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55. 아이들을 입시지옥 굴레에 가두지 말자

― 초등학생한테 한자를 가르치는 속뜻



  아이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요? 아이는 놀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아이가 신나게 놀 만한 터전을 마련해 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마음껏 뛰놀지 못합니다. 시골에서는 아이가 사라졌으며, 도시에서는 층간소음 때문에 발조차 못 구르기 일쑤입니다. 학교에 간다 하더라도 수업 시간에 꼼짝을 해서는 안 되고, 쉬는 동안에는 교실이나 골마루에서 달리지 말라 합니다.


  놀고 싶어도 놀지 못하는 오늘날 아이들은 학교를 마친 뒤 학원버스에 실려 학원에 가야 합니다. 이 아이들은 중학교로 접어들기 무섭게 입시지옥에 휘둘리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일찌감치 ‘예비 입시생’으로 여기는 흐름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한국에서 어린이는 놀이를 모르는 채 ‘예비 대학입시생’이 되어야 하는 교육 얼거리입니다. 이런 마당에, 나라에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함께 쓰겠다고 밝힙니다. 나라에서는 어린이를 걱정하려는 듯이 이런 일을 벌인다고 하지만, 이 나라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워야 하느라 짐이 무겁고, 온갖 학원을 빙글빙글 돌아야 해서 어깨가 처지며, 이러면서도 놀 틈이 없어서 힘겹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어른은 아이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할까요? 아이한테는 아무런 권리(인권)가 없을까요?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넣느냐 마느냐 하는 이야기는 맨 먼저 어린이한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어린이가 무엇을 바라는지부터 귀여겨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교과서를 제대로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섞어서 써야 한다면, 이 교과서가 제대로 된 교과서인지, 어린이 눈높이에 맞는 교과서인지 따져야 합니다. 초등학교는 아이들이 한국말을 슬기롭게 제대로 배워서 생각을 북돋우고 마음을 가꾸는 길을 배우는 배움터입니다. 한국말을 슬기롭게 안 가르치거나 제대로 못 가르치면서 어설프게 한자 몇 가지를 아이들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하지 않는가 하고 돌아봐야 합니다.


  한국에서 가르치는 한자는 중국과 일본과 대만하고 달라, 이 한자를 가르친들 도움이 될 턱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과 대만하고 사귀는 자리에서는 영어를 쓰면 되지, 굳이 한자나 중국말까지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중국사람이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사람도 중국말을 배우면 서로 고맙겠지만, 한국사람이 중국말과 중국 글자를 일부러 배울 까닭은 없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넣으려는 속뜻도 짚어야 합니다. 교과서에 한자가 나오면 시험문제에도 한자가 나올 테고, 아이들은 이런 시험공부를 더 해야 합니다. 그만큼 초등학교에서 한국말을 제대로 가르칠 겨를이 줄어들고, 아이들은 한국말로 생각을 가꾸거나 북돋우는 흐름을 놓치거나 빼앗깁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새로운 생각을 가꾸거나 북돋우지 못하고 입시공부만 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아이들한테서 ‘생각힘(창의력·창조력)’이 줄어들거나 사라집니다. 아이들은 중·고등학교에 앞서 초등학교부터 ‘입시 노예’가 됩니다.


  한글을 지킨다는 뜻에 앞서, 아이들이 사람답게 자라는 길을 지키고 살려야 합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집어넣겠다는 정책은 아이들을 죽이거나 더 괴롭히는 짓이 됩니다.


  신나게 뛰놀고 아름답게 생각을 키워서 사랑스러운 꿈을 이루는 길로 나아갈 때에, 아이들은 튼튼하고 씩씩한 어른으로 우뚝 섭니다. 아이들은 ‘인적 자원’도 ‘미래 산업전사’도 아닙니다. 아이들은 아름다운 숨결입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으면서 착하고 참된 마음을 기를 숨결입니다. 우리 어른은, 아이가 한국말을 슬기롭게 제대로 배워서 생각힘을 키우도록 도와야 합니다. 흔들리는 한국말부터 바로세우고 일으켜서 아이들 어깨를 가볍게 할 노릇입니다. 한자 교육은 ‘참고서 업자’한테나 반가운 이야기일 테지요. 4348.3.31.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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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51. 생각을 그려서 보이는 말

― ‘내가 쓸’ 말과 ‘떠도는’ 말



  국립국어원에서는 ‘감사(感謝)합니다’라는 낱말도 ‘고맙습니다’라는 낱말과 함께 쓸 만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럴 수도 있으리라 느끼지만, 굳이 두 가지 말을 한국사람이 써야 할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사람은 한국말 ‘고맙습니다’와 한자말 ‘感謝’에다가 영어 ‘thank you’까지 쓰니까요.


