 아이들과 살림만 잘 챙긴다면 말이다 ..  〈104쪽〉


 영화 〈보랏〉은 카자흐스탄을 무대로 했다지만, 정작 이 영화를 찍은 나라는 카자흐스탄이 아닌 루마니아. 더욱이 영화 무대로 자리를 내어준 루마니아 마을은, 자기네 마을이 ‘강간범이 득시글거리고 꾀죄죄하고 아주 몹쓸 곳’인 듯 그려졌다면서 영화 만든 사람들을 고소한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그래, 영화를 찍은 미국사람들은 미국 극장에 내걸 이 영화를 보면서 키득키득 웃고 ‘저런 미개하고 야만스런 나라!’ 하고 읊겠지요. 참과 거짓이 무엇인지는 조금도 모르는 채, 영화에 담은 ‘우스개’를 즐기는 사이, 어느 곳에서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줄 모를 테지요. 이 영화를 내걸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카자흐스탄이 참말로 어떤 나라인지 모르는 채, 영화에 나온 모습이 마치 참이라도 되는 듯 엉뚱하게 알지 않겠어요? 언젠가 할리우드 영화에서 ‘대한민국 남녘’ 모습을 엉터리로 그려내어 말썽이 있었음은 까맣게 잊어버렸을 테고요.


 “여성들은 넉넉한 삶을 살지도,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젊음의 열매를 맛보지도, 사랑의 즐거움을 누리지도 못한다(61쪽).”고 하는 아프가니스탄. “교사의 상당수가 여자였기 때문에 몇몇 남학교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자격을 갖춘 남자 교사들을 찾기가 힘들었던 것이다(100쪽).”는 현실.


 우리들은 ‘북녘’이라는 나라를 얼마나 알면서 북녘 이야기를 할까요. 일본이라는 나라를 얼마나 알면서 일본 이야기를 할까요. 가까운 중국이나 러시아라고 하지만, 이들 나라 속살을 제대로 알까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버마, 스리랑카,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는 얼마나 알지요?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 서울이 ‘카불’임을 아는 사람은 그럭저럭 있겠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꿈꾸는지, 무슨 일을 하고 무슨 놀이를 즐기는지, 문화와 사회는 어떠한지, 이 나라를 둘러싼 세계 흐름은 어떠한지를 털끝만큼이나마 헤아리려는 움직임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으로 쳐들어간 까닭을 알아보려는 사람 또한 몇이나 될는지. (4340.1.1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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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하나님과 함께
야누쉬 코르착 지음, 송순재.김신애 옮김 / 내일을여는책 / 2001년 6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홀로 하나님과 함께
- 글쓴이 : 야누쉬 코르착
- 옮긴이 : 송순재, 김신애
- 펴낸곳 : 내일을여는책(2001.6.5.)
- 책값 : 6500원


 그제 시골집으로 돌아왔을 때입니다. 집안 분위기가 어딘가 으스스했습니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 보지만 달리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천장에 올려놓은 쥐끈끈이에 쥐가 잡혀서 죽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튿날 천장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니 작은 새앙쥐가 죽어 있습니다. 그렇구나. 이 목숨 하나 죽어서 그랬구나.

 죽은 쥐를 어찌 할까 망설입니다. 땅에 묻을까 어찌할까. 서울이었다면 묻을 땅이 없으니 쓰레기통에 처박힐 텐데. 망설이다가 보일러방에 옮겨 놓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여기저기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다른 쥐가 들어왔나? 불을 켜 놓고 샅샅이 살펴보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불을 끄면 다시 부스럭 소리. 그러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서 보일러방에 옮겨 놓은 새끼쥐 주검을 들고 와서 천장에 다시 올려놓습니다. 그 뒤로 소리가 뚝 끊깁니다.

 어미쥐였을까요.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저는 앞으로 가방, 자전거로 다시 태어나야지 싶은데, 새끼쥐로도 다시 태어나야겠구나 싶습니다. 책방 나들이를 하며 가방을 애먹이니까, 먼길 나들이를 한다며 자전거를 고달프게 하니까, 또 쥐끈끈이를 써서 쥐를 죽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벼로도 보리로도 콩으로도 배추로도 무로도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제가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목숨을 바쳐 준 모든 목숨붙이 삶을 한 번씩 차근차근 다시 겪어야지 싶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제 넋은 홀가분할 수 없어요. 지금은 사람 모습이지만, 또 지금은 사람으로 있다고 해서 다른 목숨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서 먹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못살게 굴기도 하잖습니까. 세상에 하느님이 있다면 사람이 믿는 하느님뿐 아니라 버느나무가 믿는 하느님이 있고, 새앙쥐가 믿는 하느님이 있으며, 쑥이 믿는 하느님이 있다고 봅니다. 또, 이렇게 다 다른 하느님이 있겠지요. 고구마 하느님, 파리 하느님, 개 하느님, 고등어 하느님도 있지 싶습니다. 모든 목숨붙이가 오롯이 제 삶을 사랑하고 가꾸고 즐길 수 있도록 돌보고 어루만져 주는 하느님이 있지 싶습니다.


