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 찾아온 떠돌이 개

 


  그제부터 마을에 개 한 마리 생겼다. 누구네 개일까? 커다란 개 한 마리 키우는 이웃 할배가 있지만, 그분 집 말고는 개를 키우는 집은 없다. 그런데, 곱슬곱슬 털이 보드라운 개 한 마리 갑자기 나타났다. 척 보아도 집안에서 귀여움을 듬뿍 받으며 살던 개로구나 싶다. 그런데 이 개는 뜬금없이 이 시골마을에 왜 나타났을까? 키우던 사람이 있던 개일 텐데, 이 개는 왜 우리 마을을 떠돌면서 할매들 꽁무니를 좇았을까?


  개는 이리저리 떠돌다가 우리 집으로 온다. 우리 집에 아이들이 있어서 달라붙는 듯싶다가도 아이들보다 나를 자꾸 좇는다. 예전에 이 개를 키우던 어느 집에 아이들이 있고 나처럼 수염 나고 머리 긴 아저씨가 있었을까? 모르는 노릇이리라.


  큰아이는 두어 살 무렵 개한테 한 번 물리고는 개 가까이 가지 않았다. 조그마한 강아지 옆에서도 무섭다고 울었다. 그런데 이 떠돌이 개를 보고는 무서워하지 않는다. 발톱도 안 보이고 혀를 낼름 내밀면서 달라붙어 안기기만 하니, 또 털이 보들보들하니, 이 개를 무서워하지 않는가. 이와 달리 작은아이는 개를 무서워한다. 작은아이도 누나만큼 나이를 더 먹으면 개를 안 무서워할까. 혼자서 마당으로 내려가서 한참 잘 놀던 작은아이가 개가 무섭다며 대청마루에 앉아 멀거니 개만 바라본다. 개를 멀리 치우니 작은아이가 비로소 눈치를 보며 마당으로 내려와서 노는데, 대문 밖으로 내보낸 개가 대문 옆으로 난 틈으로 자꾸 들어오니, 작은아이는 평상에 주저앉은 채 꼼짝하지 못한다.


  떠돌이 개한테 국을 덥혀 밥 한 그릇 준다. 금세 바닥을 삭삭 긁어 다 먹는다. 우리 집 섬돌 한쪽에 앉아 떠날 줄 모른다. 얘야, 여기는 네 살 집이 아니란다. 우리 식구는 한 번 마실을 하면 여러 날 집을 비우니 너한테 밥을 챙겨 줄 수 없단다.


  떠돌이가 되고 만 이 개를 누군가 건사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나저나, ‘도시에서 귀여움을 받으며 살았구나 싶은 개’가 어쩌다가 이 깊은 시골마을에 덩그러니 놓였을까 알쏭달쏭하다. 4347.2.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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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2-08 09:53   좋아요 0 | URL
이 개도 도시보다 시골이 좋은가봐요 ^^
그나저나 주인을 찾아야할텐데...
따뜻한 국과 밥 먹여주셨다는 말씀에 마음이 훈훈합니다.

숲노래 2014-02-08 11:37   좋아요 0 | URL
제 느낌으로는

"도시에서 누군가 자가용으로 싣고 와서 이 외진 시골에 버렸다"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닭다리를 하나 주었고, 곧 새밥을 차려서 더 주어야지요...
(설날 음식이 이렇게 도움이 되는군요. 워낙 우리 집은 고기를 안 먹어서...)

시골에서는 가끔 이런 일이 있거든요.

그러거나 말거나, 이 아이가 복실복실한 털로 '따스한 고흥' 겨울을 잘 견디고, 새봄에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을 뿐이에요...

oren 2014-02-09 01:11   좋아요 0 | URL
참 안타까운 일이네요. 저 귀여운 개가 주인을 잃었다면 그것도 안타까운 일이고, 혹시라도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았다면 더더욱 안타까운 일일 테고요.

저희 집에서도 9년째 요크셔 한마리를 데리고 사는데 온가족들이 외출시간이 길어질 때마다 그 녀석 걱정을 한답니다. 그래서 예정보다 조금만 일찍 귀가하게 되면 이구동성으로 '그 녀석이 좋아하겠군...' 하지요.

저 녀석도 어서 빨리 주인을 찾았으면 좋겠군요.

숲노래 2014-02-09 08:57   좋아요 0 | URL
마을에서 따로 이 아이를 건사하거나 돌보거나 밥을 주려는 집이 없는 듯해
우리 집 언저리에서만 맴돌면서
밥을 얻어먹어요.

