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문화재단 이야기책에 싣는 글입니다. 3-4월호가 나왔기에 이 글을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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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24. 밤하늘 별빛에 아로새긴 무늬
― 넋·얼 가꾸는 글쓰기

 


  어버이를 거들어 논일을 하는 아이는 ‘이삭’을 압니다. 이삭을 아는 아이는 “이삭이 팬다”나 “이삭이 맺힌다” 같은 말을 압니다. 이삭이 패거나 이삭이 맺히는 모습을 아는 아이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와 같은 옛말을 압니다.


  무척 오래된 옛말 가운데 하나인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입니다만, 요즈음은 이런 말을 쓰는 분이 드뭅니다. 이런 말을 쓰는 분이 드물기도 하지만, 이런 말이 왜 생겼고, 이런 말이 무엇을 나타내는 줄 제대로 느끼거나 헤아릴 줄 아는 분도 퍽 드물어요.


  벼에도 꽃이 핍니다. 벼꽃입니다. 너무 마땅한 일이기는 한데, 벼에 꽃이 피지 않으면 ‘벼알’인 ‘벼 열매’가 맺지 않습니다. 벼꽃이 피고 수술에서 암술로 꽃가루가 옮겨야 이삭이 팰 수 있습니다. 이삭이 패면 차츰 이삭이 여물지요. 이삭이 여물면 벼알은 단단하고 굵어집니다. 단단하고 굵어지는 벼알은 무게가 늘어나니, 벼꽃이 피려고 볏줄기인 꽃대가 이삭 무게에 차츰 기울어요. 할미꽃마냥 구부정하고 기웁니다. 이리하여,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처럼 이야기해요.


  속이 단단하게 들어찬 벼이삭이 있기에 고개를 숙입니다. 속이 단단하게 들어차지 않으면 볏줄기인 꽃대는 뻣뻣이 섭니다. 부추꽃대를 보면 뻣뻣하게 서요. 부추꽃은 아주 작고, 부추씨 또한 아주 작으면서 가볍기 때문에, 부추씨가 단단히 맺어도 부추꽃대는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마늘꽃대도 고개를 숙이지 않아요. 아니, 마늘꽃대는 고개를 숙일 겨를이 없다고 해야 옳습니다. 왜냐하면, 마늘꽃대가 오르면, 마늘뿌리가 굵게 맺히지 않는다면서 다들 마늘꽃대를 뽑거든요. 마늘꽃대는 사람들이 나물로 먹는데, 바로 ‘마늘쫑’입니다.


  어릴 적부터 논에서 벼를 가까이하면 벼와 얽힌 낱말과 말마디와 이야기를 온몸과 온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어릴 적부터 밭에서 마늘을 가까이하면 마늘과 얽힌 낱말과 말마디와 이야기를 온몸이며 온마음으로 맞아들입니다.


  현병오 님이 쓴 《우리 아이들은 안녕하십니까》(양철북,2013)라는 책을 읽다가 152쪽에서 “진로 문제가 화두가 되고 있다. 부모들이 더 애가 타는 눈치다. 길찾기를 지원한다는 명분으로……”와 같은 대목을 봅니다. 이 글월에 나오는 ‘명분(名分)’은 ‘구실’이나 ‘핑계’나 ‘이름’ 같은 한국말로 손질해야 알맞습니다. 아무튼, 이 글월에서 ‘진로(進路)’와 ‘길찾기’라는 두 가지 낱말을 살핍니다.


  하나는 한자말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말이라 할 수 있지만, 하나는 우리 어른들이 흔히 쓰는 낱말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어른들이 더러 쓰는 낱말입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마친 뒤 어떤 ‘진로’가 있느냐를 놓고 망설입니다. 어른들도 이녁 아이가 어떤 ‘진로’를 찾을까를 놓고 조마조마합니다. ‘진로’란 아이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입니다. 이제부터 살아갈 길입니다. 그러니까 길을 찾습니다. 살아갈 길을 찾습니다. 곧, 아이들은 ‘길찾기’를 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삶찾기’를 합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꿈찾기’를 하고, ‘사랑찾기’를 합니다.


  앞으로 살아갈 길이란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버는 길’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돈을 벌면서도 살아갈 수 있으나, 흙을 일구어 밥을 스스로 얻을 수 있습니다. 돈을 벌어 밥이 될 쌀을 사먹을 수 있지만, 돈을 안 벌고 흙을 지어 손수 쌀을 얻을 수 있어요. 또한, 흙을 일구면 내 밥을 손수 거둘 뿐 아니라, 남는 쌀을 팔아 돈을 더 얻기도 합니다. 아주 많은 돈은 아닐 테지만, 밥 근심이 없습니다.