……
저는 저 자신을 위해서 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똑바로 서서 간청합니다.
아이들에게 선한 의지를 주시고, 그들의 힘을 북돋워 주시고,
그들의 수고에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아이들을 편한 길로 인도하지는 마옵소서.
그렇지만 아름다운 길로 인도하옵소서.
제가 드리는 간청에 대해 단 한 번 드리는 불입금으로
저의 하나뿐인 찬송을 받아 주시옵소서.
그것은 슬픔입니다.
저의 슬픔과 노동을 드립니다.  〈한 교사의 기도 - 120쪽〉


 우리들 믿음이 오롯이 이루어지자면, 하나로 크게 빛을 보자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면, 사람 아닌 목숨붙이를 아끼는 하느님을 느끼고, 사람 아닌 목숨붙이와 함께하는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 아닌 목숨붙이를 어루만지는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이지 싶습니다.

 낮밥을 먹으려고 밥술을 푸다가 천장을 올려다봅니다. “미안하다, 미안해, 미안합니다.” 세 마디를 속으로 읊습니다. 그러나 “하지만 내가 사람으로 사는걸…….” 하는 핑계가 이어집니다. 참말로 내가 사람으로 살기 때문에 저 새끼쥐를 끈끈이로 잡아 죽여도 되는가요?


.. 그가 말하는 이야기는 다만 단순한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문제와 시련과 고통으로 얼룩진 삶의 현장이 늘 그를 따라다녔다. 하루를 넘기기가 버거웠고, 하루의 과제를 해결하느라 늘 허덕이며 씨름하였다. 그는 실천을 소중히 여겼다. 온통 실천과 뒤범벅이 되어 생을 불태웠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 그의 이야기는 읽기가 그리 쉽지 않다. 또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그 맛은 자극적인가 하면, 때로는 깊고, 때로는 아련한 아픔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쓴 동화들은 아주 재미가 있다. 그의 글은 흔히 논리적인 주장이나 체계적인 이론을 기대한 독자들을 당혹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언제쯤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이나 설명이 나올까 하는 기대를 충족시키지도 않는다. 장르를 구분하기 좋아하는 문학도들은 그의 글을 두고 혹 당혹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글쓰기야말로 읽는 이들이 창조적 사유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독특한 힘이었다 ..  〈옮긴이 말 : 18∼19쪽〉


 쥐를 잡았기에 낮이나 밤에 벽을 긁는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쥐들이 제 책을 갉아먹을 걱정도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무겁습니다. 외려 답답합니다. 그렇지만 다시 쥐가 끓어 사각사각 극극 긱긱 하는 소리가 들린다면? 틀림없이 그때 또다시 끈끈이를 다시 찾아서 어딘가에 놓지 않을는지. 못난 사람이라서. (4340.1.1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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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깍지 사랑 - 추둘란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수필집
추둘란 지음 / 소나무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 책이름 : 콩깍지 사랑
- 글쓴이 : 추둘란
- 펴낸곳 : 소나무(2003.12.13.)
- 책값 : 8000원


 ‘신년하례회’가 무엇을 하는 자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시민사회단체 사람들이 모인 ‘신년하례회’ 자리에 온 국무총리와 총리 경호원들이 일으킨 자그마한(어찌 보면 큰) 잘잘못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활동가로 일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올 한 해에도 힘내어 잘 일해 보자는 뜻으로 마련한 자리이니, 이 자리는 다름아닌 시민사회단체 사람들이, 또 시민사회단체에 도움을 주는 우리들 보통사람이 주인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 어쩌다가 ‘초대’가 되거나 ‘손님’으로 온 정치인과 행정관료가 주인처럼 굴곤 합니다. 더욱이 이들은 ‘한 말씀’ 하는 인사도 다른 사람보다 자기들이 먼저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 자기들은 ‘일정이 바빠서’ 빨리 한 말씀한 다음 다른 자리에 가야 한다면서. 그리하여 이들 정치인과 행정관료는 남들 앞에서 자기 할 말만 실컷 한 다음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안 듣’습니다. 정치인과 행정관료가 보여주는 이런 모습들은, 그 사람들이 정치나 행정을 어떻게 하는가를 잘 알려주지 싶습니다. 사람들이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무엇이 문제라고 그렇게 힘주어 외쳐도 귀기울여 한 번이라도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잖아요. 문화정책이든 경제정책이든, 또는 자전거정책이든 교통정책이든, 보통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목소리가 한 번이라도 정치와 행정에 제대로 담긴 적 있을까요. 허울뿐인 세미나를 사람들도 잘 알지 못하는 때에 후다닥 치르고 대충 밀어붙이고만 있지 않은가요.


.. 빨리, 또 크게 자라지 않는다 하더라도 민서는 민서의 속도대로 자라나, 이 사회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민서가 장애인이라고 해서 넘치는 보호에 익숙해지지 않기를,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차별에 주눅 들지 않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선 민서 스스로 자신의 자리에서 중심을 잘 잡아야 할 것입니다 ..  〈52쪽〉


 사회가 사회다운 모습으로 굴러가지 않는 이 나라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일이란 참 팍팍하고 고단합니다. 그런데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일 못지않게 비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일도 팍팍하고 고단합니다. 여자로 살아가는 일도 고단하지만 남자로 살아가는 일도 고단하며, 대학교까지 마친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일도 고단하지만 가방끈 짧은 무지렁이로 살아가는 일도 고단합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누구한테나 다 다르게 있는 재주와 솜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같은 일을 해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갈리기 때문에, 이제 좀 나은 자리에 올라서면 옛일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르는’ 모습 때문에, …….

