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포시 사외보 <책이 열리는 나무>에 싣는 글입니다.
여름호가 진작에 나왔는데
글은 이제야 올리는군요~

..

말넋 33. 제빛을 읽고 제말을 합니다
― 여름에 먹고 마시는 숨결


  글에 눈을 뜬 일곱 살 아이는 글이 보일 때마다 읽으려고 합니다. 글을 읽는 아이는 그저 읽습니다. 지식이나 사상이나 철학으로 읽지 않습니다. 아이 눈에 보이는 대로 글을 읽습니다. “2시 20분”이라 적힌 글이 있으면 일곱 살 아이는 “두 시 스무 분” 하고 읽습니다. 아마 여느 어른이라면 모두 “두 시 이십 분”이라 읽겠지요. 일곱 살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녔다면, 또 앞으로 학교를 다닌다면, 이렇게 읽을 수 없으리라 느낍니다. 사회에서는 “2시”를 “두 시”로 읽고 “20분”을 “이십 분”으로 읽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때를 가리키는 숫자를 왜 ‘하나 둘 셋’과 ‘일 이 삼’으로 갈라서 읽을까요? 우리는 왜 이처럼 읽을까요?

  요즈음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중국과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겨레는 예전에 “두 시 스무 분”처럼 읽었고, 돈을 셀 적에도 “1달러”를 “한 달러”로 읽었습니다. “2달러”라면? 마땅히 “두 달러”로 읽었어요. 그렇지만 이제 중국과 일본에서도 “두 시 스무 분”이나 “두 달러”처럼 읽는 사람이 많이 사라졌어요. 왜냐하면 중국에도 일본에도 ‘남녘 연속극과 영화’가 많이 퍼졌어요. 남녘에서 쓰는 말투가 중국과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겨레 말투에 스며듭니다.

  저는 여덟 살에 처음 들어간 학교에서 때를 “두 시 이십 분”처럼 읽도록 가르칠 적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여쭈었습니다. 왜 그렇게 읽느냐고 여쭈었어요. 1980년대 첫무렵입니다. 그무렵 학교에서 교사는 이런 물음을 바보스러운 말로 여겼습니다. 대꾸할 값어치가 없다고 여기며, 시키는 대로 따르라고만 했어요. 오늘날 학교는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오늘날 초등학교와 유치원에서 아이들한테 숫자읽기를 가르치면서 어떤 낱말과 말투를 보여주거나 알려줄는지 궁금합니다.

  노정임·안경자 님이 쓴 《파브르에게 배우는 식물 이야기》(철수와영희,2014)라는 책을 읽다가 “잎의 모양은 식물마다 다 달라. 우리나라에는 600여 종의 식물이 산다고 알려져 있는데(96쪽).”와 같은 글을 봅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우리 어른들 말투가 이렇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잎의 모양은 식물마다 다 달라”처럼 말합니다. 어느새 이런 말투로 딱딱하게 굳습니다. 이러한 글은 틀림없이 한글입니다. 다만, 겉보기로는 한글이요, 속보기로는 한국말은 아니에요.

  한국말로 옳게 쓰거나 말하려면 “잎은 식물마다 모양이 다 달라”처럼 다듬어야 합니다. 토씨 ‘-의’를 넣어 “잎의 모양은”처럼 쓰는 글은 한국말이 아니에요. 여기에서 더 살핀다면, “잎은 풀과 나무마다 모양이 다 달라”처럼 다듬을 만하고, “잎은 풀과 나무마다 다 달라”처럼 더 다듬을 만해요.

  책에 나온 글을 더 들여다보면 “600여 종의 식물이 산다고 알려져 있는데”와 같은 글도 “식물이 600여 종이 산다고”로 다듬어야 알맞습니다. “한 권의 책”이나 “한 잔의 커피”는 한국말이 아니에요. 영어 번역 말투입니다. 한국말로 바르게 가다듬으면 “책 한 권”이고 “커피 한 잔”입니다. “600여 종의 식물”은 한국말이 될 수 없어요. 껍데기만 한글일 뿐입니다. “식물 600여 종”이라 적어야 올발라요. 더 살필 수 있으면 “풀과 나무가 600여 가지”로 다듬고, “풀과 나무가 600가지 남짓”으로 다듬습니다. 이 글월을 통째로 다듬어 “우리나라에는 풀과 나무가 600가지 남짓 있다고 알려졌는데”로 적을 수 있으면, 비로소 옹글다 싶은 한국말이 됩니다.

