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읽는다 - 강상중의 청춘독서노트
강상중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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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나한테 "이 책을 왜 '별 둘'만 붙였어요?" 하고 묻는다면, 

"별 하나만 붙이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꾸하리라. 

 

누군가 나한테 "이 책이 어째서 '별 둘'밖에 안 되나요?" 하고 묻는다면, 

"네, 별 셋을 붙이는 대신 '시간도 돈도 아까운 책'에 넣어 드리지요." 하고 대꾸하리라.

 


 책읽는 일본사람, 책 안 읽는 한국사람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4] 강상중, 《청춘을 읽는다》


.. 나는 도쿄 역시 ‘망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적어도 이 상태로 가다가는 그렇게 될 것만 같다 ..  (61쪽)


 저는 서울 또한 무너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적어도 이대로 가다가는 깡그리 무너지고 조각조각 부서지고 끝없이 망가지며 갈가리 쪼개지다가는 폭삭 주저앉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로서로 이름값 높이고 이름값 지키며 이름값 부풀리는 데로 치닫는다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 같이 돈벌이 힘쓰고 돈벌이 매달리며 돈벌이 생각에 가득하다면 부서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도나도 겉치레 밝히고 겉치레 키우고 겉치레 사로잡히다가는 망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라도 가방끈 붙잡고 가방끈 늘리며 가방끈 내세우다가는 쪼개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같이 쇠밥그릇 살찌우고 쇠밥그릇 홀로 차지하며 쇠밥그릇 빼앗으려고 싸우다가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이제 산시로 같은 느긋한 성격의 청년은 멸종되고, 반쯤은 여가를 즐기는 기분으로 모라토리엄을 만끽하는 학생들이 대학 캠퍼스를 활보하고 있었다 … 《산시로》를 읽고 이상하게 생각한 점은, 이 청년에게는 땅에 배어 있는 피와 땀의 기억과 같은 것을 거의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다 ..  (41, 49쪽)


 해 떨어지고 늦은 저녁, 전철을 타고 인천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단단하고 억센 쇠밥그릇을 붙잡고 있는 공무원하고 마주해야 하는 자리가 몹시 낯간지럽고 벅차서, 저녁을 나누는 자리에서 홀로 일어나 밥집 문을 쾅 닫고 나갔습니다. 공무원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데, ‘민간인’하고 어울리는 자리에서까지 그 티를 버리지 못해야 할까 딱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며 겉치레만을 살피는 매무새로 넉넉히 일삯을 받고 연금을 챙기면 세상 부러울 구석이 없다고 여기지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 공무원들은 책을 읽을까요? 이 공무원들도 아이들한테 ‘훌륭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좋은’ 책을 사다 주어 읽힐까요? 이 공무원들은 당신 딸아들한테 어떤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이 공무원들한테 믿음이 있다면 성경이나 불경을 읽을까요? 성경이나 불경을 읽으면서 무엇을 생각할까요? 나라안에 으뜸으로 손꼽히는 이원수 어린이문학과 권정생 어린이문학을 당신들 딸아들한테 읽힌 적이 있겠지요? 공무원 당신들은 이원수 권정생 책을 한 권쯤 읽어 보았을까요? 읽으면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 처음 상경했을 때는 그저 ‘도쿄는 대따 크구나’하고 감탄하기만 했는데, ‘왜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걸까’ 하고 탄식이 절로 나왔다. 북적거리는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해 보면, 모두들 얼굴은 있어도 아침 출근길의 러시아워 때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언짢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돌변해서는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교성이 난무하고, 그런 북적거림 속에서도 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 사람들이 부산스레 오가고, 그 뒤로 빌딩들이 들어서 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맹렬한 기세로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몸부림치는 그런 세계 속에서는, 잠시 멈춰 서서 영원불멸한 것을 생각하려 해도 그런 것은 허황된 거짓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  (81, 83쪽)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재개발 사업에만 눈이 먼 공무원하고 날마다 마주해야 합니다. 제가 일하는 곳에서는 성과 내는 사업에만 몸바치는 공무원하고 늘 부딪혀야 합니다. 어쩌다가 이런 삶이 되었는지 저 스스로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한테 이런 삶이 주어졌다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다만, 숱한 공무원하고 부대끼는 동안, 이 공무원이든 저 공무원이든 책을 읽지 않음을 낱낱이 깨닫습니다. 이 공무원이든 저 공무원이든 저마다 붙잡는 책에 담긴 속살이나 알맹이를 옳게 붙잡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으면서 아름다움을 맛보지 못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훌륭한 줄거리 담은 책을 훑으면서 훌륭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스스로 훌륭한 삶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재미난 얘기 넘치는 책을 읽으면서 참된 재미를 곰삭이지 못하고, 스스로 재미난 사람이 되어 재미나게 일하는 매무새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책은 그저 시간 때우기일까요? 책은 한낱 시간 죽이기일까요? 책은 그냥 책일 뿐이니, 읽는 이하고 쓴 이하고는 동떨어진 삶일까요? 줄거리만 욀 수 있으면 책읽기가 끝일까요? 줄거리를 읊을 수 있으면 책을 잘 읽은 셈일까요? 독후감 숙제를 낼 수 있고, 이 숙제가 100점을 받으면 책을 가장 잘 읽은 셈일까요?


.. 어째서 내 부모의 나라는 이렇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이렇듯 비참한 기분에 젖어야 하는 것일까? 왜 … 그러나 보들레르의 비극은 어떤 의미에서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가 무리를 지어 스스로 전위임을 내세우며 거들먹거리고, 음모를 꾸미듯 정치에 정신이 빠져 있었더라면 아마 이런 작품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 전위가 되려다 결국 피에로로 끝났을 때, 그런 사람들 가운데 전향이라는 현상이 일어난다 … 좋고 나쁘고를 떠나 결국 그들은 소시민적인 안일 속에서 자신의 마지막 근거지를 구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  (100, 104, 107, 108쪽)


 책이란 모두 같은 책입니다. 헌책방 헌책과 새책방 새책과 도서관 장서는 이름이 다를지라도 모두 같은 ‘책’입니다. 겉이 좀 헐어도 책이요 갓 찍어 따끈따끈해도 책이며 도서관 딱지가 붙어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책입니다. 오늘 읽혀도 책이요 내일 읽혀도 책이며 글피에 읽혀도 책입니다. 부자가 읽어도 책이고 가난방이가 읽어도 책입니다. 대학교수가 읽어도 책이고 구멍가게 할배가 읽어도 책입니다. 가정주부로 일하는 연변조선족 아줌마가 읽어도 책이며 까맣고 큰 차를 끌고다니는 아줌마가 읽어도 책입니다.

 책이란 모두 다른 책입니다. 내가 읽는 책과 네가 읽는 책이 다릅니다. 똑같다고 하는 책을 읽을지라도 받아들이는 가슴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책입니다. 지난해에 읽을 때와 올해 읽을 때 깨닫는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책입니다. 우리들 하는 일이 모두 다르며 비슷한 일을 하더라도 생각과 느낌과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자리에서 같은 책을 읽는다 하여도 마음을 사로잡는 대목이 다르고 눈길을 끄는 글월이 다릅니다. 우리는 다 같은 책을 다 다르게 읽을 뿐 아니라, 다 다른 책을 또한 사뭇 다르게 읽습니다.


.. 1968년에 착공해 1970년 초여름에 완공된 4차선 경부고속도로는 총 길이 425킬로미터, 폭 22.4미터의 대동맥으로, 이 도로에 의해 서울과 부산은 1일생활권이 되었다. 이 대동맥의 완성과 함께 박정희 정권은 농어촌 근대화와 소득증대를 내걸고 새마을운동을 추진했다. 그것은 ‘근면ㆍ자조ㆍ협동’을 슬로건으로 하여 위로부터의 힘으로 유교적 가족주의와 공동체의식을 파괴하고 민족과 국가에 봉사하는 국민을 양성하려 한 것이었다 … 너무나 무더운 날씨에 어느 마을 사거리에 차를 세우고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그늘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고 있을 때였다. 작은아버지가 마을 사람 하나와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내 곁에 앉아 꿈쩍 않고 입을 다물고 있던 노인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자넨 일본서 왔는가보이. 여기선 다들 입이 무거워 아무 말도 안 하지만, 파쇼야, 이 나란. 일본인들 있을 때보다 더 심해. 그러니 자네도 경솔한 얘기는 입 밖에 내지 말게나.” 더듬더듬, 그러나 똑똑히 들려오는 일본어에 깜짝 놀라 절로 몸이 젖혀졌다. 게다가 ‘파쇼’라는 단어가 너무도 뜻밖이어서 얼토당토않다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 노인이 나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려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작은아버지가 돌아오자 노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언론통제와 상호감시가 궁벽한 시골 구석구석까지 눈을 번득이고 있었던 것이다 … 땅바닥을 기는 듯한 하층노동자의 빈곤과, 그들의 머리 위를 달리는 고속도로. 이 두드러진 대조는 수도 서울을 상징하는 풍경이었던 것이다 ..  (143∼145, 156쪽)


 사람 숫자만큼 책이 있습니다. 사람 숫자만큼 책이 골고루 있습니다. 사람 숫자만큼 다 다른 삶이 밴 다 다른 이야기가 어우러진 다 다른 책이 있습니다.

 저는 새책방보다 헌책방을 즐겨찾지만, 새책방 또한 곧잘 찾습니다. 새책방에서는 새로 나온 책을 흔히 찾아 읽으려 하지만, 갓 나온 책보다는 제 마음을 따뜻하게 덥히거나 촉촉하게 적시는 책을 찾으려 합니다. 헌책방에서는 판이 끊어진 안타까우면서 아름다운 책을 찾아 읽으려 하지만, 굳이 지난날 책을 찾는다기보다는 제 넋을 올바르게 이끌거나 제 얼을 알차게 일굴 수 있는 책을 찾으려 합니다.

 새책방에서 책을 살 때에는 ‘내가 이 책 하나를 사면서 이 좋은 책을 힘껏 펴내 준 출판사한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겠구나’ 생각하면서 기쁩니다. 헌책방에서 책을 살 때에는 ‘내가 이 책을 사면서 이 반가운 책을 애써 캐내고 건져내어 새로 읽힐 수 있도록 손질한 일꾼들한테 작게나마 도움이 되는구나’ 떠올리면서 즐겁습니다.

 출판사 눈으로 보자면 도서관에서 책을 갖추는 일이 달갑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도서관 책은 ‘한 권으로 수십 사람이 읽거나 수백 사람이 읽기’까지 하니까요. 그런데 어떠한 출판사 일꾼도 ‘도서관에서 책을 사들이는 일’을 꺼리지 않으며 싫어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출판사 일꾼은 헌책방에서 사람들이 책을 사는 일을 몹시 꺼리고 싫어합니다. ‘헌책방에서 사람들이 책을 사기 때문에 새책이 하나 덜 팔린다’고 생각합니다. 곰곰이 따지면, 헌책방에서 팔린 책은 한 권이요 고작 한 사람이 읽을 뿐이고, 도서관에서 사들인 책은 하나 갖고 수많은 사람이 읽으니, 도서관에서 책을 사들일 때야말로 ‘출판사 매출에 손해’일 테지만, 이렇게 낱낱이 따지고 살피는 출판사 일꾼은 아직까지 없는 줄 압니다.


..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절제와 근면과 노동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다. 아무리 땀을 흘리며 일한다 해도 돈을 벌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돈벌이가 뭐가 나쁘냐’라는 탐욕이 당당하게 행세하게 된다 … 이치로나 마쓰이 히데키 선수는 야구 배트를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100만 엔을 벌어들이지만, 나는 1년 동안 일해도 200만 엔밖에 벌지 못한다. 그래도 이곳에서 일하고 있으면 지역 사람들이 고맙다고 말해 준다. 나는 거기에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 ..  (226, 230∼231쪽)


 재일조선인이요 재일지식인인 강상중 님이 쓴 《청춘을 읽는다》라는 책을 읽습니다. 당신이 젊은 날 읽으며 가슴에 알알이 맺히거나 새겨진 책 몇 가지를 소개하면서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이 이 책만큼은 읽어 주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담은 책을 읽습니다.

