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서 띄운 '나는 대학교를 왜 때려치웠는가' 다음으로 이 글을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대학생인 분, 또 대학교 마친 분, 또 대학교를 바라는 푸름이들, 모두한테 즐거운 글선물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

 

 

[당신은 어른입니까 12] 대학교읽기
― 내가 꿈꾸는 사랑스러운 벗님

 


  대학교를 나왔대서 대수롭지 않습니다. 대학교를 안 나왔대서 대단하지 않아요. 그런데, 도시에서 일자리 얻어 살아가려면,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하지요. 의사가 되고 싶든 판사가 되고 싶든 기자가 되고 싶든 작가가 되고 싶든, 으레 대학교 졸업장을 바랍니다. 출판사 편집자나 영업자로 일하고 싶어도 대학교 졸업장을 바랍니다. 다만, 도시에서도 막일 하는 공사판에서는 대학교 졸업장을 바라지 않아요. 편의점 알바생 뽑을 적에도 대학교 졸업장은 바라지 않아요. 공장에서는 외려 대학교 졸업장을 꺼릴 테지요. 머리만 굴리려 하는 사람들은 몸을 제대로 못 쓰니까요.


  인천에서 아직 우리 식구들 살아갈 적, 골목동네를 거닐며 골목이웃을 가만히 헤아려 보곤 했습니다. 가난하다 하는 달동네 골목이웃은 으레 ‘대학교 안 다닌’ 사람이요, ‘학교 문턱조차 못 밟은’ 사람이 많아요. 이런 골목동네 찾아와 사진찍기 즐기는 이들은 으레 ‘대학교 다닌’ 사람이거나 ‘대학교 한창 다니는’ 사람이기 일쑤이고요. ‘대학교 다녔거나 다니는’ 사람들은 ‘대학교 안 다닌’ 사람들이 일군 달동네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생각할까 궁금합니다. 요즈음, ‘골목길 해설사’라든지 ‘골목길 투어’라든지 쏠쏠히 생긴다 하는데, ‘골목해설’은 누가 하고, ‘골목투어’는 누가 꾀할까 궁금합니다.


  먼먼 옛날부터 물려받아 흙을 일구는 분들은 대학교를 안 다녔습니다. 시골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네 아이들은 대학교를 다니며 몽땅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가지만, 오늘날에도 시골을 지키는 어르신들은 거의 모두 대학교하고는 먼 삶자락을 꾸립니다. 할머니는 모두 다 대학교는커녕 고등학교조차 안 다녔다고 할 만해요. 따지고 보면, ‘대학교 다니는’ 사람들은 ‘대학교 안 다닌’ 사람들이 시골에서 일군 곡식과 열매를 먹고, ‘대학교 안 다닌’ 사람들이 도시 변두리 공장에서 만든 물건을 사다가 씁니다. ‘대학교 다니는’ 사람들은 ‘대학교 안 다닌’ 사람 앞에서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며, 무슨 사랑을 베풀려나요.


  대학교를 나왔거나 한창 다니는 사람들 말씨가 참 어렵습니다. 대학교를 다니고 싶어 입시공부에 푹 파묻힌 아이들 말투까 참 어렵습니다. 대학바라기를 하는 사람들은 어려운 말, 딱딱한 말, 게다가 일본 말투가 끼어든 슬픈 말, 영어범벅, 어설픈 번역투, 이러저러해서 한국말답지 않은 한국말로 말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들 대학바라기 사람들은 이녁 스스로 어떤 한국말을 쓰는지 모릅니다.


  대학교를 안 나왔거나 학교 문턱 안 밟은 사람들 말씨가 참 쉬워요. 수수하지요. 투박하고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말씨가 참 쉽습니다. 수수합니다. 투박합니다. 그러나, 같은 시골 하늘을 등지고 살더라도, 면사무소나 농협이나 이런저런 공무원과 회사원들 말씨는 도시사람하고 똑같이 어렵더군요.


  시골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왜 대학바라기를 하면서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야 할까요. 대학교는 왜 시골에는 한 군데도 없이 도시에만 있을까요. 더러, 시골 외진 한켠에 선 대학교도 있지만, 시골자락 한 귀퉁이 차지한 대학교 가운데 ‘대학교 마친 아이들이 시골에서 살도록 북돋우거나 이끄는 곳’은 아직 한 군데조차 없어요. 그러니까, ‘시골 대학교’란 없다. 모두 ‘도시 대학교’일 뿐입니다.


