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혹한 비평 - 이현식 문학평론집
이현식 지음 / 작가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 책이름 : 곤혹한 비평
- 글쓴이 : 이현식
- 펴낸곳 : 작가들(2007.6.25.)
- 책값 : 13000원



 이 책 하나 28 ― ‘어려움’을 뚫고 나온 문학평론 하나
 : 이현식 문학평론, 《곤혹한 비평》

 

 〈1〉 한일축구, 여수박람회, 겨울올림픽


 한국과 일본이 축구 경기를 벌인다고 할 때면, 열 가지 일을 제쳐놓고 축구 경기를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분이 제법 많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반칙을 해도 좋으니 이겨야 한다’. 이때 저도 한 마디 대꾸합니다. “한국이 져도 좋으니, 반칙을 안 하는 나라가 이기면 좋겠습니다.”

 지저분하게 경기를 한다든지, 성의 없이 땀 안 흘리는 경기를 한다든지, 일찌감치 두 손을 들고 온힘을 다하지 않을 때면, 운동경기 중계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솜씨와 재주가 몹시 뛰어나다고 해도, 맞은편 선수를 깎아내리거나 얕보거나 놀린다면, 이런 선수들은 조금도 달갑지 않습니다.

 지더라도 웃어야 하고, 지더라도 땀흘려야 하며, 지더라도 다시 애써서 다음 번에 이기도록 마음을 기울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늘 이겨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경기를 치르는 줄거리가 중요하지, 지고 이기고 하는 열매는 다음 차례입니다. 이기면 이긴 대로, 지면 진 대로 즐거운 일이 운동경기요, 경기를 준비하는 동안 흘린 땀방울을 소중히 여기는 운동경기라고 느낍니다.


.. 4ㆍ19세대의 세대로서의 정체성은 온통 한글, 다시 말해 문화사적 의미에 가려 정치적 의미는 달아나 버린다. 1980년의 항쟁과 탄압 역시 김현에게 오면 ‘폭력’이라는 불투명한 단어로 바뀌어 버린다. 그가 1980년대에 했던 작업들, 예컨대 지라르에 대한 연구나 기타 그의 비평적 행위들에서 그가 폭력의 의미를 파고들었다는 점이 갖는 의의는 물론 높이 살 일이지만, 폭력이란 말은 또 얼마나 추상적인가? 그 언어로는 1980년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건 ‘폭력’이라는 보통 명사로 지칭되기에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일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현은 이 대목에 오게 되면 억압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그 특유의 열린 반성적 사유로 파악하기보다는, 자기만의 성으로 완강하게 움츠러들어 왜곡시켜버린다 ..  〈29쪽〉


 “관람객 795만 명이 찾아 10조 원의 생산유발과 5조원의 부가가치, 15만 명의 고용창출 효과가 예상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적인 파급효과도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나 2002년 한·일 월드컵보다 파급효과가 큰 것이다.(오마이뉴스 2007.11.27.)”는 기사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습니다. 올해 4월, 충주에서 인천으로 살림을 옮기며 들어야 했던 소식인 ‘아시아경기대회 인천 유치’에 못지않은 씁쓸함 때문입니다.

 10조 원을 벌어서 5조 원이 남는다고 하면, 이 5조 원으로 무슨 일을 하나요. 15만 사람한테 일자리가 주어진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고, 이들이 얻는 일자리는 무엇을 하며 보람을 느끼는 일자리이며, 이 일자리를 얻은 사람들이 돈을 벌어서 어디에서 어떻게 쓸 테며, 이 돈은 우리 자신한테, 우리 삶터에 어떻게 보탬이 되나요.

 795만이라는 숫자를 어떻게 셈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만한 숫자가 한국땅을 밟든 더 많은 숫자가 한국땅을 밟든, 이들이 묵을 잠자리는 어떻게 풀지요? 새 호텔을 잔뜩 지으면 될까요? 새 아파트를 허벌나게 올려쌓으면 될까요? 이들이 타고다닐 교통편은 어떡하지요? 이들이 먹을 밥은 또 어디에서 어떻게 마련하나요. 식량자급율이 30%도 안 되는 이 나라에서 이들한테 팔아치울 먹을거리는 죄다 나라밖에서 사들여서 시세차익 남기기로 돈벌이를 해야 하는지요?


.. 김현은 이 글에서, 적어도 저항적 폭력에 대해서는 그 특유의 맥락적 사유, 반성적 이성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억압당해 온 사람들의 저항으로부터 비롯된 폭력이 갖고 있는 위험성을 비판하되, 그는 그것의 맥락을 열린 자세로 접근하지 못한다. 그는 드러난 폭력에만 집착한다. 그 이유는 그것 역시 억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억압으로 전화될 수도 있다는 점은 사실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전에 그것이 폭력으로 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맥락을 드러내는 일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저항에 대한 왜곡이 될 수 있다. 대항 이념과 저항이 왜 개인의 자유로운 공간을 획득하려 하기보다 폭력으로 나아갔는지, 그리고 또 그것이 왜 또 다른 억압이 될 수도 있는지를 ‘사회ㆍ역사’적 맥락에서 사유하는 쪽으로 진전되었어야 한다. 그래야 억압과 폭력의 본질이 더 정확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이 훨씬 더 ‘김현’다운 모습이다 ..  〈31쪽〉


 평창 겨울올림픽 끌어들이기가 여러 차례 실패했을 때 ‘만세!’를 부르지는 않았지만, ‘후유!’ 하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한 번도 아닌 여러 번 우리들한테 ‘좋은 가르침’이 베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기울일 곳은 어디인지, 우리가 몸을 움직일 일은 무엇인지, 우리가 가진 돈이며 시간이며 땀방울을 쏟을 데는 어디인지를 넌지시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한 달에 천만 원을 벌어서 900만 원을 신나게 쓴다고 할 때와, 한 사람이 한 달에 백만 원을 벌어서 알뜰살뜰 40만 원을 쓰고 나머지 60만 원은 내 이웃이나 내 삶터 가꾸기에 쓴다고 할 때와, 한 사람이 한 달에 이십만 원을 벌어서 이웃돕기는 하나도 못하지만 제 앞가림하는 데에 허리띠 졸라매며 쓴다고 할 때, 어느 때가 우리한테 기쁨과 눈물과 웃음과 아름다움을 베푸는 일이 될는지요.

 저는 한 끼니에 밥 백 그릇을 먹지 않아도 좋습니다. 한 끼니 밥 한 그릇이면 넉넉하지만, 하루 두 끼니여도 좋고, 하루 한 끼니여도 괜찮습니다. 한 끼니 밥값으로 만 원짜리나 십만 원짜리가 아니라 해도 좋습니다. 한 끼니 밥값으로 300원이나 500원만 들어도 좋습니다. 한 잔 술값이 십만 원이나 백만 원짜리가 아닌 천 원짜리나 이천 원짜리라 해도 좋고, 동무들한테 얻어마셔도 좋습니다.


 〈2〉 우리가 살 집


 지난 토요일, 참여연대 박원순 님이 우리 일터인 도서관 나들이를 하셨습니다. 인천에 다른 볼일이 있어서 오신 김에, 〈스페이스 빔〉이라는 전시관을 찾아오셨다가, 헌책방 〈아벨서점〉 아주머니가 손수 마련한 ‘시 다락방’ 구경을 하러 가는 길에 저와 만나서 들어오셨습니다. 죽 둘러보시며 도서관 살림은 어떻게 꾸려가느냐고 물으시다가, “책도 파나요?” 하고도 물으시기에, “여기는 도서관인걸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 이 무렵 최일수나 정태용의 민족 인식은 커다란 반향을 얻지 못했다. 논의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들은 주류적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다. 사태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속단할 수 없지만, 당대의 문학계나 지성계, 넓게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되어 있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들의 주장 역시 냉전 이데올로기의 한 변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40쪽〉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켠에 자리한 〈스페이스 빔〉 전시관에서  금, 토, 일, 사흘에 걸쳐서 연극 공연이 있었습니다. 동네 한복판에 산업도로를 뚫어서 ‘남북축 고속화도로’로 만들고, 길 둘레 살림집을 싹 쓸어내어 아파트며 쇼핑상가로 재개발하려는 안상수 인천시장 정책이 어떻게 얼마나 말썽거리인지, 우리 삶을 갉아먹는지를 살며시 들려주는 연극마당이었습니다. 이 연극마당 구경이며 일손 거들기를 마치고 신포시장에 있는 닭집으로 가서 술을 한잔 걸치며 고단함을 풉니다. 밤 열두 시 나절, 닭집 문 닫을 때가 되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닭집 아저씨가 같이 한잔하자고 하셔서, 우리 무리도 닭집 아저씨하고 다른 곳으로 옮깁니다. 불 다 꺼지고 조용한 신포시장을 나와 뒤쪽 상가거리를 걷습니다. 1990년대 첫머리, 이곳 신포시장 둘레를 서울 명동거리처럼 꾸미겠다는 시 정책이 있어서, 크고작은 새 건물을 무던히도 짓고 옷집이며 밥집이며 술집이며 잔뜩 들어섰으나, 거의 모든 가게가 파리를 날리다가 쫄딱 무너졌습니다. 이즈음, 인천 연수동과 청학동 들에 수십만 채에 이르는 아파트를 올려세우고, 이 둘레에 있던 학교도 터를 팔아 그리로 옮기는 바람에, 이 거리를 찾아올 사람이 확 줄었거든요(이 때문만은 아니지만).


