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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13. 꽃말과 사랑말
― 삶과 마음을 가꾸는 말

 


  제비꽃 모습을 잘 보여주는 책 《특징으로 보는 한반도 제비꽃》(지성사,2013) 을 읽다가 33쪽에서 “운동회 날에는 달리기, 오자미 놀이, 기마전 같은 단체 경기에서” 같은 대목을 봅니다. 책을 가만히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책을 쓴 분은 ‘오자미’라고 적는데, 나는 어릴 적에 ‘오재미’라고 말했어요. 1982∼1987년에 아직 국민학교라는 이름 쓰던 학교를 다니는 동안, 교사와 둘레 어른은 으레 ‘오재미’라 했어요. 그무렵에는 ‘오재미·오제미·오자미’ 같은 낱말이 사투리처럼 조금씩 달리 쓰는 말인 듯 잘못 듣고 잘못 배웠습니다.


  학교에서 ‘오재미’를 마련해서 하나씩 가져오라 할 때마다 ‘천으로 주머니를 만들고, 속에 콩이나 쌀을 넣으라’ 했어요. 천주머니에 콩을 넣으면 ‘콩주머니’인 셈입니다. 모래를 넣으면 ‘모래주머니’ 되고, 쌀을 넣으면 ‘쌀주머니’ 돼요. 지난날에는 먹고살기 어렵던 가난한 집들 많아, 천주머니에 콩이나 쌀을 못 넣기 일쑤였어요. 동무들은 학교 운동장 한쪽을 파서 모래를 담고는 교실에서 바느질을 해서 모래주머니를 내놓곤 했어요.


  콩이나 쌀 아닌 모래 넣은 주머니를 내면, 교사들은 아주 싫어했어요. 모래 담은 천주머니는 몇 번 던지면 가는 모래가 술술 빠져나오며 못 쓰게 되었거든요.


  그나저나, ‘오재미’이든 ‘오제미’이든 ‘오자미’이든 모두 일본말이에요. 일본에서는 콩을 넣은 주머니를 던지며 노는 ‘お手玉(오테다마)’가 있다고 해요. 이 ‘오테다마’가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말꼴이 살짝 바뀌었어요. 국어사전을 살피면 ‘오자미’라 쓰지 말고 ‘놀이주머니’로 고쳐쓰라 나와요. 그런데, 정작 국어사전 올림말로 ‘놀이주머니’도 없고 ‘콩주머니’도 없어요. 올바로 고쳐쓸 한국말을 외려 안 싣고, 일본말만 실은 국어사전이에요.


  사람들 말씀씀이를 살펴봅니다. 아직도 ‘리어카’나 ‘바께쓰’나 ‘오라이’ 같은 일본말 아무렇지 않게 쓰는 사람 퍽 많아요. ‘손수레’나 ‘양동이’나 ‘좋아’ 같은 한국말을 써야 알맞고 바르며 고운 줄 못 깨닫는 분 꽤 많아요. 때로는 한국말이 맛이 안 난다 여기며 일본말을 쓰기도 해요. 한국말 ‘병따개’로는 병을 따는 맛이 안 나고, ‘오프너’ 같은 영어를 써야 비로소 병을 따는 맛이 난다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공사장에서 일할 적에는 ‘막일’ 아닌 ‘노가다’라는 일본말을 써야 제대로 일하는 줄 여기곤 해요.


  《특징으로 보는 한반도 제비꽃》을 더 읽습니다. 115쪽에 “제비꽃 종류도 대부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이른 봄에 꽃이 피는 이른바 조춘早春 식물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이른 봄에 꽃이 피는”이라 말하다가 “조춘早春 식물”이라 말합니다. 쉽고 알맞게 “이른 봄에 꽃이 피는”이라 적었으면 이대로 글을 마무리지어 “이른 봄에 꽃이 핀다”라든지 “이른 봄에 꽃이 피는 특징이 있다”처럼 하면 되지요. 애써 ‘조춘’이라는 어려운 한자말 끌어들이고서, 다시 한자로 ‘早春’처럼 붙여야 하지 않아요. 오히려 이렇게 붙이니 말이 어렵고, 뜻이 뒤죽박죽 섞여요.


  학문을 하며 쓰는 낱말로 ‘조춘 식물’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 글월을 헤아리면, 학문을 할 적에도 ‘이른봄 식물’이나 ‘이른봄꽃’처럼 쉽게 새 낱말 빚을 만해요. 더 생각해 보면, 한자말로만 ‘조춘’이라 한 낱말 쓸 노릇 아니라, 한국말로도 ‘이른봄·이른여름·이른가을·이른겨울’처럼 쓸 수 있어요. 국어사전에는 ‘첫봄·첫여름·첫가을·첫겨울’ 같은 낱말 실려요. ‘조춘·조하·조추·조동’처럼 알쏭달쏭한 한자말은 안 써도 즐겁습니다. 아니, ‘조하’나 ‘조동’이라는 낱말이 무엇인지 알 사람은 아주 적어요.


  제비꽃은 이른 봄에 핍니다. 곧, ‘이른봄꽃’입니다. 찔레꽃은 늦은 봄에 핍니다. 곧, ‘늦봄꽃’입니다. 모과꽃이나 탱자꽃이나 붓꽃은 한창 무르익은 봄에 핍니다. 곧, ‘한봄꽃’이에요. 감꽃은 봄이 저물고 여름이 다가올 무렵에 피니, ‘이른여름꽃’ 또는 ‘첫여름꽃’이 됩니다. 바야흐로 가을이나 겨울 다가올 적에 피는 꽃은 ‘가을꽃’과 ‘겨울꽃’ 될 텐데, 철을 더 헤아려 ‘늦가을꽃’이나 ‘첫겨울꽃’ 같은 낱말 새삼스레 빚을 수 있습니다.