  모두 도시로 가고 시골은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맡기면, 누가 흙을 일구지? 유기농이든 무농약이든 저농약이든 친환경이든, 누가 흙을 일구지? 필리핀이나 베트남이나 칠레에서 사다 먹으면 되나? 그러면, 필리핀이나 베트남이나 칠레 젊은이들은 대학교 안 가고 시골에서만 살아야 하나?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대서 도시에서만 살아야 할까? 도시에서 살아가는 어버이한테서 태어난 목숨이기에, 그저 도시살이만 생각하고 도시내기로 지내서 도시붙박이가 되어야 할까?


  시골 어린이집조차 숲마실을 안 합니다. 시골 초등학교조차 시골마을 들판이나 바다로 나들이를 다니지 않습니다. 시골 중학교조차 시골 어버이 봄일·여름일·가을일 거들도록 ‘일하는 방학’을 마련하지 않아요. 시골 고등학교조차 시골에서 스스로 삶을 짓고 꿈을 짓는 길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모두 도시바라기로 흐릅니다. 도시사람은 도시사람대로 도시바라기요, 시골사람은 시골사람대로 도시바라기가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바로 대학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교를 나와야 도시에서 돈 잘 버는 일자리 거머쥘 수 있고, 대학교 졸업장을 따야 손에 흙이나 물 안 묻히면서 먹고 놀고 자고 입고 싸고 뒹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전태일 님은 ‘대학생 동무 하나 있으면’ 하고 바라며 숨을 거두었어요. 그런데, 나는 고등학생 때에 전태일 님 이야기를 책으로 읽으며 ‘이건 아닌데’ 하고 느꼈어요. 아니, 어쩌면 전태일 님 이 서글픈 바람이 내 마음속에서 잠자던 생각 하나 깨웠는지 모릅니다. 무언가 하면, ‘대학생 아닌, 곧 고등학교만 마친, 또는 학교 문턱 밟은 적 없는 동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하는 대목을 일깨웠구나 싶어요. 전태일 님은 곁에 아주 사랑스럽고 애틋한 동무들이 많았는데, 미처 이 동무들 너른 사랑을 못 껴안았다고 할까요. ‘무식쟁이(대학교 나온 사람들이 대학교 안 나온 사람을 깎아내리며 부르는 이름이지만)’끼리 어깨동무를 할 적에 얼마나 크고 너르며 깊은 힘이 솟는 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고 할까요.


  나는 대학교를 그만두어 고졸 ‘신분’이기에 즐겁습니다. 내 옆지기는 고등학교를 그만두어 중졸 ‘신분’이기에 사랑스럽습니다. 꼭 학력 때문에 더 좋거나 싫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만, 제도권 입시교육이 사람을 얼마나 갉아먹고 사랑을 얼마나 깎아내리며 꿈을 얼마나 망가뜨리는가를 몸으로 느끼며 살아갈 수 있으니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아요. 우리 아이들한테 제도권 입시교육을 함부로 들이밀지 않을 수 있는 어버이로 살아가는 하루가 고맙습니다.


  나는 꿈꿉니다. ‘대학교 졸업장 없는 시골 흙동무’를 꿈꿉니다. ‘대학교 졸업장 없는 도시 달동네 예쁜 동무’를 꿈꿉니다. 모두들 어딘가에서 아름다운 하루를 누리면서 아름다운 생각을 흩뿌리겠지요. 저마다 어딘가에서 고운 사랑을 나누면서 고운 이야기꽃을 피우겠지요. 4346.1.1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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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3-01-19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 받으세요!

숲노래 2013-01-19 12:31   좋아요 0 | URL
아, 고맙습니다~
유다다 님은 세 번 네 번 고운 복과 사랑 듬뿍 누리셔요~~~ ^^

비로그인 2013-01-19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께살기님~
하루종일 이 글 생각만 했어요.
바로보기! 라니요.ㅎㅎ
바로보는 학생은 못되더라도 바로보는 부모는 꼭! 될게요.
그렇습니다ㅎㅎ

숲노래 2013-01-21 03:43   좋아요 0 | URL
우리들 모두 삶을 예쁘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어깨동무를 할 수 있으면
참 아름다우리라 느껴요~
 

울음소리

 


