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닷 Photo닷 2015.8 - Vol.21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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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211



‘누가 어디에서’ 찍는 사진인가

― 사진잡지 《포토닷》 21호

 포토닷 펴냄, 2015.8.1. 1만 원

 정기구독 문의 : 02-718-1133



  나는 스물너덧 살 즈음부터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까지는 사진을 찍지 않았고, 사진찍기는 내 삶하고 와닿지 않았습니다.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소풍을 갈 적에 사진을 찍어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수학여행을 갈 적에는 관광지에서 1회용 사진기를 사서 동무들하고 어깨동무를 하고 몇 장 찍었을 뿐입니다.


  손전화 아닌 삐삐조차 없던 때에는 ‘작가’나 ‘예술가’ 같은 이름이 붙는 사람만 사진을 찍으려니 하고 여겼고, 돈이 좀 있는 사람이라거나 취미가 남다른 사람이라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시골마을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곧잘 사진을 찍습니다. 시골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쓰는 전화기로도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시골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봄들이나 가을들이나 겨울숲이나 여름숲을 사진으로 찍지는 않습니다. 이녁 손자를 사진으로 한 장쯤 찍어서 늘 들여다볼 뿐입니다.



외국에서 한국어와 스페인어를 동시에 사용하면서 자란 한국인으로서 고려인들의 문화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처음에는 언어학의 관점에서 시작됐던 관심은 곧 사회문화 이슈로까지 확장되었다. (26쪽/마이클 빈스 킴)


시간이 지나면서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걸 알았다. 사실 정체성이라는 것 자체가 증명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입장 또한 그들을 증명하고 판별해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관찰자인데, 그것도 미흡한 관찰자였다. (33쪽/이미지)



  오직 필름으로만 사진을 찍던 지난날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퍽 드물었습니다. 필름사진만 있던 지난날에는 ‘사진하는 사람’은 그저 ‘사진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저 ‘그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진하다’나 ‘그림하다’ 같은 낱말은 따로 없지만, 사진이나 그림 같은 갈래를 씩씩하게 걷는 사람을 보며 흔히 이런 말을 썼습니다.


  디지털사진이 널리 퍼지고 손전화로도 아주 쉽게 사진을 찍는 요즈음에는 누구나 ‘사진하는 사람’이 됩니다. 지난날에는 “사진 좀 찍어 주셔요” 하고 누군가 맡기면 “사진을 어떻게 찍어요?” 하면서 손사래치는 사람이 많았으나, 오늘날에는 길을 가는 어린이나 청소년한테 “사진 좀 찍어 주셔요” 하고 맡겨도 무척 멋지게 잘 찍어 줍니다. 누구나 늘 찍고, 아무라도 즐겁게 사진놀이를 하기 때문입니다.



심사위원과 심사 대상자들이 너무 끈끈한 관계이고, 서로 너무 잘 아는 특정 공간, 특정 인맥의 이너서클이었다는 데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 최민식 사진상이 상금이 없는 명예의 상이거나 액수가 아주 형편없는 상이었다 해도 수상자는 최광호였을까? (104∼105쪽/진동선)


어느 정도의 노력과 연습만으로도 그럴싸한 사진 한 장을 찍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 보니, 속된 말로 ‘그림 그릴 능력은 안 되지만 예술가는 되고 싶은’ 철없는 이들이 사진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어쩌다 전시라도 한 번 열게 되면 그 이후로는 작가 행세는 기본이다. (111쪽/장정민)



  사진잡지 《포토닷》 21호(2015.8.)를 읽습니다. 《포토닷》 21호에 사진평론가 진동선 님이 ‘최민식 사진상’을 놓고 불거진 쓸쓸한 이야기를 짚습니다. 2013년에 이어 2015년에 두 번째 사진상 당선자가 나왔는데, 1회와 2회 당선자에다가 특별상 수상자 여럿이 ‘특정 인맥 이너서클하고 얽힌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진상을 어느 사진가한테 줄 적에 ‘오직 사진만 보면’서 심사를 하지 않고 ‘오직 사람(어떤 인맥인 사람)인가를 보면’서 심사를 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더군다나 2회 수상자가 된 분이 심사에 내놓은 작품은 2009년에 강원다큐멘터리 사진사업 지원 프로그램에 뽑혀서 지원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쓸쓸한 이야기이지만, 최민식 사진상 수상자가 나온 지 두 달이 지나도록 뾰족히 달라지거나 새로운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심사위원과 주최측은 ‘우리는 공정했다’ 하는 ‘입장발표(2015.7.14. 사진마을 누리집)’만 했습니다.


  진동선 님 말마따나 최민식 사진상을 ‘명예만 주는 상’으로 삼는다면, 상금을 아주 조금만 준다면, 그때에도 사진계에서 ‘이너서클’이 움직일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아니, 명예만 주는 상이든 상금이 얼마이든, 사진을 바라볼 적에 오직 사진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은 사람이 이웃하고 나누려는 따스한 사랑’이 어떠한가를 바라보아야지 싶습니다.




안셀 아담스는 생을 마치기 직전에 자신이 꼽은 최고의 사진을 직접 인화해 아들과 딸에게 선물로 남겼다. 1남 1녀를 둔 안셀 아담스는 평생을 사진가이자 열정적인 환경운동가로 활동하면서 가족에게는 무심했던 것으로 알려지지만, 마지막 순간에 2명의 자식에게 자신이 인화한 각기 다른 사진작품 컬렉션 3세트씩을 선물했다. (76쪽/김소윤)



  훌륭한 사진이나 안 훌륭한 사진은 따로 없습니다. 잘 찍은 사진이나 못 찍은 사진도 따로 없습니다. 스스로 이야기를 담아서 이웃과 오순도순 나눌 때에 즐거운 사진입니다. 스스로 사랑을 실어서 한식구와 도란도란 나눌 때에 기쁜 사진입니다.


