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7

학과 후배나 동아리 후배를 데리고 헌책집에 가면, 후배들은 헌책집에서 단돈 500원짜리 손바닥책이나 단돈 1000원짜리 인문책 하나조차 못 산다. “야, 이 책 좋아 보인다며. 그런데 1000원이 없어서 책을 못 사니?” “아니, 그게 아니라 …….” 후배들이 읽어 보기를 바라면서 5000원어치 헌책, 거의 열 권에 이르는 책덩이를 안겨 준다. 1998.5.20.


책 8

책값이 비싸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살림을 알뜰히 꾸리는 사람을 못 본다. 책값 오천 원이나 만 원조차 못 쓰는 사람이 밥값 몇 만 원이나 술값 십만 원은 잘도 쓴다. “한 끼쯤 굶어도 되니, 그 돈으로 책을 사면 어떨까요?”라든지 “술은 안 마셔도 되니, 그 돈으로 값진 책을 장만하면 어떨까요?” 하고 물으면 “어떻게 밥을 한 끼 굶니! 책을 안 보지!” 하고 대꾸들 한다. 누가? 출판사 편집부 일꾼이, 출판사 사장이, 작가들이, 기자들이 ……. 2000.4.8.


책 9

이오덕 어른이 얼마나 갖가지 책을 읽고 살피며 배웠는가 하고 돌아본다. 가리는 책이 없이 골고루 읽으셨다. 한국책이 없으면 일본책을 챙겨 가면서 읽으셨네. 배움길이란 이렇네. 모두 열어 놓고서 배울 줄 아는 품이어야 하네. 배웠기에 다시 배우고, 배우기에 더 배우며, 배우는 만큼 새로 배우려 하네. 그렇다고 책으로만 배울 수 있지 않다. 어디에서나 마음을 제대로 열고서 모두 가로지를 수 있도록 배우는 길이다. 이오덕 어른이 말한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이란 ‘삶을 가꾸는 배움길’이란 뜻이라고 배운다. 2004.1.1.


책 10

내가 이날 이때까지 짊어지며 살아온 책덩이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지난 2006년 한 해는 충주하고 서울 사이를 이레마다 자전거로 오가면서 서울에서 책을 200권씩 자전거수레에 잔뜩 싣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이제 앞길이 어렴풋이 보인다.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 책지기 아주머니가 인천이란 고장에서 배다리라는 터가 ‘사람이 숲이 되어 살아가는 숨결이 빛나는 터’가 되도록 한손을 거들어 주기를, 아니 나 스스로 무언가 하나 해보기를 바라는 목소리를 듣고 다짐을 한다. 그래, 도서관을 하자, 내가 읽고 갈무리한 이 책을 ‘공공도서관’이 아닌 ‘트인책터’로 가꾸어, 숲을 만지는 책을 새롭게 느끼고 익히는 보금자리를 꾸며 보자. 이름은 도서관일 테지만, 책이 책다운 모습이 무엇인가를 넌지시 이야기하는 잔치판을 벌여 보자. 2007.2.7.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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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4

외대 앞 한겨레신문 이문·휘경지국 신문배달원으로 일한 지 한 달. 형들하고 함께 먹고자는 이 작은 지하방에 내 책이 벌써 이백 권 넘게 귀퉁이에 탑으로 쌓인다. 지국장님이 한마디. “야, 공부하려고 책을 사서 읽는 건 좋은데, 우리 잘 자리가 자꾸 좁아진다. 어떡할까? 우리가 넓은 곳으로 이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너더러 책을 그만 사라고는 못 하겠고.” 1995.5.25.


책 5

“학생처럼 책을 사랑하는 대학생이 열 사람쯤만 손님으로 와도 우리 책방이 문을 닫지 않을 텐데. 그래도 문닫기 전에 학생 같은 사람을 만나니, 이제 이 헌책방을 접기로 했지만 후회가 되지는 않네. 내가 마음으로 선물해 주고 싶어 그러니까, 돈은 걱정하지 말고 여기에서 가져가고 싶은 책은 다 가져가.” 우물쭈물 아무 말을 할 수 없다. 나는 그저 이곳이 책이 알차게 있어 하루가 어떻게 흐르는 줄도 모르는 채 서서 책을 읽고, 읽은 책을 사갈 뿐인데. 한참 망설이다가 ‘게일 선교사가 쓴 한영자전 복사판’ 꾸러미를 집는다. “세 권? 달랑 세 권? 더 가져가. 아니 이 책방에 있는 책 다 가져가도 돼.” “아니에요. 다른 책은 제가 돈을 벌어서 사고 싶어요. 이 세 권만 해도 고마운걸요. 게다가 저는 신문사 지국 좁은 지하방에서 사느라 이 책을 다 가져가도 둘 데가 없어요.” 1995.10.1.


