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문화재단'에서 두 달에 한 차례 펴내는 이야기책에 싣는 글입니다.

말과 넋과 삶을 모두 아우르면서 사랑하는 길을

우리 모두 슬기롭게 헤아리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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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37. 어른이 쓰는 말 한 마디

― 아이들은 모든 말을 물려받는다



  어느 그림책을 읽다가 “오렌지 나무 가지 위에는 큰부리새가 앉아 있었지요”, “사과나무 아래로 소풍 가서 점심을 먹었어요”, “난로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야채를 썰어 냄비 속에 넣고”, “선실 안으로 서둘러 들어갔고” 같은 글월을 보았습니다. 그림책에 적힌 글월이기 때문에, 여느 어른이라면 이 글월을 그대로 아이한테 읽어 줄 테고, 글을 제법 읽는 아이라면 이 글월을 고스란히 읽으면서 이러한 말투를 모두 받아들이리라 느낍니다.


  요새는 이런 글월이 올바른지 안 올바른지 짚거나 알려주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림책을 펴낸 출판사에서도 이런 대목을 손질하거나 다듬지 않기 일쑤입니다. 출판사에서는 띄어쓰기와 맞춤법은 살피지만, ‘올바르게 쓰는 한국말’인지 아닌지까지 다루지 못하곤 합니다.


  어른들이 읽는 신문이나 잡지도 이와 비슷합니다. 신문사나 잡지사에는 교열부가 있는데, 교열부에서는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살필 뿐, ‘올바르거나 알맞게 쓰는 한국말’까지 건드리지는 못하곤 해요.


  어른들이 쓰는 모든 말을 아이들이 물려받습니다. 어른들이 거칠게 말하면 아이들도 거친 말씨를 물려받습니다. 어른들이 부드럽게 말하면 아이들도 부드러운 말씨를 물려받아요. 어른들이 마구잡이로 말하면 아이들도 마구잡이 말버릇을 물려받고, 어른들이 상냥하게 말하면 아이들도 상냥한 말버릇을 물려받아요.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얄궂은 말씨를 어른들이 털어내지 않으면, 아이들도 이런 말씨를 똑같이 씁니다. 어렵거나 딱딱한 말씨로 어른들이 늘 이야기하면, 아이들도 그만 어렵거나 딱딱한 말씨에 길듭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교과서로 배우면서 교과서 말투에 젖어들기도 합니다. 퍽 많은 어른들은 교과서에 어떤 줄거리를 담느냐 하는 대목을 따지곤 하는데, 교과서 말투와 낱말이 ‘아이가 배울 만한 말투와 낱말’인지 아닌지 하는 대목은 안 따지거나 못 따집니다.


  앞서 든 보기글에서는 ‘위’와 ‘아래’와 ‘속’과 ‘안’을 잘못 썼습니다. 이 글월을 바로잡겠습니다. “오렌지나무에는 큰부리새가 앉았지요/오렌지나무 가지에는 큰부리새가 앉았지요”, “사과나무 그늘로 나들이 가서 도시락을 먹었어요”, “난로에 냄비를 올려놓고”, “푸성귀를 썰어 냄비에 넣고”, “선실로 서둘러 들어갔고”


  새는 “나뭇가지 위”에 앉지 않습니다. 냄비는 “난로 위”에 올려놓지 않습니다. 한국말에서 ‘위’를 쓰면, 나뭇가지 위나 난로 위는 ‘하늘’입니다. 잘 생각해 보셔요. “새가 나무 꼭대기에 앉았어요”나 “새가 우듬지에 앉았어요”나 “새가 지붕에 앉았어요”처럼 쓸 뿐입니다. “지붕 위”라든지 “우듬지 위”는 모두 하늘입니다. 물건을 올려놓을 적에는 “책상에 올려놓”습니다. “책상 위”에 놓지 않아요. 아니, 놓을 수 없습니다. “사과나무 아래”라고 한다면, 나무뿌리가 있는 땅속을 가리키는 셈입니다. 나들이를 가서 도시락을 먹으려 한다면,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에 앉겠지요. 그러니 “사과나무 그늘”로 고쳐서 써야 옳아요. 다만, “사과나무 밑”처럼 쓸 수는 있습니다. ‘아래’와 ‘밑’은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말하지요? “등잔 아래가 어둡다”고는 말하지 못합니다. ‘아래’는 ‘위’와 맞물리면서 높이를 가리키는 자리에만 씁니다. ‘밑’은 바닥과 가까운 어느 자리를 가리키면서 쓰기에 “사과나무 그늘”이나 “사과나무 밑”이라고만 쓸 수 있습니다.


