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지만 파랗디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올여름 파랗던 하늘을 떠올린다. 아침에 마당에 보니 물이 얼었다. 물이 어는 이런 날 빨래는 한낮에 널어야 한다. 겨울날 골목빨래를 올해에는 사진으로 얼마나 담을 수 있으려나.

- 2010.8.22. 인천 동구 금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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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잠과 글쓰기


 새벽 네 시에는 일어나야 하루를 알뜰히 열어 알차게 보낸다고 느낀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면 더욱 알뜰살뜰 보낼 수 있을 텐데, 세 시나 두 시부터 일어나 하루를 열면 몸이 좀 찌뿌둥하다. 다섯 시에 일어나면 빠듯하게 몰아쳐야 하니까 적잖이 어수선하거나 벅차다. 새벽 다섯 시를 넘겨 자리에서 일어나면 나로서는 늦잠이다. 나한테는 새벽 네 시부터 하루를 열며 글쓰기를 하는 삶이 가장 알맞고 좋다.

 그런데 아이 하나를 키우는 삶으로서 이맘때가 가장 좋은데, 아이가 둘이라면 어떠하려나. 스물일곱 달째 함께 살아가는 아이한테 동생이 생겨 둘째를 첫째와 마찬가지로 돌보고 보듬으며 복닥이며 지내는 새로운 삶을 맞이한다면 내 하루는 언제 열어야 좋으려나. 그때에도 새벽 네 시에 느긋하게 홀로 글쓰기를 하며 마음닦이를 할 수 있는가. 아이 하나와 함께 살아가며 빨래감이 비로소 조금 주는구나 하고 느끼는데 다시금 기저귀 빨래 왕창 나오는 아이키우기를 해야 한다고 할 때, 내 글쓰기이며 사진찍기이며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 아이 두셋씩 키우면서도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바깥일을 해내는 적잖은 분들을 보면 몹시 놀랍다. 이분들은 언제 책을 읽고 언제 글을 쓰며 언제 밥을 먹으려나. 밥을 입으로 먹을까 코로 먹을까 귀로 먹을까.

 겨울 새벽 하얗게 밝는 모습을 창밖으로 바라본다. 시골집에서는 새벽이 하얗게 밝아 오더라도 시끄럽지 않다. 도시 골목집에서조차 새벽이 다가올 무렵 얼마나 시끌벅적한지 모른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골목집에 깃든 사람들이 새벽과 아침을 조용하면서 느긋하게 맞이하고파 하는 줄 모르는 듯하다. 큰길에서면 모르되 왜 골목길에서조차 자동차를 그리 거칠고 시끄럽게 몰까. 오토바이를 타는 이들은 왜 골목길에서도 그리 떠들썩하게 굴면서 지나갈까.

 이제 나무마다 가랑잎을 내고 멧자락에 먹을거리가 떨어질 즈음이 되니, 작은 멧새들이 새벽녘부터 우리 살림집 둘레로 찾아든다. 밤에 잠을 자다 보면 우리 살림집 문에 콩콩 쿵쿵 뭔가 부딪는 소리가 난다. 다람쥐이거나 족제비이거나 오소리이거나 너구리일 테지. 어니스트 톰슨 시튼 님은 밀가루를 일부러 문간에 뿌려 놓고 짐승 발자국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단다. 시튼 님이 살던 예전처럼 큰곰이나 늑대나 여우가 이 나라 멧자락에 보금자리를 틀지는 못한다. 고작 몇 가지 멧짐승밖에 없다.

 지난주에 멧자락을 타며 버섯을 딸 때에 고라니 똥을 보았다. 이 나라에서는 멧돼지도 그리 많지 않고 노루나 사슴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다. 멧돼지 때문에 밭농사 망친다는 곳이 제법 있는데, 지난날을 헤아린다면 요즈음 멧돼지는 멧돼지라고조차 하기 힘들다. 멧돼지가 멧자락에서 먹이를 찾을 수 없도록 고속철도를 뚫고 고속도로를 내며 공장을 지으니까 어쩔 수 없잖은가.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분들은 이 나라 정부나 건설회사한테 땅을 팔면 안 된다. 농사짓던 땅이나 너그러운 멧자락이 기찻길이나 찻길이나 공장터나 아파트가 되지 못하도록 막아 주어야 한다. 이렇게 막아내지 못하니까 멧돼지가 밭을 파헤쳐 먹이를 얻으려 한다.

