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글을 쓰는 작은아이

 


  아이들은 어버이가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 찬찬히 지켜본다. 그러고는 스스로 가만히 따라하곤 한다. 아이들이 쓰는 말이란 모두 어버이가 쓰는 말이요, 여기에 둘레 어른들이 쓰는 말을 곁들인다. 아이들이 누리는 놀이란 어버이가 누리는 놀이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먹는 밥이란 모두 어버이가 늘 먹는 밥이다.


  네 살 작은아이가 그림책에 볼펜으로 금을 죽죽 그린다. 그림도 그린다. 무엇을 하는가 하고 지켜보니, 아버지가 책을 읽으며 하는 양을 고스란히 흉내낸다. 아버지는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대목이 있으면 밑줄을 긋는다. 때로는 빈자리에 이런 생각 저런 느낌을 적어 넣는다. 아직 글을 모르고 읽거나 쓰지 못하는 작은아이인 만큼, 글씨 흉내를 꼬물꼬물 그림으로 보여준다.


  큰아이는 두 살 적에 이런 금긋기와 그림그리기를 했다. 큰아이는 무엇이든 스스로 하려 했으니 두 살 적부터 아버지 흉내를 냈고, 작은아이는 누나가 언제나 잘 챙기거나 도와주기 때문에, 두어 해쯤 늦는다고 여길 만하다. 작은아이가 볼펜을 쥐고 ‘아버지가 안 보는 데’에서 몰래 책에 금을 긋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참 예쁘다. 비록 책을 다 어저립히듯이 금을 긋고 그림을 그려서 “아이고, 보라야, 그림책을 하나 새로 사야겠구나.” 하고 말했지만, 이렇게 아이들이 ‘맨 처음’으로 금도 긋고 글(그림)도 그린 책은 오래오래 건사하며 애틋하게 되돌아볼 만하리라 느낀다. 4347.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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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도 봉숭아물 들이기

 


  어릴 적부터 어머니는 ‘봉숭아’라고만 말했다. 어머니가 ‘봉선화(鳳仙花)’라는 한자말을 쓴 일은 없다. 그런데 국민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교사들은 으레 ‘봉선화’라는 한자말만 쓰고 ‘봉숭아’라는 한국말은 거의 안 썼다. 중학교에서 배운 “울 밑에 선 봉선화야” 같은 노래가 있는데, 언젠가 “울 밑에 선 봉숭아야” 하고 낱말을 고쳐서 부르니, 음악 교사가 길다랗고 굵직한 몽둥이로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나로서는 그 옛날 ‘조선 여느 백성’이 고운 꽃송이를 한자말로 가리켰으리라고는 느낄 수 없어 한국말로 고쳐서 부르지만, 음악 교사는 헛소리 하지 말라고만 윽박질렀다. 겨레말을 빼앗기며 슬픔에 젖었다는 사람들이 ‘봉숭아’라는 꽃이름을 안 쓰고 ‘봉선화’라는 한자말을 썼을까? 나로서는 믿기지 않는다.


  졸린 작은아이 낮잠을 재우는 동안 할머니가 큰아이 손가락마다 봉숭아물을 들여 주신다. 봉숭아잎을 미리 빻아서 봉지에 싸고는 얼려 두셨다고 한다. 그래, 봉숭아물을 꼭 봉숭아꽃이 필 무렵 들여야 하지는 않아. 한겨울에도, 설에도, 봄에도 얼마든지 물들일 만하지. 봉숭아잎을 빻아 얼려 놓을 수 있다면, 언제라도 꺼내서 곱게 물을 들일 만하지.


  나는 우리 어머니 아이일 뿐 아니라, 어여쁜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버이인 줄 새삼스레 돌아본다. 우리 시골집에는 아직 봉숭아가 피어나지 않지만, 올해에는 길가에서 자라는 봉숭아를 잘 살펴서 잎을 알뜰히 그러모아 틈틈이 빻아 놓아야겠다. 4347.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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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동저고리 파랑새 그림책 84
이승은.허헌선 글.인형 / 파랑새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41


 

사랑받는 아이들
― 색동저고리
 이승은·허헌선 글·인형
 김준아 사진
 파랑새 펴냄, 2010.3.30.


 

  일곱 살 큰아이가 입는 바지 가운데 한 벌은 무릎에 구멍이 있습니다. 설날을 맞이해 찾아간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큰아이가 좋아하는 옷을 입혔는데, 그만 무릎에 구멍이 있는 줄 살피지 못했습니다. 아니, 여느 때에 이 바지 무릎에 난 구멍을 기우지 못했습니다. 빨래를 할 적마다 기워야지 생각하다가 잊고 지나갔습니다. 큰아이가 구멍난 옷을 입고 뛰놀 적마다, 갈아입혀 빨래를 하고 나서 기워야지 생각하다가 또 잊고 지나갔습니다.