  유월 문턱에 감꽃을 바라봅니다. 감꽃은 오월에 피고 유월에 집니다. 유월에 지는 감꽃은 칠월에 무르익어요. 팔월에는 감알이 어떤 빛이 될까요? 집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으면 날마다 새롭게 감잎과 감꽃과 감알을 살필 수 있어요. 감을 잎과 꽃과 알로 헤아릴 만합니다. 감나무에서 감알을 하나 톡 따서 먹으면, 단단한 씨앗을 봅니다. 감씨예요. 그러니까, 풀과 나무는 네 가지로 묶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잎과 꽃과 알과 씨예요. 더 들여다보면, 잎이 돋기 앞서 싹이 터요. 싹은 씨앗이 흙에 드리운 뒤 바깥으로 내놓는 첫 잎사귀나 줄기입니다. 나무라면 한해살이 아닌 여러해살이인 터라, 싹이 튼다기보다 눈이 터져요. 나무에 있는 눈은 겨울눈이라고 합니다. 이리하여, 풀이라면 ‘싹·잎·꽃·알·씨’로 흐르는 삶이고, 나무라면 ‘눈·잎·꽃·알·씨’로 흐르는 삶입니다.

  여름이면 우리들은 밭에서 나는 오이를 먹고 토마토를 먹습니다. 매화알도 살구알도 복숭아알도 노르스름하거나 발그스름하게 영급니다. 오얏알은 아예 빨갛디빨갛게, 빨갛다 못해 검붉게 익습니다. 매화알은 으레 푸른 빛깔일 때에 따서 효소를 많이 담지만, 매화알을 매화나무에 그대로 둔 채 바라보면 노르스름하면서 바알간 빛이 도는 열매로 익습니다. 잘 익은 매화알을 먹으면 ‘매화알이 푸를 적에 따서 효소로 담가 먹는 까닭’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매화알은 매화알대로 맛이 있어요. 다만, 매화알은 살구맛도 오얏맛도 아닙니다.

  곧, 매화알은 매화빛과 매화내음으로 매화맛입니다. 살구알은 살구빛과 살구내음으로 살구맛입니다. 눈썰미가 밝은 분이라면, 매화잎과 살구잎과 복숭아잎이 어떻게 다른지 쉬 알아챕니다. 능금잎과 배잎이 어떻게 다른지 곧 알아챌 테고요. 눈썰미가 어둡다면 감잎과 모과잎과 뽕잎을 못 알아봐요. 무화과잎을 못 알아보는 분도 있어요. 다 다른 나무에서 다 다른 잎을 알아본다면, 잎빛과 잎무늬와 잎결을 모두 다르게 읽을 수 있어요. 나무마다 다른 빛과 무늬와 결을 읽는다면, 말을 하거나 글을 쓸 적에 ‘오동잎빛’과 ‘마삭줄꽃빛’을 말하거나 ‘능금꽃내음’과 ‘멧딸내음’을 말할 수 있어요. 나무마다 다른 빛과 무늬와 결을 못 읽으면, 숲에서 들려주는 빛을 말이나 글로 담아서 나타내지 못해요.

  그나저나 수박은 언제 익을까요? 참외는 언제 익나요? 모두 여름에 익어요. 비닐집에서 키우면 봄에도 수박과 참외를 맛보는데, 해와 바람과 비를 머금는 수박과 참외는 여름빛이 무르익을 때에 제맛입니다. 여름에 여름을 먹는 제맛을 안다면, ‘제빛’을 찾고 ‘제말’을 하며 ‘제삶’을 가꾸는 ‘제길’을 걷겠지요.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읽는 만큼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사랑하는 만큼 스스로 살아갑니다. 4347.5.2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말넋 36. ‘치마’와 ‘스커트’

― 삶을 바라보는 넋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라기에 한국사람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어도, 내 어버이가 한국사람이면 한국사람입니다. 어버이가 한국사람도 아니요,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나, 내 삶터를 한국으로 삼으면 한국사람입니다. 겉보기로는 ‘똑같이 한국사람’이라 하더라도, 삶으로는 서로 사뭇 다릅니다. 그래서, 겉보기로는 ‘똑같이 한국말’이라 하지만, 삶으로 보면 말이 사뭇 다르기 마련입니다.


  한국사람이 쓰는 말은 여럿입니다. 맨 먼저 한국말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중국 한자말과 일본 한자말과 한국 한자말이 있습니다. 여기에 일본말이 있고 영어가 있으며 몇 가지 서양말과 중국말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한국사람이 가장 널리 쓰는 말이라면 아무래도 ‘한국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일하는 곳이 다르고 마음을 기울이는 데가 다른 터라, 어떤 한국사람은 ‘중국 한자말’이나 ‘일본 한자말’을 가장 자주 씁니다. 어떤 한국사람은 ‘영어’를 매우 자주 씁니다.