  부산마실 마치고 고흥으로 돌아오는데, 부산 사상 버스역에서 시외버스 기다리다가, 우리 집 큰아이가 동무 아이랑 잘 뛰노는 모습을 보고는, 아버지는 뒷간 다녀와야겠다 싶어 뒷간에 들었더니, 큰아이가 아버지 사라졌다며 버스역이 떠나가도록 꺼이꺼이 운다. 책방 아저씨가 곁에 있어도 아버지 없다며 우는 소리에, 뒷간에 앉아 볼일을 보지도 못하고 바로 나온다. 얘야, 너 아버지 있건 말건 네 동무하고 이 버스역 구석구석 달리고 뒹구며 노느라 아버지는 안 쳐다보고 불러도 안 오잖니. 아버지가 너를 두고 사라질 일 있겠느냐. 바깥마실 다니느라 속이 더부룩해서 뒷간에 가려 했는데, 그대로 놀면 되잖니. 어쩌면 너는 그렇게 개구지게 뛰놀면서도 아버지가 그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 내내 지켜보았니. 그곳에 아버지가 있으니 마음을 푹 놓고 이 버스역을 네 앞마당 삼아 신나게 뛰놀았니. 네 웃음소리도, 네 울음소리도 그예 하늘을 찢고 가슴을 찢는구나. 4346.1.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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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10] 글읽기
― 신문에 ‘사건·사고’ 이야기가 없어야지요

 


  어느 신문이든 펼치면 맨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사고’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정치판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경제판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 노동판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사고’, 사회 언저리에서 불거지는 ‘사건·사고’ 이야기로 가득해요. 여기에 방송 연예인들 ‘사건·사고’가 한몫 단단히 거듭니다.


  어른들 보는 신문이든 아이들 보는 신문이든 서로 매한가지입니다. 도시에서 나오는 신문이든 시골에서 나오는 신문이든 모두 엇비슷해요. 이 나라에서 나오는 신문이란 죄다 ‘사건·사고’만 다루는구나 싶습니다.


  기자들은 ‘사건·사고’를 캐는 사람을 가리키기만 할까 궁금하지만, 오늘날 이 나라에서 기자로 일하는 분들은 ‘사건·사고’ 다루는 울타리를 스스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신문을 읽거나 방송을 켜거나 인터넷을 여는 여느 사람들 또한 ‘사건·사고’ 이야기에 눈길을 보내고 생각을 기울입니다.


  날마다 온갖 ‘사건·사고’ 이야기가 넘실거립니다. 사람들은 속닥속닥 ‘사건·사고’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자꾸 잊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는 차츰 잊습니다. 서로 ‘꿈꾸는’ 이야기는 그예 잊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을 가까이하는 동안 사람들 마음속에는 ‘사건·사고’ 생각이 꾸준히 스며듭니다. 생각밭에도 마음밭에도, 또 지식밭에도 온통 ‘사건·사고’ 이야기를 심습니다. 이리하여, 오늘날 여느 사람들은, 도시에서 지내든 시골에서 지내든 ‘풀·숲·나무’ 이야기를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옆에 ‘풀·숲·나무’가 있어도 못 느끼기 일쑤요, 코앞에서 ‘풀·숲·나무’를 마주하더라도 어떤 내음이요 어떤 빛깔이며 어떤 무늬인가를 알아채지 못해요.


  바람이 불어도 바람내음을 못 맡는 도시사람입니다. 햇살이 드리워도 햇살내음을 안 맡는 시골사람입니다. 들새가 노래해도 자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에 파묻혀 도시사람은 들새와 벗하지 못합니다. 멧새가 지저귀어도 경운기와 갖가지 기계를 다루느라 시골사람은 멧새와 동무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싶은가에 따라서, 나한테 찾아드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스스로 ‘사건·사고’ 이야기에 젖어들면, 언제나 ‘사건·사고’ 이야기가 나한테 찾아듭니다. 스스로 ‘풀·숲·나무’를 떠올리면 언제나 ‘풀·숲·나무’ 이야기가 나한테 다가와요.


  내 삶에 맞추어 내 생각이 자랍니다. 내 생각에 따라 내 말이 자랍니다. 곧, 내가 쓰는 글이든 이웃이 쓰는 글이든, 저마다 생각을 담는 글이요, 생각이란 삶을 담기 마련이니, ‘삶을 담는 글’입니다. ‘사건·사고’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사건·사고’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을 부릅니다. ‘풀·숲·나무’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풀·숲·나무’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을 부를 테지요.