 글쓴이 강상중 님은 일본에서 일본말을 쓰면서 살기에 마땅히 ‘자이니치’라는 일본말을 쓸 텐데, 《청춘을 읽는다》라는 책에서도 ‘자이니치’라는 일본말이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책을 읽다가 턱턱 막힙니다. 지난 2004년에 나온 《소년의 눈물》이라는 책에서도 ‘자이니치’라는 일본말은 몹시 껄끄러웠습니다. 일본에서 일본말을 하며 살아갈 때에는 마땅히 ‘자이니치’일 테지만, 한국에서 한국말을 하며 살아가고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눌 때에는 마땅히 ‘재일’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나라 이름은 ‘한국’이지 ‘코리아’가 아니며, 나라밖 사람이야 우리를 가리켜 ‘코리아’라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가리켜 ‘코리아’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청춘을 읽는다》를 펴낸 출판사와 옮긴이는 굳이 ‘자이니치’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책을 덮고 생각합니다. 이 낱말 하나 때문에 책을 못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 낱말 하나쯤이야 살며시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래요, 얼마든지 지나쳐도 됩니다. 또한, ‘자이니치’란 일본말을 곰곰이 곱씹으면서 우리 터전을 돌이켜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제 마음에는 아쉬움이 여러 가득입니다. 한 가득이나 두 가득조차 아닌 여러 가득입니다. 강상중 님 당신한테 젊음을 빛내 준 책 몇 가지라고 하나, 우리가 굳이 이 책들을 같이 읽어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깜냥껏 우리 터전에 따라 우리 마음을 빛낼 책을 찾아야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다 다른 자리에서 살아가는 다 다른 우리들은 다 다른 책으로 우리 젊음을 뽐내고 즐기고 누리고 나누며 어깨동무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강상중 님이나 《청춘을 읽는다》를 펴낸 출판사나 ‘꼭 이 몇 가지 책을 읽으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 《청춘을 읽는다》는 이 나라 젊은이가 또다른 새로운 책으로 저마다 다른 젊음을 다 다른 모양새로 가꾸고 일구라는 쪽으로는 줄거리를 펼치지 않았습니다. 강상중 님 젊음을 흔든 책 몇 가지에만 눈길을 맞추면서 이 책이야말로 ‘젊음을 흔드는 책’이라는 목소리를 한결같이 되풀이했습니다.

 얼마 앞서 유시민 님도 《청춘의 독서》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이 나라 대한민국에는 청소년책이 몹시 드물며, 청소년책을 꾸준히 내는 출판사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아주 적습니다. 처음 출판사를 열 때부터 오늘까지 한결같이 청소년책을 내는 외곬로 내는 출판사로는 ㅇ 한 곳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ㅇ이라는 출판사는 아직 ‘청소년이든 젊은이이든 마음을 움직이는 책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책’은 한 번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푸름이나 젊은이한테는 ‘이 책을 읽자’고 하는 말보다 ‘이런 책이 있고 저런 책이 있으니, 저마다 눈길과 입맛과 마음에 맞는 책을 하나쯤 살피면서 저마다 다 다른 우리 삶을 생각하고 붙잡자’고 하는 몸짓으로 숱한 이야기책을 내놓을 뿐입니다.


.. 우리는 햇살 속에서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는 건전한 청춘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남녀는 병적일 만큼 수척하고 뒤틀리고 문드러진 나체의 소유자들뿐이다 ..  (96쪽)


 강상중 님 책이나 유시민 님 책이나 똑같이 ‘젊음을 빛내고 일깨운 책은 이러저러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분이 손꼽은 책들은 모두 ‘고전’이라 일컬을 만한 책입니다. 가벼운 책이 없습니다. 가볍게 손에 쥐고 읽을 책이 없습니다. 무거운 책입니다. 무거워 손이 덜덜 떨리는 책만 들추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강상중 님이나 유시민 님 삶이나 눈높이에서 젊은이한테 《원피스》를 읽으라 하거나 《꽃보다 남자》를 들추라 하지는 못하겠지요. 《천재 유교수의 생활》이나 《현시연》을 펼치라 하지도 못할 테고요.

 다시 한 번 책을 펼쳐서 읽어 봅니다. 책을 살피며 밑줄을 그었던 대목을 곰곰이 되씹습니다. 밑줄을 그었던 대목 말고는 왜인지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습니다. 밑줄을 그었던 대목도 한 번 더 돌아볼 만할 뿐, 가슴을 콩쾅쿵쾅 뛰도록 하지 않습니다.

 거듭 책을 덮고 생각합니다. 우리 젊은이한테 ‘자, 젊은이들아 책을 읽자!’ 하고 이야기를 하겠다면, 젊은이들 가슴을 쾅쾅 울리거나 소복소복 적시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젊은이들한테 ‘이 책만큼은 젊을 때 반드시 읽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내 젊을 때 이 책들로 가슴이 울렁거렸는데, 오늘을 사는 젊은이한테는 어떤 책이 가슴이 울렁거릴까요? 저마다 다 달리 가슴을 울렁이도록 하는 책을 다 다른 삶자리에서 찾아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어요’ 하는 이야기로는 말문을 열 수 없었을까 궁금합니다.

 책읽기는 경력이나 권위나 학력이나 자랑이 아니거든요. 어떤 책을 먼저 빨리 읽었다고 더 빼어나거나 훌륭하지 않거든요. 어느 책을 못 읽었다 해서 바보이거나 멍텅구리가 아닙니다. 어떠한 책을 수없이 되풀이 읽었다 해서 슬기롭거나 똑똑하지 않습니다.

 책을 말하는 책을 이야기하려면, 책에 앞서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책을 말하는 책을 내놓으려면, 책과 함께 삶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책을 말하는 책을 내밀겠다 하면, 책 둘레에 얽힌 발자국과 손자국을 나란히 읽어야 합니다. (4342.11.14.흙.ㅎㄲㅅㄱ)


 ┌ 《청춘을 읽는다》(돌베개,2009)
 ├ 글 : 강상중 / 옮긴이 : 이목
 └ 책값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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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09-11-16 16:56   좋아요 0 | URL
(돌베개 편집자께서 댓글을 두 가지 더 달다가 지우셨군요. 제 편지에 몇 조각이 남아 옮겨붙어 본다면)

제 생각이 너무 짧아 그런지, 된장 님이 왜 이런 글을 썼는지 저는 전혀 모르겠네요.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글을 읽고 나서 "이 책은 그야말로 읽을 값어치가 없구나" 생각하셨다니 그 이유가 정말 궁금합니다. 좋다, 싫다 단정을 할 때는 근거를 밝혀야 한다고 '책'에서 배웠습니다. 친절하게는 아니더라도 왜 제 생각이 너무 짧은지, 이 책에 5점이라는…

"제가 이런 글을 왜 썼는지, 편집자님께서는 하나도 알아채고 있지 않으십니다." 네, 전혀 모르겠습니다. "편집자님 생각이 너무 짧구나 싶습니다." 죄송하실 것은 없습니다만, 좀 무책임하신 듯합니다. 저는 편집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독자로서, 된장 님께서 이 책에 대해 오해를 하고 계신 부분이 있는 듯하여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물론, 이 책이…

숲노래 2009-11-16 17:03   좋아요 0 | URL
편집자께서는

(1) '돌베개 편집자'로 이 책을 생각하는지
(2) '돌베개 책만 읽는 독자'로 이 책을 바라보는지
(3) '출판노동자'라는 편집자로 이 책을 생각하는지
(4) '모든 책을 고루 사랑하는' 독자로 이 책을 바라보는지

'겸연'하게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도 '남이 쓴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댓글을 달아 놓는 일은 '제가 알음알이로 아는 출판사 책이라고 별 다섯을 붙이는 일 없이, 모든 책에 모두 공정하게 평가를 하며 별과 비평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짜증스럽고 딱합니다. 책을 그런 매무새로 만듭니까? 당신이 만든 책에 평점이 낮아 기분이 나쁩니까?

어떤 작가는 제가 별 둘을 붙이고 비평도 몹시 안 좋게 했지만, 옳게 읽어내 주었다면서 고마워 했습니다. 그 작가 스스로도 책이 나온 뒤로 좀더 야무지게 글을 여미지 못했음을 느꼈다며 부끄러워 했고, 앞으로 새 책을 쓸 때에는 모두 고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제가 모든 책에서 모든 알맹이를 다 집어낸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거짓말을 하는 책에서는 거짓말을 느낍니다. 돈맛에 들린 책에서는 돈맛을 읽습니다. 사랑을 말하는 책에서는 사랑을 느낍니다.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책에서는 아름다움을 선물로 받습니다.

강상중 님 책에서는, 아쉽게도, 겉치레와 조금 우쭐해 하는 마음을 읽었습니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이름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되었던 줄거리였으며, 재일조선임임을 들먹이려 했다면, 아직 제가 소개글은 안 썼지만, '고사명'이라는 분이 쓴 <산다는 것의 의미>라고 하는 아주 놀라운 책이 있습니다. 재일조선인 젊은이한테든 일본 젊은이한테든 한국 젊은이한테든 '젊음을 불태우는 삶과 책'을 말하려 한다면,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 "발가락 때만큼이라도 글에 온힘을 바치고 불태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100점 만점에 5점조차도 섣불리 붙일 수 없습니다. 그나마 강상중 님 책에서는 '참된 마음'이 어느 만큼 드러났다고 느껴서 0점이 아닌 5점입니다.

부디, 돌베개라는 출판사 편집자인 당신께서, 이 책 <청춘을 읽는다>가 얼마나 "청춘을 못 읽고 안 읽고 엉뚱하게 읽은" 책인지를 깨닫고, 앞으로 '돌베개' 이름을 내걸고 나오는 책이 뜬금없거나 쓸개빠진 쪽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돌베개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붙인 댓글은 그동안 '돌베개'에서 나온 숱한 아름다운 책에 먹을 바르는 슬픈 몸짓입니다.

지나가다 2009-11-24 10:0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건 뭐 시비를 걸자고 작정하고 비뚤어지게 자기 주관을 마구 읊어대는 전형적인 글이군요. 꼬인 마음과 잘난척하는 유치함, 무조건 소수 의견으로 강요해대는 관성 같은 것들이 글에 지독하게 배어 있는 느낌입니다. 출판사 직원분이 호의로서 좋은 댓글을 달았으나 악바친 시비걸기 글에 그 의미가 사라지는 모습을 봅니다. 자기가 책에 대해 평하는 것이야 자유겠으나 이 글은 자유로운 서평보다는 흠집내기를 즐기는 모습으로 비칩니다.

숲노래 2009-11-24 14:25   좋아요 0 | URL
시비걸기로만 읽으셨다니 죄송합니다.

그러나, 시비걸기로만 읽으신 지나가다 님 마음씀이 슬픕니다.

저 또한 이러한 책을 '좋은 뜻'에서 비평을 하고 비판을 하지,
아예 쓰레기 같은 책이라면 사지도 않고 읽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지나가다 2인 2009-11-29 00:1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아...책을 이렇게도 읽을 수 있다니 참 흥미롭습니다. 그렇기에 된장 님께서 위에 쓰신 그야말로 '책이란 다 다른 책'인 거겠죠.

허나...님께서 이 책에 대해 비판하신 부분에 대해 제가 '전혀' 공감할 수 없음은 단순히 다 다른 책이어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일까요.

그리고 오히려 이 책의 편집자님께서 조목조목 달아주신 답변들에 대해 죄송하게도 거의 100% 공감하게 됨은 또 왜일꺄요.

저는 책을 복잡하게 읽지도 못하며 또 복잡한 책은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자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갔는지는 조금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 그게 흔히 얘기하는 소통의 일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된장 님께서도 댓글에 말씀하셨듯이 말입니다.

이 책 '청춘을 읽는다'는 방금 막 완독했구요, 책을 읽고 나서 강상중 님에 대해 여러가지 궁금한 점이 생겨 서핑을 하다 우연히 여기까지 들어왔습니다. 책을 읽고 난 소감은...'꽤 괜찮다'입니다. 예전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으며 정신이 번쩍 들었던 대목을 저자께서 다시금 되새겨주셔서 반갑기도 했고 제가 잘 몰랐던 일본에 대해서 아주 작게 나마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편집자 님께서 올려주셨던 것처럼 저자가 읽었던 책 중에 어떤 건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이건...흠...별로겠어...라고 쉽게 넘겨버렸습니다. 전혀 '이 책이야말로'라는 강제성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잘못된 건가요?