  눈은 겨울에 내려 ‘겨울눈’인데 봄까지 내리면 ‘봄눈’입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가르면 ‘일월눈’이나 ‘이월눈’, 그리고 ‘삼월눈’과 ‘사월눈’처럼 쓸 수 있습니다. 바람을 두고 ‘오월바람’과 ‘유월바람’이라 쓸 수 있어요. 하늘을 놓고 ‘칠월하늘’과 ‘팔월하늘’이라 쓸 수 있고, 비를 가리켜 ‘구월비’와 ‘시월비’라 쓸 수 있어요.


  하루하루 흐르는 삶을 바라보며 말 한 마디 짓습니다. 삶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말을 즐겁게 짓습니다. 즐거운 삶에서 즐거운 말 샘솟는 동안, 내 마음에도 즐거움 샘솟고, 즐거움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이웃과 동무를 사귀면서, 시나브로 사랑씨앗 한 톨 맺습니다. 내 마음에도 사랑씨앗을 한 톨 심고, 이웃 마음에도 사랑씨앗을 한 톨 심습니다. 알맞고 바르며 아름다운 말로 생각을 가다듬고 삶을 빛내는 사이, 어느덧 내 꿈과 사랑도 알맞고 바를 뿐 아니라 아름답게 거듭납니다.


  꽃을 생각하니 꽃다운 말이 됩니다. 사랑을 생각하니 사랑스러운 말이 됩니다. 웃음을 생각하니 웃음 넘치는 말이 됩니다. 기쁨을 생각하니 기쁨 가득한 말이 됩니다. 삶을 가꾸듯 말을 가꿉니다. 삶을 가꾸듯 말을 가꾸면서 마음을 나란히 가꿉니다. 말을 가꾸면서 삶을 가꿉니다. 말을 가꾸는 몸가짐으로 마음을 함께 가꿉니다. 말과 마음을 가꾸면서 저절로 삶을 가꾸고 사랑을 가꿉니다.


  꽃내음 나누려는 마음일 때에는, 내 마음 담아서 나타내는 말마디에 꽃내음 찬찬히 묻어납니다. 사랑빛 함께하려는 생각일 때에는, 내 사랑 드러내려는 말마디에 사랑스러운 빛줄기 곱다시 드리웁니다. 전문가나 학자가 ‘오자미’라는 낱말 파헤쳐 고쳐쓰라 일컫기 앞서, 아이들과 살아가는 여느 어버이와 교사 스스로 고운 넋 담는 고운 말 쓰면서 고운 삶 되기를 빕니다. 학문하는 사람이 전문으로 쓰는 낱말에도 따사롭고 살가우며 넉넉한 숨결 북돋우는 마음 깃들 수 있기를 빕니다. 4346.5.2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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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9. 봄제비와 봄들꽃
― 고운 생각에서 태어나는 고운 말

 


  제비는 철새입니다. 철 따라 둥지 틀 자리를 새로 찾아서 날아다니기에 철새입니다. 참새는 텃새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한 곳에서 보금자리를 틀어 살아가기에 텃새입니다.


  고흥 시골집에 봄날 제비가 찾아듭니다. 지난해에는 4월 봄에 찾아들더니, 올해에는 3월 봄에 찾아들어요. 올해에는 참 일찍 오는군요. 왜 이리 일찍 오는가 알쏭달쏭합니다. 이 나라 날씨가 차츰 따스해지니까, 아니 더워지니까, 제비도 일찍 찾아올까요.


  아침에 째째째째 하는 소리를 들으며 제비가 찾아온 줄 깨닫습니다. 지난해에는 들마실을 하며 제비 날갯짓을 처음 만났고, 올해에는 우리 집 처마 밑 둥지에서 지난해 알을 깐 제비 세 마리가 노니는 모습을 보며 제비 노랫소리 새삼스레 느낍니다. 그래, 이제 너희가 이곳에서 짝을 찾아 알을 낳고 새끼 돌보려 한다면, 똥받이를 달아야겠구나.


  제비가 둥지에서 새끼들 똥을 받아 밑으로 버리니, 똥을 받아낼 나무판을 대야 합니다. 제비똥 받는 나무판이니, 말 그대로 똥받이입니다. 똥받이를 대지 않으면, 처마 밑은 온통 똥바다가 돼요.


  제비가 봄에 찾아오니, 봄철을 일컬어 제비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비가 찾아드는 이맘때는 꽃이 바야흐로 피어나는 철이기에, 봄철은 꽃철이라 달리 일컬을 수 있습니다. 재미나게 말을 엮는다면, 봄제비철이나 봄제비꽃철이나 봄꽃철이나 봄꽃제비철처럼 새 낱말 지을 수 있어요. 봄날 봄꽃 마실을 누리는 사람은 봄마실을 하는 셈이요, 봄꽃마실 즐기는 셈입니다. 봄에 피는 꽃이기에 봄꽃이면서, 봄들꽃이라 할 수 있어요. 멧골에서 피는 봄꽃은 봄멧꽃이라 해도 어여쁩니다.