  ‘항상(恒常)’이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이 낱말은 겉보기로는 한자말이지만, 그냥 한자말이 아닙니다. 첫째, ‘항상’은 ‘한국말이 아닌 말’입니다. 이 다음으로 놓고 보면 ‘중국 한자말’이나 ‘일본 한자말’일 테지요. 그러면, 한국말은 무엇일까요? ‘늘’과 ‘언제나’와 ‘노상’과 ‘한결같이’입니다. 이밖에 때와 곳에 따라 수많은 말이 더 있습니다.


  한국사람이라 하더라도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알아듣기는 알아듣습니다. 영어를 섞든 일본 한자말을 넣든 번역 말투를 쓰든, 이럭저럭 서로 알아듣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알아듣기만 하면 어떤 말이든 깊이 살피지 않고 써도 될까요? 이를테면, ‘치마’와 ‘스커트(skirt)’라는 낱말이 있는데, 두 낱말을 한국사람이 한국에서 섞어서 써도 될까요?


  한국말사전은 ‘스커트’를 올림말로 다룹니다. 영어사전이 아닌 한국말사전에 ‘스커트’가 올림말로 나옵니다. 한국말사전에 나오는 ‘스커트’ 뜻풀이를 보면 “주로 여성이 입는 서양식 치마. 모양에 따라 타이트·개더·플레어·플리츠·랩 따위로 나누고, 길이에 따라 미니·미디·맥시 따위로 나눈다. ‘치마’로 순화”라 나옵니다. 그러면 ‘치마’는 어떻게 풀이할까요? 한국말 ‘치마’를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면 “여자의 아랫도리 겉옷”이라 풀이합니다.


  두 낱말을 잘 살피면 두 낱말은 아주 다른 낱말인 줄 알 수 있습니다. ‘치마’는 한국말을 쓰는 나라에서 쓰는 낱말이고, ‘스커트’는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쓰는 낱말입니다. 그리고, 한국말사전에서 다루는 낱말풀이는 엉터리입니다. 왜냐하면, ‘스커트’를 가리켜 “서양식 치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서양식 치마라 한다면 ‘서양치마’라고 아예 새로운 낱말을 지어서 써야 올바릅니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한국으로 나들이를 와서 ‘한복’이라는 옷을 본다면, 이 가운데 ‘한복 치마’를 본다면, 미국사람이나 영국사람은 무어라 말할까요? 아주 마땅히 ‘스커트’라 하겠지요. 요새는 ‘미니스커트’가 아예 한국말 고유명사처럼 못이 박혔지 싶은데, ‘미니스커트’도 영어일 뿐 한국말이 될 수 없습니다. 한국말은 ‘깡동치마’나 ‘짧은치마’입니다. 사진을 서양에서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으레 ‘포토그래퍼’라는 이름을 쓰고, 이런 분들한테서 사진을 배운 젊은이도 이녁 스스로 ‘포토그래퍼’라는 낱말을 쓰지만, 사진을 찍는 사람은 한국에서 ‘사진가’입니다. 자전거를 서양에서 먼저 만들었건 말건, 한국에서는 ‘자전거’를 탈 뿐입니다. ‘바이서클(bicycle)’을 타지 않아요.


  한국사람은 한국에서 ‘노래’를 합니다.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은 ‘音樂’을 할 테고, 서양사람은 ‘music’을 할 테지요. 그러나 요새는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음악’조차 아닌 ‘뮤직’을 합니다.


  무엇이 한국말일까요? 무엇이 한국말이 아닌 말일까요? 무엇이 한국말인 말일까요?


  삶을 바라보는 넋에 따라 말이 다릅니다. 삶을 바라보는 넋에 따라 말뿐 아니라 삶부터 다릅니다. 삶을 바라보는 넋에 따라 말과 삶과 빛이 다르고, 꿈과 사랑과 노래가 다릅니다.


  우리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답게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겉보기로 한글이 아닌 알맹이로 한국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을 밝히는 말을 알차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슬기롭게 삶을 가꾸듯이 슬기롭게 말을 가꾸어야 합니다.


  한국 사회나 언론이나 학문이나 역사나 문화나 교육을 돌아보면, 어디에서나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억누르는 얼거리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억누를까요? 때로는 짓밟고 때로는 따돌리기까지 하는데, 왜 이런 짓을 일삼을까요? 까닭을 살피면 아주 쉽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을 짓지 못하도록 가로막으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쉽게 쓰는 말은 가장 쉽게 슬기로 닿습니다. 가장 쉽게 쓰는 말은 언제나 가장 아름답습니다. 가장 쉽게 쓰는 말은 늘 가장 쉽게 생각을 열고 틔워서 가장 사랑스러운 빛으로 거듭납니다.