그리고...된장 님께서 답해주신 내용 가운데

'제가 이런 글을 왜 썼는지, 편집자님께서는 하나도 알아채고 있지 않으십니다.

편집자님 글을 읽은 느낌은, "이 책은 그야말로 읽을 값어치가 없구나"일 뿐입니다. 아쉽지만, 편집자님 생각이 너무 짧구나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거 말입니다. 솔직히 제 느낌은 그렇습니다. 한 번 꼬인 걸 놓고 상대방이 마음 터놓고 풀어보려했는데 너무도 처참하게 무안주며 "야~ 너 진짜 못 알아듣는구나 너 그 수준밖에 안되니 우리 서로 말 섞지 말자"라고 하는 걸로 밖에 안보입니다.

아, 그리고 이건 또 뭔가요?

(1) '돌베개 편집자'로 이 책을 생각하는지
(2) '돌베개 책만 읽는 독자'로 이 책을 바라보는지
(3) '출판노동자'라는 편집자로 이 책을 생각하는지
(4) '모든 책을 고루 사랑하는' 독자로 이 책을 바라보는지

이게 왜 그렇게 중요한 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된장 님께서는 (4)번의 입장에서 편집자 님이 댓글을 다시길 원했던 건가요. 글쎄요. 저는 위의 어느 입장이든 상관없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자신의 위치에서 진실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거 계속 얘기가 길어지는데요. 안하고 지나가면 안될 것 같아 이어봅니다.

'그렇게도 '남이 쓴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댓글을 달아 놓는 일은 '제가 알음알이로 아는 출판사 책이라고 별 다섯을 붙이는 일 없이, 모든 책에 모두 공정하게 평가를 하며 별과 비평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짜증스럽고 딱합니다. 책을 그런 매무새로 만듭니까? 당신이 만든 책에 평점이 낮아 기분이 나쁩니까?'

왜 함부로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왜 함부로 평점이 낮아 기분이 나빴냐고 지래짐작하십니까? 이상하죠. 오히려 '제대로 읽지 않은 분'은 된장 님인 것처럼 느껴지니 말입니다.

된장 님의 글에 대한 반박(?)은 이미 편집자 님께서 충분히, 그리고 속시원하게 해주셨기 때문에 제가 덧붙인다면 그야말로 사족일 수 밖에 없을 듯 싶습니다. 아, 끝으로... 지나가다 님께서 써주셨듯이 '시비걸기'로 읽혀지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음을 잊지않으셨으면 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한 번은 우연일지라도 두 세번 반복되면 그건 어떤 이유가 있어서이기 때문입니다.

숲노래 2009-11-29 08:44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이든 그 사람이 지내온 삶에 따라 '읽기'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그 사람 삶에 따라 '좋게' 받아들일 수 있고 '아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강상중 님은 겉멋이나 겉치레로 살아온 분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강상중 님 책이 더없이 부질없거나 안타깝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어느 만큼 '독자를 얻을' 수 있겠으나 더 깊은 골을 찬찬히 짚지는 않았다고 느낍니다.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쓴 <보도사진가>라든지 이시무레 미치코 님이 쓴 <슬픈 미나마타>라든지 얼마 앞서 유선진 할머니가 쓴 <사람 참 따뜻하다>라든지, 또는 팔리 모왓 님이 쓴 <잊혀진 미래>라든지 시모무라 고진 님이 쓴 <지로 이야기> 같은 책을 '가슴으로 새기며' 읽을 수 있으면 <청춘을 읽는다>에서 "청춘"과 "읽는다"가 제대로 삭여지지 못했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쓴 글을 '시비걸기'로 느끼든 말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시비걸기로 느끼는 분은 언제까지나 시비걸기로만 여기며 그 테두리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글에 '시비 거는' 사람이 '시비만 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뜻으로든 궂은 뜻으로든 '이야기 걸기'일 테니까요. 제가 보지 못한 대목을 짚으며 시비를 건다면 언제든지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와 다른 눈길로 그예 트집잡기에 지나지 않으면 웃습니다 :)

지나가다 2인 2009-11-29 00:1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아, 그리고 된장 님께서 추천해주신 '산다는 것의 의미'는 앞으로 읽을 책 목록에 넣어놓겠습니다. 좋은 책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숲노래 2009-11-29 08:4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책을 읽는 분들이 '사람 삶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땀흘린 책을 알아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저는 <마법사에게 소중한 것> 같은 만화책 또한 퍽 좋아하는데, 우리 옆지기는 <마법사에게 소중한 것>이나 아다치 미츠루 만화는 좀 시큰둥하게 보더군요... <단순하고 소박한 삶> 같은 책은 4/5까지는 괜찮았는데 끄트머리 1/5에서 영... 어긋나 버려서...

지나가다3인 2009-12-02 17:5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안타깝습니다. '슬픈 미나마타'의 리뷰를 보고 된장님 블로그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요. 윗분도 지적해주셨다시피 모든 일이 한 번은 우연일지라도 두 세번 반복되면 어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느끼기에도 편집자분이 지나가다가 몇 가지 정중하게 의문을 표한 글에 된장님이 다신 댓글은 근거와 배려가 부족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적어도 정성스럽게 책을 편집한 사람이 직접 남긴 댓글이니만큼, '편집자님의 생각이 너무 짧구나 싶습니다'라는 말로 그 글을 깔아뭉개는 것만은 하지 않으셨다면 좋았을텐데요. 물론 솔직한 생각을 표시하는 것이 나쁜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이니만큼 상대방 입장도 고려했으면 더 나았을뻔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우리 세상은 뒤틀리고 비틀리며 엉터리로 가고만 있습니다'라는 말도, 편집자의 댓글 몇 개만으로 결론 내리기엔 무리가 있는 말 같습니다.


숲노래 2009-12-02 20:45   좋아요 0 | URL
말씀 고맙습니다.

저는 제가 늘 가장 바르고 곧은 눈길로 사람과 세상과 삶을 들여다본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그날그날 살아가는 대로 적을 뿐입니다. 아무래도 요즈음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출퇴근하는 고달픈 고리'에 매여 있다 보니, 이런 댓글을 좀더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어쩌면, 이번 <청춘을 읽는다> 같은 책은 굳이 서평을 달 만한 무게나 값이 없었다고 느낀 그대로 아예 글을 안 썼다면 더 나았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아주 나쁜 책'이 아니라 '무언가 놓친 지점이 많은 책'이기에 그 대목을 넌지시 이야기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오늘 띄운 곽아람 님 책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와 같은 책이 '문제라거나 못났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글쓴이와 편집자 모두 느끼거나 잡아채지 못하는 아쉬운 손길과 눈길과 마음길'이 무엇인가를 나중에라도 깨우쳐 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님 말씀처럼 세상 모든 말과 생각은 '댓글 몇 개만으로 결론 내리기' 어렵습니다. 또한 결론은 함부로 내려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는 웬만한 댓글에는 아예 대꾸를 하지 않아야겠다고 느낍니다.

지나가다2인 2009-12-03 01:0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위에 글을 올렸던 지나가다2인입니다.^^;;

제가 달았던 글에 된장 님께서 어떤 답변을 다셨는지 궁금해서 들어와봤는데 얘기들이 좀 엉뚱하게('당신'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말 논쟁) 흘러가고 있었네요.

다른 건 그냥 그렇다 치고, 일단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몇 자 적어봅니다.

된장 님께서 '당신'의 용도가 다양하다고 말씀하셨는데 맞습니다. '당신'은 3인칭 극존칭으로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거 '3인칭'입니다. 1인칭이나 2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쓸 때 극존칭이 되는 것이죠. 된장님의 예문도 3인칭인 경우의 문장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신'이 2인칭이 될 때는 부부끼리 부르는 경우를 제외하곤 존칭보다는 상대를 낮잡아 부르거나 편하게 부르는 용도가 되는 게 상식입니다. 된장 님께서 엠제이비 님을 호칭하실 때는 2인칭으로 '당신'을 사용하셨을테니 답은 어느정도 나온 것 같군요. 설령 된장 님께서 상대방을 높이는 용도로 '당신'을 사용하셨다고 해도 그건 전혀 일반적인 용법이 아닙니다. 백이면 백, 상대방이 오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거죠.

그리고...쓰다만 글을 상대방 동의 없이 올린 것은 분명 문제가 있어보입니다. 엠제이비 님께서 사과를 요구하셨으나 무시하신 거 맞죠? 흠...

끝으로 '앞으로 웬만한 댓글에는 아예 대꾸를 하지 않아야겠다고 느낍니다.'라고 하셨는데 무슨 악플을 단 것도 아니고 상식적인 수준의 댓글에 대해서 이렇게 반응하시면 블로그는 왜 하시는 건지 모르겟네요. 그냥 자기 컴퓨터 하드에 일기쓰듯 기록하시고 혼자 보고 싶으실 때 보시면 되는 것 아닌가요? 인터넷은 공공의 공간입니다. 검색하면 된장 님께서 쓰신 글들이 쫙 뜨는 거 아시잖아요. 그 공공의 공간에 글을 쓴다면 그 글을 통해 영향받을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책임감은 다양한 비판에 대한 겸허한 반응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된장 님께는 그런 면이 안보입니다. 아쉽네요.

숲노래 2009-12-03 05:59   좋아요 0 | URL
오늘날 우리들이 '당신'을 엉터리로 쓰고 있는데, 국어사전에서 이 흐름을 받아들여 '당신'을 '낮춤말'처럼 다루고 있습니다만, '너'나 '자네'나 낮춤말처럼 쓰는 낱말이고 '당신'은 예의를 갖추어 하는 말입니다. 또는 '싸움을 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하도 엉터리로 쓰기 때문에 때때로 '님'이라는 낱말로 가리키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들이 쓰는 말을 옳고 알맞게 가누려는 마음이 없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자면 '님'이라는 낱말을 쓰는 일이 나을는지 모릅니다.

..

엠제이군 님은 '쓰다 만 글'이 아니라, 일부러 제 마음을 들쑤시려고 저만 보도록 해 놓은 악플을 그렇게 해 놓은 뒤 지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악플은 저한테 돌아오는 화살이 아닌, 바로 그런 악플을 쓰는 님한테 고스란히 돌아가는 글임을 알려드리려고 달아 놓았습니다.

저작권법에 따른다면 이렇게 붙여놓는 일은 잘못입니다. 법에 따라서 사과하라고 한다면 잘못한 일이므로 사과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삶을 돌아본다면, 이러한 안타까운 모습을 그분이 느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왜 싸워야 하는가요?

책 하나를 놓고 어떤 이는 이런 마음을 느껴서 이런 마음을 나누고자 하는데, 왜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가요? '느낌글' 하나를 놓고는 '동의나 반대'가 아닌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하고'가 있을 뿐입니다.

..

말 그대로 웬만한 댓글에는 대꾸를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제 글에는 댓글이 안 달려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웬만하면 댓글을 안 달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댓글을 다는 분들 스스로 '이야기(소통)'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면, 서로한테 부질없는 노릇입니다.

말이 좋아 인터넷이 '공공 공간'이지, 제대로 '공공 공간' 노릇을 안 하는 때가 얼마나 많을까요?

저라고 하는 사람은 '공공인'이 아니라, 알라딘 서재에 글을 쓰는 한 사람이지만, 저는 제 모습이 다 드러나도록 되어 있고, 다른 이들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댓글을 남깁니다.

님 말씀처럼 '다양한 비판'에는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다양함'이라는 옷을 입고 '다양하지 않게 헐뜯는' 말에는 그리 달가이 받아들일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헐뜯기라 하여도 저한테는 밥이 되는 목소리라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의 첫 수업
박원순, 홍세화 지음 / 두리미디어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배움터가 못 되는 학교에 갇힌 사람들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3] 박원순과 52명, 《내 인생의 첫 수업》



 열여섯 달이 되어 가는 아기는 ‘엄마’와 ‘아빠’와 ‘아기’라는 말 다음으로 ‘아, 됐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참말로 이 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알쏭달쏭이지만, 우리 귀에는 ‘아, 됐다’로 들립니다. 아기가 무언가 집고 싶어서 안달을 하고 떼를 쓸 때에 모른 척하고 있는데, 아기가 집어 달라는 무언가를 집어서 슬그머니 건네면, 아기는 한숨을 쉬듯 ‘아, 됐다’ 하고 내뱉습니다.