  지구별이 서로 한식구라는 생각이라면, 일본말 ‘ありがとう’나 네덜란드말 ‘Dank je’를 쓰자고 할 수 있어요. 인도말과 베트남말과 터키말과 핀란드말도 함께 쓰자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한국사람이 한국에서 함께 사는 이웃과 주고받을 한국말을 알려주거나 가르치는 자리라 한다면, 한국말을 슬기로우면서 곱고 참답게 쓰는 길을 밝혀야지 싶습니다.


  한자말 ‘感謝’는 ‘고마움’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말 ‘고마움’을 한자로 옮기면 ‘感謝’가 되는 셈입니다. ‘고맙습니다’를 영어로 옮기면 ‘땡큐’가 되는 얼거리와 같습니다. 그러면 ‘고맙다(고마-)’는 무엇을 뜻할까요? 이 낱말은 “이녁(그대)이 나한테 넓거나 너그럽게 베푼 마음을 흐뭇하게 여긴다”를 뜻합니다. 이리하여, ‘고맙다’나 ‘고맙네’나 ‘고마워요’처럼 말할 적에는 으레 목을 가볍게 숙이거나 허리까지 깊이 숙입니다. 나한테 마음을 넉넉하게 쓴 그대(이녁) 마음이 몹시 반가우면서 흐뭇하니까요. ‘이녁(그대, 너, 자네)’ 자리에 있는 사람이 손아랫사람이거나 아이라 하더라도 으레 절을 하지요. ‘고맙다’라는 낱말은 이처럼 내 맞은편에 있는 사람을 높이거나 섬기거나 모시려는 기운을 담습니다. 그래서 예부터 ‘고맙다’라는 낱말은 무척 거룩한 느낌을 나타냈어요.


  ‘절’을 어느 자리에서 하는지 돌아봅니다. 차례나 제사를 지낼 적에 절을 합니다. 웃어른한테 절을 합니다. 설날에 절을 합니다. 절은 누구한테 하는가 하면 ‘어른(철이 든 사람)’한테 하고, ‘님(하느님, 신)’한테 합니다. 그러니까, ‘고맙다’라는 낱말 한 마디에는, 나보다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나한테 넓게 마음을 쓴 이웃사람과 생각이 트인 철이 든 어른을 마주하면서 ‘그대는 나한테 고운 님입니다’ 하고 밝히는 뜻을 담습니다.


  한자말 ‘감사’나 영어 ‘땡큐’나 일본말 ‘아리가또’에도 저마다 다른 뜻과 기운과 이야기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 다른 나라에서 다 다른 뜻과 기운과 이야기가 쌓였을 테지요. 그래서, 우리는 나라와 겨레마다 다른 뜻과 기운과 이야기를 서로 아낄 수 있으면 됩니다. 이러면서 우리가 스스로 오랜 나날에 걸쳐 손수 짓고 갈고닦은 삶을 돌아볼 수 있으면 돼요.


  내가 쓸 말은 언제나 내 삶과 넋을 곱고 참다우면서 슬기롭게 북돋울 수 있는 말이어야 합니다.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할 적에는 내 삶과 넋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거나 함부로 다루는 셈입니다. 말 한 마디를 찬찬히 가누고, 글 한 줄을 옳게 다스릴 때에, 삶과 넋도 찬찬히 가누면서 옳게 다스릴 줄 압니다. 그래서 유행처럼 퍼져서 한때 쓰이는 ‘안습·레알·멘붕’ 같은 말마디에는 어떤 새로움이나 놀라움이나 기쁨도 깃들지 않습니다. 그저 유행처럼 퍼져서 한때 쓰일 뿐입니다. 이런 말마디에는 어떠한 숨결이나 빛이나 넋도 스미지 않아요. ‘떠도는 말’은 그야말로 한동안 떠돌다가 어느새 잊힙니다. 떠도는 말은 처음 불거질 적에 갑작스레 널리 퍼져서 마치 이 말을 안 쓰면 안 되기라도 하는듯하기까지 하지만, 목숨줄이 아주 짧아요. 2010년대에 널리 떠도는 ‘대박’ 같은 말도 앞으로는 하루아침에 사라지리라 느낍니다.