 새벽 네 시쯤 하루를 열며 글을 쓰고 있자면, 새소리는 새벽 다섯 시 오십 분이나 여섯 시 십 분 사이에 맨 처음으로 들린다. 여섯 시 반부터 새소리가 꽤 많이 들린다. 겨울을 코앞에 두니까 이즈음 들리는데, 이제 이곳 멧기슭 살림집에서 겨울을 난 다음 새봄을 맞이하고 새여름을 즐길 수 있다면, 그때에는 멧새가 봄이랑 여름에는 언제부터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새 하루를 여는지 남달리 알 수 있겠지. 멧새 모이통을 하나 마련해 볼까. (4343.10.2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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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운 바람이 불 때에 따뜻하던 나날을 떠올린다고 하던가. 여러 날 퍽 길게 따뜻하다 싶더니 바야흐로 칼바람이 한 번 몰아치니까, 한창 무덥던 여름날 골목 모습을 생각하고 싶다. 골목동네를 온통 꽃나라로 일구던 아줌마들 고운 손길을 헤아려 본다.

 - 2010.6.13. 인천 동구 금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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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 보듬는 마음


 지난 열흘 동안 애 아빠는 다른 어디로 혼자 볼일 보러 먼길을 나서지 않습니다. 아이랑 옆지기랑 꼭 붙어서 지냅니다. 옆지기는 몸이 많이 아프고 힘들기에 아이랑 노는 몫은 으레 아빠가 맡습니다. 아빠한테는 할 일이 멧더미 같으나 멧더미 같은 일거리는 흔히 뒤로 젖혀 놓습니다. 다만, 날마다 쓸 글은 새벽 서너 시에 일어나 아이가 잠이 깰 무렵까지 신나게 써댑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단하지만 고단하다는 티를 되도록 안 내려고 용을 쓰면서 아이랑 놉니다. 이러면서 이렇게 잠도 안 자는 아이랑 하루 내내 부대끼자면 얼마나 힘이 많이 드는가를 새삼스레 깨닫고, 옳게 ‘아이를 맡아 가르치는 이’들이 얼마나 힘겨운 노릇이며 이들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뼛속 깊이 헤아립니다.

 아이 아빠는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 먼저 자리에 드러눕습니다. 아이를 부릅니다. 그림책을 하나 꺼냅니다. 하나 더 꺼내고 또 하나 더 꺼냅니다. 드러누워서 그림책을 읽습니다. 아이도 함께 보자고 부릅니다. 아이가 와서 “누워! 누워?” 하면서 엉덩이를 들이밉니다. 그림책은 배에 얹고 아이를 두 손으로 안아 얌전히 눕힙니다. 팔베개를 할까 말까 하다가 아기 베개에 머리를 놓습니다. 그림책을 듭니다. 여느 때라면 누워서 책을 든다고 팔이 아플 까닭이 없지만, 아침부터 갖은 집안일을 하면서 아이랑 놀다 보면 누구나 팔이 저립니다. 그래도 꾹 참고 그림책을 넘깁니다. 새로운 그림책을 보고도 싶지만, 아주 재미나다고 느끼는 그림책만 보고 또 보고 다시 봅니다. 팔이 저리고 졸리며 고단할 때에도 언제나 새롭게 보고 즐길 만한 아주 훌륭하다 싶은 그림책이 아니면 아이를 재우면서 읽힐 수 없습니다. 그림책은 지식책이 아니에요. 그림책이란 삶책이요 사랑책입니다.

 세 권을 내리 읽으니 참말로 팔이 후들후들. 아이보고 이제 “벼리도 코 자야지. 토끼도 코 자고 고양이도 코 자는데, 코 자자.” 하고 말합니다. “토끼 코 자? 고양이 코 자?” 하면서 도무지 곱게 잠들어 줄 낌새가 아닙니다. “응, 아빠도 코 잘게. 드르렁! 드르렁!” 일부러 코고는 소리를 내다가 실눈을 뜹니다. 아이는 잘 생각을 않으며 조그마한 손으로 살며시 아빠 얼굴을 쓰다듬습니다. 아빠가 가여워 보였을까요. 아빠가 힘들어 보였을까요. 아니면 아빠를 사랑해 주려는 마음일까요. 엄마나 아빠가 저를 그렇게 살며시 쓰다듬어 주곤 하니까, 이런 손길을 떠올리며 아빠한테 돌려주는 셈일까요.

 부드러이 보듬는 살결이 얼마나 고마우며 사랑스러운가를 살 떨리도록 느낍니다. 부드러이 보듬는 살결이란, 나도 좋고 당신도 좋습니다. 부드러이 보듬는 글이란, 나도 좋고 당신도 좋겠지요. 인문책이란 지식책이 아니랍니다. 인문책이란 사랑책이며 삶책입니다.

