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달, 웃는 오이

 


  동그랗게 썬 오이를 먹던 큰아이가 문득 묻는다. “아버지, 이거 달이야?” “아니. 보름달이야.” “오잉? 그러면 이거는? 이거 달이야?” “아니. 그건 초승달이야. 달은 동그랄 때에는 보름달이고, 가느다랄 때에는 초승달이고, 반토막일 때에는 반달이야.” 잘 알아들었을까? 한창 뭔가를 쪼물딱쪼물딱하더니 빙긋 웃는다. 뭔데? 오이를 조금씩 잘라서 먹고 붙여서 “아버지, 이거 웃는 달이야.” 하면서, ‘웃는 오이’를 만들어 밥상 귀퉁이에 올린다. 작은아이도 옆에서 “웅는 달. 웅는 달.” 하고 누나 말을 따라하려고 애쓴다. 4346.5.2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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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22] 방송읽기
― 무엇을 보고 들어야 즐거울까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갈 때에 곧잘 버스 일꾼이 라디오를 켭니다. 군내버스 20분을 조용히 시골길 누비며 다닐 때가 있지만, 시골길 누비면서도 라디오 소리에 두 귀가 멍멍할 때가 꽤 됩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고흥읍에서 순천을 오갈 적에는 거의 언제나 버스 일꾼이 라디오를 틉니다. 시외버스로 고흥과 순천을 오가는 한 시간 길에는 거의 언제나 두 귀 멍멍한 채 있어야 합니다.


  시외버스 일꾼은 시외버스에 어른이 타건 아이가 타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타건 푸름이가 타건 어르신이 타건 대수로이 살피지 않습니다. 그저 버스 일꾼 스스로 들으려 하는 라디오를 켭니다.


  가끔 도시로 가서 시내버스를 탈 적에는 좀 다르다고 느끼곤 합니다. 왜냐하면, 도시에서는 자동차 너무 많고, 사람들 지나치게 많아서, 도시 시내버스 일꾼으로서는 라디오라도 켜지 않으면 골이 아프겠구나 싶어요.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와 손전화 소리와 수다 떠는 소리에서 홀가분하면서 도시 시내버스를 몰자면, 라디오란 더할 나위 없는 길벗이 되리라 느껴요.


  시골 군내버스는 퍽 달라요. 호젓한 시골길을 달리는 군내버스는 앞에서나 옆에서나 뒤에서나 숲을 보고 들을 봅니다. 때로는 냇물을 보고 바닷물을 봅니다. 눈을 맑게 틔우고 생각을 환하게 여는 푸른 빛깔을 한 가득 바라보면서 버스를 몰 수 있어요. 그러니, 시골 군내버스 일꾼은 굳이 라디오를 안 켜도 됩니다. 게다가, 시골 할매나 할배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가 있고, 갓 태어난 아기들 무럭무럭 자라 어린이 되고 푸름이 되며 어른 되는 흐름을 죽 지켜보기도 하기에,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새록새록 누립니다. 따로 라디오를 헤아릴 틈이 없다 할 만해요.


  도시에서 택시를 모는 일꾼이 손님들 기다리면서 텔레비전을 볼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루 내내 찻길에서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에 시달리면서, 자동차 배기가스를 맡을 뿐 아니라, 열 몇 시간 좁은 자동차에 갇히다시피 들어앉아 일을 해야 하니, 택시 일꾼 또한 버스 일꾼처럼 라디오가 길벗이요 텔레비전이 삶벗 되리라 느껴요.


  그러면,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버스와 택시 일꾼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채우는 이야기는 어느 곳에서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이 빚을까요. 사람들 마음을 따사롭게 보듬는 이야기가 새벽부터 밤까지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흐르나요. 치거나 박거나 싸우거나 하는 이야기가 흐르는 방송은 아닌가요. 아름다운 사람들 아름다운 이야기는 뒤로 밀린 채, 갖가지 정치 다툼·경제 다툼·외교 다툼 따위만 다루다가는, 차별 문제·반민주 문제·막개발 문제조차 제대로 못 다루는 방송이지 않나요.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는 사람들 마음을 어떻게 건드리는지 궁금합니다.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영화나 연속극이나 운동경기나 새소식이나 정보나 토론이나 연설 들은 사람들 생각을 어떻게 움직이려는지 궁금합니다.

