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47. ‘사람’과 ‘국민’과 ‘백성’

― 누가 ‘이곳’에서 쓰는 말인가



  요즈음은 정부에서 ‘국민(國民)’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예전에는 나라에서 ‘백성(百姓)’이라는 낱말을 썼습니다. 요즈음 생각 있다는 사람은 ‘시민(市民)’이나 ‘서민(庶民)’라는 낱말을 쓰는데, 한동안 ‘민중(民衆)’이나 ‘민초(民草)’ 같은 낱말이 두루 나돌기도 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름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모든 사람을 가리킬 수 있고, 권력과 동떨어진 채 스스로 삶을 짓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모저모 살피면, 정부에서 쓰는 말이나 지식인이 쓰는 말은 한국말이 아닙니다. 이뿐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을 좀처럼 안 쓰고, 여느 자리에서 사는 사람이 흔히 쓰는 ‘이웃’이라는 말도 어지간해서는 안 씁니다.


  ‘국민’은 일제강점기에 천황을 섬기던 이웃나라에서 한겨레를 짓밟으면서 퍼뜨린 한자말입니다. 이리하여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초등학교’로 바꾸었어요. 그렇지만 ‘국민투표’라든지 ‘국민의 소리’라느니 하면서, 이 낱말을 제대로 씻거나 떨치려는 사람은 거의 안 보입니다. 지난날 조선에서는 신분이나 계급으로 사람을 가른 탓에, 사람을 ‘사람’으로 말하지 않았고, ‘이웃’이란 시골자락에서 수수하게 흙을 짓던 사람들이 마을을 조촐히 이루어 서로 주고받는 이름이었어요. 그래서 지난날 조선에서는 임금과 백성이 이웃 사이가 아니었으며, 양반과 농사꾼도 서로 이웃 아이가 아니었어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쓰던 말이 ‘백성’이요, 이런 낱말에는 예전 사회와 정치 얼거리가 고스란히 깃듭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일는지 헤아릴 노릇입니다. 우리는 국민도 백성도 아니지만, 시민이나 서민도 아닙니다. 낱말로만 보아도 ‘시민’은 “시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군이나 읍이나 면에서 사는 사람은 군민이나 읍민이나 면민이에요. 오늘날은 도시사람이 92%가 넘는다지만, 여느 사람을 함부로 ‘시민’이라 할 수 없습니다. 벼슬이나 특권이 없는 사람을 ‘서민’이라 한다는데, 이 또한 사람을 계급과 신분으로 가르는 이름입니다. 지식인은 ‘민중·민초’ 같은 이름을 한자말로 짓지만, 정작 민중이나 민초라 할 사람은 한자 권력이나 지식하고는 등진 채 살았습니다. 지식인이 “여느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을 쓰려 했다면, 여느 사람 살림과 터전을 헤아려 ‘시골사람’이나 ‘들사람’ 같은 이름을 써야 올바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너와 나 사이에 울타리를 걷어내어 오롯이 ‘사람’이라고만 써야지요.


  지난날 ‘훈민정음’은 한자를 중국말대로 읽도록 적으려고 쓴 소릿값(발음기호) 구실을 하는 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이라는 그릇은 권력자와 지식인만 살짝 썼을 뿐, 여느 자리에서 살던 사람(백성)은 이러한 그릇을 알지도 배우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채 ‘입으로 말만 하면서 살았’습니다. 오늘날 ‘한글’은 한국말을 담는 그릇입니다.그런데 오늘날 한글이라는 그릇에는 한국사람이 생각을 주고받는 이야기가 담기기보다는, 온갖 한자말과 영어가 어수선하게 섞일 뿐 아니라, 번역 말투와 일본 말투가 두루 파고들어 짬뽕이 됩니다.


  짬뽕이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짬뽕이 되면서 한국말은 가뭇없이 자취를 감춥니다. 한국말을 한국사람 스스로 잊으면서 어떤 생각을 말이나 글로 담으려 했는지 잊습니다. 한국말을 한국사람 스스로 잃거나 팽개치면서 어떤 넋을 말이나 글에 실어 서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가까지 잃거나 팽개칩니다.


  ‘사람’과 ‘人間’은 다릅니다. ‘사람’과 ‘human’은 다릅니다. 이러한 말이 태어난 곳도 다르고, 이러한 말을 쓴 발자취와 나날도 다릅니다. 오늘날에는 나라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북돋우기보다는, 학교교육으로 아이들을 가두어 입시지옥으로 내몰아 대학바라기만 하도록 내몰다가, 대학교를 마치면 다시 취업지옥으로 몰아세워서 도시에서 돈벌이에만 사로잡히도록 들볶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어른이 되기까지 사람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 새로 아이를 낳을 적에도 사람다운 숨결을 쉬지 못합니다. 말이 말다웁기 앞서 사람이 사람다운 삶이 없습니다. 말이 말답게 서기 앞서 사람이 사람답게 설 수 있는 터가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백성도 국민도 시민도 서민도 민중도 민초도 대중도 아닙니다. 그저 사람입니다. 모두 똑같이 사람으로 이 땅에 서서 다 함께 이웃이자 동무입니다. 사람으로서 쓸 말을 생각할 노릇이고, 이웃끼리 주고받을 말을 헤아릴 노릇이며, 동무끼리 나눌 말을 살필 노릇입니다.