  참된 말, 참말, 그러니까 한자말로 하자면 ‘진리’란 무엇이겠습니까. ‘참다운 빛이 감도는 말’은 한결같이 가장 쉽습니다. 어린이도 알아차릴 수 있기에 슬기요 진리입니다. 학교를 다닌 적 없는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기에 슬기이면서 진리입니다. 한국사람이면서 우리 스스로 한국말 아닌 ‘엉뚱한 말’을 자꾸 쓰지요? 보기를 들자면 ‘존재(存在)’ 같은 한자말이 있는데, 사회와 교육과 문학과 문화 모두 이런 엉뚱한 말을 자꾸 쓰도록 몰아붙이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 넋과 뜻을 오롯이 펼치지 못합니다. 이런 말을 듣는 사람도 좀처럼 마음과 생각을 열지 못합니다. 이야기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 자꾸 말을 더 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보셔요. 아이들은 ‘존재’나 ‘스커트’ 같은 낱말이 없어도 생각이 가로막히지 않습니다. 모든 마음을 술술 풀어놓습니다.


  한국사람은 이웃과 동무인 다른 한국사람하고 어떤 말로 생각과 마음을 나눌 때에 가장 즐겁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울까요? 말을 새로 찾는 일하고 말을 제대로 보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스스로 쓰고 싶으면 ‘스커트’이든 ‘뮤직’이든 ‘존재’이든 그냥 쓰면 됩니다. 다만, 한국사람 스스로 이런 낱말을 자꾸 쓰면 쓸수록, 생각을 틔우고 마음을 열어 슬기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빛은 차츰 스러지거나 사라질밖에 없습니다. 4347.7.2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말넋 29. 말넋을 거스르는 네 가지 ㄱ
― 토씨 ‘-의’를 잊어야 한다


  수수한 말이란, 어린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함께 쓰는 말입니다. 몇몇 지식인과 전문가만 쓰는 말이 아니라, 누구나 즐겁게 쓰는 말이 수수한 말입니다. 수수한 말이란, 모든 사람이 즐겁게 쓰는 말입니다. 교수와 교사와 학자와 박사만 주고받는 말이 아니라,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하면서 쓰는 말이 수수한 말입니다. 수수한 삶일 때에 이 나라가 아름답습니다. 수수하게 어깨동무를 할 적에 함께 웃고 노래하면서 이야기꽃이 피어납니다. 수수하지 않을 적에는 평화가 아닌 전쟁이 됩니다. 수수하지 않기에 신분과 계급을 가릅니다. 수수하지 않은 말로는 인문학도 역사도 문학도 꽃피우지 못합니다.

  오늘날 초등학교 교과서를 들여다보면 아주 어려운 인문책에 나오는 낱말로 이루어져요. 교과서 편집자들이 쓰는 ‘여느 말’부터 벌써 어려운 인문책 낱말로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교과서를 엮는 이들은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이한테 알맞거나 여덟∼열세 살 어린이 눈높이한테 알맞춤한 낱말을 살피지 않습니다. 교과서 엮는 이들은 지식발달 단계와 교과과정만 살핍니다. 아이들이 앞으로 어떤 낱말로 어떤 삶을 가꾸면서 어떤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면 아름다울까를 안 살핍니다.

  말에는 언제나 넋을 담습니다. 내 넋을 담아 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눕니다. 말에는 언제나 뜻을 싣습니다. 내 뜻을 실어 이웃과 같이 생각을 주고받습니다. 말에는 언제나 꿈을 넣습니다. 내 꿈을 넣어 서로서로 즐거이 사랑할 길을 돌아봅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넋과 뜻과 꿈을 북돋웁니다. 일본사람은 일본말을 쓸 테고, 미국사람은 미국말을 쓸 테며, 중국사람은 중국말을 쓸 테지요.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이나 중국사람이 한국말을 쓸 일이 없습니다. 한국사람이 일본말이나 미국말이나 중국말을 쓸 까닭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요즈음 우리 모습을 들여다보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사람답게 한국말을 쓰지 못합니다. 한국말을 한국사람 스스로 내팽개치거나 망가뜨린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지만, 교과서 지식과 수업일 뿐,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이웃과 어깨동무하면서 즐겁게 노래할 말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지식은 지식일 뿐 말이 아니지만, 입시지식만 학교에서 가르칩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하는 말이라면, 집에서 어버이가 가르치거나 사람들 스스로 배워야 합니다. 대학생이 되기에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전문가나 지식인 자리에 들어서면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어른한테서 배우고 아이한테서 배우며 스스로 넋을 가꾸거나 살찌우면서 배울 노릇입니다.

  책으로는 말을 못 배웁니다. 말이란 머리에서 생각을 기울여 마음을 담아 들려주는 이야기이기에, 스스로 몸과 마음과 삶을 함께 가꾸면서 저마다 넋에 사랑과 꿈과 즐거움을 다스려야 비로소 배웁니다. 식물도감으로 풀을 배울 수 없듯이, 한국말사전으로 말을 배울 수 없습니다. 풀은 풀이 자라는 숲이나 들에서 풀을 마주하며 살아가야 배웁니다. 대학교 전문과정에서 흙일을 배울 수 없듯이, 전문 강사한테서 말을 배울 수 없습니다. 농학박사가 된대서 흙일을 하지 않아요. 스스로 땅을 마련해서 흙을 살찌우고 보듬으며 아낄 수 있어야 흙일을 합니다.