  작가로 뛰는 사진가라고 해서 늘 작품을 만들어 내야 하지 않습니다. 예술이나 작품이 되기 앞서 ‘사진’이어야 합니다. 사진이 되는 길은 ‘예술이 되는 길’이나 ‘작품이 되는 길’이 아닙니다. ‘삶이 되는 길’일 때에 비로소 사진은 사진으로 오롯이 섭니다.


  화가가 되려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화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요? 그림을 그려서 돈을 벌어야 ‘화가’라는 이름을 붙일 만할까요? 그리고, 사진을 찍거나 글을 써서 돈을 벌어야 ‘작가’라는 이름을 붙일 만할까요?



이곳 라다크의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거나 곰파에서 동자승으로 지내면서 교육을 받고 자란다. 디스킷 마을의 여학교에서는 여자아이들이 작은 교실 바닥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었다. 아이들 하나하나의 눈동자가 별처럼 빛나 보인 건 기분 탓일까. (89쪽/이경택)




  별처럼 빛나 보이는 아이들을 마주하면서 저도 모르게 사진을 찍는다고 합니다. 눈처럼 하얗게 보이는 마음을 만나기에 저도 모르게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내 마음’에도 기쁘게 이야기를 아로새긴다고 합니다.


  남보다 돋보여야 훌륭한 사진이 아닙니다. 돋보이지 않아도 사진은 사진입니다. 돋보이더라도 이야기가 없거나 삶이 깃들지 않으면 사진이라는 이름을 쓰기 어렵습니다.


  시골 할머니는 이녁 손전화 기계에 담은 손자 사진을 보면서 웃습니다. 밭일을 하다가 허리를 펴면서 손전화 기계를 딸깍 열여서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한참 허리를 펴고 쉰 뒤에 다시 손전화 기계를 탁 닫고는 주머니에 넣습니다.


  늘 들여다보면서 애틋한 마음이 흐르도록 하기에 사진입니다. 늘 바라보면서 따스한 숨결이 흐르도록 하기에 그림입니다. 늘 되읽으면서 아름다운 꿈이 새록새록 피어나도록 하기에 글입니다.



패션사진을 업으로 살아온 내가 지난해부터 농민신문사에서 나오는 어린이 잡지 〈어린이동산〉의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개인 사진 중에 우리나라 풍경사진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녀 보고 싶어 자청한 일이다. 어린이 잡지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역사 유적지와 인물 순례를 하기 때문에 전국 박물관을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다. 역사 공부도 함께 하게 되는 고마운 일이다. (94쪽/조남룡)




  사진잡지 《포토닷》에 실린 여러 사람 목소리를 가만히 살핍니다. 젊은 작가 목소리를 살피고, 패션사진 한길만 걸어왔다는 사람 목소리를 살핍니다. 외국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 목소리를 살피고, 이달 《포토닷》 21호에 실린 고려인 사진가 목소리를 살핍니다.


  다 다른 고장에서 태어나서 다 다른 어버이한테서 다 다른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들은 다 다른 이야기를 가슴에 품으면서 사진을 바라봅니다. 이 사람 사진은 저 사람 사진보다 낫지도 않지만 덜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이 사람 사진은 이러한 이야기를 담고, 저 사람 사진은 저러한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이 사람 사진에서는 이 고장 노래가 흐르고, 저 사람 사진에서는 저 마을 웃음소리가 퍼집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날씨여서 집안에서 불을 피우고 계십니다. 작은 온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함께 차를 나눕니다. 집안에 변변한 살림살이는 없지만 노부부가 생활하기에 부족한 것도 없습니다. (117쪽/황성찬)



  기계를 빌어서 찍는 사진이지만, 사진을 찍는 임자는 언제나 사람이고,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마음으로 한식구를 보살피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마음으로 숲을 헤아리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마음으로 온누리를 껴안으면서 드넓은 우주를 꿈꾸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마음속에 있습니다. 사진은 어떻게 찍을까요? 바로 마음으로 찍습니다. 사진은 어떻게 읽는가요? 언제나 마음으로 읽습니다.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서로 아끼면서 언제나 사랑이 피어나는 마음입니다 … 어떻게 사진을 찍든 대단할 것도 대수로울 것도 훌륭할 것도 없습니다. 사진은 ‘전문가’만 찍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누구나’ 찍기 때문입니다 … 오늘 이곳에서 제 삶을 사랑하면서 찰칵 하고 단추를 눌러서 빚는 사진에 기쁜 이야기를 담자고 하는 사진기를 가슴으로 포근히 안으면 더없이 아름다우면서 반갑습니다. (125쪽/최종규)




  전문가만 사진을 찍어야 한다면, 사진은 대단히 재미없으리라 느껴요. 전문가만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야 한다면, 글이나 그림은 참으로 재미없으리라 느껴요.


  날마다 밥을 지어 아이들을 먹이는 어버이는 ‘살림 전문가’나 ‘밥짓기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저 아이들을 사랑하는 여느 어버이가 밥을 맛나게 짓고 즐겁게 짓습니다. 아이들을 재우며 자장노래를 부르는 어버이는 전문 가수나 성악가나 음악가가 아닙니다. 아이들을 아끼고 보살피면서 따사로운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모든 어버이가 기쁘며 달콤하게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집마다 골목마다 전하지 못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벽에 묻어 있다. 아련한 것은 아련한 대로, 명징한 것은 명징한 대로 전하고 싶다. (39쪽/최정호)