  깨끗하다는 토박이말을 살린다거나, 지식을 키우려고 한자말이나 영어를 섞어 써야 한다거나, 죽은 옛말을 살린다거나, 사자성어를 부려 써야 한다거나, 시사상식을 키워야 한다거나, 이런 허울이나 저런 틀에 갇히지 말 노릇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면서 쓸 말을 찾고, 이웃과 이웃이 아낄 말을 깨달으며, 동무와 동무가 어깨를 겯을 말을 지어서 가꿀 노릇입니다.


  지난날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임금과 신하는 ‘어떤 말’로 ‘국무회의’ 같은 자리를 마련했을까요? 지난날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임금과 신하는 ‘한국말’을 썼을까요, 아니면 중국말을 썼을까요? 지난날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임금과 신하뿐 아니라 양반은, 그무렵 이 나라에서 99%를 웃돌던 여느 시골자락 흙지기가 수수하게 쓰던 ‘한국말’로 정치나 정책을 펼쳤을까요, 아니면 중국말로 말과 글을 썼을까요?


  오늘날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대통령과 공무원과 지식인과 학자와 교사는 어떤 말을 쓰는가요? 교과서에 얽매인 말을 쓰는가요?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쓰는가요? 높고 낮은 신분이나 계급이라는 울타리를 걷어내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한국말’을 여느 사람 눈높이로 수수하거나 투박하게 쓰는가요?


  한자말을 쓰든 안 쓰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영어를 쓰든 안 쓰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토박이말을 잘 캐내든 말든 놀랍지 않습니다. 언제나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말’을 해야 합니다. 언제나 사람으로서 ‘사랑을 밝히는 사람다운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사람으로서 ‘이웃과 동무를 아끼는 사랑을 밝히는 사람다운 말’을 날마다 새롭게 배워서 아이한테 물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4347.12.23.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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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처럼 2015-01-31 01:57   좋아요 0 | URL
사람다운 말, 맞습니다. 함께 사는 아름다운 말. 또 배우고 갑니다.

숲노래 2015-01-31 09:58   좋아요 1 | URL
사랑스러우면서 평화로운 말이란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람이 되는 말이로구나 하고 느껴요

민들레처럼 2015-01-31 11:23   좋아요 0 | URL
이 글과는 상관이 없는데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아내를 부르는 말이 무엇인가요? 주로 저희 집사람은 여보, 저는 당신 이렇게 부르는데. 부부 사이는 평등하다고 해서 임자, 가시버시..이런 말들이 있던데 어떻게 부르는게 제일 좋을까요?

숲노래 2015-01-31 11:41   좋아요 1 | URL
http://blog.aladin.co.kr/hbooks/7343434

이 주소에 쓴 글이 있습니다.
어떤 이름을 쓰든 `말하는 사람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져요.
아무리 좋다고 하는 이름을 쓰더라도
말하는 사람 마음이 곱지 않으면
고운 말은 태어나지 못해요.

예부터 시골에서는 `이녁`이나 `임자` 같은 말을 썼어요.
어느 한쪽 성별을 가리키는 이름은 한국말에 없어요.
둘을 아우르는 이름만 있답니다~

`여보`는 ˝여 보시오˝ 하고 부르는 말일 뿐이랍니다~
 

경기문화재단에서 두 달에 한 차례 내는 문화잡지 2015년 1~2월호에 싣는 글입니다.


..


말넋 45. ‘눈결’에 깃든 이야기를 읽는다

― 함께 놀며 지은 말을 물려준다



  시를 쓰던 김남주 님이 있습니다. 1994년에 숨을 거두었는데, 시골에서 흙을 일구면서 살고 싶다는 꿈을 키우다가 몸이 너무 나빠서 쉰 살이 안 되어 죽었습니다. 이녁 동생은 시인이 나고 자란 전남 해남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면서 산다 하고, 《식량 주권 빼앗겨도 좋은가?》(철수와영희,2014)라는 조그마한 책에 이녁 동생 목소리가 전남 해남 고장말로 찬찬히 흐릅니다. 25쪽을 보니 “우리 논 옆으로 조그마한 똘(실개천)이 항시 흘러요.” 같은 말마디가 나옵니다.