  할머니는 큰아이 무릎을 보고는 “자, 꼬매자.” 하고 말씀하고는 그 자리에서 척 기워 줍니다. 그래, 맞아, 이렇게 해야지, 하고 깨닫습니다. 꼭 깨끗이 빨고 나서 기워야 하지 않아요. 다른 옷으로 갈아입힌 뒤에 기워야 하지 않아요. 빨고 나서 기우자고 생각하니 자꾸 잊습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힌 뒤에 기우자 여기니 늘 지나쳐요. 처음 보았을 때 기우고, 처음 깨달았을 때에 바로 손을 쓸 노릇이에요.


  큰아이는 할머니가 무릎을 기워 준 옷을 다시 입고는 빙그레 웃습니다. “할머니가 꼬매 주셨다!” 하면서 좋아합니다. 앞으로 두고두고 자랑하며 다니겠다고 느낍니다. 일곱 살 큰아이는 한 살 적이나 두 살 적 겪은 일도 곧잘 떠올리면서 “예전에 그랬다구.” 하고 말하니, 앞으로 무척 오랫동안 오늘 일을 되새기겠다고 느낍니다.


.. 돌이네 집은 몹시 가난했어. 엄마는 삯바느질과 빨래 일감을 손에서 놓을 새가 없었지. 그래도 함께 있을 때는 도란도란 웃음이 끊이지 않았어 ..  (2쪽)

 


  무슨 일이 그렇게 바쁘거나 많아 우리 아이 바지 구멍 하나 못 기웠는가 하고 생각하다가, 그동안 큰아이 바지 구멍을 못 기웠기에 할머니 손길을 받을 수 있다고 달리 생각합니다. 빈틈이 너무 많은 나머지, 빈틈이라기보다 아예 구멍과 같은 살림꾸리기라 할 텐데, 빈틈도 있고 구멍도 있으니, 곁에서 고운 님들이 따사로운 손길을 베풀어 줍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뿐 아니라 이웃들 손길도 받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손길도 받습니다. 이 사람이 내밀고 저 사람이 건네는 고운 손길을 듬뿍 받습니다.


  우리 식구한테는 자가용이 없습니다. 자가용이 없으니 아버지가 이끄는 자전거에 두 아이가 타고 함께 마실을 가거나,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를 다닙니다. 자가용이 없는 만큼, 자가용이 있는 이웃이 가끔 태워 주곤 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자동차를 탈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한 달에 두 번쯤, 때로는 한 번쯤 자동차를 탑니다. 두 아이는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에만 나가더라도 “와, 차 탄다!” 하면서 좋아합니다. 시골집에서 거의 날마다 자전거를 탈 때에는 바람이 불건 되게 춥거나 덥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이 마을 저 마을 누빌 수 있으니 즐겁습니다.


.. 돌이와 분이는 아이들이 너무 부러웠지만 꾹 참고 집으로 돌아왔어. “와! 오빠 잘 만든다!” 돌이는 분이에게 멋진 가오리연을 만들어 주었어 ..  (11쪽)

 

 

  가만히 돌이켜봅니다. 우리 식구한테는 자가용도 없지만, 아기수레도 없습니다. 아기수레 없이 두 아이를 안고 업으며 다녔습니다. 두 아이가 아직 똥오줌 못 가리던 때에는 천기저귀와 옷가지를 가방 가득 챙겨 짊어지면서 다녔습니다. 전철에서도 오줌기저귀뿐 아니라 똥기저귀를 갈았습니다. 시외버스와 기차에서는 으레 기저귀갈이를 했습니다. 시외버스에서 비닐봉지에 똥받이를 한 적이 있고, 오줌받이도 한 적이 있습니다. 전라남도 고흥에서 시외버스를 타면 어디를 가든 먼길이기에, 시외버스에서 볼일을 봐주어야 할 때가 있어요.


  한여름에 아이들 기저귀와 옷을 가득 담은 가방을 메고 아이를 품에 안고 걷자면 몹시 덥고 고단합니다. 그러나, 덥고 고단할 뿐 싫거나 어렵지 않습니다. 따사로운 숨결을 품에 안았고, 즐거운 짐을 등에 짊어졌어요. 어버이 품에 안긴 아이는 걱정없이 마실을 다닙니다. 어버이 품에 안기며 자라는 아이는 어느새 두 다리로 서고 걸으면서 어버이 품을 벗어납니다. 이러다가도 “안아 줘.” 하며 두 팔을 벌립니다.


