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2.3.17.


《곰이라고요, 곰!》

 프랭크 태슐린 글·그림/위정현 옮김, 계수나무, 2007.4.1.



비가 온다. 빗물을 느끼고 비노래를 듣는다. 조용히 민들레싹을 바라보고, 빗물이 톡톡 풀싹에 닿으면서 튕기는 무늬를 읽는다. 저렇게 높다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인데, 이 빗물을 맞고서 어떤 풀꽃나무도 안 다친다. 사람도 안 다친다. 사람이나 돌이 저 높은 하늘에서 떨어지면 풀꽃나무도 사람도 다치겠지. 그러나 구름을 이룬 바닷물방울이 빗방울이란 몸으로 바뀌어 내릴 적에는 온누리를 포근히 어루만진다. 이 빗물에도 떨어지지 않는 꽃송이를 올려다본다. 빗물을 반기지 않는 마음으로 망가지는 우리 모습이기에 갑작스레 벼락비나 함박비가 쏟아진다고 느낀다. 《곰이라고요, 곰!》을 새로 읽었다. 우리말로는 1982년에 처음 나왔는데, 그때에 이 그림책을 눈여겨본 사람은 얼마쯤일까? 2007년에 새로 나올 즈음에도 썩 널리 눈여겨보지 않았으리라 느낀다. 2022년에는 좀 다를까? 우리가 스스로 숲을 잊으면서 숲빛을 잃고, 우리가 스스로 쳇바퀴나 톱니바퀴 노릇에서 멈추려 하면서 그만 우리 스스로 망가지는 나날이지 않은가? 곰은 숲에서 살아가기에 곰이다. 사람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 적에 사람일까? 새는 하늘하고 땅 사이를 날아서 새요, 풀벌레는 푸르게 이 별을 노래하기에 풀벌레이다.


#TheBearThatWasnt #FrankTash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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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2.3.16.


《신동엽전집 증보판》

 신동엽 글, 창작과비평사, 1975.6.5.첫/1999.4.10.15벌



민들레싹 셋을 찾는다. 아마 더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셋이 도드라진다. 어느덧 우리 집 꽃나무마다 흐드러지고, 이 꽃으로 찾아드는 벌떼가 윙윙 노래한다. 꽃나무 곁에 서서 벌떼소리를 듣노라면 ‘벌소리’ 아닌 ‘벌노래’로구나 싶다. 땅바닥에 자그맣게 봄꽃이 필 적에도 벌은 어느새 찾아온다. 어느 집에서 벌을 치기에 꿀벌이 찾아들기도 할 테지만, 사람손을 안 타면서 스스로 살림하는 꿀벌도 있다. 꽃꿀하고 꽃가루를 찾는 벌을 가만히 보면 여러 갈래 벌을 만난다. 오늘도 가볍게 이는 바람이다. 이제 자전거를 달리고 싶은 작은아이가 마당에서 애쓴다. 《신동엽전집 증보판》이 집에 있으나 굳이 한 벌 새로 장만해서 다시 읽어 보는데, 만만하지 않더라. 예전에는 마냥 아름답게 읽고 누린 글자락이었다면, 큰아이한테 읽힐 만하려나 하고 생각하며 읽으니 “아, 아니로구나. 해묵은 글이로구나.” 싶더라. 한자를 너무 많이 드러내어 쓰기도 했으나, 이보다는 순이를 보거나 다루는 글결이 그리 사랑스럽지 않다. 지난날에는 노래(시)에 다 이렇게 담았고 요새도 이렇게 담는 사람이 많다지만, 아름길을 바라는 어버이로서, 사랑꽃을 그리는 시골돌이로서, 신동엽 노래조차 아이들한테 못 읽히겠다. 내가 새로 쓰고, 더 찾아야겠구나.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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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2.3.15.


《조지와 마사》

 제임스 마셜 글·그림/윤여림 옮김, 논장, 2003.12.20.



작은아이랑 들길을 걸어서 면소재지 우체국을 다녀온다. 혼자 뛰고 달리기를 즐기며 다릿심을 붙이던 예전에는 어느 만큼 걷다가 안기거나 업히고는, 다시 뛰고 달렸다면, 열두 살을 맞이한 이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저 앞으로 먼저 달려가면서 논다. 들길을 호젓이 걷는다. 작은아이랑 걸으면 더 잰걸음이어야 한다. 글월을 부치고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호덕마을에서 멈추었다. 조금 더 가면 되나, 걷기만 하기보다 하늘을 누리고 바람빛을 머금으려 한다. 내내 하늘을 보며 걸으며 생각했는데, 구름은 바닷물방울로 이룬 하늘물결이로구나 싶다. 《조지와 마사》를 새로 읽었다. 두 물뚱뚱이(하마)는 마음결이 다르고 눈길이 다르다. 둘은 ‘사랑’이라는 마음이 똑같을 뿐, 삶결이며 손길이 다르다. 다른 둘이기에 다르게 만나고 다르게 얘기하다가 나란히 어우러질 새길을 찾는다. 예부터 우두머리가 서서 나라·마을을 다스리려 했기에 순이돌이가 서로 갈라치기를 했다고 느낀다. ‘근현대사·조선사’를 아이들한테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아이들은 갈라치기를 배울밖에 없다. 정작 우리가 가르칠 대목이란 ‘순이돌이가 다른 마음을 사랑이란 한빛으로 어우러지던 오랜 어깨동무하고 살림빛’이지 않을까? 갈라진 나날보다 하나인 나날이 길었다.