  봄에는 그야말로 온통 봄입니다. 봄바람, 봄꽃가루, 봄구름, 봄하늘, 봄볕, 봄나무, 봄밭, 봄노래, 봄새, 봄아이, 봄놀이, 봄들, 봄바다, 봄밥, ……. 여름에는 여름바람을 비롯해서 여름밥까지 있고, 가을에도 겨울에도 새삼스러운 하루를 누리면서 새로운 이름 하나 얻습니다.


  내 곁에서 사랑을 속삭이며 서로를 지키는 짝꿍은 곁지기이면서 옆지기입니다. 곁에 있어 곁지기요, 옆에 있어 옆지기입니다. 책방을 지키는 일꾼은 책방지기요, 도서관을 지키는 일꾼이라면 도서관지기입니다. 나라를 보살피는 일꾼은 나라지기라 할 만하고, 겨레 삶을 북돋우려 하는 일꾼은 겨레지기라 할 수 있어요. 문화를 가꾸는 일꾼은 문화지기요, 교육을 살찌우는 일꾼은 교육지기입니다. 은행지기, 가게지기, 식당지기, 마을지기, 학교지기처럼 ‘-지기’라는 말마디로 말샘을 퍼올리면 즐겁습니다. ‘-지기’를 더 헤아리면, 하늘지기, 흙지기, 시골지기, 사랑지기, 꿈지기, 이야기지기처럼 남다른 지기를 생각할 수 있고, 노래지기, 아이지기, 책지기, 웃음지기처럼 여러 갈래로 생각을 넓힐 만합니다.


  1989년에 처음 나온 《우리글 바로쓰기》(이오덕 씀,한길사 펴냄)라는 책을 찬찬히 되읽습니다. 이 책을 쓴 이오덕 님은 “훌륭한 문학의 업적을 남긴 분도 아이들에게 잘못된 말을 가르쳐 우리 말을 병들게 했을 경우, 그 잘못을 드러내어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13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 그렇습니다. 아무리 훌륭하다 싶은 문학을 일군 분이라 하더라도, 알맞지 못하고 바르지 못하며 슬기롭지 못한 글을 써서, 엉뚱한 글투를 퍼뜨리고 만다면, 이 대목은 나무랄밖에 없어요. 나무라면서 바로잡거나 바로세워야지요. 알맞고 바르며 슬기로운 말과 글이 되도록 힘쓸 노릇입니다. 이오덕 님은 “통속적이 아닌 말, 고상한 말을 표준말로 삼는다고 중류사회의 말을 쓰다 보니 농민의 말, 민중의 말은 ‘통속적인 말’로 버림받고, 사전에까지 ‘통속적’이라 풀이해 놓는 것 아닌가(18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을 여러 차례 되읽고 곱읽으면서 생각을 갈무리해 봅니다.


  봄날 피는 봄꽃 가운데 맨 먼저 피는 꽃은 ‘봄까지꽃’이에요. 늦겨울에 처음 꽃봉오리 터뜨리고, 봄이 저물 무렵 꽃도 저물기에, 참말 봄까지만 피는 꽃이라서 ‘봄까지꽃’이라고 해요. 그러나, 퍽 많은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식물학자한테서 식물학 배운 한국 식물학자가 일본 풀이름을 고스란히 옮겨서 퍼뜨린 ‘개불알풀꽃’이라는 낱말을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일제강점기 찌꺼기라 할 꽃이름을 바로잡자고 여러 사람이 애썼는데, 그만 어느 시인이 ‘봄까지꽃’ 말밑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봄까치꽃’이라 시에 잘못 쓴 적 있어요. 봄과 까치가 잘 어울려서 ‘봄까치꽃’인 줄 잘못 알았다고 하지요. 이리하여,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 꽃이름을 옳게 모르는 채, 오늘날까지 ‘개불알풀꽃’과 ‘봄까치꽃’이라 잘못 쓰는 사람 퍽 많습니다. 언제쯤 봄꽃 이름 하나 살가이 건사할 수 있을까요.


  봄까지꽃이 피고 나면 곁에서 별꽃이 피어요. 별을 닮아 별꽃이라 하는데, 별꽃은 별꽃나물이라 하기도 해요. 별꽃이 피면, 이윽고 코딱지나물꽃이 피어요. 시골사람은 코딱지나물꽃이라 하고, 식물학자는 이런 이름이 ‘통속적’이라 해서 ‘광대나물꽃’이라고 꽃이름을 다르게 붙였어요. 국어사전을 뒤적이면 ‘광대나물’이라는 이름만 오르지, ‘코딱지나물’이라는 이름은 못 올라요.


  ‘애호박’은 작은 호박이라서 애호박입니다. 서울에는 애오개라는 데가 있는데, 작은 고개라서 애오개입니다. 그러나, 애오개가 작은 고개인 줄 미처 살피지 못한 예전 지식인들은 ‘아현동’이라고 동네 이름을 한자로 옮겨적으면서 ‘阿峴’이라 붙였어요. 왜 한겨레가 예부터 익히 가리키던 땅이름으로 동네 이름을 붙이지 못할까요. 골안마을, 무너미마을, 한티재 같은 이름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쓰면서, 땅이름을 비롯해서 먼먼 옛날 사람들 넋을 돌아본다면 역사와 문화와 삶을 한결 슬기롭게 돌아볼 수 있을 텐데요.