  고흥읍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이웃도시 순천으로 마실을 가서 한나절 지내고는 다시 고흥읍으로 와서 군내버스로 갈아타고는 시골마을 우리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합니다. 시외버스 타고 오가는 동안 내내 라디오 소리에 귀가 멍멍했고, 군내버스에 내리자마자 마을 어귀부터 훅 끼치는 고소하고 시원한 들바람에 개구리 노랫소리 가득 울려퍼집니다. 개구리 노랫소리 사이사이 아직 나즈막하다 싶은 풀벌레 노랫소리 섞입니다. 멧새 노랫소리는 개구리 노랫소리에 그예 파묻힙니다. 머잖아 이 밤에 개똥벌레 불꽃춤잔치 벌어지리라 생각합니다. 해마다 찾아오는 밤노래잔치 즐겁고, 해마다 다시 마주하는 개똥벌레 불꽃춤잔치 반갑습니다. 하늘 올려다보면 별이 쏟아지고, 멀리 내다보면 까만 밤하늘 가로지르는 멧자락 얼핏설핏 보입니다.


  라디오 방송 가운데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즈음 개구리 노랫소리나 제비 노랫소리 들려주는 적은 아직 없습니다. 텔레비전 방송 가운데 세 시간이나 네 시간 즈음 바람소리와 햇살내음이랑 풀노래랑 바다물결 골고루 보여주는 적은 아직 없습니다. 바람 따라 풀이 눕고 나뭇잎 살랑거리는 소리를 오래오래 들려주는 라디오 방송이 있을까요. 고래가 노니는 춤사위를 오래도록 보여주는 텔레비전 방송이 있을까요.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우리한테 어떤 이야기밭이 될까요.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지구별 사람들한테 어떤 사랑이나 꿈이 될 만할까요. 우리들은 꿈과 사랑을 헤아리면서 방송을 마주하는 삶인가요 아닌가요. 4346.5.2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당신은 어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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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자전거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운 다음, 아이들 이모부더러 자전거를 몰아 보라 한다. 집에서 면소재지까지는 내리막길이다. 이 길에는 자전거 타기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그럭저럭 갈 만하고, 두 아이와 수레를 붙인 무거운 자전거도 이럭저럭 끌 만하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이 샛자전거와 수레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를 들여다본다.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달리는 맛 어떠하니. 이모부가 달리는 자전거 맛은 아버지가 달리는 자전거 맛하고 얼마나 다르니.


  자전거로 함께 달리면서 바람소리를 듣고 바람내음을 맡는다. 자전거로 나란히 달리면서 멧새와 개구리 노래하는 소리를 듣는다. 길바닥을 볼볼 기는 풀벌레 바라보고, 이웃마을 논과 밭을 내다본다. 우리를 둘러싼 마을과 숲과 멧골을 천천히 천천히 헤아린다. 4346.5.2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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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5-21 13:17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저까지 마음이 싱그러워 지네요.
^^ 근데 자전거가 씽씽 달리고 있나봐요.
산들보라의 꼭 잡은 두 손과 얼굴을 보니까요.~^^

숲노래 2013-05-21 16:17   좋아요 0 | URL
네, 달리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달려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자전거마실' 모습이랍니다~~ ^^;;
 

설거지 하고 싶어

 


  설거지를 하는 아버지 곁에 걸상을 받치고 선 여섯 살 사름벼리가 문득 “나도 설거지 하고 싶어.” 하고 말한다. “그래? 그런데 네가 설거지를 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음. 하고 싶어?” “응.” “그러면, 잘 봐.” 아이 왼손으로 설거지감 하나를 쥐도록 하고 아이 오른손으로 수세미를 쥐도록 한다. 그러고 내 왼손으로 아이 왼손을 잡고, 내 오른손으로 아이 오른손을 잡는다. 설거지를 어떻게 하면 되는가를 두 번 보여준다. 그러고 나서 아이한테 맡긴다. 아이는 아버지한테 손이 잡히며 설거지를 한 느낌을 살려 따라한다. 기름기 있는 밥은 거의 먹지 않으니, 설거지를 하며 비누를 묻히는 일 거의 없다. 물이 흐르게 해서 슥슥 문지르고 헹구면 끝이다. 앞으로 큰아이한테 설거지를 더러 맡길 만하겠다고 느낀다. 좋다. 여섯 살 사름벼리 첫 설거지 누린 날이로구나. 4346.5.2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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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5-20 09:46   좋아요 0 | URL
아유~마치 아가씨같은 모습의 샤름벼리가 설겆이하는 뒷모습의,
발판을 딛고서도 살짝 뒤꿈치를 올린 다리의 선과 하나로 묶은 머리와 팔 모양으로
열심히 설겆이를 하려는 마음이 다 보입니다.~^^
사진,이란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감탄을 하며...*^^*

숲노래 2013-05-20 09:57   좋아요 0 | URL
사진이 있어, 이 예쁜 모습 찍을 수 있어, 참 고맙습니다.
 