  책에서는 묶음표를 치고 ‘실개천’이라 덧붙입니다. ‘실개천’과 같은 뜻이라는 소리일 테지요. 한국말사전을 보면 ‘개천(-川)’은 “개골창 물이 흘러 나가도록 길게 판 내”라 하고, ‘개골창’은 “수챗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이라 해요. 그러니, ‘개천’은 “수챗물이 흐르는 도랑이 이어지도록 판 물줄기” 를 가리켜요. 요즈음은 도시가 커지면서 개천이나 개골창을 보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이밖에 다른 물줄기를 구경하기도 퍽 어려워요. 이를테면, 시내와 내와 도랑과 개울과 가람과 개를 보기란 아주 어렵지요.


  ‘시내’는 “조그마한 내”를 가리킵니다. ‘내’는 “‘시내’보다 크지만 ‘가람(강)’보다는 작은 물줄기”를 가리킵니다. ‘가람(강)’은 “넓고 크게 흐르는 물줄기”를 가리키고, ‘개’는 “가람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가리켜요. ‘도랑’은 “매우 작고 좁은 개울”을 가리키고, ‘개울’은 “골짜기나 들에 흐르는 작은 물줄기”를 가리키지요.


  도랑은 시내가 되고, 시내는 내가 되며, 내는 가람이 됩니다. 가람은 개를 거쳐 바다로 갑니다. 물줄기는 흐릅니다. 골골샅샅 다른 물줄기가 흐릅니다. 예부터 물을 아주 알뜰히 여기고 고이 건사했기에 물줄기를 가리키는 이름이 여러 가지입니다. 조그마한 개울은 ‘실개울’이고, 논에는 ‘논도랑’이 있습니다.


  겨울에는 냇물이 꽁꽁 얼어요. 실개울도 개울도 도랑도 얼어붙습니다. 겨울논에 물을 대면 논에는 얼음판이 널찍하게 생깁니다. 추운 고장에서는 겨울볕에도 ‘논얼음판’이 꺼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얼음이 언 곳을 찾아서 발을 지치느라 부산합니다. 신발 바닥에 쇳날을 박지 않아도 얼음을 슬슬 지치면서 즐겁습니다. 솜씨 좋은 언니나 오빠가 있으면 나무를 만져서 썰매를 만듭니다. 썰매에는 한 사람이 탈 수 있고 둘이 탈 수 있습니다. 서로 갈마들면서 놀 수 있습니다.


  도시에는 논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개울도 실개울도 시냇물도 냇물도 없습니다. 사람이 헤엄치기 어려운 ‘가람(강)’이 흐르기는 하지만, 겨울에 이곳에서 얼음을 지치며 놀기에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도시에서도 아이들이 골목 한쪽을 놀이터로 삼아서 비료 푸대를 타든 맨몸으로든 눈놀이를 했어요. 눈을 뭉쳐 눈싸움을 하고, 눈을 굴려 눈사람을 빚으며, 눈길을 타며 눈썰매 놀이를 즐깁니다. 그런데, 이제는 ‘눈놀이’가 아니에요. 요새는 도시에서 따로 시설을 지은 ‘눈썰매장(-場)’이라든지 ‘스노우파크(snowpark)’를 찾아간다고 합니다. 노는 곳이기에 ‘놀이터’이듯 눈썰매를 탄다면 ‘눈썰매터’여야 할 텐데, 이처럼 이름을 짓지 못합니다. 겨울에 눈놀이를 즐기는 곳이라면 ‘눈놀이터’여야 할 테지만, 이렇게 이름을 짓지 않고 ‘스노우파크’가 되어요. 그러고 보면, 도시에 있는 시골에서는 여름에 ‘여름놀이’나 ‘물놀이’라 하지 않고 ‘워터파크(waterpark)’라 해요.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라는 책을 읽으니, 33쪽에 “아이들에게는 긴장을 풀고 숨을 쉴 여유가 필요하다. 놀 시간이 필요하다.”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참말 아이들은 놀 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쉴 틈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마음껏 뛰놀 틈이 있어야 하고, 어른들은 마음껏 쉴 틈이 있어야 합니다. 따로 돈을 내고 들어가야 하는 시설에서가 아니라, 집이나 일터나 학교 둘레에서 넉넉히 뛰놀거나 쉴 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을 돌아보면, 마을이나 동네마다 있던 커다란 나무그늘이 여름날 놀이터요 쉼터입니다. 시내와 개울과 도랑도 놀이터이면서 쉼터입니다. 어른은 시내와 개울과 도랑에서 물을 긷거나 빨래를 하면서 일하지만, 일하면서도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고, 아이들은 어버이 곁을 졸랑졸랑 따라다니면서 물놀이를 하고 까르르 웃습니다.


  요즈음에는 어른도 아이도 ‘개울’이라는 낱말이나 ‘눈싸움’이라는 낱말이나 ‘시냇물’이라는 낱말이나 ‘눈사람’이라는 낱말을 입에 굴리기 어렵습니다. 사진이나 영상이나 그림으로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으나, 막상 맨눈으로는 삶자리 둘레에서 못 보거든요.