책 6

책이 활활 탄다. 중대장이 북북 찢어발긴 책이 아주 잘 탄다. 중대장은 《태백산맥》 같은 불온도서가 어떻게 내무반에 돌아다니느냐고, 그런 빨갱이 책은 모조리 불살라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중대장이 관물검사를 하면서 솎아내지 않은 책은 ‘섹스소설’이다. 중대장은 우리더러 ‘섹스소설’만 읽고 딸딸이를 치란다. 다른 모든 책은 정신건강에 해롭단다. 불구덩이 곁에서 책을 찢어발기던 중대장이 사라진다. 아직 찢지 않은 책 서른 권 즈음을 잿더미에 슬슬 묻는다. 책을 다 태웠다고 말한다. 잿더미에 묻은 책은 밤에 보초를 설 적에 빼내려 했는데, 중대장은 불구덩이로 돌아와서 작대기로 잿더미를 뒤지더니 안 찢고 안 태운 책을 찾아낸다. “이런 ○○○들이 다 있어!” 완전군장을 짊어지고서 19소초부터 22소초까지 철책을 따라 걷는다. 물 한 모금 얻어마시고서 23소초를 지나 32소초까지 걷는다. 다시 우리 소초까지 돌아오기까지 열여덟 시간. 《태백산맥》을 불태우지 않았다고 아주 신나게 피눈물이 난다. 그러나 이웃 소초를 오가면서 금강산 구경도 잘했고, 엄청난 골짜기도 실컷 구경했고, 새파란 하늘빛도 잔뜩 보았다. 1996.6.7.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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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1

책은 나무이다. 나무를 베어 얻은 종이로 책을 엮으니 책이란 나무이다. 책은 바람이다. 책이 된 나무는 바람을 먹고 사니까 책은 바람이다. 책은 물이다. 책이 된 나무는 빗물을 먹고 자라니까 책은 물이다. 책은 흙이다. 책이 된 나무는 흙에 뿌리를 뻗어 튼튼하게 서니까 책은 흙이다. 책은 해님이다. 책이 된 나무는 햇볕 햇살 햇빛을 듬뿍 받아들이면서 가지를 뻗고 잎을 내놓으니 책은 해님이다. 책은 숲이다. 책이 된 나무는 잔뜩 우거져 스스로 숲이 되니, 책은 숲이다. 1992.8.28.


책 2

책이 나를 부른다. ‘얘, 얘, 나 좀 보렴.’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어디에서 틀림없이 부르는 소리가 났는데, 둘레에 아무도 없다. ‘얘, 얘, 사람만 보려 하지 말고 나를 보렴.’ 사람 아닌 책이 부른 줄 알고 흠칫했으나 이내 책을 마주한다. ‘얘, 얘, 넌 뭐가 되고 싶니?’ ‘아, 뭐가 되고 싶냐면, 어른이지.’ ‘그래? 그렇구나. 그러면 넌 나를 보면서 어른이 되는 길을 스스로 배워 보렴.’ 1993.4.17.


책 3

학교(고등학교)에서 소지품검사를 한다. 내 짐꾸러미에 있던 책 다섯 권을 빼앗아 간다. 책 다섯 권이란 교과서나 참고서나 문제집이 아니었던 책. 어떤 책을 빼앗아 갔는고 하니, 윤동주 시집, 김소월 시집, 한용운 시집, 릴케 시집, 이육사 시집. 학교 정규수업이 끝나고 보충수업을 하기 앞서 교무실에 간다. “선생님, 제 책 돌려주십시오.” “왜? 공부하는 책이 아니니까 압수했다. 왜 돌려줘야 하냐?” “선생님, 저 책도 공부하는 책입니다. 삶을 공부하는 책이기도 하지만, 수능 시험하고 본고사 시험을 치르려면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시와 소설도 읽고 외워야 합니다.” “안 돼. 왜 교과서만으로 공부를 못 하냐?”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수능이나 본고사는 교과서 바깥에서 지문을 따서 문제를 낸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그런데 교과서만으로 입시 공부를 하라니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이 얘기를 옆에서 듣던 국어 교사 한 분이 보다 못했는지 “○ 선생님, 그 책들 돌려주시지요. 수능 국어시험 보자면 꼭 봐야 할 책들 같습니다.” 하고 거든다. 국어 교사가 거들어서 내 책을 돌려받았다. 1993.5.20.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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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1

어디서 살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길그림을 편다. 고속도로가 지나가지 않고, 골프장하고 핵발전소하고 화력발전소가 없으며, 기차도 지나가지 않는 곳이 있는가 하고 살핀다. 이러면서 군부대나 공장이 들어설 만하지 않은 데를 찾으니 한국에서 꼭 한 군데. 고흥이 있네. 2011.4.1.


