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59. 교과서에 ‘한자’를 넣을 까닭이 없다

― ‘입시공부’ 아닌 ‘넋 살찌우는 말’을 살펴야



  숲을 그릴 수 있으면 모든 말이 고운 숨결이 되리라 느낍니다. 숲을 그리지 못하면 어느 말을 쓰든 고운 넋이 못 되는구나 싶어요. 그러니까, 어른이 먼저 어떤 말을 써야 하고, 아이한테 어떤 말을 물려주어야 하는가를 슬기롭게 살핀다면, 어른과 아이 모두 슬기로우면서 고운 넋이 됩니다. 어른부터 스스로 어떤 말을 써야 하는지 깨닫지 않는다면, 어른과 아이 모두 어리석거나 바보스러운 말을 쓸 뿐 아니라, 넋과 삶 모두 어리석거나 바보스러운 길로 흐르고 맙니다.


  초등학교에서 한자를 가르치든 영어를 가르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한자와 영어를 외국말로 옳고 바르면서 슬기롭고 아름답게 가르치면 됩니다. 그러나, 이 나라 정치권력은 초등학교에서 한자와 영어를 외국말로 똑똑히 가르치거나 제대로 가르칠 뜻이 아닙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초등학교에서 한국말부터 옳거나 바르거나 슬기롭거나 아름답게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뿐 아니라 중·고등학교에서도 한국말을 제대로 가르치는 얼거리가 없고, 교사는 교사대로 대학입시에 매달리느라 한국말은 뒷전으로 밀어두기 마련입니다.


  나라(정치권력)에서 교과서에 한자를 함께 쓰려고 하는 까닭은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차근차근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아이들이 ‘교과서만 들여다보도록 하는 입시교육’에 일찍부터 길들도록 하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창조력)을 펼치지 못하도록 짓누르려는 뜻입니다.


  아이와 어른은 모두 ‘한자 하나’를 더 알거나 ‘알파벳 하나’를 더 알아야 지식이 늘지 않습니다. ‘한자말 하나’를 더 익히거나 ‘영어 하나’를 더 익혀야 생각이 자라지 않습니다. 지식을 늘리려면 지식을 늘릴 수 있도록 가르칠 노릇입니다. 생각을 키우려면 생각을 키울 수 있도록 이끌 노릇입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말’을 제대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말사전을 달달 읊거나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야 하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살다’라는 낱말이 하나 있으면, 이 낱말로 ‘함께 살다’나 ‘모여 살다’를 그리고, ‘책삶’이나 ‘노래삶’이나 ‘숲삶’을 그리며, ‘마을살이’와 ‘꿈살이’와 ‘사랑살이’를 그릴 수 있도록 말을 슬기롭게 가르쳐야 합니다. ‘기쁘다’라는 낱말이 하나 있으면 ‘기쁘네·기쁘구나·기뻐·기쁘지·기쁘지롱·기쁘다네·기쁘구마·기쁘요·기쁘다’처럼 말끝을 바꾸면서 느낌을 바꾸는 결을 살가이 가르쳐야 합니다.


  가는 말이 고울 때에 오는 말이 고운 줄 가르치고, ‘말이라는 씨앗’을 심은 대로 넋이 자라고 삶이 피어나는 흐름을 가르치며, 모든 생각은 말로 짓는다는 얼거리를 가르칠 노릇입니다.


  학교 문턱에 처음 발을 내딛는 여덟 살 아이가 무엇을 보고 생각하면서 삶을 익혀야 하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덟 살 아이 마음에 어떤 숨결이 깃들도록 할 때에 이 아이가 아름답게 자라서 사랑스러운 꿈을 키울 만한가를 헤아려야 합니다. ‘학습 목표’가 아닌 ‘삶’을 살펴야 합니다. ‘학력 높이기’가 아닌 ‘꿈’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아갈 곳은 ‘경제 성장’이 아니라 ‘삶을 사랑하면서 스스로 알차게 가꾸는 길’이어야 합니다.