이 아이가 우리 집에 오기 앞서는
마을 온갖 고양이들이 우리 집에서 놀았는데,
오늘 아침에 이 아이가 컹컹 짖으며
고양이를 쫓아내는군요.

흠...
 
다큐멘터리 사진을 말하다 - 최민식의 16가지 생각
최민식 글.사진 / 하다(HadA)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76

 


눈빛 밝혀 사진을 찍는다
― 다큐멘터리 사진을 말하다
 최민식 글·사진
 하다 펴냄, 2010.7.16.

 


  눈빛을 밝히며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두 아이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을 때이든, 전남 고흥에서 군수와 개발업자가 한목소리 되어 핵발전소와 화력발전소를 시골마을 바닷가 국립공원 한쪽에 지으려고 하는 일을 반대하는 집회에 찾아가서 사진을 찍을 때이든, 늘 눈빛을 밝히며 사진을 찍습니다. 스튜디오라는 곳에서 모델을 세워서 패션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가난하고 아픈 이웃을 찾아다니면서 눈물을 삼키고 다큐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저마다 눈빛을 밝히며 사진을 찍습니다.


.. 그 시대에 촬영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성과 사진가의 사물에 대한 사상이 분명히 표현되어야 한다. 내용이 희박하여 감동이나 느낌을 줄 수 없다면 가치 있는 사진이라고 말할 수 없다 … 내 사진의 중심을 이루는 테마는 언제나 인간애였다 ..  (9, 23쪽)


  눈이 반짝 빛날 때에 사진을 찰칵 찍습니다. 눈이 번쩍 뜨일 적에 사진기를 덥석 쥡니다. 눈빛이 밝지 않다면 사진을 못 찍습니다. 눈빛이 곱지 않다면 사진기를 못 쥡니다.


  사진은 눈빛으로 찍습니다. 눈빛 가운데 밝은 눈빛으로 찍습니다. 사진은 눈길로 찍습니다. 눈길 가운데 맑은 눈길로 찍습니다.


  사진을 찍고 싶다면, 눈빛을 밝게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눈빛을 밝게 다스리자면, 먼저 삶을 밝게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이 밝게 빛난다면, 곧 삶빛이 환하다면, 마음에 따사로운 빛이 흐르면서 마음빛이 눈부십니다. 삶빛과 마음빛이 눈부실 적에 비로소 눈빛이 고이 퍼지면서 사진 한 장 아름답게 일굽니다.


  눈빛이란 삶빛입니다. 삶빛이란 마음빛입니다. 마음빛이란 무엇일까요. 마음에 서리는 빛은 어떻게 태어날까요. 바로 사랑이에요. 마음빛이란 사랑빛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에 사랑빛이요, 이 사랑빛을 바탕으로 마음빛을 가꿉니다. 사랑을 담아 가꾸는 마음빛으로 살아가기에 삶빛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삶빛이 새롭게 태어나니, 즐겁고 씩씩하게 사진기를 손에 쥐어 눈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 오늘날 우리 주위에 있는 사진들은 본질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들뿐이다. 표현기교로만 이루어진 사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 조잡한 사진에서는 사진가의 의식과 사상을 찾아볼 수 없다. 사진은 평등하다 … 나의 사진은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가난이 바탕이 되어 만들어졌다 ..  (33, 45쪽)


  온마음 가득 사랑을 끌어올려 사진 한 장 찍습니다. 온마음으로 찍는 사진입니다. 온마음으로 눈빛을 밝혀 찍는 사진입니다. 온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삶에서 샘솟는 따사로운 눈빛으로 찍는 사진입니다.


  멋지게 찍어서 사진이 아니라, 마음으로 찍어서 사진입니다. 대단하게 찍어서 사진이 아니라, 사랑으로 찍어서 사진입니다. 놀랍거나 빼어나게 찍어서 사진이 아니라, 아름다운 꿈과 빛을 따사로운 손길로 어루만지면서 담기에 사진입니다.


  최민식 님이 쓴 《다큐멘터리 사진을 말하다》(하다,2010)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젊은 사진가한테 띄우는 짤막한 편지인 《다큐멘터리 사진을 말하다》입니다. 젊은 사진가한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열여섯 가지로 간추려서 띄우는 책입니다.