  학교에서 말을 제대로 못 가르치고, 사회에서도 말을 얄궂게 뒤틉니다. 학교와 사회가 못 가르치거나 얄궂게 뒤트는 커다란 굴레를 네 가지 꼽자면, ‘-의’하고 ‘-的’하고 ‘존재’하고 ‘번역’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커다란 굴레는 ‘-의’입니다. 말끝마다 ‘-의’를 붙이거나 넣는 말씨는 한국말을 몹시 어지럽힐 뿐 아니라,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 스스로 넋과 얼을 무너뜨리곤 합니다.

  보기를 들자면, ‘바람골’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바람의 골”이 아닌 “바람골”입니다. 일본에서 나온 만화영화 가운데 “바람 골짜기의 나우시카”로 알려진 작품이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 만화영화를 “風の谷のナウシカ”로 적습니다. 한국사람은 ‘바람골’이거나 ‘바람 골짜기’이지만, 일본사람은 “바람의 골(짜기)”입니다. 한국사람은 ‘빨강’이나 ‘붉은 빛’이라 말하지만, 일본사람은 ‘赤の色’으로 적습니다. 한국사람은 ‘파란 하늘’이라 말하지만, 일본사람은 ‘靑の空’으로 적어요.

  한국말은 “내 아버지”이거나 “우리 어머니”입니다. 한국말을 잊은 사람들은 “나의 아버지”나 “우리의 어머니”처럼 잘못 씁니다. 한국말은 “네 목소리”요 “할머니한테서 배웠어요”인데, 한국말을 잊은 사람들은 “너의 목소리”나 “할머니의 가르침을 받았어요”처럼 잘못 써요.

  개구리가 봄날에 노래하면 “개구리 노래를 들었어요”라 말해야 올바릅니다. “개구리의 노래를 들었어요”라 말하면 올바르지 않습니다. 사이에 꾸밈말을 넣어 “개구리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어요”라든지 “개구리가 들려준 노래를 들었어요”처럼 적을 때에 올바르지, ‘-의’를 넣으면 올바르지 않아요.

  요즈음은 “나의 취향의 남자”, “혼신의 힘을 다해서”, “비극의 시작을 보면”, “네 살 위의 누나예요”, “최선의 방법으로”, “감시의 눈길을 보내다”, “아래의 내용을 읽으시오”, “그녀의 다른 작품으로는”, “종전의 관행을 보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나중의 문제입니다”, “두 개의 도시를 여행하다”처럼 ‘-의’를 섣불리 넣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 “온힘을 다해서”, “비극이 일어난 곳을 보면”, “네 살 위인 누나예요”, “가장 나은 방법으로”, “지켜보다”, “다음 내용을 읽으시오”, “(아무개)가 쓴 다른 작품으로는”, “예전 관행을 보면”,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 “나중 문제입니다”, “두 도시를 여행하다”처럼 쓸 줄 모르고, 이처럼 쓸 수 있는 줄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이와 같이 먼먼 옛날부터 수수하게 말하며 살아온 줄 깨닫지 못합니다.

  말은 쉽습니다. 누구나 쓰는 말이기에 쉽습니다. 지식을 담으려 한다면 지식을 담을 노릇이지, 말을 어렵게 뒤틀거나 일본 말투나 서양 말씨를 써야 하지 않습니다. “민들레는 봄꽃”이나 “민들레는 봄을 부르는 꽃”이나 “민들레는 봄을 노래하는 꽃”이라고 말하면 됩니다. “민들레는 봄의 꽃”이라 말할 일은 없습니다. 4347.4.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말넋 38. 쉬운 말
― 삶을 누구나 즐겁게 짓도록 하는 말


  《조지 아저씨네 정원》(시공사,1995)이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나는 이 그림책이 무척 멋있다고 느낍니다. 글과 그림이 아주 아름답게 어우러졌거든요. 그림책에 나오는 ‘조지 아저씨’는 시골에서 조용히 흙을 만지며 사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아저씨네 땅은 넓지 않아요. 아주 작답니다. 아저씨는 조그마한 땅을 일구며 살지만 언제나 흐뭇하고 넉넉해요. 모든 풀·꽃·나무하고 속삭일 줄 알고, 새·벌레·짐승하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웃들과 마음으로 사귀어요.

