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분의 일 1
타카토시 나카무라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549



우리가 함께 하면서 즐거운 하루

― 십일분의일 (1/11) 1

 나카무라 타카토시 글·그림

 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3.9.25. 4800원



  한집을 이루는 사람은 혼자일 수 있고 여럿일 수 있습니다. 한집에 한 사람만 있더라도, 한마을을 이루자면 ‘여러 한집’이 모여야 합니다. 그러니, 한마을을 이루려면 여러 사람이 골고루 어우러져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도 있고 저러한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한별을 이루는 이 지구에는 여러 나라와 겨레가 있습니다. 같은 나라이면서 여러 가지 말을 쓰기도 하고, 여러 겨레가 모인 나라에서 한 가지 말을 쓰기도 합니다. 삶과 말이 같을 적에는 겨레요, 삶과 말이 다르더라도 한마을을 슬기롭게 이루려 하면 나라입니다.



“축구는 이제, 취미 삼아 할 거야.” “하지만 너만큼 실력 좋은 사람이 축구를 안 하는 건 아까운데.” “국가대표가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긴 한데, 이미 결심했어.” (18쪽)

“난 축구를 계속할 수 있었어. 그건, 축구가,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야.” (32쪽)



  혼자서 무대에 오르는 운동경기가 있고, 여럿이 무대에서 뛰는 운동경기가 있습니다. 혼자서 무대에 오른다 하더라도 이 한 사람을 돕거나 돌보는 사람은 여럿입니다. 여럿이 무대에서 뛰는 운동경기라면 그야말로 여러 사람이 한마음이 되어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나카무라 타카토시 님이 빚은 만화책 《십일분의일(1/11)》(학산문화사,2013) 첫째 권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만화책은 ‘축구’라는 운동경기를 놓고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혼자서 잘 한다고 잘 할 수 있는 운동경기가 아닌, 여럿이 함께 도우면서 즐겁게 할 수 있는 운동경기를 보여줍니다. 한두 사람이 솜씨를 뽐낼 때에 놀라운 성적을 거둘는지 모르나, 모든 사람이 한몸과 한마음이 되어 움직일 적에 비로소 ‘이 운동경기를 하는 보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나도 비슷한 처지였던지라 젊었을 땐 둘이서 정말 고생했어. 아빠는 ‘호강시켜 주지 못 해 미안하다’고 늘 내게 말했지. 그렇게 아빠는, 대학에 가지 않은 것, 고교 시절 달리기만 했던 걸 내내 후회했어. 그래서 최소한 내 아이들에게만은 나 같은 고생은 시키고 싶지 않다, 그게 아빠가 서클 따위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야.” (79∼80쪽)



  우리가 함께 하면서 즐거운 하루입니다. 우리가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빙그레 웃는 하루입니다. 우리가 같이 노래하면서 어깨동무하는 하루입니다.


  네 힘이 모자라면 내가 힘을 쓰면 됩니다. 내 힘이 모자라면 네가 힘을 쓰면 돼요. 둘 다 힘이 모자라면 이웃이나 동무를 부릅니다. 둘 다 힘이 넘치면 이웃이나 동무를 도우러 가요.


  물이 흐르듯이 삶이 흐릅니다. 물결처럼 기쁜 노래를 부르면서 삶을 가꿉니다. 물처럼 맑은 눈망울로 바라봅니다. 온누리를 적시는 빗물처럼 서로서로 마음을 촉촉히 적시는 고운 숨결이 됩니다.



“골도 어시스트도 아니야. 얼핏, 이 달리기는 그저 쓸데없는 짓으로 보일지 몰라. 하지만, 그렇게, 쓸데없을지도 모르는 걸 온힘을 다해 해야, 비로소 재미있는 축구로 이어지는 거야.” (87∼88쪽)

‘늘 혼자서 카메라에 빠져 있던 그녀를, 반 아이들은 괴짜 취급했지만, 그런 주변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 왠지 무척이나 상쾌해 보였다.’ (117쪽)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자, 그렇게, 새로운 결심을 가슴에 품고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무렵, 내 몸은 변하기 시작했다.’ (122쪽)



  만화책 《십일분의일(1/11)》이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새롭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품을 때에 비로소 새롭게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스스로 새롭지 않겠다는 마음이 될 때에 참말 새로움이 하나도 없는 하루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보스럽게 산다면 그저 바보일 테지요. 그러나, 바보스럽게 산다고 해서 나쁘지 않습니다. 바보스러움을 온몸으로 겪을 뿐입니다. 슬기롭게 살 적에는 슬기로운 빛이 널리 퍼집니다. 나부터 슬기로우면서 둘레에 밝은 웃음을 베풀고, 내 둘레에서 슬기로우면서 나한테까지 밝은 웃음이 퍼집니다.


  조금 늦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조금 일찍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일찌감치 바보스레 살다가 뒤늦게 바보스러움을 떨칠 수 있어요. 차근차근 한길을 걸으면서 바보스러움을 씻은 뒤에, 빙그레 웃음꽃을 피울 수 있어요.



“결국 판단은, 네 몫이야. 네가 가고 싶은 길을 선택해라.” (81쪽)

“진심으로 변하려 한다면, 사람은 변할 수 있어요.” (152쪽)

‘지금, 이제야 겨우 딱 한 걸음 다가갔다. 그 시절 내가 그토록 꿈꿨던, 겉모습만이 아닌, 반짝반짝 빛나는 나 자신에게.’ (163쪽)



  내 길은 내가 걸어갑니다. 내 밥은 내가 먹습니다. 내 말은 내가 합니다. 내 노래는 내가 부릅니다. 내 웃음은 내가 짓습니다. 내 빨래는 내가 합니다. 참말 모두 내 몫을 나 스스로 즐겁게 맡습니다. 내 꿈은 내가 이루고, 내 사랑은 내가 길어올려요.