  필름사진에서 디지털사진으로 넘어선 무렵부터 ‘사진은 누구나 마음껏 즐기는 삶놀이’ 가운데 하나로 거듭났으리라 느낍니다. 디지털사진으로 넘어선 뒤에 손전화 기계마다 이모저모 ‘사진 찍는 기능’이 놀랍도록 나아지면서 ‘사진을 언제 어디에서나 신나게 누리는 삶놀이’ 가운데 하나로 새롭게 뿌리내리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래서 나는 사진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구나 찍을 수 있을 때에 사진이고, 누구나 즐길 수 있을 때에 사진이며, 누구나 제 삶을 기쁘게 담아서 이웃하고 오순도순 어깨동무를 하면서 노래하도록 북돋우는 웃음씨앗이 될 때에 참말 재미난 사진이라고 생각합니다. 4348.8.18.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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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는 평화 - 전쟁,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평화주의자들의 대담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21
전쟁없는세상 엮음, 엄기호 외 지음 / 오월의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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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25



‘사랑하는 평화’와 ‘저항하는 군대’

― 저항하는 평화

 전쟁없는세상 엮음

 오월의봄 펴냄, 2015.1.12. 16000원



  한자말 ‘저항’은 어떤 힘에도 굽히지 않으면서 거스르거나 버티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평화’는 평온하거나 화목한 모습이라든지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평온’은 조용하고 평안한 모습을 가리키고, ‘화목’은 서로 뜻이 맞고 정다운 모습을 가리키며, ‘갈등’은 서로 적으로 여기거나 부딪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평안’은 걱정이 없는 모습을 가리키고, ‘정다움’은 따뜻한 마음이 흐르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제 “저항하는 평화”란 무엇인가를 헤아려 봅니다. 조용하면서 따뜻한 마음이 흐르고 걱정없이 서로 아끼는 삶을 망가뜨리거나 어지럽히려는 어떤 힘이나 무리가 있기에, 이에 맞서려고 하는 몸짓을 놓고 “저항하는 평화”라고 말하는구나 싶습니다. 평화를 깨거나 무너뜨리려고 하니 이에 맞서려고 하는구나 싶어요.



대학생들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 대에 고졸이나 중졸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안 해 본 것입니다. 만나 본 적도 없고요. 그런데 군대에 갔더니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18쪽)


우리의 삶이 힘들고, 사회적 안전망은 다 망가졌고, 사회가 엉망진창이 되어 먹고살기 어려워도 결국 군대는 필요하고 좋은 무기는 사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장되는 것 같아요. 별다른 고민 없이 군대는 당연히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 군대를 유지시키기 위해 비용을 지출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 되죠. (30쪽)



  권력자한테는 노예반란이 ‘평화를 깨는’ 일이 되리라 봅니다. 기득권자한테는 기득권 울타리를 허무는 몸짓이 ‘평화를 깨는’ 일이 되겠지요. 독재자한테는 독재를 나무라거나 꾸짖는 손짓이 ‘평화를 깨는’ 일이 될 테고요.


  양반 제도가 있던 지난날에는 양반 제도를 거스르는 평민이나 ‘상놈’ 몸짓이 바로 ‘평화를 깨는’ 일이라 할 만합니다. 임금님이 시킨 일을 안 하는 평민이나 상놈 몸짓이란 언제나 ‘평화를 깨는’ 일이었으리라 느낍니다.


  그런데 노예가 되어 짓눌리는 사람은 ‘처음부터 평화를 못 누리’며 삽니다. 권리를 빼앗긴 사람은 기득권자가 가로챈 권리 때문에 ‘처음부터 평화를 모르’며 살아요. 독재권력이 서슬 퍼렇기에 사람들이 아무 대꾸조차 못 하면서 숨을 죽이는 모습은 ‘평화’가 아닙니다.


  사람들 스스로 어느 자리에 서느냐에 따라서 ‘평화’와 ‘평화가 깨진 모습’을 바라보는 눈길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애들이 약하기 때문에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것은 폭력을 정당화하죠 … 현실적으로는 힘있는 사람은 보호받고 힘없는 사람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해요. (34, 39쪽)


우리나라는 근대화되면서 군대를 국민 자격증을 부여하는 기관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국가가 군대를 통해 ‘시민’이 아니라 ‘식민’을 양성하는 것이죠. 국가적 규율에 복종하는 기재로서 군대가 작동합니다 … 군대는 합법적인 살인 조직입니다. 어느 나라 군대이건 그 본질은 똑같죠. 다만 한국 상황에서 다른 점은 그런 군대에 갈 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선택권 자체가 없다는 점이죠. (63, 71쪽)



  ‘전쟁없는세상’이라는 모임에서 엮은 《저항하는 평화》(오월의봄,2015)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군대를 거느리는 권력자한테는 병역거부를 하는 사람들이 ‘저항하는 반역자’처럼 보이리라 느낍니다. 그리고, 군대를 지구별에서 몰아내어 서로 아끼는 사랑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들한테는 군대와 권력자야말로 ‘저항하는 반역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군대는 왜 있어야 할까요? 적군이 있으니 아군이라고 하는 군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아군한테 적군이 될 그곳 사람들은 왜 군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할까요? 이쪽 아군한테는 적군이 될 그쪽 아군한테는 바로 이쪽 아군이야말로 적군입니다.


  이쪽에 군대가 있으니 저쪽에서도 군대를 거느립니다. 저쪽에 군대가 있으니 이쪽에서는 군대를 더 키우려고 하며 전쟁무기도 더 갖추려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한테 핑계입니다. 서로서로 너희가 군대와 전쟁무기를 없애지 않으니 우리도 군대와 전쟁무기를 안 없앤다고 핑계를 댑니다.