  아이는 어른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톱니바퀴나 부속품이나 종(노예)이 아닙니다. 아이는 스스로 생각하고 손수 삶을 지을 줄 아는 철들고 슬기로운 사람으로 자라야 합니다. 이제 학교에서는 ‘교과서 지식을 머릿속에 들이밀어 입시지옥으로 내모는 짓’을 그만둘 노릇입니다. 초등학교부터 학교 텃밭을 일구고, 학교 운동장 둘레를 숲으로 가꾸면서, 아이들이 밭과 숲을 스스로 돌보는 손길을 키울 수 있어야 합니다. 고작 한자 몇 가지를 교과서에 넣느니 마느니 하면서 애먼 돈과 품과 겨를을 바칠 까닭이 없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제대로 할 몫을 제대로 보아야 하고, 아이들이 참답게 배워서 참다운 사람으로 크는 길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교과서에 한자를 밝혀서 알려주느냐 마느냐 하고 따지기 앞서, 교과서를 이룬 글이 아이 눈높이에 맞도록 쉽거나 바르거나 아름다운가를 따져야 합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조차 한자를 밝혀서 써야 할 만큼 그 한자말을 꼭 써야 하는가를 따져서, ‘한글로 적을 때에 곧바로 알아보면서, 이렇게 알아본 대로 생각을 밝히도록 이끄는 글’로 교과서를 고쳐쓰도록 마음을 기울일 노릇입니다. 교과서에 한자를 밝혀서 써야 한다면, 교과서 글(문장)이 엉망이라고 스스로 밝히는 셈이니까요.


  우리는 ‘삼월’을 ‘삼월’로 적고 이렇게 알면 될 뿐입니다. ‘三月’로 적고 이렇게 읽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글쓰기’를 ‘글쓰기’로 적고 이렇게 알면 됩니다. ‘作文’으로 적고 이렇게 읽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시와 소설도 그저 ‘시’와 ‘소설’이지, ‘詩’나 ‘小說’로 적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만화’와 ‘사진’을 ‘漫畵’와 ‘寫眞’으로 적을 줄 알기에 문화나 예술을 잘 알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아이들이 ‘思慮’를 모른다고 걱정하지만, 어른도 ‘사려’가 무슨 뜻인지 제대로 모릅니다. 한자를 밝힌대서 이 한자말을 알 수 있지 않습니다. 한자말 ‘사려’는 “깊게 생각함”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깊게 생각하다”라 말해야 누구나 알아들을 만하지, ‘사려(思慮)하다’처럼 적어야 알아들을 만하지 않습니다.


  시는 그저 ‘시’입니다. 시를 ‘시’로 적으면서, 시란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라고 가르쳐서, 아이들이 초등학교에서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시’라는 글짜임에 맞추어서 즐겁게 쓸 수 있도록 이끌 때에 참답고 아름다운 교육입니다.


  아이들이 앞으로 걸어갈 아름다운 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른들이 꾸려서 아이들한테 베풀 교과서는 어른들 스스로 삶을 아름답게 지으면서 깨달은 슬기를 담은 책이어야 합니다. ‘한자를 밝혀서 적느냐’는 둥 ‘영어로도 함께 적느냐’는 둥 이런 철없는 소리는 그치고, ‘삶을 이루는 바탕이 될 생각을 짓는 말’을 어떻게 알차면서 알뜰히 다스려서 가르칠 때에 아름다울까 하는 대목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국말을 슬기롭게 제대로 배워야 영어나 중국말도 슬기롭게 제대로 배울 수 있습니다. 한국말부터 슬기롭게 제대로 쓸 줄 모르면, 외국말을 아무리 잘 배운다고 하더라도 통역이나 번역을 못 합니다. 한국말을 슬기롭게 제대로 가르칠 수 있도록 교과서를 바로잡으면, 아이들은 스스로 어떤 외국말이든 슬기롭게 제대로 배우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자랍니다. 4348.3.31.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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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처럼 2015-04-15 11:28   좋아요 0 | URL
맞아요. 번역된 글 보면 바로 알겠더라구요. 우리말을 모르고 뒤쳐놓아 읽어도 무슨 말인지 한참 생각해요.

숲노래 2015-04-15 16:47   좋아요 0 | URL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는 채
외국책을 옮기려 하면
참말... 뭔 소리인지 알 길이 없기 마련이에요...
그렇지요...
 


말넋 53. 생각을 담는 그릇, 마음을 가꾸는 연장

― 슬기롭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답게



  누구나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어야 스스로 배웁니다. 스스로 첫걸음을 내딛지 못하면 스스로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을 돌아보아도 이를 환하게 깨달을 만합니다. 아이는 말을 늘 스스로 배웁니다. 옆에서 어른이 말을 가르친다고도 할 터이나, 아이는 늘 스스로 말을 배웁니다. 옆에서 어른이 아무리 재잘거리거나 수다를 떨더라도, 아이 스스로 이 말을 받아들이려고 할 때에 비로소 말을 배웁니다.