 자전거로 시내를 달리노라면, 곧잘 뒤에서 빵빵거리는 자동차를 만납니다. 이때는 으레 깜짝 놀랍니다. 자동차 경적이 얼마나 큰가요. 차에 탄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누르는 경적이지만, 앞뒤 왼쪽 오른쪽 차근차근 마음쓰며 달리던 자전거꾼은 난데없는 큰소리에 심장이 벌렁벌렁합니다. 자동차가 빵빵거리는 까닭은 자전거가 길에서 거치적거리기 때문, 그러니까 ‘자동차님이 나아가는 앞길을 막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는 자동차끼리도 빵빵거립니다. 건널목 신호가 바뀌자마자 바로 부웅 하고 지나가지 않으면, 뒷차는 1초도 안 기다리고 바로 ‘빠아아∼ㅇ’ 하고 몇 초 동안이나 경적을 울립니다. 좁은 골목길을 천천히 빠져나가는 앞차한테도 빵빵거리는 자동차요, 씽씽 달리는 고속도로에서도 자기보다 느리게 가는 앞차한테도 빵빵거리는 자동차입니다. 이들 자동차꾼은 차에서 내려 길을 걸을 때, 자기 앞에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있어도 ‘뷁!’, ‘꽥!’, ‘야!’ 하고 소리지르며 비키라고 할는지.


.. 오히려 누군가 틀린 답을 칠판에 쓸라치면, 마치 자신이 틀리기라도 한듯 위로해 줍니다. “알믄 여기 왔것슈? 모르니 배우러 왔쥬.” 겨울이라고 해서 할머니들이 마음 편히 쉬는 것은 아닙니다. 농사철엔 농사철대로 뼈빠지게 일하고, 겨울엔 도라지를 까거나 냉이를 캐 돈 사는 것이 할머니들의 일입니다. 그렇게 오십 년, 육십 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올겨울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그 아까운 시간을 쪼개 한 자 한 자 글자를 읽고 쓰고 있습니다 ..  〈40쪽〉


 우리 세상이 다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돈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남 앞에서 우쭐거리거나 마구 날뛰지 않으면서, 돈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쪼들리거나 고달프지 않으면서 함께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글을 아는 사람은 아는 대로 좋은 이야기를 한가득 들려주려고 애쓰고, 글을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해도 넉넉하고 즐거이 함께 어울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1등만, 첫째만 잘사는 세상이 아니라 2등이나 10등이나 꼴등도, 둘째나 넷째나 막내도 잘사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콩깍지 사랑》은 천천히 걷는 걸음을, 나즈막하게 읊는 이야기를, 한 손을 슬쩍 옆사람 한쪽 어깨에 얹고 어깨동무하며 함께 살자는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4340.1.10.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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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가 어때서? - 65세 안나 할머니의 국토 종단기, 2009년 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황안나 지음 / 샨티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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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9 - 내 나이가 어때서?
 : 예순다섯 황안나 할머님 걷기 여행

 
- 책이름 : 내 나이가 어때서?
- 글쓴이 : 황안나
- 펴낸곳 : 샨티(2005.8.5.)
- 책값 : 10000원

 
 〈1〉 익산 사는 할머님

 
 익산에 사는 할머님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만두게 되었지만, 이오덕 선생님 원고 갈무리를 하면서 알게 된 분입니다. 이 할머님은 이제 여든에 가까운 나이인데, 일흔 넘은 나이에 글쓰기에 눈을 떠서 당신이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틈틈이 글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쓰는 글이 아니라 ‘우리 말 다듬기’까지 하면서 쓰는 글입니다. 할머님 나이와 대면 반도 안 되는 젊은 사람들은 ‘우리 말 다듬기’는커녕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엉망인 글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가실지 알 수 없는 익산 할머님은 부지런히 국어사전 들여다보고, 《우리 글 바로쓰기》나 《우리 말 살려쓰기》 같은 책을 뒤적이면서 당신이 여태껏 잘못 알고 잘못 쓴 말이 없는가를 살핍니다.


.. 그곳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우리는 통일전망대를 찾았다. 2천 리 길을 걸어서 도착했던 곳. 그 먼길을 걸어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나는 내 발로 내 일기를 땅 위에 꾹꾹 눌러 쓴 거였다! ..  〈252쪽〉


 익산에 사는 그 할머님은 눈이 안 좋습니다. 늦은 나이에 ‘책읽는 재미’를 붙이셨다는데, 눈이 아파서 책을 보기 어려우니 참 슬프고 힘들다고 하소연합니다. 젊을 적에는 딸아들 뒷바라지하느라, 또 남편이 정년퇴직하고 집에서 지내는 동안 집안살림 꾸리랴 책 한 권 읽을 사이 없이 지냈다고 합니다.


.. 나는 지금까지 남에게 해 끼치지 말고 신세지는 짓은 하지 말자며 살아왔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면서 남의 신세 안 지고 살 수가 있나? 돌아보면 모든 게 다 신세진 일뿐이다. 농부들 덕에 먹고, 옷 짓는 분들 덕에 입고, 신발 만드는 분들 덕에 이렇게 몇날 며칠을 걷고 있으니 ..  〈78쪽〉


 낮에는 조그맣게 가꾸는 밭에 나가서 밭일을 하고,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와 어두운 눈에 힘을 주어가며 셈틀 자판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글을 쓰신답니다. 반 해쯤 앞서는 인터넷도 배우셨는데, 아직은 인터넷편지만 보낼 줄 알고 다른 것까지는 못 배우셨다고 하더군요.