  고운 생각에서 고운 말이 태어난다고 느낍니다. 고운 사랑에서 고운 이야기 자란다고 느낍니다. 먼 옛날 옛적 누군가, ‘풀’, ‘하늘’, ‘보리’, ‘꿈’, ‘아이’, ‘빛’, ‘누리’, ‘무지개’ 같은 낱말을 어떤 사랑으로 지었을까 가만히 헤아립니다. 오늘 이곳에서 내가 사랑 하나로 빚을 새로운 말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4346.3.2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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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11. 바람소리와 숨소리
― 아이들한테 말을 가르치는 사람

 


  시골마을에서는 으레 마루문이나 창문을 열고 하루를 누립니다. 시골에서는 사람 귀를 거슬리는 소리는 웬만해서는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 경운기 지나가는 소리에, 장사꾼 짐차 알리는 소리, 마을방송 소리, 이런저런 자동차와 방송 소리 있지만, 이들 몇 가지 소리를 빼면 고즈넉한 시골소리 살그마니 스며듭니다. 이를테면, 이른새벽부터 늦은밤까지 들새와 멧새가 노랫소리 들려줍니다. ‘새소리’이지요. 문을 열고 바깥바람 들어오도록 하면, 바깥소리 함께 들리는데, 시골마을 감도는 새소리는 한두 가지나 몇 가지 아닙니다. 종달새인가 찌르레기인가 아직 알쏭달쏭하다고 느끼지만, 아마 종달새도 찌르레기도 맞구나 싶은 새소리를 듣고, 뻐꾸기 노래를 들으며, 박새와 동고비 노래를 듣습니다. 노랑할미새 노래를 듣고, 직박구리 노래를 들어요. 제비와 멧비둘기와 까치와 까마귀와 참새도 여러 새소리 사이에 노랫소리 섞습니다. 저녁에는 소쩍새와 휘파람새 노래를 들려주고, 사월에서 오월로 넘어설 무렵에는 개구리 노랫소리 한껏 무르익을 테지요.


  그러나, 시골마을에서 지내더라도 마루문을 열지 않으면 새소리를 듣기 어렵습니다. 시골 들판에서 일하고, 시골 밭자락에서 일하며, 시골 숲속에서 마실을 누리지 않으면 새소리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시골학교 다니는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버스나 자가용 타고 학교를 오가면, 시골을 온통 채우는 새소리하고 멀어져요. 버스 구르는 소리와 자가용 달리는 소리를 내내 듣겠지요. 버스나 자가용을 안 타더라도 손전화 매만지거나 귀에 소리통 꽂고 대중노래를 들으면, 이때에도 시골소리하고는 멀찍이 떨어질 테고요.


  바람이 불어 후박나무 가지를 건드립니다. 바람이 동백잎과 동백꽃을 건드립니다. 사월에 흐드러진 풀빛 꽃망울 한가득 터뜨리는 느티나무는 꽃잎과 나뭇잎이 사르락사르락 부대끼면서 새로운 풀노래 들려줍니다. 느티꽃이 지는 오월되면 짙푸르게 빛나는 느티잎이 어우러지며 새로운 풀노래 들려주지요. 가을에는 붉게 물드는 잎사귀 얼크러지는 새로운 풀노래 들려줍니다. 철마다 다르고, 날마다 다른 소리예요.


  밭뙈기에 옹크리고 앉아 흙을 만지고 풀을 돌보노라면, 앉은뱅이 나즈막한 꽃대를 건드리는 바람을 쐽니다. 들바람이요 흙바람이자, 봄꽃바람입니다. 가느다란 냉이꽃대 건드리는 봄바람과 굵직한 유채꽃대 흔드는 봄바람은 소리와 냄새와 빛깔이 다릅니다. 민들레꽃 건드리는 봄바람과 딸기꽃 건드리는 봄바람은 또 소리와 냄새와 빛깔이 달라요. 탱자꽃 건드리는 봄바람과 찔레꽃 건드리는 봄바람은 또 이대로 소리와 냄새와 빛깔이 다르지요.


  눈을 감고 소리를 듣습니다. 눈을 감고 소리를 헤아립니다. 저마다 어떤 소리인가 하고 가만히 생각합니다. 참새는 ‘짹짹’ 하고 노래하지 않습니다. 개구리는 ‘개굴개굴’ 하고 노래하지 않습니다. 귀뚜라미와 풀무치와 방아깨비 풀벌레 풀노래 소리결 또한 모두 다르며, 어떤 틀에 박힌 글로 적바림할 수 없습니다. 왜가리는 어떤 소리를 내며 울까요? 제비는 어떤 소리를 내며 처마 밑 둥지에 깐 새끼한테 먹이를 물어다 나를까요? 시골마을에 깃든 초등학교에서 아이들 맡아 가르치는 분들은 시골아이한테 어떤 소리를 들려주고, 어떤 빛깔을 보여주며, 어떤 무늬를 깨닫도록 북돋울까요? 도시 한복판에 있는 초·중·고등학교 교사는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한테 어떤 소리·모습·빛깔·무늬를 보여주거나 알려주거나 밝힐 수 있을까요?


  강성미 님이 쓴 《내 아이가 사랑한 학교》(샨티,2013)라는 책을 읽다가, 217쪽에서 “난 속으로 ‘휴!’ 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하는 대목을 보고, 234쪽에서 “어휴, 민주한테 얼마나 고마운지.” 하는 대목을 봅니다.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이 책을 쓴 강성미 님은 한숨소리를 아직 옳게 가누지 못합니다. 이 책을 내놓은 출판사 편집부 일꾼도 한겨레 한숨소리를 어떻게 적을 때에 알맞은가 하는 대목을 미처 살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국사람 스스로 아예 모르지는 않는 한숨소리예요. 다만, 제대로 가르치는 어른 드물고, 올바로 이야기하는 어른 찾아보기 힘들며, 저마다 입시공부와 영어공부에 얽매여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슬기롭게 가다듬는 길은 좀처럼 느긋하게 들려줄 틈이 없을 뿐이로구나 싶어요.