  냄비에 무엇을 넣는다는 대목과 비슷하게, “가방에 책을 넣는다”라든지 “주머니에 손을 넣다”라든지 “지갑에 돈을 넣다”라든지 “저금통에 돈을 넣는다”처럼 씁니다. 이런 글월에는 ‘안’이나 ‘속’을 쓰지 않아요. 한자말로는 ‘수중(手中)’을 쓰는데, 한국말로는 “손 안”처럼 쓰지 않습니다. “수중에 돈이 얼마 있니?”처럼 묻겠지만 “손 안에 돈이 얼마 있니?”가 아니라 “손(주머니)에 돈이 얼마 있니?”처럼 물어야 올바르게 쓰는 한국말입니다.


  “선실로 들어갔다”와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는 어떠할까요? “자, 이제 집으로 들어가자”라든지 “방에 가서 자야지”라든지 “학교에 가요”라든지 “교실로 들어가자”처럼 씁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나 “방 안에서 자야지”나 “학교 안에 가요”나 “교실 속으로 들어가자”처럼 쓸 수 없습니다. 영어에서는 ‘in’이 있고 한자말에서는 ‘中’이 있는데, 한국말에서는 ‘속/안’을 아무 데나 함부로 안 씁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말사전을 보면, “지갑 안”이나 “극장 안”이나 “공원 안” 같은 보기글을 함부로 실어요. 이런 말은 한국말이 아닌데 말이지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다”이지, “극장 안에 가서 영화를 보다”가 아닙니다. “공원에서 담배 피지 마셔요”이지 “공원 안에서 담배 피지 마셔요”가 아닙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시인 서정홍 님은 《닳지 않는 손》(우리교육,2008)이라는 동시집에 〈우리 말 1〉이라는 글을 실었습니다. “사고 다발 지역이 무슨 뜻인지 / 아버지한테 물어보고 알았지만 / 사고 많이 나는 곳은 /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 물어보지 않고도 / 알 수 있는 쉬운 우리 말, / 나는 우리 말이 좋다.”


  우리가 쓰는 말 한 마디에는 우리 삶이 깃듭니다. 아이들이 물려받는 말 한 마디에는 어른들이 지은 삶이 고스란히 깃듭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지난날에는 한국말사전이나 여러 가지 책이 없었어도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말을 슬기롭게 물려주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한국말사전도 여럿 있고, 아이들은 학교를 오랫동안 다니는데, 정작 한국말을 제대로 알거나 살피거나 다루거나 쓰는 어른이 매우 드뭅니다. 지난날에는 ‘위·아래·속·안’을 잘못 쓰는 어른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말을 책이 아닌 내 둘레 어른한테서 배웠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어떤 말을 물려줄 만할까요? 우리 어른들은 날마다 어떤 말로 우리 삶을 나타내거나 나눌 때에 아름다울까요? 4347.9.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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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6. ‘익숙한 한자말’이기에 고친다

― 한자말을 왜 바로잡아야 하는가



  책을 읽을 적에 ‘맞춤법 살피기’나 ‘띄어쓰기 바로잡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을 하자면 ‘책읽기’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책읽기는 ‘이야기나 줄거리 읽기’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다루는지 찬찬히 읽고, 어떤 줄거리를 들려주려는지 가만히 읽으려면 그예 이야기와 줄거리에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생각하면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에 얽매여 다른 대목을 놓치기 일쑤입니다.