.. 지역문학은 자기가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생활 현장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70∼80년대 리얼리즘 문학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면서도 지역문학은 생활을 구체적인 자기 삶의 문제로 인식하고, 일상의 차원과 연계시킨다는 점에서 80년대 문학이 갖고 있는 한계로부터 탈출한다. 아울러 방향 없는 일상성과도 거리를 둔다는 면에서 90년대 포스트모던 문학과 스스로를 구별한다 … 인천이 갖고 있는 정서와 부산의 정서는 다르다. 자연환경도 다를 뿐더러 지역의 역사도 다르다. 자연히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삶의 방식도 다를 수 있다. 그런 정서와 풍토들, 거기에는 그 지역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 삶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 건강성, 그것의 문제성이 주목하자는 것이다. 80년대의 열정은 지역 안에서 구체화된 현실과 만날 수 있고, 90년대 애매한 일상의 모습이 지역 안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  〈59쪽〉


 ‘건설 경기’를 북돋우면 일자리도 늘고 경제지표도 올라간다며, 온갖 건설계획이며 재개발계획이 쏟아집니다만, 이런 ‘조금 묵은 집 헐고 새 시멘트집 짓기’가 언제까지나 우리한테 돈벌이가 될까요. 재개발한다며 옛집 헐고 아파트 올리는 일은 참말로 우리한테 돈벌이가 될까요. 길어도 서른 해를 버티지 않게 짓는 아파트 문화는, 얼마나 우리 삶을 가꾸어 줄까요. 한 집에서 대여섯 해 살기도 힘들게 하면서 자꾸자꾸 이삿짐을 꾸리게 하는 우리 사회 우리 땅에서는, 참말로 누가 집임자요 땅임자일까요.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다섯 평짜리 작은 골목집보다, 빈 방이 남아도는 쉰 평짜리 아파트가 더 살기 낫거나 아름답다는 ‘생각(이미지)’은 누가 심고 있으며, 이런 생각에 왜 우리들이 끄달려야 하고, 우리 사회는 왜 이런 쪽으로 흘러야 하나요.


.. 나는 두 가지 현실이 지역 차원에서 보다 첨예하게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즉 중앙의 보수적이고 구태의연한 문단구조가 더욱 극명한 형태로 뿌리깊게 존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위에서 지적한 가능성들이 싹트고 있는 것이다. 중앙문단 중심의 보수적 문인 조직은 오랜 기간 동안 조직 차원의 개혁 노력이 미미했기 때문에 그 존재 의미는 거의 다해 버린 것이 아닌가 여겨질 만큼 문학의 창조적 역량을 잃어버렸다. 남은 것은 형해화되어 버린 제도이며 조직이고 형식화된 권력일 뿐이다 … 적어도 내가 보는 한에서는 문학에 대한 열의나 능력보다는 예산과 이권의 다툼장으로 변해버린 것이 지방의 보수적 문인 조직이다. 여기에 값싼 문인 지망생들이 대거 몰려들어 그런 분위기에 일조한다. 세력을 만들고 파벌이 형성되면서 지방문단 조직은 권력기관이 된다 ..  〈65쪽〉


 술집에서 나와 걷습니다. 시간은 벌써 두 시, 세 시……. 몸은 고되지만 잠은 오지 않고, 술은 들어갔으나 얼근하지 않고, 터덜터덜 골목골목 사잇길로 천천히 뚜벅뚜벅 걷습니다. 고개를 살짝 기웃하면 집안이 들여다보이는 집들,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면 집안 사람들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는 집들, 창문 안쪽 살림살이가 훤히 보이는 집들. 스무 해 앞서도, 마흔 해 앞서도, 한국전쟁 때 미군 함포사격을 맞는 바람에 새로 올린 집도 많지만 그때에도 살아남아서 고이 이어오고 있는 골목집들. ‘독립운동을 했건 일제부역을 했건’ 아랑곳하지 않고, ‘사상분자가 많이 사는 동네’라고 해서, 일부러 온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함포사격을 오래도록 한 뒤 ‘인천상륙작전’을 하느라 애꿎은 백성들, 서민들, 밑바닥 사람들, 보통사람들 목숨이 하늘하늘 사라져 가야만 했다던 그 동네 골목길을 걷습니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제가 깃들이는 집은 1957년에 지어졌습니다.


 〈3〉 날씨


 아침햇살을 받으며 일어나 보니, 방 온도는 6도. 너무 쌀쌀하면 안 되겠구나 싶어 살짝 보일러를 돌립니다. 보일러 돌리는 김에 머리를 감고 빨래 넉 점을 합니다. 천으로 된 시장가방은 마당 담벼락에 널어 놓고, 긴양말 두 점은 모기장 위에 얹고, 바지 한 벌은 큰방 문고리에 겁니다.


.. 오늘날 우리의 문학상 제도는 어떤 형태로건 자본과 결탁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에 그 권위를 온전하게 확보하기 힘들다 … 우리는 베스트셀러 소설, 베스트셀러 시집이라고 해서 그것을 곧 훌륭한 문학 작품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학상 수상 작품이라는 레테르가 시장에서 소비자에게 상품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란 예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 인지도 높은 굵직한 문학상들의 제정과 운영에 애초의 순수한 취지가 영향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자본의 논리가 훨씬 더 크고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신경숙이 훌륭한 작가가 아니래서가 아니다. 조금 지명도 있고 팔릴 것 같은 작가를, 출판사마다 문학상을 수여한다는 이름으로 서로 앞다퉈가며 끌고가려는 현실이 눈에 빤히 보여 그런 것이다 ..  〈80∼82쪽〉


 마당에 나와 둘레를 둘러봅니다. 앞집 감나무는 두 알 남고 모두 털렸습니다. 감나무 임자는 몇 알 남겨 두기를 잊지 않습니다. 앞집 옥상마당에 고인 물이 살짝 얼어 있습니다. 그 옆집 옥상마당 빨랫줄에는 담요 한 장 널리고, 하늘빛은 파랗습니다. 구름 한 점 안 보입니다. 어제 그제 살짝 비가 듣더니 12월을 코앞에 둔 11월 막바지 하늘인데도 참 맑네요. 그리 쌀쌀하지 않으면서.


.. 추상적으로 규정된 개념어들이 너무 쉽게 사용되고 있어서 일단 문장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현대성’은 과연 무엇인지도 짐작하기 전에 거기에 욕망이 결탁되고, 또 그것을 비판한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개념적인 용어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데다가 문장을 충분히 풀어쓰지 않아서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은 아니다 … 나름대로 문학에 대해 공부도 하고 문학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고민한다고 하는 내가 잘 이해하거나 납득되기 힘든 글이라면, 평범한 문학 애호가들이 대부분일 일반적인 독자들도 이 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 〈98쪽〉


 겨울이 겨울 같지 않은 미친날씨가 끝나고 추위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겨울 찬비나 겨울눈도 아닌 봄비로 느껴지는 따순 비가 내렸습니다. 겨울비 내린 뒤면 더 추워져야 하는데, 오히려 따뜻해지면서 아침에는 안개도 피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날씨입니다. 덕분에 보일러는 덜 돌려도 좋아 기름 걱정은 덜할 수 있겠네요. 이만한 날씨에도 보일러를 팡팡 돌린다면 기름 걱정이 크겠지요. 자전거로 일터를 오가거나 두 다리로 걷지 않고, 자가용을 끌고 일터를 오간다면 기름 걱정이 크겠지요. 추우면 옷을 한 벌 더 입고, 일터에 가는 시간이 늦을 듯하면 저녁에 일찍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되는데. 배가 고프면 먹고 배가 안 고프면 안 먹으면 되듯이, 꽃그릇 흙이 마르는가 싶으면 물을 주고 촉촉하면 안 주어야 하듯이, 우리 삶도 있는 그대로 있는 만큼 느끼고 받아들이고 즐기면 될 텐데.


.. 이문열의 소설은 누구에게나 소설의 재미를 한껏 북돋고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매력을 갖고 있다. 이문열의 소설을 읽다 보면 누구나 자신이 지식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 그렇지만 그의 소설은 현실을 환기시키지 않는다. 아니면 현실의 특정 부분만 확대하여 과장한다. 그의 소설들에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거나 아니면 단순하게 방향이 잡혀 있다. 세계가 변해가는 과정, 삶이 흘러가는 과정은 그리 문제시되지 않는다. 세계가 변해가는 과정의 힘겨움, 삶이 진행되는 과정의 고통스러움이 세밀하게 포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렇게 되도록 짜여 있기 때문이다 ..  〈289∼299쪽〉


 시간은 어느덧 열한 시를 넘어섭니다.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옵니다. 이부자리 있는 데로 맑은 햇살이 비치니, 방 온도도 조금씩 올라가겠지요. 문득, 이 햇살을 그대로 보내기 아깝습니다. 이불 둘 걷어서 앞마당으로 나갑니다. 한손으로 뭉그러 잡고 한손으로 탁탁 텁니다. 잔먼지가 하늘에 폴폴 날립니다. 벽돌 둘을 대며 담벼락에 넙니다.

