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살다 1

고등학교 1학년이던 무렵 시라고 하는 글을 쓰고 싶었으나 가르칠 만한 어른을 만나지 못했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나온 시를 읽고, 헌책집에 찾아가 오래된 시를 찾아서 읽고, 새책집에 나들이를 해서 새로 나온 시를 살펴서 읽는다. 누가 가르치지 않으니, 또 배울 만한 어른이 없으니 그저 다른 시나 시집을 찾아 읽으면서 스스로 생각한다. 마음에 와닿는 시는 쉽게 알아보았다. 시를 쓴 사람이 그분 삶을 스스로 생각하면서 그분 말씨대로 쓴 시가 마음에 와닿는다. 그분 삶이 아닌 딴 사람 삶을 어깨너머로 구경하면서 쓴 시는 마음에 안 와닿는다. 멋을 부리려고 한자를 집어넣거나 영어를 섞는 시도 마음에 안 와닿는다. 아이들한테 아양을 떨듯 말장난을 하는 동시도 마음에 안 와닿는다. 마치 어른끼리 다 안다는듯 어린이를 내려다보는 동시도 마음에 안 와닿는다. 그렇구나. 잘나든 못나든 내가 살아가는 대로 쓸 노릇이구나. 내가 살지 않는 모습을 쓰려니 꾸며야 하고, 내가 사는 모습을 고스란히 쓰니 꾸밀 일이 없다. 내가 살지 않는 모습을 쓰려니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같은 겉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고, 내가 사는 모습을 그대로 쓰니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틀린 글이어도 마음을 찡하게 사로잡는구나. 저잣거리 아재나 할매가 투박하게 흘려쓴, 이러면서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틀린, 이녁 바구니 앞에 놓은 수수한 글씨야말로 시요 노래요 고운 글이다. 1995.11.17.


글을 살다 2

살아가는 터전에서 글을 쓴다. 살아가는 사람하고 글을 쓴다. 살아가는 보금자리에서 내가 하는 일과 내가 꾸리는 살림을 글로 쓴다. 살아가는 사람하고 어울리는 나날을 글로 쓴다.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나는 시골집 시골다움을 글로 담는다. 시골집에서 네 사람 짐을 꾸려 먼 마실을 나와 새 보금자리를 찾는 동안, 시골집 아닌 길손집에서 묵는다. 길손집에서 묵는 내내 귀로 들리는 소리는 자동차랑 텔레비전 울리는 소리와 에어컨이나 냉장고나 정수기가 전기를 먹으며 끄르릉 끓는 소리. 우리 넷이 지난 한 해를 살아온 시골집은 텅 비었을 테지만, 시골집 둘레로 갖은 풀벌레가 새벽부터 밤까지 고즈넉히 울겠지. 귀를 기울이자. 마음을 열며 귀를 기울이자. 읍내 길손집에서 묵을지라도 냉장고 꼬르륵 소리에 묻히는 저 먼 멧골자락 풀벌레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마음을 열면 이 소리를 고즈넉히 들을 수 있으리라. 마음을 열지 못하면 길가 풀섶 작은 풀벌레 소리조차 못 들으리라. 나는 내가 먹는 밥과 내가 입는 옷과 내가 자는 보금자리 기운을 하나하나 받아들이면서 글을 쓴다. 나는 내가 딛는 땅과 내가 마주하는 살붙이와 내가 사랑하는 하늘땅을 고스란히 맞아들이면서 글을 쓴다. 내 글은 내 사랑이어야 한다. 내 글은 내 삶이어야 한다. 내 글은 내 눈물과 웃음이어야 한다. 2011.9.27.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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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너나없이’ 볼 수 있다면 ‘너나있이’ 볼 수 있다. ‘너나없이’란, 너랑 나를 가리려는 마음이 없이 보려는 눈이다. ‘너나있이’라면, 너랑 나를 가리려는 마음이 있이 보려는 눈일 텐데, 너랑 나는 다르지 않으면서 다르다. 너랑 내가 살아가는 몸뚱이가 다르고, 너랑 내가 짓는 살림이 다르고, 너랑 내가 사랑하는 길이 다르다. 그렇지만 너랑 나는 똑같이 아름다운 숨결이자 넋이자 마음이다. 다르지만 같고, 같지만 다르다. 우리는 서로 달라 어느 곳에서 일하더라도 자리도 다를 텐데, 자리란 위아래로 가르지 않는다. 자리는 그저 자리로 가른다. 윗자리하고 아랫자리란 없다. 이 자리 저 자리 그 자리가 있을 뿐이다. 네가 위에 서거나 내가 위에 설 수 없고, 내가 밑에 서거나 네가 밑에 설 수 없다. 이를 읽지 못하기에 서로 ‘남’이 된다. 이를 읽지 못한 채 서로 높이거나 낮추어야 하기에 그만 ‘놈·년’이 된다. 이를 읽을 적에는 비로소 서로 ‘님’이 된다. 이야기를 하려면 너나없는 마음이 되면서, “참다이 너나있는, 참너랑 참나가 어깨동무하는 사이인 마음”이어야지 싶다. 1995.11.4.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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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난