  길찾기란 ‘직업찾기’만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일자리찾기’라 할 ‘직업찾기’에만 머문다면, 길찾기가 너무 애달픕니다. 아이도 어른도 꿈과 사랑을 함께 찾을 때에 한결 즐거우며 아름다우리라 느껴요. 길찾기, 삶찾기, 꿈찾기, 사랑찾기, 넋찾기, 빛찾기, 마음찾기, 이야기찾기, 말찾기, 꽃찾기, 노래찾기, 웃음찾기, 평화찾기, 민주찾기, 통일찾기, …… 이렇게 한 가지씩 생각을 넓힐 때에 참으로 어여쁘면서 기쁘리라 느낍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올려다보는 밤하늘은 아주 곱습니다. 새까만 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물결은 그예 별잔치입니다. 누군가는 별잔치를 보석잔치라고 말하는데, 그분은 ‘보석’을 알기에 보석잔치라 말하겠지요. 아이들은 보석을 모르니 밤별을 보석잔치라 말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시골에서 으레 들꽃을 만나며 아끼기에, 밤별을 만날 적에 ‘꽃잔치’와 같다 말합니다. 커다란 함박꽃이나 장미꽃 같지 않지만, 커다란 동백꽃이나 튤립꽃 같지 않으나, 새봄 부르는 아주 조그마한 ‘별꽃’마냥 밤하늘 별잔치는 온통 꽃잔치입니다.


  귀뚜라미가 귀뚜르르 귀뚜르르 노래하는 보금자리에서 지내는 사람은 늘 귀뚜라미 노랫소리가 익숙해서,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귀뚜라미 소리를 이내 알아챕니다. 자동차가 쉴새없이 지나다니는 동네에서 지내는 사람은 언제나 자동차 소리가 익숙해서,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자동차 소리를 곧 알아챕니다. 소쩍새 노랫소리를 늘 듣던 사람은 소쩍새 노래가 익숙할 테니, 낯선 마을로 나들이를 가더라도 소쩍새 노래를 들으면 바로 귀를 번쩍 떠요. 그러면, 오늘날 이 땅 아이들은 어떤 소리에 귀가 익숙할까요. 오늘날 이 땅 어른들은 어떤 소리와 빛깔과 냄새와 무늬에 익숙할까요. 우리들은 어떤 말이 익숙할까요. 우리들은 어떤 말을 즐겁게 쓰나요.


  새해를 맞이해 일곱 살이 된 아이와 읽을 그림책을 한 권 장만했습니다. 아이하고 읽기 앞서 어버이로서 먼저 찬찬히 살핍니다. 이러다가 “허풍이 너무 심하네.”와 같은 말마디를 봅니다. 가늘게 한숨을 쉽니다. “허풍이 너무 심하네.” 같은 말마디는 일곱 살 어린이한테 알맞춤할까 궁금합니다. 그림책을 창작하거나 번역하는 분들은 일곱 살 어린이한테 이 말마디가 알맞다고 느꼈을까요. 내 일곱 살 적에 둘레 어른들은 ‘심하다’라 말하지 않고 ‘세다’라 말했습니다. “이렇게 허풍이 센 놈을 봤나.”처럼 말씀하셨어요. 넋과 얼을 가꾸는 글은 어떻게 쓰는가를 새롭게 되새깁니다. 어른 스스로 씩씩하게 넋을 찾으면 아이들도 씩씩하게 넋을 찾습니다. 어른 스스로 곱게 얼을 밝히면 아이들도 곱게 얼을 밝힙니다. 4347.1.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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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23. 쉽게 쓰는 우리 말글
―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즐거운 말

 


  이상권 님이 쓴 《이승모 할아버지의 남녘북녘 나비 이야기》(청년사,2003)라는 책을 읽다가 80쪽에서 “북쪽에서는 ‘나비’와 ‘나방’을 ‘낮나비’와 ‘불나비’라고 부른단다. 낮에 날아다니는 나비, 밤에 불을 보고 찾아오는 나비라는 뜻이야.” 하고 이야기하는 대목을 봅니다. 조금 더 읽으면 “‘호랑나비’는 북쪽에서는 ‘범나비’라고 불러. 많은 사람들이 ‘범’이 한자고, ‘호랑이’는 한글인 줄 알더구나. 하지만 범이 한글이란다.” 하고 나와요. ‘호랑(虎狼)’은 “범과 늑대”를 뜻해요. 두 가지 숲짐승을 아우르는 한자말이에요. 그러니, ‘호랑이’라는 낱말로 범을 가리키는 일은 그르지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호돌이’를 상징물로 썼는데, 이때에 잘못된 말을 아주 널리 퍼뜨렸어요. ‘호돌이’는 ‘호랑돌이’를 줄인 이름이니까요. 한겨레는 한국말로 ‘범돌이’와 ‘범순이’라 해야 올바릅니다. 나비를 가리키는 이름을 남녘에서는 ‘호랑나비’로 쓴다고 하지만 올바른 이름이 아니니, 하루 빨리 ‘범나비’로 바로잡아야 올발라요.


  그나저나, 북녘에서 ‘낮나비’와 ‘불나비’, 이렇게 두 갈래로 나누는 이름이 참으로 알맞아요. 남녘에서 ‘나방’이라 가리키는 벌레는 낮에는 꼼짝않거든요. 밤이 되어 불이 있는 곳에 모여들어요. 아이들한테 벌레를 보여주거나 가르치는 자리에서도 ‘낮나비·불나비’라 말할 적에 한결 쉽고 알맞게 알아들으리라 느껴요.