.. 사람 하나 볼 수 없는 호젓한 산길을 걷는다. 고요한 길을 걷자니 마음이 절로 경건해진다. 대자연은 그 자체로 큰 예배당이며 사찰이 되어 주는 놀라운 힘을 지녔다. 가식이 없고, 억지가 없고, 포장이 없는 자연 앞에 서니 나 역시 발가벗고 나를 마주하고 싶어진다. 지금껏 살면서 알게 모르게 저지른 잘못들, 남에게 준 상처들이 얼마나 많았으랴. 사람에게뿐 아니라 이 자연의 뭇 생명들에게는 또 어떠했을까? ..  〈166쪽〉


 익산 할머님이 못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농사지을 줄 알고, 집안일 할 줄 알고, 집안일에서도 장 담그기부터 옷짓기까지 두루 할 줄 압니다. 언뜻 보면 ‘돈되는’ 일이란 없다고 하겠지만 하나같이 ‘사람되는’ 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보듬고 돌보는 일이지 싶습니다. 남 앞에서 자기를 뽐내거나 내세우거나 드러낼 만한 자랑거리는 없지만, 당신 스스로 좋아하고 즐기고 홀가분하게 삶을 가꾸거나 꾸릴 일거리와 놀이감이 넉넉한 분이라고 느낍니다.

 
 〈2〉 온갖 세상사람들

 
 내일쯤 서울로 책방 나들이를 떠날까 합니다. 이레 동안 시골집에서 조용히 글도 쓰고 책도 읽고 혼자서 밥하고 빨래하고 이불 털고 지냈습니다. 여럿이 함께 먹는 밥도 맛있지만, 고구마 송송 썰어서 누런쌀로 지어 혼자 먹는 밥도 맛있습니다. 반찬은 배추속이나 김치나 참치. 때때로 된장 푼 국수를 삶아서 먹습니다. 이렇게 지내노라면 익산 할머님처럼 돈벌 일이란 없지만 돈쓸 일도 없습니다. 돈 나갈 구석이 있어야지요. 돈 나갈 구석이라면 서울 나들이를 하면서 사람들을 만날 때 술 마시는 자리에서, 책방을 찾아가면서 책을 사면서, 사진을 찍으면서뿐. 이때 빼고는 돈쓸 일이 참 없습니다.


.. 찻길 옆으로 걷다보면 군인들을 가득 태운 차가 지나가기도 했는데, 짓궂은 군인들이 던진 건빵에 얼굴을 맞은 적도 있었다. 꽤나 아팠지만, 뭐라고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고개 숙인 채 걷기만 했다 ..  〈34쪽〉


 자전거를 타고 충주에서 서울까지 가는 길은,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깝습니다. 올봄부터는 거의 자전거로만 다니는데, 틈틈이 고속버스도 탑니다. 여름과 가을에는 고속버스를 한두 번 탔던가. 겨울 들어 날이 추워진 탓에, 자전거가 몇 번 고장나는 바람에 고속버스를 타기도 했지만, 고속버스를 타면 텁텁한 공기가 마뜩지 않아 힘듭니다. 외려 자전거로 서울을 오갈 때가 시원하고 좋습니다.

 다만, 자전거로 318번 시골길을 지나 38번 국도를 잠깐 탄 뒤, 17번 국도를 지나고 42번 국도로 접어들어 용인 시내를 가로지른 뒤 탄천 자전거길에서 서울로 들어서기까지 자동차와 수없이 부대껴야 합니다. 마음씨 좋은 자동차 운전수도 많지만, 마음씨 고약한 찌질이 운전수도 많습니다.


.. 절뚝이며 식당을 찾아갔는데, 혼자인 걸 보더니 두 손 홰홰 내저으며 식사가 안 된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먹고 있는데…… 내 꼴이 거지꼴이었는지 몰라도 기분이 엄청 나쁘다. 아니, 진짜 거지라도 그렇지 ..  〈48쪽〉


 그런데 찌질이 운전수만 있지 않고 찌질이 자전거꾼도 있어요. 한강 자전거길을 탈 때 더러 부대끼는데, 값비싼 자전거에 장비를 갖추고 다른 사람들을 놀리는 이들, 또는 얕보는 이들, 또는 다른 사람 위험하게 마구 내달리는 이들. 이런 찌질이 자전거꾼을 보면, 이들이 자가용을 몰 때에도 찌질이 짓을 하지 않겠느냐 싶어 안쓰럽고 불쌍합니다. 한 번 살다가 가는 이 좋은 삶을 왜 저렇게 얄궂게 보내는가 싶어서요.