이름난 이가 쓴 글이란 ‘이름난 이가 쓴 글’이다. 훌륭한 글도 멋진 글도 놀라운 글도 새로운 글도 빛나는 글도 고운 글도, 더구나 좋은 글도 아니다. 글쓴이 이름값이나 펴낸곳 이름값을 쳐다본다면, 글멋이나 글맛을 알 수 없다. 모름지기 어느 글을 읽든 글쓴이 이름이나 펴낸곳 이름은 덮을 노릇이다. 오로지 글만 쳐다보고서 이 글에 흐르는 기운이나 뜻이나 마음이나 눈빛을 읽어야지 싶다. 글이란, 한글이나 알파벳이라고 하는 껍데기가 아닌, 한글이나 알파벳이라고 하는 무늬에 담은 기운이나 뜻이나 마음이나 눈빛이다. 우리는 줄거리를 알려고 읽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마음을 알려고, 기운을 나누려고, 뜻을 키우려고, 눈빛을 밝히려고 읽는다. 속내 아닌 껍데기를 훑기에 이름값에 속아넘어가기 일쑤이다. 이름값에는 아무런 마음이 안 흐른다. 1994.4.30.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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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지 않는다기보다 잊을 수 없는 일인데 굳이 떠올리지 않고 살던 일 가운데 1998년 어느 한 가지를 적어 본다. 그무렵 나는 한겨레신문을 돌리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이었으나, 주마다 두세 가지 ‘우리말 소식지’를 엮어서 내 돈으로 복사해서 돌리며 살았는데, 뜬금없달까 뜻밖에 어느 자리에 부름을 받아 두 시간 동안 강사 노릇을 했다. 그날 그 자리는 나로서는 첫 강의였다. 그런데 그 강의는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이나 단체 우두머리 이백 사람이 모였고, 그때 편 온갖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님’이었다. 어느 분이 “우리 회사에서 회의를 하다 보면, 부하 직원들이 자유롭게 토론이나 발언을 하지 못하고, 그냥 ‘네네’ 하는 분위기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게 걱정되세요? 그러면 왜 걱정일까요? 제가 그 회사 대표라면, 서로 직함으로 부르지 않고 ‘아무개 님’이라 부르면서 말하자고 할 겁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그냥 말을 놓고서 서로 이름으로만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말을 놓지 않으면서 ‘님’으로 높이기로 할 수도 있어요. 서로 높이기로 하는 말씨로 이야기를 펴도록 한다면, 대표님이 계신 그 회사에 있는 누구라도 처음에는 낯설어 하겠으나, 회의를 하루이틀 하다 보면 어느새 자유로울 뿐 아니라 훌륭하고 아주 새롭게 생각을 뻗어서 멋지고 알찬 자리가 될 만하리라 봅니다.” 하고. 내가 나를 스스로 낮출 까닭이 없다. 서로서로 ‘님’이라 말하면서 서로 들려주는 말을 귀담아듣겠다는 마음이랑 몸짓으로 거듭나면 된다. 이러면 이야기도 술술 흐르고, 참으로 훌륭하고 멋지게 피어날 수 있다. 그나저나, 그때 내가 이런 말을 들려준 뒤 그 대표라는 분이나 다른 분들이 어떤 낯빛이었는가를 적고 싶다. 그야말로 아주 싸늘했다. 나를 그지없이 미친 놈으로 보는 느낌이더라. 서로서로 ‘님’으로 여기자는 말이, 그때에는 하나도 받아들여질 수 없었나 보더라. 2019.2.28.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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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 1

“와,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도 수첩을 써요?” 충주에서 서울로 자전거를 오가는 길에 건널목 신호등에 걸리면 어깨짐에서 수첩을 꺼내어 이제까지 달린 느낌이며, 자전거로 달리면서 보고 겪고 듣고 한 일을 재빠르게 적는다. 이밖에 여러모로 떠오른 생각이나 할 일을 적는다. 같이 자전거를 달리던 이웃님이 어떻게 자전거를 달리다가도 그 짧은 틈에 수첩을 쓰느냐고 물으시기에, “저는 제가 하는 일을 모두 머리에 새겨서 떠올릴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그때그때 수첩에 적으면, 바로 오늘 이곳에서 어떻게 살았나를 제대로 볼 수 있더군요. 그러니 늘 즐겁게 수첩을 써요.” 하고 대꾸한다. 자전거를 타면서 쓰는 수첩은 온통 땀투성이. 2006.7.8.