국가 안보라는 개념은 오랜 반공주의 속에서 오염되어서 모든 인권을 억압할 수 있는 만능 면허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국가 안보라기보다는 정권 안보, 권력 안보의 측면에서 늘 사용되어 왔죠. (87쪽)


국가주의와 종교의 긍정적 관계 형성에서 반공주의와 군종 제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 종교인들은 선악 이원론을 이용하여 ‘반공주의 종교화’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자체적으로 구축한 방대한 ‘반공 인프라’를 통해 끊임없이 반공주의를 재생산해 왔습니다. (150쪽)



  곰곰이 돌아보면, 권력자는 모두 한통속입니다. 권력자는 서로 군대를 거느리면서 ‘한 나라를 이루는 여느 사람들’을 휘어잡습니다. 군대는 평화를 지키는 구실을 하지 않습니다. 군대는 권력자를 지키는 울타리 노릇을 합니다. 군대는 평화가 아닌 권력을 지키면서 평화를 늘 억누르는 노릇을 합니다.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사회의식이나 학교교육이나 정치지도자가 길들이려는 지식이 아닌, 우리 삶으로 제대로 바라보면서 잘 알아야 합니다.


  땅을 일구어 밥을 거두는 시골사람은 전쟁무기를 손에 안 쥡니다. 우리가 밥을 먹으려면 두 손에 호미와 삽과 낫과 쟁기가 있어야 합니다. 밭일이나 논일을 하는 사람이 허리에 권총을 찰까요? 아닙니다. 시골사람을 소작인이나 노예로 부리려고 하는 권력자가 허리에 권총을 찹니다. 시골에서 들일을 하는 사람은 웃통을 벗고 맨발에 맨몸에 맨손으로 오직 흙을 만질 뿐입니다.


  참다이 삶을 지으면서 아름답게 밥을 나누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맨손입니다. 잘 바라보고 알아야 합니다. 나락을 거두고 푸성귀를 돌보는 시골사람은 늘 맨손이요 아무런 무기가 없습니다. 나무를 때어 밥을 짓던 먼먼 옛날 옛적 시골사람부터 오늘날 시골사람까지 언제나 가장 사랑스러운 손으로 밥을 짓습니다. 손에 총을 거머쥐면서 밥을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병역거부라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틀 안에서 병역제도의 비합리성, 폭력성에 저항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을 넘어서 국민화하려는 폭력에 저항하는 것은 물론 이런 국민화 과정이 아닌 다른 사회, 다른 나라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244∼245쪽)


학교가 폭력적인 구조 안에 있으니까 학교 폭력도 비일비재했죠 … 증상은 폭력적인 학교 문화, 입시 교육이라는 환경의 결과인데, 폭력의 결과를 오히려 폭력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셈이죠 … 폭력적인 아이들의 모습은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싶다는 절규일 수도 있는데, 구조가 그것을 들어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폭력은 사랑이 없는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269, 271, 275쪽)



  《저항하는 평화》라고 하는 이야기책은 평화가 무엇이고 전쟁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밑바닥을 샅샅이 훑고 헤아리면서 다룹니다. 폭력이 왜 태어나는가 하는 대목을 짚고,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 마음이 얼마나 메마른가 하는 대목을 건드리며, 폭력으로 삶을 무너뜨리려는 전쟁이 왜 군대를 키우면서 이 사회와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는가 하는 대목을 돌아봅니다.


  젊은이는 군대에 가야 하지 않아요. 젊은이는 사랑스러운 보금자리에서 살림을 가꾸어야지요. 젊은 사내와 가시내는 모두 군대 문제 때문에 휘둘리거나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젊은 사내와 가시내는 서로 아끼고 돌보면서 사랑스러운 마을을 일구는 슬기를 모아야 합니다.


  삶을 노래할 때에 평화입니다. 삶을 노래하지 않으면 평화가 아닙니다. 사랑을 꿈꿀 때에 평화입니다. 사랑을 꿈꾸지 않으면 평화가 아닙니다.


  살인 훈련은 평화가 아닌 전쟁입니다. 이제 갓 스무 살밖에 안 된 어린 사내한테 총칼을 쥐어 주면서 ‘어디에도 없는 적군’을 머릿속에 바보스레 만들어서 이웃을 잊고 동무를 밟고 올라서도록 길들이는 짓은 바로 권력자가 온누리 사람들을 억누리려고 하는 쳇바퀴 같은 제도입니다.



권력에 복종하니까 권력이 유지된다는 거예요. 따라서 민중들이 복종하길 거부한다면 권력은 서서히 무너질 수밖에 없죠 … 정치적으로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하는 사람들이 자기 완결적인 삶의 구조를 갖춘다면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가장 말을 안 듣는 세력이 될 수 있죠. (297∼298, 311쪽)


2008년 촛불은 계속 광화문으로만 집결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광화문만 명박산성으로 막으면 된다, 아주 쉽죠. (316쪽)



  사랑은 평화로 가고, 평화는 사랑으로 갑니다. 전쟁은 군대로 가고, 군대는 전쟁으로 갑니다. 사랑스러운 평화가 이루어지는 마을에는 전쟁도 군대도 없습니다. 사랑스러운 평화하고 동떨어진 곳에는 전쟁과 군대가 나란히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왜 성노예가 생겨야 했을까요? 이웃나라를 군대를 앞세운 총칼로 짓밟은 이들은 마음속에 오직 전쟁 생각만 있기 때문입니다. 해방을 맞이한 한국에도 왜 성매매가 있을까요? 이 나라에 참다운 평화가 없는 채 군대가 골골샅샅 또아리를 틀기 때문입니다.


  모든 폭력은 사랑이 없는 곳에서 싹트고, 사랑이 없는 곳에서 싹트는 폭력은 다른 폭력으로 자꾸 이어집니다. 모든 폭력을 잠재우는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이어지면서 평화로운 삶과 마을과 보금자리로 거듭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폭력이 아닌 사랑을 배우면서 찾을 노릇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삶을 가꾸려면, 전쟁은 그치고 군대를 없애면서 두레와 품앗이로 숲과 들을 일굴 수 있어야 합니다.