  그런데 이 멋진 그림책에 붙은 이름은 ‘정원(庭園)’입니다. 정원이란 어떤 곳일까요. 그림책에 ‘정원’이란 한자말로 이름을 붙인 어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한국말사전을 뒤져 ‘정원’ 말뜻을 살피면, “집 안에 있는 뜰이나 꽃밭”이라 나옵니다. 그러니까, 한국말은 ‘뜰’이나 ‘꽃밭’이라는 소리예요.

  다시금 한국말사전을 살핍니다. ‘뜰’을 “집 안의 앞뒤나 좌우로 가까이 딸려 있는 빈터. 화초나 나무를 가꾸기도 하고, 푸성귀 따위를 심기도 한다”로 풀이합니다. ‘꽃밭’은 “꽃을 심어 가꾼 밭”으로 풀이해요. 더 살피면, ‘화초(花草)’는 “꽃이 피는 풀과 나무”를 가리켜요.

  멋진 그림책에 “조지 아저씨네 꽃밭”이나 “조지 아저씨네 앞뜰”이나 “조지 아저씨네 뜨락” 같은 이름이 붙으면 어떠할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이 나라 아이들이 ‘뜰·앞뜰·뒷뜰·옆뜰·뜨락·꽃밭’ 같은 낱말을 눈으로 읽고 귀로 들으면서 자랄 수 있으면 어떠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이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집숲’이나 ‘숲집’ 같은 낱말도 듣고, ‘풀꽃집’이나 ‘나무꽃집’이나 ‘꽃숲집’ 같은 낱말을 들으면서 자란다면 어떠할까 하고 곱씹어 봅니다.

  저는 어릴 적에 이웃 할아버지한테서 ‘철’이라는 낱말을 처음으로 제대로 들었습니다. 아마 열 살 즈음이었지 싶은데, 일흔 살이 넘은 이웃 할아버지는 열 살짜리 아이한테 “얘야, 철이 들지 않으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어른이 아니란다.”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한테 여쭈었지요. “할아버지, 그러면 내가 할아버지 나이가 되어도 철이 안 들면 어른이 아닌가요?” “그렇지.” “할아버지, 그러면 할아버지가 아직 철이 안 들었으면 할아버지도 어른이 아닌가요?” “그렇지.” “우와, 그러면 철이 들어야 어른이 되네요.”

  이때부터 저는 ‘철’이라는 낱말을 들을 적마다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어요. 봄철·여름철·가을철·겨울철 같은 낱말을 들으면서 괜히 웃음이 나면서 즐거웠어요. 1980년대 국민학교 교과서에는 ‘철’이라는 낱말과 함께 ‘계절’이라는 낱말이 나오고, 어른(교사와 어버이와 이웃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철’이라는 낱말보다 ‘계절’이라는 한자말을 더 즐겨 씁니다. 텔레비전을 켜면 날씨를 알리든 여느 방송이든, 어른들은 으레 ‘계절’이라는 한자말만 읊어요. 라디오에서 흐르는 대중노래에서도 언제나 ‘계절’이에요.

  스무 살이 넘은 어느 때, 동무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철’이라는 낱말이 제 입에서 흘러나왔어요. 동무들은 이 낱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저더러 ‘철’이 무엇이느냐고 묻습니다. 어리둥절해서 ‘철’도 모르느냐고, ‘봄철’ 할 때에 철이라고 말하는데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한자말 ‘계절’이 한국말로 ‘철’이라고 말하니, 그제서야 알아듣지만 다시 묻지요. ‘철’이라는 낱말이 참말 있느냐고.

  여느 어른들은 ‘철’이라고 하면 ‘쇠’를 가리키는 한자 ‘鐵’을 떠올립니다. 한국말 철을 그리는 어른이 몹시 드뭅니다. 쇠를 ‘쇠’라 가리키지 못하니, 쇠를 가시처럼 엮은 그물을 놓고 ‘쇠가시그물’이라 가리키지 못하고 ‘철조망(鐵條網)’이라고만 가리킵니다. 부엌에서 쓰는 수세미도 ‘쇠수세미’라 하는 사람보다 ‘철수세미’라 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느껴요.

  철이란 무엇일까요. 철은 날씨를 가리키면서 때를 나타냅니다. 제대로 찾아오는 흐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철이 든다”고 할 때에는 “옳고 그름과 참거짓을 살피거나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뜻해요. 다시 말하자면, 옳고 그름을 살피거나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마음바탕일 때에 ‘어른’이라는 소리입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어른이 되지 않아요. 성년식을 치렀기에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가게에서 주민등록증 없이 술이나 담배를 살 수 있기에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철이 들 때에 어른입니다. 생각이 바르게 설 때에 어른입니다. 생각을 아름답게 키워서 스스로 하루를 새롭게 짓고 삶을 가꿀 때에 어른입니다.