  자, 숨을 한 번 들이켜봐요. 어떻게 들이켜나요. 후우우욱 들이켜겠지요. 턱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겨 봐요. 어떻게 생각에 잠기나요. 으흐흐흐흠 생각에 잠기겠지요. 아이들이 뭔가 잘못했을 때에 어떤 숨소리 새어나오나요. 아이구, 으이구, 아유, 같은 말이 절로 나오겠지요.


  예부터 한겨레 어느 누구도 숨소리를 잘못 적은 일 없어요. 왜냐하면, 어른들은 이녁 어버이한테서 말을 곱게 물려받았고,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말을 이녁 스스로 어른 되어 아이들 낳으면 다시 곱게 물려주었어요. 이런 삶을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 해 이었어요. 이러다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와 해방과 미군정과 한국전쟁과 분단과 온갖 아프고 힘겨운 나날 이어지면서 ‘어른이 아이한테 말 슬기롭고 올곧게 물려주던 삶’이 와르르 무너졌어요.


  한국과 이웃한 일본에서는 한숨을 내쉬는 소리를 ‘휴’로 적습니다. 한국사람은 ‘후유’로 적습니다. 또는 ‘히유’로 적어요. 때로는 ‘어휴’나 ‘아휴’가 되지요. ‘으흠’이나 ‘에헴’처럼 숨소리를 내요.


  아주 조그마한 대목이라 할 숨소리예요. 아주 자그마한 자리라 할 새소리이고 벌레소리예요. 그런데,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아주 조그마한 대목 올바로 들려주지 못하면 아이들은 올바르지 않은 말을 늘 듣고 으레 따라해요. 우리 어버이들이 아이들 앞에서 아주 자그마한 자리 슬기롭고 해맑게 밝혀 말을 하거나 글을 쓰지 못하면, 우리 아이들은 제대로 된 한국말하고 자꾸 멀어져요. 집에서부터 어버이 누구나 알맞고 아름답게 말할 수 있기를 빌어요. 그리고, 학교에서 교사 자리에 있는 분들 모두 사랑스러우면서 포근하고 넉넉한 넋으로 말과 글을 들려줄 수 있기를 빌어요. 4345.4.1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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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모두 알거나 모두 모르는 말

 


  우리가 쓰는 말은 모두 아는 말이거나 모두 모르는 말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을 가만히 돌아보면, 국어사전을 그때그때 들추면서 이야기를 하거나 글을 쓰는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그러니까, 어느 모로 보면 모두들 ‘어느 말이든 다 안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을 살피면 제때 제자리에 제대로 옳거나 바르게 쓰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어느 말이든 다 안다’ 하듯이 쓰는 말이지만, 정작 ‘서로서로 어느 말이든 다 모른다’고 할 만해요.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불랑제》(포노,2013)라는 책을 읽다가 115쪽에서 “그 잊지 못할 말을 쓰는 사람은 한편으로 새로운 것을 지어내고, 또 한편으로는 언어의 속성을 압니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줄거리가 좋구나 싶어 밑줄을 긋고 여러 차례 되읽다가 문득 한 가지 더 깨닫습니다. 이 글월은 앞과 뒤가 살짝 어긋나는군요. 보기글 앞쪽에는 “잊지 못할 ‘말’”이라 적지만, 보기글 뒤쪽에는 “‘언어’의 속성”이라 적어요. 한쪽은 ‘말’이고, 다른 한쪽은 ‘언어’예요.


  국어사전을 뒤적이면, ‘말’을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쓰는 음성 기호”라 풀이합니다. ‘언어(言語)’는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에 쓰는 음성, 문자 따위의 수단”이라 풀이해요. 자, 그러면 ‘말’과 ‘언어’는 서로 얼마나 어떻게 다를까요. 아니, 두 낱말은 다르다 할 수 있을까요. 두 낱말을 다르게 쓰거나 가르는 일은 얼마나 쓸모가 있을까요. 두 낱말을 애써 나란히 적어야 글쓴이 마음을 깊거나 넓게 나타낼 수 있나요.


  ‘사람’과 ‘인간(人間)’ 사이에서도 그래요. 어른들은 두 낱말을 조금 다른 자리에서 쓰지만, 아이들한테는 두 낱말이 똑같아요. ‘밥’과 ‘식사(食事)’라든지, ‘아침’과 ‘오전(午前)’, ‘빠른전철’과 ‘급행(急行)전철’, 또 ‘늦다’와 ‘지각(遲刻)하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은 쉽고 바르며 고운 말 한 가지만 쓰기를 바랍니다. 어렵거나 딱딱하거나 메마른 말은 재미없어요.


  한쪽은 한국말입니다. 다른 한쪽은 한국말 아닌 한자말입니다. 한겨레가 예부터 이 나라 삶터에 걸맞게 지어서 쓰는 낱말이기에 한국말입니다. 한국말을 쓰는 한겨레가 토박이말로는 어딘가 모자라거나 아쉽다고 여겨, 또는 한국 바깥에서 쓰는 말이 한겨레한테도 도움이 되거나 좋다고 여길 때에 받아들이면, 이 ‘한자말’인 ‘바깥말’을 한겨레도 쓸 수 있습니다. 곧, 한국말은 토박이말이고, 한자말은 바깥말, 그러니까 외국말입니다.