전쟁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악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죠. 가난이나 기근, 굶주림, 인격 모독, 폭력, 거짓, 파괴, 아동학대, 강간과 매춘 등등. 거의 모든 나쁜 것이 전쟁 속에 들어 있습니다 … 인간을 인격으로 존중하지 못하는 공간에서 나도 모르게 내 말이나 행동에서 그런 악함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354쪽)



  군대가 그대로 있는 사회에서는 핵발전소도 그대로 있기 마련입니다. 군대를 차츰 줄여서 마침내 없애려고 하는 사회에서는 핵발전소도 물리치면서 없애려 하기 마련입니다.


  평등하고 평화와 동떨어진 나라에서는 폭력과 차별이 춤춥니다. 평등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에서는 참말 언제나 평등하고 평화가 따사로이 흐릅니다.


  아이들을 생각하고, 이 아이들이 자라서 낳을 아이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전쟁무기와 군대와 폭력을 물려줄 생각인지, 아니면 아이들한테 꿈과 사랑과 평화와 평등을 물려줄 생각인지, 오늘 이곳에서 어른들 스스로 똑똑히 헤아려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전쟁무기와 군대를 물려준대서 평화로울까요? 아이들한테 참다운 사랑을 슬기롭게 물려주어야 비로소 평화롭지 않을까요? 4348.8.17.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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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어 게임 3
카이타니 시노부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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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547



올바르게 살면 늘 속을까?

― 라이어 게임 3

 카이타니 시노부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07.4.25. 4200원



  카이타니 시노부 님 만화책 《라이어 게임》(학산문화사,2007) 셋째 권 첫머리에서 ‘놀라운 사기꾼’ 노릇을 하는 ‘아키야마’라는 젊은이 이야기가 흐릅니다. 아키야마네 어머니는 이녁 아들을 대학교까지 보내려고 궂은 일을 마다 않으면서 일을 하다가 그만 몸이 무너졌고, 이즈음 다단계 업체에 속아넘어가면서 나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아키야마라는 젊은이는 어머니가 속아넘어간 다단계 회사한테 앙갚음을 할 뜻을 품었고, 끝내 다단계 회사를 와르르 무너뜨리고는 옥살이를 했다고 합니다.



“꾀를 부려서 잠시 이득을 봐도,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어. 하지만 정직하게 살면 반드시 행복이 찾아올 거야.” (12쪽)


아키야마의 어머니는 고스란히 속아넘어간 것이다. 언제 어느 때나 사기꾼은 절박한 사람을 하이에나처럼 찾아낸다. 아키야마의 어머니도 이때 정말 몸도 마음도 한계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 (15쪽)



  《라이어 게임》에서 두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아키야마는 언제나 머리를 똑똑하게 굴립니다. 어리숙하게 보이면 다른 사람이 나를 속이려 하니, 조금도 어리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속여서 제 배를 채우는 사람이 있다면 이녁한테 곧바로 앙갚음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회는 내가 너를 밟고 일어서느냐, 아니면 내가 너한테 밟히면서 바보스레 눌려야 하느냐 같은 두 갈래 길밖에 없다고 여겨요.


  만화책에서 흐르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참말 이 같은 모습을 쉽게 마주할 수 있습니다. 눈속임이나 거짓말이 아닌 착한 몸짓과 참말로 서로서로 아끼는 사람은 좀처럼 안 드러나는 듯 느낄 만합니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도드라질까요? 바로 참말 아닌 거짓말로 사는 사람들 모습이 도드라집니다. 조용히 제 보금자리를 가꾸는 사람들 이야기는 신문에도 방송에도 책에도 거의 안 나온다고 할 만합니다. 떠들썩하게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들 이야기가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을 가득 채워요. 그런데 수많은 여느 사람들은 바로 이런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을 보면서 ‘믿기’ 마련입니다.



“그걸 왜 지키니? 이건 라이어 게임. 속고 속이는 전쟁이야. 후후후, 아무튼 둔해 빠졌다니까. 넌 말이지, 내가 올라가기 위한 제물이었어.” (82쪽)


“아, 난 왜 이렇게 멍청할까. 왜 그런 게임을 해 버린 걸까.” “후회해도 소용없어. 당했으면, 갚아 줘야지!” (126쪽)



  올바르게 살면 늘 속을까요? 어쩌면 속을는지 모릅니다. 올바르게 살면 늘 빼앗길까요? 어쩌면 빼앗길는지 모릅니다. 올바르게 살면 늘 가난할까요? 어쩌면 가난할는지 모릅니다. 올바르게 살면 늘 고달플까요? 어쩌면 고달플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를 속이지 않는 사람은, 아니 나 스스로를 속이려는 마음이 없이 삶을 짓는 사람은 즐겁게 웃습니다. 아프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아프거나 슬프게 눈물을 흘립니다. 나를 속이지 않으니 밥을 지을 적에 스스로 가장 맛있게 지으려 하고, 스스로 가장 맛있게 지은 밥을 이웃하고 넉넉히 나누지요.


  나를 속이지 않으니, 아니 늘 나를 참다이 바라보면서 살림을 가꾸니, 가난하건 가멸차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아이들하고 한솥밥을 먹는 기쁨으로 활짝 웃으면서 노래할 만합니다. 귀뚜라미 노랫소리가 반갑고, 바람 따라 춤추는 나뭇잎 소리가 재미납니다.



“싫으면 안 사도 돼. 기다리는 것은 패배뿐이니까.” (182쪽)


“전, 여러분의 말을 듣지 않겠어요! 모두들, 정말 이기적이군요. 1회전 투표 전에 한 스피치 타임에선, 아무도 제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았잖아요!” (196∼197쪽)



  《라이어 게임》은 이 이름 그대로 ‘거짓말 놀이’에 휩쓸린 사람들 모습과 몸짓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거짓말 놀이를 해야 나 혼자 살아남겠구나 하고 느끼는 사람들이 어떤 모습이 되어 어떤 몸짓을 보여주는가를 낱낱이 드러냅니다.