  너도 나도 얼마든지 반짝반짝 빛나는 숨결입니다. 나도 너도 언제나 고요히 피어나면서 눈부시게 일어서는 나무와 같습니다. 열한 사람이 함께 운동장에서 뛰는 축구처럼, 나는 열한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때로는 운동장에서 뛰지 못하고 뒷자리에 앉아서 지켜보는 사람일 수 있어요. 때로는 뒷자리에도 앉지 못하고 관중석에 앉아서 쳐다보는 사람일 수 있어요.


  어느 자리에 앉든 다 재미있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내 몫은 즐거이 맡을 수 있습니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달릴 수 있고, 물주전자를 떠올 수 있으며, 목청껏 기운을 북돋아 줄 수 있습니다. 서로 아끼는 마음일 적에는 언제 어디에서나 사랑스러운 벗님입니다. 4348.8.26.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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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마이어 : 나는 카메라다 비비안 마이어 시리즈
비비안 마이어 지음, 박여진 옮김 / 윌북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찾아 읽는 사진책 212



우리는 누구나 ‘이야기 도서관’이다

―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

 비비안 마이어 사진

 존 말루프 보관

 로라 립먼·마빈 하이퍼만 글

 하워드 그린버그 엮음

 박여진 옮김

 윌북 펴냄, 2015.3.30. 25000원



  요즈음 ‘사람책’이라는 말이 차츰 퍼집니다. ‘사람이 바로 책이다’라는 뜻으로 쓰는 ‘사람책’입니다. 종이로 빚어야만 ‘책’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오롯이 ‘책과 같다’는 뜻입니다.


  종이로 빚은 책을 내놓을 때에만 ‘작가’이지 않습니다. 연필을 손에 쥔 적이 없고, 교사나 교수나 강사가 되어 본 일이 없더라도, 아이들한테 삶을 이야기로 물려준 사람은 누구나 ‘작가’라고 할 만합니다. 온 삶으로 사랑을 아이와 이웃과 동무한테 고스란히 보여준 사람도 누구나 ‘작가’라고 할 만합니다.


  작품이란 무엇일까요? 예술이나 문화라는 이름이 붙을 때에만 작품일까요? 전시회를 하지 않거나 책을 내지 않더라도, 온몸이 고스란히 ‘작품’과 같아서, 호미질을 하는 손놀림이나 밥을 짓는 손놀림이나 바느질을 하는 손놀림이 한결같이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운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사진은 바로 ‘사람책’을 찍습니다. ‘사람이 바로 책이다’ 하고 느낄 만한 모습을 보면서, 사진기를 찰칵 눌러서 사진 한 장을 남깁니다. 사진에 담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면서 저마다 아름다운 ‘사람책’ 모습이라고 할 만합니다.




마이어의 사진 한 장 한 장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그 이야기는 보는 이들마다 달라진다 … 그녀가 찍은 사람들과 풍경은 누구라도 찍을 수 있다. 하지만 사진을 찍기 전에 먼저 보아야 한다. 마이어는 탁월한 시선과 완벽한 기술을 겸비한 예술가였다 (9쪽/로라 립먼)



  비비안 마이어 님이 찍은 사진으로 엮은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윌북,2015)를 읽습니다. 이 사진책은 비비안 마이어 님이 엮지도 않았고, 비비안 마이어 님이 뜻하지도 않았습니다. 젊은 날부터 늙어서 죽는 날까지 늘 사진기를 목걸이처럼 몸에 품고 살던 사람이 걸어온 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진책인데, 비비안 마이어 님이 ‘한뎃잠’도 자다가 ‘돈이 없어서 애먹’기도 하다가, 그만 이녁 사진과 책과 물건이 모두 경매로 넘어갔다고 해요.



부동산 중개업자인 존 말루프는 380달러에 30만 장에 달하는 네거티브 필름과 소지품들을 구매했다. 자연스럽게 그는 그녀의 삶이 남긴 무런들을 소유하게 되었다 … 실제로 마이어의 작품은 무엇일까? 생전에 마이어는 자신의 작품에 우선순위를 매기지 않았다. (40, 41쪽/마빈 하이퍼만)




  ‘부동산 중개업자’인 ‘존 말루프’라는 사람은 380달러에 30만 장에 이르는 필름과 온갖 물건을 손에 넣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죽음을 앞두고 이녁 사진과 책과 물건을 모두 빼앗겨야 한 비비안 마이어 님 손에는 ‘돈 몇 푼’이 흘러갔을까요? 아마 한푼조차 안 갔을 테지요. 경매에 넘겨졌다고 하니까, 코앞에서 이녁 모든 것이 갑자기 이슬처럼 사라지는 모습만 지켜보다가 눈을 감고 흙으로 돌아갔겠구나 싶습니다.


  다시금 생각합니다. 380달러에 필름 30만 장입니다. 이밖에 다른 것도 아주 많다고 하니까(자그마치 컨테이너 다섯 대 부피), 10달러에 필름 1만 장을 산 셈입니다. 마흔 해 넘도록 바지런히 찍은 사진을 단돈 몇 푼에 빼앗긴 비비안 마이어 님이라고 할 만합니다. 존 말루프 님은 인터넷경매로 ‘비비안 마이어 사진’을 팔려고 했다는데(팔았는지 안 팔았는지까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사진 한 장마다 값을 얼마쯤 붙여서 내놓았을까요? 이를테면, 오드리 햅번을 찍은 사진은 값을 얼마쯤 붙여서 내놓았을까요?