  갓난아기는 ‘맘마’라든지 ‘엄마’라는 짧은 말마디부터 뗍니다. 입술을 터뜨려서 말을 터뜨립니다. 이윽고 ‘아빠’라든지 ‘까까’라든지 ‘어’라든지 ‘으’라든지 외마디소리를 하나하나 쓰면서 새로운 말로 나아갑니다. 아이는 말을 배우겠다는 뜻을 스스로 느끼면서 하나씩 배우고, 둘레 어른이 여느 때에 늘 쓰는 말을 귀여겨들은 뒤 입술을 달싹이면서 하나씩 흉내를 내요. 흉내가 시늉이 되고 시늉이 흉내가 되다가 어느새 버릇으로 굳습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는 말처럼, 세 살 아기가 둘레 어른한테서 귀여겨듣고 익힌 말이 여든 살까지 곧게 흐릅니다.


  스스로 배워서 스스로 삽니다. 스스로 받아들인 말로 스스로 삶을 짓습니다. 이리하여, 열 살이 되거나 스무 살이 되어도, 말은 늘 스스로 배웁니다. 스스로 새로운 낱말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새로운 말투를 맞아들입니다.


  어려운 말은 없고, 쉬운 말도 없습니다. 한국사람한테 영어가 어렵지 않으며, 한국사람한테 한국말이 어렵지 않습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모든 말을 다 배웁니다. 영어이든 독일말이든 프랑스말이든, 내가 스스로 배우려고 할 때에 배울 수 있습니다. 역사이든 철학이든 학문이든, 우리는 늘 스스로 배우려고 마음을 먹을 때에 하나하나 배웁니다. 내가 스스로 배우려 하지 않으면 어떤 말도 못 배워요. 그러니까, 내가 마음속으로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자!’ 하는 다짐을 또렷하게 새기지 않는다면, 내가 한국사람이라 하더라도 한국말을 못 배웁니다. 어릴 적부터 버릇이 되거나 길들거나 물든 대로 아무 말이나 그냥 쓰는 삶이 됩니다.


  말은 어떤 그릇일까요?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입니다. 내가 쓰는 말은 어떤 그릇일까요? 내가 쓰는 말은 내 생각을 담은 그릇입니다. 어떤 낱말이나 말투를 쓰든, 이 낱말과 말투는 모두 내 생각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낱말과 말투에 내 마음결을 고스란히 드러내요.


  어떤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만 그럴듯한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녁은 겉보기에 그럴듯한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몹시 투박한 말을 쓰는데, 이 투박한 말이 참으로 사랑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이녁은 겉보기에는 투박하더라도 생각은 참으로 사랑스럽다는 뜻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이 낱말을 쓰기에 옳고, 저 낱말을 쓰기에 그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느 낱말을 쓰든, 어떤 마음결인가 하는 대목을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먼저, 내 마음결을 슬기로우면서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추스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결과 마음밭과 마음속과 마음자리를 튼튼히 세우고 씩씩하게 가꿀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바탕’을 야무지게 짓고 나서, 이러한 마음바탕에 말을 씨앗처럼 심습니다.


  이리하여,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면서, 생각을 가꾸는 연장이 됩니다. 내가 마음에 심는 말 한 마디는 ‘내 생각을 새롭게 가꾸는 빛이나 숨결이나 물결’처럼 흐릅니다. 내 말 한 마디는 내 마음에 바람처럼 드리우면서 햇살처럼 퍼집니다. 바야흐로 이때부터 ‘어떤 말을 어떤 자리에 어떻게 쓰느냐’ 하는 대목을 살핍니다. 마음바탕이 제대로 선 뒤에 비로소 ‘어떤 말을 쓸 때에 내 마음을 한결 슬기롭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답게 가꾸느냐’ 하는 대목을 살필 수 있습니다.


  생각을 담는 그릇이기에 함부로 다룰 수 없습니다. 생각을 가꾸는 연장이니 엉터리로 다룰 수 없습니다. 내 생각그릇인 말을 함부로 굴릴 수 없습니다. 내 생각을 밝히거나 가꾸는 연장인 만큼, 더 즐겁고 기쁘게 다루려 하기 마련입니다.