  우리가 늘 쓰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터에서 늘 마주하고 만나며 부대끼는 말입니다. 책으로만 읽은 말은 머리에 안 남습니다. 살면서 몸으로 겪는 말이 머리에 남습니다. 책에서만 본 꽃은 냄새나 빛깔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들이나 숲이나 밭에서 만나는 꽃을 살그마니 쓰다듬을 적에 꽃내음과 꽃빛을 제대로 압니다. 맨눈으로 보고 맨손으로 만지며 맨몸으로 마주하는 꽃은 오래도록 이름을 떠올려요. 개울을 집 둘레에서 못 보고 사전이나 도감에서만 본다면, 동네에서 골목을 자동차한테 빼앗겨 동무들과 눈싸움을 하지 못하고, 동무들 모두 학원에 다니느라 바빠 어쩌다가 스노우파크에 나들이를 간다면, 겨울과 눈과 썰매와 고드름을 제대로 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얼굴이나 손바닥으로 받으면 차가운 느낌이 상큼할 뿐 아니라, 눈이 녹아서 물방울이 되기 앞서 어여쁜 무늬(결정)를 볼 수 있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내려온 ‘눈결’이나 ‘눈무늬’라 할 텐데, 지난날에도 오늘날에도 앞날에도 이 눈결이나 눈무늬는 이어가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먼 옛날부터 수많은 어버이와 아이가 어우러지면서 지은 낱말입니다. 우리는 옛 어버이와 아이한테서 ‘개울’과 ‘썰매’와 ‘놀이터’라는 낱말을 물려받았는데, 앞으로 어떤 낱말을 뒷사람한테 물려줄 수 있을까요. 4347.12.1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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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2. 한국말이 흘러온 길

― 싱그러운 말과 책에 담긴 글



  시인 신현림 님은 아이들과 함께 읽을 아름답고 즐거운 동시를 살피다가 어느새 스스로 동시를 씁니다. 누구보다 이녁 딸하고 함께 읽으면서 즐길 이야기요 동시이기에, 스스로 써서 나눌 때에 한결 환하며 사랑스러우리라 느낍니다. 《초코파이 자전거》(비룡소 펴냄,2007)라는 동시집을 읽습니다. 맨 처음 실린 〈초코파이 자전거〉를 보면 “초코파이 자전거를 탔더니 / 바람이 야금야금 / 다람쥐가 살금살금 / 까치가 조금조금 / 고양이가 슬금슬금 먹어서”와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봄바람〉을 읽으면 “봄바람에 / 내 머리카락 살랑살랑 / 엄마 치마 하늘하늘 // 봄바람에 / 벚꽃잎 화르르르 // 어느새 / 봄이 활짝 피었네”와 같은 이야기가 흘러요. 〈청소〉를 읽으면 “쓱쓱쓱 빗자루로 쓸고 / 싹싹싹 걸레로 닦고 / 쓱쓱싹싹 청소를 했네 // 어느새 방 안은 / 환한 보름달”과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 동시집에 실은 다른 동시를 읽어도 이처럼 낱말이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지면서 구슬처럼 또르르르 구릅니다. 시나 동시이기에 말구슬이 곱게 구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말을 처음 배울 아이들과 나눌 사랑을 마음속으로 곱게 그렸기에, 시나 동시에 고운 말이 그득그득 깃들 수 있다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어버이와 둘레 어른한테서 말을 물려받습니다. 어버이와 둘레 어른이 여느 때에 쓰는 말이 곧 아이들이 쓰는 말이 됩니다. 어버이와 둘레 어른이 여느 때에 아름답거나 사랑스레 말을 하며 살면, 아이들이 여느 때에 쓰는 말이 아름답거나 사랑스럽습니다. 어버이와 둘레 어른이 여느 때에 깊이 살피지 않거나 널리 돌아보지 않으면서 거칠거나 뒤틀린 말을 아무렇게나 쓰며 살면, 아이들은 거칠거나 뒤틀린 말에 아무렇게나 젖어듭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거의 모두 학교를 다닙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가장 오래 보냅니다. 학교에서 교사가 들려주는 말을 가장 오래 듣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를 가장 오래 들여다봅니다. 이리하여 요즈음 아이들은 ‘교사 말투’와 ‘교과서 말투’에 젖어들어서 이러한 말투대로 저희 말투를 삼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학교에서 어른(교사)들은 어떤 말을 쓰는가를 헤아려야 합니다. 오늘날 초·중·고등학교에서 쓰는 교과서에는 어떤 말이 실렸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아이들은 이밖에 텔레비전과 인터넷에서 흐르는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쓰는 말이 거칠거나 뒤틀렸다고 한다면, 아이들 탓이 아니라, 우리 어른들이 이룬 사회와 교육이 거칠거나 뒤틀린 탓입니다. 아이들한테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숨결을 보여주거나 들려주거나 알려주지 못한 탓이지요.