  내가 쓸 말은 ‘삶을 밝히는 말’입니다. 내가 쓸 말은 ‘떠도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가꿀 하루는 ‘삶을 밝히는 일’이요, 내가 지을 하루는 ‘삶을 노래하는 일’입니다.


  양자역학을 풀어내어 노벨상을 받은 하이젠베르크 님이 쓴 《부분과 전체》(지식산업사,1982)라는 책을 읽다가 ‘참기쁨(79쪽)’, ‘참모습(95쪽)’, ‘참지식(166쪽)’ 같은 낱말을 봅니다. 앞머리 ‘참-’을 붙인 낱말을 가만히 혀에 얹어서 굴리면서 생각합니다. ‘참모습’이라는 낱말은 한국말사전에 나오지만, 다른 두 낱말은 한국말사전에 안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낱말도 즐겁게 쓸 만하고, 기쁘게 주고받을 만합니다. ‘기쁨’이라 할 때와 ‘참기쁨’이라 할 때에는 느낌과 뜻이 사뭇 달라요. ‘지식’이라 할 때하고 ‘참지식’이라 할 때에도 느낌과 뜻이 아주 다릅니다.


  ‘참-’이라는 낱말에 다른 말마디를 하나씩 더 붙여 봅니다. 참사랑, 참마음, 참노래, 참꿈, 참숲, 참말, 참글, 참책, 참하루, 참삶, 참일, 참놀이, 참사람, ……. 그러고 보면, ‘참꽃’과 ‘참나무’와 ‘참새’라는 낱말이 있어요. 사회나 정치나 교육도 ‘참사회·참정치·참교육’처럼 ‘참-’을 붙여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참다운 넋이 되어 새롭게 거듭나려 한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참-’을 붙일 만합니다. 이리하여, 나 스스로 착한 넋이 되어 새롭게 거듭나려 한다면 ‘착한-’을 앞에 붙일 만하고, 나 스스로 고운 넋이 되어 새롭게 거듭나려 한다면 ‘고운-’을 앞에 붙일 만합니다. ‘착한사랑·고운사랑’을 할 수 있으며, ‘착한일·고운일’을 할 수 있어요. ‘착한말·고운말’을 쓸 수 있으며, ‘착한삶·고운삶’을 가꿀 수 있습니다.


  생각을 그려서 보이는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려 하는가를 말로 담아서 보여줍니다. 남한테 보여주기보다 내가 나한테 보여줍니다. 내 생각은 늘 내 말로 드러납니다. 내가 가꾸려는 하루는 늘 내 말에 바람 한 줄기처럼 실려서 흐릅니다.


  내가 쓸 말은 내가 손수 삶을 짓도록 북돋우는 기운찬 말입니다. 내가 나눌 말은 내가 손수 삶을 가꾸면서 사랑과 꿈이 자라는 말입니다. 내가 들려줄 말은 내가 손수 아끼면서 보듬을 삶을 노래하는 말입니다.


  참말을 하면서 참하루를 엽니다. 참글을 쓰면서 참동무를 사귑니다. 참노래를 부르면서 참사랑이 퍼집니다. 참꽃을 바라보는 봄이요, 참나무가 베푸는 도토리를 줍는 가을입니다. 아름다운 삶을 아름다운 넋으로 바라보며 아름다운 말이 태어납니다. 4348.2.24.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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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56. 한자말은 영어처럼 외국말

― 한국말, 우리말, 토박이말, 시골말, 숲말



  ‘한자’로 지은 말을 제대로 살필 줄 아는 학자가 무척 드뭅니다. ‘알파벳’으로 지은 말은 으레 ‘외국말’인 줄 알면서, 막상 ‘한자’로 지은 말이 ‘외국말’인 줄 제대로 느끼거나 바라보는 지식인이 아주 드뭅니다.


  오늘날 한국을 보면, 한자로 지은 말이 퍽 널리 퍼졌습니다. 그러나, 막상 한국사람이 여느 때에 늘 쓰는 말 가운데 ‘한자로 지은 말’은 얼마 안 됩니다.


  한국말사전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일본사람이 지은 일본말사전을 베낀 탓에, 일본에서나 쓰던 한자말이 한국말사전에 아직 꽤 많이 나돕니다. 한국사람이 쓴 일도 쓸 일도 없는 한자말이 한국말사전에 뜬금없이 실리기 일쑤입니다. 게다가 조선 무렵에 정치권력자가 쓰던 ‘궁중 한자말’이 한국말사전에 지나치게 많이 실렸습니다.