  이 작은 책 하나를 읽으면 ‘좋은 사진가’로 거듭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작은 책을 첫걸음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앞으로 수많은 사진책을 만나고 사진을 만나며 책을 만날 뿐 아니라, 사람들과 이웃과 풀벌레와 숲과 하늘과 흙 모두 골고루 만나기를 바라는 길잡이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나는 이 세상이 좀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믿음을 나누고 싶다. 사진이 내게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듯이, 독자들도 나의 사진의 숲에서 사랑을 만나고 길을 찾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 이웃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오늘도 나를 이 땅에서 사진가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  (57, 82쪽)


  사진을 왜 찍을까요? 즐겁기에 찍겠지요. 무엇이 즐거울까요? 삶이 즐겁지요. 삶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으로 이루어진 빛이지요.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나와 네가 한몸 한마음인 줄 깨달으면서 어깨동무하는 눈빛이지요.


  그러니, 사진은 눈빛으로 찍는데, 그냥 눈빛이 아닌 ‘사랑하는 눈빛’입니다. 사랑하는 눈빛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또한, 그냥 사랑하는 눈빛이 아니라, ‘즐겁게 노래하고 웃고 춤추면서 지구별에 아름다운 꿈 드리우기를 바라는 눈빛’입니다. 평화롭게 노래하기를 바라는 눈빛입니다. 따사롭게 춤추기를 바라는 눈빛입니다. 즐겁게 어깨동무하면서 활짝 웃기를 바라는 눈빛입니다.


  노래하는 사람은 눈빛을 밝힙니다. 눈빛을 밝히는 사람은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하는 사람은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노래를 부릅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었을 적에 노래가 흘러나오는지 돌아봐요. 사진 한 장 찍으면서 빙그레 웃는지 헤아려요. 사진 한 장 종이에 앉혀 이웃한테 선물하면서 까르르 웃음꽃과 노래잔치 이루어지는지 살펴요.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무슨 사진을 찍든, 사진은 맑은 눈빛을 가다듬고 밝은 눈빛을 곱게 나누면서 찰칵 한 장 찍습니다. 4347.2.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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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봉오리 하나

 


  우리 집 동백꽃 봉오리는 언제 터지려나 하고 날마다 들여다보다가 드디어 하나 찾아냅니다. 그래, 여기 안쪽에서 곱다시 숨어 기다리는구나. 너보다 바깥쪽에서 햇볕 더 듬뿍 받는 봉오리들 많은데, 안쪽에 깃든 네가 먼저 활짝 피어나겠구나. 며칠쯤 걸릴까. 며칠이 지나면 네 봉오리가 살그마니 열리면서 흐드러지게 터지는 붉은 빛깔 될까. 마당에서 노는 작은아이를 부른다. “보라야, 저기 봐. 빨간 봉오리 보이니? 우리 집 동백나무도 곧 꽃송이 하나가 터질 듯해.” 한참 두리번거리던 작은아이도 빨간 빛 살짝 내민 봉오리를 알아본다. 이제부터 기운내어 벌어질 일만 남았다. 즐겁게 기다린다. 4347.2.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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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핑거 1
마츠모토 코유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312

 


사랑을 가꾸는 ‘푸른 손가락’
― 그린 핑거 1
 마츠모토 코유메 글·그림
 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08.5.25.

 


  어제 아침 전남 고흥에 아주 드문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한 해에 한 차례 올까 말까 한 손님입니다. 손님은 하늘에서 하얀 빛으로 찾아옵니다. 나풀나풀 춤을 추면서 찾아옵니다. 살랑살랑 바람을 타고는 가벼운 몸짓으로 빙그레 웃으면서 찾아옵니다.


  손님은 우리 집 지붕에 살포시 내려앉더니 마당을 빙 돌다가 후박나무와 동백나무 곁에서 노래합니다. 그러고는 뒤꼍과 이웃집으로 골고루 찾아가고, 우리 마을과 이웃 여러 마을에도 두루 나들이를 합니다.


  모처럼 찾아온 손님은 낮 열두 시를 지날 무렵부터 천천히 사라집니다.