  이제 나는 ‘나 혼자만 아는’ 말을 쓸 수 없습니다. 생각과 마음이 얽힌 수수께끼를 안다면, 아무 말이나 아무렇게나 쓸 수 없습니다. ‘이웃과 함께 나눌’ 말을 헤아려서 쓸 때에 아름다운 줄 알아차립니다. ‘동무와 사이좋게 주고받을’ 말을 골라서 쓸 때에 사랑스러운 줄 알아봅니다. ‘내가 스스로 마음을 가꾸면서 둘레 이웃과 동무 모두한테 따스하게 드리울’ 말을 지어서 쓸 때에 슬기로운 줄 알아냅니다.


  사람으로서 쓰는 말을 돌아봅니다. 온누리를 지은 수많은 사람들 땀방울과 웃음과 노래를 생각하면서, 내가 기쁘게 쓸 말을 돌아봅니다. 참말 아무 낱말이나 서툴게 쓸 수 없습니다. 참으로 아무 말투나 섣불리 쓸 수 없습니다. 번역 말투나 일본 말투를 쓴다고 해서 ‘나쁜’ 일은 아니나 ‘즐거운’ 일이 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중국 한자말이나 일본 한자말을 쓰기에 ‘그릇된’ 일은 아니나 ‘기쁜’ 삶이 되기 힘들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읽고 느끼면 됩니다. 즐거움으로 나아가도록 북돋우는 말결을 생각합니다. 기쁨으로 거듭나도록 이끄는 말삶을 생각하고 자꾸 생각합니다.


  말 한 마디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삶 한 자락을 제대로 바라봅니다. 말 한 마디를 제대로 갈고닦으면서, 넋과 얼을 제대로 갈고닦습니다. 말 한 마디를 슬기롭게 다스리면서, 꿈과 이야기와 사랑을 슬기롭게 다스립니다.


  ‘생각을 가꾸는 연장’은 ‘아무렇게나’ 쓸 수 없습니다. 이 연장(말과 글)은 제대로 써야 합니다. 슬기롭게 써야 합니다.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써야 합니다. 한국사람이기에 한국말을 ‘잘’ 해야 하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럽게’ 쓸 줄 아는 한편, 사람으로서 ‘삶말’을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럽게 쓸 줄 알면 됩니다. 삶말을 쓰는 사람이 삶을 짓고 넋을 지으며 말을 짓습니다. ‘말삶’을 읽는 사람이 삶을 읽고 넋을 읽으며 말을 읽습니다. 4348.3.7.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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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52. 마음결을 살리는 말결

― 위아래가 없는 말넋



  시를 쓰는 신현림 님은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현자의숲,2012)이라는 책을 낸 적 있습니다. 이 책 166쪽을 보면 “아주머니와 나는 계속 이야기꽃을 피워 갔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값진 대화가 이어졌지요.”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이야기꽃’과 ‘대화(對話)’라는 낱말이 잇달아 나옵니다. 하나는 한국말이고, 다른 하나는 한자말입니다. 두 낱말 모두 한국말사전에 나오는데, ‘대화’는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 또는 주고받는 이야기”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야기꽃’과 ‘대화’는 뜻이 같은 셈이고, 글쓴이는 ‘뜻이 같은 두 가지 말’을 나란히 적은 셈입니다.


  시를 쓰는 분이 쓴 글이니, 여러 가지 낱말을 섞어서 쓸 만합니다. 다만, 한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이야기꽃’이라는 낱말을 넣었으면, 다음에는 ‘이야기밭’이라는 낱말을 넣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잔치’나 ‘이야기마당’이라는 낱말을 넣을 수 있고, 그냥 ‘이야기’라고만 적어도 됩니다. 그러나 이런 얼거리를 헤아리는 어른은 퍽 드뭅니다. ‘이야기’라는 낱말을 바탕으로 새로운 낱말을 하나하나 일구어서 쓰려는 마음을 키우는 어른은 참 드물어요.


  한자말 ‘대화’를 쓰는 일이 나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런 한자말도 쓸 수 있습니다. 영어로 ‘story’를 쓸 수 있을 테고 ‘talk’를 쓸 수도 있어요. 요즈음은 ‘북 토크’라든지 ‘북 콘서트’ 같은 말을 쓰는 사람도 제법 많습니다. 한국말사전에 오르지 않은 영어요, ‘한국말 아닌 외국말’이지만, 이런 영어를 거리끼지 않습니다. 한국말로 하자면 ‘책 수다’나 ‘책 이야기잔치’쯤 될 텐데, 이처럼 한국말로 새롭게 생각을 지으려고 하는 흐름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아요.


