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책

군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이튿날 찾아간 헌책집에서 《몽실 언니》란 동화책이 보여서 선 채로 책을 펼치다가 그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누가 볼세라 구석 깊은 곳에 숨어 더 눈물지으면서 읽다가 덮었다. 더 읽을 수 없다. 얼른 책값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와서 눈물바람으로 끝까지 읽었다. 난 여태 뭘 읽고 살았지? 스물 몇 해를 살며 책다운 책을 여태 하나도 못 읽었잖아. 게다가 동화책다운 동화책을 어릴 적에 하나도 못 읽었잖아. 그래, 그러면 오늘부터 동화책을 읽자. 스물네 살 어린이로서 동화책을 읽자. 1998.1.3.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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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람

‘우리말 소식지’하고 ‘헌책방 소식지’를 주마다 서너 가지씩 혼자 엮어서 써내고, 이를 복사해서 돌리니, 둘레에서 놀란다. 어떻게 주마다 서너 가지 소식지를 혼자 다 쓸 수 있느냔다. 나는 외려 더 놀란다. 왜 그렇게 못 할까?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 못 한다고 여기니 끝내 못 할 뿐이지 않을까? 누가 나더러 소식지를 내라고 하지 않는다. 스스로 써야겠다고 여겨서 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쓴다기보다 마음에서 저절로 솟구쳐오른다. 그렇다고 솟구쳐오르는 모든 이야기를 써내지는 않는다. 글만 쓸 수 없다.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신문을 다 돌리면 지국 식구들 먹을 밥을 지어서 차리고, 신문 돌리며 땀으로 흥건히 젖은 옷을 빨래하고, 이웃 지국하고 주고받은 열 가지 아침신문을 샅샅이 읽으면서 신문글 오려모으기를 하고, 자전거 타고 헌책집에 가서 책을 읽는다. 낮에는 신문값 걷으러 다닌다. 저녁에는 대학교 셈틀칸으로 찾아가서 열 시에 문을 닫기 앞서까지 신나게 글을 쓴다. 놀랄 일이란 없다. 하루를 쪼갤 마음이 있으면 틈이 생긴다. 이렇게 스스로 지은 틈에 스스로 마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쓸거리가 차고 넘친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글로 옮기고 싶은 몇 가지를 고른다. 우리는 마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에 글을 못 쓸 뿐이다. 1998.3.2.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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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 단식

지율 스님이 백 날 넘게 밥굶기를 하면서 말없이 외쳤다. 도룡뇽 목소리를 들으라고, 도룡뇽 곁에 있는 냇물 노랫소리를 들으라고, 냇물 곁에 있는 돌멩이 말소리를 들으라고, 돌멩이 곁에 있는 멧새 얘깃소리를 들으라고, 멧새 곁에 있는 바람줄기 울음소리를 들으라고, 바람줄기 곁에 있는 나뭇잎 웃음소리를 들으라고, 나뭇잎 곁에 있는 모래알 꿈소리를 들으라고, 모래알 곁에서 발 담그며 노는 아이들 사랑소리를 들으라고. 이러면서 덧붙인다. 우리는 밥을 얼마나 먹어야 하느냐고. 2006.1.7.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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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칸