  우리는 슬기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조선 무렵에 정치권력을 거머쥔 사람은 ‘인구 통계로 치면 몇 퍼센트’가 될까요? 1퍼센트는커녕 0.1퍼센트도 안 됩니다. 조선 무렵에 ‘중국글로 쓴 책’을 익히면서 지식인 노릇을 한 사람도 ‘인구 통계로 치면 0.1퍼센트는커녕 0.01퍼센트’조차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말사전을 보면 ‘중국글로 쓴 책’에 적힌 한자말이 그대로 나오고, ‘궁중 한자말’도 고스란히 나와요. 이와 달리, 조선 무렵에 이 땅에서 99.9퍼센트나 99.99퍼센트에 이르던 여느 사람이 쓰던 말은 모두 실리지 않습니다. 고장마다 다르게 쓰던 고장말을 한국말사전에 제대로 담지 않아요. 시골마다 다르게 살려서 쓰던 시골말을 한국말사전에 알차게 싣지 못합니다.


  ‘한국말’은 한국사람이 쓰는 말입니다. ‘토박이말’은 한국사람이 예부터 손수 지어서 쓰는 말입니다. ‘우리말’은 ‘토박이말’이나 ‘한국말’을 가리키기도 하고, 둘을 아우르기도 하는 이름입니다. ‘표준말’은 현대 사회나 정치나 문화를 펴면서 나라에서 한 가지 틀로 세운 말입니다. ‘시골말’은 손수 흙을 가꾸면서 삶을 스스로 짓는 사람이 쓰는 말입니다.


  ‘한자말’은 한자로 지은 말입니다. 그러면, 한자말은 어디에 들어갈 만할까요? 한자말은 어디에도 들어갈 만하지 않습니다. 한자말은 한국말도 토박이말도 우리말도 표준말도 시골말도 아닙니다. 한자말은 그저 ‘한자말’입니다. 알파벳으로 지은 ‘영어’는 어떠할까요? 영어도 한국말이 아니고 토박이말이 아니며 우리말이나 표준말이나 시골말이 아닙니다. 영어도 그저 ‘영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자말과 영어는 모두 ‘외국말’입니다.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외국)’에서 쓰는 말이 바로 한자말과 영어입니다.


  조선 무렵 궁중에서 한자말을 썼습니다. 그러면, 궁중에서는 왜 한자말을 썼을까요? 중국 정치를 섬기려는 뜻에서 한자말을 썼고, 조선 무렵 궁중에서는 ‘중국 한자말’을 썼습니다. 궁중에서 쓰던 ‘중국 한자말’을 한국 지식인도 받아들여서 썼습니다. 이들은 ‘중국 한자말’로 정치를 하고 사회를 지키며 문화를 폈습니다. 이들은 손수 흙을 가꾸면서 삶을 짓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느 사람(백성, 시골사람)이 시골에서 삶을 지으면서 ‘풀’이나 ‘나무’나 ‘숲’을 가꿀 적에, 궁중 권력자나 지식인은 ‘草’라든지 ‘木’이라든지 ‘林’ 같은 한자를 썼습니다.


  조선 사회가 일본 제국주의 힘에 무너지면서 일제강점기가 되니, 이때부터 ‘중국 한자말’이 차츰 밀려나면서 ‘일본 한자말’이 이 나라에 들어오고, ‘일본말’까지 뒤따라 들어옵니다. 조선 사회는 마흔 해 가까이 식민지가 되어 짓눌려야 했는데, 식민지에서 풀려난 뒤에 ‘일본 제국주의 부역자’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일본 한자말’과 ‘일본말’을 익히면서 공무원이 되거나 지식인 노릇을 하던 이들은 예전과 똑같이 ‘일본 한자말·일본말’로 글을 쓰거나 신문을 내거나 책을 묶었습니다. 이리하여 ‘조선’에서 ‘한국’으로 이름을 바꾼 이 사회에는 ‘중국 한자말’에다가 ‘일본 한자말’이 두루 퍼집니다. 정치권력자와 지식인은 ‘여느 시골사람이 쓰는 말’은 조금도 안 쓰면서 ‘권력자가 쓰는 한자’로 생각을 펴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조선 무렵뿐 아니라 고려 무렵도 똑같습니다만, 궁중 사회와 지식 사회는 ‘우리말’이라고 할 ‘한국말’을 살피거나 가꾸거나 배우거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궁중 사회와 지식 사회는 언제나 ‘다른 나라 말(외국말)’인 한자말을 썼고, 이 한자말은 ‘중국 한자말·일본 한자말’ 두 갈래로 나누어집니다. 오늘날 한국말사전을 보면, ‘뜻이 같으나, 다르게 쓰는 한자말’이 몹시 많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궁중 사회와 지식 사회는 이웃 두 나라 정치권력을 섬기던 버릇으로 ‘다른 나라 말(외국말)’로 정치·경제·학문·문화·문학 따위를 펼쳤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는 해방 뒤에 미군정을 거쳤고, 미국 사회와 문화 물결이 다시금 스며듭니다. 이리하여,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은 그만 ‘중국 한자말 + 일본 한자말 + 미국말(영어)’이 되고 맙니다. 여기에다가 한국에서 정치와 지식을 거머쥔 이들이 ‘한국 한자말’을 새로 지어서 씁니다. 한국말이 아닌 외국말인 ‘한자말’인데, 한국에서 쓰는 한자말은 ‘중국 한자말·일본 한자말·한국 한자말’ 이렇게 세 가지로 더 가지를 칩니다.