주의 깊게 사진을 들여다보고 사람과 공간을 관찰하는 일은 특별하고도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마이어를 알았던 사람들이 그녀를 이야기할 때 독특한 차림새나 걸음걸이도 자주 언급하지만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은 그녀의 목에 언제나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 아이들에게 음식이 식탁에 오르는 경로를 보여주기 위해 도축 조합에 데리고 가기도 했고, 자필 서명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으며, 동네 공원이나 해변에 소풍을 가거나, 민주당 전당 대회 기간에 열린 대학생들의 격렬한 시위 현장에도 데리고 갔다고 한다. (18, 20쪽/마빈 하이퍼만)




  내가 찍는 사진을 돌아봅니다. 나는 우리 집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을 적에 이 아이들한테서 밝게 피어나는 눈부신 한때를 즐겁게 아로새깁니다. 먼저 마음에 아로새기고, 그 다음에 사진으로 옮깁니다. 언제나 마음에 기쁘게 담은 뒤에 사진으로도 가볍게 옮깁니다.


  사랑으로 짓고 싶은 하루이기에, 사진기를 쥐는 마음도 사랑이 됩니다. 노래를 부르며 어깨동무하고 싶은 삶이기에, 사진기를 쥐는 눈빛도 노래처럼 흐릅니다.


  스스로 사랑일 때에 사랑스레 사진을 찍고, 스스로 노래일 때에 노래하며 사진을 찍습니다. 스스로 슬프기에 슬픈 빛이 어리는 사진을 찍으며, 스스로 아프기에 아픈 넋이 드러나는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책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에 실린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이 사진책에 실린 비비안 마이어 님 사진은 모두 ‘비비안 마이어 님 삶’입니다. 비비안 마이어 님이 어떤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든, 비비안 마이어 님한테는 사진기를 목걸이로 삼아서 어디이든 마음껏 누비고 다니는 삶이 바로 기쁨이요 노래요 사랑이었습니다.


  비비안 마이어 님이 낳지 않았으나 비비안 마이어 님이 돌보는 아이들을 이끌고 도축장에 가거나 전시장에 가거나 골목길을 다니는 동안에도 사진기는 늘 비비안 마이어 님 목에 걸렸다고 합니다. 마음으로 삶을 읽고, 손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사랑으로 삶을 누비고, 기쁨으로 사진을 빚습니다.




마이어가 열심히 모았던 것은 사진만이 아니다. 마이어는 세실 비튼부터 토마스 스트루스에 이르기까지 사진가에 관한 논문을 포함해 수천 권의 책들을 모았다. 뿐만 아니라 사진엽서, 유명인사의 사인이 든 사진, 야구 카드, 모조 보석, 정치 홍보용 배지, 우표, 라이터, 구둣주걱, 병따개 등도 수집했다 … 갱단 기사부터 케네디에 관련된 기사, 상담을 해 주는 디어 애비 칼럼, 현대 사진전 리뷰 같은 기사들을 발췌해 모았다. 그 분량이 파일 수백 권에 달했다. (22쪽/마빈 하이퍼만)



  우리는 누구나 ‘도서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책’이면서 ‘사람도서관’입니다. 둘레에 이야기로 삶과 사랑을 노래처럼 들려줄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저 온몸으로 삶과 사랑을 노래처럼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슬기로운 삶을 환하게 밝히듯이, 우리는 저마다 책이면서 도서관입니다.


  그리고, 비비안 마이어라고 하는 분은 이녁 두 손에 사진기를 쥐면서 ‘온몸과 사진으로 삶을 적바림하는 도서관’이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비비안 마이어 님이 빚은 사진을 두루 살펴보면, ‘사람이 살아가는 수많은 모습’이 드러나고, ‘사람으로서 이 땅에 태어나서 하는 일과 놀이’가 나타나며, ‘사람이 사랑과 꿈으로 짓는 이야기’가 애틋하게 흐릅니다.




대다수 사진가들이 안전하게 최상의 사진을 확보하려고 같은 대상을 다양한 구도로 여러 장 찍는 데 반해 마이어는 관심이 있고 눈에 들어온 피사체를 단 한 장만 찍었다 … 그녀가 찍은 도시 풍경에서 가장 강하게 드러난 것은, 사람들의 의식 수준을 높이겠다거나 맹목적으로 숭배하게 만들겠다거나 변화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삶이란 무엇이며 우리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계속 직면하고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 그녀 자신의 욕구였다. (26, 30쪽/마빈 하이퍼만)



  아마추어나 프로를 따로 나눌 까닭이 없습니다. 역사책에 이름을 남겨야 비로소 ‘작가’나 ‘사진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진이라고 하는 삶은 몇몇 사진가로 뭉뚱그릴 수 있지 않습니다. 그림이나 노래나 글도 이와 같아요. 몇몇 뛰어나다거나 놀랍다고 하는 화가나 가수나 시인 같은 사람들로 뭉뚱그릴 수는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진가입니다. 노래를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수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시인이요 소설가입니다. 우리는 모두 작가입니다. ‘작가’, 한국말로 쉽게 풀자면, 우리는 모두 “짓는 사람”입니다. 삶을 짓고 사랑을 지어서 이 “삶 사랑”을 이야기로 새롭게 짓는 사람입니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사진을 찍을 적에 ‘같은 모습’을 굳이 여러 눈길로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일부러 여러 눈길로 찍으며 놀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꼭 한 장만 찍어도 이야기꽃이 피어나니, 애써 여러 눈길로 찍지 않아도 됩니다. 둘레를 휘 살피면 사진으로 담을 이야기가 흘러넘칩니다. 한곳에 고일 겨를이 없습니다. 나비처럼 춤추는 몸짓으로 이곳저곳 사뿐사뿐 즐겁게 웃으며 돌아다니면서 사진꽃이 핍니다.