  ‘푸르다·파랗다·누렇다·빨갛다’ 같은 빛이름은 모두 시골에서 태어났어요. 우리가 예부터 익히 쓴 한국말 가운데 시골에서 안 태어난 말이란 없지만, 푸르다이건 누렇다이건 시골에서 마주하는 숲과 들에서 얻은 낱말이에요. 풀을 느끼는 빛이라 푸르다요, 하늘과 바다에서 느끼는 빛이라 파랗다이며, 잘 익은 나락에서 느끼는 빛이라 누렇다이면서, 무르익은 열매에서 느끼는 빛이라 빨갛다예요.


  이런 말밑을 살필 줄 안다면, 섣불리 영어로 ‘그린·블루·옐로우·레드’처럼 쓸 때에는 아무런 빛느낌도 삶느낌도 이야기도 담기 어려운 줄 깨달아요. 영어라서 쓰지 말아야 하지 않아요. 우리 삶을 담지 못하니까 우리 말글이 아닙니다. 이런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는 이들 빛이름에 그 나라 빛과 삶과 이야기를 담겠지만, 우리들 살아가는 한국에서는 영어에 아무런 이야기나 느낌이 없어요.


  어떤 지식인은 ‘똘레랑스’라는 프랑스말을 들여와서 프랑스에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마음씨를 말해요. 다른 지식인은 한자말로 ‘관용’을 빌어 이녁 느낌을 말해요. 그러면, 지식인 아닌 여느 한국사람은, 시골사람은, 어린이는, 여느 할매와 할배는, 이 프랑스말과 한자말을 얼마나 잘 헤아릴 만할까요. 왜 지식인들은 ‘너그럽다’나 ‘넉넉하다’라는 한국말을 안 쓸까요.


  영국에서는 ‘영어 쉽게 쓰기’를 한다고 해요. 우리도 ‘한국말 쉽게 쓰기’를 하자는 움직임이 있어요. 그렇지만, 막상 한국말을 쉽게 쓰려는 사람은 드물어요. 어려운 말과 딱딱한 말을 함부로 써요. 신문도 방송도 교과서도 쉬운 말로 엮지 않아요. 초·중·고등학생이 보는 교과서에도 여느 어른들이 보는 신문에서 쓰는 말이 그대로 나와요. 초·중·고등학생 눈높이를 헤아리지 않아요.


  김남일 님이 쓴 《통일 할아버지 문익환》(사계절,2002)이라는 책 70쪽을 보면, “다른 많은 학생들과 함께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숭실중학교를 자퇴한 문익환과 윤동주는”이라는 대목이 있어요. 한쪽에서는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라 적지만, 다른 곳에서는 ‘자퇴’라 적어요. 한쪽은 한국말이고 다른 한쪽은 한자말이에요.


  이와 비슷한 얼거리로, ‘쉬다·휴식’을 섞어 쓰는 어른이에요. ‘밥·식사’를 섞어 쓰고, ‘학교 가다·등교하다’를 섞어 쓰며, ‘가르치다·교육하다’를 섞어 써요. ‘어버이’라는 한국말 있지만 으레 ‘부모’라는 한자말을 써 버릇하는 어른이요, ‘생일잔치’ 아닌 ‘생일파티’라는 말을 쉬 쓰는 어른입니다.


  어른들부터 말버릇이 올바르지 않다면 아이들도 말버릇이 올바를 수 없어요. 아이들은 어른한테서 말을 듣고 배우니까요. 어른들부터 말버릇을 슬기롭게 가다듬어야 비로소 아이들이 슬기로운 말을 들으면서 아름답게 말을 하고 글을 써요.


  우리 말글을 쉽게 쓰는 길은 따로 없어요. 쉽거나 어려운 말이란 따로 없어요. 나라마다 다른 말이 있고, 겨레마다 다른 말이 있어요.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안 쓰니까 어렵고, 한국사람이 중국 한자말이나 일본 한자말이나 미국 영어를 아무렇게나 아무 곳에 쓰니까 까다롭습니다. 곧, 한국사람이 한국에서 이웃과 동무를 사랑스레 사귀면서 즐겁게 나누는 말이 되어야 비로소 쉬운 말이 되고, 고운 말이 되며, 착하며 참된 말이 돼요.


  눈높이를 살필 노릇입니다. 내 말을 듣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살필 노릇입니다. 일곱 살 어린이 앞에서 어떤 낱말을 고르고 어떤 말투와 말씨로 이야기를 들려줄는지 살필 노릇입니다. 열일곱 살 푸름이 앞에서 어떤 낱말을 가리고 어떤 말투와 말씨로 삶을 노래할 때에 서로 아름답고 즐거운가 하고 생각할 노릇입니다.


  이것저것 많이 배운 내 눈높이가 아니라,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살아가는 할매와 할배 눈높이를 돌아보면서 말을 할 때에 가장 쉬우면서 바르고 예쁜 말이 태어납니다. 책에서 읽어 얻은 글이 아니라,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일하는 이웃들 삶을 헤아리면서 글을 쓸 적에 가장 고우면서 즐겁고 사랑스러운 글이 자랍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즐거운 말입니다. 서로 마음을 맞추고, 서로 마음을 아끼면서 사랑스러운 말입니다. 서로 보듬는 넋이 될 때에 고운 말입니다.