  여느 사람도 쓸 만한 한자말이 있습니다. 여느 사람도 쓸 만한 영어가 있으니, 외국말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받아들여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느 사람이 쉽게 쓰는 수수한 한자말은 ‘외국말’에서 ‘들온말(외래어)’로 자리를 바꾸면서 ‘한국말’ 품으로 녹아듭니다. 외국말이기에 모두 손사래를 쳐야 하지 않습니다. ‘버스’나 ‘컴퓨터’나 ‘인터넷’ 같은 외국말을 받아들여서 쓰듯이 ‘학교’나 ‘교과서’나 ‘사회’ 같은 외국말(한자말)도 받아들여서 쓸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외국사람’이 아닌 ‘한국사람’이기에, 한국사람으로서 스스로 우리가 쓸 말을 손수 짓는 넋을 가꿀 줄 알아야 합니다. 외국말을 무턱대고 받아들여서 아무렇게나 쓰는 삶이 아니라, 손수 한국말(우리말)을 새롭게 짓는 슬기로운 마음이 될 수 있어야지요. 오늘 우리가 한국말(우리말)을 새롭게 짓는다면, 이 말은 ‘숲말’입니다. 푸른 바람을 나누어 주면서 스스로 우거지는 숲처럼, 우리 삶과 사회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어 주는 바탕이 되는 말이라는 뜻에서 ‘숲말’입니다. 4348.3.25.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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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9. ‘자유로운’ 생각과 삶과 말

― 아이한테 들려줄 노래에 담는 말



  어른이 지어서 아이와 함께 부르려는 노래를 가리켜 ‘동요(童謠)’라고 하지만, 이 한자말을 한국사람이 쓴 지 얼마 안 됩니다. 서양 현대문학을 받아들인 일본에서 널리 쓰던 말마디를 한국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동시’나 ‘동화’라는 낱말도 이와 같습니다. 일본을 거쳐서 들어왔기에 안 써야 할 낱말이 되지 않습니다. 일본을 거치든 중국을 거치든 미국을 거치든, 한국사람이 한국말로 가장 알맞고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새 낱말’을 지을 수 있는지 없는지 먼저 생각한 뒤 즐겁게 쓰면 됩니다.


  한국말사전에는 아직 안 실리지만 ‘어린이노래’라는 낱말을 새롭게 지어서 쓰기도 합니다. 어린이와 함께 부를 노래요, 어린이가 즐기는 노래라는 뜻에서 ‘어린이노래’입니다. 곰곰이 헤아린다면, 한국에서는 지난날에 그냥 ‘노래’라고만 했습니다. 지난날에는 어른과 아이가 따로 없이 모두 노래를 불렀어요. ‘노래’를 굳이 가른다면 ‘일노래’와 ‘놀이노래’가 있습니다. 어른은 일을 하니 ‘일노래’이고, 아이는 놀이를 하니 ‘놀이노래’입니다. 지난날에 아이가 부르던 노래는 모두 놀이를 하며 부르던 노래예요. 그러니, ‘어린이노래’란 모두 ‘놀이노래’이면서 그냥 ‘노래’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이들은 노래를 얌전히 앉아서 듣거나 부르지 않아요. 춤을 추거나 웃거나 뛰놀면서 노래를 불러요. 어른들은 무대나 공연장 같은 데에 다소곳하게 앉아서 노래를 듣기도 하지만, 아이들한테는 이런 노래가 몹시 힘듭니다. 좀이 쑤시지요. 한편, 노래를 더 살피면 지난날 어른들이 일을 하며 부르던 노래는 ‘들노래’와 ‘마을노래’로 가를 수 있어요. 들에서 일하며 부르는 노래가 있고, 마을에서 일하며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가르면 ‘살림노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바느질을 하거나 베틀을 밟거나 절구질이나 방아질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빨래를 하거나 다듬이질을 하며 부르는 노래는 ‘일노래’이면서 ‘살림노래’로 여길 만해요.


