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겨레말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소식지에 실으려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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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39. 한국말사전이 살릴 말

― 아름다운 말은 쉽다



  흔히 ‘국어사전’을 말하고, 학교에서는 ‘국어’를 가르칩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분은 으레 ‘국민’을 얘기합니다. 한자로 ‘國-’을 붙이는 한자말이 퍽 많습니다. 그런데 한국사람이 ‘國-’을 붙인 낱말을 쓴 지는 얼마 안 됩니다. 아주 마땅합니다. 한국사람으로서 이런 낱말을 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부터 ‘한복·한식·한옥’ 같은 낱말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옷·밥·집’입니다.


  ‘國-’붙이 낱말 가운데 ‘국민학교’만큼은 몹시 어렵게 ‘초등학교’로 바꾸었습니다. ‘국민(國民)’이라는 한자말에 깃든 슬프며 아픈 생채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國語’라는 한자말을 그대로 쓰지만, 이 낱말을 앞으로 언제까지 써야 하는지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국어’는 한국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어른들은 ‘국민’이라는 낱말을 털어냈는데, 말과 글을 다루는 어른들은 언제쯤 ‘국어’라는 낱말을 털 수 있을까요.


  ‘國歌·國鳥·國花’ 같은 낱말을 곧바로 알아듣는 아이는 드뭅니다. 어른도 곧잘 헷갈릴 만합니다. 일본에서는 이런 낱말을 쓰더라도 한국은 한국말이 있으니 이런 낱말을 ‘나라노래·나라새·나라꽃(나랏노래·나랏새·나랏꽃)’으로 새롭게 지어서 쓸 줄 알아야 하고, 이런 낱말을 사전에 담을 수 있어야 해요. 한국말을 담는 한국말사전은 한자말을 담는 사전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사전들은 한국말을 슬기롭게 담거나 한국말을 알뜰살뜰 가꾸는 길하고는 동떨어집니다. 어린이가 초등학교를 다니며 옆에 놓는 사전조차 교과서에 실은 낱말을 풀이하는 참고서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아요. 어린이가 스스로 한국말을 슬기롭게 깨우치면서 말빛을 가꾸도록 돕지 못합니다.


  푸성귀나 남새나 나물을 제대로 살피는 어른이나 아이는 몇쯤 될까 궁금합니다. 국립국어원 사전 말풀이를 살피면, ‘푸성귀’는 “사람이 가꾼 채소나 저절로 난 나물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하고, ‘남새’는 “= 채소(菜蔬)”라 하며, ‘나물’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합니다. ‘채소(菜蔬)’는 “밭에서 기르는 농작물”이라 하고, ‘야채(野菜)’는 “(1) 들에서 자라나는 나물 (2) ‘채소(菜蔬)’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합니다. 그런데 ‘야채’는 ‘やさい’라는 일본말에서 비롯했다고들 합니다. 여러모로 살피면, 풀을 먹는(채식) 사람이건 풀을 안 먹는 사람이건, 풀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모릅니다. 말을 다루는 사전도 이를 옳게 가누지 못합니다.


  사람이 따로 길러서 먹는 풀일 때에 ‘남새’입니다. 스스로 돋는 풀일 때에 ‘나물’입니다. 남새와 나물을 아우를 때에 ‘푸성귀’입니다. 풀을 먹는 사람, 곧 ‘채식’이란 “푸성귀 먹기”이거나 “풀 먹기”이거나 “풀밥 먹기”예요. 이러한 얼거리를 살핀다면, ‘채식(菜食)’이라는 말을 털면서 ‘풀먹기’나 ‘풀밥’ 같은 낱말을 지을 수 있고, 학자들이 먼저 이런 낱말을 사전에 담을 수 있어요.


  만화영화 〈백설공주〉를 아이들과 보던 곁님이 문득 ‘하얀눈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이야기합니다. 일곱 살과 네 살인 아이들한테는 ‘백설공주’가 어떤 이름이고 뜻인지 알려주기 어렵습니다. 쉽게 풀어내어 이름을 새로 짓습니다. 요즈음 ‘에코백(ECO-BAG)’이 널리 퍼지지만, 나는 늘 ‘천바구니’를 챙깁니다. 시골 읍내에는 없으나 도시로 마실을 가면 으레 ‘네일아트’를 하는 가게를 봅니다. 이런 가게를 스치고 지나가다가 문득 생각했어요. 저곳에서는 손톱에 꽃이 피도록 하는구나 하고. ‘손톱꽃’이라고 할까요, ‘손톱빛’이라고 할까요.