  이웃이나 동무와 이야기를 나눌 적에 무엇을 듣습니까? ‘이야기’를 듣겠지요? 말투가 거친 사람이 있고, 어느 고장에서는 사람들이 으레 거칠다 싶은 말씨로 이야기를 합니다. 서울에서만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경상도나 전라도에 가서 깜짝 놀라거나 어리둥절할 수 있어요. 말씨와 말투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울내기라 하더라도 말씨와 말투로 ‘사람을 따지거나 재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이야기와 줄거리’에 마음을 기울인다면, 서로 오붓하고 즐겁게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아이와 어른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도 돌아볼 노릇입니다. 아직 많이 어린 아이들, 이를테면 서너 살이나 예닐곱 살 아이는 ‘틀린 말’을 곧잘 씁니다. 아직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몇 차례 바로잡아 주더라도 아이는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 자꾸 틀려요. 그런데, 아이가 자꾸 틀린 말을 할 적에 ‘틀린 말 바로잡기’만 끝없이 시키면 어찌 될까요? 둘 사이에 이야기가 될까요? 아이는 그만 입을 앙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할 테지요. 더더구나, 두어 살이나 서너 살 아이가 ‘틀린 말’을 쓰더라도 어버이라면 이 아이가 ‘어떤 이야기를 밝히려는 말’을 하는지 이내 알아차립니다. 어버이는 ‘틀린 말 바로잡기’가 아니라 ‘이야기 나누기’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읽든 이야기를 나누든, 옆사람이 ‘한자말을 섞어서 지식을 자랑하든’ 말든 아랑곳할 일이 없습니다. ‘온갖 영어를 섞어서 쓰든’, 아니면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일본 말투를 아무렇지 않게 쓰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서로 주고받을 이야기를 헤아린다면 모두 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마친 뒤에는 몇 가지 알려줄 수 있어요. 글을 다 읽고 나서 이야기와 줄거리를 찬찬히 곰삭힌 뒤 몇 가지 짚을 수 있어요.


  《아델과 사이먼》(베틀북 펴냄,2007)이라는 예쁜 그림책이 있습니다. 그림도 예쁘고 이야기도 예쁩니다. 이 그림책을 찬찬히 읽다가 “둘은 그림 찾기를 포기하고 공원으로 갔어요(7쪽)”라는 대목에서 ‘포기(抛棄)하고’라는 한자말을 ‘그만두고’나 ‘그치고’로 고칩니다. “너 당장 내려오지 못해(8쪽)”라는 대목에서 ‘당장(當場)’이라는 한자말을 ‘어서’나 ‘바로’로 고칩니다. “하루 종일(15쪽)”이라는 대목에서 ‘종일(終日)’이라는 한자말을 ‘내내’로 고칩니다. “제발 조심해(15쪽)”라는 대목에서 ‘조심(操心)해’라는 한자말을 ‘잘 살펴’로 고칩니다. “결국 찾지 못했어요(19쪽)”라는 대목에서 ‘결국(結局)’이라는 한자말을 ‘끝내’나 ‘그예’로 고칩니다.


  예쁜 그림책에 나오는 번역글입니다. 이 그림책은 우리 집 아이들과 함께 읽는 그림책이기에 연필로 죽죽 금을 그은 뒤 바로잡습니다. 아이들이 그림책을 혼자 읽을 적에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익혀서 곱고 사랑스레 쓰기를 바라면서 바로잡습니다. 그런데, 책에 적힌 이런 한자말은 사람들한테 꽤 익숙한 낱말입니다. 어린이책에까지 쓰는 이런 한자말은 사람들한테 무척 익숙하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들이 ‘오늘날 익숙하게 쓰는 한자말’이기 때문에 바로잡습니다. ‘사람들이 익숙하게 안 쓰는 한자말’이라면 구태여 바로잡을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익숙하게 안 쓰는 한자말’은 구태여 바로잡지 않아도 곧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언제나 이어집니다. 모든 것은 늘 똑같습니다. 익숙하게 널리 쓰는 한자말이기에 안 고쳐도 된다는 생각은, 일제강점기가 서른다섯 해쯤 되었으니 그대로 살아도 된다는 생각하고 똑같이 이어집니다. 참말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식민지 종살이가 오래 이어지다 보니 아주 많은 분들이 ‘종으로 지내는 삶’을 익숙하게 받아들여 일본말을 쓰고 일본 이름을 지으면서 살았어요. 해방된 지 일흔 해가 되도록 ‘일제강점기 찌꺼기 말투’가 사회 곳곳에 아주 깊이 뿌리내린 채 안 뽑힙니다. 어른들 스스로 ‘익숙하게 쓴다’는 핑계를 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쓸 말은 ‘익숙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쓸 말은 ‘써야 할 말’입니다. 우리가 쓸 말은 ‘생각을 나타내고 마음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우리가 쓸 말은 ‘삶을 가꾸는 말’과 ‘삶을 짓는 말’과 ‘삶을 사랑하는 말’입니다.