  오늘날 널리 퍼진 어린이노래 가운데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으로 첫머리를 여는 노래가 있고,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로 첫머리를 여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를 처음 지은 어른이나 오늘날 이 노래를 부르는 아이나 그냥 듣고 부릅니다. 그런데, 두 어린이노래에서 크게 잘못된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산 위에서”와 “산 속 옹달샘”입니다.


  바다에서 부는 바람은 바닷바람입니다. “바다 위에서” 부는 바람이 아닙니다. 들에서 부는 바람도 “들에서” 불 뿐, “들 위에서” 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산에서 부는 바람”이나 “멧골에서 부는 바람”으로 바로잡아야 해요. 사람들은 “산에 나들이를 갈” 뿐, “산 속에 나들이를 간다”고 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잠을 자지 “집 속에서” 잠을 자지 않습니다. “깊은 산에 옹달샘”이나 “깊은 멧골 옹달샘”처럼 어린이노래를 바로잡아야 옳습니다.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잘못 쓰는 말투라 하더라도 이러한 말투를 ‘자유’로 보아야 할까요? 널리 퍼진 노래라 하더라도 잘못 쓰는 말투가 더 퍼지지 않도록 바로잡아야 할까요? 널리 퍼졌으면 잘못된 말투라 하더라도 그대로 써야 할까요? 널리 퍼지기 앞서 바로잡았으면 가장 나았을 테지만, 노래를 선보이거나 문학을 선보이거나 책을 선보이는 어른들은 ‘낱말 하나’와 ‘말투 하나’까지 얼마나 올바르거나 알맞은지 제대로 안 살피기 일쑤입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살피지만, 말다운 말인지 헤아리지는 않습니다.


  다른 갈래에서 생각해 봅니다. 이를테면, 가게에 놓인 과자에 ‘독성 물질’이 섞였으면 어른들은 어떻게 할까요? 빵집에 놓인 빵에 곰팡이가 피었으면 어른들은 어떻게 할까요? 광우병이나 조류독감이라고 해서 소와 닭을 수십만 마리나 산 채로 파묻기까지 하는 어른들 모습은 무엇일까요? 입에 들어가는 밥에서 아주 조그마한 잘못이 하나라도 드러나면, 하늘이 무너지듯이 깜짝 놀라면서 아주 발빠르게 바로잡으려고 애씁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들어가는 말은? 생각을 가꾸는 말은? 사랑을 살찌우는 말은? 넋을 북돋우는 말은?


  우리가 늘 쓰는 말은 우리 마음을 이끕니다. 아주 자그마한 말 한 마디가 바로 우리 마음과 생각과 사랑과 넋을 움직입니다. 널리 퍼진 노래에서 한두 군데 잘못된 대목이니, 슬쩍 눈을 감고 지나쳐도 될까요?


  자유로운 말이란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말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말이란 서로 아끼고 돌보는 마음을 북돋우는 말이라고 느낍니다. 내 삶을 곱게 가꾸면서 이웃과 동무가 저마다 이녁 삶을 곱게 가꾸도록 북돋울 때에 참다운 자유가 되리라 느낍니다.


  말 한 마디를 찬찬히 살피는 까닭을 돌아봅니다. 마음을 알뜰살뜰 여미어 이웃과 사랑스레 어깨동무하는 꿈을 짓고 싶기에 말 한 마디를 찬찬히 살핍니다. 글 한 줄을 곰곰이 헤아리는 까닭을 짚습니다. 생각을 슬기롭게 가꾸면서 내 보금자리와 우리 마을을 모두 아름답게 일구고 싶기에 글 한 줄을 곰곰이 헤아립니다. 규칙이니까 지켜야 하는 말이 아니라, 서로 즐겁게 마음을 살찌우고 싶기에 말을 곱게 가다듬습니다. 원칙이니까 따라야 하는 글이 아니라, 다 함께 기쁘게 노래하듯이 생각을 키우고 싶기에 글을 정갈히 추스릅니다.


