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사람과 책읽기


 시골에 살면서 도시마실을 할 일이란 드물다. 도시로 볼일을 보러 갈 일이란 딱히 없다. 우리 식구가 도시로 마실을 간다면, 책방에 가거나 출판사에 가거나 무슨 강의에 가거나 아는 분을 만나러 간다. 롯데월드라든지 큰공원이라든지 육삼빌딩이라든지 운동경기장이라든지 갈 일이란 없다. 아이 어머니는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꽉 막힌 도시에 한 시간 아닌 십 분만 있어도 숨이 막힌다고 느끼지만, 아이 아버지 또한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에 있는 일이 즐겁거나 기쁘지 않다. 돌이켜보면, 도시에서 살아갈 때에는 술이라도 마셔서 머리가 해롱거리지 않는다면 견딜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싶다.

 시골에 살며 가끔 도시로 마실을 가기 때문에, 도시사람이 책을 얼마나 읽는지 살필 겨를이 없다. 어쩌다 한 번 도시로 마실을 가서 전철이나 버스를 탄대서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움직이는 도시사람’이 이곳에서 책을 얼마나 읽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드문드문 마주하는 모습이기는 하더라도, 나날이 ‘전철이나 버스에서 책을 읽는 사람 모습’은 사라지거나 자취를 감추는구나 싶다. 어쩌다가 한두 사람 책을 손에 쥐는 모습을 본다 하더라도 참고서나 자기계발서나 토익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겉으로는 책읽기로 보이지만, 책이 아닌 교재를 외우는 사람이다.

 아이와 함께 도시마실을 하며 책을 펼치다가 생각에 잠긴다. 억지로 책을 조금 펼쳐 몇 쪽을 넘기고는 덮어 가방에 도로 넣는데, 아이와 함께 다니면서 책을 펼칠 겨를을 내기란 몹시 힘들다. 아이와 함께 움직이는 어버이는 책읽기하고는 아주 멀어지고야 만다. 아이 어버이는 책읽기에서 아이읽기로 새 삶을 보낸다.

 여느 도시사람이라면 책읽기로 마음읽기를 하기보다는 손전화로 놀이를 하거나 텔레비전을 즐길 때에 좋아하겠지. 자가용을 몰며 어디를 놀러다닌다든지, 맛집이나 찻집을 마실하는 삶이 즐겁겠지.

 요 며칠 손바닥 텃밭에서 풀을 뽑으며 놀았다. 일이라기보다 놀이라 할 만하다. 여느 농사꾼이 보자면 이 손바닥 텃밭으로 뭘 깨작거리느냐 싶을 만하니, 우리로서는 그냥 흙놀이일 뿐이다. 백 평 천 평은커녕 열 평조차 안 되는 손바닥 텃밭을 깨작거리니까 텃밭농사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부끄럽다. 다만, 우리 식구한테는 이 조그마한 텃밭에서 거둘 푸성귀로도 즐거우니까 깨작질이기는 하나 텃밭놀이를 한다. 아버지가 텃밭놀이를 하는 동안 딸아이는 아주 스스럼없이 흙밭으로 따라와서 호미라든지 쟁기라든지 삽이라든지 쥐겠다며 알짱거린다. 삽이나 쟁기는 무거워서 못 들지만, 아버지가 드니까 저도 들고 싶어 한다. 아이한테는 호미가 삽과 같은데, 호미로는 성이 안 차는 듯하다. 아이한테도 일이라기보다는 놀이일 테니까.

 도시에서 도시사람으로 지내는 동안, 나와 옆지기는 아이한테 ‘책 읽히기’를 넘어 무언가 해 줄 만한 일거리나 놀이거리가 그리 마땅하지 않았다. 늘 하는 집일은 이렁저렁 보여주거나 시킬 만했다. 빨래라든지 걸레질이라든지 밥상차림이라든지, 이런 집일을 아이도 거뜬히 거든다. 그렇지만 집살림이 무엇이고 사람살림이 어떠한가를 느끼도록 돕기가 몹시 어렵다.