 엄마가 문득 읊는 소리를 듣고는 따라하는지, 그냥저냥 내는 소리가 ‘아, 됐다’처럼 들리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작은 키로 발돋움을 하며 무언가 집으려고 용쓰는 아기가 드디어 제 손에 무언가를 집고 나서 내뱉는 그 짧은 소리마디는 더없이 잘 어울리면서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 내가 다닌 학교에 민주공화국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면, 대한민국 공교육의 1차적 소명은 대한민국 국민을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으로 형성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공교육의 현장인 학교마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민주공화국이어야 했다. 프랑스의 학교마다 그들의 국가 이념인 ‘자유ㆍ평등ㆍ박애’가 강조되듯이. 그러나 내가 다닌 학교에서 강조된 것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반공ㆍ방첩’이었다 … 젊은 세대들은 거의 이 사건을 모른다. 5ㆍ18광주민주화운동과 6ㆍ10민주항쟁조차도 모르는데, 하물며 보도지침사건을 배우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도지침사건은 한국 언론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  (16∼17쪽/홍세화, 97쪽/김주언)


 아기는 날마다 새롭게 배웁니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집과 똑같은 동네를 보면서도 배우고, 때때로 조금 먼 동네로 마실을 가며 부대끼는 모습과 사람들을 보면서도 배웁니다. 낯선 바람을 쐬면서 배우고, 낯익은 바람을 쐬면서 배웁니다. 어느 하나 배움 아닌 이야기가 없는 우리 터전입니다. 좋은 모습을 배우는 한편, 궂은 모습을 배웁니다. 좋은 사람한테서 좋은 내음과 목소리와 생각과 삶을 살며시 배울 수 있을 테고, 궂은 사람한테서 궂은 내음과 목소리와 생각과 삶을 안타깝게도 어느 결엔가 배울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꼭 아이를 키우는 몸이 되었기 때문에 제 둘레 터전을 더 깊이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이가 없이 어른끼리 살아가는 터전이라 하여도 ‘사람이 살 만’한 곳이어야 합니다. 맑은 숨과 따뜻한 햇볕을 쬘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나부터 내 이웃한테 따사로운 사람이어야 하며, 내 이웃은 둘레 사람들한테 넉넉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살 만합니다. 동네는 돈에 눈먼 이들이 함부로 짓밟거나 까부수는 재개발구역이면 안 됩니다. 한 동네에 뿌리내린 채 서른 해이고 쉰 해이고 백 해이고 걱정없이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시끄럽거나 지저분한 장사꾼이 들이닥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에서는 좀처럼 살 만한 터전을 찾기 어렵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이 있는 대로, 돈이 적거나 없는 사람은 돈이 적거나 없는 사람 대로, 마땅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힘이 듭니다.

 참말 왜 우리는 이렇게 온누리를 들쑤시면서 끝없이 재개발을 되풀이해야 할까요. 갯벌을 갯벌답게 살리고, 바다와 냇물을 바다와 냇물 그대로 살리면 안 되는가요. 논밭과 산들에 그렇게 비료와 농약을 쳐대야만 하는가요. 좀 못생기고 자그마한 능금과 배와 복숭아와 포도를 먹어서는 안 되는가요. 더 빨리 달리는 고속철도보다, 더 둘레 터전을 아늑하게 보듬으며 환경사랑을 함께하는 철도를 마련할 수는 없을까요.

 이 나라를 지키는 길에 국가보안법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국가보안법이 없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생각이 몹시 안쓰러운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법 없이 느긋하고 넉넉하고 따뜻하고 힘차고 슬기로운 삶터를 일굴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더 많은 돈이 없이도 얼마든지 나라를 북돋우고 살림을 북돋우며 교육과 문화와 과학을 북돋울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 당시에 대한 기억들은 온통 선생님들께 ‘개기고 기어오른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내심으로 선생님들을 깔보고 무시했다. 학생이라고 무시하고 때리는 사람들에게는 같은 대접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 세상 물정에 어둡던 나는 쉬는 시간이면 맨 뒷자리에 앉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교련반대시위가 심심치 않게 벌어졌지만 나는 그냥 멀리 피해 다녔다. 행여 그쪽 가까이 지나가다가 잘못될까 두려웠고, 혹시 졸업 이후에 공무원 등으로 취직하는 데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20쪽/오창익, 112쪽/이학영)


 《내 인생의 첫 수업》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덜컹거리는 지옥철에서 이 사람한테 밀리고 저 사람한테 발을 밟히며 읽습니다. 밀어붙이는 사람이나 발을 밟는 사람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차가운 빛조차 없는 메마른 낯빛으로 아무렇지 않게 밀치고 발을 밟을 뿐입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내 옆과 뒤에서 똑같이 하는데 내가 밀치거나 밟을 밟았대서 내가 뭔 잘못인데?’ 하는 뚱한 모습입니다.

 가늘게 한숨을 쉬면서 힘겹게 책을 손에 쥐어듭니다. 모두 쉰세 사람이 저마다 당신 삶을 오늘과 같은 흐름으로 이끌어 준 ‘고마운 스승’이 누구였는가를 떠올리면서 다 다른 삶을 다 다른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쉰세 사람은 모두 우리 세상을 좀더 낫고 알차고 아름다운 쪽으로 이끌고 싶어하는 분들로, 저마다 시민사회 모임에 몸을 담고 온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사회 디자이너’라고 일컬으면서 우리 사회가 제자리걸음이나 뒷걸음을 치지 않게끔 애쓰고 있음을 여러모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쉰세 사람이 되는 다 다른 삶이지만, 다 다른 사람들 삶이 어쩐지 몹시 닮았구나 싶습니다. 하나같이 초중고등학교 적을 ‘즐겁게’ 떠올리지 않습니다. 입시에 매이는 학생 때는 스스로를 사람답게 살지 못한 때로 떠올립니다. 대학교에 다닐 때에는 취업이라는 벽에 부딪쳐 제 밥그릇을 챙기는 쪽에 좀더 기울어져 있거나, 공장이나 시위판에 뛰어들어 ‘보통사람이 누구인가’를 비로소 처음 보고 느끼며 배웠다고 이야기합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금세 끝까지 읽어치웁니다. 다 읽어치운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글쓴이는 모두 쉰셋이지만, 왜 한 사람이 쓴 이야기라는 느낌만 드는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습니다. 어이하여 쉰세 사람이 지내온 발자국이 마치 한 사람이 지내온 발자국처럼 보이는지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 비판이라는 미명으로 상대를 비난하거나 험담해야 자신의 존재가 살아남는 우리 나라 운동권 문화에 익숙하던 나에게, 서로가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를 적절한 유머로 만들어 가는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하고 강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 그 과정에서 강압적이며 불합리한 결정의 뒤에 돈과 권력에 충성하는 과학기술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간파했다. 그래서 과학은 가치중립이라고 믿던 ‘이공계’는 인문학을 더 공부해야만 한다는 걸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  (71쪽/나효우, 149쪽/박병상)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동인천역에서 내려 어두움 깔린 길을 걷습니다. 코앞에 걷고 있는 젊은 짝꿍이 “씨발, 추워.” 하고 한 마디 뱉습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겼음직한 새파란 이들이 그리 춥다고 하기 어려운 이 날씨에 춥다고 하면서 “씨발”을 입에 붙입니다. 영 도 밑으로 뚝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춥다고 느끼면 춥겠지요.

 아침에 전철역으로 가는 길에서 스치는 고등학교 아이들 또한 어느 누구한테나 입에 “씨발”이 붙어 있습니다. “씨발, 아침부터 …….”, “씨발, 오늘도 …….” 저녁나절 동인천역 둘레 술집거리에서 노닥거리거나 뒷골목에서 담배를 꼬나무는 고등학교 아이들 입에도 언제나 “씨발”이 매달려 있습니다. 단골로 가던 창영초등학교 앞 분식집은 이제 문을 닫고 말았는데, 이 분식집에 들어앉아 떡볶이를 먹으며 한 시간쯤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곳을 드나드는 초등학생과 여고생을 살펴볼 때에는 “씨발”을 입에 달던 아이는 못 보았습니다.

 동네 탓일는지, 가게 탓일는지, 또래동무 탓일는지, 둘레에 어떤 어른이 있는가에 따라 다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창영초등학교 앞에 있던(이 학교 바로 옆에는 여상이 있습니다) 분식집 아주머니는 어린 학생이 함부로 “씨발”을 입에 올렸을 때에 가만히 있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넌지시 타이르며 이런 말을 쓰지 않도록 이끌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때때로 떡볶이를 사는 곳이 있습니다. 대한서림과 동인서관 옆에 나란히 세 곳 붙어 있는 분식집 가운데 한 집에서 사는데, 이 분식집들을 드나드는 어린 학생이나 나이 좀 먹은 아저씨들이나, 분식집 할매한테 으레 반말을 늘어놓습니다. “할머니, 빨리 줘.”라든지 “할머니, 얼마야?” 하고. 어떤 이는 ‘할머니’라고도 안 붙이고 그냥 반말만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런 반말지꺼리에 딱히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으레 높임말을 씁니다.

 할머니 분식집은 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에도 보았고, 옆지기와 함께 살며 딸아이를 낳은 요즈음도 봅니다. 할머니는 더 늙고 힘이 없어질 때에도 가게를 열어 놓으실 텐데, 앞으로 열 해쯤 더 이곳에서 장사를 이을 수 있지 않을까 어림해 봅니다. 그러니까, 이 할매 분식집을 찾아오는 나이 좀 먹은 이들은 당신이 학생 때부터 온 손님이요, 이제는 초등학생 아이를 데려오며 이곳을 들를 만한 때라 하겠습니다. 모르기는 모르지만, 이이들 나이 좀 먹은 이들은 학생 때부터 할매한테 말을 까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학교옷을 입은 어린 아이들은 앞으로 나이를 좀더 먹어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어 이곳을 다시 찾아온다면 그때에도 어김없이 말을 깔 테지요.


.. 그렇지만 중대장의 공명선거 의지는 상급자의 압력에 의해 바로 제동이 걸렸다. 거기에다 기무대 소식 보안반장까지 직접 찾아와서 “상급 라인에서는 발벗고 열심히 뛰고 있지만, 하급 라인에선 많이 ‘민주화’되어 여당표가 70퍼센트도 힘들 것이다. 너무 강압적으로 하지 말고 남들 하는 만큼만 해 줘라. 서신검열기로 표본조사를 하여 여당득표율이 저조할 때는 해당 중대가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라고 엄포를 놨다 … 그 대학이란 것이 이렇게 비싼 것이었구나! 대학생이란 것이 그저 합격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많은 돈을 풍덩풍덩 바쳐야 누릴 수 있는 신분이었구나! 나는 당시 이런 바보 같은 깨달음을 얻었던 것 같다 ..  (87쪽/이지문, 159쪽/김언경)


 집에 닿아 가방을 내려놓고 씻고 아기를 안습니다. 하루 내내 아기와 함께하지 못하고 아침저녁으로만 함께해야 하는 삶이 퍽 고단합니다. 더욱이 바깥일을 한다며 서울을 오가는 길에 부대끼거나 복닥이는 사람들이 그리 따사롭거나 넉넉하지 못해, 이런 바깥물이 제 몸에 배어들어 아기한테 옮아갈까 걱정스럽습니다. 제아무리 바깥물이 어지럽고 어수선하더라도 저 스스로 제 몸과 마음을 알뜰히 간수한다면 근심될 일이 없다 할 테지만, 한 사람한테 따스함과 넉넉함보다는 성과와 돈과 이름값을 바라는 이 삶터에서 제자리와 제길을 건사하기란 만만하지 않습니다.