 이불을 넌 자리 옆으로 까마중 한 줄기 말라 있습니다. 봄에 줄기를 올려 여름내 까만 열매를 맺은 그 까마중. 우리 집에 놀러온 분들 가운데 도시내기는 손도 대지 않은 까마중이지만, 시골내기는 “엉? 까마중이 여기서 자라네?” 하면서 덥석 따서 먹었던 까마중. 다음해에도 고 자그맣고 까만 열매를 맺어 줄까요.


.. 작품의 배경이 조선 후기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쓰여지는 작품에서 이런 식의 언어가 과연 필요할지는 의문이다. 소설의 전후 맥락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이문열 소설에는 이런 식의 구투 어린 말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가 지닌 한문 교양을 드러내는 데는 흠잡을 데 없겠지만, 그건 권력의 언어고 억압의 언어다 ..  〈300쪽〉


 〈4〉 문학평론 한 권


 문학평론 《곤혹한 비평》을 읽습니다. 글을 쓴 이현식 님은 문학평론 등단을 한 지 열 해 만에 묶었다는 평론책 머리말에서 “문학 작품을 읽고 문학책을 사는 행위가 더 이상 흔한 일이 아닌 것이 요즈음의 세태”인데, 이런 문학평론 하나 내어놓는 일이 얼마나 쓸모있겠느냐며 걱정을 합니다.


.. 한국의 시민들은 도덕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쉽게 공감한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도덕적인 방식으로 현실의 문제를 우리 사회에 제기하였다 … 《난장이》를 지배하는 언어는 단문체의 도시적 언어이고 세련되게 다듬어진 말이다. 생활 속의 살아 있는 민중의 언어가 아닌, 일반화된 언어이다. 사투리도 거의 없고 비어나 속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정확하고 균형잡힌, 깔끔하게 다듬어진 언어가 《난장이》를 시종일관 지배하고 있다. 그런 언어를 통해 시민들은 《난장이》에 친숙하게 접근한다 … 독자들이 작품을 읽어가면서 이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난장이와 꼽추, 앉은뱅이라는 육체적 조건을 제외한다면 난장이들은 시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다만 경제적으로 조금 더 궁핍할 뿐이지, 전혀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니다 ..  〈315∼317쪽〉


 “야, 우리 책 보러 가자!” 하는 사람은 없고, “야! 우리 영화 보러 가자!”나, “야, 우리 놀러 가자!”나 “야! 우리 술 마시러 가자!” 하고 외치는 사람만 가득한 우리 흐름입니다. 동네 꼬마들은 고무줄놀이며 제기차기는 할 줄을 모르고, 동네 어른들은 당신 눈길을 트고 마음문을 열어 줄 일거리나 놀이감과는 자꾸만 멀어지는 우리 흐름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문학이 문학답게 펼쳐지며 읽히는 길에서 벗어나는구나 싶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자리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에, 문학이 문학답게 펼쳐지며 읽히는 자리에서 멀어지는구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곤혹한 비평》은 세상에 나왔습니다.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온갖 힘겨움을 제 몸뚱이로 껴안으면서. (4340.11.27.불.ㅎㄲㅅㄱ)


.. 문제는 서울과 지방이 아니라 권력과 억압의 체제이며, 그것을 해체하여 자유롭고 인간적인 새로운 질서를 재창출하는 것이다 ..  〈67쪽〉

 

[글쓴이 이현식 님은] 1966년 외가인 여주에서 태어나 친가인 인천에서 자랍니다.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대학원 국문과를 마치고, 1997년 〈문학과사회〉 평론 추천으로 등단합니다. (재)인천발전연구원 문화정책 연구위원을 거쳐 인천문화재단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인하대학교에 강의를 나갑니다. 《문화도시로 가는 길》, 《제도사로서의 한국 근대문학》, 《일제 파시즘 체제하의 한국 근대문학비평》 들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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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전태일 / 돌베개 / 1988년 10월
평점 :
절판



(ㄱ)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 돌베개,1998.11.1.
(ㄴ) 어머니의 길 / 돌베개,1990.11.30.



― 이 책 하나 27 : 쉰아홉 살이 된 전태일
 :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와 《어머니의 길》


 

 〈1〉 11월 13일


 만화잡지 《고래가 그랬어》를 정기구독하고 있습니다. 2003년 10월에 첫 호를 내고 어느덧 48호까지 나왔습니다. 상업만화와 학습만화만이 판치는 우리 나라에서, 아이들과 부모들과 교사들이 자기 마음밭을 다스리는 줄거리를 담은 만화잡지이면서도 정기독자를 4천 사람 남짓 모아서 꾸려가고 있으니 놀라우면서 반가운데, 이 만화잡지 《고래가 그랬어》에 꾸준하게 실려 온 만화로 〈태일이〉(최호철 그림)가 있습니다. 서울 청계천에서 옷 만드는 일을 해 오다가 1970년 11월 13일에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서 숨을 거둔 전태일 님 이야기를 다룬 만화입니다. 이 만화 〈태일이〉는 얼마 앞서 낱권책으로 묶여 1권과 2권이 선보였습니다(돌베개 펴냄, 한 권에 1만 원씩). 《전태일 평전》이 있고, 어린이가 읽는 동화책 《청년 노동자 전태일》도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어, 요즘 아이들뿐 아니라 젊은이들도 쉬 생각해 보기 어려운 1960∼70년대 모습을 그림으로 함께 느끼고 돌아볼 수 있는 만화책이 나왔으니 참으로 뜻깊으며 반갑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런 만화를 이어싣는 잡지 《고래가 그랬어》 살림은 그다지 좋지 못해서, 주주 모으기를 한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http://gyuhang.net)

 오늘은 11월 13일, 바로 전태일 님이 다락방 옷공장이 빼곡히 늘어선 청계천 골목길에서 몸뚱이에 불을 붙이고 숨을 거두면서 ‘노동자가 누려야 할 세 가지 큰 권리’를 외치며 한 줌 재가 된 날입니다. 이때는 전태일 님 나이 스물둘. 그야말로 꽃나이입니다. 꽃나이이지만, 꽃을 피우지 못하고 저물었습니다. 아니, 꽃송이가 뚝 끊어져 버렸습니다.


.. 이미 의사의 진단은 회생할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입원실에서도 별다른 치료를 해 보지 못하고 거의 방치해 두다시피 했다. 저녁이 되면서 태일이는 기력이 탈진해 가는지 잠잠하게 누워 있었다. 한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듯하더니 눈을 뜨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배가 고프다…….” 이 얼마나 가슴 찢어지는 소리인가! 죽어가는 자식의 마지막 한 마디가 ‘배가 고프다’는 말이라니. 에미로서 생전에 잘 먹이고 잘 입히지는 못했을망정 죽는 순간까지도 배고픔을 달래 주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  《이소선-어머니의 길》 35쪽


 뚝 끊어져 버리는 꽃송이는 배고픔에 시달리면서도 제 꽃잎을 떨구지 않았습니다. 꽃송이가 통째로 끊어져 버렸지만, 고픈 제 꽃잎에 양반을 빨아들이기보다 다른 꽃잎들한테 양분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땅에 뚝 떨어지면서도 책갈피 사이에 남는 꽃잎이 아닌, 그 몸뚱이 그대로 썩어가며 땅으로 돌아가 다른 꽃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거름으로 바뀌었습니다.


 〈2〉 15 : 8


 쉰아홉 해. 쉰아홉 살. 1948년에 태어난 전태일 님이 살아 있다면 쉰아홉입니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 여느 노동자로 일했다면 머잖아 정년퇴임으로 일터를 물러나야 하는 나이입니다. 전태일 님이 숨을 거둔 뒤, 살아남은 이소선 어머님은 온갖 회유와 협박을 물리쳤습니다. 돈으로 아들 주검을 사려는 공권력 앞에서 떳떳했습니다. 이리하여 죽은 님과 남은 님한테 떨어지는 것은 ‘돈’이 아닌 ‘싸움’.

 이소선 어머님을 살살 달래며 돈으로 꾀려던 이들은, “그 돈을 다 합치면 종로에 있는 노동청 산재 사무소 옆에 있는 빌딩 큰 것을 살 수 있다고 했다. 그 빌딩을 사서 세를 주고, 한 칸만 가지고 식당을 해서 곰탕이며 도가니탕을 팔면서 사람을 고용하면, 나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도 자식 대에까지 편하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식당에 노동청 직원들이 매일같이 단골로 다니면 장사도 잘 될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어머니의 길, 50쪽)”는 이야기처럼, 이 나라 모든 노동자한테 고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삶터보다는, 한두 사람만 떵떵거리며 배불리 먹고살 수 있는 평등하지 못한 삶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떠할까요. 어두운 세상에 한 떨기 꽃잎일망정 거름으로 제 몸을 바친 한 사람 뜻이 이 땅에 스며든 지 서른하고도 일곱 해째 되는 지금 이 세상은. 지금 이 세상은 얼마나 ‘모든 일꾼이 고르게 권리를 누리며 어깨동무하며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아름다운 세상일까요. 돈이 적다고 권리를 앗기지 않으며, 힘이 없다고 권리가 밟히지 않으며, 이름이 없다고 권리가 내동댕이쳐지지 않는, 누구나 즐겁게 일하고 놀고 먹고 자고 껴안고 말하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논밭이나 텃밭을 가꾸는 한편, 맑은 바람과 따순 햇볕을 쬐면서 지낼 수 있는 세상인가요.