길손집에서 하룻밤 묵는다. 새벽에 일어나 무릎셈틀을 켠다. 누리그물을 이어 주는 상자에 적힌 비밀번호를 넣는데 도무지 안 된다. 길손집지기한테 여쭈려 하나 달게 주무셔서 깨우지 못한다. 한참 헤매다가 옆칸에 살며시 들어간다. 어제 길손집에 묵으면서 보니 손님이 든 칸이 없는 듯했다. 빈 옆칸에 적힌 비밀번호를 넣으니 누리그물로 들어갈 수 있다. 내가 묵은 칸에 적힌 비밀번호로는 안 되고 옆칸에 적힌 비밀번호로는 된다. 아리송하구나 싶으면서도 고맙다. 이쪽에 없으면 저쪽에 있는 대로 쓰면 되는 셈이네. 그렇잖은가. 이 길을 가려는데 삽질을 해서 막혔다면 저 길로 돌아가면 될 테지. 나는 길을 갈 뿐이다. 2019.2.26.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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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경상도 안동에서 오늘 하루도 두 끼니만 먹으면서 조용하게 살아가는 권정생 할아버지는 우리들한테 이야기한다. “동화 몇 편 썼다고, 그거 대단하다고 보면 안 돼요.” 하고. 이 말을 제대로 곰삭여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는지 모르겠다. 또 하나. 권정생 할아버지는 이녁을 찾아오는, 이른바 ‘(학교) 선생님’이나 ‘(큰 신문사) 기자’나 ‘(글깨나 쓴다는) 작가’들한테도 한 마디 한다. “나보고 건강하게 오래 살라고 하는 건, 죽으라는 이야기보다 더 나쁜 이야기기예요. 나 대신 아파 주면 좋겠어요.” 하고. 이 말 또한 얼마나 알아들을까? 아마 거의 알아듣지 못하리라. 그저 ‘늙은이가 이제 노망까지 들었나? 주책이야, 원!’ 하고 생각하는 분이 제법 많더라. ‘권 선생님이 너무 아프니, 이런 말까지 다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분도 퍽 많고. 권정생 할아버지는 ‘선생님·기자·작가’한테 두 가지 이야기를 대뜸 한단다. 이런 말씀을 하는 할아버지 곁에서 빙그레 웃으며 대꾸한다. “그러게요. 다들 참 너무 몰라요. 이 쉬운 얘기를 왜 알아들으려고 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알아듣기 싫어서 모르는 척하지는 않을까요?” 안동에서 권정생 할아버지를 뵙고서 무너미마을로 돌아온다.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하고 책을 갈무리하는 한밤에 문득 두 마디 이야기를 낱낱이 풀어서 적어 보자는 생각이 든다. 뒤엣말을 먼저 생각하겠다. “나 대신 아파 달라”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가? 이는 바로 “아픈 사람 마음이 되라”는 뜻이다. “아픈 사람처럼 작은 목숨, 작은 일도 고맙게 고이 여기며 낮은 목소리로 조촐하고 조용하게 살자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스스로 제발 아파 보라는 뜻이다. 스스로 모질게 아파 보지 않고서 섣불리 ‘오래 살라’는 말 좀 그만하라는 뜻이다. 생각해 보라. 아픈 채 오래 살면 기쁠까? 날마다 끔찍하게 아프면서 헉헉대는데, 이 삶을 오래오래 이르라고 하는 말이란, 아픈 사람이 듣기 좋은 말이 될까? 참 많은 사람들이 입에 얹는 “어린이 마음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가고, 어린이처럼 깨끗한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지만 이런 말을 입에 얹더라도 이 말뜻을 속속들이 짚지는 않는 듯하다. 왜냐하면 ‘어린이처럼 사는’ 사람이 아주 드무니까. 지식만으로 살아가는 길이 대단히 아찔한 줄 뻔히 아는 사람들조차 ‘지식이 아닌 경험’과 ‘지식이 아닌 마음과 생각’을 고이 여기지 않기 일쑤이다. 가난하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하고 ‘한마음 한몸’이 되지 않고서는 돕는 손길을 내밀 수 없다. 아니, 돕는 손길이 아니라 어깨동무하는 손길이 못 된다. 그저 불쌍해서 동전 몇 닢 던져 주는 사람은 잘난 멋에 딱하게 볼 뿐, 참으로 함께하는 손길이 아니다. 한결같이 몸과 마음 모두 아늑하고 폭신한 자리에 있으면서 입과 말로만 시끄럽게 ‘가난한 이를 돕자’는 소리만 떠들면 무엇하겠는가? ‘환경을 지키자’는 이야기를 목소리로만 외치지 말자. 알찬 환경책을 읽자고 추천하지 말자. 이런 말 하나 내세우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숲사람이 되어 살아가면 된다. 스스로 숲이 되어 살면 넉넉하다. 자가용을 장만해서 몰 생각보다는, 바람이 되어 훨훨 날아다닐 생각을 할 노릇이다. 고속도로를 더 놓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홀가분히 바람으로 날아다니면 넉넉한 줄 알 노릇이다. 더 빠른 길이 아닌, 다 같이 즐거운 길을 헤아릴 노릇이다. 자가용을 몬대서 나쁘지 않다. 이 하나를 알 노릇이다. 자가용 모는 즐거움처럼 버스나 기차를 타는 즐거움이 있고, 자전거를 달리거나 걷는 즐거움이 있으며, 텃밭을 일구는 즐거움이 있고, 숲길을 맨발로 거닐거나 드러누워 하늘바라기를 하는 즐거움이 있다. 이 뭇즐거움이 고루 어우어져야 참말로 즐거운 삶 아닐까? 앞엣말을 생각하자. “동화 몇 편 썼다고 대단히 보지 말라”는 이야기는 헛된 이름에 놀아나지 말라는 소리이다. 헛된 이름과 감투에 눈이 멀어서, ‘이름도 감투도 없는 낮고 여린 사람 목소리와 삶’을 놓치거나 쉬 지나치거나 얕보거나 깔보는 못된 버릇을 버리라는 소리이다. 이 땅에서 가장 알뜰하고 훌륭하며 사랑스러운 이야기는 바로 헛된 이름과 감투에 눈이 멀고 머리가 빈 사람들이 가장 깔보고 짓밟고 비웃는 ‘못 배우고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 삶자리에서 태어나곤 한다. 왜 그럴까? 왜 짓밟히거나 깔보이거나 얕잡히는 삶자리에서 참으로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이야기가 꽃으로 피어날까? 가만 보면 바로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숱한 글이 이렇다. 다만 누구나 권정생 할아버지처럼 글을 쓸 까닭은 없다. 어느 자리에 있든 제 손으로 살림을 짓는 따사롭고 넉넉한 마음으로 이 하루를 그대로 글로 옮기면 된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빛이 아닌, 어깨동무하면서 같이 앞길을 바라보는 눈썰미로 거듭나면 된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마음으로 넌지시 얘기한다. ‘여보게, 훌륭한 스승은 먼 데 있지도 않고 하늘나라에 있지도 않으며 바로 그대돌 가까이에, 옆에 있는데, 왜 못 보고들 그리 사는가? 그대가 바로 그대 스승인 줄 아는가, 모르는가?’ 하고. 2005.6.7.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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