  사전을 보면 풀 빛깔을 가리키는 ‘풀빛’이라는 낱말은 있지만, ‘꽃빛’이나 ‘잎빛’ 같은 낱말은 없습니다. 우리 사전은 어떤 낱말을 얼마만큼 실을 때에 아름다울까 궁금합니다. ‘설빔’처럼 ‘잔치빔’이나 ‘돌빔’ 같은 낱말을 즐겁게 지을 수 있으나, 이런 낱말을 가꾸는 학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사전을 살펴서는 ‘가엾다·불쌍하다’나 ‘무섭다·두렵다’나 ‘곱다·아름답다’ 같은 한국말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낼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말은 쉽습니다. 한국말에 실을 낱말은 아름다워야지 싶습니다. 4347.7.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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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3. 훈민정음과 한글과 한국말

― ‘쉬운 말’과 ‘어려운 말’



  ‘밥값’이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이 낱말은 세 가지 뜻으로 씁니다. 첫째는 “밥을 먹는 데 드는 값”입니다. 둘째는 “끼니가 될 밥을 먹으며 치르는 값”입니다. 셋째는 “밥을 먹은 만큼 하는 일”입니다. 시를 쓰는 정호승 님은 《밥값》이라는 이름을 붙인 시집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공기관이든 여느 회사이든 학교이든 ‘밥값’이라는 낱말은 거의 안 씁니다. 으레 ‘식대(食代)’라는 한자말을 씁니다. 밥을 밖에서 사다 먹자고 할 적에도 한자말을 빌어 ‘식당(食堂)’이라는 낱말을 써요. 한국말로 ‘밥집’을 쓰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요즈음은 ‘맛집’이라는 낱말이 꽤 퍼졌습니다. 맛있게 하는 밥집을 가리키는 ‘맛집’일 텐데, 이러한 낱말을 쓰는 흐름을 잘 살핀다면, ‘밥집’이라는 낱말도 앞으로 넉넉히 쓸 만하리라 봅니다. 구내식당이나 학생식당 같은 곳이라면 ‘밥터’라는 낱말을 새로 지을 수 있어요. 책을 사고파는 곳을 가리켜 ‘책방’이라고도 하지만 ‘책집’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책이 있는 곳, 이를테면 도서관이나 서재라 한다면 ‘책터’라는 낱말을 새로 지을 수 있습니다.


  돈을 내고 빨래를 맡기는 곳은 ‘빨래방’입니다. 이와 달리, 예부터 마을에서 빨래를 하려고 모이는 곳은 ‘빨래터’예요. ‘터’라는 낱말은 ‘집’이나 ‘방’과 다른 자리에서 써요. 그래서, 돈을 내고 노래를 부르는 작은 방이라면 ‘노래방’이라 할 테지만, 노래를 즐겁게 듣거나 누리는 곳, 이를테면 ‘음악회관’이나 ‘콘서트장’이나 ‘음악감상실’ 같은 곳은 ‘노래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입시교육으로 찌든 ‘학교’가 아닌 참답게 삶을 배우는 곳을 가리켜 ‘배움터’라는 이름을 새롭게 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글날을 맞이하면 이곳저곳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글은 모든 소리를 담을 수 있는 글이요, 지구별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손꼽는 글이라고 일컫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틀리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한글을 높이 사기만 할 뿐, 정작 한글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는 한국말은 어떠한가를 살피지 않기 일쑤입니다.


  한겨레는 왜 ‘모든 소리를 담을 만한 글’을 쓸까요? 한국말은 모든 소리를 귀여겨듣고 즐겁게 입으로 들려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한글은 왜 뛰어나다고 손꼽을 만한 글일 수 있을까요? 이 글을 쉽고 빠르게 익히면 우리가 입으로 나누는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거나 즐거운 이야기를 오래오래 건사하도록 옮겨적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을 쉬운 글로 담아 삶을 쉽게 지으면, 모든 사람이 날마다 아름답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길을 엽니다.


  한글날을 맞이해서 모처럼 한글을 생각한다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한결 깊거나 넓게 살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글날 하루만 반짝 스치듯이 지나가기보다는 한 해 내내 말과 글이 서로 맺고 얽는 흐름을 톺아볼 수 있기를 바라요.