 흙일꾼으로 태어나거나 자라지 못한 어버이로서 흙일꾼다운 매무새를 아이한테 보여주거나 물려주기란 힘들다. 어버이부터 흙놀이를 천천히 받아들이면서, 바쁜 걸음이나 재촉하는 뜀박질이 아닌, 철을 몸으로 맞아들이는 걸음에 맞추어 흙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차근차근, 열 해나 스무 해를 두고 느긋하게 흙살림을 살펴 내 집살림을 아이가 알뜰살뜰 받아먹게끔 손길을 내밀어야지 싶다.

 흙놀이를 하고 나면, 손바닥 텃밭 깨작질이더라도 등허리가 쑤셔 아이한테 ‘책 읽히기’를 못하기 일쑤이다. 참 미안하다. 그러나, 아이한테 읽히는 책에 깃든 이야기란, 흙놀이를 하는 삶이니까. 봄꽃과 봄나무를 그려 넣은 책을 읽히지 않더라도, 아이 눈으로 봄꽃과 봄나무를 보도록 하면 되니까. 멧새와 파란하늘 나온 그림책을 굳이 읽히기보다, 멧새 소리를 텃밭에 맨발로 서서 듣고, 파란하늘을 호미질을 멈추고 허리를 두들기며 가만히 올려다보며 느끼면 되니까. (4344.4.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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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겹살과 책읽기


 딱히 고기를 즐겨먹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굳이 고기를 찾아서 먹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풀을 더 좋아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푸성귀만 먹어도 배부르기 때문은 아닙니다. 고기를 길러서 잡아 먹는 일이 어떠한가를 알기 때문은 아닙니다. 펄떡펄떡 숨쉬던 짐승을 잡아 죽인 다음 차려서 먹는 고기가 끔찍하다고 여기기 때문은 아닙니다.

 발굽병이 터지기에 고기를 멀리할 까닭은 없습니다. 발굽병이 어느새 수그러들었다기에 고기를 찾아서 먹어야 할 까닭 또한 없습니다. 늘 살아가는 터전에 걸맞게 늘 먹는 밥을 살핍니다. 늘 지내는 곳에서 어깨동무하는 이웃하고 늘 살가이 어우러지는 길을 헤아리면서 즐길 밥을 생각합니다.

 오늘날 도시에서는 고기를 먹기 쉽고, 풀을 먹기도 쉽습니다. 오늘날 도시에는 짐승을 가두어 살을 찌우는 짐승우리가 없으며, 푸성귀를 기르는 밭이 없습니다. 아니, 도시에는 사람들이 날마다 먹어야 하는 밥을 얻는 논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먹을거리는 도시로 들어가서 도시에서 사고팔려 도시에서 쓰입니다. 쌀이든 밀이든 물고기이든 뭍고기이든 푸성귀이든, 도시에서 스스로 길러서 즐기는 먹을거리란 한 가지도 없으나, 도시에서는 모든 먹을거리가 아주 값싸면서 흔합니다.

 도시에는 책방이 많습니다. 작은 책방이 수없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도시에서는 책 하나 사들이는 일이 아주 쉽습니다. 좋다 여기는 책이든 훌륭하다 섬기는 책이든, 도시에서는 아주 손쉽게 장만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도시사람은 책 좀 읽어 볼까 생각하며 얼마든지 책 하나 손쉽게 얻어서 읽습니다. 도시사람은 영화 좀 볼까 생각하며 언제라도 영화관에 홀가분하게 찾아가서 가볍게 봅니다. 피자 한 판을 사서 먹든, 짜장면을 시켜서 먹든, 세겹살을 구워서 먹든, 무엇이거나 언제라도 아무렇지 않게 즐기거나 누립니다.

 글은 쉽게 쓰기 마련이고, 그림은 쉽게 그리기 마련이며, 사진은 쉽게 찍기 마련입니다. 골머리를 썩히면서 쓰는 글이나 그리는 그림이나 찍는 사진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 삶을 그대로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리며 사진으로 찍기 때문에, 글쓰기와 그림그리기와 사진찍기가 쉬울 뿐입니다. 꾸미거나 덧바를 수 없는 글쓰기요 그림그리기요 사진찍기일 뿐입니다. (4344.4.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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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과 책읽기


 돈을 갖고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합니다. 아이키우기가 되든 배움이 되든 책읽기가 되든 사랑이 되든, 돈을 갖고 움직일 때에는 어느 한 가지도 안 합니다. 왜냐하면, 돈을 갖고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기에 책을 사거나 빌려서 읽지는 않습니다. 돈이 있으니 책을 읽을 겨를이 넉넉하지는 않습니다. 돈이 없기에 책을 못 사거나 못 빌리거나 못 읽지는 않습니다. 돈이 없으니 책을 읽을 겨를이 모자라지 않습니다.