  해를 바라보기에 ‘해바라기’이듯, 하늘을 바라보기에 ‘하늘바라기’이고, 별을 바라보며 ‘별바라기’, 달을 바라보며 ‘달바라기’ 돼요. 대학교를 바라본다면 ‘대학바라기’ 될 텐데, 예쁘며 맑은 빛 감도는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는 푸름이들 누구나 꿈바라기·사랑바라기·빛바라기·꽃바라기·나무바라기·바다바라기 같은 마음 일구기를 빌어요. 서울바라기나 도시바라기 말고 시골바라기와 숲바라기를 할 수 있으면 아주 반갑습니다. 4346.12.1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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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문화재단 사외보 2014년 1-2월호에 싣는 글입니다. 지난해 11월에 써 두었고, 이제 비로소 올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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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21. 우리와 함께 있는 말
― 누가 언제 쓰는 말일까

 


  아이한테 읽히려고 그림책을 장만합니다. 그림책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읽히기도 하지만, 아이가 한글을 천천히 익히면서 스스로 읽을 책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어버이 목소리를 들으며 말을 익히고, 나중에는 눈빛을 밝혀 글을 깨칩니다.


  어느 책이건 아이한테 먼저 쥐어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창작 그림책이건 번역 그림책이건 아이들 삶과 걸맞지 않다 싶은 낱말이나 말투가 깃들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아무렇지 않게 쓰지만, 아이한테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없는 낱말과 말투가 있어요. 이를테면, 요새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조차 ‘생일잔치’ 아닌 ‘생일파티’라 하고, 어느 곳에서는 ‘버스데이 파티’라고까지 합니다. ‘버스데이 파티’라 하는 곳은 아이들한테 영어를 더 가르치려 하는 곳인데, 요즘 어른들 가운데 ‘파티’가 영어이고 ‘잔치’가 한국말인지 아는 분이 무척 적어요. 이리하여 ‘돌잔치’ 아닌 ‘돌파티’를 ‘럭셔리’하게 하는 어른들이 있어요.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참말 이렇습니다. 어느 그림책을 읽다가 ‘생일파티 미션’이라는 말이 흐르기에 이내 덮었어요. 도무지 보아주기 힘들더군요.


  스웨덴에서 1983년에 처음 나오고, 한국에서는 2011년에 옮긴 그림책을 아이한테 읽히기 앞서 차근차근 살피다가, “첫눈은 뭔가 특별하고 멋지니까요”라든지 “눈에게 불공평하게 굴지는 않아요”라든지 “눈은 자작나무 숲 위로 펑펑 내리고 있어요”라든지 “한손 부인”과 “한손 씨”와 같은 말투를 봅니다. “계속 달리기만”하고 “내처 달렸어요” 같은 말투도 봅니다.


  아이들한테 ‘다르다’나 ‘남다르다’라는 낱말을 들려주는 어른이 아주 드문 요즈음입니다. ‘까다롭다’라는 낱말을 쓰는 어른도 퍽 드뭅니다. 어른들 스스로 “첫눈은 뭔가 남다르고 멋지니까요”라든지 “눈한테 까다롭게 굴지는 않아요”처럼 말하지 않아, 아이들은 ‘남다르다’라든지 ‘까다롭다’ 같은 낱말을 어른으로 자라기까지 좀처럼 못 듣습니다.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쓰자면 “눈은 자작나무 숲에 펑펑 내려요”처럼 손질해야 합니다. 눈은 “숲 위로”가 아닌 “숲에” 내립니다. “지붕 위로” 쌓이는 눈이 아니라 “지붕에” 쌓이는 눈입니다. 영어 현재진행형을 잘못 옮겨 “내리고 있어요”라 적지만, “내려요”로 바로잡아야 올발라요. 어른들 읽는 책에서도 올바로 가누어야 아름답고, 아이들 읽는 책에서는 더욱 마음 기울여 올바로 가누어야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한손 부인” 아닌 “한손 아주머니”요, “한손 씨” 아닌 “한손 아저씨”입니다. 아이들이 어른한테 “한손 부인” 하고 부르겠습니까. “한손 아주머니(아줌마)”라 부르지요.


  누가 언제 쓰는 말인가 하고 찬찬히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어른들이 으레 쓰는 말을 아이들이 흔히 들으면서 자라는 줄 알아차려야 합니다. 예부터 말매무새 올바로 가다듬으라 했어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했습니다.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뜻일 뿐 아니라, 어른들이 하는 모든 말을 아이들이 고스란히 듣는다는 뜻이에요. 어른들끼리 있는 자리에서 어른들 내키는 대로 아무 말이나 주고받는다 하더라도, 이런 말이 모두 아이들이 주고받는 말로 이어져요. 여느 때에 언제나 아름답게 말할 줄 아는 어른이어야, 아이들 또한 언제나 아름답게 말하는 삶 물려받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나 늘 사랑스레 말할 수 있는 어른이어야, 아이들도 늘 사랑스레 말하고 글을 쓰는 넋 이어받아요.