  생각을 이어 보면, 우리 사회는 ‘철’이라는 낱말을 학교에서도 언론에서도 책이나 교과서에서도 올바르게 안 다룹니다. 아니, 억누르거나 짓밟거나 내팽개친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생각하는 길을 막는다고 할 만해요.

  ‘하늘’이나 ‘바람’이나 ‘숲’이나 ‘집’이나 ‘사랑’이나 ‘사람’이나 ‘삶’ 같은 낱말을 찬찬히 읽고 들으면서 생각하는 어른은 얼마나 있을까요. 이 나라 아이들은 이 같은 낱말을 언제 어디에서 어느 만큼 들으면서 생각을 키울 수 있는가요. 껍데기말만 자꾸 퍼뜨리는 어른이지 싶습니다. 껍데기말에 사로잡힌 나머지 아이들한테 알맹이말하고 멀어지도록 부추기는 어른이지 싶습니다.

  ‘하늘’이라는 낱말을 써야 하늘을 생각합니다. ‘바람’이라는 낱말을 써야 바람을 생각합니다. 깊이 들여다보고 넓게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똑바로 바라보면서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집’이 아닌 ‘가옥·주택·주거지·부동산’이라는 이름만 자꾸 쓰면, 우리는 스스로 집을 잊어요. 집이 어떤 곳인지 잃습니다. ‘사랑’이 아닌 ‘연애·애정·자비·자애·러브’ 같은 이름을 자꾸 쓰면, 우리는 스스로 사랑을 잊거나 잃어요.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란 누구일까요. 사랑을 지으며 삶을 가꾸는 사람은 어떤 빛일까요.

  쉬운 말 한 마디는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쉽게 주고받는 말 한 마디는 저마다 생각을 꽃피우도록 북돋우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 한 마디란 ‘삶을 누구나 즐겁게 짓도록 이끌거나 돕는 말’이라고 느낍니다. 아이와 어른 모두 스스로 내 모습을 돌아보고 삶을 바라보면서 길을 찾도록 드리우는 빛이 ‘쉬운 말’이지 싶습니다. 4347.6.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말넋 30. 말넋을 거스르는 네 가지 ㄴ

― ‘-的’을 떨구어야 한다



  말은 그저 말이기도 하기에, 말은 말대로 쓰면서, 말에 어떤 마음을 담느냐를 살필 수 있으면, ‘수수한 말’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일곱 살 어린이하고 어떤 말로 이야기를 나누려 하느냐, 일흔 살 할머니하고 어떤 말로 이야기꽃을 피우려 하느냐, 하고 생각한다면, 오늘날 웬만한 문학책과 인문책은 거의 ‘읽을 값어치가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알아들을 만하게 쓰는 인문책이 드물고, 아이들이 배울 만한 낱말과 말투로 이야기를 펼치는 문학책이 드뭅니다. 일흔 살 할머니나 여든 살 할아버지가 알아듣도록 쓰는 인문책은 없다시피 하며, 아흔 살 할머니나 백 살 할아버지가 한국말을 새롭게 배우도록 북돋우는 문학책은 아예 없을는지 모릅니다.


  나는 ‘항상(恒常)’이라는 한자말을 안 씁니다. 그림책에 이 한자말이 나오면 연필로 죽죽 그은 뒤 ‘늘’이나 ‘언제나’ 같은 한국말을 적어 넣습니다. 한국말사전에서 ‘항상’을 찾으면 낱말풀이를 “언제나 변함없이”로 달아요. 그러니까, 한국말사전을 엮은 이들도 ‘항상 = 언제나’인 줄 안다는 뜻이고, 이 한자말은 쓸 만하지 않다고 밝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말사전은 얄궂습니다. 한국말사전에서 ‘언제나’를 찾으면 “때에 따라 달라짐이 없이 항상”으로 풀이해요. ‘항상 = 언제나’로 풀이하면서 ‘언제나 = 항상’으로 풀이하는 셈입니다.


  이와 같은 돌림풀이를 깨닫는 한국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러한 돌림풀이가 엉터리인 줄 알아차리면서 한국말을 새롭게 가꾸거나 돌보면서 빛내야겠다고 생각하는 한국사람은 몇이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늘·언제나·노상’ 같은 한국말을 씁니다. 때로는 ‘한결같이’를 씁니다. 이 낱말은 저마다 뜻과 느낌이 살짝 다릅니다. 이러한 낱말을 혀에 얹어서 읊으면, 이 낱말은 어느새 가락을 입고 노래로 거듭납니다. 낱말 한 마디가 새롭게 살아나면서 환하게 타오르는 해님처럼 따스합니다.