  삶꽃을 피우듯이 사진꽃을 피우고, 사진꽃을 피우기에 사랑꽃이 피며, 사랑꽃은 이내 이야기꽃으로 거듭납니다.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은 어느새 사람꽃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사진책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는 아주 재미있습니다.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말없이 들려주거든요. 사진이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조용히 알려주거든요. 그러면, 사람은 무엇일까요? 사진책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에 실린 숱한 사진을 빌어서 말하자면, 사람은 노래이고 춤이고 빛이고 고요이고 웃음이고 눈물이고 사랑이다가, 이 모두를 아우르는 이야기 한마당입니다. 4348.8.26.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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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한테 빗자루로 맞은 날
박일환 지음, 오윤화 그림 / 창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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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5



어머니도 아직 사랑을 잘 모르나 봐

― 엄마한테 빗자루로 맞은 날

 박일환 글

 오윤화 그림

 창비 펴냄, 2013.12.16. 8500원



  아이가 늦도록 잠들려 하지 않으면 어버이는 고단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고단할까요? 아이가 안 자서 어버이인 내가 못 자거나 다른 일을 못 하기에 고단할까요? 아이가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않으면 아침에 늦게 일어나거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더라도 몸이 찌뿌둥할까 싶어서 고단할까요?


  아이를 꾸짖는 어버이는 ‘아이 아닌 어버이 스스로’를 꾸짖는 셈입니다. 아이를 나무라는 어버이는 ‘아이 아닌 어버이 스스로’를 나무라는 셈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꾸짖거나 나무라는 어버이는 ‘아이가 시무룩해 하거나 울’면, 이런 모습을 보면거 가슴이 미어집니다. 아이를 꾸짖거나 나무랄 일까지 아니었는데 괜한 짓을 한 줄 뒤늦게 알아채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이한테 한 말은 모두 어버이가 저 스스로한테 한 말이라 가슴에 날카롭게 꽂히고 말지요.


  이와 달리, 아이를 따사롭게 보듬으면서 아끼는 말은 아이한테뿐 아니라 어버이한테도 하는 말입니다. 아이한테 부드럽고 착하게 흐르는 말은 바로 어버이 스스로한테 부드럽고 착하게 흘러요. 따스하면서 살가이 부르는 자장노래는 아이한테도 곱게 스미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어버이 가슴에 한결 뚜렷하면서 곱게 감겨들기 마련입니다.



떨어진 손톱을 보며 / 빙긋 / 조각 웃음을 흘리는데 // 손톱 깎다 말고 뭐 해? / 엄마가 소리치는 바람에 / 얼른 손톱을 쓸어 모았다. (손톱)



  박일환 님이 빚은 동시집 《엄마한테 빗자루로 맞은 날》(창비,2013)을 읽습니다. 책이름부터 뭔가 ‘있어’ 보이는 동시집입니다. 엄마한테 빗자루로 맞았다니, 아팠을까요 서운했을까요 놀랐을까요 슬펐을까요 괴로웠을까요 미웠을까요, 아니면 사랑스러웠을까요. 아이 어머니는 왜 아이를 빗자루를 들어서 때렸을까요. 맞아서 아프라고 빗자루를 들었을까요, 아니면 맨손으로 손찌검을 하기 싫어서 빗자루를 들었을까요, 아니면 눈에 빗자루가 보여서 바로 집어서 성풀이를 하려 했을까요.


  어머니도 아직 사랑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아니, 어머니라고 해서 사랑을 잘 안다고 할 수 없다고 할 만합니다. ‘어머니가 되기 앞서’까지 초·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입시에 빠져들어 헤매다가 대학교를 마쳤고, 대학교를 마친 뒤 몇 해쯤 회사 일을 하다가 아기를 배어 회사를 그만둔 뒤 아기를 낳은 어머니가 많아요. 이렇게 살아온 어머니는 ‘사랑을 찬찬히 돌아볼 겨를’이 없기 마련입니다. 이는 아버지도 똑같아요. 참말 사랑을 잘 모르니 멋모르고 빗자루를 들어서 아이를 나무라거나 꾸짖고 맙니다.



달이 나에게 / 고운 달빛과 긴 그림자를 / 선물로 주었다. (달밤)


콩알처럼 동글동글한 / 콩새는 / 콩을 좋아해. (콩새)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을 선물합니다. 어버이는 사랑을 선물하려고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 사랑을 선물합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사랑을 선물하기에 아이도 어버이한테 사랑을 선물하지 않아요. 그럼 왜 아이는 어버이한테 사랑을 선물할까요?


  자,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 돈을 선물할까요? 아니지요. 아이는 어버이한테 밥을 선물할까요? 아니지요. 옷이나 집을 선물할까요? 아니에요. 아이는 어버이한테 자동차나 자격증이나 성적표 따위를 선물하지 않아요. 아이는 어버이한테 케익이나 떡도 선물하지 않아요. 두 살 아기가 밥을 지을 수도 없지만, 뭘 돈으로 장만해서 선물할 수도 없습니다.