  한국말은 ‘파랑’이고 한자말은 ‘靑色’이며 영어는 ‘blue’입니다. ‘블루’나 ‘청색’ 같은 바깥말을 쓰고 싶다면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말은 ‘파랑’입니다. 한국말은 ‘하늘’이고 한자말은 ‘蒼空’이며 영어는 ‘sky’입니다. ‘스카이’나 ‘창공’ 같은 바깥말을 쓰려 한다면 쓸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국말은 ‘하늘’입니다.


  오늘날 꽤 많은 어른들은 ‘청색’이나 ‘창공’ 같은 한자말이 익숙합니다. ‘블루’나 ‘스카이’ 같은 영어도 익숙합니다. 익숙하니까 이런 바깥말을 아무렇지 않게 읊습니다.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을 떠나, 익숙한 말투가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그런데, 아이들한테는 아직 익숙하지 않습니다. 어른들한테는 익숙하더라도 아이들한테는 안 익숙한 낱말입니다. 아이들은 말다운 말을 배워서 생각다운 생각을 키울 노릇이고, 아이들은 말다운 말을 가꾸어서 삶다운 삶을 지을 노릇입니다. 어른들은 이녁한테 익숙한 말로 늘 똑같은 생각과 삶을 되풀이하는 굴레에서 벗어날 노릇입니다. 어른들은 ‘나한테 익숙한 말’이 아니라 ‘삶을 가꾸고 사랑을 북돋우며 생각을 키우는 말’을 슬기롭게 찾아서 새롭게 배울 노릇입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새롭게 자라면서 받아들일 즐겁고 기쁜 말을 배울 노릇이요, 어른들은 날마다 새롭게 생각하면서 꿈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말을 다시 배울 노릇입니다. 4347.11.1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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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겨레말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소식지에 실으려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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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39. 한국말사전이 살릴 말

― 아름다운 말은 쉽다



  흔히 ‘국어사전’을 말하고, 학교에서는 ‘국어’를 가르칩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분은 으레 ‘국민’을 얘기합니다. 한자로 ‘國-’을 붙이는 한자말이 퍽 많습니다. 그런데 한국사람이 ‘國-’을 붙인 낱말을 쓴 지는 얼마 안 됩니다. 아주 마땅합니다. 한국사람으로서 이런 낱말을 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부터 ‘한복·한식·한옥’ 같은 낱말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옷·밥·집’입니다.


  ‘國-’붙이 낱말 가운데 ‘국민학교’만큼은 몹시 어렵게 ‘초등학교’로 바꾸었습니다. ‘국민(國民)’이라는 한자말에 깃든 슬프며 아픈 생채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國語’라는 한자말을 그대로 쓰지만, 이 낱말을 앞으로 언제까지 써야 하는지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국어’는 한국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어른들은 ‘국민’이라는 낱말을 털어냈는데, 말과 글을 다루는 어른들은 언제쯤 ‘국어’라는 낱말을 털 수 있을까요.


  ‘國歌·國鳥·國花’ 같은 낱말을 곧바로 알아듣는 아이는 드뭅니다. 어른도 곧잘 헷갈릴 만합니다. 일본에서는 이런 낱말을 쓰더라도 한국은 한국말이 있으니 이런 낱말을 ‘나라노래·나라새·나라꽃(나랏노래·나랏새·나랏꽃)’으로 새롭게 지어서 쓸 줄 알아야 하고, 이런 낱말을 사전에 담을 수 있어야 해요. 한국말을 담는 한국말사전은 한자말을 담는 사전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사전들은 한국말을 슬기롭게 담거나 한국말을 알뜰살뜰 가꾸는 길하고는 동떨어집니다. 어린이가 초등학교를 다니며 옆에 놓는 사전조차 교과서에 실은 낱말을 풀이하는 참고서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아요. 어린이가 스스로 한국말을 슬기롭게 깨우치면서 말빛을 가꾸도록 돕지 못합니다.


  푸성귀나 남새나 나물을 제대로 살피는 어른이나 아이는 몇쯤 될까 궁금합니다. 국립국어원 사전 말풀이를 살피면, ‘푸성귀’는 “사람이 가꾼 채소나 저절로 난 나물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하고, ‘남새’는 “= 채소(菜蔬)”라 하며, ‘나물’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합니다. ‘채소(菜蔬)’는 “밭에서 기르는 농작물”이라 하고, ‘야채(野菜)’는 “(1) 들에서 자라나는 나물 (2) ‘채소(菜蔬)’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합니다. 그런데 ‘야채’는 ‘やさい’라는 일본말에서 비롯했다고들 합니다. 여러모로 살피면, 풀을 먹는(채식) 사람이건 풀을 안 먹는 사람이건, 풀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모릅니다. 말을 다루는 사전도 이를 옳게 가누지 못합니다.