  둘레에서 이웃들이 ‘항상’ 같은 낱말을 쓰면, 내 귀로 이 낱말이 들어오며 곧바로 ‘늘’이나 ‘언제나’로 바뀝니다. 다만, 내 귀와 머리와 마음은 늘 ‘옮기기(번역)’를 하지만, 이웃한테 “그런 말을 쓰기보다 이런 말을 써야 뜻과 느낌이 제대로 살아날 수 있어요” 하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웃은 이웃 나름대로 그 낱말에 이녁 뜻과 느낌을 담았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웃이 스스로 이녁 말을 다시 바라보면서 다시 가다듬고 다시 생각해서 말빛과 말숨을 살찌우려고 해야 비로소 말을 바꿉니다. 남이 바꾸어 줄 수 없습니다.


  ‘읽을 값어치가 있는 글’이란 무엇일까 헤아려 봅니다. 함부로 말할 대목은 아니라 할 텐데, ‘말이 왜 말이고, 우리가 말을 왜 쓰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또한 말이 말답게 설 수 있도록 해야, 비로소 이야기를 담으면서 수수한 말이 됩니다.


  그러면 왜 수수한 말을 찾거나 생각해야 할까요. 햇볕과 같은 말이 수수한 말입니다. 바람과 같은 말이 수수한 말입니다. 빗물과 같으며, 풀과 같은 말이 바로 수수한 말입니다. 해가 떠서 온누리를 비출 적에 ‘대단하구나!’ 하고 느낄 사람도 틀림없이 있을 테지만, 우리는 날마다 아침에 해가 뜨는 일을 아주 마땅히 받아들입니다. 아니, 굳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바람을 마시는데, 바람을 마시면서 ‘아 내가 숨을 쉬지’ 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초라도 새 바람을 안 마시면 모두 죽는 몸이지만, 1초라도 숨을 쉬는 줄 생각하지 않아요. 바람은 그만큼 수수하면서 마땅한 빛입니다. 빗물과 풀과 나무와 숲도 이와 같아요. 이들은 모두 아주 대단하고 대수롭지만, 우리가 따로 더 깊거나 넓게 생각하거나 따지지 않아요. 그야말로 수수하면서 언제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해와 같고 바람과 같이 수수하다 싶은 말을 제대로 보면서 제대로 느끼고 제대로 가슴에 담아 제대로 입으로 꺼내거나 제대로 손으로 옮길 수 있을 때에, 말빛이 환합니다. 풀이나 나무와 같이 수수하면서 늘 우리와 함께 있는 말을 똑똑히 바라보면서 깨달아 마음에 씨앗으로 심을 때에, 말숨이 싱그럽습니다.


  심우성 님이 한국말로 옮긴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학고재,1996)라는 책을 읽는데 첫머리에 “일제의 식민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간접으로 동조한 것이라는 의견”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글에서는 ‘-적(的)’을 안 붙이고 ‘간접으로’라 적습니다. 생각해 볼까요. 이 글에서 ‘간접적으로’라 적으면 얼마나 다를까요. ‘간접으로’와 ‘간접적으로’는 서로 얼마나 다를까요. 우리는 왜 굳이 ‘-적’을 붙이려 할까요.


  이 글을 더 살핀다면, “일제 식민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살며시 뜻을 같이했다는 생각”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간접으로 동조한”은 “살며시 동조한”이나 “여러모로 동조한”이나 “옆에서 동조한”으로 손볼 만합니다. 이렇게 ‘간접(間接)’을 손질할 때에는 ‘-적’은 어느새 사라집니다.


  “소모적(消耗的)인 논쟁”은 무엇일까요. 이런 한자말을 꼭 써야 할까요. 처음에 “부질없는 말다툼”이나 “덧없는 말씨름”이나 “쓸데없는 말싸움”처럼 글을 쓰면 한결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시대착오적(時代錯誤的)인 생각”이라면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나 “낡은 생각”이나 “시대를 거스르는 생각”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적’을 붙이는 한자말은 모두 손질할 만합니다. 그러니까, ‘-적’을 붙이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적’이 들러붙지 않도록 처음부터 아주 오롯하다 싶은 한국말을 제대로 살펴서 쓸 일이에요. “향토적 서정”이 아닌 “고향빛”이나 “시골 느낌”을 말하면 되고, “정적인 놀이”가 아닌 “차분한 놀이”나 “조용한 놀이”나 “얌전한 놀이”를 말하면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아닌 “손꼽히는 것”이나 “뛰어난 것”을 말하면 돼요.


  ‘-적’을 붙일 적에 말넋을 거스르는 줄 느낄 수 있기를 빌어요. 온누리 모든 사람이 넋을 거스르거나 흐트리는 낱말이 아닌, 넋을 살찌우거나 곱게 가꾸는 낱말을 쓰기를 빌어요. 늘, 언제, 어디에서나, 스스로 마음을 아름답게 보살피면서 생각을 튼튼하게 북돋우는 말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4347.6.2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