  온누리 모든 아이는 어버이한테 오직 사랑을 선물합니다. 사랑받기에 사랑을 선물로 하지 않아요. 아이 숨결은 언제 어디에서나 모두 사랑뿐이라서, 늘 어버이한테 사랑을 선물합니다.



별만큼 작은 별꽃. / 별만큼 예쁜 별꽃. // 별은 밤하늘에 숨어서 빛나고 / 별꽃은 길섶에 숨어서 피지요. // 별은 고개를 들어야 보이고 / 별꽃은 고개를 숙여야 보이지요. (별꽃)



  사랑을 선물하면서 사랑을 받는 아이는 별꽃을 별처럼 알아봅니다. 학자가 별꽃이라는 이름을 붙였기에 ‘별꽃’이라 하지 않습니다. 아이 스스로 길바닥을 쳐다보고 풀밭을 바라보다가 문득 ‘와, 여기에 하얀 별이 조그맣게 내렸네!’ 하고 놀라면서 ‘별꽃’이라는 이름이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아이는 별꽃이 별꽃나물인지 아닌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그저 하얀 별이 낮에도 방긋방긋 웃는구나 싶어서 반갑습니다. 개미를 보려다가, 사마귀나 메뚜기를 보려다가, 나비나 잠자리를 잡으려다가, 아이는 문득 별꽃을 보고는 별을 그리면서 온마음이 새롭게 푸근합니다.



엄마 차 타고 가는데 / 갑자기 / 택시가 옆에서 끼어들자 / 엄마가 욕을 했다. / 나도 옆에서 / 한마디 거들었더니 / 엄마 얼굴이 굳어졌다. (엄마 얼굴이 빨개졌다)


아빠 차 타고 가다 / 깜박 잠이 들었는데 // 어느새 시골에 다 왔다며 / 빨리 내리란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건?)



  아이는 별꽃을 바라보면서 나비하고 노는데,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동차를 몹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동차를 모느라 아이를 쳐다볼 겨를이 없습니다. 자동차를 몰면서 옆이나 뒤를 돌아볼 사람은 없어요. 말이 안 되지요. 자동차를 싱싱 몰다가 옆을 보면 어찌 되겠어요? 큰일이 나지요.


  그렇다고 자가용을 모는 일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가용을 모는 어버이는 그만큼 아이 얼굴을 또렷이 쳐다볼 겨를이 없다는 뜻입니다. 자가용을 모느라 다른 자동차와 길알림판과 찻길 따위를 살피느라, 막상 아이가 어떤 눈빛이요 몸짓이며 마음인가를 살필 틈이 없다는 뜻입니다.


  박일환 님은 〈엄마 얼굴이 빨개졌다〉라든지 〈세상에서 가장 빠른 건?〉처럼 재미난 동시를 씁니다. 비록 자동차를 몰 적에 어버이는 아이하고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지 못하지만, 이런 삶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아요. 어머니는 얼굴이 벌개지고, 아버지는 아이가 잘 자도록 하면서 시골집까지 잘 왔구나 싶어 마음을 놓는 이야기를 찬찬히 잘 들려줍니다.



모기가 / 팔뚝을 물었다. // 빨갛게 / 솟아오른 자리에 // 할머니가 / 침을 발라 주셨다. // 모기 주둥이처럼 / 내 입이 / 삐죽 튀어나왔다. (모기 주둥이)



  〈모기 주동이〉 같은 동시도 재미있지요. 할머니를 몹시 사랑하고 좋아해서 ‘할머니 침이 묻은 밥’도 아무렇지 않게 먹을 아이가 있을 테고, 모기 물린 자리에 할머니가 침을 바르면 징그럽거나 싫다고 여길 아이가 있을 테지요. 이래서 좋고 저래서 나쁘지 않습니다. 아이들마다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것을 보면서 자라기 때문에, 그저 다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다만, 이럴 때에, 그러니까 아이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만날 적에, 어머니나 아버지도 곁에 있기를 바라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슬기롭게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시겠지만, 어머니나 아버지도 할머니 할아버지 곁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을 새삼스레 느끼면서 새롭게 받아들이고, 또 아이한테 살가운 징검다리 구실을 할 수 있으면 한결 아름다우리라 느낍니다. 이러한 삶이 되면, 동시도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날 만하겠지요.


  그나저나, “파란 고추는 익으면 / 빨간 고추가 되고 // 파란 사과도 익으면 / 빨간 사과가 되는데 // 파란 수박은 아무리 익어도 / 파란 수박인걸(엉큼한 수박).” 같은 이야기가 흐르는 동시는 좀 아쉽습니다. 풋고추나 풋능금은 ‘푸른 빛깔’입니다. 풀빛입니다. ‘파란 빛깔’이 아니지요. 더더구나 수박을 놓고 “파란 수박”이라고 하다니요.


  “새파란 보리싹”처럼 쓰기도 합니다만, 오늘날 아이들은 시골에서 거의 안 살 뿐 아니라, 시골일조차 제대로 모릅니다. 먼 옛날에 누구나 시골에서 나고 자라면서 시골일을 하던 때라면 “새파란 보리싹”이라 말해도 다 알아듣습니다만, 요즈음 도시 아이들을 헤아린다면, 또 도시에서 가게에서나 고추랑 능금이랑 수박을 볼 아이들을 헤아린다면, 고추도 능금도 수박도 ‘푸른’이라는 말을 붙여서 나타내야 올바릅니다. 4348.8.25.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동시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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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숟가락 8
오자와 마리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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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37



‘엄마도 이 집 아이라면’ 좋을 텐데

― 은빛 숟가락 8

 오자와 마리 글·그림

 삼양출판사 펴냄, 2015.6.2.