.. 끝날이 인생에 종점이겠지.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아이롱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걸(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 사나이 큰 포부를 가지고 인내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지만 정히 못 견디겠다 ..  (1967년 3월 18일) /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09쪽


 하루 열다섯 시간을 괴롭게 일하는 노동자가 이 땅에서 사라졌을까요. 참말 사라졌을까요. 관공서와 학교와 큰 공장부터 해서 ‘주 5일노동’을 펼칩니다만, 작은 공장과 작은 일터 노동자들은 얼마나 ‘주 5일노동’ 혜택을 받고 있을까요. 한 주에 닷새 일하면서도 누구나 고르며 알뜰한 권리를 누리며 일한 대가와 대접을 받고 있는지요.


 〈3〉 살아가는 이 몫


 아침에 눈을 뜨니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퍽 따뜻했습니다. 어제도 그제도 따뜻했습니다. 한낮에 구름 한 점 없는 날이면 긴소매 입고 거리를 돌아다닐 때에 등에 땀이 송송 맺힙니다. 11월을 넘겼는데. 12월이 코앞인데. 올겨울에는 눈송이 구경 한 번 못하고 지나갈지 모르겠습니다.

 미친날씨(기상이변)라고 할 수 있지만, 날씨가 미쳤다면 왜 미쳤을까요. 우리들은 가만히 있는데 날씨만 미칠까요.

 나날이 늘어나는 자동차, 나날이 넓어지는 찻길, 나날이 새로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물건들, 새로 쏟아지는 물건 못지않게 넘쳐나는 쓰레기. ‘쓰레기를 줄이자’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보이지만, ‘무엇이 쓰레기이고, 쓰레기 줄이는 삶이란 무엇인지’ 깊이 헤아리며 몸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보기 어렵습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 번화거리를 빼고는 걷는 사람 구경하기 힘듭니다. 대중교통이든 자가용이든 기름 먹는 탈거리로 움직이는 우리들입니다. 여름에는 추운 일터, 겨울에는 더운 일터가 대단히 많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일터, 여름에는 춥고 겨울에는 더운 일터에서 일하는 분들도 ‘노동자’입니다. 이름은 똑같이 ‘노동자’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정규직’이고 어떤 이는 ‘비정규직’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이주노동자’입니다.

 노동자 권리, 그러니까 일하는 사람이 자기가 일한 만큼은 알맞게 대접을 받아서 배곯지 않을 뿐 아니라 골고루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 낡고 허름한 옷을 입어도 똑같은 사람으로 지낼 권리, 가방끈이 짧아도 새 직원 뽑는 자리에서 푸대접을 안 받을 권리, 부자 동네 아닌 서민 동네에 살아도 막개발과 재개발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삶터를 고이 지키며 살아갈 권리, 남자이건 여자이건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똑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권리, 어른이라고 젊은이라고 늙은이라고 어린이라고 어느 한편이 따돌림받거나 업신받지 않을 권리, 무기를 적게 가지거나 안 가지고 있어도 무기 많이 가진 나라한테 시달리지 않을 권리 …… 들을 우리들은 얼마나 누리고 있을까요. 아니, 우리들은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하지만 마땅히 못 누리고 있는 권리를 되찾으며 함께 누리고자 얼마나 마음을 기울이고 있나요. 마음 기울이기를 넘어서 얼마나 땀을 흘리며 두 손 맞잡으며 움직이고 있을까요.


.. 동지는 모두 5권의 노트에 일기를 남겼다. 그런데 분식 직후, 조선일보사에서 기사 작성에 참고한다며 가져갔는데, 일기의 중요한 부분들이 예리한 면도칼에 의해 잘려나가 없어져버린 채 되돌아왔다. 이후 동지의 가족은 1년 여에 걸쳐 없어진 일기를 되찾으려 무진 애를 썼으나, 결국 돌려받지 못했다. 게다가 1978년 어느 날에는 동지의 가족들이 집을 비운 사이에 일기장 3권을 집을 뒤져 도둑질해 간 일도 일어났다 ..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머리말


 2007년 우리 세상을 헤아리면서 1970년 우리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를 다시 펼쳐 봅니다. 옆에 나란히 꽂아 놓고 있던 《어머니의 길》도 다시 펼쳐 봅니다. 그러다가 문득,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ㅇ씨가 낸 《사회부 기자》(1977)라는 책에 실린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이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 나는 우선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일기장을 어디서 찾아낼 수 없을까? 그것만 찾아낸다면 통쾌한 스쿠프가 될 텐데…. 뭔가 있긴 있을 텐데….” 나는 추리, 상상 속에서 혼자 특종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힘든 상상이었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그에게 일기 같은 게 있을 것인가 말이다. “여기서 도대체 내가 무엇을 취재할 수 있단 말인가?”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주위 상황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경만 할 수는 없는 시간이었다. 제일 먼저 나는 부의금 방명록을 먼저 체크해 보기로 했다. 누가누가 와서 얼마씩이나 내고 갔는가부터 알아보고 싶어서였다. 시체실 한쪽 테이블에 청년이 두 명 앉아 방명록을 기록하고 있었다. 명단을 쭉 훑어봤으나 이렇다 할 지명인사는 없었다. 명단을 모두 막 훑어보고 난 순간, 그 방명록이 낡은 대학노우트였다는 사실에 순간적으로 나는 섬뜩해졌다. 청색 비닐 커버의 대학노우트. 직감적으로 느낌이 이상했다. 아니나다를까. 대학노우트를 한 장 펼쳐보니 무언가 잔뜩 적혀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틀림없다.”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게 뭐요?” 나는 부의금 접수를 맡은 20대 청년에게 귀엣말로 슬쩍 물었다. 주위에는 동료 기자들이 쉴사이없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일이 일기예요.” “어?” 나는 무조건 그 노우트를 움켜쥐었다. “잠깐 좀, 봅시다.” “누구신데요?” “나가 보면 압니다.” 부의금이 적힌 대학노우트를 코우트 호주머니에 움켜넣고 내가 먼저 앞장을 서 시체실을 나왔다. 그 청년은 죽은 태일 군의 사촌형이라고 했다. “태일 군의 집으로 갑시다!” 짚차는 급히 병원을 빠져나갔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 청년은 얼떨결에 차에 올라탔으나 자신이 탄 차가 신문사 짚차란 사실을 미처 몰랐던 모양이었다 ..  《사회부기자》 41∼43쪽


 조선일보 사회부기자 ㅇ씨는 전태일 님이 살던 집까지 찾아가서 남은 일기장까지 손에 얻습니다. 뒷날 일기장이 전태일 님 남은 식구한테 돌아왔지만 잘려진 곳이 있는 채 돌아왔다고 합니다. 누가 어떤 일을 했을까요? 사라진 글쪽에는 무슨 이야기가 실려 있었을까요?


.. 그러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2만 여 명을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입니다.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써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 저 착하디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좀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십시요. 근로기준법에선 동심들의 보호를 성문화하였지만 왜 지키지를 못합니까? 발전도상국에 있는 국가들의 공통된 형태이겠지만 이 동심들이 자라면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37쪽


 일기장은 칼질이 되기도 하고 도둑맞기까지 했습니다. 아니, 일기장에 앞서 전태일 님은 벌써 흙으로 돌아가고 없습니다. 일기장이 칼질이 되고 도둑을 맞았어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떠난 이 넋과 뜻을 잊지 않습니다. 더욱 깊이 새깁니다. 땅에 뚝 떨어지고 만 꽃송이인 전태일 님은 세상에 없어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떠난 이가 못 다한 일을 이어가고 모자라다고 해도 꿋꿋하게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헌법이 있고, 노동법이 있고, 평등권이나 자유권이니 기본권이니 생존권이니 있습니다. 종이에 또렷하게 새겨진 법과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법이 있으니 나라에서는 무엇보다도 나라에서 세운 법이 제대로 지켜지도록 온힘을 쏟아야 옳습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얼마나 ‘종이에 적힌 법’을 지키고 보듬고 있을까요.