  우리는 밥을 먹습니다. 우리는 밥그릇을 먹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웃하고 도란도란 밥 한 그릇을 나눕니다. 다만, 밥그릇에 담은 밥을 나누지, 밥을 담는 그릇을 나누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한글날을 기린다고 할 적에는 ‘그릇’이 되는 글(한글)이 아니라 ‘알맹이(밥)’가 되는 말(한국말)을 제대로 기리면서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대로 바라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릇을 먹지 않고 밥을 먹어요. 우리는 껍데기를 먹지 않고 알맹이를 먹어요. 우리가 옷을 입는 까닭은 옷을 지키려는 뜻이 아니라, 옷이 감싸는 알맹이인 몸을 지키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 몸은 우리 몸에 깃든 마음을 지킵니다. 우리가 저마다 다른 사람이요 숨결이라고 할 적에는, 몸뚱이만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몸뚱이에 깃든 넋이 저마다 다르면서 애틋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한글날을 기려야 한다면, 그릇인 글 때문이 아니라, 그릇에 담는 말 때문입니다. 지난날 훈민정음을 처음 지었다고 할 적에 중국글과 중국말만 있었다면 훈민정음이 오늘날처럼 빛이 날 까닭이 없었으리라 느낍니다. 게다가 처음 훈민정음이 태어나고 나서 오백 해 가까이 한글이 푸대접을 받은 발자국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훈민정음이 왜 푸대접을 받았을까요? 임금님이 새로운 우리 글자를 짓기는 했으나, 이 새로운 글자를 한겨레 모든 사람이 두루 배워서 쓰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임금님 둘레에 있는 몇몇 지식인과 권력자만 쓰도록 했습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거나 바다에서 물을 만지거나 아이를 낳아 돌보는 여느 사람한테 훈민정음을 가르치지 않았어요. 훈민정음은 오직 양반과 사대부와 임금님 둘레 몇몇 사람만 배워서 아주 조금 쓰던 글입니다. 이런 ‘죽은 글’이 오백 해쯤 흐른 개화기 언저리가 되어, 비로소 여느 사람 손으로 넘어와 ‘산 말’로 깨어납니다.


  ‘훈민정음’에서 ‘한글’로 이름을 바꾼 까닭이 있습니다. ‘훈민정음’은 처음 이 글을 지은 분 뜻과 같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을 누리려고 썼습니다. ‘한글’이라는 새 이름을 지은 분은 이 글을 몇몇 사람만 홀로 차지해서 쓰는 글이 아니라, 온누리 모든 사람이 즐겁게 배워서 아름답게 쓰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오늘날에도 ‘글 권력(지식·학문·정치)’을 누리는 이들은 한자와 한자말을 즐겨씁니다. 오늘날 새로운 ‘글 권력’을 누리는 이들은 알파벳과 영어를 즐겨씁니다.


  우리는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를 먹는 사람입니다. 옷을 아끼는 사람이 아닌 몸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몸에 깃든 마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한글은 한글대로 아끼되, 제대로 아끼고 사랑하며 보듬을 것은 ‘말’입니다. 먼먼 옛날부터 이 땅에서 태어나 살던 한겨레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즐겁게 나누던 ‘말’을 제대로 바라보고 아끼고 사랑하고 보듬을 노릇입니다. 말을 살릴 때에 넋이 살고, 넋이 살 때에 사랑이 살며, 사랑이 살 때에 사람이 삽니다.


  지난 오백 해 남짓 훈민정음을 쓴 분들은 무엇보다 ‘한국 지식인이 한자 소리를 하나로 모두어서 쓰도록 틀을 세우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내 삶을 스스로 가꾸면서 아름답게 새로 지어 날마다 즐겁게 사랑을 나누자는 뜻’으로 한글에 한국말을 담아서 쓸 수 있기를 빕니다. ‘쉬운 말’을 ‘쉬운 글’에 담을 때에 삶이 사랑스레 열립니다. ‘어려운 말’을 ‘어려운 글’에 담을 적에 삶이 차갑고 무섭게 닫히거나 갇힙니다. 4347.10.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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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1. ‘다른 말’과 ‘틀린 말’