  아침에 두 아이를 데리고 마당 한쪽에서 능금씨를 심습니다. 마침 어제오늘 비가 와서 흙이 촉촉하게 젖었기에 손가락으로 땅을 쏘옥 눌러서 넉 톨을 심습니다. 능금씨에서 싹이 틀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모릅니다. 다만, 우리 집 마당 한쪽에서 씨앗에서 자라는 나무가 있기를 꿈꿉니다. 어린나무를 장만해서 키우는 나무도 사랑스럽고, 새가 눈 똥으로 자라는 나무도 사랑스러우며, 예전부터 이 시골집에서 자라는 나무도 사랑스럽습니다. 우리 집을 둘러싼 여러 사랑스러운 나무에 ‘씨앗 한 톨로 키운 나무’가 있으면 더욱 사랑스러우리라 생각해요.



“요 매화나무가 리츠 오빠 나무고, 요 단풍나무가 시라베 오빠 거, 가장 왼쪽에 있는 레몬나무가 내가 태어났을 때 심은 거야. 루카한테는 올리브가 어울린다고 엄마랑 얘기했거든.” “올리브가 뭐야?” “이 모종나무 이름.” (16∼17쪽)


‘문득 바라보니, 루카가 어리광부리고 싶어하는 것 같기에, 엄마랑 둘이 샌드위치처럼 양쪽에서 꼭 안아 줬다.’ (37∼38쪽)



  오자와 마리 님 만화책 《은빛 숟가락》(삼양출판사,2015) 여덟째 권을 읽습니다. 만화책 《은빛 숟가락》은 ‘집에서 사랑으로 지어서 먹는 밥’ 이야기를 다룹니다. 대단한 밥차림이라 하기 어려울 수 있고, 누구나 지어서 먹을 만한 밥차림이라 할 수 있는데, 한집 사람들이 저마다 손을 거들어 이것을 함께 하고 저것을 같이 하면서 짓는 밥차림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집 사람들이 누리는 한솥밥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맛집 이야기라든지, 요리 대회 이야기라든지, 요리 솜씨를 겨루는 이야기라든지, 술안주를 찾는 이야기가 만화로 꽤 많이 나오는데, 《은빛 숟가락》에서 다루는 ‘집밥’은 여러모로 사뭇 다릅니다. 밥 한 그릇이 마음을 달래는 이야기를 다루되, 온누리 모든 살림집에서 저마다 사랑을 담아서 짓는 밥 한 그릇에서 피어나는 이야기가 흐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다루어요.



‘처음엔 밥 먹기 전에 ‘잘 먹겠습니다’ 하는 거랑, 밥 먹고 나서 ‘잘 먹었습니다’ 인사하는 걸 까먹기도 했어. 나중에 배고파질 때를 위해 잔뜩 남겼다가 혼나기도 하고, 다음 식사가 언제가 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 많이 먹어서 배 아파지기도 했지만, 이제 괜찮아. 형네 집에서는 매일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밥 먹는 시간이 꼭 있거든.’ (22쪽)


‘엄마는 제대로 밥 먹고 있을까? 엄마가 일을 쉬는 날, 늦게 일어나서 보울 가득 샐러드만 먹거나, 크리스마스 무렵엔 이틀 연달아 케이크만 먹던 날도 있었는데. 카나데 누나가 그런 건 영양이 치우쳐서 안 된대. 엄마도 이 집 아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29∼30쪽)



  《은빛 숟가락》 일곱째 권에서 ‘루카’라는 아이는 ‘어머니 집’을 떠납니다. 이 만화책을 이끄는 주인공 사내인 ‘리츠’라는 젊은이는 ‘그동안 기른 어머니’ 말고 ‘저를 낳은 어머니’가 있는 줄 고등학생 적에 처음으로 알았고, 고등학교를 마친 뒤 ‘저를 낳은 어머니’를 찾아가기로 했는데, ‘저를 낳은 어머니’한테서 사랑을 조금도 못 받는 채 밥도 으레 굶는 ‘동생 루카’를 만나요.


  마음이 여리면서 착한 리츠라는 젊은이는 척 보기에도 제 동생인 줄 알겠는 아이한테서 등을 돌릴 수 없습니다. 날마다 손수 도시락을 싸서 ‘다른 집’에서 ‘저를 낳은 어머니’한테서 사랑을 못 받는 동생한테 가져다 줍니다. 도시락을 가져가는 길에 언제나 그림책도 챙겨서 책을 읽어 주고 여러 가지 놀이를 함께 해요.


  이러던 어느 날 리츠라는 젊은이는 ‘저를 낳은 어머니’하고 이야기를 하기로 합니다. ‘루카라는 아이를 리츠라는 젊은이한테 맡겨’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러면서 루카라는 아이는 리츠가 사는 집으로 옮기고, 루카라는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때에 제 끼니를 먹는 삶’을 누려요.