  사람이 따로 길러서 먹는 풀일 때에 ‘남새’입니다. 스스로 돋는 풀일 때에 ‘나물’입니다. 남새와 나물을 아우를 때에 ‘푸성귀’입니다. 풀을 먹는 사람, 곧 ‘채식’이란 “푸성귀 먹기”이거나 “풀 먹기”이거나 “풀밥 먹기”예요. 이러한 얼거리를 살핀다면, ‘채식(菜食)’이라는 말을 털면서 ‘풀먹기’나 ‘풀밥’ 같은 낱말을 지을 수 있고, 학자들이 먼저 이런 낱말을 사전에 담을 수 있어요.


  만화영화 〈백설공주〉를 아이들과 보던 곁님이 문득 ‘하얀눈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이야기합니다. 일곱 살과 네 살인 아이들한테는 ‘백설공주’가 어떤 이름이고 뜻인지 알려주기 어렵습니다. 쉽게 풀어내어 이름을 새로 짓습니다. 요즈음 ‘에코백(ECO-BAG)’이 널리 퍼지지만, 나는 늘 ‘천바구니’를 챙깁니다. 시골 읍내에는 없으나 도시로 마실을 가면 으레 ‘네일아트’를 하는 가게를 봅니다. 이런 가게를 스치고 지나가다가 문득 생각했어요. 저곳에서는 손톱에 꽃이 피도록 하는구나 하고. ‘손톱꽃’이라고 할까요, ‘손톱빛’이라고 할까요.


  사전을 보면 풀 빛깔을 가리키는 ‘풀빛’이라는 낱말은 있지만, ‘꽃빛’이나 ‘잎빛’ 같은 낱말은 없습니다. 우리 사전은 어떤 낱말을 얼마만큼 실을 때에 아름다울까 궁금합니다. ‘설빔’처럼 ‘잔치빔’이나 ‘돌빔’ 같은 낱말을 즐겁게 지을 수 있으나, 이런 낱말을 가꾸는 학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사전을 살펴서는 ‘가엾다·불쌍하다’나 ‘무섭다·두렵다’나 ‘곱다·아름답다’ 같은 한국말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낼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말은 쉽습니다. 한국말에 실을 낱말은 아름다워야지 싶습니다. 4347.7.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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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3. 훈민정음과 한글과 한국말

― ‘쉬운 말’과 ‘어려운 말’



  ‘밥값’이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이 낱말은 세 가지 뜻으로 씁니다. 첫째는 “밥을 먹는 데 드는 값”입니다. 둘째는 “끼니가 될 밥을 먹으며 치르는 값”입니다. 셋째는 “밥을 먹은 만큼 하는 일”입니다. 시를 쓰는 정호승 님은 《밥값》이라는 이름을 붙인 시집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공기관이든 여느 회사이든 학교이든 ‘밥값’이라는 낱말은 거의 안 씁니다. 으레 ‘식대(食代)’라는 한자말을 씁니다. 밥을 밖에서 사다 먹자고 할 적에도 한자말을 빌어 ‘식당(食堂)’이라는 낱말을 써요. 한국말로 ‘밥집’을 쓰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요즈음은 ‘맛집’이라는 낱말이 꽤 퍼졌습니다. 맛있게 하는 밥집을 가리키는 ‘맛집’일 텐데, 이러한 낱말을 쓰는 흐름을 잘 살핀다면, ‘밥집’이라는 낱말도 앞으로 넉넉히 쓸 만하리라 봅니다. 구내식당이나 학생식당 같은 곳이라면 ‘밥터’라는 낱말을 새로 지을 수 있어요. 책을 사고파는 곳을 가리켜 ‘책방’이라고도 하지만 ‘책집’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책이 있는 곳, 이를테면 도서관이나 서재라 한다면 ‘책터’라는 낱말을 새로 지을 수 있습니다.