 돈이 있으면서 마음이 함께 있을 때에는 참으로 즐겁다 싶은 나날을 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돈이 없으면서 마음이 나란히 없을 때에는 더없이 괴롭다 싶은 나날에 허덕일는지 모르리라 생각합니다.

 돈이 없으나 마음이 있을 때에는, 책을 살 수 없다지만 빌리거나 얻어서 책을 읽습니다. 때로는 종이책 아닌 사람책을 읽고 자연책을 읽으며 삶책을 읽습니다. 사랑책을 펼치고 믿음책을 나누면서 일책과 놀이책을 어깨동무합니다.

 돈이 있으나 마음이 없기 때문에, 책을 사더라도 책알맹이를 꾸밈없이 받아안거나 받아먹지 못합니다. 책은 돈으로 읽지 않을 뿐더러, 이름값이나 권력으로도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책은 지식으로도 읽지 못합니다. 책은 계급이나 신분으로도 읽지 못합니다. 책은 오로지 착하거나 참답거나 고운 매무새 하나로 읽을 뿐입니다.

 마음이 있을 때에 읽는 책이 됩니다. 마음이 없을 때에는 그 어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책이 됩니다.

 물건으로서 책을 손에 쥘 수야 있겠지요. 노리개처럼 사람을 돈으로 부릴 수야 있겠지요. 돈이 많으니 넓디넓은 땅을 홀로 차지할 수 있겠지요. 돈이 많으니 아무 집안일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집이 으리으리하겠지요.

 내 마음은 나 스스로 일굽니다. 내 생각은 나 스스로 가다듬습니다. 내 말은 나 스스로 돌봅니다. 내 사랑은 나 스스로 가꿉니다. 내 믿음은 나 스스로 보듬습니다. 내 책은 나 스스로 읽을 뿐 아니라 내 책은 나 스스로 쓰고 엮습니다. (4344.4.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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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희


 노래꾼 이선희 님은 〈달려라 하니〉와 〈천방지축 하니〉 노래를 불렀다. 이 만화영화가 나중에 다시 나올 때에는 다른 사람 목소리가 흐르는데, 다른 사람이 이 만화영화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니, 이선희 님 목소리가 하니 삶하고 얼마나 잘 어울리거나 걸맞는지 새삼스레 깨닫는다. 마음속에서 활활 불타지만 겉으로 보기에 사람들은 하니라는 자그마한 아이 가슴에 무엇이 있는지, 아니 자그마한 아이 하니 가슴이 활활 불타오르는지조차 느끼지 못한다. 이러다가 이 작은 아이가 뜨겁게 활활 불타오르면서 솟구칠 때에 비로소 입을 쩍 벌리며 놀란다. 도무지 삭일 수 없는 아픔과 슬픔과 미움과 기쁨과 괴로움과 힘겨움과 고마움과 안타까움에 꿈과 사랑과 그리움이 뒤엉크러진 불꽃. 이선희 님은 노래를 부를 때에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저 목소리만 남다르거나 돋보이는 노래꾼이었을까. 응어리가 터럭만큼도 남지 않도록 활활 불태우는 노래꾼이었을까. 하니를 마음으로 껴안으면서 사랑하는 노래꾼이었을까. 저 스스로 하니와 같이 살아가며 외치는 노래꾼이었을까.

 “꼭 감은 두 눈 속에, 엄마 얼굴 아른아른, 사실은 보고 싶대. 왼발 깽깽 오른발 깽깽, 그렇게 홀로 선대.”