  생각을 차근차근 북돋운다면 ‘책 이야기놀이’나 ‘책 이야기꽃’ 같은 이름을 쓸 수 있고, ‘책꽃 이야기꽃’이나 ‘책·이야기·꽃’ 같은 이름을 쓸 수 있습니다. ‘책놀이 이야기놀이’라든지 ‘책·이야기·놀이’처럼 새로운 이름을 얼마든지 지을 만합니다.


  말을 살리는 길은 쉽습니다. 나 스스로 삶을 살려서 넋을 살릴 때에는 말이 기쁘게 살아납니다. 한국말사전에서 어떤 낱말을 캐내야 ‘말 살리기’가 되지 않습니다. 생각을 살찌울 수 있는 말을 스스로 마음속에서 일으킬 때에 말을 살립니다.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쓰는 말을 새롭게 돌아보면서 차근차근 가꿀 때에 말을 즐겁게 살립니다.


  신현림 님이 쓴 글을 보면 ‘계속(繼續)’이라는 한자말이 나옵니다. 이 낱말은 “끊이지 않고 이어 나감”을 뜻한다고 해요. 이 한자말을 쓰는 일은 옳지도 그르지도 않습니다. 그저, 곰곰이 돌아볼 노릇입니다.


  한번 돌아보셔요. “나는 끊이지 않고 이야기꽃을 피워”처럼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야기꽃을 자꾸 피워”나 “나는 이야기꽃을 그대로 피워”나 “나는 더 이야기꽃을 피워”나 “나는 새롭게 이야기꽃을 피워”나 “나는 곱게 이야기꽃을 피워”처럼 말을 할 수 있어요. 어느 낱말을 써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실타래가 아닙니다. 때와 곳을 더 넓게 살피면서 생각을 한껏 북돋울 낱말을 살릴 수 있느냐 하는 실마리입니다.


  한국말이 한자말보다 낫기 때문에 한국말을 써야 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한국말을 쓸 뿐이면서, 한국말로 넋과 삶을 아름답게 살찌우거나 살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말 한 마디를 바라보면서 내가 선 자리를 새롭게 돌아보고, 내가 선 자리를 새롭게 돌아보면서 우리가 나아가는 삶길을 새롭게 살펴서 가꿉니다. 말 한 마디는 내 넋과 삶과 길을 새롭게 가꾸거나 일구거나 북돋우는 밑바탕입니다.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한국말’이 무엇인지 헤아려야 합니다. 사회의식이나 고정관념이나 학교교육이나 제도권이나 교과서나 이론이나 지식이라는 딱딱한 틀을 내려놓고, 우리 삶과 넋과 꿈과 사랑과 숨결과 생각과 마음과 이야기를 품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고맙다’라는 낱말 한 마디는 “그대가 나한테 넓게 베푼 마음을 흐뭇하게 여기는 뜻”을 나타내려고 씁니다. 이리하여, 이러한 뜻을 ‘내가 너한테 나타내’려고 ‘고맙다’라는 낱말을 쓴다면, 나는 아주 스스럼없이 나와 마주한 너(그대, 이녁)한테 고개를 숙여 절을 해요. 네가 나보다 한참 어린 사람이어도 ‘고맙다’ 하고 말하면서 절을 합니다. 이러한 뜻과 느낌을 담은 낱말이니, 예부터 ‘고마-’라는 말밑에 깊거나 너른 숨결이 깃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서로 말을 나누는 까닭은 이런 숨결과 넋을 다시금 되새겨서 새로운 마음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말에는 위나 아래가 없습니다. 말에는 계급이나 신분이 없습니다. ‘높임말’이 있습니다만, 높임말은 사람을 위아래로 가르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너(그대, 이녁)를 섬기거나 모시면서 함께 아름다운 삶으로 가려고 쓰는 말입니다. 서로 아끼면서 돌볼 수 있는 마음이 되려고 높임말을 씁니다. 이리하여, 높임말은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한테만 쓰는 말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이일 때에 높임말을 씁니다. 높임말이 아닌 여느 말에도 서로 아끼거나 돌보는 마음을 담을 수 있으니, 서로 나이가 많이 벌어지더라도 ‘여느 말’로 따사로운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한식구끼리는 높임말을 거의 안 쓰지요. 한식구끼리는 으레 ‘여느 말’을 써요.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이가 ‘여느 말’로 홀가분하면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한식구끼리는 ‘나이’를 헤아리지 않고 ‘사랑’을 헤아리기 때문에, 여느 말을 쓰면서도 무척 따스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이도 서로 ‘나이’가 아닌 ‘사랑’을 살피기 때문에, 높임말 아닌 여느 말을 쓰면서 언제나 웃음꽃이 피고 기쁜 노래가 흐릅니다.