  제때에 제 끼니를 처음으로 먹으면서 밥상맡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처음으로 배우는 루카라는 아이는 마음속으로 혼자서 생각합니다. ‘엄마도 이 집 아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루카의 책가방 멘 모습을 보면 분명 데려가고 싶어질 거야. 그리고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또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겠지. 그러니까 당분간은 안 만나도 돼. 가끔 너한테서 이렇게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좋아.” (55∼56쪽)


‘하지만 만일 지금 그 애가 상처받은 상태라면 뭔가 하고 싶어.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가드레일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축 처져 있을 때에, 그 애가 손을 내밀어 준 것처럼.’ (68∼69쪽)



  아이는 아이입니다. 어른도 아이입니다. 몸뚱이와 키는 크더라도 어른도 아이와 똑같이 아이입니다. 아이도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고, 어른도 사랑을 받으면서 삽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는 제대로 철들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어른도 제대로 슬기롭지 못해요.


  사랑이 흐르기에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씩씩하고 멋진 아이로 철이 듭니다. 사랑이 샘솟기에 어른은 기운차게 일하고 살림을 가꾸는 동안 아름답고 슬기로운 사람으로 우뚝 섭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먹는 밥 한 그릇은 ‘그냥 밥 한 그릇’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기쁘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밥 한 그릇입니다. 한집에서 함께 나누는 밥 한 그릇은 ‘그냥 끼니 한 번’이 아니라 따사로운 마음이 오가면서 맑게 웃음잔치를 이루는 밥 한 그릇입니다.



“아까, 널 기다리면서 깨달았어. 가방 안에 늘 이 상자가 있었듯이, 내 마음속엔 네가 있었다는 것. 이제 상자 귀퉁이가 닳았고, 내용물도 전혀 대단한 게 아니지만, 늦어서 미안해. 생일 선물이야.” (94∼95쪽)



  밥상에 반찬을 많이 올려야 넉넉하지 않습니다. 값진 먹을거리를 늘 밥상에 올려야 즐겁지 않습니다. 어떤 반찬을 올리든 한솥밥을 오순도순 먹을 수 있을 때에 넉넉한 한 끼니입니다. 어떤 먹을거리를 나누든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먹을 수 있을 때에 즐겁습니다.


  동무를 부르고 이웃을 부릅니다. 멀리 떨어져 사는 살붙이를 부릅니다. 차린 것은 얼마 없어도 밥상맡에 나란히 둘러앉습니다. 서로 마음으로 사귀는 아름다운 넋이기에 즐겁게 밥 한 그릇을 비웁니다.



“그거 말인데, 뭐, 이런저런 말을 하는 놈도 있겠지. 너 때문에 주전에서 누락되는 사람도 있을지 몰라. 하지만, 작은 내 동생을 보면서, 있을 자리라는 건 처음부터 존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거라고 절실히 느꼈어.” (144∼145쪽)



  씨앗을 심어서 열매를 얻기까지 긴 나날이 듭니다. 남새 씨앗을 심어도 석 달을 기다리기 마련입니다. 나무 씨앗을 심으면 여러 해를 기다려야 합니다. 나는 ‘씨앗으로 키운 예쁜 배나무’를 만난 일을 늘 마음으로 되새깁니다. 대여섯 해쯤 앞서 골목집 한쪽에 마련한 마당에서 잘 자란 배나무를 본 적 있는데, 이 배나무를 돌본 할아버지는 ‘놀러온 아들이 준 배가 맛있어서 씨앗을 남겨서 심어 보았는데, 이렇게 잘 자라서 이제 이 배나무에서 배를 얻어.’ 하고 말씀했습니다. 배씨 한 톨을 배나무로 키우기까지 얼마나 긴 나날을 얼마나 따순 손길로 어루만지셨을까요.


  사람도 씨앗 한 톨에서 새로운 숨결로 자랍니다. 모든 짐승과 벌레도 알(씨앗)에서 깨어나서 새로운 목숨으로 삶을 짓습니다. 풀과 나무도 언제나 씨앗 한 톨에서 새롭게 자랍니다. 몸에도 씨앗이 깃들고, 마음에도 씨앗이 깃듭니다. 우리 몸과 마음은 아주 작은 씨앗에서 비롯하는데, 이 작은 씨앗은 가없이 너르며 깊은 바람이 되어 따스한 사랑으로 거듭납니다.



“우리 집에 와. 좁은 정원이지만 무리해서 농구대를 설치했거든.” “어째서 그런 식으로 말해 주는 거예요?” “네가 농구를 좋아한다는 걸 아니까 그렇지. 그리고 또 하나는 나를 위해서야.” (138∼139쪽)



  밥을 다 지어서 밥상에 차릴 즈음 아이들을 부릅니다. 자, 수저는 너희가 놓아 주렴. 두 아이는 저마다 수저를 놓습니다. 어머니 수저와 아버지 수저도 아이들이 놓아 줍니다. 아직 아이들은 스스로 밥을 지을 줄 모르니 어버이가 도맡아서 짓습니다. 앞으로 아이들이 야무지게 자라서 손수 밥을 지을 무렵에는 내가 수저를 놓을 수 있겠지요. 밥을 먹자고 부를 수 있어서 기쁜 하루입니다. 밥상맡에서 수저 놀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밥 한 술 뜰 수 있어서 즐거운 삶입니다. 4348.8.25.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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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8-25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즐겨보는 만화입니다~^^
가족을 배려하는 마음이 읽혀서 좋습니다.

숲노래 2015-08-25 21:26   좋아요 0 | URL
오자와 마리 님 만화를 보시는군요 @.@

일본에서는 십 몇 권까지 벌써 나왔는데
한국은 번역이 너무 늦어요 ㅠ.ㅜ
9권이나 10권은...
또 이분 다른 작품은 언제쯤 번역이 될는지
참 까마득합니다......
 