― 한국말을 바로보고 바로세우는 길



  사람마다 삶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말이 다릅니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말이 달라요. 삶터가 다르고 사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충청도와 경기도도 말이 다르지요. 삶터와 삶자락이 모두 다를 뿐 아니라 사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에서 잘 자라는 나무가 경기도나 서울에서는 잘 자라기 어렵습니다. 날씨와 철과 바람과 햇볕과 물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흙이 다르고, 숲과 들과 바다가 다르지요. 똑같은 잣나무나 참나무라 하더라도 강원도와 충청도에서 자라는 나무는 달라요. 크기도 모양새도 빛깔도 냄새도 다릅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와 어는 같을 수 없습니다. 서로 다릅니다. 표준말로는 “했고요”라 할 테지만, “했구요”라든지 “했구만”이라든지 “했지라”라든지 “했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장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릅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할 적에는, 바로 이처럼 삶자락과 고장마다 다른 삶결에 따라 말이 다르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와 달리, ‘틀린 말’이 있습니다. 한국말에는 현재진행형이나 과거분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영어 같은 외국말을 한국사람이 배우려고 하면서, 그만 서양 말법에 따라 현재진행형과 과거분사 꼴로 ‘번역’을 해야 했고, 이런 번역 말투가 어느새 한국사람한테 널리 퍼졌습니다. 이를테면 “가고 있습니다”라든지 “먹고 있습니다”라든지 “했었거든요”라든지 “먹었었어” 같은 말투는 모두 틀립니다. 잘못 쓰는 말투예요. 이런 말투는 “갑니다”와 “먹습니다”와 “했거든요”와 “먹었어”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는 지구가 마치 한집인듯이 여기곤 하지만, 지구가 한집이어도 한국말과 영어는 같은 말이 아닌 다른 말입니다. 영어 말법을 한국 말법에 집어넣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생각해 보셔요. 미국사람은 ‘싱글싱글·싱글벙글·빙글빙글·싱긋싱긋·싱긋빙긋·빙긋빙긋·방긋방긋·방글방글·벙글벙글·벙긋벙긋’ 같은 한국말을 영어로 적을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겨레가 서로 다른 삶에 따라 서로 다른 말을 쓰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대로 한국말을 한국 말법에 맞게 쓰고, 영어 쓰는 나라에서는 그 나라 삶에 따라 그 나라 말법을 즐겁게 씁니다.


  일본사람은 일본말로 “준비 땅!”을 쓰는데, 아직 꽤 많은 한국사람은 이런 일본말을 버젓이 씁니다. 일본말인 줄 모를 뿐 아니라, 오랫동안 몸에 익었다면서 이런 말투를 털지 않습니다. 글이나 말 첫머리에는 “하여”나 “해서”나 “하지만”을 넣을 수 없습니다. 이런 말투는 “이리하여”나 “이리해서”나 “그러하지만(그렇지만,그러나)”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여·해서·하지만”은 모두 ‘틀린 말’입니다. 잘못 쓰는 말투를 잘못 퍼뜨리는 노릇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투를 쓰는 적잖은 이들은 잘잘못을 느끼거나 헤아리지 않기 일쑤예요. ‘틀린 말’을 쓰면서, ‘다른 말’인듯이 잘못 여기거나 둘러댑니다.


  “가벼운 미소”나 “넓은 광장”은 모두 잘못 쓰는 말입니다. ‘틀린 말’입니다. “가벼운 웃음”이나 “넓은 터(광장)”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잘못 쓰는 ‘틀린 말’은 틀린 말일 뿐 ‘다른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된장찌개에 된장을 안 넣고 간장이나 소금을 넣어도 간이 맞아요. 그러나 된장찌개가 아닌 간장찌개나 소금찌개입니다. 된장을 안 넣고도 된장찌개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콩나물국에 소금이 아닌 설탕을 넣으면 어찌 될까요. ‘다른 콩나물국’을 끓이는 셈일까요, ‘틀린(잘못 끓인) 콩나물국’을 끓이는 셈일까요.


  ‘축제’는 일본말입니다만 어느덧 한국 사회에 이 일본말은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영어를 썩 안 좋아하는 이들은 ‘축제’나 ‘축전’ 같은 한자말을 쓰고, 말을 깊이 살피지 않는 사람은 ‘페스티벌’이나 ‘쇼’나 ‘비엔날레’ 같은 영어를 써요. 한국말로 ‘잔치’나 ‘큰잔치’나 ‘작은잔치’나 ‘마당’이나 ‘한마당’을 쓰는 사람이나 모임이나 지자체를 보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한국말을 옳거나 알맞거나 아름답거나 즐겁게 쓰지 않는 일을 놓고 ‘다른 말’이라고 여겨도 될는지 아리송합니다. 아이들과 ‘생일잔치’를 하지 않고 ‘생일파티’를 하는 모습도 ‘다른 말’을 쓰는 모습이라고 해도 될까 궁금합니다.