  오늘날 누구나 흔히 쓰는 ‘버스’와 ‘택시’는 틀림없이 영어입니다. 바깥말, 곧 외국말이에요. 그러나, 외국말이자 영어인 ‘버스’와 ‘택시’는 한국사람 누구나 즐겁게 쓰는 낱말이에요. 뿌리는 한겨레 삶터하고 걸맞지 않지만, 오늘날 흐름하고는 잘 어울리니까 받아들여서 씁니다. 이 흐름을 헤아린다면, ‘인간·식사·오전·급행·지각’ 들을 한겨레한테 도움이 된다고 할 때에는 넉넉히 받아들여 쓸 만해요. 이 낱말들이 한겨레한테 도움이 안 된다고 할 때에는 굳이 받아들일 까닭이 없으니 안 쓰면 돼요.


  나는 우리 시골집에서 우리 아이한테 ‘인간·식사·오전·급행·지각’ 같은 낱말을 안 씁니다. 쓸 일이 없습니다. 내 둘레 다른 사람들은 이 낱말을 쓰지만, 나와 아이들이 이 낱말을 써야 하지 않습니다. 나와 아이들이 이 낱말을 안 쓰고 다른 사람이 이 낱말을 쓰더라도 알아들어요.


  그나저나, “언어의 속성(屬性)을 압니다”는 무엇을 뜻할까요. 이와 같이 쓰는 말은 우리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먼저 ‘속성’이 무슨 뜻인지부터 살펴야겠지요. 이 한자말은 “사물의 특징이나 성질”을 뜻합니다. ‘특징(特徵)’은 또 “다른 것에 비하여 특별히 눈에 뜨이는 점”을 뜻해요. ‘특별(特別)’은 다시 “보통과 구별되게 다름”을 뜻하지요. 이룰 간추리자면 ‘속성’은 “어느 사물 하나가 다른 사물하고 다른 모습”을 일컫는다 할 수 있어요. “언어의 속성을 압니다”는 “말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압니다”라는 이야기이고, “말은 어떤 속살인가를 압니다”라든지 “말빛이 무엇인가를 압니다”라는 이야기가 되기도 해요.


  《아메나시 면사무소 산업과 겸 관광담당》(대원씨아이,2011)이라는 만화책 3권 23쪽을 읽습니다. “시식회가 아니라 스미오 팬모임 같구만.”이라는 글월을 봅니다. 빙그레 웃습니다. ‘팬모임’이라는 낱말에 눈을 번쩍 뜹니다. 그래요. ‘팬모임’이 될 테지요. ‘팬클럽(fan club)’이 아닌 ‘팬모임’이 될 테지요. ‘팬’이라는 낱말은 이럭저럭 쓴다 하더라도, ‘클럽’은 ‘모임’으로 얼마든지 거를 수 있어요. ‘동아리’로 풀어도 되지요.


  우리 스스로 조금 더 생각을 기울이면 ‘팬’이라는 영어도 살짝 풀어낼 만해요. “시식회가 아니라 스미오 좋아하는 모임 같구만.”이라 하든지 “시식잔치가 아니라 스미오 사랑모임 같구만.”이라 할 수 있어요. “맛보기잔치가 아니라 스미오잔치 같구만.”이라 해도 앞뒤가 잘 맞습니다.


  살려서 쓰려고 하면 살려서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이냥저냥 쓰려고 하면 그야말로 이냥저냥 쓰고 마는 말입니다.


  말 한 마디 읊을 적에 곰곰이 생각합니다. 나는 시골마을에서 두 아이와 살아가니까, 두 아이한테 밥을 차리는 마음을 가만히 생각합니다. 아이들한테 아무 밥이나 차려서 내밀 수 없고, 아이들한테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읊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 읽을 그림책을 아무것이나 값싸게 장만해서 건넬 수 없어요. 아이들이 아무 짓이나 함부로 해도 아름다울 수 없어요. 곧, 아이들한테 가장 맛나며 좋은 밥을 차려서 내줄 때에 즐겁고, 이러한 밥은 어른인 내가 먹을 때에도 즐겁습니다. 아이들이 듣기에 가장 곱고 쉬우며 맑은 말을 읊을 때에 아이들한테 반가우며, 이러한 말은 어른인 내가 듣거나 쓸 적에도 반갑습니다.


  사랑을 담은 밥일 때에 맛나게 먹고, 사랑을 담은 말일 때에 즐거이 나누며, 사랑을 담은 삶일 때에 서로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나날을 누립니다. 봄볕은 봄꽃을 곱게 피우고, 여름볕은 여름꽃을 환하게 피웁니다. 고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고운 말을 주고받고 싶습니다. 4346.3.2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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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서재이든 일기장이든, 글을 쓰는 분들이 '글이 무엇'이고 '말이 어떠한'가를 찬찬히 헤아리는 길에 살짝 도움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을 알맞게 '바로잡'거나 '고쳐써'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생각하며 말하고 글쓸' 때에 비로소 내 넋과 얼이 살아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2011년 1월 1일에 쓴 글인데, 여러 곳을 크게 손질해서 비로소 이곳에 걸칩니다. '새로운 우리 말글 이야기책'에 실을 원고를 추리면서 나 스스로 새삼스럽다고 느낍니다.

 

..