  그런데, 거짓말 놀이가 아닌 ‘참말 놀이’를 하겠노라 하고 생각을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너를 속여야 내 밥그릇을 두둑히 챙길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너랑 즐겁게 손을 맞잡고 슬기를 모으면 서로서로 밥그릇이 푸짐하다는 생각을 품으면 어떻게 될까요?


  네 몫을 내가 차지해야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네 몫은 네가 누리고 내 몫은 내가 즐기자는 생각으로 어깨동무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혼자서 돌다리를 놓기는 매우 힘들지만, 둘이 하거나 서넛이 하면, 또는 열이나 스물이 하면 무척 손쉬우면서 거뜬합니다. 두레나 품앗이를 하는 사람들은 똑같은 품을 들여서 다 함께 더 넉넉히 누리는 살림을 지을 수 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플레이어 전체로서는 손해를 보지 않는 거죠. 그것은 즉, ‘나만 이득을 보겠다’라고 생각하는 플레이어가 하나도 없다면, 전원이 살 수 있다는 뜻이에요.” (208쪽)


“이 라이어 게임은 거짓말쟁이가 이기는 게임이라고 생각하셨죠? 저는 아니라고 봐요. 라이어 게임이란, 사실, 거짓말을 해서 이기고 싶다는 욕망을 극복하고, 정직해질 수 있느냐를 시험하는 게임이라고 생각해요.” (210쪽)



  한 사람만 배가 부르다고 해서 나쁠 일은 없다고 봅니다. 다만, 한 사람이 배가 부르면 다른 사람은 모두 배가 안 부르겠지요. 한 사람이 돈을 왕창 번다면, 다른 사람은 돈을 왕창 잃겠지요.


  혼자 배가 부르면 즐거울까 궁금합니다. 혼자 모든 돈을 거머쥐면 이 돈을 얼마든지 쓸 만할까 궁금합니다.


  많이 먹거나 많이 써야 즐거운 삶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즐겁게 먹어야 즐겁고, 즐겁게 써야 즐겁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웃을 속이면서 등골을 빼먹으려는 사람은 한 번 등골을 빼먹으면 앞으로도 등골을 빼먹으려는 길을 가고야 맙니다. 언제까지나 스스로 거짓말에 휩쓸려서 살아야 합니다. 여느 때에 늘 이웃하고 오순도순 나누는 사람은 앞으로도 늘 오순도순 나누는 기쁨을 가꾸기 마련입니다. 삶은 삶 그대로 바라보면서 가꿀 때에 아름답습니다. 4348.8.17.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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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의 특별한 모자 베틀북 그림책 100
기타무라 사토시 지음, 문주선 옮김 / 베틀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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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54



내가 꿈꾸는 대로 멋진 하루를 즐기네

― 밀리의 특별한 모자

 기타무라 사토시 글·그림

 문주선 옮김

 베틀북 펴냄, 2009.4.15. 1만 원



  아이들이 곧잘 ‘빈손’을 나한테 내밉니다. “자 보셔요!” 하고 빙그레 웃습니다. “응? 뭔데?” 하고 물으면, “여기 있잖아요, 잘 보셔요!” 하고 다시 말합니다. “그래, 뭘까? 아버지는 잘 모르겠는걸. 네가 좀 알려주렴.” 하고 말하면, “아유, 그것도 몰라요, 초콜릿이잖아요. 하나 드세요.” “그렇구나, 초콜릿이네. 고마워, 잘 먹을게.” 하면서 ‘아이 손에 있는 초콜릿’을 살그마니 집어서 입에 넣습니다.


  나는 어느새 ‘내 맨손’에 과자를 한 점 올려놓고 아이한테 내밉니다. “자, 너도 받으렴.” “뭔데요?” “잘 봐. 모르겠니?” “뭘까?” “과자야. 너도 같이 먹자.” “아, 맛있는 과자로구나. 고맙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즐겁게 ‘비었으나 가득한 손’으로 무엇이든 나눕니다.




“좀더 싼 것은 없을까요?” “어느 정도 가격을 생각하시나요?” “음, 이 정도요.” 밀리는 아저씨에게 지갑을 보여주었어요. 그런데 지갑 속이 텅 비었지 않겠어요? “흠, 어디 보자.” 아저씨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어요. (5쪽)



  기타무라 사토시 님이 빚은 그림책 《밀리의 특별한 모자》(비룡소,2009)를 읽습니다. 이 그림책에는 그야말로 ‘남다른 모자’ 이야기가 흐릅니다. 어떤 모자인가 하면, ‘꿈꾸는 사람’한테만 보이는 모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생각하는 사람’만 볼 수 있는 모자라고도 할 만합니다.


  꿈꾸지 않는 사람은 못 보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안 봅니다. 꿈꾸는 사람이기에 어떤 모자이든 아름답게 쓸 수 있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언제 어디에서나 새로운 모자를 쓸 수 있어요.




아저씨는 상자에서 조심조심 모자를 꺼내 밀리에게 씌워 주었어요. 모자는 밀리에게 꼭 맞았어요. “고맙습니다. 마음에 쏙 들어요.” 밀리는 지갑에 있는 것을 몽땅 아저씨에게 주었어요. (6쪽)



  그림책 첫머리에 보면 ‘밀리’라는 아이는 모자 가게에 찾아갑니다. 마음에 드는 모자가 있는데 밀리한테는 돈이 없습니다. 모자 가게 아저씨는 밀리 지갑을 보고는 한참 생각에 잠깁니다. 이러다가 멋진 상자를 하나 가지고 오지요. 그러고는 상자를 열어 밀리 머리에 씌워 줍니다.