 기쁜 삶을 기쁜 빛으로 부르고, 슬픈 삶을 슬픈 바람으로 부르며, 즐거운 삶으로 일구는 노래가 가슴 시리도록 좋다. (4344.4.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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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책’은 다른 책


 일본이 독도를 일본땅으로 밝힌다고 한 일은 퍽 오래되었다. 이런 이야기가 언론에 뜰 때면 사람들이 크게 성을 내거나 목청을 돋운다. 그렇지만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한테 제대로 따졌다거나 앞으로 이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꾸짖었다는 이야기는 딱히 들은 적이 없다. 일본은 진작부터 정치에서뿐 아니라 교과서나 지도책에서 독도를 일본땅으로 적곤 했다. 한두 해 일이 아니라 쉰 해나 예순 해쯤 된 일이다. 젊은 일본사람뿐 아니라 나이든 일본사람이라면, 역사를 한결 깊이 들여다보면서 올바르게 깨우치자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여느 일본사람으로서는 독도라는 섬이 일본땅 아닌 한국땅이라고 생각하기란 어렵다. 아니, 여느 일본사람이라면 독도 같은 섬이 일본땅인지 아닌지를 살피지도 않겠지.

 일본은 참 무서운 나라이다. 이와 맞물려 한국도 참 두려운 나라이다. 무서운 나라 옆에서 두려운 짓을 고스란히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나라일을 똑바로 하라고 뽑아서 비싼 일삯 주면서 일을 맡기지 않았겠는가. 우리는 언제까지 독도 말썽을 한결같이 들어야 할까.

 아이들 그림책을 살피다가 《꾸러기 곰돌이》(웅진출판사)가 눈에 뜨여 오랜만에 들여다본다. 1985년에 처음 나온 《꾸러기 곰돌이》하고 ‘다른 책’이라 하는 《꾸러기 깐돌이》(지경사)는 1988년에 한국말로 옮겨졌지 싶다. 일본에서는 1976년에 《ノンタン》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왔다. 지난 2009년에는 《개구쟁이 아치》(비룡소)라는 이름으로 《꾸러기 깐돌이》가 새로 나왔다. 《꾸러기 곰돌이》는 1996년을 끝으로 ‘웅진출판사(웅진닷컴)’에서는 더 펴내지 않은 듯하고, 1998년부터 ‘세상모든책’이라는 출판사에서 새롭게 내놓는데, 2005년에 새판을 찍는다.

 나는 우리 아이한테 어떤 그림책을 보여주어야 좋을까 생각해 본다. 《꾸러기 곰돌이》를 읽혀야 할까, 《꾸러기 깐돌이》를 읽혀야 할까, 《ノンタン》을 읽혀야 할까, 《개구쟁이 아치》를 읽혀야 할까. 《꾸러기 곰돌이》는 곰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세 가지 ‘다른 그림책’은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네 가지 그림책은 ‘다른 책’이면서 다른 책이 아니다. 네 가지 그림책을 내놓은 사람들은 다 다른 마음이었고,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사람들한테 다 다르게 팔리면서 다 다르게 사랑받는다. 일본에서 《ノンタン》은 2800만 부가 넘게 팔렸고, 아직도 널리 잘 팔린다니까, 어쩌면 30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할 만한지 모른다. 내가 가진 2003년 판 《ノンタン》 낱권책 하나는 300쇄를 훌쩍 넘는다. 내가 가진 《꾸러기 곰돌이》 1990년 판은 12쇄인데, 나중에 20쇄를 찍었다는 말을 들었으며, 더 찍었는지 모르고, 출판사를 옮기며 얼마나 더 찍었는지는 잘 모른다.

 한국사람이 먹는 웬만한 과자나 가공식품은 일본에서 나온 웬만한 과자나 가공식품을 베꼈거나 훔쳤다. 한국사람이 어린 날 읽던 숱한 만화는 일본 만화를 베끼거나 훔쳤다. 한국사람이 아이한테 읽히던 예전 그림책은 으레 일본 그림책을 베끼거나 훔쳤고, 요사이는 저작권삯을 치르며 일본에서 사서 옮긴다. 2011년이라는 오늘날, 아직 이 나라 한국에서는 ‘다른 책’이 다르다고 하면서 나온다.

 하기는, ‘새우깡’은 ‘캇빠세우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한국에서 ‘새우스넥’이 나왔을 때에 ‘새우스넥’은 베끼기(표절)라면서 판매중지가 되지 않았던가. 나는 일본이 무섭고 한국이 두렵다. 일본사람이 ‘김치’를 ‘기무치’라고 팔아먹는다고 호들갑이지만, ‘초코파이’는 ‘엔젤파이’가 아니었던가. ‘초코파이’는 일본이고 중국이고 ‘초코파이’라는 이름으로 잘도 팔지 않는가. (4344.4.1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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