  정일근 님이 쓴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창비,1987)을 읽다가 8쪽에서 “대청마루 떡하니 놓인 쇠북을 보면”이라는 대목을 만났어요. 제 이름 ‘최종규’에서 ‘종’은 한자로 적으면 ‘쇠북 종’입니다. 제 이름에 깃든 ‘종’이라는 한자를 ‘쇠북’으로 읽는 줄 어릴 때부터 알기는 했지만 쇠북이 무엇인 줄 가르쳐 주는 어른이 둘레에 없었어요. 다른 동무는 예쁘거나 멋지다 싶은 뜻(새김)을 이름으로 얻는데, 나는 쇠북이 뭐냐, 웬 이름이 이러한가, 하고 여겼습니다. 아마 어른들도 쇠북이 무엇인 줄 제대로 몰랐구나 싶은데, 나이 서른을 한참 넘긴 어느 날 스스로 쇠북을 깨달았어요. 쇠로 만든 북이라 쇠북이요, 쇠북이란 ‘종’을 가리키는 한국말이었습니다. 떵떵 울리는 ‘종’은 중국말이었어요.


  이오덕 님이 쓴 동화책 《종달새 우는 아침》(굴렁쇠,2007)을 읽으며 31쪽에서 “나만은 내일 학교를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대목을 만납니다. 무릎을 철썩 칩니다. 그래요. 저도 어릴 때부터 ‘쉰다’는 말을 자주 듣고 썼어요. 몸이 아프면 학교를 쉽니다. 어른이 된 뒤에는 몸이 아픈 날 회사를 쉽니다. 네 식구 살아가는 시골집에서 몸이 고단하면 집일을 살짝 쉽니다. 학교나 회사를 다닐 적에는 “학교를 빠진다”라 말하기도 했어요. 이럴 때마다, 학교에서는 ‘결석’이라는 말을 썼고, 회사에서는 ‘결근’이라는 말을 썼어요. 서류에는 이런 낱말 써야 한다고 하지만, 왜 서류에 ‘쉼’이라는 말을 쓸 생각은 못 할까요.


  우리 겨레가 한자를 쓴 지 1500년이 되었다고 말하는 분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 겨레가 한자를 쓰지는 않았어요. 임금님과 신하와 지식인만 한자를 썼어요. 서울에 모이거나 읍내에 모인 몇몇 관리와 지식인, 여기에 임금님만 한자로 글을 썼을 뿐, 글 아닌 말에서는 모두 ‘한자 아닌 한국말’이었어요. 99.9%를 훨씬 넘는 여느 사람들은,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일하면서 ‘정갈하고 고운 한국말’을 썼습니다. 정치와 행정 맡은 이들이 한자를 받아들여 썼다지만, 다른 거의 모든 사람은 한자를 모르는 채 한국말만 알뜰살뜰 주고받았어요.


  여느 시골사람은 ‘물들이기’를 하지만, 관리와 지식인은 ‘염색’을 말합니다. 여느 시골사람은 ‘흙(논밭) 일구기’를 하지만, 관리와 지식인은 ‘농사’를 말합니다. 더 낫거나 더 좋은 말은 따로 없다고 느껴요. 우리가 쓰는 말이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말입니다. 우리가 선 자리에서 말이 새로 태어나고, 우리가 생각하며 사랑하는 자리에서 말이 새로 자랍니다. 아이 앞에서뿐 아니라, 어른 스스로 삶과 넋 곱고 사랑스레 돌보며 말과 글 나란히 곱고 사랑스레 돌보기를 빌어요. 삶사랑이 말사랑 됩니다. 삶가꾸기가 말가꾸기 됩니다. 삶짓기가 말짓기 돼요. 4346.11.2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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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22. 한국말 살려쓰는 길
― 작은 마음 따사롭게 사랑하기

 


  시인 김명수 님이 쓴 《이육사》(창작과비평사,1985)라는 위인전을 읽다가 112쪽에서 “비록 바지저고리를 입고 홑치마를 두른 촌사람들이었지만”이라는 대목을 봅니다. 아무것 아니라 할 글 한 줄일 수 있지만, 이 대목에 밑줄을 주욱 그었어요. 이 한 줄에서 우리 겨레 오랜 삶을 읽습니다.


  요즈음도 이와 비슷하게 말하는 분이 더러 있지만, 이제는 “치마를 두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퍽 드뭅니다. 예부터 치마는 ‘입는다’보다는 ‘두른다’고 했습니다. 군대에서는 옷을 입는 일을 놓고도 ‘착용’이라는 일본 한자말을 쓰고, 우리 사회에서는 옷입기를 가리키는 낱말이 하나같이 영어예요. ‘옷차림’이나 ‘입성’이나 ‘차림새’나 ‘옷맵시’ 같은 말은 ‘패션’ 한 마디에 줄줄이 밀려요.