  온누리를 따뜻하게 어루만지면서 평화와 평등과 민주와 통일이 드리우기를 바란다면, 바로 나부터 내 마음자리에 평화와 평등과 민주와 통일이 싹틀 수 있도록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내 마음자리에 ‘사건·사고’ 이야기가 아닌 ‘풀·숲·나무’ 이야기가 감돌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꿈을 생각하고 사랑을 생각하며 믿음을 생각할 노릇이에요. 꿈을 빚는 이야기를 스스로 쓰고, 사랑을 빚는 이야기를 스스로 읽으며, 믿음을 빚는 이야기를 다 함께 나눌 노릇이지요.


  ‘사건·사고’ 이야기를 자꾸 꺼낼수록, 사람들은 ‘논쟁·투쟁’에 휘둘립니다. ‘풀·숲·나무’ 이야기를 천천히 주고받으면, 사람들은 아름다움과 빛줄기와 따사로움에 시나브로 젖어듭니다.


  신문에 ‘사건·사고’ 이야기만 가득하다면 신문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방송에 ‘사건·사고’ 이야기만 수두룩하다면 텔레비전을 꺼야 합니다. 인터넷에 ‘사건·사고’ 이야기로 빼곡하다면 인터넷 창을 닫아야지요. 겨울숲을 바라보아요. 겨울들을 거닐어요. 겨울바다를 마주해요. 너른 하늘 파랗게 눈부신 숨결을 마셔요. 봄을 기다리는 새싹이 얼어붙은 땅에서 힘껏 솟아나려고 하는 모습을 지켜봐요. 한겨울에 먹이를 찾는 들새와 멧새들 날갯짓을 물끄러미 바라보아요. 마음속에서 사랑이 자라고 꿈이 피어나며 믿음이 솟아나도록, 생각씨앗 한 알을 슬기롭게 다스려요. 내 작은 힘을 모으고 네 작은 힘을 갈무리해서, ‘참신문’을 엮을 수 있기를 빌어요. ‘사건·사고’ 이야기로 넘치는 ‘거짓글’은 이제 그만 쓰고 그만 읽어요. 서로 아름답게 어깨동무하면서 착하게 살림하는 ‘참글’을 쓰고 즐겁게 읽어요.


  글쓰기는 삶쓰기예요. 글읽기는 삶읽기예요. 내가 쓰는 내 삶이 ‘사건·사고’뿐이라면 너무 메말라 답답하지 않겠어요? 내가 쓰는 내 삶이 ‘풀·숲·나무’라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푸르고 싱그러우며 어여쁘겠지요? 서로 사랑할 삶을 읽고, 함께 사랑할 삶을 쓸 때에, 비로소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4346.1.1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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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걷기

 


  큰아이는 작은아이보다 크니까 멀찌감치 앞장서서 달리곤 하지만, 곧 다시 달려와서 함께 걷는다. 작은아이 곁에서 작은아이 걸음에 맞추어 나란히 걷는다. 그래, 먼저 저 앞으로 달려가도 되지. 다시 돌아오면 되니까. 너는 더 신나게 달리고 싶으니, 앞으로 달려가고는 뒤로 달려오면 되지. 나란히 걷다가 또 신나게 달리고, 다시 신나게 달려서 돌아오며, 새삼스레 함께 걸으면 되지. 4346.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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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양말

 


  큰아이는 곧잘 짝양말을 신는다. 한 짝을 맞추어 신는 양말 아닌, 짝짝이로 신는 양말이다. 틀림없에 제 짝이 한 켤레로 있는 양말인데, 짝짝이로 신으면서 어느새 한 켤레로 맞는 양말 한 짝이 사라지기도 하고, 제 짝이 사라지니 어쩔 수 없이 짝양말을 신기도 한다. 이 양말도 예쁘고 저 양말도 예쁘다면서 이리저리 신고 벗고 놀다가, 한 짝이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숨는 바람에 짝양말을 신기도 한다. 제 짝 한 켤레로 안 신고 짝양말 신은 모습을 아버지한테 들키면, 치마를 확 내리며 짝양말을 숨기고는 까르르르 웃는다. 쳇. 너 참 잘났어. 네가 빨래를 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자꾸 새 양말 꺼내 신고 또 벗고 또 신고 하면서 방바닥에 네 양말을 잔뜩 늘어놓으려니. 네 마음껏 짝양말 신고 싶으면 네가 손수 빨아서 말리고 개서 건사하라구. 요 여섯 살 말괄량이야. 4346.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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