 한편으로는, 이런 법이 없더라도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온힘을 쏟아야 옳습니다. 근로기준법이 없다고 해도 사람을 마구잡이로 부리는 일이 없어야 하고, 헌법이 없어도 누구나 고른 권리를 두루 누릴 수 있어야 하며, 기본권이나 평등권이라는 말이 없어도 누가 누구를 괴롭히거나 들볶거나 등처먹는 일이란 없어야 합니다. 몸이 아파서 조퇴를 하는 사람한테도 똑같은 일삯이 주어져야 합니다. 나어린 일꾼이라고 해서 나이든 사람과 견주어 반토막 일삯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이름난 작가라고 글삯을 더 챙겨 주고 이름없는 작가라고 글삯을 떼어먹는 일이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한 줌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간 전태일 님이 외친 목소리는 틀림없는 ‘노동 3권’입니다. 그러면 이 노동 3권이란 무엇인가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좋을 세 가지 권리일까요. 이 권리를 누려야 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 우리 대표들은 노정국장실로 갔다. 노정국장한테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어떻게 대책을 세울 것이냐고 다그쳤다. “여러분의 요구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여러분의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으니 조금만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우리의 주장에는 얼버무리기만 했다. “노력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말해 보시오.” “이렇게 집단적으로 와서 행동하는 것은 불법이니 빨리 철수하세요!”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고 무턱대고 쫓아낼 궁리만 했다. 그 말에 욱하고 화가 뻗쳤다. “이봐요, 노정국장! 당신은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근로자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 아니요? 감독소홀로 근로자가 죽어나자빠져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근로자들이 여기저기에서 권리를 찾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면 회사에서는 해고시키고 폭력배를 동원해서 사람을 두들겨패고, 상급노조에서는 제명이니 유령노조니 하는 야비한 수법으로 탄압을 하고 있는데, 노동청에서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요? ..  《어머니의 길》 308쪽


 살아남은 이 가운데 한 사람인 이소선 어머님은 1970년 11월 13일 그날부터 2007년 11월 13일 오늘까지도 꼿꼿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한 줌 재가 된 전태일 님이 당신 어머님한테 마지막으로 남긴 말, “가냘픈 생명체가 계속 병들어가니까, 하루하루 병들어가는 것을 그냥 볼 수가 없어서, 안 보이는 벽살이 우리를 가두고 옥죄고 있어서 그 단단한 벽을 허물기 위해 나는 작은, 아주 작은 바늘구멍이라도 내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어머니의 길, 32쪽)”를 지키면서. 아니, 이소선 어머님 스스로 이 땅에서 전태일 님처럼 세상을 부대끼며 살다 보니까, 당신부터도 ‘작은 구멍’ 하나 낼 수밖에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한꺼번에 내는 큰 구멍이 아니라, 작은 사람들이 아주 조그맣게 겨우 내고 있는 구멍 하나를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어깨동무하면서 낼 때 비로소 우리 삶터에도 숨통이 트일 수 있다고 깨달았기에. (4340.11.13.불.전태일 님 죽은 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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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의 낙타와 성자
엘리아스 카네티 지음, 조원규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엘리아스 카네티 님 책은 좋다. 반갑다. 하지만, 이분 책을 훌륭히 우리 말로 옮길 만한 사람은 우리 나라에 없을까? 훌륭하게 우리 말로 옮길 수 있도록 번역가한테 시간을 주고 마음을 써 주는 편집자나 출판사는 없을까? ... '리뷰' 대신 '번역 문제' 이야기를 풀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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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에 사는 ㅇ님이 책을 한 꾸러미 보내 주었습니다. ㅇ님이 하나하나 사서 읽었던 책입니다. 책 안쪽에 ㅇ님이 찍어 놓은 도장 자국이 자그맣게 보입니다. ㅇ님은 이 책을 하나하나 고를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헤아리면서 고맙게 책장을 펼칩니다. 구겨지거나 접히거나 비틀린 곳 하나 없이 깨끗한 책입니다. 먼저, 엘리아스 카네티 님이 쓴 《모로코의 낙타와 성자》를 읽습니다.

 그러나 한 장 두 장 넘기는 책장이 자꾸 끊기고 또 끊깁니다. 책을 쓴 분이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얼추 짚을 수 있으나, 마음속 깊이 스며든다는 느낌은 옅습니다. 왜 그러지? 책을 덮고 며칠 묵힙니다. 다시 책장을 펼쳐 읽습니다. 또 덮습니다. 다시 읽다가 또 덮습니다. 이러기를 보름 남짓.

 오늘 아침, 한 번 더 책을 펼쳐서 읽습니다. 오늘은 두 쪽을 넘기지 못합니다. 다시 책을 덮고 엘리아스 카네티 님이 쓴 《구제된 혀》나 《군중과 권력》을 헤아려 봅니다. 책꽂이에서 《군중과 권력》을 꺼내어 짚이는 대로 한 대목 골라 읽어 봅니다.


.. 필자는 군중결정체를 군중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경계가 분명하고 커다란 항구성을 지닌 인간들의 소집단이라고 규정한다. 이 집단은 개괄적 성격을 띠면서도 한눈에 봐서 그대로 파악될 수 있는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  〈85쪽〉


 오늘 읽다가 막힌 《모로코의 낙타와 성자》를 다시 펼칩니다.


.. 보석 상인들은 별도의 미음자형 건물에 모여 있는데 길고 가느다란 가게 안에서 남자들이 수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24쪽〉


 우리 나라에는 날마다 수없이 많은 책이 나오는데, 이 가운데 대단히 많은 책이 ‘번역’책입니다. 창작책 가운데에도 나라밖 이야기를 글감으로 삼은 책이 많고, 나라밖 책으로 공부하거나 나라밖에 나가서 둘러보거나 느끼거나 공부한 줄거리를 담은 책이 많습니다.

 책마다 자기 빛깔이 있고 얼굴이 있어서, 백 가지 책이라면 백 가지 빛깔과 얼굴을 느낀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저로서는 요즘 나오는 백 가지 책을 보면서 백 가지 빛깔이나 얼굴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다 똑같은 빛깔이라고, 다 어슷비슷한 얼굴이라고 느낍니다.

 어린이책 번역을 보아도, 어른책 번역을 보아도 매한가지입니다. 먼저, 책을 써낸 사람, 글쓴이 모습이나 말씨나 얼굴이나 말투나 느낌을 읽기 어렵습니다.

 책을 써낸 사람마다 이름이 다를 텐데, 책을 써낸 사람마다 자기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나라가 다를 텐데. 책을 써낸 사람이 살아온 겨레붙이가 다를 테고, 책을 써낸 사람이 어울리며 만나는 사람이 다를 텐데. 책을 써낸 사람이 보고 듣고 배우고 부대끼는 삶과 삶터가 다를 테며, 책을 써낸 사람마다 쓰는 말이 다를 텐데. 책을 써낸 사람마다 생각하며 나타내려는 이야기가 다르고, 책을 써낸 사람마다 바라거나 꿈꾸는 세상이 다를 텐데.

 《모로코의 낙타와 성자》를 읽다가 막힌 대목을, “보석장수들은 따로 ㅁ자 꼴로 지은 건물에 모여 있는데, 길쭉하고 좁은 가게에서 손수 보석을 다듬고 있다”쯤으로 다듬어 봅니다. 썩 내키지 않습니다. 번역책을 읽으면서 왜 번역글을 다듬으며 읽어야 하지? 막힘없이 술술 읽을 수 없는지?

 들뢰즈를 우리 말로 옮길 때, 들뢰즈처럼, 또는 들뢰즈보다 더 깊이 학문을 갈고닦아야 가장 훌륭하게 들뢰즈를 옮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페이터 산문을 우리 말로 옮길 때, 페이터가 살았던 지난날과 그 나라 문화와 사회를 두루 톺아보는 눈길이 없다고 해서 페이터 산문을 우리 말로 옮길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생각해 봅니다. 일제강점기 역사를, 일제강점기 때 이 나라 백성들이 어떻게 짓밟히고 시름시름 앓으며 고달팠는가를 돌아보는 마음이 없이 〈낙엽을 태우며〉를 읽거나 〈학도여 성전에 나가라〉를 읽을 때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목넘이 마을의 개〉는, 〈탁류〉는, 〈모래톱 이야기〉는 지난 우리 삶과 역사를 굽어살피지 않으면서도 넉넉하게 받아들이고 헤아릴 만한 작품일까요. 〈잉여인간〉은, 〈당신들의 천국〉은, 〈유예〉는 지금 우리 삶과 터전이 어떠한 모습인지 넘겨다보지 않으면서도 알뜰하게 곰삭이면서 고개를 끄덕일 만한 작품일까요. 흘려들은 지식하고 머리로 생각한 깜냥만으로 〈태백산맥〉이나 〈봄날〉이나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를 속속들이 새겨읽을 수 있을까요.

 가와바타 야스나리 님이 쓴 〈눈나라(설국)〉는, 이 작품으로만 훌륭했기 때문에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었을까요.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라는 사람이 일본 문화와 문학을 모두 사랑하면서, 일본사람과 하나가 되어 도쿄에 살면서 〈눈나라〉를 미국말로 옮겨내지 않았을 때에도 〈눈나라〉는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었을까요. 일본말로 된 문학을 미국말로 옮긴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는 《도쿄 이야기》를 썼고, 《나는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는가》를 썼습니다. 두 가지 책 모두, 일본사람 저리 가라 할 만큼 일본과 도쿄 문화와 사회를 깊이 꿰뚫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정체성인 ‘미국사람’을 잊지 않습니다.

 이 나라 아이들을 생각해 봅니다. 초등학교에 들지도 않았는데 영어를 배우고 한문을 외우는 이 나라 아이들을 생각해 봅니다. 지난 토요일 잠깐 서울 나들이를 하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철에서 “마미! 마미!”를 외치는 어린 계집아이를 보았습니다. “엄마! 엄마!”를 외치지 않고 “마미! 마미!”를 외치는 어린아이는 여덟아홉 살쯤? 아이 어머니는 딸아이가 ‘마미’라고 해도 “원 녀석두, 마미가 뭐니, 엄마지 않구?” 하고 바로잡아 주지 않습니다. ‘엄마’가 아닌 ‘마미’라고 쓸 줄 알아야 영어가 몸에 익은 생활말로 버릇으로 굳어서, 앞으로 일류대학교에 들어가자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영어를 그렇게 생활말로 쓰면 좋지’ 하고는 느낄는지 모릅니다.