  다른 삶터는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서울과 부산은 저마다 달라 아름답습니다. 경기와 강원과 전라와 경상과 충청은 서로 다른 터전이요 마을이고 이야기이기에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다른 말’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저마다 다른 곳에서 다른 보금자리를 다른 몸가짐과 눈길로 사랑스레 가꾸는 삶일 때에 아름다운 ‘다른 말’이 태어납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구름이다” 하고 말할 사람이 있고, “구름이 있네” 하고 말할 사람이 있으며, “구름이 토끼처럼 생겼네” 하고 말할 사람이 있을 테고, “구름은 하늘에서 사는구나” 하고 말할 사람이 있어요.


  ‘다른 말’이란 저마다 다르게 사랑하면서 가꾸는 삶에서 찬찬히 태어나는 아름다운 말입니다. ‘다른 말’은 서로서로 아끼고 사랑합니다. ‘다른 말’은 이웃과 동무가 쓰는 말을 가만히 살피거나 귀여겨들으면서 새롭게 맞아들입니다. ‘다른 말’은 말법이나 말틀이나 말삶을 무너뜨리거나 일그러뜨리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쳐들어온 말은 모두 ‘틀린 말’입니다. 영어를 배우는 일은 뜻있습니다만, 영어 말투나 말법을 한국말에 억지로 끼워맞추려는 모습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my’를 ‘내’가 아닌 ‘나의’로 번역해서 가르치거나 쓰는 일은 모두 ‘틀린 말’입니다. ‘your’는 ‘네’로 번역해야 옳고 맞지, ‘너의’로 번역하면 ‘틀린 말’입니다. 바다는 ‘바닷가’요 내는 ‘냇가’이며 강은 ‘강가’입니다. 이를 ‘해변’이나 ‘천변’이나 ‘강변’처럼 한자를 빌어서 써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틀리게 쓴 말은 알맞게 바로잡으면 됩니다. 이제껏 틀리게 썼으면 앞으로 바로잡으면 됩니다. 내가 쓰는 말투 열 가지 가운데 열 가지가 모두 ‘틀린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씩 차근차근 바로잡으면 됩니다. 한국말을 한 가지씩 새롭게 배우면서 즐겁게 쓰면 돼요.


  내 삶을 바로보면서 내 말을 바로세웁니다. 내 넋을 바로보면서 내 삶길을 바로잡습니다. ‘틀린 말’을 잘못 받아들여서 쓴 일은 부끄럽지 않고, 대수롭지 않으며, 꾸중 들을 일이 아닙니다. 이제껏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 슬기롭게 삶과 넋과 말을 바로보면서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게 한국말을 가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7.10.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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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에서 펴내는 격월간잡지 2014년 9-10월호에 싣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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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35. ‘우수’상은 ‘덤’으로 준다

― 살아가는 대로 쓰는 말



  ‘우수’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이 낱말 한 마디만 들려주면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요? 곰곰이 생각에 젖어 봅니다. 나는 이 낱말과 얽혀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꽤 어릴 적 일을 떠올립니다. 열 살 언저리나 더 어릴 적에 어머니 손을 잡고 저잣거리에 나들이를 가던 일을 그립니다. 그때 어머니는 저잣거리에서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장만하면서 “‘우수’ 없어요?” 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할머니는 “우수? 우수 줘야지.” 했습니다. 어떤 아주머니는 “‘우수’요? 우수가 뭐예요?“ 하고 되묻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러니까, ‘덤’. 덤 없어요?” 하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였는지 이웃 할아버지였는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만, 어떤 할아버지한테 내 상장을 자랑하듯이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우수’ 상장을 받았어요!” 할아버지가 상장을 받아서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우수상이라고? 더 얹어서 주는 상이 뭐가 좋다고 그러냐?” 하고 한마디 퉁을 놓았습니다. 이때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아리송했습니다. 못 알아들었습니다. 저잣거리에서 어머니한테서 들은 ‘우수’를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말하고 이어서 생각하지 못했어요.


  한국말 ‘우수’나 ‘우수리’는 요즈음 아주 잊히거나 사라지거나 죽은 말이 됩니다. 이 자리에 한자말 ‘성과(成果)’과 ‘성과급(成果給)’이 또아리를 틉니다. 그리고, 이 한자말조차 밀어내고 영어 ‘인센티브(incentive)’가 밀려듭니다.