 지식을 주워담아서는 그림책이든 인문책이든 될 수 없으나, 책조차 되지 못합니다. 지식으로 꽉꽉 들어찬 낱말을 엮어 지식을 꽃피우는 놀라운 얼거리를 보여준다고 해서 그림책이나 인문책이 될 턱이 없어요. 이런 책은 모두 부질없는 자랑책이자 돈책이 되고 맙니다. 참으로 책다운 책이고자 한다면 눈물책이거나 웃음책이어야 합니다. 땀방울책만으로는 책이 되지 못합니다. 차근차근 살림책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살림책이 되려면 땀방울은 밑바탕으로 깔아 놓으니 땀방울책만으로는 모자랍니다. 햇살책 달빛책 별빛책 구름책 하늘책 흙책 배추책 보리책 바람책 냇물책 바다책 멧새책 무지개책 들이 고루고루 어우러지면서 바야흐로 살림책이 되고, 이 살림책 가운데 그림책이든 사진책이든 인문책이든 가지를 칩니다. (4343.10.2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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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밥 하는 마음


 내 어머니를 뵈러 찾아가든, 옆지기 어머님을 뵈러 찾아가든, 언제나 밥 대접을 받습니다. 우리가 두 어머니한테 밥 대접을 해 드리고 싶으나 좀처럼 이런 자리를 마련하기 힘듭니다.

 우리 딸아이가 무럭무럭 자란 뒤를 헤아려 봅니다. 우리 딸아이가 스물이 되고 서른이 된다면 나와 옆지기는 쉰을 넘고 예순을 넘겠지요. 이때에 딸아이가 밥을 차려 주겠다 할 때에 나나 옆지기는 어떻게 마주할까 궁금합니다. 가만히 앉아 넙죽 받아먹기만 하려나요. 아니면,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아이한테 밥을 차려 줄까요. 두 할머니가 앞으로 스무 해나 서른 해 뒤까지 튼튼히 살아가신다 하면 어떻게 하실는지 궁금합니다. 나이를 많이 자셨으니 조용히 밥상을 받으실는지, 나이가 많으신데에도 어찌 귀여운 손녀한테 밥상을 받느냐며 당신이 차리실는지요.

 두 어머니는 두 아이한테 늘 새로 한 밥을 차리고 새로 한 반찬을 내놓습니다. 해 놓은 밥이건 식은 밥이건 도무지 내놓지 않습니다. 먹던 반찬 또한 되도록 내놓지 않습니다. 그냥 손쉽게 주셔도 되건만, 또는 우리가 알아서 차리면 되는데, 두 어머니는 당신 몸을 움직이고 당신 손을 놀립니다.

 아침마다 아이가 먹을 새밥을 합니다. 아침에 몸이 몹시 고단하여 새밥을 못한다면 낮이나 저녁에 새밥을 합니다. 하루에 한 번만 새밥을 합니다. 두 번 새밥을 하고 싶으나 아이가 아직 밥을 조금만 먹기에 밥을 두 번 하기 힘듭니다. 나중에 씩씩하게 커서 밥을 꽤 먹는다면, 아이랑 아빠가 먹을 밥을 하루에 두 번 할 날을 맞이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여느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이 되면 아이가 잘 안 먹어 밥이 조금 남기 일쑤입니다. 이 밥은 고스란히 이듬날로 넘어갑니다. 아이가 배고프면 먹으라고 밥상에 이 밥을 그대로 놓습니다. 이듬날이 됩니다. 새밥을 합니다. 새밥 냄새가 구수합니다(아이한테도 구수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구수하다고 느껴 주기를 빌지만 참말 모를 일입니다). 아이 밥그릇에 있던 헌밥은 아빠 밥그릇으로 옮깁니다. 아이 밥그릇은 깨끗이 씻어 물기를 닦은 다음 새밥을 담습니다. 이러면서 떠올립니다. 아하, 두 어머니가 당신 두 아이한테 새밥을 굳이 차리는 마음이란 내가 내 아이한테 노상 새밥을 해서 가장 먼저 떠서 주는 마음이랑 똑같다고. 책을 새로 써낼 때 서양사람은 으레 당신 아이라든지 옆지기라든지 어머니한테 바친다는 말을 거의 빠짐없이 적어 놓는데, 이 마음도 새밥 하는 마음이랑 고스란히 이어지겠다고. (4343.10.25.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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