 이리하여 초등학교 아이들이 즐기는 인터넷게임에서도, ‘준비, 땅!’이 아니라, ‘ready, start!(또는 ready, go!)’가 버젓이 알파벳 글자로 찍혀서 화면을 채웁니다. 스물 안팎 젊은이들이 ‘고 고 고’라고 말하기에 무슨 소리인가 한참 알쏭달쏭해 한 적이 있습니다. 시내버스에서도 영어로 안내방송이 나오는 세상입니다. 그렇지만 미국말을 쓰는 미국이나 영국이나 필리핀이나 다른 유럽나라 문화와 사회를 우리들은 얼마나 잘 헤아리거나 살피거나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이토록 미국말이 우리 삶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고 있는 이 나라에서, 한국말로 창작한 문학이며 예술이며 문화며, 미국말로 옮겨서 소개하거나 알리는 일은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미국말 할 줄 아는 사람 많고, 일본말 할 줄 아는 사람 많으며, 중국말 할 줄 아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 많은 ‘나라밖 말 잘하는 사람’들은, 우리 문화와 문학과 예술을 나라밖 사람들한테 ‘그 나라밖 사람들이 살갗으로 느끼며 받아들일 만큼 들려줄 만한’ 높낮이가 되어 있는지요.

 어쩌면, 제가 너무나 많이 바라는지 모릅니다. 너무 높은 자리를 꿈꾸는지 모릅니다. 《Death of a Salesman》을 《세일즈맨의 죽음》으로밖에 옮길 줄 모르는 이 나라인데. 《Being and Nothingness》을 《존재와 무》로밖에 옮길 줄 모르는 이 나라 사람들인데.


.. It was a bright cold day in April, and the clocks were striking thirteen ..


 번역가가 아닌, 이 나라 대학생들이, 또 고등학생이, 또 초등학생이, 또 토익점수 높게 받은 사람이, 이 글월 하나를 우리 말로 옮긴다면 어떻게 옮길까요. 이 글월은 조지 오웰 님이 쓴 《1984》 첫 줄입니다. (4340.10.3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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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꾼 2009-03-28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전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았지만, 우연히 카네티를 검색하다...허나 두 번째 지적 부분은 교정자도 충분히 잡아줄 수 있었습니다. 과거 전 직장 동료들과 이런 얘길 한 적이 있어요. '제대로 된' 번역가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일단 한국어 문장 구사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그룹별로 외국어를 하나씩 무작위로 뽑게 한 다음 그 언어를 죽기 살기로 가르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외국어는 스파르타식으로 좀 휘몰아치면 웬만큼 언어감각이 있는 사람은 잘 배우잖아요~ 뭐 행간의 의미야 차차 실력이 늘면서 보이는 거니까...그런데 세일즈맨의 죽음이 '세일즈맨의 죽음'이면 안 되나요?

숲노래 2009-04-14 14:50   좋아요 0 | URL
세일즈맨의 죽음은... 언젠가 쓴 글이 있는데... 좀 깁니다 ^^;;;
 
전태일 통신 우리시대의 논리 4
전태일기념사업회 엮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 책이름 : 전태일 통신
- 엮은이 : 전태일기념사업회
- 펴낸곳 : 후마니타스(2006.11.13.)
- 책값 : 만 원



.. 점점 많은 서비스 업체들이 아르바이트로 사람을 채우고 있습니다. 아르바이트, 파트타임이라는 이름으로요. 시간당 임금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일자리입니다. 4대보험이라고 하는 건강보험도, 고용보험도, 산재보험도, 국민연금도 물론 없습니다. 그 시간당 임금도 최저임금에 딱 맞추어 그 이상은 주지 않습니다. 돈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 것일까요? 오히려 학생들은 공부할 시간까지 다 빼앗긴 채 일하고 있습니다 ..  〈41쪽〉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목소리를 담아내어 나눌 만한 자리가 얼마쯤 있을까 헤아려 봅니다. 신문에? 방송에? 잡지에? 낱권책에? 교과서에?

 인터넷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포털이라고 하는 곳에 작은 모임이나 방을 마련해서 자기 이야기를 띄울 수 있습니다. 자기가 띄운 글을 읽어 줄 사람이 몇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 사회나 문화나 교육이나 경제나 여러 곳에 두루 ‘영향을 끼칠 만한 매체’에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목소리’를 기꺼이 찾아다니며 듣고 담아내는 일이란 몹시 보기 힘듭니다.


.. 강남구청은 주변 아파트에서 보기 흉하다는 민원이 들어온다고 이유를 내겁니다만, 우리는 그것이 궁색한 억지 주장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파트 쓰레기를 치우고 재활용하는 넝마공동체가 없다면 그 처리비용은 고스란히 세금으로 충당해야 합니다 ..  〈133쪽〉


 너무 낮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할까요? 너무 낮은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듣지 못할까요? 너무 낮은 자리에서 아파하기 때문에 내려와서 쓰다듬어 주기 힘들까요?

 낮은 자리에서 살면 안 될 까닭이 있을까요? 낮은 자리에서도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없어도 그만인 사람들인가요? 낮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푸대접을 받아야 할 까닭이 있는가요?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끼리 오순도순 어울리면서 조용하게 공동체를 이루어 지내면 안 되는가요?


.. 21세기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은, 삼성재벌이 어떠한 방법으로 무노조를 유지하기 위해 갖은 악랄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지, 듣고도 믿지 못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  〈267쪽〉


 더 오래 학교를 다녀서 더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해서, 학교를 못 다니거나 덜 다닌 사람보다 ‘높은’ 사람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졸업장 갯수와 자격증 갯수가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자격증과 졸업장 하나 없는 사람보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은행계좌에 돈이 어마어마하게 쌓인 사람이라고 해서, 통장 하나 없이 살아가는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돌아볼 대목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나라에서 살아가면서 소중하게 감쌀 대목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며 받아들일 대목은 무엇일까요. 아이들한테 흐르는 맑은 냇물이 아닌 정수기를 사 주면 될까요. 아이들한테 산과 들과 멧짐승과 들짐승이 아니라, 그림책과 사진책과 다큐멘터리 비디오를 보여주면 될까요. 아이들한테 따순 사랑과 믿음과 나눔이 아니라, 졸업장과 대기업 명함과 서울 강남 아파트를 장만해 주면 될까요? (4340.10.2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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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
공선옥 지음, 노익상·박여선 사진 / 월간말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마흔에 길을 떠나다
- 글 : 공선옥
- 사진 : 노익상ㆍ박여선
- 펴낸곳 : 월간 말(2003.7.5.)
- 책값 : 8500원



 이 책 하나 23 ― 우리는 모두 길 떠나는 사람
 : 공선옥, 《마흔에 길을 떠나다》를 읽고


 

 〈1〉 우리 살림살이가 우리 세상 모습


 오늘 아침은 조금 포근합니다. 어제 아침만 해도, 그제 아침만 해도 햇볕이 맑게 비추었으나 날은 쌀쌀했어요. 햇볕이 괜찮구나 싶어서 이불을 담벼락에 널었지만, 잘 안 마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가을 아닌 가을이라서, 가을을 잊은 가을이라서, 가을이 이제 우리네 땅에 “한국사람들아, 나는 이제 한국땅에서 못 살겠다. 너네들이 돈벌이에 이름날리기에 무리짓기에 매달리면서 내가 깃들 조그마한 땅뙈기 안 남겨 놓는구나!” 하고 마지막말을 남기고 떠나는 즈음이라서 날씨 변덕이 대단합니다.


.. 그러나 배달호 씨가 다니던 회사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공기업이던 한국중공업이 두산이라는 민간기업으로 넘어갔을 때도 정부는 공기업의 실질적 주인이랄 수 있는 국민들의 의사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두산중공업으로 이름이 바뀌고 나자마자 한국중공업 노동자 천 여 명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한 사람의 노동자가 해고된다는 것은 그 노동자의 가정이 흔들릴 수도 있는 일이다. 가정이 깨지고 그 가정의 아이들이 버려지고…… ..  〈233쪽〉


 왜 변덕스러운 날씨가 되었을까요. 올봄에는 왜 이리 하늘이 뿌연 채 무더웠으며, 올여름에는 왜 이리 벼락비가 쉴 새 없이 오래오래 쏟아졌을까요. 올가을에는 왜 이리 더웠다가 확 추워졌다가 오락가락일까요. 올겨울은 어떻게 될까요. 올겨울은 무시무시한 강추위가 몰아닥칠는지, 아니면 파리와 모기가 알을 깔 만큼 텁텁한 날이 될는지.


.. “요새는 마트라는 게 생겨 가지고 장사 안 돼요. 자가용 타고 마트 가서 싣고 가면 그만인데, 이런 데 누가 옵니까?” 그는 하루 종일 연탄난로 끼고 앉아, 오지 않는 손님 기다리며 ‘테레비’ 보는 것도 중노동이라고 했다 ..  〈205쪽〉


 엊저녁, 집 앞에 있는 헌책방에 잠깐 들렀습니다. 헌책방 아주머니는 목요일에 진도에 다녀왔다면서, “이제 헌책방도 도시를 떠나야 할 때가 되었나 봐.” 하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 생각이 ‘거기 낙후되었잖아요? 거기 지저분하잖아요? 거기 그래서는 안 되잖아요?’ 하면서 책을 있는 그대로 못 보고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새 것 기준이 무엇이고 어디에 두는지 모르겠어. 기준도 없을 거야.” 하는 말을 붙입니다.