#GeorgeandMartha #JamesMarshall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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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2.3.14.


《축소지향의 日本人》

 이어령 글, 기린원, 1986.4.10.



1934년에 태어나 2022년 2월에 숨을 거둔 이어령 님이 남긴 책 가운데 《축소지향의 日本人》을 오랜만에 되읽어 본다. 곰곰이 되읽수록 루스 베네딕트 님이 쓴 《국화와 칼》을 흉내냈구나 싶다. 미국사람이 한겨레보다 일본사람을 어찌 더 잘 알 수 있겠느냐는 마음이 도사린 줄거리를 읽으면서, 글빛은 있되 삶빛은 얕다고 새삼스레 느낀다. 이어령 님은 ‘글을 읽어 책을 쓰기는 하되, 숲이나 마음으로는 읽지 않는 바람에, 이웃한테 넋을 새롭게 가꾸는 길을 들려주는 숨빛으로는 못 가는구나’ 하고도 느낀다. ‘잡아채는 눈’은 있으나 ‘디디는 발’이 얕고, ‘써내는 붓’은 있으나 ‘살림하는 손’은 없지 싶다. 큰아이랑 안개비를 맞으며 읍내마실을 한다. 우체국을 들르고 몇 가지를 장만한다. 우리 집 나무는 천천히 꽃잔치를 이룬다. 꽃잔치 다음에는 잎잔치를 펴겠지. 잎잔치 다음에는 풀벌레랑 개구리한테 둘러싸여 노래잔치로 나아갈 테고.


https://blog.naver.com/hbooklove/222208621854



이어령 님이 한창 붓발을 날릴 적에 낸 책이 있다. ‘제비’를 제비로 알아보지 못한 채 ‘참새’로 적었는데, 이분만이 아니라 꽤 많은 붓바치(지식인)가 제비랑 참새를 가릴 줄 모르는 모습을 오래도록 보았다. 냉이꽃이랑 꽃마리꽃을 못 알아보는 사람도 많고, 느티잎이나 뽕잎이 나물인 줄 모르는 사람도 많다. 그러고 보니 이어령 님은 ‘천경자 님 그림’을 둘러싼 실랑이에서 엉뚱한 짓을 벌였지. 지식에 갇힌 지식인이랄까.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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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2.3.13.


《청각장애 아이의 부모로 산다는 것》

 그레고리 마이외·오드레 레비트르 글·그림/김현아 옮김, 한울림스페셜, 2019.9.23.



고흥에는 두어 달 만에 비다운 비가 내린다. 바람도 시원스레 분다. 온통 촉촉하게 적시고 땅빛이 바뀐다. 처음 고흥에 깃들던 무렵만 해도 다른 고장에 먼지구름이 끼어도 고흥만큼은 없더니, 이제는 고흥도 다른 고장처럼 똑같이 먼지구름이 낀다. 나날이 시골숲이 밀리거나 깎이면서 햇볕판(태양광)으로 뒤덮이고, 흙도랑을 잿빛도랑(시멘트도랑)으로 바꾸어 놓으니, 더구나 밭마다 비닐을 가득 덮고, 죽음거름(화학비료)을 뿌린 비닐자루를 아무 데서나 태우거나 그냥 버리니, 시골이 갈수록 망가질 테지. “귀가 어둡다”란 이름으로 나온 책을 《청각장애 아이의 부모로 산다는 것》으로 옮겼는데, 책이름이 너무 길고, 가르침(교훈)을 어렵게 담으려 한다고 느낀다. 이 책에서도 나오는데, 다들 아이를 배움터(학교)에 꼭 집어넣으려 하면서 끝없이 싸운다. 배움터에 애써 보내어도 동무를 사귀지 못하고 따돌림에 괴로운 아이들인데, 끝까지 배움터만 바라보면서 믿으려고 한다면, 아이는 어떻게 이 터전에서 살아갈까? 허울만 좋은 ‘모둠(통합)’이다. ‘장애인 통행권’을 자꾸 땅밑길(지하철)에서만 외치려 하는데, ‘여느 거님길’부터 엉망이다. 걸어다닐 수 없는 거님길부터 다스릴 줄 안다면 땅밑길은 저절로 바뀌리라 느낀다.


#Tombedansloreilledunsourde #AudreyLevitre #GregoryMahieux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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