  말결을 살피면서 마음결을 살립니다. 마음결이 살아나면 삶결이 살아납니다. 삶결이 살아날 때에 꿈결과 사랑결이 함께 살아납니다. 새롭게 살아난 꿈결과 사랑결에 따라 따사롭고 넉넉한 이야기결이 태어납니다. 아주 조그맣다 싶은 낱말 한 마디에서 모든 숨결이 새롭게 피어납니다. 4348.3.7.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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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55. 아이들을 입시지옥 굴레에 가두지 말자

― 초등학생한테 한자를 가르치는 속뜻



  아이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요? 아이는 놀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아이가 신나게 놀 만한 터전을 마련해 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마음껏 뛰놀지 못합니다. 시골에서는 아이가 사라졌으며, 도시에서는 층간소음 때문에 발조차 못 구르기 일쑤입니다. 학교에 간다 하더라도 수업 시간에 꼼짝을 해서는 안 되고, 쉬는 동안에는 교실이나 골마루에서 달리지 말라 합니다.


  놀고 싶어도 놀지 못하는 오늘날 아이들은 학교를 마친 뒤 학원버스에 실려 학원에 가야 합니다. 이 아이들은 중학교로 접어들기 무섭게 입시지옥에 휘둘리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일찌감치 ‘예비 입시생’으로 여기는 흐름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한국에서 어린이는 놀이를 모르는 채 ‘예비 대학입시생’이 되어야 하는 교육 얼거리입니다. 이런 마당에, 나라에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함께 쓰겠다고 밝힙니다. 나라에서는 어린이를 걱정하려는 듯이 이런 일을 벌인다고 하지만, 이 나라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워야 하느라 짐이 무겁고, 온갖 학원을 빙글빙글 돌아야 해서 어깨가 처지며, 이러면서도 놀 틈이 없어서 힘겹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어른은 아이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할까요? 아이한테는 아무런 권리(인권)가 없을까요?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넣느냐 마느냐 하는 이야기는 맨 먼저 어린이한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어린이가 무엇을 바라는지부터 귀여겨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교과서를 제대로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섞어서 써야 한다면, 이 교과서가 제대로 된 교과서인지, 어린이 눈높이에 맞는 교과서인지 따져야 합니다. 초등학교는 아이들이 한국말을 슬기롭게 제대로 배워서 생각을 북돋우고 마음을 가꾸는 길을 배우는 배움터입니다. 한국말을 슬기롭게 안 가르치거나 제대로 못 가르치면서 어설프게 한자 몇 가지를 아이들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하지 않는가 하고 돌아봐야 합니다.


  한국에서 가르치는 한자는 중국과 일본과 대만하고 달라, 이 한자를 가르친들 도움이 될 턱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과 대만하고 사귀는 자리에서는 영어를 쓰면 되지, 굳이 한자나 중국말까지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중국사람이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사람도 중국말을 배우면 서로 고맙겠지만, 한국사람이 중국말과 중국 글자를 일부러 배울 까닭은 없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넣으려는 속뜻도 짚어야 합니다. 교과서에 한자가 나오면 시험문제에도 한자가 나올 테고, 아이들은 이런 시험공부를 더 해야 합니다. 그만큼 초등학교에서 한국말을 제대로 가르칠 겨를이 줄어들고, 아이들은 한국말로 생각을 가꾸거나 북돋우는 흐름을 놓치거나 빼앗깁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새로운 생각을 가꾸거나 북돋우지 못하고 입시공부만 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아이들한테서 ‘생각힘(창의력·창조력)’이 줄어들거나 사라집니다. 아이들은 중·고등학교에 앞서 초등학교부터 ‘입시 노예’가 됩니다.


  한글을 지킨다는 뜻에 앞서, 아이들이 사람답게 자라는 길을 지키고 살려야 합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집어넣겠다는 정책은 아이들을 죽이거나 더 괴롭히는 짓이 됩니다.