 싸우고 싶지 않은데 싸우도록 내몰고, 어깨동무하고 싶은데 어깨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다투고 싶지 않은데 당신들과 같은 옷을 입지 않으면 편을 가릅니다. 따돌리기도 싫고 따돌림받기도 싫은데 당신들과 같은 자리에 서지 않으면 손가락질을 하거나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합니다.

 오늘 우리 삶터에는 학교라 할 만한 학교가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오늘 우리 삶터는 학교 울타리 안쪽에서만 가르치고 배우는데, 울타리 안이나 밖이나 매한가지로 어지럽고 어수선할 뿐 아닌가 싶습니다. 제도권을 박차고 나와도 제도권 틀거리요, 제도권 바깥에서 힘내어 싸운다 할지라도 제도권 테두리로구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제도권을 비판하면서 제도권을 바로잡자고 애쓰는 쉰세 분이 쓴 토막글을 모은 《내 인생의 첫 수업》은 어쩔 수 없이 제도권 이야기에 파묻힐밖에 없고, 이리하여 쉰세 사람 쉰세 가지 삶이라고는 하나, 속살은 하나같이 어슷비슷하거나 도토리 키재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같은 목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배움터가 못 되는 학교를 박차고 나오지 못하면, 살림터가 되기 힘든 울타리에 매이는가 봅니다. 배움터가 되는 학교를 스스로 찾아나서지 못하면, 살림터가 될 우리 세상을 일구지 못하는가 봅니다. (4342.11.12.나무.ㅎㄲㅅㄱ)


 ┌ 《내 인생의 첫 수업》(두리미디어,2009)
 ├ 글 : 박원순을 비롯해 쉰두 사람
 └ 책값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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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울 수 없는 이미지 2 - 한국전쟁에 휩싸인 사람들
박도 옮김,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RA) 사진 / 눈빛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사진읽기 없이 사진찍기에 갇힌 한국사람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6] 박도 엮음,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



- 책이름 :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
- 사진 : 한국전쟁 미군 종군기자
- 엮은이 : 박도
- 펴낸곳 : 눈빛 (2006.6.25.)
- 책값 : 35000원



 (1) 사진읽기와 사진찍기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골목길을 사진으로 여러 해 또는 여러 달 담은 다음에 사진잔치를 여는 분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김기찬 님을 빼놓고 ‘골목길 이야기’를 사진책으로 엮어 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아직까지 한 사람도 없다 할 만합니다.

 사진으로 담을 만큼 눈에 뜨이거나 마음을 사로잡는 모습이 되는 골목길이라고는 하지만, 책으로 엮었을 때에는 팔기가 썩 힘들어 출판사에서 꺼리기 때문일까요. 김기찬 님 앞으로나 뒤로나 골목길을 찍는 사람은 많으나 김기찬 님이 이른 사진예술에는 가 닿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사진감은 골목길이라고 하나, 정작 골목동네 삶자락을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얼마 앞서 인천 송림4동 골목길 한켠에서 사진잔치가 열렸습니다. 이곳 인천 송림4동 골목동네를 사진으로 담은 분이 그곳에 있는 골목집 담벼락에 사진 서른 점쯤을 붙이며 조촐하게 마련한 자리입니다. 빗줄기 꾸준하던 일요일 아침에 화평동부터 걸어 송현1ㆍ2ㆍ3동을 거쳐 송림2동과 6동을 지나 4동에 다다르며 담벼락 사진 몇 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딱히 이 사진잔치를 구경할 마음에 송림4동까지 걷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골목동네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담아서 어떻게 보여주려고 했는지 궁금했습니다.

 번들번들한 종이에 뽑은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피식 하는 웃음조차 나지 않습니다. 슥 한 번 둘러보고는 다시 더 들여다볼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사진이 붙은 담벼락 옆으로 난 골목으로 조용히 들어갑니다. 잠자리채와 어울리고 있는 꽃그릇에는 가을 김장거리가 자라고 있습니다. 빗줄기 떨어지는 골목집 처마와 처마 사이는 좁아 작은 우산임에도 반을 접어서 걸어야 합니다. 골골샅샅 새삼스레 골목을 돕니다. 옆으로 이어진 송림4동 천주교회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성모님한테 꾸벅 절을 하는데, 둘레에 떨어져 있는 가을 나뭇잎 빛깔이 퍽 곱구나 싶어 사진 한 장 담습니다. 제 사진기와 렌즈는 화각이 좁아 울긋불긋 빛깔이 어우러지는 천주교회 안마당과 골목동네 이웃집을 나란히 사진 한 장에 우겨 넣지 못합니다. ‘참 안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굳이 한 장에 우겨 넣어야 하지는 않잖아?’ 하고 새롭게 생각합니다. 있는 그대로 좋으니까요. 그러면서 깨닫습니다. 왜 나는 저 담벼락에 붙은 사진들이 못마땅하다고 느끼고 있는가를. 골목동네와 골목동네 사람을 찍으려 했다는 저 사진들은, 곰곰이 따지면 골목동네를 찍지 않았습니다. ‘골목동네 느낌이 나도록 하는 풍경’을 하나 찍었고, ‘골목동네 사람들 얼굴 모습’을 하나 찍었습니다. 그러니까, 골목길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골목길 풍경’을 찍은 사진이요, 골목집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사람들 얼굴’을 찍은 사진인 셈입니다.

 비오는 일요일 한낮을 지날 무렵, 낮은 산자락에 자리한 작은 골목집 안마당에서 남자 어르신 여럿 목소리가 왁자하게 울려퍼집니다. 남자 어르신 여럿은 겨울을 부르는 비를 맞이하면서 술 한잔을 즐기고 있습니다. 담벼락에서 까치발을 하면 어르신들이 어떻게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고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슬그머니 지나칩니다. 저로서는 어르신들 목소리만으로도 술내음을 맡았습니다.

 재능대학교 높은 건물이 우람하게 올려다보이는 달동네 꼭대기에 닿습니다. 나무전봇대랑 사이좋게 어울려 있는 골목집 한 채는 담벼락에 무청을 말리고 있습니다. 사진 석 장 담습니다. 이 삶자락이 고스란히 아름답다고 느끼기에, 한 장이나 두 장, 때로는 석 장쯤 사진으로 담습니다. 한 번에 한 장쯤 찍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다시 찾아와서 다시 한두 장 새롭게 담습니다. 그런 뒤 또 찾아와서 새삼스레 한두 장 다시 담고, 이러기를 여러 해 되풀이합니다.

 저는 헌책방을 사진에 담을 때에도 이렇게 해 왔습니다. 한 번 찾아가서 그날 찍은 사진만으로도 그 헌책방 이야기를 낱낱이 보여줄 수 있도록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그날 한 번 찾아가는 발걸음만으로 사진을 마무리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헌책방 사진을 찍은 지 벌써 열한 해를 넘기고 있는데, 단골로 다니는 헌책방마다 그 한 곳을 찍은 사진만 모아도 사진책 여러 권 낼 만큼 되었다 하지만, 제 마음은 ‘아직 멀었다’입니다. 헌책방이 스스로 담아내고 있는 햇수와 너비와 눈물과 깊이가 어떠한데 고작 열 몇 해 사진을 담고 이야기를 듣고 온몸으로 부대꼈다고 해서 그곳을 ‘알’고 ‘보’았고 ‘느꼈’다고 하면서 섣불리 사진책 하나를 마무리할 수 있겠습니까.

 글을 쓰는 사람은 퍽 바지런히 글을 읽습니다. 내가 쓰는 글과 견주어 다른 사람이 쓰는 글을 아주 많이 읽습니다. 내 글을 한 줄 쓰려고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책으로 치면 열 권 넘게 읽습니다. 때로는 백 권쯤 읽습니다. 웬만큼 훌륭하다고 느낄 만한 분들 책이라면, 이분이 이 한 권을 써내기까지 읽은 다른 사람 글책은 자그마치 만 권이나 이만 권쯤은 된다고 느낍니다. 훌륭한 책을 만날 때마다 이 책을 태어나도록 이끌어 준 또다른 책 만 권을 헤아립니다.

 옛말에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고 했습니다. 제가 읽기로는 훌륭한 책이지만, 이 책을 쓴 분은 늘 부끄럽다고 여기겠지요. 그래, 글쓴이는 부끄럽다고 여기는 읽는이는 훌륭하다고 받아들인 책 하나는 수많은 다른 책나라로 다리를 이어 주는 노릇을 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사람들한테 조용히 인사를 건네면서 나 스스로 더욱 담금질을 하고 좀더 갈고닦기를 하라고 어깨를 토닥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퍽 게을러 다른 사람 사진을 거의 안 읽습니다. 아예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글쓰기에 앞서 글읽기가 있듯이, 그림그리기에 앞서 그림읽기가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진찍기에 앞서 사진읽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읽기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진쟁이 스스로 사진읽기를 제대로 하지 않는 가운데 사진찍기만 무턱대고 나섭니다. 마치, 다른 사람 작품을 들여다보는 일이 내 사진을 더럽히거나 얼룩지게 하기라도 하듯이. 괜히 영향을 받거나 비슷한 틀이 나오도록 하기라도 하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거룩하고 뛰어나고 빼어나고 훌륭했던 글쟁이와 그림쟁이는, 눈을 감는 마지막날까지 다른 사람 글과 그림을 들여다보고 읽어내고 삭여내어 받아들이려고 무던히 애썼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빚어낸 글과 그림 부피보다 다른 이 글과 그림을 받아들인 부피가 훨씬 큽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 글과 그림을 흉내내지 않으며 당신 글과 그림을 일구었습니다.

 오늘날 사진쟁이들은 다른 사람 작품을 거의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창조나 개성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생각힘이 없습니다. 넋이나 얼 또한 없습니다. 외려 죽은 작품만 쏟아집니다. 그리고, 죽은 작품만 숱하게 쏟아내면서 스스로 죽어 있는 작품인지 아닌지 깨닫지 못합니다.

 흔한 말로 한국땅에서 사진기 다룬다는 사람이 천만이 된다고 하는데, 더없이 아름다운 사진책 하나가 천만 권 팔리기를 바랄 수 없다손 치더라도 만 권조차 아닌 천 권마저 팔리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우리 모습이 이렇습니다. 백 권이나마 팔리면 잘 팔린 셈입니다. 한 해 동안.

 모두들 읽기는 하지 않는 주제에 ‘내가 사진을 얼마나 잘 찍었는지 좀 들여다보쇼!’ 하면서 끝없이 당신들 작품을 쏟아내기만 합니다. 알음알음으로 서로서로 사진잔치에 찾아가 주기는 하지만, 서로서로 찾아가 주어도 서로서로 어떤 사진을 어찌어찌 찍었는가를 살피지 멋힙니다. 살폈어도 속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잘못 찍었으면 나무라고 엉뚱하게 찍었으면 꾸짖으며 형편없이 찍었으면 다그쳐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진찍기에 앞서 사진읽기가 안 된 요즈음 사진쟁이들은 ‘사진말하기’조차 할 줄 모릅니다. 아니, ‘사진말하기’는 생각해 본 적이 없겠지요.

 이리 비틀 저리 뒤틀 하면서 갈팡질팡이요 엉망진창입니다. 새로운 사진쟁이라면서 이름과 얼굴 들이미는 사람은 넘쳐나는데 하나도 새롭지 못합니다. 사진예술을 한다고 내세우고 있으나 하나도 예술다움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2009년 사진밭이 쑥대밭이라 한다면, 사진찍기에 앞서 사진읽기를 할 줄 알거나 하려고 힘쓰는 사진쟁이를 찾아보기 어려운 데에서 골칫거리가 싹트고 있다고 봅니다.


 (2)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두 번째 이야기


 박도 할아버지는 지난 2006년에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을 내놓았습니다(2004년에 1권, 2007년에 3권을 냈습니다). 당신이 찍은 사진이 아니지만, 당신이 엮은이 이름을 걸었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참말 모르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누가 찍었는지 왜 찍었는지 알기 쉽지 않은 사진들을 알뜰히 그러모아서 사진책을 엮었습니다.

 틀림없이 주한미군이 찍은 사진이었을 테며, 종군 사진기자나 사진작가가 찍기도 했을 사진이라고 봅니다. 이 가운데에는 임응식 님이 찍은 사진이 함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임응식 님은 한국전쟁 때 미군에 사진기자로 들어가서 여러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는데, 모든 필름을 미군한테 내어주어야 했다고 했거든요.