  어린이책에만 나오는 “바지저고리와 홑치마” 또는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도 우리 겨레가 “한복을 입는다”고 말하지 않아요. 1919년에 만세운동을 하던 이들이 “한복을 입고 만세운동을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를 입고 만세운동을 했다”고 말합니다.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를 차린 한겨레는 ‘한옥’에 살지 않아요.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돌로 바닥을 깔며 흙으로 벽을 바르고 짚으로 지붕을 이은 집에 살아요. 우리 겨례 여느 살림집은 흙집이거나 풀집이거나 나무집이거나 돌집입니다. 한자 쓰기를 즐긴 양반이라면 ‘흙집’이나 ‘풀집’이라 말하지 않고 ‘초가’라 했지만, 시골에서 흙 만지고 풀 베는 사람들은 그저 ‘풀집’이라 말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날마다 밥을 먹는데, 임금이나 양반은 ‘조석’을 먹습니다. 이와 달리 논밭 일구는 시골지기는 ‘아침저녁’을 먹어요. ‘밥’을 먹지요. 우리 겨레가 예부터 먹은 밥은 그저 ‘밥’이지, 어느 누구도 ‘한식’을 먹지 않아요.


  이제 이 나라에 서양 물결이 넘실거리니, 따로 ‘한복·한옥·한식’ 같은 이름을 붙여서 이야기를 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겨레 옷과 집과 밥을 제대로 가리키자면, 우리 겨레 글이 ‘한 + 글’이듯, ‘한 + 옷’과 ‘한 + 집’과 ‘한 + 밥’이 되어야 올바릅니다. 우리 겨레 이름 ‘한 + 겨레’처럼 말이에요.


  유소림 님이 쓴 산문책 《퇴곡리 반딧불이》(녹색평론사,2008)를 읽다가 30쪽에서 “돌 틈의 작은이들은 저마다 제일 좋아하는 방식으로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라 나오는 대목을 봅니다. 국립국어원 맞춤법에 따르자면 ‘작은 이’처럼 띄어야겠지만, 이 책에 나온 그대로 붙여서 ‘작은이’라 쓸 만해요. 작은 사람을 가리킬 수 있고, 작은 목숨을 가리킬 수 있어요. 작은 꽃과 풀과 벌레 모두를 아우를 수 있으며, 작은 새와 물고기도 여기에 넣을 수 있습니다.


  ‘작은이’처럼 ‘고운이’를 쓰고, ‘사랑이’를 쓰며, ‘꿈이’나 ‘착한이’를 써도 재미있어요. 우리 둘레 반가운 님들한테 이렇게 이름 하나 조그맣게 붙이면서 생각을 틔우고 마음을 살찌울 만합니다.


  한국말 살려쓰는 길은 쉽습니다. 즐겁게 살려서 쓰면 됩니다. 작은 마음 따사롭게 헤아리면서 사랑하면 됩니다. 국어학 자료를 꿰거나 온갖 국어사전을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대학교 국문학과를 다녀야 하지 않아요. 국어순화 운동을 힘껏 벌여야 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살면서 가장 즐겁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되면 넉넉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들이 아름답게 살려서 쓸 말이란, 바로 우리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면서 즐겁게 쓰는 말이에요. 삶을 밝히는 말을 살려서 쓸 노릇이지, 국어사전에서 잠자는 말을 깨워서 쓸 노릇이 아닙니다.


  우리 겨레가 쓰던 말을 생각할 수 있으면 돼요. 한국말이란 먼먼 옛날부터 시골에서 흙을 만지고 일구며 가꾸던 이들이 쓰던 말이에요. 임금이나 학자나 양반이 쓰던 중국말은 우리 겨레 말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시골마을에서 조그마한 시골사람이 흙과 풀과 꽃과 나무를 아끼고 사랑하면서 쓰던 말이 우리 겨레 삶빛 흐르는 말입니다.


  시골말 살릴 때에 한국말이 살아요. 시골마을 살릴 때에 이 나라가 살지요. 시골사람 살아날 때에 우리 삶과 문화가 시나브로 살아날 수 있어요. 시골을 잊거나 잃는다면 한국말을 잃는 셈이에요. 시골하고 등지거나 시골빛을 놓친다면 한국말 살찌우는 길하고 멀어져요. 학문으로 살릴 말이 아닌 삶으로 살릴 말이니까요. ‘국어순화 운동’은 그야말로 운동에서 그치기에, ‘삶을 가꾸는 말’로 나아가야 아름다우면서 즐겁습니다.


  삶을 가꾸면 저절로 말을 가꾸기 마련이에요. 삶을 가꾸는 사람은 마음과 사랑을 가꿉니다. 마음과 사랑을 가꾸니, 허튼 말이나 못된 말이나 얄궂은 말이나 뒤틀린 말을 안 써요. 마음과 사랑을 가꿀 만한 넉넉하고 따사로운 말을 쓰기 마련이에요. 이런 말을 써야 맞고 저런 말을 쓰니 틀리다 할 수 없어요. 삶을 가꾸지 않고 말만 가꾸지 못해요. 삶을 일으키면서 말을 일으킬 수 있지, 말만 번듯하게 세우고 삶을 튼튼히 세우지 못한다면, 도로 무너져요.