  돈을 내고 빨래를 맡기는 곳은 ‘빨래방’입니다. 이와 달리, 예부터 마을에서 빨래를 하려고 모이는 곳은 ‘빨래터’예요. ‘터’라는 낱말은 ‘집’이나 ‘방’과 다른 자리에서 써요. 그래서, 돈을 내고 노래를 부르는 작은 방이라면 ‘노래방’이라 할 테지만, 노래를 즐겁게 듣거나 누리는 곳, 이를테면 ‘음악회관’이나 ‘콘서트장’이나 ‘음악감상실’ 같은 곳은 ‘노래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입시교육으로 찌든 ‘학교’가 아닌 참답게 삶을 배우는 곳을 가리켜 ‘배움터’라는 이름을 새롭게 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글날을 맞이하면 이곳저곳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글은 모든 소리를 담을 수 있는 글이요, 지구별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손꼽는 글이라고 일컫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틀리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한글을 높이 사기만 할 뿐, 정작 한글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는 한국말은 어떠한가를 살피지 않기 일쑤입니다.


  한겨레는 왜 ‘모든 소리를 담을 만한 글’을 쓸까요? 한국말은 모든 소리를 귀여겨듣고 즐겁게 입으로 들려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한글은 왜 뛰어나다고 손꼽을 만한 글일 수 있을까요? 이 글을 쉽고 빠르게 익히면 우리가 입으로 나누는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거나 즐거운 이야기를 오래오래 건사하도록 옮겨적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을 쉬운 글로 담아 삶을 쉽게 지으면, 모든 사람이 날마다 아름답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길을 엽니다.


  한글날을 맞이해서 모처럼 한글을 생각한다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한결 깊거나 넓게 살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글날 하루만 반짝 스치듯이 지나가기보다는 한 해 내내 말과 글이 서로 맺고 얽는 흐름을 톺아볼 수 있기를 바라요.


  우리는 밥을 먹습니다. 우리는 밥그릇을 먹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웃하고 도란도란 밥 한 그릇을 나눕니다. 다만, 밥그릇에 담은 밥을 나누지, 밥을 담는 그릇을 나누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한글날을 기린다고 할 적에는 ‘그릇’이 되는 글(한글)이 아니라 ‘알맹이(밥)’가 되는 말(한국말)을 제대로 기리면서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대로 바라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릇을 먹지 않고 밥을 먹어요. 우리는 껍데기를 먹지 않고 알맹이를 먹어요. 우리가 옷을 입는 까닭은 옷을 지키려는 뜻이 아니라, 옷이 감싸는 알맹이인 몸을 지키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 몸은 우리 몸에 깃든 마음을 지킵니다. 우리가 저마다 다른 사람이요 숨결이라고 할 적에는, 몸뚱이만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몸뚱이에 깃든 넋이 저마다 다르면서 애틋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한글날을 기려야 한다면, 그릇인 글 때문이 아니라, 그릇에 담는 말 때문입니다. 지난날 훈민정음을 처음 지었다고 할 적에 중국글과 중국말만 있었다면 훈민정음이 오늘날처럼 빛이 날 까닭이 없었으리라 느낍니다. 게다가 처음 훈민정음이 태어나고 나서 오백 해 가까이 한글이 푸대접을 받은 발자국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훈민정음이 왜 푸대접을 받았을까요? 임금님이 새로운 우리 글자를 짓기는 했으나, 이 새로운 글자를 한겨레 모든 사람이 두루 배워서 쓰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임금님 둘레에 있는 몇몇 지식인과 권력자만 쓰도록 했습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거나 바다에서 물을 만지거나 아이를 낳아 돌보는 여느 사람한테 훈민정음을 가르치지 않았어요. 훈민정음은 오직 양반과 사대부와 임금님 둘레 몇몇 사람만 배워서 아주 조금 쓰던 글입니다. 이런 ‘죽은 글’이 오백 해쯤 흐른 개화기 언저리가 되어, 비로소 여느 사람 손으로 넘어와 ‘산 말’로 깨어납니다.


  ‘훈민정음’에서 ‘한글’로 이름을 바꾼 까닭이 있습니다. ‘훈민정음’은 처음 이 글을 지은 분 뜻과 같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을 누리려고 썼습니다. ‘한글’이라는 새 이름을 지은 분은 이 글을 몇몇 사람만 홀로 차지해서 쓰는 글이 아니라, 온누리 모든 사람이 즐겁게 배워서 아름답게 쓰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오늘날에도 ‘글 권력(지식·학문·정치)’을 누리는 이들은 한자와 한자말을 즐겨씁니다. 오늘날 새로운 ‘글 권력’을 누리는 이들은 알파벳과 영어를 즐겨씁니다.