 한국땅으로 들어왔던 미국 군부대가 수많은 사진쟁이를 부려서 숱하게 찍고 모으고 한 사진들로 사진책을 엮었는지 그냥 자료로만 간수하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이들 미국 군부대는 한국전쟁 때 찍은 한국땅 한국사람 모습을 내다 버리지 않았습니다. 알뜰하게 건사해 놓았습니다. 우리한테는 없는 우리 삶자락 이야기가 외려 미국땅 어느 관공서 도서관 한켠에 얌전하게 모셔진 채 오래도록 찾는 이 하나 없이 묻혀 있었습니다.


..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은 투명유리로 된 최신의 6층 건물로, 그 규모도 엄청 컸지만 그곳에 소장한 수백만 파일의 각종 기록물의 방대함을 보고는 탄복하였다. 5층 자료실에서 비밀 해제된 한국 관련 사진(주로 한국전쟁 사진)들을 보자 50여 년이 지난 그때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떠올랐다. 한국전쟁 당시 나는 여섯 살 난 소년으로 기억들이 가물가물 남았는데 그 사진들을 보자 바로 나와 내 이웃들의 살아 있는 모습처럼 다가왔다. 순간 나는 그 사진들을 모두 우리 나라에다 옮겨 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을 다 옮겨 오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자료실에서 사진 스캔은 허용되기에 재미동포에게 스캐너를 빌려서 40여 일 동안 수십만 장의 사진 가운데 480여 매를 골라 컴퓨터에 담아 왔다 ..  (엮은이 말/박도)


 우리한테는 어떤 ‘기록’이 있고 ‘자료’가 남았다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 나라 대한민국에는 기록을 하는 공공기관이 있는지 궁금하며, 기록을 하는 문화예술교육인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자료를 간수하는 공공기관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며, 자료를 그러모으는 문화예술교육인은 또 얼마나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은 ‘기록예술’이라는 이름이 나란히 붙습니다만, 사진을 기록하는 예술로 끌어올리는 사진쟁이는 한국땅에 몇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 한국땅에서 사진을 하는 분들은 ‘기록’이나마 제대로 하고 있을까요? ‘예술’이라도 제대로 하고 있을까요? 기록도 예술도 아닌 사진을, 그냥저냥 사진이라는 허울만 뒤집어쓴 채 놀음놀이에 빠져 있지는 않을까요?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을 사둔 지 퍽 되었으나 책을 제대로 펼칠 겨를이 없이 지냈습니다. 책상맡에 두기는 했으나 펼치지 못한 채 두 해 가까이 먼지만 먹이고 있었습니다. 세 시간 남짓 비를 맞고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찍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이 사진책이 보여 다른 일을 젖혀 놓고 한참 여러 번 들여다보았습니다. 이 사진책을 그러께 처음 장만하던 때 보기는 보았겠지만 그때에는 저 스스로 샅샅이 읽어내면서 받아들일 만한 가슴이 못 되었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이태를 흘려보내며 골목동네 사람으로 살아온 다음에 비로소 읽어낼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새삼스럽게 느낍니다.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에는 ‘인천’ 모습을 담은 사진이 꽤 많이 실려 있습니다. 아마 이 책에 싣지 못한 인천 예전 모습은 훨씬 많으리라 봅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미군은 인천을 거쳐 서울로 들어섰으며, 인천에는 대단히 큰 미군부대가 있었으니까요. 요사이야 다른 데에도 미군부대가 엄청나게 많지만, 이무렵을 떠올리면 ‘서울로 들어서는 문이요 서울을 지키는 문’인 인천이다 보니, 인천에서 미군이 오락가락하며 담은 사진은 따로 한 권으로 묶어도 될 만큼 되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인천시 문화부 일을 맡은 공무원은 이 사진책을 알아보지 않습니다. 인천문화재단 공무원 또한 이 사진책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인천에서 지역학을 한다는 교수님 또한 이 사진책을 껴안지 않습니다. 인천에서 사진을 하고 역사를 하고 무어를 하고 한다는 지식인과 예술인 또한 이 사진책을 보듬지 않습니다.

 사진책에 실려 있는 ‘온통 나무전봇대가 줄을 잇는 저 동네’는 인천 어디메일까를 한참 떠올려 보지만 떠오르지 않습니다. 1950년대 인천은 매우 좁기 때문에 어딘지 어림은 되나 제대로 짚이지 않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2009년까지 인천 옛 도심지에 남아 있는 나무전봇대 가운데에는 이때 1950년대에 일찌감치 박아 놓은 녀석들이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여태껏 살아낸 녀석일 수 있습니다. 뭐, 꽤나 많은 집들은 쉰 해나 예순 해 역사를 아무렇지 않게 간직하고 있으니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 찬찬히 읽은 다음 덮습니다. 이제 책꽂이 잘 보이는 자리에 곱게 꽂아 놓습니다. 박도 할아버지가 이 책이름을 지었는지 출판사 편집자나 사장이 붙였는지 모르나,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이름이 무척 잘 어울립니다. 참말로 지울 수 없는 모습들입니다. 잊을 수 있으나 지울 수 없는 모습들입니다. 모른 척할 수 있으나 지울 수 없는 모습들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오늘 우리 삶자락을 꾸밈없이 사진으로 적바림해 놓고 있지 않다고 하여도 오늘 우리 모습은 어떻게도 지울 수 없고 감출 수 없고 꾸밀 수 없고 버릴 수 없습니다. 멋진 모습이건 훌륭한 모습이건 더 내세울 수 없으며, 못난 모습이건 모자란 모습이건 뒤에 꿍쳐 놓을 수 없습니다. 모두 우리 모습입니다. 모두 우리 삶입니다. 모두 우리 이야기입니다.

 이 나라 사진쟁이가 이 나라 삶자락을 있는 그대로 사진에 여미어 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 삶은 그예 우리 삶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손으로 우리 삶을 담아내지 못하고,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두 권에 담긴 모습처럼 ‘딴 나라 사람 손’에 담기는 우리 모습이 될 텐데, 이러하든 저러하든 우리 삶은 우리 삶입니다. 슬픈 일이지만 앞으로 2059년이 되면, 2009년을 돌아보는 사진자료를 그러모을 때 한국 사진쟁이 손으로 담은 사진은 한 장조차 없이 ‘딴 나라 사람 손’으로 담은 사진만 죽 그러모아서 “2059년판 지울 수 없는 이미지”가 나오지 않으랴 싶습니다. 걱정이 아닌 참모습이요, 슬픔을 넘어 헛웃음입니다. (4342.11.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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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은 힘이 세다 - 앙성댁 강분석이 흙에서 일군 삶의 이야기
강분석 지음 / 푸르메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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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22 ― 사랑씨 없는 도시사람이 되어 간다지만
 : 강분석, 《씨앗은 힘이 세다》


- 책이름 : 씨앗은 힘이 세다
- 글 : 강분석 (http://www.angsung.com)
- 펴낸곳 : 푸르메 (2006.5.19.)
- 책값 : 9000원



 (1) 서울 같은 큰도시에서 찾는 씨앗


 사람은 누구나 씨앗 하나 품고 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어버이한테서 목숨을 받아 태어날 때부터 씨앗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날 목숨씨를 아버지와 어머니한테서 함께 받습니다. 어느 한쪽 씨앗만으로는 우리가 태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곡식에는 씨눈이 있습니다. 이 씨눈이 트고 자라며 더 많은 열매를 맺어 우리 밥상에 오릅니다. 쌀과 보리뿐 아니라 콩과 팥 또한 씨앗이며 곡식입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고기에도 씨앗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버이한테서 목숨씨를 얻듯 짐승 또한 제 어미한테서 목숨씨를 얻습니다. 그저 우리들 거의 모두 언제나처럼 ‘토막토막 잘게 썰린 채 불에 익히기를 기다리는’ 고깃점만 보거나 밥집에서 다 익혀 놓은 고깃점을 받아들일 뿐이라 살갗으로 못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든 푸나무이든 물뭍짐승이든 씨앗에서 비롯합니다. 씨앗에서 비롯하며 씨앗을 남깁니다. 씨앗에서 비롯하여 씨앗을 남기기까지 고이 삶을 꾸리는 한편, 다른 목숨한테 밥이 됩니다. 사람이든 푸나무이든 물뭍짐승이든, 저마다 목숨을 잇자면 다른 씨앗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목숨을 내 몸에 삭여 새 기운을 얻어야 합니다. 홀로 살 수 없는 사람이요, 홀로 살지 못하는 푸나무요, 홀로 살아가지 못하는 물뭍짐승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지켜야 한다고 외칠 때에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이 이어가도록 하자는 뜻일 텐데, 이 자연 지키기란 다름아닌 ‘먹이사슬이 흐트러지지 않게끔 다양성을 건사하는 일’입니다. 사람만 배불리 먹는다든지, 사람 가운데 몇몇 겨레나 나라만 배터지게 먹는다든지 하지 않게끔, 알뜰살뜰 올바르게 추스르자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터는 어떻습니까. 우리 삶터는 서로가 서로를 지키거나 보듬거나 껴안거나 사랑하는 삶터인지요? 우리 삶터는 서로서로 오붓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을 만한 넉넉하고 따스한 삶터인지요?

 서울 광화문에 자리한 한글학회에 일을 나오고 있는 요즈음, 낮밥 때에 맞추어 문방구에 다녀옵니다. 문방구 다녀오는 길에 큰길 안쪽 모퉁이에 큼지막하게 문을 연 ‘ㅎ플러스 슈퍼마켓’이라는 데를 들여다봅니다. 요사이 말 많은 곳 가운데 하나인데, 돈이 많은 큰 회사들이 ‘동네 구멍가게’ 씨를 마르게 한다는 그 ‘슈퍼마켓 아닌 슈퍼마켓’입니다.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이 바글바글이요, 가게를 드나드는 손님 또한 바글바글입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서울 광화문 같은 데에는 ‘동네 구멍가게’가 들어설 수 있을까?

 지난주에 종로 안쪽 골목을 거닐다가 ‘동네 구멍가게’에서 보리술 한 병을 살까 하고 값을 여쭈니 640들이도 아닌 500들이 중간병을 2100원 달라고 합디다. 이 구멍가게에서 150미터쯤 떨어진 편의점에서도 640들이 보리술을 2000원 받고 있는데. 구멍가게 할매는 외국 관광객한테 바가지를 씌우면서 당신 살림을 꾸리거나 가게를 지키는 셈이었을까요? 자리값을 그쯤은 받아야 하는 셈이었을까요? 아무래도 서울 종로 같은 데에는 골목길이 골목길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이런 곳 구멍가게 또한 구멍가게라 하기 어려우며, 구멍가게가 들어설 수 없겠구나 싶습니다. 서울 광화문이나 종로거리에는 ‘근대화슈퍼’나 ‘연쇄점’ 같은 구멍가게는 또아리를 틀 수 없고, ‘ㅎ 슈퍼마켓’과 ‘ㄹ 슈퍼마켓’만 들어서야겠다고 느낍니다.

 낮밥 때를 맞추어 길거리에 쏟아져 걷는 사람들 숲을 헤치고 일터로 돌아왔습니다. 하나같이 잿빛이나 검은빛 양복을 갖춰 입은 사람들은 담배나 커피잔을 들고 하하호호 웃고 맑은 얼굴빛입니다. 문득, 속으로 ‘서울 도심지에는 굳이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이 따로 없구나.’ 하고 느끼면서, ‘서울뿐 아니라 부산과 대구와 인천과 광주와 대전 같은 큰도시 번화한 거리에도 아무런 철과 날씨가 아랑곳하지 않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철이 바뀌어도 철이 바뀌는 줄 모를 뿐더러, 느낄 까닭이 없는 이곳에서는 사람이든 푸나무이든 짐승들이든 옹근 목숨씨 하나로 자리잡기 힘들겠다고 새삼 느낍니다. 언제나 똑같은 회사일이요 사무직이지, 무슨 씨앗이고 철이고 목숨이고 있겠습니까. 좀더 나은 대접과 연봉과 보고서와 성적이지, 어떤 하늘이고 꽃잎이고 바람이고 깃들겠습니까.