  한국말이 흘러온 길을 생각합니다. 한국말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이 쓴 말입니다. 정부에서 내놓은 통계를 보면 2013년까지 도시에서 사는 사람이 92%가 넘는다고 합니다. 통계에 가려진 숫자를 본다면, 그러니까 주민등록은 시골에 두고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사람 숫자까지 헤아린다면 도시에서 사는 사람은 99%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시골에서는 고등학교만 마치면 거의 모두 도시 학교로 빠져나가거나 도시에 있는 회사에 일자리를 얻는데, 초·중·고등학교를 아예 도시에 자취방을 얻어 다니는 아이가 무척 많습니다.


  1960년에는 시골사람이 60%였어요. 더 예전에는 시골사람이 90%를 넘었어요. 조선이나 고려 같은 예전에는 시골사람이 99%라고 할 수 있어요. 일제강점기나 개화기 무렵까지 이 나라를 이룬 거의 모든 사람은 시골사람이었습니다.


  지난날 시골에서는 글을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았고 책을 읽거나 읽히지 않았습니다. 시골사람은 한자나 한문을 안 썼고, 이런 글은 알지 않았습니다. 한자나 한문을 쓴 사람은 일제강점기나 개화기 무렵까지 1%가 될까 말까 했다고 할 만합니다. 조선이나 고려 무렵이라면 한자나 한문을 알던 사람은 훨씬 적었겠지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쓴 말은 늘 ‘한국말’이었고, 집권자나 몇몇 지식 있는 사람이 쓴 말만 ‘한자하고 얽힌’ 셈입니다. 이런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도 엇비슷합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시골에서 살며 흙을 만진 사람들은 ‘글(한자나 한문)’을 알지 않았고 배우지 않았습니다. 한·중·일 세 나라에서 ‘한자로 이룬 문화’를 사람들이 두루 마주한 지는 아직 백 해가 안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안 되는 집권자와 몇몇 지식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입으로 나누는 말’로 삶과 노래와 이야기와 마을을 지으며 아이를 낳아 돌보고 흙을 일구었습니다.


  곰곰이 따지면,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한자 문화권’이 아닙니다. 정치 권력을 누리거나 지식 권력을 누린 몇몇 사람만 쓰던 한자나 한문은 ‘문화권’이 아닌 ‘권력’이었을 뿐입니다.


  이 같은 대목을 살핀다면, 오늘날 우리가 즐겁게 쓰면서 아름답게 가꿀 ‘말’이란 무엇인지 또렷하게 깨달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싱그러운 말이란 무엇이고, 책에 담긴 글이란 무엇인지 잘 돌아보아야지 싶습니다.


  말이란, 그냥 쓰는 말이 아닙니다. 말이란, 우리 생각을 담아서 이웃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음고리이자 징검돌입니다. 말이란, 집과 밥과 옷을 짓는 삶에서 밑바탕을 이룹니다. 말이란, 언제나 노래가 되고 이야기꽃으로 피어납니다. 먼먼 옛날부터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글(한자)과 책을 모르던 사람들이 스스로 노래를 짓고 모든 삶을 입말로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 곁에서 삶을 노래로 듣고 이야기로 배우면서 ‘몸으로 익히는 삶말’을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게 익혀 새롭게 하루를 지었습니다. 풀이름 하나부터 씨앗을 심어 거두는 모든 얼거리를 몸으로 함께 일하고 놀면서 입말로 배웠어요.


  흐르고 흐르는 말입니다. 냇물처럼 흐르는 말입니다. 구름이 모여 비를 뿌리고, 빗물은 숲과 들에 깃들어 골짝물이나 시냇물이나 샘물이 됩니다. 우리는 물을 즐겁게 마시면서 말도 즐겁게 가꾸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냇물이나 샘물이나 빗물이 아닌, 댐에 가둔 수돗물을 마십니다. 숲과 들하고는 동떨어진 도시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지냅니다. 사회가 바뀌었으니 말도 바뀔 만할 텐데, 그러면 한국말은 이제 어디로 어떻게 흘러야 할까 궁금합니다. 아이들한테 노래처럼 들려주는 구슬 같은 동시는, 아이와 함께 어른도 기쁘게 누릴 삶말은, 참으로 어디에 있을까요. 4347.9.2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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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군포시에서 내는 문화잡지 가을호에 실은 글입니다.


..