파타리로! 23
마야 미네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548



재미난 삶을 바라는 장난꾸러기 임금님

― 파타리로 23

 마야 미네오 글·그림

 조은정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06.9.15. 3500원



  마야 미네오 님이 빚은 만화책 《파타리로》(대원씨아이,2006) 스물셋째 권을 읽습니다. 한국에서는 서른째 권까지 나오고 더는 나오지 않는 만화책입니다. 일본에서는 1979년에 첫 낱권책이 나왔고, 아직도 새 이야기가 꾸준히 나와서 2015년 5월에 아흔넷째 권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만화를 그리는 분이 씩씩하게 몇 해 더 그린다면, 이 만화책은 마흔 해를 잇는 발자국을 남길 테고, 낱권책으로도 백 권을 넘기겠구나 싶습니다.




“그럴듯한 말로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구! 사탄님의 명령을 거역할 거라면 힘으로라도 데리고 가겠어!” “힘으로?” (7쪽)

“나의 소중한 사람에게 집적대지 마! 다음에 또 이런 짓을 하면 소금을 뿌려서 머리부터 씹어버릴 거야!” (27쪽)



  만화책 《파타리로》는 ‘엽기발랄 원조만화’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이런 이름 그대로 《파타리로》에 나오는 ‘마리넬라 왕국’에서 임금님 노릇을 하는 ‘파타리로’는 언제나 우스꽝스럽거나 바보스러운 짓을 일삼습니다. ‘마의 삼각지대’ 한복판에 뜬 작은 섬나라라 하는 마니넬라 왕국이라는데, 파타리로 국왕은 이 나라에서 나오는 다이아몬드를 팔아서 어마어마한 재산을 쌓고, 이 재산으로 비밀정보요원(이들 요원한테는 ‘양파’라는 이름을 붙였다)을 키웁니다. 그런데 파타리로 국왕이 거느리는 비밀정보요원은 딱히 하는 일이 없습니다. 언제나 심심하다고 노래하는 국왕 곁에서 단막극놀이나 분장놀이를 하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인간계에는 옛날 인간이 파묻어 둔 보물이 여기저기에 있어. 그것을 파내지.” “그런 것을 용케 아는군요.” “파묻는 현장에 있었을 때도 있었고, 파묻은 본인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거든.” “그렇군요. 몇 천 년 전부터 인간계에는 가끔 왔었으니까요.” “아스타로트 님은 몇 살이에요?” “글쎄, 나도 몰라.” “1만 살은 훌쩍 넘었잖아요. 생일 초가 장난 아니겠네요.” (38쪽)



  만화책 이야기로 그칠 수도 있지만, 파타리로 국왕은 나라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돈이 넘쳐나니까 걱정하지 않는다기보다 처음부터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파타리로 국왕이 걱정하는 일은 언제나 하나뿐이니, ‘삶이 재미없으면 어쩌나?’입니다.


  그래서 늘 이런저런 일을 꾀하고, 이런저런 장난을 치며, 이런저런 놀이를 지어냅니다. 만화책 《파타리로》를 놓고 ‘엽기발랄’이라고 하는 까닭은 ‘사회의식하고 동떨어진 모험과 놀이’로 온 하루를 보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몇 살인지 알 수 없는 파타리로인데, 학교에 가거나 책을 읽는 일은 없습니다. 만화에 나오는 여러 ‘미소년’도 학교에 가거나 책을 읽는 일은 없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돈이 넘치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을 때에만 ‘삶이 재미있기를!’ 바랄 수 있을까요? 돈이 아주 많아야만 ‘이제부터 삶을 재미있게 누려야지!’ 하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돈이 아주 많다고 하는 이들은 외려 돈을 자꾸자꾸 더 모으려고만 하지 않는가요?




“양파를 빌려줄 거야, 말 거야? 공짜로 빌린다는 건 아니야!” “사례금을 지불하겠다구?” “아아!” “그러면 그렇다고 빨리 말하잖구서 뭐야. 친구 사이에 싱겁기는.” (105쪽)


“너무 멋지다. 밖에 서서 음식을 먹는 것은 생전 처음이야.” “햄버거는 웬디스가 제일 맛있어.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은 마음만 먹으면 뼈까지 먹을 수 있어.” (175쪽)



  즐겁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웃고 노래하려는 사람이 웃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춤추고 꿈꾸려는 사람이 춤추고 꿈꿀 수 있습니다. 생각으로 하루를 짓고, 하루를 짓는 대로 삶을 짓습니다. 만화책 《파타리로》에 나오는 ‘엽기스러운 모습’이나 ‘동성애 몸짓’은 그저 그렇구나 싶은데, 아무래도 한국에서 나온 《파타리로》 서른 권은 일본에서 꽤 예전에 나온 책이니 ‘해묵은 우스개’라 할 수도 있어서 그냥 그렇구나 싶은데, ‘아무 걱정을 안 하며 재미난 놀이를 새롭게 찾으려’ 하는 파타리로 국왕 모습은 여러모로 맑습니다. 짓궂은 얼굴로 여길 수도 있지만, 신나게 노는 어린이 얼굴이라 할 수도 있어요.


  이 만화책을 아이들한테 읽힐 수는 없고, 스무 살쯤 넘은 뒤에야 보여줄 수 있을 테지만, 만화책 《파타리로》에 나오는 ‘삶을 바라보는 눈길’을 가만히 헤아립니다. 아침에 웃으면서 일어날 때에 스스로 웃음이고, 저녁에 노래하면서 잠들 때에 스스로 노래입니다. 4348.8.25.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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