수첩 2

술자리에서도 수첩을 책상에 올려놓으니 함께 있는 분이 손을 절레절레 흔든다. “아니, 그렇게 수첩에 늘 뭔가 메모하는 습관은 참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술자리에서도 수첩을 책상에 올려놓고서 써요? 와, 나라면 죽어도 못 한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한다. “아마 그러지 않을까요? 다들 ‘죽어도 못 한다’고 여기니 참말로 죽어도 못 하리라 느껴요. 저는 스스로 이 일을 하면서 이 길을 갈 생각이라서, 술자리이든 뒷간에서 똥을 누는 자리이든 제 삶자국하고 생각자국을 기꺼이 수첩에 적습니다.” 2006.12.11.


수첩 3

“여태 쓴 수첩만 해도 엄청 많겠지요?” “그렇겠지요? 세 본 적은 없는데, 그동안 쓴 수첩만으로도 책꽂이를 빼곡하게 채울 만큼 됩니다.” “그렇게 수첩을 많이 쓰는데, 글을 쓸 적에 다 활용하시나요?” “아니요. 저는 글만 쓰지 않고 살림도 하니까요,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고 이것저것 하노라면, 정작 수첩에 적어 놓고도 못 살리기 일쑤예요. 아마, 수첩에 적는 백 가지 가운데 하나를 살려서 쓴다면 많이 살리는 셈입니다.” “수첩에 적고도 못 살리는데 아깝지 않아요?” “오늘은 집안일이나 아이들하고 어우러지는 살림을 하니까 수첩을 살리지 못할 테지만요, 나중에 아이들이 스스로 씩씩하게 서는 때에는 예전에 제가 쓴 수첩을 살릴 틈이 생기지 않을까요? 또, 제가 쓴 수첩을 제가 살리지 못해도, 제가 이렇게 수첩을 써 놓았으니 우리 아이들이든 다른 분들이든 얼마든지 이 수첩을 재미나거나 알뜰하게 살려서 쓸 만하지 싶습니다. 저는 저 혼자 좋거나 즐겁자고 수첩을 쓰지 않아요. 사람 하나 살아가는 길이 어떤 발자국인가를 그저 차분히 옮겨 볼 뿐입니다.” 2010.3.7.


수첩 4

박근혜란 사람을 놓고 ‘수첩공주’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많다. 왜? 뭣하러 비아냥거리지? ‘수첩공주’란 이름을 참으로 얄딱구리하게 바라보면서 비아냥거리고 손가락질을 하는데, 나라지기 노릇을 하려는 이라면 마땅히 ‘수첩순이’나 ‘수첩돌이’가 될 노릇이다. 곁에 있는 심부름꾼도 ‘수첩심부름’을 알뜰히 할 노릇이고. 그이가 잘못한 일은 잘못일 테지만, 수첩을 꼬박꼬박 챙기며 다녔다고 한다면, 이는 곰곰이 생각하면서 배울 노릇이라고 느낀다. 2014.6.3.


수첩 5

나는 수첩을 여러 가지 챙긴다. 처음에는 주머니에 수첩을 넣었으나, 걸어다니다가 그만 수첩이 흘러나와서 잃은 뒤로는 목걸이로 꿰어 다니곤 했다. 목걸이 수첩은 사진을 찍을 적마다 걸리적거려서 다시 어깨짐에 넣기로 했다. 어깨짐에 책이며 수첩이며 연필이며 잔뜩 넣으니 어깨짐 하나가 너무 무겁더라. 정작 수첩을 꺼낼 적마다 뒤죽박죽이 되었다. 이리하여 수첩만 넣는 앞짐을 따로 어깨에 가로지르기로 했다. 내가 쓰는 수첩을 살피면, 먼저 온갖 생각을 갈무리하는 수첩이 하나. 말을 새롭게 살리거나 짓는 이야기를 다루는 수첩이 하나. 말을 새롭게 짓는 틀을 짜는 수첩이 하나. 삶노래, 이른바 시를 적는 수첩이 하나. 아이들이 조잘조잘 터뜨리는 새로운 말하고 이야기를 적는 수첩이 하나. 이밖에 수첩 하나를 다 쓰면 곧바로 꺼낼 수 있도록 빈 수첩을 챙긴다. 연필은 앞짐이며 등짐이며 몇 자루씩 둔다. 책상맡에는 연필을 백 자루 넘게 올려놓고 쓴다. 그때그때 연필을 깎기보다는 이 연필 저 연필 돌려서 쓰다가 어느 연필을 집어도 뭉툭하구나 싶으면 한꺼번에 몰아서 칼로 깎는다. 수첩 하나는 내 곁에 있는 또 다른 생각주머니이자 생각샘이라고 여긴다. 2017.12.10.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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