..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다가 ‘사회복지’라고 쓴 팻말 앞으로 갔는데, 담당 직원인 듯한, 머리를 들까불러서 올려붙인 총각이 끝도 없이 전화를 해대고 있었다. 가만 들어 보니 업무용 전화도 아니다. 할머니라고 깔보나? 눈꼬리에 살짝 힘을 줬더니 옆자리 아가씨가 무슨 일로 오셨냔다. 손에 들고 있던 신청서와 주민등록증, 통장과 도장을 쓱 내밀었더니, 받아들면서 “할머니, 통장 사본을 가져오셔야죠.” 하며 톡 쏘는 거다. 시치미 뚝 떼고 “사본이 뭔데요?” 했더니 나를 힐끗 바라보고는 말 없이 통장을 복사해서 접수를 시켜 주었다 ..  〈73∼74쪽〉


 서울 나들이를 와 보면 모두모두 놀랍습니다. 저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기는 했지만, 서울 같은 큰도시가 아니라서 그런지, 아직도 서울 나들이를 할 때면 시골놈 느낌을 지우지 못하겠습니다. 높은 아파트와 건물을 보면 ‘우와’ 하면서 고개가 젖혀지도록 올려다봅니다. ‘저 높은 아파트를 어떻게 올렸을꼬?’ 하는 말도 절로 나옵니다. 으리으리 비싼 자동차를 보면 ‘이야’ 하면서 ‘저런 비싼 차를 어떻게 찻길에 끌고 나올 수 있을까. 다치면 어쩔꼬?’ 하는 말도 쉬 튀어나옵니다. 길거리를 가득 메우며 바삐 걷는 사람들을 보면 ‘어어’ 하면서 ‘이 사람들한테 휩쓸려서 저리로 가면 안 되는데, 난 다른 데로 가야 하는데’ 하며 땀을 삐질삐질 흘립니다. 그래도 한 가지, 시골에는 없는 헌책방이 있기 때문에, 시골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반가운 책들이 곳곳 헌책방에 많이 있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숨이 막히는 매캐한 배기가스라든지, 구역질이 절로 나오는 소독냄새 짙은 수도물 세상인 서울이지만, 며칠만 잘 견디면 다시 맑은 바람과 물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꾹꾹 참고 견딥니다.


.. “아이구, 괜찮습니다. 전 강원도까지 걸어가려고 합니다.”
 두 손을 모으고 절까지 하면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에 난 할 말을 잃었다.
 “아, 제가 아주머니를 어떻게 할까 봐 그러세요?
 그는 불쾌해 하고 있었다. 자기 딴에는 선의를 베풀려고 한 건데 마치 내가 자기를 믿지 않고 의심해서 타지 않는 걸로 알았나 보다. 그랬다면 언짢을 만도 했을 거다. 나는 그저 연방 굽실대며 고맙단 말만 했다. 차는 먼지를 끼얹으며 떠났다. 차도 화난 듯이 보인다 ..  〈136∼137쪽〉


 사흘이나 나흘쯤, 때로는 닷새쯤 서울에서 나들이를 쭉 다닌 뒤 충주로 돌아갈 때면, 가방은 터질 듯이 꽉 찹니다. 짐수레를 끌고 왔다면 짐수레가 묵직해서 잘 끌리지 않을 만큼 책뭉치를 채워 싣습니다. 이리하여, 처음 자전거를 타고 서울로 올 때는 일곱 시간 안팎 걸리던 길이, 서울에서 충주로 돌아갈 때면 으레 아홉 시간은 넉넉히 걸립니다. 가다가 쉬고, 또 가다가 쉬고, 다시 가다가 쉬면서. 여름날 아침 일찍 떠나도 저녁에 해 다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닿습니다. 옷이고 가방이고 온통 땀범벅이요,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제 몸에서 나는 땀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언젠가 어느 술자리에서 제 옆에 앉게 된 어느 분은 “땀냄새 너무 나서 싫다”고 손사래를 치더군요. 그래서 저는 “화장품 냄새도 너무 싫어요.” 하고 대꾸했습니다.


.. 내가 먹은 건 대량 생산된 인스턴트 라면에 단무지에, 누가 먹을지 생각도 않고 만든 커피다. 그러니 그 안에 무슨 기운이 담겨 있겠는가. 배가 불러도 허전한 건 당연한 일일 게다 ..  〈179쪽〉


 올봄부터 자전거로 충주와 서울을 오갔으니,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철을 한 번뿐이기는 하지만 두루 겪은 셈입니다. 그동안 죽 겪어 보기로, 시골에는 참 사람이 없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뭐, 다 아는 이야기지요? 시골에 사람이 없다는 소리는. 젊은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더러 있다면 다방에서 커피 나르는 아가씨쯤 될까나. 한창 바쁜 농사철에도 논이나 밭에서 사람 구경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없는 사람품으로 농사를 짓자니 농약을 지치도록 뿌리는 농사를 지을 테고, 이런 농사가 아니고는 지금 농사일을 버틸 수 없구나 싶습니다. 말이 좋아 유기농이지, 도시사람들 입맛 돋군다는 유기농이지, 실제로 논밭에 엎드려서 풀을 뽑고 김을 맬 농사꾼 처지를 생각해 보셔요. 요새 배추 한 포기에 얼마 하는지 아나요? 10년 앞서 배추 한 포기 값이 얼마인지 아나요? 스무 해 앞서 배추 한 포기 값이 얼마인지 아나요? 자그마치 스무 해 앞서하고 지금하고 배추값이 ‘똑ㆍ같ㆍ습ㆍ니ㆍ다’.