말넋 40. 삶을 비추는 거울

― 가을에 부는 바람과



  제비는 팔월 끝무렵에 한국을 떠납니다. 삼월 끝무렵부터 사월 첫무렵에 한국으로 날아오는 제비는 한국에서 옛집을 손질해서 알을 낳고 새끼를 돌보다가 칠월 첫무렵에 새끼들한테 날갯짓을 가르치고는 팔월 끝무렵에 다시 태평양을 가로지르기까지 바지런히 날개힘을 키웁니다. 나는 시골에서 아이들과 살림을 가꾸기에 언제나 제비를 바라보면서 제비 한살이를 읽습니다. 해마다 몇 월 몇 일에 제비가 돌아오는지 읽고, 언제쯤 알을 낳으며, 알을 낳은 뒤로는 수컷 제비가 얼마나 자주 제비집을 들락거리고, 알에서 새끼가 깐 뒤로는 암수 제비가 얼마나 자주 먹이를 물어다 나르는지를 가만히 지켜봅니다. 날마다 제비집을 살피면서 새끼가 얼마나 자라는가를 헤아립니다. 이윽고 제비가 둥지를 떠나는 날을 돌아보고, 마을 너른 들에 제비가 무리를 지어 마지막 춤사위를 벌이다가 다 같이 태평양으로 힘차게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누군가 제비 한살이를 좇아서 지은 책을 읽어도 제비 한살이를 알 수 있습니다. 제비 한살이를 책으로 엮자면 퍽 여러 해 동안 제비를 지켜보았을 테니, 책만 보아도 여러모로 도움이 됩니다. 박쥐라든지 소쩍새라든지 꾀꼬리 한살이 이야기도 누군가 알뜰히 엮은 책을 장만해서 읽으면 고맙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알 수 있어요. 우리가 곁에 두는 한국말사전도 이와 같지요. 뜻있는 여러 사람이 오랫동안 땀을 흘려서 엮은 사전을 뒤적이면서 말을 새롭게 살펴서 익힐 수 있으니 고맙습니다.


  아이들이 어버이 곁에서 모든 삶을 배웁니다. 아이들은 책으로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말을 책이 아닌 어머니와 아버지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읊는 말을 귀여겨들으면서 배웁니다. 아이들 몸짓과 말짓은 모두 어버이한테서 삶으로 물려받습니다. 어버이는 학교나 학원이나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이 아닌 삶을 가르칩니다.


  가위질을 책으로 배우지 않습니다. 수저질을 책으로 익히지 않습니다. 고무줄놀이나 소꿉놀이를 책으로 배우는 아이는 없습니다. 자전거를 타거나 뜀박질을 할 적에 책으로 익히는 아이는 없습니다. 요즈음은 요리학원이나 요리책이 많기는 합니다만, 먼먼 옛날부터 밥짓기는 늘 삶으로 물려주고 물려받았습니다.


  우리는 한국말사전을 아주 쉽게 넘길 수 있습니다. 종이책이 아니어도 인터넷이나 손전화 기계에서 찾아보면 말풀이를 곧장 알아볼 수 있습니다. 놀라운 문명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종이사전뿐 아니라 인터넷사전이 가까이 있으면서도 정작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기 일쑤이고, 슬기롭게 못 쓰곤 합니다.


  아주 쉽게 말풀이를 찾아볼 수 있는데 왜 오늘날 사람들은 한국말을 더 모르고, 한국말을 더 잘못 쓰며, 일본 말투라든지 번역 말투에 왜 자꾸 길들거나 물들기만 할까요? 대학 교육 받는 사람이 늘고, 요즈음은 초·중·고등학교를 거의 모든 사람이 꼬박꼬박 다니는데, 왜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아름답게 못 쓰고 참다웁게 못 쓰며 사랑스럽게 못 쓸까요?


  예부터 말을 ‘한국말사전’이나 ‘책’이나 ‘교재’로 가르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예부터 말은 어버이가 아이한테 삶으로 가르쳤습니다. 게다가 옛날 사람들은 사전도 책도 교재도 없었지만, 아주 많은 말을 아주 쉽고 빠르며 즐겁게 아이한테 물려주었어요. 오늘날 사람들은 학교를 오래 다니고 사전도 책도 교재도 많지만, 정작 한국말을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됩니다. 오늘날 한국말사전에 담은 낱말은 모두 옛날 사람들이 ‘머리에 담아서 언제 어디에서나 홀가분하게 흔히 쓰던 말’입니다. 지식이 아닌 말이었고, 정보가 아닌 말이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한국말사전이나 도감이 없었어도 풀과 물고기와 나무와 꽃과 새와 짐승과 온갖 이름을 다 알았어요. 이름을 다 알 뿐 아니라 쓰임새나 한살이나 빛깔과 무늬를 모두 알았어요.


  오늘날 우리들은 ‘베틀’이나 ‘절구’나 ‘물레’라는 이름을 압니다. 그러나 베틀을 어떻게 만들고, 베틀로 어떻게 천을 짜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기둥’이나 ‘처마’나 ‘들보’라는 낱말을 압니다. 그러나 어떤 나무를 어떻게 베어 어떻게 손질할 때에 기둥이 되고 처마가 되며 들보가 되는 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스스로 나무를 베어 손질한 뒤 집을 지을 줄 모릅니다.


  바람이 붑니다. 사월에서 오월로 접어드는 바람빛이 다르고, 칠월에서 팔월로 넘어가는 바람결이 다릅니다. 오월에서 유월로 넘어설 때 바람맛이 다르며, 팔월에서 구월로 들어서는 바람내음이 다릅니다. 아니, 하루하루 바람노래가 달라요.