 아침마다 시청역에서 내려 광화문으로 걸어오며 하늘을 올려다보면 경복궁과 인왕산 위로 하늘이 시커멓습니다. 먹구름이 깔려 시커멓지 않고, 서울에 잔뜩 깔린 먼지와 배기가스 때문에 시커멓습니다. 가뜩이나 서울은 우줄우줄 산 때문에 바람이 쉬 빠져나가지 못하는데, 인왕산과 북한산 둘레로 높직높직 아파트가 새로 올라서면서 먼지와 배기가스는 하염없이 늘기만 합니다. 경제위기 소리가 잦아든 지 오래이고, 기름값 걱정 같은 소리는 하기 좋아서 하는 말 뿐이며, 음식쓰레기는 늘기만 할 뿐 줄어들지 않습니다. ‘밥그릇 비우기’를 하는 분이 제법 늘어 몇 만 사람쯤 되는 듯하지만, ‘밥그릇 비우기’를 안 할 뿐 아니라 생각조차 않는 사람은 수천만 사람입니다. 서울땅에서 씨앗을 찾거나 말하거나 나눌 수 있는 길은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2) 시골 농사꾼이 되며 깨달은 씨앗


 벌써 열두 해째 농사짓기를 하고 있는 강분석, 유근세 두 사람은 당신들 땀방울을 그러모아 지난 2006년에 《씨앗은 힘이 세다》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을 찾아온 사람들한테 ‘도시에 있었다면 이런 글을 쓰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면서, 땅한테도 고맙고 당신들이 지은 곡식을 사 주는 도시사람한테도 고맙다고 이야기합니다. 처음 시골에 자리잡을 때에는 마땅한 벌이구멍이 없어 번역일을 하며 겨우겨우 메꾸었다고 했는데, 이렇게 메꾸면서도 ‘죽어라 일만 하는 허리 휘는 농사꾼 삶’이 아닌 ‘농사짓는 틈틈이 쉬면서 하늘을 볼 느긋함’을 품을 줄 아는 가슴 따스하고 넉넉한 사람이 되기를 꿈꾸었다고 합니다.

 시골살이를 몰랐을 뿐 아니라 생각조차 않던 두 사람인데, 어느덧 쉰다섯 나이 가운데 열두 해를 시골에서 보냈고, 앞으로 시골에서 보낼 햇수는 길어지기만 할 테니, 머잖아 도시살이 햇수 못지않게 시골살이 햇수가 채워질 테고, 차츰차츰 당신들이 도시살이 하던 나날을 떠올리기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골에서 땅을 부치고 땅한테서 얻으며 보내는 하루하루는 언제나 새로운 배움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배움은 앞으로도 꾸준하게 새로워지리라 봅니다. 아닌게 아니라 시골살이 봄여름가을겨울은 2009년과 2008년이 다릅니다. 2008년과 2007년이 다르고, 2006년과 2010년이 같을 수 없습니다. 해마다 다르고 달마다 다르며 날마다 다릅니다. 늘 똑같이 하는 일이란 없고, 늘 똑같이 느낄 모습이란 없습니다.

 산이, 논밭이, 내와 물이, 바다가 언제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 적이 있겠습니까. 늘 다른 자연 터전입니다. 다만, 우리가 늘 다른 자연 터전을 알아차릴 수 있느냐 없느냐일 뿐입니다. 늘 다른 자연 터전을 우리가 어느 만큼 새기고 삭이며 받아들일 수 있느냐일 뿐입니다.

 이리하여, 늘 다른 자연 터전을 가슴으로 껴안는 우리들이 될 때에는, 하루하루뿐 아니라 사람사람을 다 다른 목숨으로 돌아보면서 껴안는 우리들이 될 수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삶이요 생각이요 움직임임을 느끼는 우리들이 됩니다. 나를 속깊이 들여다보며 사랑할 뿐 아니라, 내 둘레 사람들 또한 속깊이 톺아보면서 믿고 손잡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는 우리들이 됩니다.

 《씨앗은 힘이 세다》라는 책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 잘 나거나 너 못난 삶이 아닌, 나 스스로를 못 보고 너 스스로도 못 느끼는 삶을 이제는 멈추자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구나 싶습니다. 날마다 새로 배우는 고맙고 넉넉한 삶일 때 가장 알차고 아름답겠습니다만, 이렇게 꿋꿋하고 다부지게 ‘돈-이름-힘’을 훌훌 내던지고 홀가분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당신들 스스로 먼저 보여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도시에서 앞으로도 내처 살든, 도시에서 앞으로는 떠나려 하든, 우리 스스로 사람다운 씨앗이 누구한테나 가늘게 떨면서 옹송그리고 있음을 거듭 헤아리자는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3) 거듭 읽는 글월


 2006년에 장만한 뒤에 오래도록 책상맡에 꽂아 두고 틈틈이 넘기던 책을 이제 마감하면서, 그동안 밑줄을 그으며 읽던 대목을 하나하나 손소 옮겨적어 봅니다. 마음에 아로새길 만한 이야기라면 타자로 쳐서 종이로 뽑든 손으로 종이에 옮겨적든 해 보면 한결 깊고 널리 살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4342.11.5.나무.ㅎㄲㅅㄱ)


[머리말] 아직 밥벌이도 안 되고 농사와 사람의 일로 어려움도 있지만, 저는 지금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 자연과 농사가 제게 준 것이 그토록 크기 때문입니다. 이제껏 우리가 가꾼 이 땅에서 언제까지나 농부로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8쪽] 시골 와서 두 번째 맞는 겨울, 금융위기로 서울의 아파트가 팔리지 않아 돈줄이 막혔는데, 두릅 묘목이며 농자재며 경운기를 사느라 돈이 자꾸 들어갔다. 우연히 신문에 난 공고를 보았는데, 공공근로사업으로 정보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영어와 컴퓨터 지식이 있는 사람을 모집한다는 거였다. 게다가 재택근무라니 딱이다 싶어 부랴부랴 서류를 갖추어 면사무소에 제출했더니 전업농가라 안 된다고 했다. 시골에 3백 평 이상의 땅을 가지고 있으면 전업농가로 분류되는데,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농업 인력이 다른 근로사업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전업농가는 지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볼펜으로 짚어 가며 공문을 읽어 주는 면사무소 직원에게 나는 한 마디만 했다. “3백 평 땅에 농사지어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어이도 없고 속도 상하고, 그리고 비참했다. 집에 돌아와 애꿎은 막걸리 잔만 비웠던 것조차 씁쓸하게 기억된다.

[73, 195쪽] 처음 방문한 곳은 사과 농장이었다. 방충시설과 환풍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농장을 둘러보고 나서도 어딘지 모르게 묵직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누군들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싶지 않으랴. 가진 돈이 없으니 아무리 좋은 시설도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 한 달에 50만 원이면 빠듯하게나마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년에 6백만 원. 설마 그 돈을 못 벌랴 했는데, 서울에서 내외가 한 달이면 벌던 그 돈은 초보 농군이 넘보기에는 너무나 큰 거금이었다. 하루아침에 얼마가 올랐다는 서울 아파트 값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꼭 남의 나라 이야기같이 느껴진다 … 도시에서 사는 자식들이야 돈도 몇 푼 안 되는데 그만두시라고 쉽게 말한다지만, 농협빚 고지서에 농약청구서를 생각하면, 또 여름방학 때 당신 찾아 내려올 손주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106, 142쪽] 거실에서 바라보이는 영수 할아버지의 직사각형 논 위에 커다란 삿갓 모양의 짚가리 여섯 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서 있다. 꼭 조형미술 작품 같다. 봄부터 겨울까지 영수 할아버지의 논은 거대한 종합 예술관이다. 자연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야외 예술관 … “매화 꽃망울이 조금씩 커지면서 분홍이 되었다가 다시 하얀 꽃으로 피는 것은 매년 보아도 똑같이 감동스러울 거예요.” 경주에서 매실 농사를 짓는 마로 어머니는 그 말씀을 하실 때 소녀처럼 해맑은 얼굴이 되었다.

[175, 227, 238쪽] 며칠 전, 맨발로 우리 논에 들어섰던 아이도 언젠가는 어른이 되겠지. 어른이 된 어느 날, 도시의 빌딩숲을 정신없이 걷다가 문득 어린 날 빨간색 반바지를 입고 산골짜기 논에 들어섰던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 … 내 손으로 논에 모를 심고 잡초를 뽑고 벼를 거두고 나서야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상품이 될 수 있는 게 아님”을 몸과 마음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 만약 내가 지금도 도시에 있다면, 일 년 내내 푸른 잎을 자랑하는 화분의 나무를 바라보며 내 삶도 그렇게 늘 푸르러야만 한다고 떼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곳에서야 나는 느티나무가 늘 푸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리고 푸른 느티나무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것도요.

[199, 231쪽] 소비자들이 때깔이나 크기로만 농산물을 선택한다면 이 땅의 농부들은 농약을 안 칠 수 없을 것입니다 …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말은 어록에 기록되어 저 아득한 후대에까지 전해지겠지만, “농부 못해먹겠다”는 말에 누가 콧방귀나 뀔까요?

[218쪽]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하늘이 험악했지만 남겨 놓은 두 골이 영 눈에 밟혔다. 다솜이네서 팥을 얻어 다시 밭에 올랐다. 남은 두 골에 팥을 넣는 동안 비가 계속 내렸다. 온몸을 두들기는 장대비를 우산으로 가리는데 아람이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 농사는 그렇게 지어야 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내려오는 길, 마음은 뿌듯했다.

[223, 226쪽] 10년이 넘게 농부가 되겠노라고 노래를 불렀으면서도 변변한 준비와 공부가 없었던 것이 우리의 귀농에서 가장 큰 잘못이라고 하겠다. 그 땅에 대궐 같은 집을 짓는 것으로 우리의 실수는 돌이키기 어려운 것이 되고 말았다. 집을 짓는 과정에서 예상외로 많이 들어갔던 자금도 그랬지만, 더욱 치명적인 것은 집 때문에 발목이 묶인 것이었다 … 그러나 농사지어 먹고사는 일도 만만치도 않거니와, 시골에도 이웃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그것도 오래고 단단한 문화와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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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을 신은 자전거 - 스타일리시한 라이딩을 위한 자전거 에세이
장치선 지음 / 뮤진트리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여자가 타는 자전거와 남자가 타는 자전거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1] 장치선,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



 애 아빠는 아직 제 몸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나, 아기는 눈썹 위가 크게 찢어져 병원에 안겨 가서 꿰매었습니다. 애 아빠가 조금씩 몸이 나아질 무렵 이제는 아기가 몸이 뜨거워지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칭얼대기만 합니다. 아파도 아프다 말을 못하는 아기로서는 울고 칭얼댈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칭얼거리니 꿰맨 자리에 자꾸 피가 배깁니다. 저녁과 밤과 새벽에 반창고를 갈아 붙입니다. 관장을 하며 배속에 있는 똥을 내보내도록 해 줍니다. 옆지기는 아기를 내내 안고 어르고 달래고 젖물리면서 긴긴 밤을 더디더디 보냅니다. 아기하고 씨름하면서 보내고 나니 어느덧 아침이 밝아 옵니다. 묵은 똥을 모두 내보낸 아기는 뜨거움이 많이 가라앉으면서 조용해지고, 엄마 품에서 조금 더 옹알거리다가 비로소 새근새근 잠듭니다. 애 아빠는 아직 성하지 않은 몸으로 이불 한 채를 빱니다. 간밤에 아기가 똥을 퍼질러 놓은 이불입니다. 바야흐로 겨울이 코앞에 닥쳐, 이제부터는 빨아서 개 놓을 이불은 얼른 빨아서 개 놓아야 하니 이불 빨래를 미룰 수 없습니다. 후들거리는 손발로 꾹꾹 누르고 밟고 하면서 이불을 빱니다. 이불 빠느라 손발이 후들거리지만, 내친 김에 기저귀 빨래를 함께 합니다.