.. 나는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반갑고 고맙다. 한 사람이 자유로워진다면 그만큼 이 우주도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그 자유로 인해 행복해지는 만큼 이 우주에도 행복의 기운이 생기는 거니까 ..  〈200쪽〉


 제가 사는 시골도 공기가 많이 나빠졌습니다. 땅값이 싸고 서울하고 퍽 가까운 편이라 그런지 온갖 공장이 다 들어섰거든요. 제가 사는 산기슭 집에서도 새로 공장터를 닦는 모습이 내다 보입니다. 아마, 충청도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이지 싶어요. 경상도도 전라도도 비슷하겠지요. 아니, 전라도는 좀 덜한 듯해요. 하지만 어느 시골이라고 다르겠어요. 더구나 땅 일구어 먹고살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이 나라에서, ‘일하는 시간은 가장 길고 받는 일삯은 가장 적은’ 농사꾼이 되도록 가르치는 교사도 학교도 하나 없는 이 나라에서, 무슨 시골에 어떤 희망이 있을는지요. 희망도 없지만 나날이 공기와 물이 더러워집니다. 오늘처럼 구름 한 점 없는 깊은 밤에는 쏟아져내릴 듯 별이 보여야 하고 은하수도 보여야 하는데, 웬걸요, 별만 좀 많이 보인다뿐이지, 또 이 별도 지난해만큼 보이지도 않아요. 게다가 밤에 울던 소쩍새와 휘파람새는 이제 이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3〉 살아갈 길이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길일까요. 어떤 삶이 잘 꾸리는 삶일까요. 꼭 알맞는 답이 있을까요. 저부터 제가 잘 살고 있는지 못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저 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제 몸이 가자는 대로 살 뿐입니다. 더럽고 나쁜 것하고는 담을 쌓으려 하고, 좋고 깨끗한 것을 찾으려 할 뿐입니다. 소중한 제 삶을 알차고 아름다운 것으로 채우거나 가꾸려고 할 뿐입니다. 먹고살자면 어느 만큼 돈이 있어야 하기에 밥벌이가 되는 일을 하기는 하지만, 돈 많이 버는 일은 안 합니다. 제 살림에는 많은 돈까지 있지 않아도 되니까요.


.. 내가 살아온 길 옆에서 본 사람들은 말한다. 어떻게 이혼하지 않고 살았느냐고. 그건 내가 남보다 참을성이 많다거나 대단해서가 아니다. 남편이 그토록 오랫동안 말못할 고생을 내게 안겨 줬지만 그가 노름을 한 것도 아니고, 술이나 여자로 재산을 탕진한 것도, 게으른 것도 아니다. 다만 하는 일마다 운이 따라주지 않은 것뿐이다 ..  〈95쪽〉


 자전거 고장이 잦기 때문에, 고장 적고 튼튼하고 잘 나가는 자전거 한 대, 아니 두 대쯤 장만하고픈 마음 굴뚝같습니다. 두 대를 번갈아 타면서 틈틈이 손질해서 오래오래 타고픈 마음 하늘같습니다. 하지만 값싼 자전거 한 대 새로 장만할 살림이 안 되고, 지금 타는 자전거를 알뜰히 손봐서 타야지 싶기도 합니다. 그래, 저는 자전거 타기를 즐기는 사람이지, 자전거 모으기를 즐기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 나 역시 아직도 과거의 아픔을, 증오를 움켜쥐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나의 미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올가미가 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살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내 남은 소중한 시간들을 미움과 원망으로 허비하랴. 이만 하면 됐다 싶다. 바람 한 줄기가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  〈170쪽〉


 아무튼. 자전거 타기를 즐길 때 어려운 일이 있다면, 앞서 이야기한 찌질이 운전수와 찌질이 자전거꾼 때문입니다. 이밖에도 교통정책이 오로지 자동차 중심으로 되어 있는 형편, 자전거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환경이 하나도 없는 대목, 자전거가 다니는 길이 너무 울퉁불퉁하고 많이 패여 있을 뿐 아니라, 거님길엔 턱이 너무 높아서 아찔할 때가 잦기도 한 일도 걱정입니다. 이리하여 즐겁게 자전거를 타다가도 ‘에이, 썅!’ 하면서 입에서 궁시렁궁시렁 욕이 튀어나오고 이맛살을 찌푸리곤 해요. 걷는사람도 자전거꾼도 자동차모는이도, 다 함께 즐거울 길이란 없을까요. 이런 일은 마음쓸 만하지 않을까요.

 
 〈4〉 고이고 싶지 않은 마음

 
 한 자리에 고이고 싶지 않습니다. 한 곳에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 비록 제가 있는 자리가 아주 느긋하고 높으며 멋들어졌다고 할지라도. 제가 머물고 있는 곳이 돈 걱정 없고 언제나 홀가분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할지라도.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 얼마만큼 즐길 수 있는지 부딪히고 싶습니다. 제 마음에 쏙 드는 책 하나를 골라서 두고두고 읽을 수도 있어요. 많은 분들이 성경을 품에 안고 살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 마음에 쏙 드는 책을 한 권만이 아니라 백 권쯤, 아니 천 권쯤, 아니 만 권쯤, 될 수 있다면 십만 권도 좋고 백만 권도 좋습니다. 제 힘이 닿는 만큼 만나고 싶어요. 만나기 힘들다면 제 손으로 제 마음에까지 들 만한 책을 써내고 싶습니다.