  전남 광주에서 다달이 나오는 〈전라도닷컴〉이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2015년 1월호를 보면, 전남 곡성 수월리 김봉순 할매가 들려주는 “우덜이 날마다 밭고랑으로 기어댕긴께 도시사람들 묵제. 내 손이 키와서 전국이 다 묵제. 힘들다고 모다 호맹이 자리 땡개불문 모다 못 묵제(27쪽).” 같은 말마디가 고스란히 나옵니다. 전라말이요 곡성말이면서 수월마을 사람들이 쓰는 말입니다. 표준말이나 서울말로 고쳐서는 말맛이 나지 않습니다. 곡성 옆에 있는 구례에서는 구례말을 쓸 테고, 구례 옆에 있는 하동에서는 하동말을 쓸 테지요. 마산은 마산말, 진주는 진주말, 순천은 순천말을 씁니다. 자유롭게 쓰는 말이란 내가 나고 자란 터전에서 싱그러이 살아서 숨쉬는 말이지 싶습니다. 이웃을 아끼고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쓸 때에 참으로 자유로우면서 아름다운 말이지 싶습니다. 4348.1.11.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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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군포에서 내는 <책이 열리는 나무>에 싣는 우리 말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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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8. 이야기꽃 피우는 겨울에

― 말꽃을 피우는 바탕인 한국말사전



  봄에 피기에 봄꽃입니다. 겨울에 피는 꽃은 겨울꽃일 테지요. 그런데,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봄꽃·가을꽃’은 올림말로 나오지만, ‘여름꽃·겨울꽃’은 올림말로 안 나옵니다. 요즈음 한글맞춤법에서는 한국말사전에 안 나오는 낱말은 띄어서 적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봄꽃·여름 꽃·가을꽃·겨울 꽃’처럼 달리 적어야 할까 궁금합니다.


  한국말사전에 ‘놀이노래’라는 낱말은 나오지만 ‘어린이노래’라는 낱말은 안 나옵니다. ‘일노래’와 ‘들노래’라는 낱말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을 수 있지만 ‘숲노래’나 ‘바다노래’라는 낱말은 한국말사전에서 찾을 수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들과 숲과 바다에서 부르는 노래를 ‘들노래·숲 노래·바다 노래’처럼 적어야 할까요?


  한국에도 ‘노숙자(露宿者)’가 무척 많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낱말은 깎아내리는 낱말이라 하면서 ‘노숙인(露宿人)’으로 고쳐서 써야 한다고도 합니다. 한자 ‘者’를 ‘人’으로 바꾸면 사람 대접도 달라진다고 여기는 셈입니다. 그런데, 한국사람은 예부터 ‘노숙’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집이 아닌 길바닥에서 자거나 쉬거나 지낼 적에는 ‘한데’라는 낱말을 썼으며, 집에서 잠을 못 자고 길바닥에서 잠을 자면 ‘한뎃잠’을 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추운 겨울에 집이 없이 길에서 오들오들 떨며 지내는 이웃은 ‘한뎃잠이’입니다. 조금 더 살피면, 집이 없는 이는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외로운 이들입니다. 사회에서 쫓겨났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떨꺼둥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가을이 저물 무렵, 그러니까 겨울 문턱에 시골에서는 고구마를 캡니다. 따뜻한 아랫목에 고구마 상자나 푸대를 놓고 겨우내 고구마를 삶아서 먹어요. 요새는 시골에서 비닐농사를 짓는 분이 매우 많기에 감자는 ‘비닐농사 감자’가 있고, ‘비닐을 안 쓰고 맨땅에 심어서 거둔 감자’가 있습니다. 고구마는 으레 ‘비닐 안 씌운 땅에서 키우는 고구마’인데, 땅바닥에 아무것도 씌우지 않으면 ‘맨땅’이라 합니다. 그렇지만, 농협이나 생협 같은 데에서는 한국말 ‘맨땅’을 안 씁니다. 일본에서 농사짓는 이들이 쓰는 한자말 ‘노지(露地)’를 빌어 ‘노지 감자’라고 해요. 왜 ‘맨땅 감자’라고는 말하지 않을까요? 왜 농협과 생협은 한국말을 알맞고 바르게 쓰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못할까요?


