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2.3.15.


《조지와 마사》

 제임스 마셜 글·그림/윤여림 옮김, 논장, 2003.12.20.



작은아이랑 들길을 걸어서 면소재지 우체국을 다녀온다. 혼자 뛰고 달리기를 즐기며 다릿심을 붙이던 예전에는 어느 만큼 걷다가 안기거나 업히고는, 다시 뛰고 달렸다면, 열두 살을 맞이한 이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저 앞으로 먼저 달려가면서 논다. 들길을 호젓이 걷는다. 작은아이랑 걸으면 더 잰걸음이어야 한다. 글월을 부치고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호덕마을에서 멈추었다. 조금 더 가면 되나, 걷기만 하기보다 하늘을 누리고 바람빛을 머금으려 한다. 내내 하늘을 보며 걸으며 생각했는데, 구름은 바닷물방울로 이룬 하늘물결이로구나 싶다. 《조지와 마사》를 새로 읽었다. 두 물뚱뚱이(하마)는 마음결이 다르고 눈길이 다르다. 둘은 ‘사랑’이라는 마음이 똑같을 뿐, 삶결이며 손길이 다르다. 다른 둘이기에 다르게 만나고 다르게 얘기하다가 나란히 어우러질 새길을 찾는다. 예부터 우두머리가 서서 나라·마을을 다스리려 했기에 순이돌이가 서로 갈라치기를 했다고 느낀다. ‘근현대사·조선사’를 아이들한테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아이들은 갈라치기를 배울밖에 없다. 정작 우리가 가르칠 대목이란 ‘순이돌이가 다른 마음을 사랑이란 한빛으로 어우러지던 오랜 어깨동무하고 살림빛’이지 않을까? 갈라진 나날보다 하나인 나날이 길었다.


#GeorgeandMartha #JamesMarshall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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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2.3.14.


《축소지향의 日本人》

 이어령 글, 기린원, 1986.4.10.



1934년에 태어나 2022년 2월에 숨을 거둔 이어령 님이 남긴 책 가운데 《축소지향의 日本人》을 오랜만에 되읽어 본다. 곰곰이 되읽수록 루스 베네딕트 님이 쓴 《국화와 칼》을 흉내냈구나 싶다. 미국사람이 한겨레보다 일본사람을 어찌 더 잘 알 수 있겠느냐는 마음이 도사린 줄거리를 읽으면서, 글빛은 있되 삶빛은 얕다고 새삼스레 느낀다. 이어령 님은 ‘글을 읽어 책을 쓰기는 하되, 숲이나 마음으로는 읽지 않는 바람에, 이웃한테 넋을 새롭게 가꾸는 길을 들려주는 숨빛으로는 못 가는구나’ 하고도 느낀다. ‘잡아채는 눈’은 있으나 ‘디디는 발’이 얕고, ‘써내는 붓’은 있으나 ‘살림하는 손’은 없지 싶다. 큰아이랑 안개비를 맞으며 읍내마실을 한다. 우체국을 들르고 몇 가지를 장만한다. 우리 집 나무는 천천히 꽃잔치를 이룬다. 꽃잔치 다음에는 잎잔치를 펴겠지. 잎잔치 다음에는 풀벌레랑 개구리한테 둘러싸여 노래잔치로 나아갈 테고.


https://blog.naver.com/hbooklove/222208621854



이어령 님이 한창 붓발을 날릴 적에 낸 책이 있다. ‘제비’를 제비로 알아보지 못한 채 ‘참새’로 적었는데, 이분만이 아니라 꽤 많은 붓바치(지식인)가 제비랑 참새를 가릴 줄 모르는 모습을 오래도록 보았다. 냉이꽃이랑 꽃마리꽃을 못 알아보는 사람도 많고, 느티잎이나 뽕잎이 나물인 줄 모르는 사람도 많다. 그러고 보니 이어령 님은 ‘천경자 님 그림’을 둘러싼 실랑이에서 엉뚱한 짓을 벌였지. 지식에 갇힌 지식인이랄까.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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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2.3.13.


《청각장애 아이의 부모로 산다는 것》

 그레고리 마이외·오드레 레비트르 글·그림/김현아 옮김, 한울림스페셜, 2019.9.23.