.. 그렇다! 나는 많이 변했다. 평생을 삶의 짐에 눌려서 지냈다. 그러나 이제 앞으로는 자유롭게 살아갈 것이다. 남들은 나더러 늦었다고 말하지만 뭐가 늦었단 말인가! 나는 지금이 좋다. 나를 얽매게 하는 게 없고, 거칠 게 없는 나이, 어딜 가서 혼자 머물러도 좋은 나이, 아무 옷이나 편하게 걸쳐도 좋은 나이, 아무도 경계하지 않는 나이, 그래서 더없이 편한 나이…… 내 나이가 나를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지! 나는 지금 내 나이가 참 좋다 ..  〈244∼245쪽〉


 사진 한 장을 찍어도 ‘오늘 찍은 사진보다 더 나은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올 한 해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보다 더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사진 여러 만 장을 찍었어도, 어느덧 10만 장 넘게 찍었는지 몰라도, 사진찍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아니, 그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손아귀에 힘이 있다면 앞으로도 사진기를 늘 꾹 움켜쥐면서 제 눈길에 살가이 다가오는 우리 삶터를 고이 담아내고 싶습니다.


.. 이제는 뭐든 사 달라면 사 줄 수 있는 영감이 되었는데, 이젠 내가 갖고 싶은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뭘 입어도 어울리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  〈21쪽〉


 예순다섯 나이에 남녘당을 두 다리로 가로지른 황안나 할머님이 쓴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책을 한 해하고도 석 달 만에 다 읽어냈습니다. 2005년 8월 16일에 첫 장을 넘겼고, 2006년 11월 25일에 마지막 쪽을 덮었습니다. 참 더디 읽은 셈인데, 더디 읽고 싶었습니다. 아니, 마음먹고 붙잡으면 두어 시간에도 읽어낼 수 있지만, 일부러 야금야금 읽었습니다. 야금야금 읽다가 책꽂이에 꽂아둔 채 잊기도 했습니다. 좀 묵히려고요. 묵혔다가 다시 꺼내어 읽으려고. 다 읽고 한 번 더 읽을 수도 있지만, 한꺼번에 황안나 할머님 삶을, 황안나 할머님이 그동안 어렵사리 어깨에 올려놓고 있다가 스무사흘 만에 가까스로 통일전망대에 내려놓은 짐을, 찬찬히 헤아려 보고 싶었습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책은 황 할머님이 스무사흘에 걸쳐서 땅끝마을부터 통일전망대까지 혼자서 두 다리로 걸어간 이야기를 적바림한 책입니다만, 고작 스무사흘 겪어냄을 적바림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예순다섯 해 삶을 스무사흘 동안 돌아본 이야기로 이 책 하나에 오롯이 담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나이 서른둘 어설픈 나이로는 이 책을 함부로 읽어제낄 수 없겠더군요.

 길을 걷다가 펑펑 울기도 하는 할머님 삶을 어찌 한숨에, 한달음에, 후다닥 읽어제낄 수, 읽어버릴 수 있나요. 할머님 걸음걸음 하나하나 조곤조곤 함께 따라 밟으며 차근차근 지근지근 차곡차곡 따라 읊었지요. 할머님이 웃을 때는 나도 따라 웃고, 할머님이 눈물 흘릴 때는 나도 따라 울면서. 서운한 일을 겪을 때는 저도 따라 서운하고 반가운 일을 만날 때는 저도 따라 반가우면서.

  책이란, 책을 써낸 사람 삶이 담기기 마련이니까. 책에 담긴 글을 써낸 사람 삶을 헤아린 출판사 사람 삶도 함께 담기기 마련이니까. 책펴낸 사람들 마음을 헤아려 땀흘려 일한 책마을 사람들(인쇄-제본소-지업사-코팅회사-배본사 들) 손때도 함께 묻어나기 마련이니까. 책마을 사람 모두가 바라는 마음을 고이 담은 책방 사람 손길이 마지막으로 배면서 책꽂이 한켠에 꽂히기 마련이니까. 이런 책을 그저, 내처, 빨리빨리 읽어내릴 수는 없습니다. 늘 곁에 두면서, 가방에 언제나 넣어 다니면서, 똥누러 뒷간에 가더라도, 술 한 잔 걸칠 동무를 만나는 길에도, 졸려서 잠자리에 들기 앞서도, 밥 한 그릇 뚝딱 비우는 사이에도, 한결같이 옆에 놓고 즐기는 책인걸요.

  아쉬움 한 가지. 황안나 할머님은 남녘땅 가로지르기를 해낸 뒤, 남녘땅 바닷가 훑기까지 해냈습니다. 남녘땅 바닷가를 황해, 남해, 동해에 걸쳐 죽 훑은 이야기도 책으로 묶어내마 하고 다짐하셨다는데, 아직 이 다짐을 몸으로 옮기지 않으셨더군요. 하지만 기다립니다. 예순다섯 해가 지나고서야 겨우 남녘땅 걷기를 할 수 있었는데, 예순다섯 해 삶이 비로소 책 하나로 묶여 나왔는데, 바닷가 걷기 이야기도 기다려야 만날 수 있겠지요. 아직 앙금이 가시지 않고, 채 털어내지 못한 아픔과 힘겨움을 선뜻 내려놓을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황안나 할머님 둘째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겠지요. 기다립니다. (4339.12.2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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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아 극장
엔도 슈사쿠 지음, 김석중 옮김 / 서커스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문학] 유모아 극장 (엔도 슈사쿠)  2006.12.24 00:13