  곰곰이 살피면, 농협이나 생협에서 일하는 분 가운데 책상맡에 한국말사전 한 권쯤 올려놓고 낱말을 알맞게 살피면서 쓰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여느 공공기관과 일터뿐 아니라, 동사무소나 학교에서도 책상맡에 한국말사전 한 권 살포시 놓고서 즐겁게 한국말을 꾸준히 익히고 배우면서 서류를 꾸미거나 글을 쓰는 분이 드물어요. 시나 소설을 쓰는 이가 아니라면 한국말사전을 거의 안 봅니다. 대학입시를 바라보는 수험생도 영어사전은 들추지만 한국말사전은 안 들춥니다.


  그런데, 한국말사전을 들추어도 뜻을 알 수 없기 일쑤예요. 이를테면 ‘파종’과 ‘씨뿌리기’를 들 수 있어요.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이 오면 시골에서는 모두 씨를 뿌리려고 연장을 손질하고 땅을 고릅니다. 이러한 일을 가리키는 한자말 ‘파종(播種)’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으면, “곡식이나 채소 따위를 키우기 위하여 논밭에 씨를 뿌림. ‘씨뿌리기’, ‘씨 뿌림’으로 순화”로 풀이하는데, ‘씨뿌리기’라는 낱말을 찾으면 “= 파종”으로 풀이해요. ‘씨뿌리기’로 고쳐써야 한다는 한자말 ‘파종’인데, 막상 ‘씨뿌리기’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뜻풀이는 없이 ‘파종’이라는 낱말만 덩그러니 적어요. 그리고, ‘외롭다’를 찾으면 “홀로 되거나 의지할 곳이 없어 쓸쓸하다”로 풀이하고, ‘쓸쓸하다’를 찾으면 “외롭고 적적하다”로 풀이합니다. 낱말풀이가 돌림풀이입니다. 이래서야 한국말사전을 책상맡에 놓아도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기는 어렵습니다.


  ‘창피하다’와 ‘부끄럽다’와 ‘수줍다’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려고 한국말사전을 살펴도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창피하다’는 “체면이 깎이는 일이나 아니꼬운 일을 당하여 부끄럽다”로 풀이하고, ‘부끄럽다’는 “(1) 일을 잘 못하거나 양심에 거리끼어 볼 낯이 없거나 매우 떳떳하지 못하다 (2) 스스러움을 느끼어 매우 수줍다”로 풀이하며, ‘수줍다’는 “숫기가 없어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이 어렵거나 부끄럽다”로 풀이합니다. 말풀이가 이리저리 오락가락입니다. 더군다나, ‘창피하다’라는 한국말하고 소리값이 같다면서 ‘猖披’라는 한자에서 이 낱말이 생겼다고 적기까지 하는데, ‘猖披’라는 한자말은 “미쳐 날뛰다”를 가리킵니다. 옛사람이 한문으로 적은 글에서 ‘猖披’를 “옷고름이나 치마끈을 풀어놓고 죄어 매지 않은 것”을 가리키면서 쓴 적이 있다고 하지만, 입으로 읊는 소리가 같다고 해서 함부로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창피하다’는 얼굴이 깎여 고개를 들지 못하거나 숨고 싶은 마음을 나타냅니다. ‘부끄럽다’는 거리끼거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일이 있거나 잘못을 했기에 다른 사람 앞에서 고개를 들기 떳떳하지 않거나 숨고 싶은 마음을 나타냅니다. ‘수줍다’는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을 하거나 몸짓을 보이기 어려운 마음을 나타냅니다.


  한국말사전은 한국말을 한국사람이 슬기롭게 살펴서 제대로 알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국말사전을 옆에 즐겁게 놓으면서 말과 넋과 삶을 새롭게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부터 한겨레는 가을일을 모두 마치고 겨울이 되면, 집집마다 아궁이에 불을 때어 방바닥을 따숩게 하면서 온 식구가 이불을 함께 뒤집어쓰고 모여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어요. 겨울은 이야기꽃이 피는 철입니다. 겨울에 들과 숲에서는 동백꽃이나 복수초가 피기도 하는데, 무엇보다 겨울에는 이야기꽃이 핍니다. 봄은 들에 들꽃이 흐드러지는 철이요, 겨울은 우리 스스로 이야기를 짓고 가꾸면서 이야기꽃과 생각꽃과 사랑꽃과 꿈꽃을 아름다이 일구는 철이에요.


  말꽃을 피울 수 있는 겨울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 이야기 씨앗 한 톨을 곱게 심어서 이야기 열매를 알차게 맺는 겨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겨우내 노래꽃, 춤꽃, 글꽃, 그림꽃, 사진꽃 모두 곱게 피울 수 있기를 바라요. 4347.11.25.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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