  선선하게 부는 바람을 쐽니다. 얼마 앞서까지는 후끈후끈한 바람을 쐬었다면, 이제는 보들보들 산뜻한 바람을 쐽니다. 우리 식구는 유월부터 칠월을 지나 팔월까지 마을 골짜기로 나들이를 다닙니다. 자전거를 몰거나 두 다리로 걸어서 골짜기로 가요. 우리 식구는 이를 ‘골짝마실’이라 합니다. 골짝마실을 하면 골짝물에 몸을 담급니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보고, 푸르게 우거진 숲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듣습니다. 물소리는 언제나 물노래입니다. 냇물노래이고 골짝물노래입니다.


  우리 마을 뒤쪽을 감싸는 멧자락에 있는 골짜기는 아직 깨끗합니다. 다슬기와 가재와 도룡뇽과 송사리가 함께 삽니다. 이곳에는 아직 개똥벌레가 밤에 춤을 추리라 생각합니다. 군청에서 시멘트로 덮은 데가 있으나, 흙바닥이 그대로인 곳이 있으니, 개똥벌레도 다른 숲짐승과 숲벌레도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거나 알을 낳을 만합니다. 흙이 있을 때에 비로소 숲이 이루어집니다.


  바람이 철을 알려줍니다. 바람은 철과 달과 날을 알려줍니다. 바람을 읽고 구름을 읽으면 하루와 한 해를 내다볼 수 있습니다. 예부터 지구별 모든 겨레는 숲과 바람과 해와 흙과 풀을 읽으면서 말을 짓고 넋을 가꾸면서 삶을 지었습니다. 어머니 품이란, 시골에서 흙을 가꾸는 포근한 손길로 아이를 사랑하는 넋입니다. 아이가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는 말이란, 푸르게 우거진 숲을 사랑하고 맑게 부는 바람을 누리는 즐거운 빛입니다. 삶을 아름답게 바라보면서 느끼고 찾을 때에 우리가 쓰는 말은 아름답게 거듭납니다. 삶을 사랑스레 가꾸고 나누는 하루를 새롭게 열 적에 우리가 쓰는 글은 살가이 짓는 웃음노래가 됩니다. 4347.8.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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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4-12-17 21:31   좋아요 0 | URL
군포시에서 문학잡지도 나오나요?

그건 그렇고 낱말은 알지만 그 쓰임새나 내용을 모른다는 것, 그래서 글은 읽었지만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것같습니다. 누구는 한자교육을 안해서라고 말하던데, 실은 삶에서, 생활에서 그것들을 보고 배울 일이 없어서 그런거겠지요.

숲노래 2014-12-18 07:31   좋아요 0 | URL
올해에 네 차례 우리말 이야기를 실었는데...
막상 이 글을 올리려니
그 책 이름이 생각이 안 나서... ^^;;;;
`군포시 사외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책이 아주 멋지게 나온답니다.

한자말을 잔뜩 쓴 논문 같은 인문책을 알아듣자면 한자를 가르쳐야 할 테지요 ^^
그러나, 지식으로는 다 `읽`어도 `알`지는 못하기 마련이에요.
하양물감 님 말씀이 옳습니다 ^^
 

말넋 44. 말은 흐르지만 사회는 갇혀서

― ‘한국말’은 어디에서 있는가



  일본사람 사노 요코 님이 쓴 글을 윤성원 님이 한국말로 옮긴 《나의 엄마 시즈코상》(이레,2010)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106쪽에서 “남동생은 상처받은 마음을 동물을 통해 치유하려 했다. 사랑새를 애지중지하며 정성껏 돌보았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이 글월에서 ‘사랑새’라는 이름을 보고 살짝 놀랍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잉꼬(いんこ)’라는 일본말을 쓸 뿐, ‘사랑새’라는 한국말을 모르기 일쑤입니다. ‘잉꼬’라 말하면서, 이 이름이 일본말인 줄 알아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일본사람이 가리키는 이름 말고 한국말로 예부터 가리키던 이름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한국사람이 예부터 가리키던 한국말을 배우거나 들은 사람은 어느 만큼 될까요?


  그런데, ‘사랑새’라는 이름을 잘 살려서 옮긴 책은 “우리 엄마 시즈코”가 아닌 “나의 엄마 시즈코상”입니다. 일본사람은 일본말로 ‘私の’로 적었을 테지만, 이를 한국말로 제대로 옮기자면 “내 엄마”라 하든 “우리 어머니”라 해야 올바릅니다. 왜냐하면, ‘나의’는 한국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내’와 ‘너·네’가 한국말입니다. ‘나의·너의’는 모두 잘못 쓰는 말입니다. “동물을 통(通)해 치유(治癒)하려 했다”도 한국말이 아닙니다. 겉모양은 한글이지만 알맹이는 일본 말투입니다. 한국말로 제대로 적자면 “동물로 다스리려 했다”나 “짐승을 곁에 두어 달래려 했다”로 고쳐써야 합니다. “애지중지(愛之重之)하며 정성(精誠)껏 돌보았다”는 겹말입니다. ‘애지중지’와 ‘정성껏’은 같은 뜻입니다. 무엇보다 ‘애지중지’이든 ‘정성껏’이든 한국말로 다시 옮기면 ‘살뜰히’나 ‘알뜰히’입니다. 두 가지 말을 함께 쓰고 싶다면, “사랑새를 알뜰살뜰 돌보았다”처럼 한국말로 제대로 적으면 됩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어떻게 배울까요. 학교에서는 한국말을 어떻게 가르칠까요. 집에서는 어버이가 아이한테 말을 어떻게 알려주거나 물려줄까요.