  이오덕 님이 쓴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삼인,2005) 101쪽을 읽으면 “농어민들은 자랑스러운 겨레말을 모두 어렸을 때 부모들한테서 듣고 배워, 다시 그 아들딸들한테 건네고, 이래서 배달말은 지금까지 이어 왔습니다. 그러니까 일하면서 살아온 모든 부모들은 겨레말을 그 자식들에게 가르치는 훌륭한 교육자였다고 하겠습니다.”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말이 아니에요. 집에서 가르치는 말이에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삶이 아니라, 집에서 어버이가 가르치는 삶이에요. 날마다 즐겁게 일구는 삶을 아이들한테 고스란히 이어요. 하루하루 사랑스레 보듬는 삶을 아이들한테 차근차근 이어요. 아이와 늘 함께 살아가니, 아이 앞에서 어른으로서 삶을 어떻게 다스릴 때에 아름다운가를 스스로 깨닫겠지요. 아이들만 말을 배우지 않아요. 어른들도 스스로 말을 배워요. 어른들은 스스로 삶과 넋과 말을 꾸준히 새로 배우면서 아이들한테 삶밥과 넋밥과 말밥을 물려주는 빛을 드리웁니다. 4346.12.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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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2-14 12:22   좋아요 0 | URL
'풀집'이라는 말을 참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랄 땐 온통 풀밭에서 뛰놀고, 풀빛을 보며 자라고, 풀잎을 베어 지게에 담아 소에게 여물을 주고, 늦여름이면 어른들이 온통 풀베기에 나서서 밭에 쓸 '퇴비'를 만들었고, 가을걷이가 끝나면 짚으로 지붕을 새로 얹었던 기억이 새롭네요. 그렇게 흙집과 풀집에서 살던 우리네 삶이 '우리 시대에 이르러' 잠깐 동안에 참 너무 많이 바뀌었단 생각이 드네요.

숲노래 2013-12-14 12:45   좋아요 0 | URL
풀하고 멀어지면서 '풀말'을 잊고, '풀삶'하고 동떨어지는 한편, 풀처럼 푸르고 맑은 마음과 사랑과 빛도 모조리 잃는구나 싶곤 해요..
 

지난 시월 끝날에 충남 서천여고에 찾아가서

그곳 푸름이와 나눈 이야기입니다.

 

..

 

말넋 19. 아름답게 빛나는 말이란
― 시골말로 이루는 한국문학

 


  1:2,100,000 축적인 길그림을 들여다보면, 충청남도 서천군에 ‘서천읍·장항·개야도·성의·판교·죽도·연도·어청도’까지 나옵니다. 1:75,000 축적인 길그림책을 펼쳐 충청남도 서천군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두툼한 길그림책에는 ‘가르메·고산메·안산넘얼·막굴·북척메·서내바지교·싸름매·시루굴·섭실·수랑골·궁골·관돌·까치고개·개복다리·낭골·큰낭골·냄배·강성구레·시른개·모가울·밭가운데·구수내골·새터·탑시·갈태·원뫼·솜부리시·건드래·칡더굴·부래이골·싸리뫼·윗뜸·가루골·가리골·방죽건너’ 같은 이름이 줄줄이 나옵니다. 마을이름이 재미있구나 싶어 자꾸 길그림책을 들여다봅니다. 문득 궁금해서 우리 식구 살아가는 전남 고흥 자리도 길그림책으로 살핍니다. ‘큰뜸·가는골·땅골고개·가드릿재·송곳산·마파지·동굴섬·샛여·더터굴재·닭섬·솔개재·솔바위고개’ 같은 이름을 봅니다. 이 이름들은 언제 누가 지었을까요. 이런 이름은 무엇을 떠올리며 지었을까요.


  ‘닭섬’이라면 닭을 닮은 섬이라서 닭섬일까요. 그러면 ‘닭’이라는 이름과 ‘섬’이라는 이름은 누가 어떻게 처음 지은 말일까요. ‘새터’는 골골샅샅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보는 마을이름입니다. 새로 일군 터, 곧 새로 일군 마을, 그러니까 ‘새마을’과 같은 뜻으로 쓰는 새터예요. 그러면 ‘새(새롭다)’와 ‘터’라는 이름은 누가 어떻게 처음 지은 말일까요. ‘솜부리시’ 같은 마을이름은 어떻게 태어났는지 궁금합니다. 충남 서천말로 서천사람이 빚은 이름일 테지요. ‘냄배’나 ‘시른개’나 ‘모가울’ 같은 마을이름은 또 어떻게 태어났는지 궁금합니다. 이와 같은 마을이름은 어떤 사랑을 담아서 처음 지었을까요. 이러한 마을이름은 어떤 마음으로 처음 붙여서 가리켰을까요.