 책이면 그냥 책이지 헌책과 새책이 따로 없습니다. 공장에서 막 찍어서 잉크 냄새 폴폴 나는 책이 새책일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원고를 묶어서 펴낸 책이라고 새책일 수 없습니다. 절판되었던 책을 새로 찍으면 새책일까요. 서른 해 동안 꾸준히 사랑받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교보문고에서 사면 새책일까요? 이 책을 헌책방에서 옛날 문학과지성사 판으로 사서 읽으면 헌책일까요? 따끈따끈한 책을 교보문고에서 샀다고 해도, 책값을 치른 그때부터는 헌책인가요? 껍데기에 먼지 하나 안 묻히고 살며시 읽은 뒤 책꽂이에 얌전히 꽂아 놓으면 새책 대접을 받을 수 있나요? 우리한테 새 것이란 무엇이고, 헌 것이란 무엇일까요.


.. 안동 하회마을이 좋았던 것은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살지 않고 전시용으로 지어 놓은 ‘전통마을’이라면 정말로 끔찍할 것 같았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곳에 삶을 위한 거래가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갈수록 오는 사람은 없고 떠나는 사람만 있는 다른 농촌 마을에 비하면 하회마을은 그 얼마나 복받은 마을인가. 좀 뜬금없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사람을, 이웃을 반기지마는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진 사람들은 그 누구도 얼씬하지 못하도록 담도 성벽같이 에워싸고 자물쇠도 철통같이 닫아 거는 것일까 ..  〈201쪽〉


 헌책방 아주머니는 말을 잇습니다. “기후변화도 다 사람이 만들어 가고 있잖아. 난데없이 폭포수처럼 비가 쏟아붓는다든지…….”

 전국 곳곳에 새 길을 닦는다고 부산합니다. 전국 구석구석에 새 아파트 올린다며 법석입니다. 도시 변두리고 시골구석이고 공장을 끌어들여서 물건을 팔 수 있어야 지자체 벌이가 늘어나고 우리 살림이 나아지기라도 하는 듯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백 억이나 수천 억 원이 손해라고 하면서도 지하철 공사는 그치지 않습니다. 서울, 부산, 대구, 대전, 인천, …… 지역 지하철역은 큼직큼직 지어 놓습니다. 교통분담을 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 자동차는 마냥 늘어나야 하고 버스도 하냥 늘어나야 하며 지하철도 끝없이 늘어나야 합니다. 지구 한쪽에서는 머잖아 석유가 동이 난다고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만큼은 기름먹는 자동차 생산을 자꾸 늘리려 하고, 자동차만 다닐 수 있는 찻길을 더 많이 더 넓게 늘리려고 합니다.


.. 그 노동, 그 땀, 그 눈물이 들어간 터전이라는 것이 그곳에 사는 사람한테 어떤 의미인지를 시골살이를 해 본 경험이 있는 나는 조금은 알고 있다. 그 노동과 그 땀과 그 눈물이 들어간 터전의 의미란, 말하자면 수 틀리면 돈으로 맞바꾸어 쉽게 손 털고 나갈 수도 있는 그런 종류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  〈172쪽〉


 우리들 사는 집에서 일터까지 오가는 거리는 얼마쯤 될까요. 집에서 일터까지 걸어서 오가자면 얼마쯤 걸릴까요. 자전거를 타고 오가면 얼마쯤 되지요? 한 시간 걷기를, 삼십 분 자전거 타기를 꺼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 집에서 가장 가까운 가게나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사지 않고, 꼭 자가용을 몰고 ○○마트에서 쇼핑수레 한 가득 물건을 사들여서 차 짐칸에 그득그득 싣고 돌아오지 않습니까. ○○마트에서는 비닐봉지 값을 얼마 받는다고 하며 비닐봉지 덜 쓰기를 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이곳에서 파는 물건을 보면 낱낱으로 비닐포장을 하고 있으며, 끼워팔기하는 물건마다 비닐이며 랩이며 테이프며 덕지덕지입니다.


.. 인사동에 딱 들어서는데, 받은 첫 느낌은 새로 단장하는 데 돈 꽤나 들었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인사동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  〈153쪽〉


 요일에 맞추어 쓰레기를 나누어 내놓는다고 해서 쓰레기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도시사람들 집과 길거리는 조금 깨끗해 보일 뿐입니다.

 우리들이 날마다 내놓고 있는 쓰레기는 참말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그 쓰레기를 한 곳에 모아서 꾸역꾸역 쓰레기산을 이루어 놓는다고 해서 쓰레기가 제대로 삭을까요. 차에서 내뿜는 배기가스가, 우리들 집과 일터에서 때는 기름과 돌리는 에어컨에 들어가는 온갖 자원이, 냉장고며 가습기며 정수기며 텔레비전이며 전자레인지며 오븐이며 세탁기며 비데며…… 우리는 얼마나 알맞게 물건을 갖추어서 쓰고 있을까요. 꼭 써야 할 물건을 알맞는 자리에 두고 있는가요. 몇 해 쓰지 않고 내다 버리거나 ‘새 것’으로 갈아치울 물건을 유행 따라 돈푼 내며 주워모으고 있지는 않나요.


 〈2〉 우리 스스로 바라는 대로 살겠지


 가까운 헌책방으로 나들이를 가든, 서울에 있는 책마을 사람이나 동무를 만나러 가든, 가방에는 사진기 두 대를 챙기고 커다란 가방을 등에 메고, 앞에는 작은 가방 하나와 사진기기방을 멥니다. 꼭 행군을 앞둔 군인 차림새입니다. 늘 마주치는 이웃사람들도 “어디 여행 가셔요?” 하고 묻습니다. “늘 이런 차림인걸요.” 하고 대꾸하며 웃습니다. 동네에서도, 서울에서도, 또 다른 곳에서도, 긴머리에 깎지 않은 수염 얼굴을 보고는 “외국사람인 줄 알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산 같은 가방에 한쪽 손에는 늘 사진기가 들려 있고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을 보면 그렇게 느낄 수 있겠지요.

 그렇게 보거나 말거나 저는 저대로 자전거를 몰며 길을 나서고, 때때로 자전거를 집에서 쉬게 한 다음 두 다리로 길을 나섭니다. 자전거를 몰 때면 한결 먼거리를 네 시간이고 여섯 시간이고 달립니다. 두 다리로 걸을 때에도 다섯 시간이고 일곱 시간이고 걷습니다. 양말을 신지 않는 맨발 고무신 걸음이니, 남들은 한 해 남짓 신을 수 있다던 고무신도 여덟 달이나 열 달만 되어도 뒷축이며 바닥이며 다 닳아서 구멍이 나고, 발가락이며 발바닥이며 굳은살로 딱딱합니다. 늘 무거운 짐과 사진기를 짊어지거나 자전거 손잡이를 잡아야 하는 손아귀는 굳은살이 깊게 박힙니다.

 땀이 물줄기 되어 볼을 타고 흐르거나 방울이 져서 똑똑 떨어지더라도 걷거나 자전거를 몹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 땅을 밟고, 내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나는 냄새를 맡습니다. 비록 나날이 답답해지는 바람이고 코가 매운 냄새로 비위가 거슬리고 속이 울렁거립니다만, 이 모습 이 삶 이 터전 이 사람이 우리들 이웃이요 우리 자신이며 우리 겨레이고 우리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 방 안으로 들어섰다. 냄새가 난다. 좋다. 그 방에서 나는 냄새는 바로 ‘옛날 엄마’ 냄새다. 신식이 아닌, 고생 많이 한 구식 엄마들만이 낼 수 있는 냄새가 바로 그 방에서 나고 있다. 나는 숨을 흠씬 들이킨다. 밖에서는 내린 눈이 녹아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  〈28쪽〉


 골목길에서도 무서운 빠르기로 내달리는 저 시커먼 자가용 모는 양복쟁이 아저씨도 우리 한겨레입니다. 담배꽁초나 빈 과자봉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길바닥에 휙휙 던지는 젊은이도 이 나라 한겨레입니다. ‘남자는 머리가 짧아야 하고 여자는 머리가 길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읋는 예닐곱 살짜리 꼬마아이들도 이 나라 한겨레입니다. 차방귀 고스란히 들이마시는 길바닥에 좌판을 깔고 1000원짜리 김밥과 가래떡을 파는 아주머니 할머니도 우리 이웃이요 한겨레입니다. 편의점 알바를 하며 날로 무뚝뚝해져 가는 어린 학생들도 우리 동생이며 한겨레입니다.

 사천만이 사는 남녘이라면 사천만 가지 얼굴이 있고 사천만 가지 목소리가 있으며 사천만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사천칠백만이 사는 남녘이라면 사천칠백만 가지 모습에 사천칠백만 가지 꿈에 사천칠백만 가지 이야기가 있겠지요. 그러나 꾸준하게 늘어나는 이 나라 사람들 숫자처럼 우리 삶이나 일이나 놀이나 이야기나 책이나 생각이나 몸짓이나 모양새들이 저마다 다르며 알콩달콩 어울린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모두 똑같은 한 가지로 틀에 맞춰지는 사천만, 또는 사천칠백만이 아닌지요. 학교를 다니면 다닐수록, 텔레비전을 보면 볼수록, 인터넷을 즐기면 즐길수록 판에 박힌 길을 그예 달려가는 허수아비로 바뀌어 가지 않는가요.