  ‘돈이 없는 아이’한테 모자 가게 아저씨는 어떤 모자를 주었을까요? 밀리는 모자 가게 아저씨가 건넨 모자가 아주 마음에 든다면서 ‘지갑에 있는 것을 몽땅’ 주었다고 해요.


  그런데 말이지요, 밀리 지갑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돈’은 한푼도 없었다고 합니다.




밀리는 케이크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안을 들여다보았어요. 케이크들은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로 맛있어 보였지요. 어느새 밀리는 케이크 모자를 썼어요! (12∼13쪽)



  여느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모자를 받은 아이는, 여느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돈을 어른한테 주었습니다. 여느 눈이 아닌 남다른 눈으로, 그러니까 오직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자를 선물한 어른은, 여느 눈이 아닌 남다른 눈으로, 다시 말하자면 오로지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과 웃음을 아이한테서 받습니다.


  어린이 밀리가 쓰는 ‘남다른 모자’는 아이 혼자서 빚지 않습니다. 어린이 밀리를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마음으로 사랑할 줄 아는 어른하고 함께 빚습니다.


  꿈은 어디에서 태어날까요? 꿈은 사랑스러운 마음에서 태어납니다. 생각은 어디에서 자랄까요? 생각은 아름다운 마음에서 자랍니다.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꿈을 짓는 삶이기에 웃습니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생각을 가꾸는 하루이기에 노래합니다.




특별한 모자를 쓴 사람은 밀리 혼자만이 아니었어요. 모두들 저마다 특별한 모자를 썼지요. 모양도 크기도 다 달랐어요. (18∼21쪽)



  소꿉놀이는 멋진 놀이입니다. 아이들이 소꿉으로 짓는 살림은 아주 재미나면서 아름답습니다. ‘눈에 보이는’ 돈이 많아야 넉넉한 삶이 아닙니다. ‘눈에 안 보이는’, 아니 ‘마음을 열고 바라볼 때에 볼 수 있는’ 사랑이 가득할 때에 넉넉한 삶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름값이 커야 즐거운 삶이 아닙니다. ‘오직 마음을 따스하고 넉넉하게 가꾸면서 짓는’ 내 이름과 네 이름이 어우러져서 한살림을 가꾸는 하루일 때에 기쁘게 꿈꾸면서 곱게 생각하는 삶이 되어요.


  내 모자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네 모자는 더없이 아름답습니다. 내 꿈은 아주 사랑스럽습니다. 네 꿈은 대단히 사랑스럽습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아름답고, 우리가 어깨동무하며 걷는 길은 늘 사랑스럽습니다. 4348.8.16.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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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 어린 새
김명수 지음, 신민재 그림 / 창비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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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4



너랑 나랑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

― 산속 어린 새

 김명수 글

 신민재 그림

 창비 펴냄, 2005.12.26. 8000원



  늦여름이 무르익는 새벽입니다. 새벽바람은 제법 서늘합니다. 아이들은 새근새근 자다가 이불을 걷어차고, 나는 이불을 주섬주섬 챙겨서 여미어 줍니다. 두 아이 사이에서 자니까 아이들이 언제 이불을 걷어차는지 알고, 언제 이불을 여미어 주어야 하는지 압니다.


  자는 아이들이 이를 갈면 얼른 손을 뻗어 볼을 톡톡 치고는 살살 어루만집니다. 예쁜 이는 예쁘게 두고 즐겁게 꿈꾸라고 속삭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갈기를 멈추며 길게 하품을 하고는 냠냠 입맛을 다시면서 조용히 꿈나라로 다시 빠져듭니다.


  어느덧 동이 트고, 조용히 잠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아침에 끓일 쌀을 씻어서 불립니다. 다시마를 한 조각 뜯어서 불립니다. 집식구 모두 꿈나라에서 노니는 동안 느긋하게 부엌일을 살피고는 내 새로운 하루를 엽니다.



꽃 보고는 몰라요 / 사과꽃은 하얘도 / 빠알간 사과 열리고 / 감꽃은 뽀얘도 / 붉은 감이 달리고 (꽃 보고는 몰라요)



  김명수 님 동시집 《산속 어린 새》(창비,2005)를 읽습니다. 아이들을 곱게 바라보는 마음이 동시 한 줄로 흐르고, 글쓴이 어린 날을 되새기는 이야기가 동시 두 줄로 흐르며, 이 땅 아이들이 먼먼 옛날부터 가슴에 품은 숨결이 동시 석 줄로 흐르다가는, 오늘날 아이들한테 글쓴이가 들려주고 싶은 생각이 동시 넉 줄로 흐릅니다.



민들레는 그럼 왜 민들레가 되었을까 / 진달래는 그럼 왜 진달래가 되었을까 // 불러 주고 불러서 / 민들레가 되었지. / 너와 내가 예뻐해서 / 진달래가 되었지 (누가 누가 지었을까)



  민들레가 왜 민들레인지 알려면 어린이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표준말로는 ‘민들레’이지만 고장마다 가리키는 이름이 다 다릅니다. 수백 가지도 아닌 수천 가지 ‘이름’이 있는 민들레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수천 가지 이름’이 어슷비슷하기도 하고 많이 다르기도 하지만, 꼭 하나를 가리키는 이름이에요. 다 다른 고장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다 같은 민들레를 바라보며 가리키는 이름은, 다 다른 삶터에 맞게 태어난 말로 다 같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민들레를 아끼지 않는다면 민들레한테 이름을 붙여 주지 않습니다. 진달래를 아끼지 않는다면 진달래한테 이름을 붙여 주지 않아요.