  지난 1991년에 《草家》(열화당 펴냄)라는 사진책이 나온 적 있습니다. 책이름을 한자로만 적으니 아쉬운 노릇이지만, 그래도 이 사진책은 낱말을 잘못 적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흔히 ‘초가집’처럼 잘못 말하거든요.


  ‘초가’는 ‘풀(草) + 집(家)’입니다. ‘풀집’을 일컬어 ‘초가’라는 한자말을 예전 지식인이 지은 셈입니다. 그러니, ‘초가집’이라 말하면 ‘풀집집’ 꼴이 됩니다. 아주 우스운 말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 겨레는 예부터 ‘풀집’을 지었을까요? 풀(이엉)로 지붕을 얹었거든요. 풀로 담을 이었어요. 기둥은 나무로 세우지만, 기둥 사이를 막을 적에는 풀(짚)을 이겨 넣은 흙을 댔습니다. 집이 온통 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풀과 흙과 나무와 돌로 지은 집이 ‘한겨레 살림집’입니다. 풀을 여러모로 아주 많이 쓰기에 ‘나무집’이나 ‘돌집’이라고는 안 하고 ‘풀집’이라 했어요.


  지난날 우리 겨레는 옷을 지을 적에 풀에서 실을 얻었습니다. 모시풀이나 삼풀에서 실을 얻었어요. 모시옷은 모시풀에서 얻은 모시실로 지은 옷이요, 삼베옷은 삼풀에서 얻은 삼실로 지은 옷입니다.


  밥은 어떻게 먹었을까요? 밥도 풀밭에서 얻었지요. 온갖 나물이란 바로 풀입니다. 사람이 손수 심어 ‘남새’이고, 들과 숲에서 스스로 자란 풀을 뜯어서 먹으면 ‘나물’입니다. 이런 삶이었으니, 한겨레 살림집은 ‘풀집’일밖에 없습니다. 풀옷이고 풀밥이니까, 이 흐름에 맞게 ‘풀집’이에요.


  노르웨이에서 날아온 어린이책 《비발디》(어린이작가정신,2014)를 읽다가 38쪽에서 “아침 식사를 하려고 식탁 앞에 앉았어요. 향긋한 차.”라는 대목을 봅니다. “아침밥”이라 안 하고 “아침 食事”로 적을 뿐 아니라, ‘밥상’이 아닌 ‘食卓’이라 적으니 아쉬우나, ‘향긋한’이라 적으니 반갑습니다.


  김혜영 님이 시골살이를 하면서 쓴 《암탉, 엄마가 되다》(낮은산,2012)라는 책을 읽다가 116쪽에서 “병아리가 어미닭과 첫 눈맞춤을 해요.”라는 대목을 보고, 196쪽에서 “낙엽이 지고, 첫눈이 내렸습니다”라는 대목을 봅니다.


  한국말사전에 ‘눈맞춤’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사람들이 곧잘 씁니다. 왜냐하면, 참말 서로 눈을 맞추면서 즐겁기 때문입니다. 눈을 찡긋 하면서 웃어요. 즐거운 눈맞춤입니다. 입을 맞추어 입맞춤이고, 마음을 맞추어 마음맞춤이며, 꿈을 맞추어 꿈맞춤입니다. 다만, “낙엽(落葉)이 지고”처럼 적으니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한자말 ‘낙엽’은 “진 잎”입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잎을 한자말로 ‘낙엽’이라고 해요. 다시 말하자면, “낙엽이 지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바닥에 구르는 잎이 ‘낙엽’인걸요.


  “잎이 진다”고 할 적에, 곧 가을에 잎이 진다고 할 적에는 “가랑잎이 집”니다. 한국말 ‘가랑잎’은 나뭇가지에서 마른 잎이에요. 나뭇가지에서 잎이 마른 뒤 지니까 “가랑잎이 진다”고 말해야 올바릅니다. 또는 “잎이 진다”라 하거나 “가을잎이 진다”고 해야지요.


  한국사람은 “낙엽이 지다”와 같은 말을 언제부터 썼는 지 궁금합니다. 아마, ‘낙엽(落葉)’이라는 한자말이 들어온 뒤부터 썼겠지요. 그러나, ‘낙엽’이라는 한자말은 한자를 쓰던 옛날 지식인이 아니고는 안 썼어요. 여느 한국사람은 아무도 모르던 낱말이요, 쓸 일이 없던 낱말입니다. 먼먼 옛날부터 여느 한국사람, 그러니까 여느 시골사람은 ‘나뭇잎’이나 ‘잎’이나 ‘가랑잎’이라고만 했어요.