 오늘도 아침부터 일하러 서울로 가야 하지만, 집일을 내버려 두고 홀로 나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밀린 일도 일이지만, 집식구를 함께 건사하지 못하고 바깥일만 챙겨서 좋을 구석은 없다고 느낍니다. 내 이웃한테 보탬이 되는 일을 한다손 치더라도 내 식구한테 함께 보탬이 되는 일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나저나, 사진쟁이 가운데 저처럼 후들거릴 때까지 손발을 놀리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렇게 후들거리는 손으로는 사진기를 쥘 수 없으니까요. 몇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하며 쉬어 준다면 후들거림이 잦아들 테지만, 집일이며 바깥일이며 잔뜩 있는데, 이 모두를 남한테 떠넘길 수 없습니다. 비빔질을 하면서 걱정이요, 비빔질을 마치고도 근심입니다.

 아침에 이불을 빨며 곰곰이 헤아려 보는데, 흔히는 ‘자질구레한’ 집일이라고 여기면서 애 엄마한테 이 모두를 맡기고 애 아빠는 슬그머니 몸을 빠져나와 회사로 가 버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기 관장을 하려면 한 사람이 아기를 붙잡고 한 사람이 줄에다 약을 탄 물을 넣어야 하는데, 이런 일은 엄마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죽 하랴 밥 하랴 뭐 하랴, 거기다 빨래하랴 치우랴 뭣뭣 하랴, 아기가 아프지 않아도 엄마들은 혼자서 하루해가 몹시 짧지만, 아기가 아프면 더더욱 하루해가 짧을 뿐더러 잠을 못 이루고 고단함이 가득 쌓입니다.


.. 사람들이 종종 묻습니다. ‘너는 자전거로 멋부리느냐’고. 이런 질문이라면 대답보다는 반대로 물어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멋진 물건으로 멋을 부리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느냐’고 … 잘 모르는 사람들은 미니벨로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바퀴가 저렇게 작아서 어디 굴러나 가겠어!” 이는 몰라도 너무 몰라서 하는 말이다. 자전거의 속도는 바퀴의 크기보다는 앞뒤 기어의 비율인 ‘기어비’거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미니벨로는 기어비가 큰 편이어서, 작은 바퀴로도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것이다 … 미니벨로는 도시에서 타기 좋은 자전거인 것이다 ..  (여는 말, 67)


 오늘보다 더 무겁고 아픈 몸이던 어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서울로 일을 하러 가서 몇 시간 자리를 채우고 돌아왔습니다. 서울로 가는 전철길에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라는 책을 펼쳤습니다. 자전거를 즐겨타는 사람이 쓴 책이요, 더욱이 ‘자전거를 즐겨타는 여자’가 쓴 책입니다. 이제까지 나라안에 나온 자전거책을 돌아보면 거의 모두 ‘남자만 썼’습니다. 자전거 즐김이가 남자만이 아닐 텐데, 자전거책은 하나같이 남자들만 쓸 수 있는 듯 나왔고, 이 책들은 하나같이 ‘남자가 읽기에 좋도록만’ 엮었습니다. 얼마 앞서 나온 《자전거 홀릭》이라는 책에서는 ‘지름신’을 이야기하며 “가족을 위해 하나를 양보하면 두 개 세 개의 양보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배려와 이해가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가족들은 나를 이해하게 되고, 다음번에는 기꺼이 남편과 아빠를 위해 그들의 시간을 양보해 줄 것이다(86∼87쪽)”라는 대목이 엿보이기까지 하는데, 자전거 즐겨타기를 오로지 ‘남자 일’로만 여기는 눈길에 갇혀 있는 모습입니다. 더 비싸고 더 고급스럽고 더 겉멋을 부릴 수 있는 자전거 부품을 ‘질러대면서도 아내와 아이 눈치를 안 보려면 어떻게 하면 좋다’는 ‘요령(?)’을 다룬 대목이라 이 책을 읽다가 그만 질렸는데요,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남자들끼리 자전거를 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참말로 이렇게 ‘여자로서 자전거를 즐기는 일’을 얕잡거나 모른 척해도 되는지 궁금합니다. ‘남자끼리만 타기에 더 좋은 부품을 질러대는’ 데에 돈을 쓰지 말고, ‘부부가 함께 타기에 좋은 자전거를 장만하는’ 데에는 돈을 못 쓰는지 궁금합니다. ‘부부와 아이 모두, 그러니까 식구들 모두 즐겁게 자전거 마실을 하기에 좋은 자전거를 마련하는’ 데에는 돈과 마음 모두 못 쓰는지 궁금한 노릇입니다.


.. “자전거 태워 줄게요.” 이건 나의 로망 〈아멜리에〉의 한 장면이 될 수 없는 시추에이션이었다. 나는 저 자전거를 타는 순간 ‘영심이 인증’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탔다. 키다리 아저씨의 자전거도 아니었고, 고가의 근사한 자전거도 아니었고, 내가 꿈꾸는 핑크색 튜닝 자전거도 아니었지만, 나는 탔다. 그리고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 나는 작고 아담한 핑크색 자전거를 꿈꾸었지만, 그는 튼튼하고 뒷자리가 넓은 자전거를 꿈꾸었다 ..  (32쪽)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는 오로지(까지는 아니나, 거의 오로지) ‘여자로서 자전거를 마음껏 즐기자’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여자로서 자전거를 처음 만나고 장만하고 남자친구하고 자전거를 즐기던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찬찬히 나옵니다. 글쓴이처럼 ‘자전거 타는 기본’을 모르고 예쁜 자전거부터 덜컥 장만한 사람들이 자전거를 끌고 길거리로 나오기 앞서 알아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알맞게 적어 넣습니다. 먼저 겪어 본 사람으로서, 자전거를 타는 기본 예의와 교통법규 들을 곰곰이 되새기자는 이야기가 돋보입니다. ‘오랜 동무(여자들)’하고 함께 자전거를 끌고 마실을 다니기에 좋은(서울 시내에서) 곳이 어디인가를 넌지시 알려주는 대목 또한 볼 만합니다.

 다만, 이런 ‘자전거 타는 기본’ 이야기를 이 책에서 글쓴이가 굳이 왜 적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자전거 타는 기본’은, 새 자전거를 살 때 자전거와 함께 곁들여 오는 ‘자전거 설명서’에 훨씬 꼼꼼하면서 알기 좋도록 그림까지 그려서 보여주고 있거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글쓴이가 제법 긴 쪽수를 마련해서 적바림하는 일은 나쁘지 않지만, ‘자전거 타는 기본과 예의’ 이야기는 딱 한 줄로, ‘자전거를 살 때에 설명서를 반드시 챙겨서 꼼꼼하게 읽읍시다!’ 하고 적어 주면 넉넉해요. 헌 자전거를 산다 할지라도, 동네 자전거집에 들러서 ‘자전거 설명서 한 부 얻을 수 있을까요?’ 하고 여쭈면 열 곳 가운데 아홉 곳은 거저로 줍니다. 우리 나라 자전거꾼치고 자전거 설명서를 꼬박꼬박 챙기고 읽는 사람이 거의 없어, 자전거집마다 설명서가 잔뜩 쌓여 있거든요.


.. 오지랖이 넓은 탓일까? 고리타분한 생각일까? 아니, 어쩌면 늘어나는 중국집 스티커만큼이나 내 머리속도 그 무언가로 채워졌기 때문일까? 환경 비용을 줄이는 일, 그리고 환경운동가가 되는 일은 대부분 이처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 일회용 나무젓가락이나 플라스틱 포크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에게 오지랖이 넓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자장면 배발도 자전거를 이용하면 된다 … 자전거도로가 충분하고 제대로 정비되어 있다면 정장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지 못할 이규가 있을까. 자전거 타기가 생활화되었다면 슬리브리스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이 자전거를 꺼릴 이유가 있을까 ..  (46, 100쪽)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니 옆지기가 묻습니다. 아침에 들고 간 그 자전거책을 읽으니 어떠하느냐고. 머뭇거립니다. 가만히 헤아려 보다가, 재미없었다고 대꾸합니다. 값비싼 자전거가 아니라 ‘좋은’ 자전거라고 느끼기 때문에(누구한테나 도움이 되고 지구환경에 보탬이 되며, 잘생기고 쓸모 많은 자전거라고 느끼기 때문에), 이 좋은 자전거로 한껏 멋을 내면서 살고 싶다는 분이 엮은 자전거 이야기라서, 남달리 눈여겨볼 이야기가 많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무슨 멋을 부리는지는 몇 줄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 자전거길 현실 몇 쪽에다가 남자친구 자전거 얘기 몇 쪽에다가 아버지와 짐자전거가 얽힌 ‘로망’을 몇 쪽쯤 이야기하다가 책 1/4을 ‘자전거 설명서’에 뻔히 나오는 이야기를 길게 적바림하는 바람에 지루했거든요.

 여느 ‘남자 자전거꾼’이 여느 ‘자전거 타는 삶을 이야기한 책’하고 짜임새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느끼니 몹시 뻔했습니다. 그래도 여느 남자 자전거꾼처럼 ‘어떤 스펙’을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아 반갑다고 느꼈습니다. 이거를 갖추고 저거를 갖추지 않고서는 자전거를 타지 말아야 하는 듯 이야기하는 책은 아니라서 괜찮았습니다. 산을 타는 재미니 강을 달리는 즐거움이니 하면서 휴일에 놀러다니는 이야기에만 치우치지 않아 마음에 들었습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자전거 하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다루고 있어서 새삼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왜 글쓴이 이야기를, 글쓴이 자전거 이야기를, 글쓴이가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쏘다니던 산뜻함과 기쁨과 고단함과 슬픔을 좀더 낱낱이 보여주지 못하고 말았을까요. 왜 어설픈 가르침이나 길잡이에 빠져들고 말았을까요. 왜 몸소 부대끼거나 겪으면서 받아들인 ‘서울 시내에서 일하고 살면서 자전거를 타는 여자로서 내 삶은 이러했고 이러하며 이러하리라 본다’는 고갱이를 붙잡지 못했을까요.

 우리 자전거 문화가 아직은 밑바닥이기에, 자전거를 말하는 책 눈높이조차 밑바닥에서 허덕여야만 하는지요? 우리 자전거 정책이 아직 씨앗이 뿌려졌다고 하기도 어렵기에,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 목소리 담은 책 또한 이렇게 제 줏대를 잃고 시류나 유행에 끄달려야 하는가요?


.. 자동차는 불편하게! 자전거와 보행자는 편하게! 이것이 암스테르담을 암스테르담답게 만드는 기본이다 … 남자친구의 허리둘레에 그다지 사랑스럽지 않은 핸들 하나가 더 생긴 것도 자동차와 혼연일체로 생활했던 탓은 아닐까 …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청담동에서는 자전거를 주차하기가 왠지 조심스럽다. 자동차 주차 공간을 조금만 할애해 자전거족을 위한 주차 공간을 만들어 주면 고급스러운 청담동 분위기에 어울리는 자전거족이 되어 줄 자신이 있는데 말이다 ..  (54, 58, 122∼123쪽)


 자전거는 틀림없이 굽높은구두도 신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전거는 고무신도 신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전거는 짐도 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전거는 짧은치마도 입을 수 있어야 하고, 청바지나 반바지나 양복 또한 입을 수 있어야 합니다.

 빨리 달리는 자전거와 함께 천천히 달리는 자전거가 골고루 길을 누빌 수 있어야 합니다. 아기를 태운 자전거와 함께 사랑하는 짝꿍이 나란히 앉은 자전거가 어깨동무하며 거리를 오갈 수 있어야 합니다. 자동차 빵빵 소리에 세발자전거와 네발자전거가 놀라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골목길에서든 아파트 주차장에서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달리는 어린이들 자전거보다 빨리 내달리는 자동차가 사라질 수 있어야 합니다. 경주하는 자전거는 경륜장에 가거나 곧게 쭉 뻗은 길로 가야 합니다.

 평화가 되는 자전거이며, 사랑이 되는 자전거에다, 어깨동무가 되는 자전거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라 한다면, 끌신을 신은 자전거한테도 살짝 눈짓 한 번 보낼 수 있겠지요. 이야기책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는 살그머니 눈짓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예 콧대를 높이며 흥 하고 돌아섭니다. (4342.11.4.물.ㅎㄲㅅㄱ)


 ┌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뮤진트리 펴냄,2009)
 ├ 글 : 장치선
 └ 책값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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