  옛날부터 시골지기는 모든 이웃한테 저마다 다른 이름을 알뜰살뜰 붙여 주었어요. 거머리한테도 거머리라는 이름을 주고, 장구애비 물방개 소금쟁이 게아재비 미꾸라지 다슬기 개똥벌레 가재 같은 이름이 골고루 있습니다. 파리 모기를 비롯해서 벌이랑 나비라는 이름도 있는데, 벌하고 나비는 또 수많은 이름이 갈래갈래 있습니다.



조개는 / 제 껍질에 / 노을을 새긴다 (조개의 무늬)



  마음을 기울여 사랑을 하지 않으면 이름을 붙여 주지 않습니다. 잘 헤아려 보셔요. 도시에서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길에서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든지 발을 밟고 지나간다든지 밀치고 지나가는 ‘여러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버스나 전철을 타 보셔요. 아주 고단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도시에서는 ‘둘레에 있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못 느끼기 마련이라, 우리 곁을 스치거나 밀치며 지나가는 ‘이웃이어야 할 사람’한테 아무 이름을 못 붙입니다.


  이는 시골에서도 똑같습니다. 요즈음 시골에서는 들나물이나 들풀을 아끼는 손길이 거의 사라졌어요. 그냥 농약을 뿌려대어 죽이니까요. 논이고 밭이고 온통 농약투성이가 되면서, 논에서 살던 수많은 이웃도 거의 다 죽어서 사라집니다. 논개구리 참개구리 무당개구리 맹꽁이 두꺼비 같은 이름은 아예 생각할 틈도 없습니다. 방아깨비 풀무치 여치 베짱이 같은 이름은 아예 들여다볼 틈도 없습니다. 이른봄에는 쑥이나 냉이를 조금 들여다볼 뿐, 여름쑥이나 가을쑥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소리쟁이 미나리 질경이 민들레 토끼풀 모두 숱한 ‘잡풀’로 여겨 농약으로 죽이려 할 뿐입니다.



동생과 내가 잠도 깨기 전 / 아버지는 제일 먼저 일어나셔서 / 쇠죽솥에 물을 붓고 / 불을 지피고 / 작두로 썰어 놓은 볏짚을 넣고 / 콩깍지를 한 삼태기 / 헛간에서 퍼 와 / 외양간 소를 위해 쇠죽 끓이시고 (겨울 아침 우리 집)


울바자에 내린 눈은 울바자 덮고 / 대숲에 내린 눈은 대숲을 덮고 (겨울날)



  동시집 《산속 어린 새》에서 흐르는 겨울날 모습은 아련한 옛모습이로구나 싶습니다. 쇠죽을 끓이는 시골집은 몇 채쯤 남았을까요? 쇠죽을 끓일 볏짚을 건사한 시골집은 몇 채쯤 남았을까요? 요즈음 벼는 하나같이 유전자를 건드려서 짜리몽땅하기에 짚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즈음 벼는 짜리몽땅할 뿐 아니라 짚이 아주 가늘고 힘조차 없어요. 무엇보다도 일소를 부리는 시골집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울바자가 남은 시골집이 있기는 있을 테지요. 그러나 요즈음 시골마을은 어디를 가든 시멘트로 쌓은 블록담입니다. 수수깡 울타리라든지 탱자나무나 찔레나무 울타리는 찾아볼 길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래도 이런 아련한 모습이 동시집 한켠에 살며시 깃듭니다. 이 동시집을 읽을 요즈음 어린이는 ‘울바자’가 무엇인지 모를 테고, ‘작두’나 ‘삼태기’를 구경할 일도 없다고 할 터이니, 뭔 얘기를 읊는 동시인지 하나도 모를 만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이 동시에 이러한 이야기가 깃들기에, 아이들은 이 노래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에는 누구나 겪고 살며 누리던 이야기이나, 이제는 ‘동시 한켠에만 유물처럼 남은’ 노래를 마음으로 그리도록 이끄는 조그마한 씨앗이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달맞이꽃 핀 마을에 어둠 내리면 / 모깃불 피어나는 마당 너머로 / 반딧불이 깜박이며 숨바꼭질하고 (박꽃 핀 마을에)



  도시에는 모깃불도 없고 마당도 없습니다. 아파트나 다세대주택에는 마당도 없고 밭뙈기도 없습니다. 도시에서도 달맞이꽃을 심어서 돌보는 곳이 있을는지 모르겠는데, 요즈음 시골에서도 달맞이꽃을 보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달맞이꽃도 숱한 ‘잡풀’ 가운데 하나로 여겨서 농약으로 태워 죽이기 때문입니다.



동생이 / 태어나자 / 우리 할머니 / 시골에서 / 서둘러 올라오셨다. // 할머니가 / 내 동생을 가슴에 안고 / 함박웃음 지으며 / 노래하신다. (할머니의 노래)



  너랑 나랑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이기에 즐겁습니다. 너랑 나랑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기에 웃음꽃이 핍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노래를 물려주고,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노래를 가슴으로 새기면서 기쁘게 뛰어놉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노래를 물려주면서 씩씩하게 일하고, 아이는 어버이가 차려 주는 밥을 먹으며 새롭게 기운을 냅니다.


  새끼 새도 어미 새도 숲이 있을 때에 둥지를 틀어 삶을 누립니다. 모든 새는 숲에 깃들어 숲노래를 부를 적에 싱그러운 숨결이 됩니다. 사람도 숲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살림을 가꿀 적에 싱그러운 넋이 됩니다. 아이들이 숲을 책으로만 만나지 않기를, 아이들이 반딧불이나 무지개를 동영상으로만 들여다보지 않기를, 언제 어디에서나 이웃과 동무로 마주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이를 돌보는 어른도 곁에서 늘 숲을 사랑하고 흙과 바람과 빗물을 고마이 여길 줄 아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8.16.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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