  일본사람 니시마키 가야코 님이 빚은 어린이책 《킁킁, 맛있는 냄새가 나》(시공주니어,2007)를 읽으면서 24쪽에서 “계란 프라이를 손으로 집어 먹고 있고”라는 대목을 보았습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무릎을 쳤습니다. 요즈음 사람들 가운데 ‘계란(鷄卵) 프라이(fry)’ 같은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아주 널리 쓰는 말입니다. 내 어머니는 내 어릴 적에 ‘우수’ 같은 말을 쓰실 줄 알면서도, 달걀을 부치거나 지질 적에 언제나 ‘계란 프라이’라 하셨고, 요즈음에도 똑같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계란 프라이’라 하지는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일본사람이 쓴 말이 한국에 잘못 들어와서 굳었다고 느낍니다. 한국사람은 ‘달걀부침’이나 ‘달걀지짐’입니다. 우리 삶을 스스로 아름답게 가꾸면서 우리가 쓰는 말과 글 또한 아름답게 나눌 수 있기를 빕니다. 4347.8.1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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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에서 펴내는 잡지에 싣는 글입니다. 지난 여름호에 실은 글인데 이제서야 걸치네요.

..

말넋 34. 새롭게 태어나는 말
― 함께 살리며 아끼는 말


  까치가 지은 둥지는 ‘까치집’이라 합니다. 한국말사전을 보면 ‘까치집’은 올림말입니다. 새가 지은 둥지는 ‘새집’이라 해요. 이 낱말도 한국말사전에 나와요. 제비가 지은 ‘제비집’과 딱새가 지은 ‘딱새집’은 한국말사전에 나오지 않습니다. 한국말사전에 ‘-집’을 뒷가지로 올린다면, ‘제비집’이나 ‘딱새집’이나 ‘할미새집’ 이나 ‘해오라기집’같은 낱말을 따로 올림말로 싣지 않아도 돼요. 그렇지만, 아직 한국말사전은 한국말을 넓고 깊으며 슬기롭게 갈고닦는 밑틀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늘날 맞춤법으로는 ‘제비 집’이나 ‘참새 집’처럼 띄어서 적어야 하는데, 굳이 이렇게 띄어서 적어야 할까 궁금해요. 이 새가 지은 집은 붙여서 적고, 저 새가 지은 집은 띄어서 적어야 할 까닭은 없어요.

  러시아사람 코르네이 추콥스키 님이 쓰고 한국사람 홍한별 님이 옮긴 《두 살에서 다섯 살까지》(양철북,2006)라는 책을 읽다가 125쪽에서 “준비, 땅!”이라는 말마디를 봅니다. 저도 어릴 적에는 이런 말을 익히 썼습니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이런 말을 으레 썼거든요. 어느 교사는 “요이, 땅!”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교사(어른)가 읊는 말투를 받아들여 “요이, 땅!”이라 했어요. “요이, 땅(ようい,どん)!”이 일본말인 줄 알아차린 때는 한참 뒤였어요.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1990년대 첫머리까지 이 말마디가 일본말이라고 알려준 어른(교사)이 없었어요.

  그러면 한국말은 무엇일까요. 한국사람이 예부터 즐겁게 쓰던 한국말은 무엇일까요. 학교에서 한국말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우리들은 한국말을 어디에서 제대로 배울 만할까요.

  총을 쏘는 소리를 두고, 한국사람은 ‘탕’으로 적습니다. 일본사람은 총을 쏘는 소리를 ‘땅(どん)’으로 적어요. 그러면 ‘요이(ようい用意)’는 무엇일까요. 이 일본말은 ‘준비(準備)’를 뜻한다 하고, 이 말뜻을 좇아 “요이, 땅!”을 “준비, 탕!”으로 고쳐서 쓰자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이쯤까지는 요즈음 들어 이럭저럭 둘레에서 들을 수 있고 밝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쯤에서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일본말을 한국말로 고쳐서 바르게 적는 길’만 헤아리느라, 막상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로 삼기 앞서, 한겨레가 수천 수만 해에 걸쳐 어떤 말을 썼는지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겨레는 남달리 ‘셋’이라는 숫자를 좋아합니다. 왜 좋아할까요? 아무래도 오랜 숨결과 이야기가 깃들었을 테고,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움직이면서 좋아하겠지요. 수많은 사람들 손과 입을 거쳐 ‘셋’이라는 숫자를 마음으로 깊이 받아들이거나 삶으로 넉넉히 맞아들였겠지요.