- 책이름 : 유모아 극장
- 글쓴이 : 엔도 슈사쿠
- 옮긴이 : 김석중
- 펴낸곳 : 서커스(2006.11.4.)
- 책값 : 8800원


 지난달 끝무렵, 서울 마포구 공덕동을 찾아간 일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퍽 예전부터 알고 지낸 분을 만나 낮밥을 얻어먹었습니다. 날이 제법 쌀쌀해 술 한 잔도 곁들였습니다. 술 한 잔 걸치니 몸이 좀 녹더군요. 자전거를 타고 오며 길을 헤매느라 찬바람을 많이 맞았는데, 한결 나았습니다.


.. “이봐. 이봐. 노상방뇨는 일본의 법률에 벌금형이라는 것을 모르나? 파출소에 가자.” 경관의 말투를 흉내내 큰소리로 꾸짖었다.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상대는 몸을 이쪽으로 틀면서 돌았다. 그 순간 알았던 것이다. 범인은 글쎄, 내가 가자고 했던 그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젊은 경관이었다. “이, 이, 이거야…… 죄송…… 하게 됐습니다.” 그는 바지의 단추를 채우는 것조차 잊고 송구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분명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삐질삐질 솟아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순찰을 돌다가, 그만, 참을 수가 없게 되어서…….” “아니, 괜찮아요.” 나는 서글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  〈92쪽〉


 공덕동에서 만난 사람은 한때 ㅎ신문에서 판매부 일을 했고, 어느 날 마음먹은 일이 있어서 신문사를 그만두고 ㅇ이라는 출판사에 들어가 편집부서 한 곳에서 일을 맡았습니다. 때때로 헌책방에서 마주치기도 해서 헌책방 가까이에 있는 맥주집에서 술잔을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안정된 돈-이름을 얻을 수 있는 ㅇ출판사 자리를 떨쳐나오고 1인출판사를 차립니다.


.. “앗, 회충이다. 조심해.” “뭐라고, 회충?” “그래. 장 속에서 자네 여동생의 영양을 빨아먹고 있는 회충이다. 자네는 어떻게 여동생에게 구충제도 먹이지 않은 거야?” “이봐, 지금 그런 말 하고 있을 겨를이 없어. 메스로 죽이는 거야. 이 회충을.” 가까이 다가온 회충을 메스로 찔렀다. 하얀 액체가 주위로 흘러나왔다. 회충이 날카로운 입을 벌리고 온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  〈29쪽〉


 1인출판사를 연 분은 사무실을 따로 낼 돈까지는 없기에, 당신이 아는 제법 큰 출판사 사무실 한켠에 책상 하나 빌려서 전화 한 대 놓고 일을 합니다. 먹고살기 어려운 세상이라고, 작은 출판사는 더욱이 살아남기 어렵다고 하는 판인데, 참 대단한 용기로 일을 벌였습니다.


.. 그때, 나와 쏙 빼닮은 얼굴의 남자가 내 쪽을 향해 빙긋이 웃었다. 나와 똑같은 얼굴의 뺨에는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와 똑같은 얼굴이, 나를 조소하듯이 빙긋이 웃었다. 저것은 나의 분신이었다. 나의 분신이, 매일 전서구처럼 직장을 통근하고, 점심시간에는 카레라이스를 먹고, 그리고 한 달에 두 번 아내한테 들키지 않게 가슴을 조마조마하며 바람을 피우고 있는 나를 비웃고 있었다 ..  〈167∼168쪽〉


 소설책을 오랜만에 펼쳤습니다. 소설을 쓴 ‘엔도 슈사쿠’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면서, 일본 소설은 여태 몇 권 읽지 않았으나, 당신이 처음 일을 벌여서(출판사 차리기) 손수 우리 말로 옮기기까지 한 책(첫 번역책)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런데 웬걸. 생각 밖으로 재미를 느낍니다. 금세 읽히는군요. 소설이란 이런 거였나 하고 새삼스레 생각하면서, 이 책 하나 엮어내려고 땀을 흘렸을 분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가 제대로 몰라서 그렇지,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큼직한 책방에서도 묻히는 책이 얼마나 많을까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 가는 책은 얼마나 많으며, 딱 한 번이라도 읽는이 손에 쥐어지지 못하는 책, 평론가들 칭찬이든 깎아내림이든 비판이든 추켜세움이든 한 번이라도 들어 보지 못하고 역사에 묻히는 책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예전에는 ‘판매국 아저씨’라 했다가(그때 그분 나이는 서른도 안 되었을 텐데), ‘편집장 아저씨’라 바꾸었다가, 이제는 ‘사장 아저씨’로 바꾸어 부르는 선배가 어느 날 전화를 걸어 옵니다(그러고 보니 아직 장가도 안 갔는데 마구 ‘아저씨’라고 했네요).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책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으니 참 힘들다고. 그래, 참 힘든 세상입니다. 좋은 책을 내도 좋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사람이 적은 세상, 돈을 처바른 책을 내도 돈처바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 그런 세상입니다. 그래서 엔도 슈사쿠라는 분은 《유모아 극장》이라는 이야기책을 이런 세상에 내놓았을까요. (4339.12.2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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