  ‘마을’은 사람들 살림집이 조그맣게 모여 이루어진 삶터를 가리킵니다. ‘고을’은 마을이 여럿 모여 이루어진 삶터를 가리켜요. ‘서라벌·달구벌·새벌·황산벌’ 같은 땅이름에 나타나는 ‘-벌’은 퍽 크게 이루어진 고을을 가리킵니다. 이때에도 ‘마을·고을·벌’ 같은 낱말을 얼마나 오랜 옛날 옛적에 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지었는지 궁금해요.


  ‘사투리’는 어느 한 곳에서 쓰는 말을 가리킵니다. 어느 고장에서 쓰는 말이라면 ‘고장말’입니다. 고을에서 쓰는 말이라면 ‘고을말’일 테고, 마을에서 쓰는 말이라면 ‘마을말’이에요. 마을에서도 어느 집에서만 쓰는 말이라면 ‘집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갈무리하면, 가장 작은 테두리에서 쓰는 말은 ‘집말’입니다. 나를 낳고 돌보는 어버이가 쓰면서 나한테 물려주는 말이 ‘집말’입니다. 집말을 쓰는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면서 여러 집말이 섞여 ‘마을말’이 이루어집니다. 마을과 마을을 여럿 아울러 커다란 고을을 살필 적에는 ‘고을말’이 될 테지요. 다른 고을에서 온 사람이라면 고을말을 느낄 텐데, 요즈음으로 치자면 면내나 읍내쯤에서 쓰는 말이 고을말입니다. ‘고장말’이라면 충청도·전라도·경상도·경기도처럼 더 큰 테두리에서 가리키는 말이에요. ‘사투리’는 집말부터 고장말까지 모두 아울러요.


  서울에서 버스나 기차를 타고 충청도로 접어들면 남다르다 싶은 고장말을 느낍니다. 수원이나 파주에서 태어나 살던 사람이 서울로 나들이를 갈 적에도 남다르다 싶은 고장말을 느껴요. 그런데, 오늘날 서울에서는 구나 동마다 다른 고을말이나 마을말은 사라졌어요. 신림동이나 효자동에 깃든 살림집마다 다 달리 쓰는 집말도 사라졌어요. 텔레비전이 시골까지 퍼지며 오늘날 시골에서도 고장말이나 고을말이나 마을말이나 집말은 거의 사라졌다 할 만하지만, 아직 정갈하게 머리카락을 빗어 비녀를 꽂는 시골 할매가 있는 만큼, 오래된 집말과 마을말을 두멧시골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서천사람한테는 어떤 서천말이 남았을까요. 서천군 마서면에서 살아가는 마서사람한테는 어떤 마서말이 남았을까요. 서천군 마서면 송석리에서 살아가는 송석사람한테는 어떤 송석말이 남았을까요. 서천군 마서면 송석리 골뫼마을에서 살아가는 골뫼사람한테는 어떤 골뫼말이 남았을까요.

 

  동화책 《몽실 언니》를 쓴 권정생 님은 경상도 안동 시골마을 사람들 말투를 더듬으며 《한티재 하늘》이라는 이야기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야기책 《한티재 마을》에 나오는 시골말은 경상말이요 안동말이며 더 깊이 파고들어 조그마한 마을 ‘한티재사람’들이 쓰던 ‘한티재말’이에요.


  우리는 흔히 한국말로 문학을 한다고 일컫는데, 한국사람이 빚어서 나누는 한국문학에서 쓰는 한국말이란 어떤 한국말일까요. 표준 한국말일까요. 서울사람이라면 표준 한국말이 된 서울말로 한국문학을 할 만할 텐데, 인천사람이나 부산사람도 서울말로 한국문학을 할 때에 아름다울까 궁금합니다. 인천사람은 인천말을 찾고, 부산사람은 부산말을 찾아 한국문학을 밝힐 때에 한결 아름답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저처럼 전남 고흥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고흥말로 한국문학을 할 때에 아름답습니다. 충남 서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서천말로 한국문학을 할 때에 아름답겠지요. 문학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교육도 모두 고장말로, 마을말로, 집말로, 시골말로, 사투리로 꽃피울 적에 한결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이문구 님이나 이청준 님이나 박영한 님이나 조정래 님이나 박완서 님이나 박경리 님이나 ‘표준 서울말’로 이녁 문학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이녁이 태어나 자란 ‘마을에서 쓰던 말’과 ‘집에서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말’로 문학을 했어요.


  오늘날은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말로 문학을 하는 셈일까요. 아니면,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르치는 말로 문학을 한다고 해야 할까요. 대학교나 문학강좌에서 들려주는 말로 문학을 하는 노릇일까요.

 

  누구나 이녁 보금자리에서 삶을 일굽니다. 삶을 일구면서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샘솟는 이야기를 사랑스레 노래하면서 말이 태어납니다. 4346.9.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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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2-03 11:47   좋아요 0 | URL
이렇게 글을 올려 주셔서 또
충남 서천여고 푸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들었을
좋은 '말넋'을 함께 듣는군요~
참으로 감사합니다~*^^*

숲노래 2013-12-04 07:19   좋아요 0 | URL
시골 아이들이 곧 시골 떠나 도시로 가더라도
'시골에서 나고 자란 보람'을
꿋꿋하고 씩씩하게 건사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