 ‘합니다’와 ‘하고 있습니다’

 


  다시금 새해를 맞이합니다. 새롭게 맞이한 해인 만큼 나이는 한 살 더 먹습니다. 내 나이는 서른이 되었다가 서른다섯이 되고 마흔을 지나 쉰과 예순을 거칠 테지요. 일흔이나 여든 아흔이나 백까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앞으로 몇 살까지 나이를 먹을 수 있을까 모르지만, 오늘 내 나이는 대단한 숫자가 아니요, 그리 많은 숫자 또한 아닙니다. 언제나 내 나이답게 살아가면서 내 나이에 걸맞게 생각하고 말을 하거나 글을 써야 올바르리라 생각합니다.


  새해 첫날, 내 글투는 어떠한가 하고 새삼스레 곱씹어 봅니다. 지난날 내 글투가 어떠했는가 가만히 헤아립니다. 1998년에 한글학회에서 주는 ‘한글공로상’을 참 어린 나이에 받기는 했으나, 이때에는 신나게 팔뚝질을 하듯이 운동을 했을 뿐, 참다이 말사랑이나 글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사회가 사회이다 보니 팔뚝질 아니고서는 사람들이 귀나 눈을 열지 않기도 했다지만, 차분하게 말사랑 글사랑을 펼치지 못했어요. 이무렵 쓴 글을 돌아보면 ‘것’을 얼마나 자주 썼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것도 그저 지나간 일이 되고 마는 것인지” 같은 글을 곧잘 썼어요. 이제는 이렇게 글을 쓰지 않고 말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 또한 그저 지나간 일이 되고 마는지”처럼 글을 쓰고 말을 합니다. 아니면 “이마저 한낱 지나간 일로 삼고 마는지”처럼 글을 쓰거나 말을 해요.


  1998년에 쓴 글을 되짚으니 “먼저 풀어야 한다. 더불어, ……” 같은 글투도 보입니다. 이 대목도 엉터리입니다. ‘더불어’를 글 맨앞에 외따로 쓸 수 없어요. “이와 더불어”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2007년부터 2009년 첫머리 사이에는 ‘자기(自己)’와 ‘자신(自身)’이라는 낱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놓고 오래도록 머리앓이를 했습니다. 이러한 낱말은 한자말 아닌 우리 말로 삼아서 그대로 써야 하지 않겠느냐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낱말을 쓰고 다시 쓰다 보니 어쩐지 나 스스로 초라하지 않느냐 싶더군요. 고작 이런 낱말조차 예부터 곱게 쓰던 말투를 살피어 새로운 오늘날에 알맞게 담아내지 못한다면 말사랑 글사랑이란 덧없지 않느냐 싶어요. 예전에 쓴 내 글을 가만히 되읽습니다. ‘자신’이나 ‘자기’라는 낱말이 어느 자리에 어떻게 깃드는가 하고 곰곰이 돌아봅니다.

 

 자신은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나는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나로서는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당신은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그때에는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적잖은 사람들은 ‘자신’과 ‘자기’뿐 아니라 다른 낱말을 옳게 다듬거나 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말과 말은 1:1로 맞추어 고치거나 다듬을 수 없는데, 이 낱말이 이런 자리에 쓰이든 저런 자리에 쓰이든 1:1로만 생각해 버릇하거든요. ‘자신’ 한 가지를 다듬을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예요. 맨 처음으로는 ‘나’로 다듬습니다. 글흐름을 살피다 보면 ‘나로서는’처럼 ‘-로서’를 사이에 넣을 때에 한결 부드럽기도 하고, ‘당신’이나 ‘이녁’이나 ‘그 사람’을 넣어야 알맞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때에는’이나 ‘그무렵에는’을 넣어 봅니다. 그야말로 때와 곳에 따라 다듬을 말투가 다릅니다.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 이름을 소담스레 여기고
→ 이름을 대수로이 여기고
→ 이름을 알뜰히 여기고
→ 이름을 아름다이 여기고
→ 이름을 고맙게 여기고
→ 이름을 보배로이 여기고
 …

 

  ‘소중(所重)’이라는 한자말을 놓고도 퍽 오래도록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이만 한 한자말 또한 구태여 한자말로 갈라야 한다면 사람들이 ‘우리 말 운동이라더니 아주 막 나가는군’ 하고 여길까 싶었습니다.


  나는 퍽 여러 해 앞서부터 ‘소중’이라는 낱말은 되도록 안 쓰지만, 너덧 해쯤 앞서까지는 이 한자말을 그대로 쓰곤 했습니다. 다만, 이제는 이 낱말을 아예 안 써요. 굳이 이 낱말까지 쓰면서 내 마음을 나타내야 하지 않아요. 나는 내 마음을 나타낼 좋은 낱말을 알아요. 나는 내 마음을 한결 사랑스레 빛낼 낱말을 스스로 찾고 살펴요.


  처음에는 ‘소담스럽다’라는 낱말을 써 봅니다. 국어사전에 실린 ‘소담스럽다’는 두 가지 뜻풀이가 달립니다. 첫째는 “생김새가 탐스러운 데가 있다”이고 둘째는 “음식이 풍족하여 먹음직한 데가 있다”입니다. 왜 이 낱말 ‘소담스럽다’를 ‘소중하다’와 맞추었느냐 하면, 어느 날 ‘탐(貪)스럽다’라는 외마디 한자말 뜻풀이를 헤아리니, “마음이 몹시 끌리도록 보기에 소담스러운 데가 있다”로 나오더군요. 이 말풀이에 나오는 ‘소담스러운’이라는 낱말이 눈에 확 들어왔고, “소담스럽게 쌓인 눈”이라는 보기글을 곰곰이 생각하니까, “소담스럽다 : 마음이 몹시 끌리도록 좋다”라는 느낌으로 쓸 만한 낱말이로구나 싶었어요.