-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펼쳐지는 광경.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고, 남동생이 까불고, 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초록과 빛에 둘러싸인, 우리 가족의 행복의 정원.’ (6쪽)
- “내일이면 필 테니 물 좀 달라고 하고 있는걸.” “꽃은 말 같은 거 하지 않아.” “엄마는 늘 지켜보기 때문에 들리는 거란다.” (14쪽)
- “흐음, 그럼 물과 비료를 주면 꽃은 자라는 거네. 간단하네.” “아니,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응? 그게 뭔데” “후후후, 그건 말이지, 코바나, 사랑이야. 정원으로 나와서 바라봐 주고 사랑해 주면 식물의 목소리가 들린단다.” (16쪽)

 


  새봄을 기다리며 이제 막 돋은 풀이 모두 눈에 덮였습니다. 춥겠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눈은 이내 녹아 땅으로 촉촉히 스며듭니다. 더 기운을 내라고, 씩씩하게 힘을 내라면서, 겨울눈이 소복소복 쌓였나 하고 돌아봅니다. 아무리 겨울에도 포근한 고흥이라지만, 눈바람이 한 차례쯤 불면서 숲과 들을 간질여야 겨울이 지나가는 줄 알겠지요. 풀과 나무마다 눈이불을 한 번쯤 뒤집어써야, 아하 겨울이 지나가지, 하고 알아차리겠지요.


  눈이 그득그득 내렸다가 감쪽같이 녹은 들빛은 한결 보드랍습니다. 지난가을부터 시든 풀은 누르스름한 물이 쪼옥 빠져 희멀건 빛이 되고, 희멀겋게 마른 풀포기 사이로 앙증맞게 조그마한 싹이 조물조물 오릅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봄빛이지만, 해마다 새롭습니다. 해마다 느끼는 봄빛인데, 해마다 새삼스럽습니다. 들과 숲을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이 애써 베거나 뽑지 않아도 누르스름하거나 희멀건 풀포기는 모두 사라집니다. 새로 오르는 풀줄기는 말라죽은 풀포기를 털어내어 흙으로 돌아가도록 합니다. 말라죽은 풀포기는 봄이 끝나고 여름이 열릴 무렵 참말 몽땅 사라져요.


  흙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흙땅에서는 어떤 일이 생기는가요. 흙땅에서는 어떤 삶과 죽음이 갈마드나요.


- “내가 여기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건 부들레야 때문일지 몰라. 여름 내내 끊임없이 꽃을 피워서, 그 주변에 나비가 날아다녔거든.” (43쪽)
- “아빠와 엄마가 만들었던 정원이 아니라, 내 행복의 정원을 만들 거야! 그게 아빠와 엄마의 바람이란 걸 알았어.” (56쪽)

 


  봄은 늘 풀빛으로 찾아옵니다. 봄빛은 풀빛입니다. 봄이 무르익으면서 풀빛 사이사이 꽃빛이 맑고, 꽃빛이 한창 흐드러지노라면 어느새 여름 문턱입니다. 여름은 풀이 우거지는 빛이라고들 여기지만, 여름이야말로 꽃빛이 해사한 철입니다.


  그러니까, 봄은 풀이요 여름은 꽃이며 가을은 열매입니다. 겨울은 무엇일까요? 겨울은 눈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도 있고, 잎과 꽃과 열매를 모두 떨군 가지마다 새로 맺는 눈이 있습니다. 겨우내 모든 나무들은 새눈을 틔우려고 힘씁니다. 새눈에 온힘을 쏟습니다. 지난 한 해 돌이키면서 새로운 한 해에 씩씩하게 돋을 눈에 모든 기운을 바칩니다.


- ‘나무, 풀, 꽃, 산, 숲, 새. 가끔 두더지, 가끔 산토끼, 가끔 너구리. 나는 이곳에서 매일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고, 그런 속에서 일을 할 수 있다니. 난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73쪽)
-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결국 버리는 것. 뿌리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이 가든 시클라멘에게 리셋의 기회조차 주지 않다니. 난 그럴 수 없어. 걱정 마. 너희는 틀림없이 다시 살아날 거야. 내가 되살리고 말 거야!’ (79∼80쪽)


  마츠모토 코유메 님 만화책 《그린 핑거》(학산문화사,2008) 첫째 권을 읽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푸른 손가락’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남다른 주인공만 푸른 손가락일까요? 우리 모두 푸른 손가락인데, 우리 모두 스스로 손빛을 잊거나 잃지 않았을까요?


  어느 한 사람만 빼어난 푸른 손가락일 수 없습니다. 몇몇 사람만 푸른 손가락이라면, 몇몇 사람만 시골에서 흙을 일구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고작 쉰 해 앞서만 해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시골내기요 시골 흙일꾼이었습니다. 기껏 백 해 앞서를 살피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골내기이면서 시골 흙일꾼이었어요.


  인류 문명이니 문화이니 하고 말하기 앞서,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마련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람이라면, 흙을 알고 풀을 아끼며 나무를 사랑하는 삶을 일구었습니다.