고흥에는 두어 달 만에 비다운 비가 내린다. 바람도 시원스레 분다. 온통 촉촉하게 적시고 땅빛이 바뀐다. 처음 고흥에 깃들던 무렵만 해도 다른 고장에 먼지구름이 끼어도 고흥만큼은 없더니, 이제는 고흥도 다른 고장처럼 똑같이 먼지구름이 낀다. 나날이 시골숲이 밀리거나 깎이면서 햇볕판(태양광)으로 뒤덮이고, 흙도랑을 잿빛도랑(시멘트도랑)으로 바꾸어 놓으니, 더구나 밭마다 비닐을 가득 덮고, 죽음거름(화학비료)을 뿌린 비닐자루를 아무 데서나 태우거나 그냥 버리니, 시골이 갈수록 망가질 테지. “귀가 어둡다”란 이름으로 나온 책을 《청각장애 아이의 부모로 산다는 것》으로 옮겼는데, 책이름이 너무 길고, 가르침(교훈)을 어렵게 담으려 한다고 느낀다. 이 책에서도 나오는데, 다들 아이를 배움터(학교)에 꼭 집어넣으려 하면서 끝없이 싸운다. 배움터에 애써 보내어도 동무를 사귀지 못하고 따돌림에 괴로운 아이들인데, 끝까지 배움터만 바라보면서 믿으려고 한다면, 아이는 어떻게 이 터전에서 살아갈까? 허울만 좋은 ‘모둠(통합)’이다. ‘장애인 통행권’을 자꾸 땅밑길(지하철)에서만 외치려 하는데, ‘여느 거님길’부터 엉망이다. 걸어다닐 수 없는 거님길부터 다스릴 줄 안다면 땅밑길은 저절로 바뀌리라 느낀다.


#Tombedansloreilledunsourde #AudreyLevitre #GregoryMahieux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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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2.3.12.


《할아버지, 바다가 넓어요》

 고미 타로 글·그림/편집부 옮김, 달리, 2003.8.16.



솎아낸 어린 후박나무 한 그루를 마저 옆울타리 기스락에 옮겨심는다. 큰아이하고 읍내마실을 다녀온다. 어느새 더운 낮이다. 남녘은 겨울이 천천히 찾아들고 여름이 일찍 찾아온다. 저녁에 핀 매화나무 흰꽃을 본다. ‘매화’라는 이름에 ‘꽃’이라는 말이 깃드는데, 먼먼 옛날에는 나무이름을 어떻게 썼을까? 아마 나라면 살구나무나 멀구슬나무를 생각하면서 ‘말구나무’ 같은 이름을 붙였으리라 생각한다. “말갛게 구슬같은 꽃하고 열매를 맺는 나무”라는 뜻으로 ‘말구나무’이다. 《할아버지, 바다가 넓어요》는 어른하고 아이가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고 마주하면서 맞아들여 누리는가 하는 줄거리를 슬기롭고 재미나게 들려준다. ‘책을 아무리 읽어도 삶을 알 길은 없’는데, 배움터(학교)나 집이나 마을이나 나라(정부)는 너무 글에 얽매인다고 느낀다. 사랑은 글로 못 가르친다. 살림도 글로 안 가르친다. 밥짓기나 집짓기나 옷짓기를 책으로 배우나? 아니다. 어린이하고 푸름이한테 어깨동무(페미니즘)를 들려주거나 가르칠 적에도 부디 책은 내려놓고서 삶·살림으로 슬기롭게 사랑을 펴는 몸짓을 보일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바다를 바라보지 않고서야 바다가 넓은 줄 어찌 알며, 바다라는 곳부터 모르겠지.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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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2.3.11.


《다시쓴 우리말 어원이야기》

 조항범 글, 한국문원, 1997.10.15.



쉬면서 가다듬고, 또 일어나서 일하고, 다시 쉬면서 돌아보고, 새로 일어나서 일손을 잡는다. 언제나 하루는 쉬고 일하고 쉬며 일하다가 문득 모두 내려놓고서 마당이며 뒤꼍을 돌아보면서 하늘빛을 그리는 결로 흐른다. 먹고 입고 자는 삶길일는지 모르나, 그리고 돌보고 사랑하는 살림길을 걸으려고 한다. 《다시쓴 우리말 어원이야기》를 예전에 읽었으나 새삼스레 되읽는다. 글님은 ‘어원사전’을 새로 내놓기도 했는데, 예전 책에 적은 대목에서 거듭났을까, 아니면 제자리걸음일까. 우리 말글을 다루는 일을 하는 분들이 ‘대학교수’가 아닌 ‘살림꾼’이라는 자리에 서기를 바란다. ‘대학교수’란 자리를 버티려 하니 그만 생각을 펴기보다는 생각을 닫는 길에 서더라. 집안일을 하고 집밖일도 하며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는 길에 선다면, 우리가 쓰는 모든 말글은 글바치(지식인) 머리가 아닌 살림꾼(생활인·서민·평민·백성·국민) 손길에서 태어난 줄 알아채리라. 머리로만 말밑(어원)을 좇으면 뜬금없거나 엉뚱한 데로 빠진다. 뜬금길이나 엉뚱길은 나쁘지 않다. 헤매다 보면 뜻밖에 새길도 찾으니까. 그러나 모든 말은 삶·살림·사랑이라는 눈길하고 손빛에서 헤아려야 비로소 수수께끼를 푼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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