[당신은 어른입니까 21] 돈읽기
― 남한테서 무엇 하나 얻을 적에


 

  나는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 돈을 법니다. 내가 쓴 글을 책으로 묶기도 하고, 내가 찍은 사진을 누군가 사들이기도 해서, 이럭저럭 돈을 법니다. 나는 글을 써서 돈을 벌되, 돈을 안 받고 글을 보내기도 합니다. 가난한 살림에 뜻있는 일을 하는 모임이 있으면 자원봉사를 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써서 보냅니다. 사진도 이와 같아요. 애써 찍은 사진들을 아무 돈을 안 받고 보내곤 합니다.


  거꾸로 보면, 나도 내 둘레 사람들한테서 돈을 받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곱게 바라보는 분들은 내가 시골마을에서 꾸리는 사진책도서관 튼튼하고 씩씩하게 이을 수 있도록 도움돈을 보내줍니다. 도서관이 좋은 자리 얻도록 밑돈을 보태어 줍니다. 도서관 꾸리는 살림돈을 요모조모 보태어 줍니다. 도서관 새 책꽂이 들이는 돈을 보태어 줍니다. 그러면 나는 도서관 소식지라든지 내가 내놓은 책들을 이웃들한테 보내거나 선물합니다.


  내 글 한 꼭지는 원고지 열 장이 되기도 하고 원고지 백 장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 때에는 원고지 열 장짜리 글을 써서 30만 원 값을 받습니다. 어느 때에는 원고지 백 장짜리 글을 써서 거저로 주기도 합니다. 내 사진 한 장에 50만 원 값을 받기도 하면서, 내 사진 서른 장을 거저로 주기도 합니다. 어떤 일이든 꼭 돈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꿈과 사랑은 돈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이 있고 이름도 있으며 힘도 있는 사람이나 모임에서 나한테 ‘공짜 글’을 써 달라 할 때가 있고, ‘공짜 사진’을 보내 달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에는 딱 잘라 이야기합니다. 이녁한테 돈도 이름도 힘도 없으면 얼마든지 글과 사진을 자원봉사하는 마음으로 보낼 테지만, 이녁한테 돈도 이름도 힘도 다 있는데, 내가 왜 이녁한테 아무 돈을 안 받고 글이나 사진을 주어야 할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돈도 이름도 힘도 없으면서 뜻있는 일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푸념을 하는 소리를 듣는 자리에서는 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뜻있는 일을 하려는 그 마음을 더 깊이 엮어, 뜻있는 일을 하면서도 돈을 즐겁고 슬기롭게 버는 생각도 함께 해 보셔요, 하고요. 좋은 일을 하면서 좋은 돈을 벌어야 맞거든요. 아름다운 일을 하면서 아름다운 돈을 벌어야 참말 아름답지요.


  남한테서 무엇 하나 얻을 적에는, 나도 남한테 무엇 하나 건넵니다. 내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깨끗한 종이 한 장 얻어 그 자리에서 시를 한 가락 씁니다. 내가 시골에서 살아가며 누리는 아름다운 사랑을 가만히 떠올리면서 그때그때 시를 한 가락 씁니다. 또는 내가 찍은 사진 가운데 내 마음을 아주 넉넉히 살찌우는 작품을 골라서 선물로 보냅니다.


  밥 한 그릇 만나게 얻어먹으면, 설거지를 맡아서 하거나, 걸레를 빨아 구석구석 방바닥을 훔치거나 먼지를 닦습니다. 몸을 써서 날라야 할 짐이 있으면 함께 나르고, 이것저것 종이 한 장 맞드는 마음 되어 어깨동무를 합니다. 내 동무들도, 내 이웃들도 서로서로 같은 마음이겠지요. 저마다 즐겁게 얻어서 누리고, 저마다 즐겁게 손을 내밀어 함께 일을 해요. 다 함께 즐겁게 주고받습니다. 서로서로 기쁘게 웃으면서 사랑과 꿈을 돈 한 푼에 실어 나눕니다.


  내 주머니에 돈 한 푼 있으니 한 푼을 반으로 갈라 함께 씁니다. 이녁 주머니에 돈 두 푼 있으니 두 푼을 반으로 갈라 함께 써요. 넉넉히 있으니 나눈다고 할 수 있지만, 넉넉하지 않더라도 스스럼없이 나눕니다. 많고 적고는 대수롭지 않아요. 마음이 대수롭습니다. 마음을 즐겁게 추스르면서, 환하게 웃는 어깨동무를 생각합니다.


  돈이란 나눌수록 즐겁습니다. 돈이란 함께할수록 커집니다. 왜냐하면, 돈이란 바로 사람들이 만들어서 쓰거든요. 사람들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숨결이고, 사람들은 꿈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목숨이에요. 곧, 사람들은 돈이라는 물건 하나에 사랑과 꿈을 담습니다. 사랑과 꿈은 돈을 징검돌 삼아 이 사람한테서 저 사람한테 갑니다. 저 사람한테서 이 사람한테 옵니다. 4346.5.1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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