  우리는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를 먹는 사람입니다. 옷을 아끼는 사람이 아닌 몸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몸에 깃든 마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한글은 한글대로 아끼되, 제대로 아끼고 사랑하며 보듬을 것은 ‘말’입니다. 먼먼 옛날부터 이 땅에서 태어나 살던 한겨레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즐겁게 나누던 ‘말’을 제대로 바라보고 아끼고 사랑하고 보듬을 노릇입니다. 말을 살릴 때에 넋이 살고, 넋이 살 때에 사랑이 살며, 사랑이 살 때에 사람이 삽니다.


  지난 오백 해 남짓 훈민정음을 쓴 분들은 무엇보다 ‘한국 지식인이 한자 소리를 하나로 모두어서 쓰도록 틀을 세우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내 삶을 스스로 가꾸면서 아름답게 새로 지어 날마다 즐겁게 사랑을 나누자는 뜻’으로 한글에 한국말을 담아서 쓸 수 있기를 빕니다. ‘쉬운 말’을 ‘쉬운 글’에 담을 때에 삶이 사랑스레 열립니다. ‘어려운 말’을 ‘어려운 글’에 담을 적에 삶이 차갑고 무섭게 닫히거나 갇힙니다. 4347.10.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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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1. ‘다른 말’과 ‘틀린 말’

― 한국말을 바로보고 바로세우는 길



  사람마다 삶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말이 다릅니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말이 달라요. 삶터가 다르고 사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충청도와 경기도도 말이 다르지요. 삶터와 삶자락이 모두 다를 뿐 아니라 사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에서 잘 자라는 나무가 경기도나 서울에서는 잘 자라기 어렵습니다. 날씨와 철과 바람과 햇볕과 물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흙이 다르고, 숲과 들과 바다가 다르지요. 똑같은 잣나무나 참나무라 하더라도 강원도와 충청도에서 자라는 나무는 달라요. 크기도 모양새도 빛깔도 냄새도 다릅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와 어는 같을 수 없습니다. 서로 다릅니다. 표준말로는 “했고요”라 할 테지만, “했구요”라든지 “했구만”이라든지 “했지라”라든지 “했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장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릅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할 적에는, 바로 이처럼 삶자락과 고장마다 다른 삶결에 따라 말이 다르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와 달리, ‘틀린 말’이 있습니다. 한국말에는 현재진행형이나 과거분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영어 같은 외국말을 한국사람이 배우려고 하면서, 그만 서양 말법에 따라 현재진행형과 과거분사 꼴로 ‘번역’을 해야 했고, 이런 번역 말투가 어느새 한국사람한테 널리 퍼졌습니다. 이를테면 “가고 있습니다”라든지 “먹고 있습니다”라든지 “했었거든요”라든지 “먹었었어” 같은 말투는 모두 틀립니다. 잘못 쓰는 말투예요. 이런 말투는 “갑니다”와 “먹습니다”와 “했거든요”와 “먹었어”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는 지구가 마치 한집인듯이 여기곤 하지만, 지구가 한집이어도 한국말과 영어는 같은 말이 아닌 다른 말입니다. 영어 말법을 한국 말법에 집어넣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생각해 보셔요. 미국사람은 ‘싱글싱글·싱글벙글·빙글빙글·싱긋싱긋·싱긋빙긋·빙긋빙긋·방긋방긋·방글방글·벙글벙글·벙긋벙긋’ 같은 한국말을 영어로 적을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겨레가 서로 다른 삶에 따라 서로 다른 말을 쓰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대로 한국말을 한국 말법에 맞게 쓰고, 영어 쓰는 나라에서는 그 나라 삶에 따라 그 나라 말법을 즐겁게 씁니다.


  일본사람은 일본말로 “준비 땅!”을 쓰는데, 아직 꽤 많은 한국사람은 이런 일본말을 버젓이 씁니다. 일본말인 줄 모를 뿐 아니라, 오랫동안 몸에 익었다면서 이런 말투를 털지 않습니다. 글이나 말 첫머리에는 “하여”나 “해서”나 “하지만”을 넣을 수 없습니다. 이런 말투는 “이리하여”나 “이리해서”나 “그러하지만(그렇지만,그러나)”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여·해서·하지만”은 모두 ‘틀린 말’입니다. 잘못 쓰는 말투를 잘못 퍼뜨리는 노릇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투를 쓰는 적잖은 이들은 잘잘못을 느끼거나 헤아리지 않기 일쑤예요. ‘틀린 말’을 쓰면서, ‘다른 말’인듯이 잘못 여기거나 둘러댑니다.