  학교는 ‘배우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학교는 교과서 지식만 배우는 곳이 되기 일쑤입니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으면 배울 수 없기 일쑤입니다. 더욱이, 교과서는 대학입시에 얽매여 대학입시 지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학교를 다니면서 배운다고 한다면 ‘대학입시 지식을 배우’는 셈입니다. 삶을 배우거나 사랑을 배우거나 꿈을 배우지 않습니다. 교과서 지식을 배울 뿐이니,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거나 슬기롭게 배우지 못합니다.


  얼마 앞서 전남 고흥 도화면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글쓰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학교 2학년 푸름이가 쓴 글에 “타인을 배려하라” 같은 말마디가 있어서, 이 말마디를 칠판에 적고 다른 푸름이한테 “타인을 배려하라”가 무슨 뜻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시금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가 무슨 뜻인가 하고 물으니, 아무도 아무 말을 못합니다.


  왜 푸름이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가 무슨 뜻인지 아무 말을 못할까요? 아주 마땅합니다만,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 같은 말은 이 말을 듣는 자리에서 곧바로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다섯 살 어린이도 알아들을 말이요, 학교 문턱을 못 밟은 사람도 모두 알 수 있는 말입니다. 이와 달리 “타인을 배려하라” 같은 말마디는 ‘한국말로 다시 풀어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교장선생님 훈화라든지 지식인이 쓰는 글에 ‘타인’이나 ‘배려’ 같은 말마디가 흔히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곧바로 느끼거나 알 만한 말이 아닌 셈입니다. ‘다른 한국말’로 옮기거나 ‘한국말로 제대로’ 거듭 풀어야 하는 말인 셈입니다.


  한자말은 한자말일 뿐, 한국말이 아닙니다. 영어는 영어일 뿐, 한국말이 아닙니다. 일본말은 일본말일 뿐, 한국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사람은 한국말이 무엇인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하고 배우지도 못하면서 지냅니다. 이러면서 한자말과 영어와 일본말이 뒤죽박죽 파고듭니다.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얼거리가 퍽 오랫동안 뿌리를 내립니다. 일제강점기가 있었고 해방을 지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거의 백 해 동안 ‘시름시름 앓는 한국말’입니다. 이리하여 이제는 ‘잘못 쓰는 낱말이나 말투’가 아주 많은 사람들 입과 손에 들러붙습니다. 틀림없이 잘못 쓰는 말이지만, ‘잘못인 줄 못 느끼’기도 하고, ‘잘못이라고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매무새가 없’기도 합니다. 잘못 깃든 버릇대로 내처 달립니다. 잘못 물든 버릇을 바로잡아서 슬기롭고 똑똑하며 아름답게 거듭나려는 매무새를 찾아보기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오덕 님은 지난날 《우리 글 바로쓰기》 같은 책을 선보였습니다. 이 책은 ‘이대로만 써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못 쓰는 말이 이렇게 많이 있다’고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러니, 하나하나 찬찬히 짚으면서 우리 스스로 한국말을 제대로 바라보아서 제대로 깨닫고 제대로 다스릴 줄 알아야 ‘말과 넋과 삶이 함께 살아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사람은 이녁 말마디를 하나부터 열까지 하루아침에 모두 뜯어고치거나 바로잡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녁 말마디를 날마다 한 가지씩 가다듬어서 찬찬히 바로잡거나 고칩니다. 어떤 사람은 이녁 말마디를 하나도 안 고치고 하나도 안 다듬습니다.


  말은 흐릅니다. 말은 흐르니 말은 언제나 새롭게 거듭납니다. 고인 말이란 없습니다. 갇힌 말도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 사회는 얼마나 잘 흐르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학교와 사회와 정치와 문화는 부드럽게 잘 흐르는가요?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게 흐르는가요? 말은 사회를 고스란히 담습니다. 한국말이 한국말다움을 잃는다면, 한국 사회가 ‘한국 사회다움’을 잃기 때문입니다. 한국말이 ‘한자말과 영어와 일본말이 어지럽게 뒤섞인 채 시름시름 앓는다’면 한국 사회가 제자리를 못 찾고 이러저리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말은 어디에 있을까요? 4347.1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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