  함께 바람을 쐬며 걷습니다. 함께 햇볕을 먹으며 걷습니다. 함께 풀내음을 맡고, 함께 나무빛을 바라보며, 함께 꽃내음과 꽃빛을 즐깁니다.


  자가용이 없으니 골목마실을 합니다. 자가용이 없으니 들마실을 합니다. 자전거를 타니 이웃마을로 달리는 동안 여름바람과 겨울바람 실컷 마십니다.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로 찾아가서 실컷 모래놀이와 물놀이를 합니다.

 

 

 

.. 엄마는 자투리 천을 이리저리 맞춰 보고 고운 빛을 골라 마름질을 시작했어. 아껴 입던 새 저고리도 잘라 내서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바느질을 했지 ..  (18쪽)


  이승은·허헌선 두 분이 만든 인형으로 이야기를 꾸미고, 김준아 님이 사진을 담은 《색동저고리》(파랑새,2010)를 읽습니다. 이야기책 《색동저고리》에 나오는 아이들은 몹시 가난합니다. 아버지는 안 계시고 세 식구끼리 살아갑니다. 설날에 고운 때때옷 못 입습니다. 설날에 아이들은 둘이서 놀며 어머니가 바깥일 마치고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떡국 한 그릇조차 없이 손가락을 빼물다가 돌이와 분이는 스르르 곯아떨어집니다. 추운 겨울날 이불조차 덮지 못하고 어머니를 기다리다 잠든 두 아이입니다.


  해 지고 어두운 저녁에 느즈막히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두 아이가 서로 기대어 잠든 모습을 보고 애틋합니다. 버선을 벗기고 이부자리로 옮겨 눕히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가난하기에 설빔을 마련하지 못한다지만, 삯바느질을 하며 남은 자투리 천이 많은 줄 떠올립니다. 자투리 천 가운데 고운 빛깔 천을 골라 알맞게 자릅니다. 색동저고리 한 벌이 태어납니다.

 


.. 하늘로 둥실 떠올랐어! 엄마의 사랑을 입고 훨훨 무지개처럼 하늘로 날아오른 거야 ..  (28쪽)


  아이들은 사랑을 먹으며 자랍니다. 어버이가 베푸는 사랑을 받아먹으며 아이들이 자랍니다. 아이들은 더 푸짐한 밥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자가용을 몰거나 돈이 많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저희한테 사랑을 나누어 주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은 어버이 사랑 담긴 밥상을 받고 싶습니다.


  어버이 사랑스러운 손길이 깃든 옷을 입는 아이들은 옷자락을 앙증맞은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곤 합니다. 이 옷자락에 깃든 어버이 손길을 저희 손으로 느끼곤 합니다. 손끝에서 손끝으로 옮는 사랑이요, 마음에서 마음으로 퍼지는 사랑입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할 때에 즐겁습니다. 서로 돌보고 어깨동무할 때에 웃습니다. 설빔은 새옷자랑이 아닙니다. 설빔은 사랑나눔입니다. 새옷을 입었으니 좋은 설날이 아니라, 사랑을 받으며 활짝 웃는 설날입니다. 사랑으로 여는 새해 첫날입니다. 4347.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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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보라 홀로 뜰에 앉아 생각하기


 

  누나는 음성 할머니와 손을 잡고 앞뜰을 거닌다. 산들보라는 홀로 앞뜰 걸상에 앉아 먼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작은아이는 가끔 혼자 떨어져 앉아서 먼데를 바라보곤 한다. 산들보라 눈길은 어디로 이어질까. 네 살 어린이 눈길은 어디로 닿을까. 가슴속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어 먼데를 바라보며 혼자 조용히 있을까. 4347.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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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아이 45. 치마저고리 멧길 타기 (2014.1.31.)

 


  숲으로 우거진 뒷멧자락을 사름벼리가 치마저고리를 걸치고 오르려 한다. 치마꼬리가 길기에 자꾸 발에 걸린다. 치맛자락이 짧거나 바지차림이라면 이쯤 되는 비알이란 하나도 안 어렵지만, 한손으로는 치맛자락을 추스르고 한손으로는 나무뿌리를 잡거나 땅바닥을 짚느라 살짝 벅차다. 그렇지만 끝까지 용을 쓰며 오른다. 씩씩한 시골아이이니까.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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