  “소중하다 = 매우 귀중하다”입니다. “귀중하다 = 귀하고 중요하다”입니다. “귀하다 = 아주 보배롭고 소중하다”입니다. “중요하다 = 귀중하고 요긴함”입니다.


  여느 사람들은 ‘소중하다’가 무슨 뜻이요 어떤 쓰임인지 제대로 모릅니다. 그냥저냥 쓰는 낱말입니다. ‘보배롭다’가 토박이말인 줄 모르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아니, 생각조차 않겠지요. 그래, ‘보배로이’는 ‘소중하게’하고 거의 똑같은 낱말이에요. 이 낱말을 쓰면 ‘소중하게’는 퍽 말끔히 털어낼 만합니다.


  다만, 모든 자리에 ‘보배로이’를 쓰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때에는 ‘보배로이’를 쓰고, 어느 자리에는 ‘소담스레’를 씁니다. 국어사전은 예나 이제나 ‘소담스럽다’ 말풀이를 두 가지로 못박지만, 얼마든지 세 가지 네 가지 말풀이와 쓰임새가 늘어날 만합니다. 우리 스스로 다섯 가지 여섯 가지 말풀이와 쓰임새를 북돋우면 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소담스럽다’ 같은 낱말을 더욱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고 느껴요. 덧붙여, ‘알뜰히’나 ‘살뜰히’나 ‘알뜰살뜰히’를 쓰면서 ‘소중히’를 털 수 있고, ‘아름다이’나 ‘고이’를 쓰면서 말삶을 북돋울 수 있어요. 여기에 ‘대수로이’를 쓰면 거의 모든 자리에서 깔끔하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펼쳐 보이고 있으니까요 (x)
 펼쳐 보이니까요 (o)

 

  지난 2010년 여름께부터는 ‘있다’라는 말투를 되짚습니다. “하고 있다” 꼴로 쓰는 ‘있다’를 톺아봅니다.


  “보이고 있으니까요”처럼 적는다 해서 이 말투를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거의 모두라 할 만한 이 나라 사람들 누구나 이렇게 말을 하거나 글을 씁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이 말투가 영 낯설다고 느낍니다. 무엇보다 학교교육이라든지 책이나 방송하고 동떨어진 채 살아오던 사람들 ‘말을 담은 글’을 읽으면서 이런 말투를 하나도 찾아보지 못했어요.

 

 바깥말 자리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x)
 바깥말 자리에만 머뭅니다 (o)

 

  제가 쓴 예전 글을 다시금 읽으며 “하고 있다”나 “-고 있다” 꼴 말투를 살펴봅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우리 말법을 영어 말법에 끼워맞추면서 이런 말투가 자꾸 퍼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람들이 영어를 널리 배우거나 가르치면서 이런 말투를 스스럼없이 쓰는구나 싶습니다.


  우리 말글을 조금 배운 사람은 알 텐데, 우리 말에는 ‘지난날 때매김’이 없습니다. ‘현재진행형’ 또한 없습니다. 영어이든 다른 서양말이든 때매김이 똑부러지게 나뉘고, 현재진행형 말투가 참 잦아요. 서양책을 한국말로 옮기며 현재진행형 말투인 “하고 있다”와 “-고 있다”가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현재진행형’을 일본사람이 ‘中’이라는 한자를 써서 풀어내는 모양새를 한국사람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서 “하고 있다”와 “-고 있다”가 자꾸 퍼지는구나 싶습니다. “무엇무엇 하는 中이다”를 “무엇무엇 하는 중이다”라 옮긴다 해서 번역이 되지 않아요. 이를 “무엇무엇 하고 있다”로 손질해도 번역이 될 수 없어요. “무엇무엇을 한다”로 가다듬을 때에 비로소 번역이라 할 만합니다.

 

 토박이말로 짓는 중이라면 (x)
 토박이말로 짓고 있다면 (x)
 토박이말로 짓는다면 (o)

 

  어찌 보면, 이제는 우리 말글에도 ‘지난날 때매김’을 넣거나 ‘현재진행형’을 달아도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예스러운 말투로 말해야 할 까닭이 없다 여길 수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 보면, 우리는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하고 우리 말글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내 넋과 얼을 보듬으면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넉넉합니다. 괜시리 서양 말법처럼 우리 말법을 다루어야 하지 않아요. 한국사람은 한국땅에서 한글로 글을 쓰면 되고, 일본사람은 일본땅에서 가나로 글을 적으면 돼요. 서양사람은 로마자라 하는 알파벳을 쓰면 되겠지요.


  셈틀을 쓰며 인터넷으로 국어사전을 살필 때에는 국립국어원에 들어갑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창을 보면 “표준국어대사전에 대한 다양한 여러분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답변은 드리지 않습니다.” 하고 적힙니다. 말글을 다루는 공공기관이자 정부부터 글을 이렇게 써요. “표준국어대사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란 무엇이려나요.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말투이고, 이런 글은 어느 나라 글이라 할 만한가요. “표준국어대사전이 어떠한지 여러분 생각을 들려주셔요. 따로 답변하지는 않습니다.”처럼 적어야 할 글이 아닌지요. 그나저나 답변도 안 해 주면서 표준국어대사전이 어떠한가 하고 알려 달라고 적은 모양새가 쓸쓸해 보입니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있으면 대꾸를 해야 할 텐데, 귀는 있되 입이 없으면 어떡하나요. (4344.1.1.흙./4345.6.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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