.. “옥수수는 돈이 좀 되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묻기 싫은 질문을, 그러나 해야만 할 것 같은 약간의 의무감으로 묻고야 말았다. 돌아온 할머니 대답이, “돈이 되나 마나, 씨 뿌릴 때 됐으니 씨 뿌리고 거둘 때 되면 거두는 거지 뭐.” ..  〈76쪽〉


 살림집 앞으로 문구 도매상이 죽 이어져 있습니다. 어제 낮에는, 아스테이지를 사러 이 문구 도매상을 하나하나 들어가 보는데, 어느 가게에서도 아스테이지를 팔지 않습니다. 문구 도매상은 말 그대로 ‘도매상’일 뿐일까요. 아니, 이름은 도매상을 내걸지만, 이곳에서 다루는 물건은 몇몇 가지로만 못박혀 있지 않을까요. 가만히 헤아려 보니, 문구 도매상과 가까운 거리에 초등학교가 세 군데 있고 고등학교도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구 도매상 골목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문방구붙이를 살피거나 찾는 아이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기는 내가 살았던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그래도 집집이 부엌문 겸 현관문을 열어 놓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성냥갑 같은 붉은 벽돌 다세대주택들에 사람들은 갇혀 버린 듯이 느껴진다 ..  〈106쪽〉


 지지난주에 부산 나들이를 하면서, ‘부산에 왔기에 맛볼 수 있는 밥은 무엇이 있고, 부산에 왔기에 느낄 수 있는 골목은 어디가 있으며, 부산에 왔기에 함께할 수 있는 삶터며 놀이며 무엇일까’ 생각하며 부지런히 걸어다녔습니다. 자갈치시장이 있고 국제시장이 있고 광안리니 해운대니 있는 부산이고, 부민동이니 광복동이니 오랜 이야기와 역사가 있는 골목은 많기는 하나, ‘부산다움’이 무엇인가는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가 사는 인천에서도, 가까운 수원에서도, 평택에서도, 천안에서도, 청주에서도, 대전에서도, 아산에서도, 홍성에서도, 익산에서도, 전주에서도, 그곳에 머무르기에, 또 그곳을 찾아갔기에 느낄 만한 삶터란 무엇일까 모르겠습니다.

 살고 있는 땅이름만 다른 우리 나라일까요. 우리들이 저마다 살고 있는 땅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가 다르며 흐르는 물과 바람이 다릅니다만, ‘그래 이것이군’ 하면서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이야기를 못 찾겠습니다.


.. 자신은 외국에서 살았지만 한국사람으로 자부심이 있고, 그래서 한국에 오면 더욱더 우리 말을 잘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단다. 그런데 왜 공사판에서 전부 일본말을 쓰냐, 언어가 있는 민족으로서 자존심도 없느냐, 대통령도 국민들에게 힘내자고 하지 않고 화이팅이라고 하더라, 말은 얼인데 이렇게 자기 말 천대하면 생김새만 한국사람이지, 다 외국계 민족이 될 것이다. 한국을 떠나기 앞서 최씨가 맨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의 ‘배운 자’들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라고 했다 ..  〈114쪽〉


 우리네 구석구석 모두들 ‘먹고살기 어렵다’고 느껴서 그러할까요. 먹고살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지구자원을 얼마나 헤프게 쓰는지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 그러할까요. 어떻게든 돈만 더 벌면 되지만, 돈을 더 벌어도 나보다 더 많이 버는 남이 있어서 벌고 벌고 또 벌어도 마음이 차지 않을까요.

 우리는 얼마만큼 벌어야 비로소 ‘먹고살 만’하다고 느낄까요. 내 살림살이가 이웃 살림살이보다 얼마만큼 높거나 많아야 마음을 놓을까요. 내 차는 얼마나 커야 하고 내 집은 얼마나 넓어야 하나요. 차도 없고 집도 없이 살면 사람다움을 잃은 삶인가요. 자전거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걸으면 바보인가요. 전세집이나 월세집에 살더라도 집옮길 걱정이 없이 오래오래 지내려는 마음이라면 너무 어리석은가요.


.. 미군이 이 땅에 주둔하는 이유는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함일 뿐이다. 그들은 이 땅에 주둔하는 게 아니고 점령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들이 이 땅을 점령하고 있는 한에는 이 땅의 민중들은 그들의 ‘Meal’이 되고 있을 뿐이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 이 땅은 삶의 터전이지만 이 땅을 점령하고 있는 미군들에게 이 땅은 다만 작전지역 중의 한 곳일 뿐이다 ..  〈146쪽〉


 벼를 겨만 벗겨서 누런쌀로 먹으면, 깎는 데 들어가는 자원이나 품이나 시간이 덜 듭니다. 누런쌀은 흰쌀보다 우리 몸에 훨씬 좋습니다. 그러나 누런쌀이 몸에 좋다는 지식은 머리속에 있어도 누런쌀을 먹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저잣거리나 쌀집에서 누런쌀을 찾으려 해도 찾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덜 깎아 품이 적게 드는’ 누런쌀이 ‘더 깎으며 품과 자원이 더 많이 쓰게 되는’ 흰쌀보다 비쌉니다.


 〈3〉 길사람


 아침 빨래를 하면서 머리를 감습니다. 해바라기를 하며 기찻길로 전철이 오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물끄러미 기찻길을 바라봅니다. 오늘 햇살은 제법 따사롭네요. 이불 널어 놓은 담벼락에 기대어 봅니다. 배추흰나비 한 마리 팔랑거리며 눈앞을 지나갑니다. 요 앞, 조그마한 텃밭에서 알을 깬 나비인 듯하네요.

 도심지 골목길이기에 길바닥은 모두 시멘트바닥이지만, 골목집 사람들은 흙을 조금씩 퍼 와서 작은 꽃그릇을 마련하고, 돌을 쌓아 텃밭까지 일구곤 합니다. 옥상에 텃밭을 마련해 나무를 심는 분도 있습니다. 메마르고 팍팍하기만 하던 도심지 한켠은, 골목집 사람들이 스무 해, 서른 해, 마흔 해, 때로는 예순 해 동안 한 자리를 고이 지키면서 가꾸어 온 풀과 나무로 작디작은 숨구멍이 생깁니다. 이 작디작은 숨구멍에는 애벌레도 꼬물꼬물 기어다니며 잎사귀를 뜯어먹었을 테고, 이 애벌레가 자라 흰나비도 되고 노랑나비도 되겠지요.


.. 그래, 아들아, 받아쓰기 좀 못해도 좋다, 영어 같은 거 안 해도 좋다, 그러나 풀빛 향기 가득한 오월의 저문 강가에서 어미와 함께 들었던 저 소쩍새 소리를 너는 기억하려무나. 눈물로 기억하려무나. 악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 악이다. 무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마음이 무기가 되고 흉기가 된다 ..  〈246쪽〉


 마흔에 길을 나섰던 공선옥 님은 어느덧 마흔다섯 나이로 달려가고, 머잖아 쉰 살 나이가 되겠지요. 그 쉰 살에도 지금과 같이 길을 나서면서 살아가실까요.

 생각해 보면, 공선옥 님은 마흔일 때만이 아닌 서른에도 길을 나섰습니다. 스물에도 길을 나섰고 열에도 길을 나섰겠지요. 다만 공선옥 님 스스로 그 나이에는 당신이 길을 나섰다는 생각을, 느낌을, 마음을, 넋을 부대끼지는 못했으리라 봅니다.

 저도 그래요. 곰곰이 돌이키면, 헌책방 나들이를 하든 골목길 나들이를 하든 저잣거리 장보기 나들이를 하든, 날마다 ‘길을 나서며’ 살고 있습니다. 집에서 살고 있는 집사람이면서, 길에서 사는 길사람입니다.

 내 이웃과 내 동무 모두 집사람이며 길사람입니다. 아직까지 자기 꿈을 펼치지 못하며 돈벌이에 매여 있는 동무들도 ‘멀고 먼 자기 꿈을 이루기까지 힘들고 고달픈 길을 돌고 돌아’ 길을 떠난 셈입니다. 인천 배다리 골목에 뿌리를 내려 쉰 해나 일흔 해를 살아온 아주머니 할머니도 ‘어디 먼 구경 다녀 본 적’은 없다고 해도, 바로 이 뿌리내린 동네 한켠에서 늘 길을 나서면서 살아온 셈이에요.

 사람마다 자기 길이 있고, 사람마다 제 깜냥과 주제대로 길을 나섭니다. 어떤 이는 몇 천 킬로미터 바깥까지 길을 나서고, 어떤 이는 몇 백 미터 테두리에서만 길을 나섭니다. 더 먼 데까지 나간다고 더 홀가분하거나 즐겁게 길을 나서는 셈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가까운 테두리까지만 길을 나선다고 해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길나섬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백 살까지 살아야 잘사는 삶이 아니고, 스물밖에 못 산다고 못사는 삶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한 달에 천만 원을 벌어야 잘사는 삶이 아니고, 한 달에 십오만 원 가까스로 번다고 못사는 삶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자기가 길사람을 느끼고 언제나 길나섬을 한다고 느낄 수 있다면, 어느 곳 어떤 자리에서 누구와 부대끼더라도 아름다운 자기 삶터를 두 발로 튼튼하게 디디며 걸어가고 있는 멋있는 사람, 곧 멋사람이라고 느낍니다. (4340.10.14.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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