 


- “너도 마찬가지야. 자신의 힘으로 강하고 아름답게 성장하는 거야.” (17쪽)
- ‘그런 건, 식물들에겐 아무래도 좋을 일. 왜냐하면 식물은, 사람을 고르지 않으니까.’ (84쪽)
- “참 아름다워. 새싹이란 건.” (168쪽)


  ‘가꾸다’라는 낱말은 흙을 만지면서 풀과 꽃과 나무가 잘 자라도록 돌보는 일을 가리킵니다. 요새는 ‘옷이나 몸매나 얼굴을 가꾼다’고 하는 자리에 이 낱말을 더 자주 쓰는 듯하지만, ‘가꾸다’는 처음부터 “흙을 가꾸다”입니다. 흙을 가꾸고, 집살림을 가꿉니다. 마음을 가꿉니다. 사랑을 가꿉니다.


  흙에서 풀이 돋고 꽃이 피며 나무가 자라도록 가꾸는 손길이 바로, 살림과 마음과 사랑을 가꾸는 손빛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 누구나 푸른 손가락입니다. 우리들 누구나 흙을 살리고 집살림을 가꿀 뿐 아니라 마음과 사랑을 가꿀 줄 아는 고운 빛입니다.


  사랑을 가꾸는 푸른 손가락인 줄 느끼기를 바랍니다. 몇몇 사람만 남달라서 사랑을 가꾸지 않습니다. 돈이 있거나 이름이 있거나 힘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지 않습니다. 돈과 이름과 힘은 아무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 가꿉니다. 꿈은 오직 꿈으로 가꾸어요.


  즐겁게 웃고 노래하는 푸른 손가락 되기를 빌어요. 새봄을 앞두고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서 푸른 노래와 푸른 이야기를 나누는 푸른 숨결로 꿈꿀 수 있기를 빌어요. 4347.2.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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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글게 쓰는 우리 말
 (1576) 살려내다

 

  ‘찾다’와 ‘찾아내다’는 뜻이 얼추 비슷하지만, 쓰는 자리가 다르며 느낌이 다릅니다. ‘쓰다’와 ‘써내다’는 글을 적는 모습에서는 비슷하지만, 뜻과 느낌과 쓰임새는 다릅니다. ‘내다’라는 낱말을 움직씨 뒤에 받칠 적에 모두 붙여서 한 낱말로 삼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주 쓰고 익히 쓰면서 저절로 한 낱말이 되곤 합니다. ‘찾아내다’와 ‘써내다’가 처음부터 한 낱말이었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사람들이 쓰고 또 쓰면서 어느새 한 낱말이 됩니다.


  숲에서 살려낸 우리 말
  마을에서 살려낸 숲
  바다를 살려낸 아이들


  나는 ‘내다’를 붙여 ‘살려내다’ 같은 낱말을 곧잘 씁니다. 목숨을 살려낸다든지, 우리 말글을 살려낸다든지, 푸른 숨결을 살려낸다든지, 숲과 들을 살려낸다든지, 냇물과 바닷물을 깨끗하게 살려낸다든지, 이런 자리에 씁니다. 띄어서 쓰기에는 알맞지 않고, 한 낱말로 삼아 새롭게 쓸 만하다고 느낍니다.


  지난날에는 책이나 글이 얼마 없었고, 거의 모든 사람이 시골에서 흙을 만지고 살 적에는 그야말로 책이나 글은 아주 드물었어요. 지난날에는 ‘읽다’ 한 가지만 있어도 넉넉했을 텐데, 오늘날에는 누구나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아이들도 어릴 적부터 아름다운 그림책을 두루 만나며, 도서관이 무척 많이 늘었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읽다’뿐 아니라 ‘읽어내다’ 같은 낱말을 함께 쓸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읽다’ 같은 낱말이라면, ‘돌려읽다’라든지 ‘즐겨읽다’라든지 ‘살펴읽다’라든지 ‘함께읽다’처럼 더 가지를 쳐서 새로운 낱말을 빚어도 좋으리라 생각해요.


  저마다 기쁘게 우리 말글을 살려내면 아름답습니다. 서로서로 즐겁게 우리 말글을 살려내어 어깨동무하면 어여쁩니다. 한국말사전에 실은 대로만 쓸 말이 아닌, 삶을 가꾸고 넋을 보듬으면서 차근차근 살려내어 쓸 때에 환하게 빛나는 문화와 사회가 되리라 봅니다. 민주도 살려내고 평화도 살려내면서, 꿈과 사랑을 함께 살려내면 더없이 훌륭하겠지요. 4347.2.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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