  신나게 뛰놀고 아름답게 생각을 키워서 사랑스러운 꿈을 이루는 길로 나아갈 때에, 아이들은 튼튼하고 씩씩한 어른으로 우뚝 섭니다. 아이들은 ‘인적 자원’도 ‘미래 산업전사’도 아닙니다. 아이들은 아름다운 숨결입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으면서 착하고 참된 마음을 기를 숨결입니다. 우리 어른은, 아이가 한국말을 슬기롭게 제대로 배워서 생각힘을 키우도록 도와야 합니다. 흔들리는 한국말부터 바로세우고 일으켜서 아이들 어깨를 가볍게 할 노릇입니다. 한자 교육은 ‘참고서 업자’한테나 반가운 이야기일 테지요. 4348.3.31.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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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51. 생각을 그려서 보이는 말

― ‘내가 쓸’ 말과 ‘떠도는’ 말



  국립국어원에서는 ‘감사(感謝)합니다’라는 낱말도 ‘고맙습니다’라는 낱말과 함께 쓸 만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럴 수도 있으리라 느끼지만, 굳이 두 가지 말을 한국사람이 써야 할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사람은 한국말 ‘고맙습니다’와 한자말 ‘感謝’에다가 영어 ‘thank you’까지 쓰니까요.


  지구별이 서로 한식구라는 생각이라면, 일본말 ‘ありがとう’나 네덜란드말 ‘Dank je’를 쓰자고 할 수 있어요. 인도말과 베트남말과 터키말과 핀란드말도 함께 쓰자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한국사람이 한국에서 함께 사는 이웃과 주고받을 한국말을 알려주거나 가르치는 자리라 한다면, 한국말을 슬기로우면서 곱고 참답게 쓰는 길을 밝혀야지 싶습니다.


  한자말 ‘感謝’는 ‘고마움’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말 ‘고마움’을 한자로 옮기면 ‘感謝’가 되는 셈입니다. ‘고맙습니다’를 영어로 옮기면 ‘땡큐’가 되는 얼거리와 같습니다. 그러면 ‘고맙다(고마-)’는 무엇을 뜻할까요? 이 낱말은 “이녁(그대)이 나한테 넓거나 너그럽게 베푼 마음을 흐뭇하게 여긴다”를 뜻합니다. 이리하여, ‘고맙다’나 ‘고맙네’나 ‘고마워요’처럼 말할 적에는 으레 목을 가볍게 숙이거나 허리까지 깊이 숙입니다. 나한테 마음을 넉넉하게 쓴 그대(이녁) 마음이 몹시 반가우면서 흐뭇하니까요. ‘이녁(그대, 너, 자네)’ 자리에 있는 사람이 손아랫사람이거나 아이라 하더라도 으레 절을 하지요. ‘고맙다’라는 낱말은 이처럼 내 맞은편에 있는 사람을 높이거나 섬기거나 모시려는 기운을 담습니다. 그래서 예부터 ‘고맙다’라는 낱말은 무척 거룩한 느낌을 나타냈어요.


  ‘절’을 어느 자리에서 하는지 돌아봅니다. 차례나 제사를 지낼 적에 절을 합니다. 웃어른한테 절을 합니다. 설날에 절을 합니다. 절은 누구한테 하는가 하면 ‘어른(철이 든 사람)’한테 하고, ‘님(하느님, 신)’한테 합니다. 그러니까, ‘고맙다’라는 낱말 한 마디에는, 나보다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나한테 넓게 마음을 쓴 이웃사람과 생각이 트인 철이 든 어른을 마주하면서 ‘그대는 나한테 고운 님입니다’ 하고 밝히는 뜻을 담습니다.


  한자말 ‘감사’나 영어 ‘땡큐’나 일본말 ‘아리가또’에도 저마다 다른 뜻과 기운과 이야기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 다른 나라에서 다 다른 뜻과 기운과 이야기가 쌓였을 테지요. 그래서, 우리는 나라와 겨레마다 다른 뜻과 기운과 이야기를 서로 아낄 수 있으면 됩니다. 이러면서 우리가 스스로 오랜 나날에 걸쳐 손수 짓고 갈고닦은 삶을 돌아볼 수 있으면 돼요.