  어떤 일을 여럿이 함께 하면서 겨루는 자리에서 “하나, 둘, 셋!” 하고 외치는 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요이, 땅!”이라는 일본말이 뻗치더라도 “하나, 둘, 셋!” 하고 말하던 분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 둘, 셋!”을 외쳤을까요? 지식으로? 학문으로? ‘국어순화’를 하려고? 아마 모두 아니지 싶어요. 그저 먼먼 옛날부터 몸에 익고 마음에 익숙한 대로 “하나, 둘, 셋!”을 입으로 터뜨렸으리라 느껴요. 한국말로 바르게 쓰자면 “하나, 둘, 셋!”입니다.

  소설을 쓰던 이문구 님이 2003년에 숨을 거두기 앞서 동시를 그러모아 《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창비,2003)라는 책을 선보였습니다. 이문구 님은 이녁 딸아들한테 읽히려고 1988년에 처음 동시집을 냈고, 이녁 딸아들이 자라 새롭게 아이를 낳으니 손자한테 읽히려고 다시 동시를 썼어요. 이문구 님이 어린 나날 충청도 시골에서 늘 보고 겪으며 마주했던 이야기를 손자한테 들려주는 동시로 엮었습니다.

  〈맷돌〉이라는 동시를 읽으면 “이가 닳아서 덜 먹으면 / 매죄료 장수가 정으로 쪼아서 / 언제나 살갑게 돌아갔는데” 하고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 동시에는 ‘매죄료장수’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매죄료장수는 매통이나 맷돌이 이가 닳으면 정으로 쪼아서 날카롭게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요. 요즈음은 매통도 맷돌도 보기 어려우니 매죄료장수는 더더욱 볼 수 없어요.

  〈굴뚝새는 굴뚝새〉라는 동시를 읽으면 “김장을 담그고 / 고사떡을 도르고 / 동지 팥죽을 쑤니까 / 낮에도 어둑한 굴뚝에 / 굴뚝새가 왔네요” 하고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 동시에는 ‘도르다’라는 낱말이 나와요. ‘도르다’라는 낱말에는 다섯 가지 말뜻이 있는데, 다섯째 뜻이 “몫을 갈라서 따로따로 나누다”입니다. 그리고, ‘도르리’라는 낱말은 “(1) 여러 사람이 먹을거리를 차례로 돌려 가며 내어 함께 먹음 (2) 똑같이 나누어 주거나 골고루 돌라 줌”을 뜻해요. 시골에서 두레와 품앗이와 울력이 사라지면서 ‘도르리(도르다)’라는 낱말도 시나브로 사라졌는데, 1980년대 끝무렵이었는지 1990년대 첫무렵이었는지 ‘도르리’라는 이름이 붙은 과자가 나온 적 있어요. 그무렵 방송광고에서 ‘도르리’라는 과자를 알리면서 말뜻을 곁달아서 얘기했어요.

  생각해 보면, 요즈음은 두레라든지 도르리를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제는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지난날 ‘두레’나 ‘도르리’하고는 사뭇 다르지만, 새로운 삶에 걸맞게 ‘새로운 두레’와 ‘새로운 도르리’를 해요.

  도시에서 곧잘 나타나는 생활협동조합은 ‘새로운 두레’입니다. 뜻 맞는 이들이 여럿 모여 밥집에서 즐겁게 밥을 먹으면서 밥값을 나누어 내는 일은 ‘새로운 도르리’라 할 만합니다.

  삶을 새롭게 가꾸면서 말을 새롭게 가꿉니다. 삶을 알뜰히 일구면서 말을 알뜰히 일구어요. 한국말사전에서 예쁜 토박이말을 캐내는 일은 나쁘지 않으나,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예쁘게 쓸 새말을 생각하면서 나누는 일은 무척 좋습니다. 아이들한테 어떤 말을 물려주고 싶은지 헤아려 보셔요. 아이들한테 물려주기 앞서, 어른인 우리 스스로 서로서로 어떤 말을 주고받을 적에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울는지 곱씹어 보셔요. 삶을 사랑할 때에 말이 사랑스럽습니다. 4347.6.1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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