  “가벼운 미소”나 “넓은 광장”은 모두 잘못 쓰는 말입니다. ‘틀린 말’입니다. “가벼운 웃음”이나 “넓은 터(광장)”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잘못 쓰는 ‘틀린 말’은 틀린 말일 뿐 ‘다른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된장찌개에 된장을 안 넣고 간장이나 소금을 넣어도 간이 맞아요. 그러나 된장찌개가 아닌 간장찌개나 소금찌개입니다. 된장을 안 넣고도 된장찌개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콩나물국에 소금이 아닌 설탕을 넣으면 어찌 될까요. ‘다른 콩나물국’을 끓이는 셈일까요, ‘틀린(잘못 끓인) 콩나물국’을 끓이는 셈일까요.


  ‘축제’는 일본말입니다만 어느덧 한국 사회에 이 일본말은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영어를 썩 안 좋아하는 이들은 ‘축제’나 ‘축전’ 같은 한자말을 쓰고, 말을 깊이 살피지 않는 사람은 ‘페스티벌’이나 ‘쇼’나 ‘비엔날레’ 같은 영어를 써요. 한국말로 ‘잔치’나 ‘큰잔치’나 ‘작은잔치’나 ‘마당’이나 ‘한마당’을 쓰는 사람이나 모임이나 지자체를 보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한국말을 옳거나 알맞거나 아름답거나 즐겁게 쓰지 않는 일을 놓고 ‘다른 말’이라고 여겨도 될는지 아리송합니다. 아이들과 ‘생일잔치’를 하지 않고 ‘생일파티’를 하는 모습도 ‘다른 말’을 쓰는 모습이라고 해도 될까 궁금합니다.


  다른 삶터는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서울과 부산은 저마다 달라 아름답습니다. 경기와 강원과 전라와 경상과 충청은 서로 다른 터전이요 마을이고 이야기이기에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다른 말’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저마다 다른 곳에서 다른 보금자리를 다른 몸가짐과 눈길로 사랑스레 가꾸는 삶일 때에 아름다운 ‘다른 말’이 태어납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구름이다” 하고 말할 사람이 있고, “구름이 있네” 하고 말할 사람이 있으며, “구름이 토끼처럼 생겼네” 하고 말할 사람이 있을 테고, “구름은 하늘에서 사는구나” 하고 말할 사람이 있어요.


  ‘다른 말’이란 저마다 다르게 사랑하면서 가꾸는 삶에서 찬찬히 태어나는 아름다운 말입니다. ‘다른 말’은 서로서로 아끼고 사랑합니다. ‘다른 말’은 이웃과 동무가 쓰는 말을 가만히 살피거나 귀여겨들으면서 새롭게 맞아들입니다. ‘다른 말’은 말법이나 말틀이나 말삶을 무너뜨리거나 일그러뜨리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쳐들어온 말은 모두 ‘틀린 말’입니다. 영어를 배우는 일은 뜻있습니다만, 영어 말투나 말법을 한국말에 억지로 끼워맞추려는 모습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my’를 ‘내’가 아닌 ‘나의’로 번역해서 가르치거나 쓰는 일은 모두 ‘틀린 말’입니다. ‘your’는 ‘네’로 번역해야 옳고 맞지, ‘너의’로 번역하면 ‘틀린 말’입니다. 바다는 ‘바닷가’요 내는 ‘냇가’이며 강은 ‘강가’입니다. 이를 ‘해변’이나 ‘천변’이나 ‘강변’처럼 한자를 빌어서 써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틀리게 쓴 말은 알맞게 바로잡으면 됩니다. 이제껏 틀리게 썼으면 앞으로 바로잡으면 됩니다. 내가 쓰는 말투 열 가지 가운데 열 가지가 모두 ‘틀린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씩 차근차근 바로잡으면 됩니다. 한국말을 한 가지씩 새롭게 배우면서 즐겁게 쓰면 돼요.


  내 삶을 바로보면서 내 말을 바로세웁니다. 내 넋을 바로보면서 내 삶길을 바로잡습니다. ‘틀린 말’을 잘못 받아들여서 쓴 일은 부끄럽지 않고, 대수롭지 않으며, 꾸중 들을 일이 아닙니다. 이제껏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 슬기롭게 삶과 넋과 말을 바로보면서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게 한국말을 가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7.10.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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