  내가 쓸 말은 언제나 내 삶과 넋을 곱고 참다우면서 슬기롭게 북돋울 수 있는 말이어야 합니다.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할 적에는 내 삶과 넋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거나 함부로 다루는 셈입니다. 말 한 마디를 찬찬히 가누고, 글 한 줄을 옳게 다스릴 때에, 삶과 넋도 찬찬히 가누면서 옳게 다스릴 줄 압니다. 그래서 유행처럼 퍼져서 한때 쓰이는 ‘안습·레알·멘붕’ 같은 말마디에는 어떤 새로움이나 놀라움이나 기쁨도 깃들지 않습니다. 그저 유행처럼 퍼져서 한때 쓰일 뿐입니다. 이런 말마디에는 어떠한 숨결이나 빛이나 넋도 스미지 않아요. ‘떠도는 말’은 그야말로 한동안 떠돌다가 어느새 잊힙니다. 떠도는 말은 처음 불거질 적에 갑작스레 널리 퍼져서 마치 이 말을 안 쓰면 안 되기라도 하는듯하기까지 하지만, 목숨줄이 아주 짧아요. 2010년대에 널리 떠도는 ‘대박’ 같은 말도 앞으로는 하루아침에 사라지리라 느낍니다.


  내가 쓸 말은 ‘삶을 밝히는 말’입니다. 내가 쓸 말은 ‘떠도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가꿀 하루는 ‘삶을 밝히는 일’이요, 내가 지을 하루는 ‘삶을 노래하는 일’입니다.


  양자역학을 풀어내어 노벨상을 받은 하이젠베르크 님이 쓴 《부분과 전체》(지식산업사,1982)라는 책을 읽다가 ‘참기쁨(79쪽)’, ‘참모습(95쪽)’, ‘참지식(166쪽)’ 같은 낱말을 봅니다. 앞머리 ‘참-’을 붙인 낱말을 가만히 혀에 얹어서 굴리면서 생각합니다. ‘참모습’이라는 낱말은 한국말사전에 나오지만, 다른 두 낱말은 한국말사전에 안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낱말도 즐겁게 쓸 만하고, 기쁘게 주고받을 만합니다. ‘기쁨’이라 할 때와 ‘참기쁨’이라 할 때에는 느낌과 뜻이 사뭇 달라요. ‘지식’이라 할 때하고 ‘참지식’이라 할 때에도 느낌과 뜻이 아주 다릅니다.


  ‘참-’이라는 낱말에 다른 말마디를 하나씩 더 붙여 봅니다. 참사랑, 참마음, 참노래, 참꿈, 참숲, 참말, 참글, 참책, 참하루, 참삶, 참일, 참놀이, 참사람, ……. 그러고 보면, ‘참꽃’과 ‘참나무’와 ‘참새’라는 낱말이 있어요. 사회나 정치나 교육도 ‘참사회·참정치·참교육’처럼 ‘참-’을 붙여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참다운 넋이 되어 새롭게 거듭나려 한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참-’을 붙일 만합니다. 이리하여, 나 스스로 착한 넋이 되어 새롭게 거듭나려 한다면 ‘착한-’을 앞에 붙일 만하고, 나 스스로 고운 넋이 되어 새롭게 거듭나려 한다면 ‘고운-’을 앞에 붙일 만합니다. ‘착한사랑·고운사랑’을 할 수 있으며, ‘착한일·고운일’을 할 수 있어요. ‘착한말·고운말’을 쓸 수 있으며, ‘착한삶·고운삶’을 가꿀 수 있습니다.


  생각을 그려서 보이는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려 하는가를 말로 담아서 보여줍니다. 남한테 보여주기보다 내가 나한테 보여줍니다. 내 생각은 늘 내 말로 드러납니다. 내가 가꾸려는 하루는 늘 내 말에 바람 한 줄기처럼 실려서 흐릅니다.


  내가 쓸 말은 내가 손수 삶을 짓도록 북돋우는 기운찬 말입니다. 내가 나눌 말은 내가 손수 삶을 가꾸면서 사랑과 꿈이 자라는 말입니다. 내가 들려줄 말은 내가 손수 아끼면서 보듬을 삶을 노래하는 말입니다.


  참말을 하면서 참하루를 엽니다. 참글을 쓰면서 참동무를 사귑니다. 참노래를 부르면서 참사랑이 퍼집니다. 참꽃을 바라보는 봄이요, 참나무가 베푸는 도토리를 줍는 가을입니다. 아름다운 삶을 아름다운 넋으로 바라보며 아름다운 말이 태어납니다. 4348.2.24.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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