고흥 2

이른바 위험시설이나 위해시설이 없다시피 한 고흥이다. 한국에 이런 시골이 있다니 놀랍다. 그런데 이 아름답고 깨끗한 고흥에 위험·위해가 딱 한 가지 있네. 군수하고 공무원. 이들은 고흥에 ‘우주선 발사기지’를 끌어들였다. 다른 어느 나라를 보아도 ‘우주선 발사기지’처럼 무시무시하고 아슬아슬한 곳은 붉은닥세리에 짓는다. 사람이 안 살고 마을이 없으며 숲하고도 머나먼 데에 짓는다. 왜 그러겠나 생각해야 하는데, 이런 시설을 고흥에 끌어들였으니 군수·공무원이 얼마나 생각이 없는가를 알 만하다. 더욱이 이 하나에 안 그치고 핵발전소를 끌어들이려 했고, 화력발전소도 끌어들이려 했으며, 폐기물발전소도 끌어들이려 했다. 태양광시설을 아름드리숲을 파헤쳐서 마구 때려지을 뿐 아니라, 바다에까지 이런 시설을 때려지으려고 애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석탄발전소 찌꺼기를 묻는 시설을 끌어들이려 하고, 경비행기 시험장을 끌어들이려고도 하며, 온갖 막삽질이 잇따른다. 이런 어이없는 짓이 잇따르지만 기자가 서울에서 취재를 오는 일도 없다. 2018.11.1.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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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 1
이력서를 처음 쓴다. 이력서란 이름도 처음이고 하나도 몰라 둘레에 물었다. 회사에 들어가려고 쓴다는 이력서를 보니 어느 학교를 마치고 무슨 자격증이 있느냐를 적네. 나는 대학교를 그만두었으니 고졸이고, 따로 딴 자격증이 없다. 글쓰기는 평타 800을 칠 줄 알아도 무슨 자격증을 거머쥐지 않았다. 이력서를 넣을 출판사에 전화해서 여쭌다. “아, 이력서요? 이력서는, 여태까지 무엇을 하며 살아왔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가를 적으면 돼요. 길이는 제한 없습니다. 길게 쓸수록 좋아요.” 이리하여 이제껏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생각이었는지, 군대에서 어떤 일을 치렀고, 대학교를 그만둔 뜻, 신문배달로 먹고살면서 배운 이야기, 책과 헌책집과 도서관이 얽힌 실타래를 비롯해서 마음껏 쓴다. 그런데 마땅한 종이가 없어서, 신문에 넣는 광고 뒷종이를 긁어모아서 썼다. 졸업장이나 자격증 이야기는 하나도 없는, 두툼한 이력서를 마무리짓는다. 1999.7.7.

이력서 2
흔히들 ‘이력’이란 ‘학업·직업·경험’이라 여기지만, 달리 바라보아야지 싶다. ‘배움·살림·꿈’으로 걸어온 길로 바라볼 노릇이라 느낀다. 더 따진다면 ‘이력서’란 이름부터 걷어치울 일이다. ‘삶길’이란 이름을 써야 어울리지 싶다. 삶길을 적는 글(서류)이라면 ‘삶길글·삶글’이 될 테지. 어느 학교를 마쳤다고 적는 이력서가 아닌, 무엇을 배워서 어떤 길을 걷고 싶은가를 적는 삶길글이 되어야지 싶다. 어느 곳에 들어가서 몇 해를 일했다고 적는 이력서가 아닌, 어떤 일을 하려고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무엇을 느끼고 알았는가를 적는 삶길글이 되어야지 싶다. 우리한테는 졸업장이나 자격증이 덧없다. 우리한테는 배움길하고 살림길이 뜻있다. 2003.6.4.

이력서 3
학교나 기관에 강의를 갈 적마다 나더라 ‘강사카드·이력서’를 같이 보내라고 한다. 아마 다른 분도 똑같을 텐데, 틀에 박힌 강사카드나 이력서에는 따로 써넣을 만한 말이 없다. 어느 대학교를 나왔는지 적으라는데, 대학교를 그만둔 내가 뭘 적어야 할까? 어느 대학교나 기관에서 강의를 해봤는지 적으라는데, 써넣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주어진 틀을 몽땅 버리고는, ‘어떤 책하고 사전을 그동안 쓰고 엮었’는가를 써넣는다. 여러 지자체 공문서를 손질해 준 이야기를 써넣는다. 2017.1.15.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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